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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진실한 마음을 가리키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이 서로를 어긋나게 하여

끝이 났다는 날카로운 다짐에 부대낄 때

멀고도 가까운 기쁨의 고개를 우리는 넘자


그곳은 영옥의 해가 아직 다정하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삼천의 뜨거운 시선 아래

함께 서로의 아픔을

밤마다 얘기하고 듣는 해빙의 시작


그 황홀한 직시 가운데

눈물을 흩날리며 마주 서면

별것 아닌 듯한 한 자락 마음 내려오니

우애의, 엷디엷은 우애의 강물

면면한 흐름 잠시 얼어붙더라도

다만 우리는 그날 바닷가의 공놀이를 기억하리라



오랜만에 서재를 방문한다. 독서모임에서 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었다. 유치환의 <생명의 서>를 다시 쓴 감상인데, 모임 진행자님의 발제문에 빚진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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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초야 목마에 올라라.

머언 성으로

로시난테를 몰 듯이,

산초야.


날아오를 수 없다는 의심과

속고 있다는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비웃는 듯한 저들의 눈길로부터

눈을 감아라, 산초야.


마법도 거짓도 없는 저 하늘로

우리 내달려 보자.

담요로 키질을 당하면 더 가까워지지 않느냐.

이 미친 세상에 다시 불시착할지라도!


소설 속 기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


풍차가 바람을 불러일으키듯이

그러나 우리 내달려 보자.

산초야.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읽은 돈키호테의 감상을

서정주 시인의 <추천사>를 빌려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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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다는 풍랑이 거세

동굴 속은 남의 나라

 

언어란 한없이 가벼운 줄 알면서도

한 소절 노래를 불러볼까.

 

피와 눈물로 절인

이제는 잊고 싶은 기억을 되뇌며

 

영생의 포도주로

유혹하는 요정과 동침하러 간다.

 

생각해 보면 불멸을 꿈꾸던 이도

덧없이 스러져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홀로 살아있는 것일까?

 

들어주는 이는 없는데

메아리가 대답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동굴 속은 남의 나라

밤바다는 풍랑이 거셀지라도,

 

노래를 불러 기억을 붙잡으며,

새벽처럼 올 귀향을 기다리는 또 다른 나,

 

신은 나에게 작은 용기를 주니

마침내 부르는 그의 이름, 오뒷세우스.

 



 


독서 모임에서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두 시인께 용서를 구하며 메모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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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저놈에게 기억시켜 놓은 거라곤 그저 쫓고 사냥하고 죽이는 일뿐이지요. 저놈이 아는 게 그것뿐이라면 우리가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

사냥개, 로봇 사냥개,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닌 로봇 사냥개. 이를 두고 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키워드는 '부끄러움'과 '책임'이다.

옛 성현은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귀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부자들은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하라고 자식들을 가르쳤다. 시인은 살기 어려운 인생에서 시가 쉽게 씌어지는 것이 부끄럽다고 썼다.

제 앞가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부끄럽기로는 내가 최고다. 대체 나는 왜 읽는걸까? 이 소설은 책을 불태우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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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리는 죽는다. 개죽음이다. 이 개죽음을 개죽음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전호리의 육체가 아니라 전호리의 자아다. 그 자아가 바로 원숭이 왕이다. 전호리는 죽지만 원숭이 왕은 살아남는다. 육체는 죽어도 자아는 죽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죽고 그가 만든 괴물은 살아남았다.) 의미와 가치는 육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아를 위한 것이다. 육체는 의미와 가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아다. 육체의 개죽음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보려는 자아의 가련한 시도, 이것이 이 단편의 주제다. 개죽음은 전호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서 양주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 개죽음을 기록한 왕수초도 죽었다. 그리고 왕수초의 기록을 지키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 이소정과 그의 누이가 있다. 두 사람이 잘 살고 있다는 원숭이 왕의 말은 거짓말이다. 그래야 개죽음을 견딜 수 있다.


원숭이 왕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금서의 내용도 이야기로 되어 있을 것이다. 왕수초는 <양주십일기>를 쓰면서 그 수많은 죽음이 개죽음이 아닌 이유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의미와 가치는 이야기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 이야기는 물론 허구다. 모두 거짓이라서 허구가 아니라, 모두 사실일 수 없어서 허구다. 어떤 기록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을 수는 없다. 허구라서 의미 없고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허구일 때에만 의미와 가치가 발생한다. 아니, 의미와 가치는 허구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허구인 이야기를 만들고, 전파하고, 듣고, 믿는 이유다.


세상에 왕수초의 이야기나 원숭이 왕의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편의 이야기가 있다. 반대편은 바로 불의다. 불의는 상대에게 개죽음을 강요하기도 한다. 양편의 이야기들이 서로 경쟁한다. 시간이 흘러 왕수초의 이야기가 승리해 진실임을 인정받았듯이 전호리와 같은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도 승리해 진실로 승격할 것임을 작가 켄 리우는 믿는 듯하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사실 이 믿음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다. 우리는 이 믿음이 실현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특별히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란 이야기다.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다.


따라서 진실이 드러나기까지 걸리는 역사의 시간을 인간의 수명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것은 난센스다. 처음부터 역사는 인간의 죽음을 뛰어넘기 위한 이야기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이 소설집에서 펼쳐지는 진화라는 이야기도, 우주라는 이야기에도 해당한다. 역사와 진화와 우주의 시간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무의미할 만큼 작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무의미해 보이는 인간이 역사와 진화와 우주라는 이야기를 발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영원의 시간 동안 계속된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우리는 의미와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 물론 나의 이런 믿음도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는 지극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지만, 허무주의에는 빠질 수 없어서 이렇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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