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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유의 시선>과 <국가란 무엇인가>는 최근에 읽은 책이다. 김훈의 소설들은 읽은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남한산성> 이후로 나는 김훈을 읽지 않았다. <후불제 민주주의>는 열심히 정독한 책이 아니어서 여기에 올리는 것이 민망하다. 나는 좋은 글의 조건으로 분명한 주제의식과 쉬운 문장을 꼽는다. 최진석의 책은 주제가 분명했고, 유시민의 책은 읽기가 편했다. 유시민의 국가론을 읽으면서는 최진석의 선진화가 떠올랐고, 최진석의 선진화를 읽으면서는 김훈이 그려놓은 과거의 그때가 떠올랐다.


최진석의 선진화 논의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나 역시 무릎을 치면서 읽었다. 대형재난 앞에서 매번 이어지는 땜질식 처방, 사회의식 수준에서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 하면서 인물 교체와 제도 개편만을 부르짖는 현실, 직접 나서는 사람은 없고 비평가와 평론가는 넘치는 풍토, 창조 보다 모방이 더 쉽고 익숙한 사회 분위기 등 그의 진단은 뼈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진석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선진화의 과제가 주어졌다. 그것은 중진국이 되는 것보다, 그리고 산업화나 민주화보다 수천수만 배 더 어렵다. 그것은 철학적, 예술적, 문화적, 지성적, 윤리적 차원의 과제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예단하기 어렵지만, 최진석은 선진화를 절체절명의 국가적 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대목에서는 최진석에 반대한다. 유시민이라면 우리에게 왜 선진화를 제일의 과제로 '하달'하느냐고 반발할 것 같다. 유시민은 자신에게는 자유, 평등, 복지, 평화, 환경 등의 헌법가치가 모두 같은 선상에 있다고 했다. 그 어느 가치라도 절대화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지금의 선진국들도 선진화를 절대적 목표로 설정하고 노력한 끝에 선진국이 되었는가? 아니면 주어진 조건에서 물 흐르듯 흘러가다 보니 어느 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인가? 또 궁금하다. 철학적 사유의 수준을 전제로 한 선진화란 것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차원의 것인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이룬 탓에 터져 나오는 지금의 문제들처럼,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는 없는 것인가?


10년 전 김훈의 소설은, 아니 김훈의 문장은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한없이 아름다웠지만, 한편으로는 끝없는 무기력에 빠지게 했다. 나는 김훈의 소설들을 끙끙대며 읽었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건너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 개인으로서 이순신이 감당해야 했던 번민과 좌절의 시간, 조선이라는 국가가 감당해야 했던 치욕과 절망의 시간,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절대 건너뛸 수 없는 것이었다. 평화와 희망은 쉽지 않았다. 새 시대의 문이 열리는 것은 더더욱 그러했다.


유시민은 <국가란 무엇인가>의 맺는말에서도 '후불제 민주주의'를 말한다. 우리의 민주공화국은 우리가 혁명으로 세운 것이 아니다. 남들은 피를 흘려가며 오랜 세월에 걸쳐 수립한 민주공화국을 우리는 얼떨결에 갖게 되었다. 그러니 남들이 먼저 치렀던 대가를 후불로 치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나는 유시민의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은 선진화의 과제가 아니라 후불로 넘겨진 과제가 더 시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선진화에 대응해서 그 과제를 뭐라고 이름지어야 할 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공화국을 수립해 본 적이 없는 우리가 선진화를 논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제도가 아닌 의식의 차원에서) 민주공화국의 시민인 적이 없었던 우리에게 철학적 사유의 시선을 갖추라는 것은 너무 과도한 요구가 아닌가? 내가 무릎을 치면서 읽었던 최진석의 진단, 그것은 옳다. 그런데 과연 지금 당장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가? 인정하기 싫지만, 아직 우리의 수준이 그 정도인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수준은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없는, 그래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막상 생각을 적고 보니 우울해진다. 중진국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더 우울하다. 그래도 나는 믿는다. 세상은 조금씩 진보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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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사생활 - 우리는 모두, 단어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제임스 W. 페니베이커 지음, 김아영 옮김 / 사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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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

언어분석에서는 글이나 말의 내용 이해에 중요한 내용어보다는 별 쓸모없어 보이는 기능어가 더 중요하단다. 아니 절대적이란다. 저자가 제시한 내용어와 기능어의 분류에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기능어 분석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저자를 흉내내 말하자면 이것은 '흥미로운' 역설이다. 삶의 진실이란 언제나 작고 하찮은 것에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면 성급한 일반화가 될까?


<우울한>

저자는 언어분석을 할 때 '자신의 감을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대화중에 실시간으로 상대의 언어를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떤 글에 대한 사후 분석도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키워드가 되는 단어들의 수를 일일이 세어야 하니까 말이다. 물론 시간을 절약해 줄 뿐 아니라 더 정확하기까지 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 이 대목에서 약간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기계가 사람보다 심리분석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다면, 훗날 사람보다 더 뛰어난 공감능력을 지닌 기계가 등장하지는 않을까? 과학자들은 사람과 더 닮은 기계를 만들지 못해서 안달인데, 이런 우울한 생각은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안심하다>

이 책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사용한 단어는 그 사람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것이 확실하지만, 단어 사용 스타일의 변화가 그 사람을 바꾸지는 못 한다. 전문가란 사람이 이런 말을 해주니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다. 단어 몇 개 달리 사용한다고 사람 자체가 바뀌게 된다면, 뭐랄까 그건 너무 재미없고, 실망스러우며, 정의롭지 못한 일이 아닌가?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는 마법은 동화 속에서나 가능하다.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살아보니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삶이란 그렇게 쉬운 게 아니길 바란다.


<우리>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단어는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다. 굳이 이 책을 열어보지 않아도 이 단어가 집단 정체성과 관련있음은 명확하다.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 걸쳐서 집단 정체성을 강조하기 좋은 시절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집단 정체성은 고정관념, 편견, 차별과 친하다. 열차는 멀리 떨어진 지역들을 연결하기도 하지만, 선로가 지나는 어느 한 지역을 갈라놓기도 한다. 너와 내가 우리가 되어 맞잡은 두 손에 누군가는 걸려 넘어질 수 있다. 가끔 누군가를 넘어뜨리기 위해 손을 맞잡자는 말을 드러내놓고 하는 자들이 있어 기함하기도 한다.


<참다>

언어분석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타인의 심리를 읽어낸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다른 책들보다도 훨씬 쉽고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과연 이 책의 방법론이 나의 일상에 얼마나 필요한가? 타인의 심리를 읽어내야 하는 일이 내게 그리도 많은가? 많다면 왜 많은가?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복잡한 방법론이 아니라 시간이 아닌가? 전문가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그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결국 이 책에 대한 나의 흥미는 내가 그 시간을 참고 견딜 수 없음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사람의 심리를 읽는 방법에 대한 흥미보다 사람 자체에 대한 흥미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에게 그런 흥미가 있기는 한 것인가?


<왜>

어떤 일마다 배후에 누군가의 어떤 의도와 목적이 감춰져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그리 환영받을 만한 태도는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묻는다. 이런 것을 누가 왜 알고 싶어 할까? 이런 연구가 현실에서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힘은 무엇일까? 노골적으로 물어서 이런 연구에 필요한 돈은 누가 대는 걸까? 책에는 언어분석을 선거운동이나 기업 마케팅에 활용할 수 있으며, 활용하고 있다는 언급이 있다. 나는 왜 이런 대목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다. 굳이 권력과 자본의 속성을 떠올리며 불편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알면서도 불편하다. 그것이 문제다.


<그녀>

책을 읽는 내내 자꾸만 그녀가 떠올랐다. 특히 '지위', '거짓말', '권력'이라는 테마에서 그랬다. 요즘 나는 그녀의 심리상태에 대해 관심, 아니 의문이 많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궁금하다. 그녀가 어떨 때는 악마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칠푼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욕망의 화신 같다가도, 뒷방 늙은이 같기도 하다. 문제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나'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책과 관련해 보자면 그녀는 대명사를 많이, 특히 지시대명사를 아주 많이 사용한다. 대명사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의 특성이 뭐하고 했더라? 그녀는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알다 / 모르다>

계산해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알다'와 '모르다'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미국 보수진영 사람들이 오바마에 대해 착각했던 것처럼 나의 착오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이 둘이라는 사실이 단박에 떠올랐다. 그리고 뜬금없게도 상대의 심리에 대해 아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회의가 이어졌다. 상대의 심리를 아는 것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할까? 그리고 그 앎에는 혹시 나의 착각이나 편견, 자기기만이 섞여있지는 않을까? 나는 그런 회의의 끝에서 다시 한 번 '그녀'와 만났다. '그녀'가 받았던 표는 아마도 '그녀'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던진 표가 대다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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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이정철 지음 / 너머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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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흥미롭지 않은 것을 다루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흥미로운 책이 되었다. 서두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동서분당에서 기축옥사에 이르는 시간 동안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추적하는 책이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결코 쉽지 않았을 작업이다. 흥미롭지 않다고 한 것은 저자의 작업이 선악의 이분법이 아닌 각 정파와 논객들이 저마다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성을 지르는 등장인물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는 사극의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목에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넣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당시의 정치 현안과 인물 사이의 관계가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비전문가로서 따라가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하나의 사건이 종결되었나 싶으면 비슷한 성격의 다른 사건이 꼬리를 물었고, 인물들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또 다른 인물들이 등장해 그 관계가 얽히고설켰다. 하지만 나는 당쟁을 이토록 건조하게 다룬 글을 처음 보기에 이 책을 흥미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관심을 끌었던 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사림의 분열을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이 주도했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그 과정에 국왕 선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책에 따르면 조선 정치의 두 축은 대신과 언관이다. 대신은 국정의 현안을 해결하는 것이 임무이고, 언관은 관리의 부패를 막는 것이 주 임무라고 되어있다. 사실 내게는 언관이 대신과 나란히 정치운영의 축으로 언급되는 것마저도 생경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르면 언관이 스스로의 권위를 대신의 그것보다 위에 두었다는 대목에서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의 권위가 추락했다는 것을 대신의 임무인 국정현안 해결이 불가능해졌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신하들이 분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분열을 이끈 담론은 국정현안이 아니라, 서로의 부패혐의에 대한 탄핵이다. 이것이 파국으로 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


거칠게 말해서 언관은 정책이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집단이다. 오늘날로 치면 민정수석실이나, 감사원, 검찰청의 임무 정도가 될 것이다. 조정의 인사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부패하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따라서 그들이 하는 일의 최후는 늘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언관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언관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그러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 책에 설명된 그들 집단의 의사결정 방법은 또 어떠한가? 사헌부와 사간원은 전원합의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했다. 당연히 전원합의에 이르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때마다 피혐과 처치라는 (내가 보기에) 극단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결국 언관이 누군가를 탄핵하면, 탄핵을 당한 관리, 그를 탄핵한 언관, 그 언관의 탄핵에 동조한 언관과 반대한 언관 중 누군가는 자리를 떠나야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상황이 악화될 경우 홍문관 관원까지도 옷을 벗어야 했다. 한마디로 누군가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끝나는 게임이다. 이 역시 개개인의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결정 시스템의 문제이다.


이렇듯 언관의 임무와 의사결정 방식은 언제나 'All or Nothing'이었다. 정책 현안이라면 토론을 통해 조정하고 양보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인사문제는 쓰지 않으면 버리는 것뿐이다. 거기에 언관들의 피혐과 처치는 심하게 말해서 함께 일할 수 없는 사람을 합법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언관의 지위가 대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넘어서 대신의 권위를 넘어섰다는 점이었고, 이런 상황을 통제해야할 국왕의 힘이 약했다는 점이었다. 대신의 권위의 부재는 국정공백의 다름 아니고, 왕권이 약하다는 말은 브레이크가 없다는 말과 같다. 이러니 선조 재임 초 사림이 분열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정책을 두고 싸우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으며, 그 싸움을 그만두고 싶어도 쉽게 그만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상대방의 비리혐의(그마저도 대개는 과거의 혐의)를 두고 싸우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부패한 구세력이 앞선 시대를 망쳐놓았다는 진단과 그들에 의해 선배 사림이 도륙을 당했던 뼈아픈 기억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시기 사림이 놓인 정치 지형 자체일 것이다.


언관이 속한 사헌부, 사간원에 홍문관을 더해 삼사라고 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라면 중앙정치에 사림이 진출하고 삼사의 기능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대부터다. 동서분당의 시점에서 볼 때 이미 오래 진행되어 온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사림이 스스로 만든 시스템의 함정에 빠지는 일종의 자승자박을 본다. 삼사를 장악한 사림이 부패한 구세력과 한판 겨룬다. 물론 많은 피를 흘렸지만 사림은 승자가 된다. 이제 삼사의 사림이 그 칼을 내부로 향할 수밖에 없게 된 형국, 그 형국에서 분당과 당쟁은 필연이지 않았을까? 구세력이 몰락했다고 해서 삼사의 관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더구나 스스로 그 권위가 대신을 능가한다고 여기는 그들이 말이다. 이 대목에서 국정현안을 주도할 대신의 권위의 부재와 약한 왕권이 아쉬움(이것은 추후의 비극을 알고 있는 나의 현재적 평가이자 감정이다.)으로 남는다. 물론 이 역시 사림의 업보라고 할 수 있다. 사림은 부패한 선배 대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사림을 포함한) 사대부들 전체는 국왕을 조선의 단독 주권자로 여기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선조의 경우 방계라는 콤플렉스와 인순왕후의 그늘, 세자 수업을 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점 등을 생각하면, 동서분당이 이루어진 재임 초반에 이렇다 할 정치를 하지 못한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선조가 재임 초부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개혁이든 수구든) 국정운영에 임했다면 사림이 분열하고 비정상적인 당쟁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을까? 이것은 아마도 어리석은 가정일 것이다. 선조 이후의 군주들은 모두 붕당을 혁파하지 못했고, 결국 그것에 휘둘리거나 이용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중국이라는 거대 문명의 지척에서 좋든 싫든 그 영향을 피할 수 없었던 한반도처럼, 성리학적 명분론으로 똘똘 뭉친 사림이라는 신세력을 받아들인 조선의 중앙정치가 분열과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어쩌면 같은 운명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과정에서 민생이라는 현안이 외면된 것이 아쉽고, (먼 훗날의 일이지만) 인조반정이나 세도정치처럼 왕권이 어이없이 추락한 것이 놀라울 뿐이다.


여기서 저자의 결론인 '도덕적 확신'에 대해 반론 아닌 반론을 제기해야겠다. '도덕적 확신'이 사림의 분열과 대립을 증폭했다는 저자의 진단에 나는 동의한다. 저자는 선조 초의 사림을 '시비와 원칙에 민감한 젊고 비타협적인 지식인들'이라고 평했다. 이 역시 동의한다. 그런데 이런 인간형이 과연 조선의 선조 대에만 존재했는가? 이러한 인간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선조 대에 동서분당이 되었고, 그 이후의 당쟁이 기형적인 모습으로 전개되었을까? 다른 인간형의 무리가 집권했다면 선조 대에 분당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집권했다 하더라도 정치의 중심은 이미 대신이 아니라 언관이었고, 언관이 만들어내는 담론은 국정현안이 아니라 부패한 상대에 대한 탄핵이었다. 탄핵안 처리 역시 피혐과 처치라는 의사결정 방법이 고착화되어 있었으며, 국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에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는 것뿐이었다.


힘들게 이 문제를 파고든 저자가 '도덕적 확신'이라는 개인적 신념의 차원에서 한걸음 더 들어가지 않은 것이 아쉽기만 하다. 아니, 저자의 작업으로 당시의 구조적 문제가 낱낱이 드러났음에도 결론에서 명확하게 언급해주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말해야겠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도덕적 확신'이라는 답은 왠지 문제의 성격 자체를 개인 차원으로 변질시키는 것 같아 수긍하기 어렵다. 나는 역사와 정치를 모르기에 조심스럽지만, 역사적 사건은 대개 인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믿기에 그러하다. 사림의 '도덕적 확신'이 어떤 정치 구조를 만들었다면, 반대로 그 구조가 사림의 정치 행위를 어떤 식으로든 구속했을 터이다. 그것이 규명되지 않았기에 나는 저자의 물음을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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