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양장)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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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촉각 

- 그는 내 손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언제부턴가 '소통'은 SNS를 따라다니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이를 두고 한병철은 '싫어요'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좋아요'의 세상이라고 했다. 이 단편집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바라본다.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기도 한다. 보는 행위는 상대를 대상화한다. 소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듣기는 어떨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마지막 장면에서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드러나고 있다. 보는 것은 '그냥' 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듣는 것을 그렇게 했다가는 말하는 상대에게 금방 들키고 만다. '신경써서' 들어야 한다. 확실히 시각 보다는 청각이 (소통이라는 면에서) 윗길이다. 그런데 <대성당>에서는 청각을 뛰어넘는 것이 등장한다. 그것은 물론 촉각이다. 화자와 맹인이 손을 잡고 그림을 그린다. 그 결과는? "It's really something." 화자의 이 말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 한 말이다. 진짜 대단한 것은 둘이서 그린 그림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그건 뭘까?



2. 언어 

- "지금 뭐하는 거예요? 가르쳐줘요, 나도 알고 싶어요."


그게 무엇인지 묻는 것도 거기에 답하는 것도 언어를 통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자는 답답하다. 분명 <대성당>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엇인가를 느꼈는데,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이 작품은 스스로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화자가 맹인에게 텔레비전 화면 속 대성당을 묘사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사실 화자는 문제의 맹인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바로 직전까지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오랫동안 맹인에게 책(문자언어)을 읽어주고, 녹음(음성언어)된 테이프를 주고받으며 소통해온 아내가 두 사람으로부터 소외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둘이서 뭐하는지 묻는 아내에게 화자는 대꾸하지 않는다.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내가 아니라 어쩌면 언어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묻는 것 역시 아내가 아니라 언어 자체인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언어는 지금 화자와 맹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안다. 알지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really something'이다.



3. 눈부처 

-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여인을 상상해보라.


우리가 살면서 겪는 문제는 대개 관계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그 문제의 해법 역시 관계 속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삶은 오묘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역자인 김연수의 해설에 따르면 카버의 인물들은 화장실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각한다. 참으로 카버의 인물들다운 자각이다. 나라면 화장실 거울이 아니라 눈부처로 설정했을 것이다. 눈부처는 거울 속의 모습이 아니다. 상대의 눈에 들어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화장실 거울이 닫힌 공간 속 고독한 주체의 자각이라면, 눈부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함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성당>의 맹인과 그의 아내는 그럴 수 없다. 그 고독과 좌절 속에서 맹인이 발견한 소통의 방법론, 어쩌면 이것이 이 단편의 주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비약일 수 있다. 최근에서야 나는 맹인이 아니면서도 눈부처를 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대성당>의 마지막 장면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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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8-04-19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NS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더라구요. 뒷이야기를 안 들어서 왜 그만두고 싶은 건지, 이유는 알지 못하는데..정돈되지 않은 생각들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리뷰가 좋다고 생각했어요. 재밌기도 하고, 뭔가 깨닫는 바도 있고.

책의속밖 2018-04-19 15:50   좋아요 1 | URL
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아무 sns 계정도 없어서 잘 모르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아요.
요즘 세상은 sns를 이용하는 즐거움에 대해서는 말할 사람이 차고 넘치지만,
그만두고 싶은 진짜 이유를 말할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나를 보여줄 사람은 많은데, 나를 들려줄 사람은 없는 것이 비극이죠.
 
웅크린 말들 - 말해지지 않는 말들의 한恨국어사전 우리시대의 논리 24
이문영 지음, 김흥구 사진 / 후마니타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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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가벼울 수 없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취급하는 세상은 무도하다. 무도한 세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삶은 비루하다. 가볍지 않은 무엇인가에 관해 말하거나 글을 쓸 때, 우리의 말과 글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곤 한다. 세상은 무도하고, 삶은 비루하며, 언어는 가볍다. 이 세가지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절망에 가깝다. 우리의 무능과 무력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저자의 본업은 기자다. 기자의 운명은 이 절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은 무도하지 않다는 최면과, 삶은 비루하지 않다는 자위와, 언어는 가볍지 않다는 거짓으로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기자도 있다. 우리는 그런 기자를 '기레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누군가를 쓰레기로 규정하는 일은 너무도 쉽다. 진정 어려운 일은 무엇인가. 가벼울 수 없는 것들을 가벼운 언어로 말하고 쓰는 것, 하여 무도한 세상과 비루한 삶과 가벼운 언어를 동시에 까발리는 것, 그것이다. 저자는 그 일을 한다.


무도한 세상의 배후에는 권력과 자본이 있다. 권력과 자본은 그 얼굴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공문서와 법조문의 해독 불가능한 언어로, 우아하고 고상한 언어로, 애국과 질서와 발전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언어로 존재할 뿐이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권력과 자본은 우리에게 사람의 얼굴을 요구하지 않는다. 명령에 따라 노동하고, 욕망에 따라 소비하는 기계가 될 것을 요구할 뿐이다. 기계가 존엄을 말할 때, 기계는 폐기처분되거나 존엄을 모르는 다른 기계로 대체된다.


세상이 무도하니 삶은 비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의 무도함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할 일이 있다. 인정하는 것이다. 애국과 질서와 발전이라는 말에 편승하여 우아하고 고상하며 해독 불가능한 언어의 세계로 편입하고자 했던 욕망, 그 빌어먹을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존엄을 내려놓았다. 존엄을 말하는 기계의 폐기처분에 동의했으며, 자신이 그 자리에 대체되기를 바랐다. 생각하면 무도한 세상과 비루한 삶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도한 세상과 비루한 삶에 대해 말하고 글쓰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침을 뱉으면 내 얼굴에 떨어지고, 칼을 들이대면 내 몸에서 피가 난다. 언어가 가볍다는 이유로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말하고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듣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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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땅
지피 글.그림, 이현경 옮김 / 북레시피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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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제가 주인공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형제의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아버지는 법이고 질서다. 문명의 종말과 아버지의 죽음, 새판을 짜기 위한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졌다. 죽은 아버지는 수첩에 기록을 남겼다. 두 주인공은 글을 모른다. 서사는 그 무지에서 비롯된다. 수첩에 적힌 글을 읽어줄 사람을 찾아 형제는 모험을 시작한다. 특히 동생은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기록했는지가 궁금하다. 소년이 가질 수 있는, 아니 당연히 가져야 할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신화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곧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죽고 없다. 그래서 동생의 질문과 수첩에 대한 집착은 더 절실하다.


주인공의 모험에는 조력자와 방해자가 등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아직 남성이랄 수 없는 주인공 형제와 성인 남성으로 설정된 방해자들(아린고, 쌍둥이, 신도들), 그리고 여성으로 설정된 조력자들(마녀와 노예)은 우리에게 익숙한 구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익숙함은 결말까지 이어진다. 옛 질서가 새로운 질서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익숙한 것들은 우리에게 처음에는 편안함을 주지만, 나중에는 허망함을 안기고 만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이 펼쳐 보이는 새판은 대안 보다는 복기에 가깝다. 이미 영고성쇠를 다 겪고 멸망한 문명의 시작에 대한 복기 말이다. 고작 이 복기를 위해 작가는 문명을 멸망시키고, 아버지를 죽인 것일까?


작가는 사랑과 관계를 말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형제는 수첩을 읽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구출한 노예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고백을 듣고도 그녀를 버리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동생은 수첩을 버려 마녀를 구한다. 수첩을 버린 동생은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을 것이다. 대신 동생은 타인의 손을 잡는 법을 배울 것이다. 물론 그에 앞서 사형 집행인으로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수첩을 버릴 명분과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그 사형 집행인의 말은 진실이었을까? 아무래도 좋다. 소년들은 성숙했고, 사형 집행인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언어 특히 문자는 권력이고 질서다. 신도들은 사형 집행인을 중심으로 다시 모일 것이다. 그는 신의 말씀을 전할 능력을 갖고 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이다. 아버지의 수첩과 사형 집행인의 수첩이 힘을 갖는 것은 그 배타성과 불가지성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최초의 문자는 소통을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작품 속에서 시종 수직적 질서를 만들어온 수첩이 단 한 번 수평적 교환의 도구가 된다. 동생이 그것을 마녀의 목숨과 바꾸는 장면이 그렇다. 어쩌면 작가는 이 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문명을 멸망시키고, 아버지를 죽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배를 타고 떠나는 주인공 형제와 마녀, 그리고 노예는 앞으로 어떤 서사를 써나갈까? 그들도 우리처럼 가족을 이루어 핏줄로 이어지는 수직적 질서를 쓰게 될까? 아니면 수첩과 마녀를 교환했던 것처럼 수평적 사랑의 기록을 쓰게 될까? '종말 이후 그 어떤 책도 쓰이지 않았다'는 말로 시작하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종말 이후에도 쓰이는 책이 있을 것인가가 아니라,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일 것인가가 아닐까? 불길한 것은 수첩을 대신한 것이 마녀라는 점이다. 마녀는 멸망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그래서 이 작품에 그려진 새판은 대안이 아니라 복기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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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가

   사라리를 버린 사람은 별이 되었다

   나는 사다리를 버리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시는데도

   지붕 위에 앉아

   평생 밤하늘 별만 바라본다

                                       - 별




살다가 문득 그것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선택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무능력의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 어른이 되기도 싫다. 그러나 내가 벌써 어른이라면, 아마 그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나는 어른일 것이다. 우리는 둘 다 가질 수 있기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을 동시에 가질 수 없기에 선택을 강요받는다. 선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손에 쥔 것을 하나 포기해야 바닥에 놓인 것을 가져갈 수 있다. 화투가 가르쳐준 것이다. 둘 다 가질 수 없다. 선택은 둘 다 가질 수 없다는 무능력에서 기인한다.


사다리를 포기해야 별이 될 수 있다. 사다리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다리를 버리는 것은 배수진을 치는 것과 같다. 배수진을 쳤으니 죽을 힘을 다해 싸우는 수 밖에 없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별은 이렇듯 사투 속에서 태어난다. 그러니 별은 희망을 상징할 수 밖에 없다. 별이 희망을 상징하는 것 말고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과 싸우는가. 지상에서 유혹하는 온갖 것들과 싸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엄마와 밥이 가장 센 상대다. 엄마는 핏줄이요, 밥은 생계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할 때, 그 대가로서 다 버릴 수 있어도 차마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핏줄과 생계가 아니던가. 우리는 모두 엄마의 몸을 빌어 태어난 존재다.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다. 우리의 무능력은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지도 모른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어 빛나지도 못하고, 지상으로 내려와 핏줄도 생계도 잇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을 시인이라고 부른다. 시인의 자리는 하늘과 지상의 경계, 지붕 위다. 시인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런 시인을 바라보고 있다. 시인이 있기에 별의 존재를 알았다. 희망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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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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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지도 않고 이곳 서재에 들러 내가 쓴 글을 읽어 보았다. 굳이 여러 편을 읽을 필요 없었다. 참담하였다. 내 문장도 그렇게 이상하였다. 저자가 눈살을 찌푸릴 만한 표현이 여럿 보였다. 내가 이상함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문장이 더 있을 것이다. 저자는 중독이라고 했다. 편리함에 중독되어 자꾸 쓰는 중독자가 아닌지 살피라고 했다. 스스로 중독자가 아닌지 살필 수 있는 사람을 중독자라고 할 수 있을까? 변명일 지도 모른다. 나는 편리함이 좋다. 아니 좋은 지 싫은 지도 생각 않고 편리함을 좇는다. 그러니 중독이라 할 만하다. 나는 중독의 편안함과 익숙함이 좋다. 빠져나오기 싫다. 나는 비겁자다.


이 책에도 등장하는 '김훈체'를 좋아했다. 뭐가 좋은 줄도 모르고 좋아했다. 특히 <자전거 여행>의 문장들은 환상적이었다. 지금은 내가 김훈의 문장을 좋아한 일마저도 중독이었음을 어림짐작으로 안다.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좀처럼 풍경 안으로 들어가지 않음은 나의 성격과 닮아 친근함을 느꼈다. 문장 자체가 풍경이 되는 경지는 20대 특유의 탐미적 경향에 부합했다. 문장에서 흘러넘치는 인문학적 교양과 지식은 나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었다. 김훈의 문장은 때론 불안하였으나, 불안한 문장들이 모여 이루어진 글에서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뛰어들지 않고도 세상을 알 수 있을 듯했다. 이제 와서 보니 그렇다. 내 중독의 키워드는 풍경이었다. 아름답기만 해도 좋은 풍경, 굳이 뛰어들 필요가 없는 풍경.


저자는 문장의 주인이 글을 쓰는 내가 아니라고 했다. 문장 안의 주어와 술어라고 했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 생각과 달라서가 아니었다. 문장에도 주인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20년 넘게 남의 문장을 다듬어 온 사람다운 선언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의 저자가 다듬었던 글의 저자들도 생각이 같은지 궁금했다. 고 남경태 선생의 화법을 흉내내자면, 책의 저자는 오너, 교정 교열 일을 하는 사람은 CEO라고 할 수 있다. 오너는 굳이 자신이 주인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결코 문장의 오너일 수 없는 이 책의 저자는 문장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라 따로 있노라고 말한다. 그마저도 문장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노라고 말한다. 입장의 차이가 이처럼 확연하다.


김훈의 책을 펼쳐 아무 문장이나 하나 골라 읽어본다. 몇 번을 읽어도 문장의 주인을 문장 안의 주어와 술어라고 할 수가 없다. 백 번을 양보해 문장의 주인은 주어와 술어일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 문장들이 모여 이루어진 글은 오롯이 김훈의 글이다. 저자는 교정 교열 일을 하면서 글의 내용에 집중하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저자의 입장은 이미 여기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글 전체가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문장의 주인을 그 어디서도 아닌 문장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이 아닌) 글을 쓰는 저자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글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을 낸다. 모든 문장이 자신의 문장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교정 교열 일을 낮추어 보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다.


좋은 문장을 쓰고 싶었다. 연암의 문장론을 열심히 읽고, 김훈의 문체를 따라 하기도 했다. 김영하, 성석제, 이윤기, 신영복, 유시민의 문장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문제는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무엇을'이 문제라는 것은 내 사유와 경험의 부족을 뜻한다는 것도 함께 알았다. 글쓰기의 최대 난제는 좋은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글감을 찾는 일이다. 글의 좋은 내용이 이상한 문장 때문에 가려지는 일이 많다. 그러나 지탄받을 내용의 글이 좋은 문장을 썼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는 없는 법이고, 뻔한 내용의 글이 완벽한 문장을 썼다고 해서 감동을 주는 글로 돌변하지도 않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이 좋은 문장에 매달리면 자칫 빛 좋은 개살구가 되기 십상이다.


(사족) 서로를 향해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이 구사하는 문장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다행히 이 책은 좋은 글에 이상하지 않은 문장이 갖춰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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