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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는 단순히 성격 문제나 불순한 동기 때문에 비난받은 게 아니다. 그녀는 자연에 역행했다고, ‘여성으로서’ 실패했다고 비난받았다. 최근의 심리학 연구는 이른바 ‘독자적(agentic)’ 위치, 다시 말해 능력, 신망, 자기 주장을 포함하는 행위 주체성을 보여주는 지위를 획득한 여성들이 곧잘 "사회적 지배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여성이 전통적으로 남성이 차지하던 고위직을 노리거나 성취함으로써 젠더 위계를 깨뜨리면 거만하다거나 공격적이라는 평판이 나돌고 젠더 위계를 유지하기 위해 — 때로는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 그런 여성을 ‘끌어내리거나’ 깎아내리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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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1-08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엇 저도 시작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꺼내놓은지 한참인데 아직도 시작을 안했네요..

건수하 2021-11-08 09:56   좋아요 0 | URL
전 제2의 성 아직 안 읽었는데 이거 읽고 분위기 파악 좀 하고 읽어보려구요 ^^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정말... 수다의 최고봉인 거 같다. 

<둠즈데이북>, <화재감시원>과는 다른 차원의 수다와 꿍얼거림이 있다. 이거부터 읽었으면 처음부터 질렸을지도. 

2차대전 중인 코번트리에서 시간여행을 반복하며 옛날 물건을 찾던 주인공은, 시간여행의 부작용으로 쉬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빅토리아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코니 윌리스는 카오스 이론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 같다. 

전작에서는 시간여행으로 인해 역사를 바꿀만한 것은 아예 차단된다, 불가능하다 했지만 여기서는 조금 더 그 부분이 발전되었는데... 복잡했고. 추리소설, 대체역사물의 요소가 다 있어 재미있었다. 

(세 가지 미스터리 중 두 가지를 맞혔다. 만세!)


작품 내에서 현재는 2057년인가 2058년. 

고양이는 멸종된 게 맞았고 역시 코니 윌리스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집사는 이름이 아닌 성으로 불린다.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의 사실을 바꿈으로써 생기는 모순, 그리고 그에 의해 생기는 영향 이야기가 많았는데 (<둠즈데이북>과 <화재감시원>에서는 그런 모순은 생기지 않는다고 했었으면서...) 처음에는 열심히 읽다가 나중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읽었다. 


모델을 만들 때 사람들은 중요할 것 같은 변수만을 고려하지만 별 것 아니라 생각해서 포함시키지 않은 요소가 나비 효과를 통해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은 말 하면 입아픈 모델링의 약점이다. 그래서 변수도 데이터도 많을 수록 정확한 것. 


요즘 일 때문에 모델링에 관심을 갖고있는데 의외의 곳에서 공감. 








​대체 역사물 때문에 <비잔티움의 첩자>가 다시 읽고 싶어졌고 

(해리 터틀도브의 다른 소설은 아직도 번역이 안 되었나?) 


아, 그리고 잊고 있던 비서의 로망이 되살아났다. 


예전에 만화 <동물의사 닥터 스쿠르>에서 수의대 대학원생들이 그랬었고, 

실험실에서도 사람들이 제발 교수님에게 비서가 있었으면 하고 바랬었다.

(역시 대학원생이란 교수에게 비서 대용인 것인가)


나는 교수도 아니지만 

핀치를 보며 이런 비서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둠즈데이북> 에서부터 계속 했다 ㅋㅋ 

핀치는 어느 정도의 보수를 받을까? <둠즈데이북> 에서의 역할을 생각하면 상당히 많이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던워디 교수만큼 보수가 많지는 않겠지. 에잇 더러운 자본주의. 


(그러니까 나에게도 돌봄을 받고 싶은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가부장제 그리고 가정이라는 것이 유지되는 이유가 이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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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말들 - 불을 밝히는, 고독한, 무한한, 늘 그 자리에 있는, 비밀스러운, 소중하고 쓸모없으며 썩지 않는 책들로 무장한 문장 시리즈
강민선 지음 / 유유 / 201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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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장서점검은 사람이 다 일일이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장서 점검기라는 게 있었다니! 놀랍고도 새로웠다 :)

점검 기간이 정해지면 그 전에 책을 제자리에 꽂는 일부터 해 두어야 한다. 책이 뒤죽박죽 꽂혀 있는 상황에서는 장서 점검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장서 점검기를 들고 다니며 책마다 부착된 전자 태그RFID로 책의 위치와 상태가 정상인지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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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번과 마녀>를 읽고 중세가 궁금해져서 <둠즈데이 북>을 읽었다. 









2054년, 시간여행이 가능해져 역사학도들이 과거로 가서 문헌이나 유물이 아닌, 실제 경험을 통해 역사를 연구하는 상황. 중세로 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의 한 대학생이 실습을 가면서 (field trip이란 말이 딱 맞다)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인플루엔자, 페스트 이야기가 나와서 나름 요즘 시대에 공감이 잘 되는 내용이었다. 


사실 내가 갖고있던 것은 10년 전에 나왔던 이 책인데 모 전자책 구독 서비스에 새로나온 버전이 있어서 종이책-전자책을 번갈아가며 읽었다. 


번역자는 같고 (SF 많이 번역하신 최용준님이다) 출판사가 다른 두 판의 차이는 내가 느끼기엔 딱 한 가지인데, 

예전 판에서 아렌스 교수를 '메리' 라고 번역하고 동료 교수와 반말을 했다면

최근 판에서는 '메리' 를 아렌스 교수 (성으로 부름) 로 바꾸고 서로 존대를 한다.


아주 재미있는 건 아니지만 계속 손이 가서 결국 삼 일만에 다 읽음.



코니 윌리스의 '수다' 가 괴롭다는 평이 많던데 그 수다와 영국식 유머가 아니었다면


(페스트로 사람들 다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젖을 안 짜줘서 젖이 퉁퉁 불어있는 암소가

젖 짜달라고 자꾸 주인공을 툭툭 친다거나, 몸이 약한 아들이 공부하느라 크리스마스에도 집에 못 온다며 엄청 걱정하는 엄마가 격리를 뚫고 옥스퍼드 안에 들어왔는데 아들은 매우 건강하게 수많은 여자를 만나 노닥거리며, 그 여자들을 통해 주인공에게 도움을 준다는 식의)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사실 어찌보면 상당히 우울한 이야기라..

(코로나 시대가 아니었다면 별로 그렇게 생각 안했을지도)




이후 시간 순서대로 <화재감시원> (이 책에 실린 같은 제목의 중편이다) 를 읽었다.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는 작품 내의 시간 순서대로 <둠즈데이북> -<화재감시원>-<개는 말할 것도 없고>-<블랙아웃>-<올클리어> 이렇게 다섯 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화재감시원>이 출판 시기는 <둠즈데이북>보다 빠르지만.) 


<화재감시원>은 바솔로뮤란 학생이 2차대전 당시 런던으로 시간여행을 가서 소이탄 공습으로부터 세인트 폴 대성당을 지키는 화재감시원 체험(?)을 하는 이야기이다. (대학 교수란 사람들이 학부생을 그렇게 위험한 곳에 보내다니!)


세인트폴 대성당이 영국 역사상 중요한 행사가 많이 열린 곳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큰 것 같긴 하지만, 위험하게 자원 봉사를 해 가며 왜 그렇게까지 구하려 하는가에 대해 매사 실용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영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잘 이해가 안 되었다.


작가가 나이가 좀 많긴 한데, 공산주의를 싫어하는건지, 아니면 모든 걸 공산주의 탓으로 돌리던 냉전시대를 비꼰건지? 공산주의자가 이 성당을 파괴했다고 원망하는 부분도 잘 이해가 안 되었다. 어느 쪽이든 굳이 그렇게 설정했다는 것에 대해 솔직하다고 해야할 것 같다.


<둠즈데이 북>처럼 재잘재잘 수다를 늘어놓지만, 여전히 과거에 있었던 괴로운 (사람들이 많이 죽는) 일을 시간여행으로 경험하는, 숙연해지는 이야기였다. 바솔로뮤가 실습 이후 시험을 치를 때 역사에 대해 무거운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고. 2054년에는 시간 여행을 통해 기록되어 남은 강자의 역사가 아닌 보통 사람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겠지. 그러나 이미 옛날에 죽은 과거의 사람과 만난다는 설정 자체가 무슨 일을 겪든 서글프게 만드는 것 같다. 어쩌겠어,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리 유한한 걸. 시간 여행은 갈 수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 없는 걸.


지질시대 시간 규모로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잠시 생각하니 끔찍하다. 사람도 아닌 다른 걸 상대하기는 힘들듯.. (공룡이라던가, 삼엽충이라던가) 그리고 어차피 오랜 시간이 걸리는 프로세스들은 관찰할 수가 없다. 시간을 빨리 돌리는 것도 가능하면 좋겠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재미있는 일은 고양이를 본 것이다. 나는 고양이에게 푹 빠져 버렸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다. 이곳에서는 고양이가 흔해 보였기 때문이다.


화재감시원 중


2054년에는 고양이가 존재하는 것 같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멸종했다는 설정인가? 뉘앙스 상으로 보면 코니 윌리스도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둠즈데이 북>을 한참 읽을 때 아이가 대체 무슨 책인데 그렇게 열심히 읽냐며 물어보기에 3일 밤에 걸쳐서 요약-윤색하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화재감시원> 마지막에 의외의 말이 들어있어 놀랐다. 



선생님들,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세요. 

부모님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세요. 


하지만 여러분이 볼 때 아이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모두가 읽거나, 나이에 맞거나 또는 적당한 주제의 책 말고요. 

부적당한 책을, 다른 사람들이 지루하다고 생각할 만한 책을 읽어주세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세요. 


아마도 여러분은 아주 오랜 뒤에 싹이 틀 그런 씨앗을 심는 것이 될 겁니다. 

20년 뒤에 갑자기 꽃피울 그런 싹을 말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아주 밝고 아름답지는 않은 코니 윌리스다운 조언이었다 :) 


내가 읽어주는 걸 좋아하지 않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걸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른 책을 읽어준다는 제안은 매우 솔깃하게 들렸다. 아이도 그렇기를. 수면 독립을 시도하며 읽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서 읽을 책 말고 다른 책, 새로운 책을 접할 좋은 기회가 되겠지. 이제 점점 어른의 책장도 넘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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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첫 페이퍼를 신나서 올렸으나. 

전에 썼던 글을 가져오자니, 책 내용 정리한 것만 있는 글도 있고...

이렇게 한 책으로 여러 번 우려먹어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ㅋㅋㅋ 약간 귀찮아지고 있다.

그래도 시작했으니 해봐야지.










제 3장 '대캘리번'은 1984년 독립적으로 출간되었던 연구의 결과물로, 이 책의 기초이자 핵심 아이디어가 들어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그때 이미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으로 보아 페데리치는 노동자를 자본가 혹은 부르주아의 정복대상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마녀사냥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이미 착안했던 것 같다 (캘리번은 마녀의 자식이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표지



3장은 강렬한 이미지로 시작한다.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의 표지라고 하는데, 가운데 배가 갈라 드러내어져 있는 여성이 있고, 이 책의 저자는 그 여성이 교수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임신했다고 밝혔지만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후 교수형에 처했다고 서술했다고 페데리치는 밝히고 있다.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해부해서 밝혔다는 것인가? 그러면 이미 그 여성은 죽었을텐데, 죽은 여성을 다시 교수형에 처했다는 말인가? 저 당시 의술의 수준으로 개복을 하면 사람을 살리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 저 여성에게 어떤 혐의가 있을테니 생명은 중요하지 않고 임신 여부를 밝히기 위해서 해부를 한 것이고 교수형은 상징적인 의미로 이미 죽은 사람에게 또 집행한 것인가? 임신 5주쯤 아주 작은 점에서 심장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나는 놀라우면서도 좀 무서웠던 기억인데, 그 당시 해부학의 수준으로 그렇게 작은 태아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 여러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성 뒤에 서 있는 창 같은 것을 들고 뭔가를 수호하는 듯한 느낌의 해골은 해부학을 상징하는 것 같고, 해골 옆에는 한 여인 (매춘부나 산파일 거라고 한다) 이 머리를 숙이고 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해부학이 도움이 되는 예는 이런 것 외에도 많았을텐데 학술서의 표지가 굳이 이런 그림이었다는 것이 당시 여성 혐오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는 것 같다.



얼마 전 낭독 모임에서 <템페스트>를 배역을 나눠 읽었다. <캘리번과 마녀>를 읽기 전 캘리번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고 싶어서 골랐던 것이기도 하지만, 극의 주제가 관용과 용서와 화해라고 해서 더 끌렸다. 물론 이야기 안에 선과 악의 구도가 있기는 하지만 응징이나 복수와는 좀 거리가 멀고 결말 부분에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진다. 악의나 불의가 있을지언정 인생은 희망적이라고 외친다.



오 놀랍구나! 훌륭한 사람들이 여기에 이렇게도 많다니!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이런 분들이 존재하다니.

참, 찬란한 신세계로다!


<템페스트> 5막 1장 181-84행, 미랜더의 대사










그래서 <캘리번과 마녀>에서 캘리번이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3장 초반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니 분위기에 취해 잠시 잊고 있었지만 여기서 미랜더가 찬미한 것은 다른 인간들이고, 캘리번은 야만적인 것으로 악의 상징으로, 인간이 아닌 것으로 묘사되었다. 정령 애리얼과 캘리번은 각각 프로스페로의 정신과 육체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봤었는데, 이게 근대 들어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시대적 분위기의 반영이었던 것이었구나.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연결되면 재미있기도 한데, 하나를 알기 위해서 다른 많은 것을 알아야 진정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답답해진다. 공부라는 것은 (사실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끝이 없다.



인색함, 신중함, 책임감, 자기통제 같은 '이성의 힘'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방탕함, 게으름, 생명 에너지의 체계적인 탕진 같은 '육체의 저급한 본능들'이 있다.


3장 196쪽


어릴 적부터 '이성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 이라는 말, 혹은 '인간만이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보면 의문이 생겼다. (요즘은 별로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하지 않는 것 같다) 다른 동물에게 이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정말 확인해보기는 한 건지 궁금했다. 보면 생김새 말고는 별로 아는 게 없는 것 같던데 말이다. 나중에 데카르트의 말을 보고 그게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되었고, 여전히 오만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인간은 자연과 선을 그었고, 거리낌없이 자연을 이용하고 파괴해 왔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신체의 개혁은 부르주아 윤리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부의] 획득을 필요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3장 197쪽


3장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문장은 이 문장이었다. 막스 베버를 읽어보지 않아서 (마르크스도 안 읽었고, 미셸 푸코도 안 읽었고, 막스 베버도 안 읽었는데 이 책을 같이 읽자고 한 것이 참 무모했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부끄럽다.) 페데리치의 문장만 읽고 하는 생각임을 미리 밝혀둔다. 물론 자본주의에서는 필요한 부 이상의 부를 계속 축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부의 획득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긴다니? 이건 개인 차원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자연스런 삶의 즐거움을 우리에게서 박탈하고자 하며 (베버의 말 - 그가 얘기했던 자연스런 삶의 즐거움이란 뭘까?), 농업 사회에서 태양, 계절적 순환에 관계되었던 노동일을 좀더 기계적이고 규칙적으로 바꾸었다. 노동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에 정해진 시간 출근하여 퇴근하게 되었고, 노동자 양성을 위해 학교라는 시스템도 만들어졌다.



어릴 때는 학교에 개근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성적이 좋아 받는 우수상 보다도 칭찬받아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나는 수두로 일주일간 결석을 해서 초등학교 때 개근상을 받지 못했는데, 6년 개근상을 받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내가 일부러 빠졌던 것도 아닌데.. 전염병이라서 못 간 거였는데. 감기에 걸려도 꼬박꼬박 학교에 가고 출근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을 서양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당황했다. 감기로 죽을 수도 있는데, 감기에 걸렸으면 쉬어야지,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옮기잖아. - 아! 정말 그렇네. 요즘 학교는 개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고 (아마 그런 상도 없지 않을까) 코로나 시대를 거치고 나면 아픈데도 학교에 가는 것은 오히려 민폐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 같다.



자연과 이성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노동이 노동자의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상품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노동자는 한정된 시간 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구매자의 처분에 맡길 수 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노동력을' (자신의 에너지, 자신의 능력을)

"꾸준히 자신의 자산이자 자신의 상품으로 간주해야만 한다"는 의미가 된다.


맑스의 말, 198쪽


새삼스레 내가 지금까지 익숙하게 생각해 온 학교 생활,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일정 시간을 일하고 대가를 받기로 계약한다는 것은 내 몸의 자유를 그 시간 동안 포기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노동자들이 이 개념에 익숙해 있었다고 하지만, 16-17세기 즉 사초축적의 시기에는 임노동에 대한 혐오가 극심하였고, 이에 대해 부르주아지는 처벌을 강화하여 노동자들을 길들이는 한편, 공중목욕탕과 선술집을 폐쇄하고 '비생산적인' 섹슈얼리티와 사교행위 등을 금지했다고 한다. 신체는 악의 근원이기도 했으나 한편 노동력의 보유고이기도 했기에 신체의 움직임과 부속기관들에 대한 연구, 해부학의 발전이 뒤따른다. 데카르트가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과 물리적인 영역을 구분했듯 신체를 어떤 본질적인 목적을 갖지 않는 기계적인 물질이라고 보는 기계론적 철학은 자연계에 대한 지배계급의 통제를 강화하는데 기여하여 인간본성에 대한 통제가 최우선적이며, 가장 필수불가결한 단계가 되도록 만들었다 (206쪽). 데카르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자기 관리를, 홉스는 국가 차원에서 개인의 종속을 이야기했으나 두 경우 모두 신체를 자본주의적 노동규율이 요구하는 자동기법과 규칙성에 걸맞게 조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207쪽).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들이 정복(식민화)하려고 했던 이질적이고 위험하며 비생산적인 존재, 즉 야만적인 저 캘리번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232쪽) 이제야 3장의 제목이 왜 '대캘리번'인지, 이 책의 제목이 왜 <캘리번과 마녀>인지 밝혀졌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최초의 기계는

증기엔진이나 시계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신체였던 것이다.


218쪽



학교에서 데카르트와 홉스에 대해 배울 때 나는 그들의 사상에 대해 배웠을 뿐, 그것이 우리를 미래의 노동자로 양성할 목적으로 학교라는 곳에 앉혀놓도록 만들었음을 알지 못했다. 물론 그 중 소수는 지배계급이 되었겠지만, 그들 역시 자본주의라는 큰 체제 내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은 미약한 개인일 뿐이다. 지배계급에 녹아들어갈 수록 부를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게 되겠지. 이런 것을 알고서도 멀쩡하게 학교에 다니거나 회사에 다니는 것은 얼마나 괴로울까. 지금까지 잘 몰랐기에, 아니면 이 개념들을 연결짓지 않고 따로따로 생각했기에 크게 괴로워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살아오면서 문득 솟구쳤던 의문, 반항심이 이 이야기와 맥락이 통하는 걸 보면 무의식적으로 나의 내면에서도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뭔가 이상함' 혹은 의문을 계속 파고 들어가 정리해 둔 것이 철학이겠지. 나는 흘려버렸던 생각들을 이미 옛날에 다 하고 또 정리해둔 철학자들에게 새삼스레 감사하다. 살아오면서 어느 때보다도 철학이 왜 우리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또 왜 우리가 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절실하게 느꼈다. 지금까지 내 감정을 부정하고 '이성' 에 충실하며 살아오려고 노력했고, 서양에서 발전시킨 방법론에 의거한 과학을 공부했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체화하려고 애썼기에 일과 생활에 있어서의 나를 분리하기가 어려워 좀 혼란스럽지만.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가, 인간을 정신과 신체로 분리하고 기계적인 신체를 노동력으로 확보하고자 했던 시기에 중세 동안 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신을 탐구하느라 바빠서 인간을 탐구할 수가 없었겠지)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있었던 마법적인 세계관, 즉 중세의 '마법적인 힘을 담는 그릇'으로 인간을 보았던 개념은 타파되어야 했다. 마법은 노동을 하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수단, 다시 말해서 노동의 거부를 의미했다. (210쪽) 또 마법은 규칙화된 노동과정을 불가능하게 하는 시공간에 대한 질적 개념에 근거했다. 개인에게 특수한 힘을 부여하는 우주라는 개념 또한 자본주의적인 노동규율과 양립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210-211쪽)



마녀 박해는 당시 임노동의 실질적 주체인 남성 노동자에게는 (마법적인 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의) 본보기가 되는, 그리고 새로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여성을 통제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당시 산파 등의 여성에 의해 행해졌던 낙태와 피임을 통제하여 새로운 노동력도 확보하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드디어 4장에서는 마녀사냥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의 주요 논지가 마녀 사냥이 여성이 가정에 종속되고 경제적 활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기에 핵심 내용인 것 같아 기대했으나, 사실 3장 만큼의 카리스마는 없었던 것 같다. 3장 너무 멋짐.



무지하면서 멋지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어 의문이 안 생긴다...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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