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하다보면 유모차에 누워있는 갓난아기나, 엄마 아빠와 놀러 나온 아이들을 만난다. 얼마 전에 아기를 낳은 조카가 가족 단톡 방에 아기의 동영상을 자주 올려준다. 아기는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옹알이를 하며 잘 웃는다. 아이들을 보면 예쁘고 귀여워 저절로 마음이 환해지는 미소가 지어지지만, 한편으로 왠지 슬프기도, 씁쓸하기도 하다. 저 아이들이 헤쳐 나갈 세상이 아득해 보여서이다. 별것도 없는 세상에서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이 쓸모없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지켜내야 하는지 그들은 아직 모를 것이다.

 

<윌리엄 스토너>의 삶에도 반짝했던 순간은 몇 번 되지 않았다. 아무 희망 없이 노동만으로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집안에서 자란 스토너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해서일 것이다. 4년간 농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스토너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부모와 척박한 땅이 있는 고향이었다. 대학 2학년 때 그는 교양 과목인 영문학 개론수업에서 아처 슬론 교수가 읽어주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져자신의 진로를 바꾼다. 그는 대학에 남아 영문학을 공부하기로 한다. 처음으로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얼마 전 예쁜 새들이 노래했으나 살풍경한 폐허가 된 성가대석을

내게서 그대 그날의 황혼을 보리.

석양이 서쪽에서 희미해졌을 때처럼

머지않아 암흑의 밤이 가져갈 황혼

모든 것을 안식에 봉인하는 죽음의 두 번째 자아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내게서 그대 그렇게 타는 불꽃의 빛을 보리.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할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죽음을 말하고 있다. 살아있음에도 죽음을 인식해야 우리는 더 지혜롭게 살 수 있다. 스토너는 너무 어린 나이에 이 소네트에 감동받았다. 이 시가 그에게 공부에 대한 열정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삶에 미리 죽음을 끌어당겨 섞어버린 것처럼 스토너는 평생을 살아간다. 아내 이디스와 딸 그레이스, 부모님, 그가 사랑했던 캐서린에게 한 번도 진정으로 책임이란 걸 지지 않았다. 피하고 견딤으로, 사회에서 벗어나기 좋은 대학이라는 곳에 매몰되어 숨어 지낼 수 있었던 게 그의 삶이었다.

 

평론가 이동진은 이 소설을 “‘스토너패배한 자의 변명과 후일담을 담은 소설이 아니다. 삶에는 근원적인 고독이 엄존하고 그 고독에는 영광과 상처가 공존한다고 말하는 소설이다. 삶의 가치가 삶 자체일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작품이다. 그 가치가 사랑과 우정이라도 그렇다. 가치가 훼손되고 목적이 좌절되며 소망까지 상실되어도,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 사람의 단순한 세월이 꼬박꼬박 묵직하게 흘러간다. 미련하지만 끝내 위엄을 잃지 않은 인간에 대한 성실하고도 위대한 문학이다.” 라는 감상을 남겼다.

 

이동진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이 책을 읽을 때, 순간순간 치받는 분노와 속상함도 많았다. 스토너가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가 한 선택과 체념이 분명 불행을 가져올 것인데도 무심하고 무기력한 스토너가 이해되지 않았다. 스토너는 자신의 전공인 문학속의 세계에서 세상이 변화되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스토너에 대해 그런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이 책을 읽는 내내 스토너가 바로 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먹먹하기도 했다.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해야 잘 되는지가 보이지만 사실 내 인생은 그렇지가 않다. 나또한 용기를 내지 못했고, 나를 먼저 생각했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세상에 등 돌리는 일이 많았다.

 

죽음을 앞둔 스토너가 회한에 빠지지 않고 그가 그 자신이었음을 느끼고 자신이 쓴 책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좋았다. 남들 눈에 실패작으로 보이는 삶도 괜찮다.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저 온전히 자기의 느낌과 생각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된 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점점 더 관대해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이렇게 물러지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지만 난 스토너를 이해하며 삶이 별것 아니라는 여유와 냉소를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 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 것 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팔다리에 나른함이 조금씩 밀려들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감각이 갑작스레 강렬하게 그를 덮쳤다. 그 힘이 느껴졌다. 그는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유쾌한 소설을 읽었다. 읽는 내내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좋아졌다. 뭉클함도 있어 숙연해질 때도 있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단순화시켜 쿨하게 사는 순례 씨가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이 소설 여기저기에서 툭 튀어나오는 유머코드도 의미심장했고 통쾌했다.

 

유능한 세신사였던 75세 순례 씨는 땀 흘리지 않고 버는 돈을 불편해한다. “순하고 예의바르다는 뜻의 순례(順禮)에서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라는 마음으로(p.13) 살고 싶어 순례(巡禮)라고 개명했다. 그녀는 자기 소유의 4층 건물인 순례 주택을 싼 값에 사람들에게 임대해주고 있다. 남자 친구 박승갑 씨의 외손녀인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오수림을 잘 키워주었다. 순례 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순례 씨를 닮아 있다.

 

순례씨와 수림은 가족보다 더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는 나이를 초월한 친구 사이다. 그들은 서로를 최측근이라 여긴다. 가깝고 정이 깊지만 그들은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지켜야 할 것과 허용되는 것이 분명하고 아주 독립적이다. 순례 씨는 어른이다. 그런 어른이 키운 중학교 3학년인 수림이는 영민하고 단단하며 감사할 줄 안다.

 

[“수림아,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순례 씨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글쎄.”

막연했다.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

순례 씨 생각 동의.” -p.53]

 

정말이다. 사람은 나이가 많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어른이 되기도, 어른답게 살기도 어렵다.

 

 

스토너와 순례 씨의 삶을 잠깐 들여다본다. 그들은 똑같이 열정을 가졌고,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을 선택해서 살았다. 하지만 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순례 씨다. 누군가 나에게 누구처럼 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난 머뭇거리지 않고 스토너가 아닌 순례 씨처럼 살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부터 나의 롤 모델은 순례 씨이다.

 

[“수림아, 이 지구에 내 최측근이 딱 한 명 있는데 누구지?”

오수림.”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행복하게 살아야 해.”

순례 씨는 감사라는 말을 잘 한다. 순례 씨가 좋아하는 유명한 말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가 떠올랐다. 나도 순례자가 되고 싶다. 순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 인생에 관광객은 되고 싶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도. -p.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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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3-31 0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장 가까운 사람 자기 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한사람 있다니 좋을 것 같네요 그런 사람은 한사람이면 되죠 소설에 나온 사람이지만 부럽네요 소설이라고 해서 꼭 현실과 다른 건 아니기도 하겠습니다 소설 속 사람과 같은 사람이 현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죠


희선

페넬로페 2024-03-31 09:15   좋아요 1 | URL
소설 속 이야기이지만 현실에서도 저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분명 현실에서도 있을거예요.

hnine 2024-03-31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은실 작가를 어린이, 청소년책들로만 읽어 알고 있었는데 순례주택은 꼭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오랜만에 작가의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떻게 보면 스토너의 삶을 닮은 시기가 있고 또 어느 시기는 순례씨의 생각과 삶과 비슷하기도 하고, 그렇게 복잡하게 진행되기도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

페넬로페 2024-03-31 10:25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이 청소년 소설로 분류되어 있더라고요. 오히려 청소년보다 어른들이 더 많이 읽어야 할 것 같았어요.
네,
hnine님 말씀처럼 인생은 여러 시기를 거치는데 스토너의 삶을 닮은 시기가 훨씬 더 많지 않나 생각했어요. 이제부턴 순례 씨처럼 살고 싶어졌어요. 巡禮하는 자세로요 ㅎㅎ

새파랑 2024-03-31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순례씨 보다는 스토너~!! 심심해 보이고 무난해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인생이 그렇지 않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특별할건 없지만 유일한 나의 인생~!!

페넬로페 2024-03-31 14:56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은 스토너~~
근데 스토너처럼 너무 쉽게 사랑하는 여자를 보내시면 안됩니다 ㅎㅎ
 
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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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많이 보았던 미국 서부 영화의 주된 배경이 텍사스였다. 사람이 전혀 살지 않을 것 같은 황량한 곳, 마을 한가운데에 어김없이 있는 술집, 문을 열면 언제나 거친 사람들이 가득하고, 항상 그곳을 혼자 찾아오는 주인공 남자, 관을 끌고 다니는 으스스한 분노의 추적자인 장고, 악을 몰아내고 결국 마을을 지켜내는 보안관 존 웨인, 선인장 하나만 달랑 있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총격전과 마지막 결투그 시절의 내게 텍사스는 영화에서만 존재하고, 내가 사는 세상과는 완전 다른,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척박한 땅이었다. 내가 가졌던 텍사스에 대한 이미지는 분명 틀렸을 것이다.

 

미국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와 주도인 오스틴의 지도를 찾아본다. 내가 사는 곳과 텍사스의 정서가 약간 다르겠지만, 세상 어디서나 인간이 사는 모습은 비슷할 것이다. 소설 <사라진 것들>의 등장인물은 거의 텍사스에 산다. 주로 예술가이거나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친다. 그들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워 와인을 많이 마신다. 어느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사는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결혼한 부부에게 아이는 언제나 부담감을 준다. 아이가 주는 감동과 행복은 잠시뿐이다. 책임을 지고 성인이 될 때까지 아이를 잘 키워내야 한다. <오스틴>에서의 나, <담배>에서의 나, <숨을 쉬어>에서의 나, <>에서의 나는 모두 아이를 가진 아빠지만 그들은 똑같이 고독하고 위태롭다. 아이는 어른의 상황이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들은 어른도 자기와 똑같이 힘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아이는 부부사이를 멀어지게도 하고 각자의 세계로 침잠하게 만든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오히려 안전하지 못하다. 가족을 지키려는 마음과 그들로부터 떨어져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공존한다. 이 단편들, 특히 <>을 읽으며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부부와 친구가 된다는 건 모호하다. 부부 사이에 끼여 있어 어중간한 느낌도 들고, 소외되고 이용당할 수도 있다. 그들이 필요로 할 땐 환영받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애물단지가 되기 쉽다. 주책맞은 사람이라고 오해받기도 한다. <라인벡>에서의 나와 <히메나>에서의 히메나가 그렇다. 친구인 부부와 우정을 나누지만 약간의 아슬아슬함도 있다. 문제는 이들 부부 사이가 그리 탄탄하지 않다는 것이다.

 

<넝쿨식물>에서 나의 아내 마야는 화가이다. 이웃에 사는 나이든 예술가인 라이어널을 포식자라 부르지만 자신의 작품을 위해 정황상 라이어널의 누드 모델이 되어 주고 그의 도움으로 전시회를 열게 된다. 아마 사랑을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거의 그랬을 것이다. 결국 이들 관계는 헤어짐으로 끝난다. 라인벡의 나는 그들을 따라 떠나지 않고, 히메나는 다른 곳으로 떠나고, 마야도 떠나 다른 곳에서 재혼해 아이들도 낳지만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있고, 엄청나게 돈도 많은 <사라진 것들>의 대니얼은 옐로스톤과 알래스카, 조슈아트리로 혼자 여행을 다닌다. 가본 적은 없지만 그곳은 내가 상상도 못할 만큼 광활하고 웅장할 것 같다. 대니얼은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의 포티나인 팜스 오아시스 트레일(길기도 하다.)’에서 실종된다. 대니얼 스스로 선택한 실종이든, 아님 사고로 인한 실종이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어간다는 사실은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 완벽한 삶을 살 것 같은 사람에게 오는 위기가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에게 실감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이틀 동안 와 대니얼의 여자 친구인 앙투아네트가 대니얼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그의 부재를 느끼고 그와의 추억을 공유하지만, 그들에게 보여 지는 것은 불안이다. 소설 <사라진 것들>뿐만 아니라 나머지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내용도 사라짐에 관한 것이다. 어떤 종류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감정, 추억, 물건은 사라지기 마련이고 그 사라짐의 의미는 점점 퇴색된다. 나중에 무엇이 남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40대 주인공들이 앓고 있는 정신적 방황과 공황, 현실의 무게감이 버거워 보여 마음이 무겁다. 견디며 그저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삶이라는 사실이 슬프다.

 

인생에서 어려운 시기는 항상 있겠지만 난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갈 때 가장 힘들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피폐해졌다. 이 시기가 이렇게 힘든데 50은 어떻게 넘길 수 있을까, 미리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50은 즐겁고 행복하게 잘 넘어갔다. 40대에 비해 형편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 거의 똑같은데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공자가 말한 불혹(不惑)이 뭔지 잘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도 생각한다. 어느 나이가 되면 흔들리지 않을까? 그때가 오기는 할까? 어쩌면 40에 인간은 사춘기를 다시 겪고, 육체가 재배치된다. 삶에 대해 처음으로 되돌아보며 내가 늙어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비로소 자신의 부모가 이해되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와인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마침 봄 미나리에 오징어를 듬뿍 넣어 미나리 전을 부친 날, 집에 오래된 와인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어디 두었는지 몰라 한참을 찾았다. 식탁을 차리며 남편에게 와인 뚜껑을 열어 달라고 했다. 평소 와인을 잘 마시지 않아 와인따개도 여기저기로 찾아다녔다. 와인이 오래되어서인지, 남편이 미숙해서인지 결국 와인 병의 코르크 마개는 중간쯤 올라오다 와자작 부서지고 말았다. 코르크조각이 와인 속으로 많이 들어갔다. 이 소설속의 라면 지하저장고로 내려가 새 와인을 가지고 오겠지만 나는 컵에 올이 촘촘한 얇은 면포를 올리고 와인을 부었다. 코르크조각은 완벽하게 제거되었고, 적당히 알코올 도수가 높은 와인의 맛은 좋았다. 나는 이렇게 인생을 살고 있다.

 

[“가끔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 알아? 그걸 놓아버리기가 너무 힘들어.”

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넌 그다지 다르지 않아.”

더 성공한 사람으로 변하지 않은 건 확실하지.” 나는 말했다. “혹은 현명한 사람으로.”

……

모르겠어.” 나는 말했다.

어쩌면 참을성이 더 많아졌겠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확실히 낮아졌고.”

자신에게 더 관대해졌다고 생각해?”

아니.” 나는 말했다. “그냥 기대가 낮아진 것뿐이야.”

-p287~288, ‘히메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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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3-30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ㅡ작중 화자 ˝나˝ 느낌이.비슷해서 저는 단편모음인줄로 모르고 이상하다.하며 읽었는데.페넬로피님께서.ㄱ ˝나˝들의 공통점 정리해주시니 확.이해가 ^^

페넬로페 2024-03-30 20:25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의 ‘나‘가 처한 상황들과 느낌이 거의 비슷하게 느껴지죠? 저도 그랬어요. 그렇기도 하고, 약간 일기같은 느낌도 들어 별점 하나 뺐어요. 얄라님의 감상, 기다리겠습니다^^

새파랑 2024-03-31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나리전에는 와인보다

막걸리 아닌가요? ㅋㅋ

이 책은 제목을 너무 잘 지은거 같아요. 사라진 것들이라니~!!

40대가 된 후부터는 뭔가가 생기기 보다는 계속 사라지는 느낌이 듭니다. 전 그래서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이 남애기 같지 않더라구요~~!!

페넬로페 2024-03-31 14:54   좋아요 1 | URL
미나리전엔 막걸리인데 이 책의 인물들이 계속 와인 마셔서 저도 마시고 싶더라고요.
새파랑님 말씀처럼 제 얘기 같기도 해서 좀 씁쓸했습니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19세기 프랑스 여러 분야의 풍속을 그대로 담은 발자크 적 리얼리즘 소설인 인간극은 세밀하고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 등장인물의 생김새부터 (발자크는 관상이나 골상학을 믿는 게 틀림없다.) 성격이나 자라 온 환경, 사건의 전개 등을 독자들의 상상력이나 해석이 별로 필요 없을 정도로 자세하게 서술한다. 그렇기 때문에 발자크의 소설을 읽기 쉽다고 착각한다.

 

어둠 속의 사건이 그랬다. 프루스트를 읽고 난 다음 선택한 발자크의 소설은 프루스트에 비해 은유와 주어를 찾기 힘들 정도로 길게 쓴 문장이 없어 술술 잘 읽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00페이지쯤 읽었을 때, 노트를 가져와 사건과 인물에 대해 정리하며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만 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격변하는 시기를 배경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과 변화에 순응하며 끝까지 살아남는 대조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그 당시 사회, 법률, 재판, 정치와 연결시킨 발자크의 글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혁명의 결과엔 늘 실망이 따르지만, 공통적으로 그 목적은 오랫동안 누려온, 부당하고 불평등한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왕권과 귀족의 권위는 무너졌고 많은 사람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으며, 그들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거나 약탈되었다. 왕족과 귀족들은 망명자가 되어 왕정복고의 기회를 노리고, 부르주아는 국가로부터 귀속재산과 귀족의 지위까지 사들인다.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가 역사의 전반에 등장했지만 그들은 돈과 함께 옛 귀족이 가지고 있던 명예나 지위도 원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부르주아인 마르셀이나 스완, 베르뒤랭 부인, 오데트가 포부르 생 제르맹지역의 살롱에 가기를 원했고, 결혼을 통해 귀족의 작위를 얻는 데 집착한 이유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돈만으로는 진정한 품위를 얻기 힘들어서였다. 부르주아(시민계급)는 가문의 전통을 상징하는 공작이나 백작, 후작이라는 지위, 이름 중간의 를 사용함으로써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쥔 새로운 역사와 권력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다.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 프랑스 혁명으로 한 밑천 잡은 고리오 영감이 그의 딸들에게 돈을 쏟아 붓는 것도, 귀족 숭배자이자 왕당파의 오노레 발자크가 스스로 자신의 이름에 를 넣어 오노레 드 발자크가 된 경우도 똑같은 이유이다.

 

 

공드르빌 영지의 드 시뫼즈 후작 부부는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이었던 독일의 귀족들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1790년에 재산을 빼앗기고 단두대에서 참수된다. 영지는 국유재산으로 환수되어 다시 매각되는데, 나폴레옹에 의해 국가참사회 의원으로 임명되고, 오브현의 실세인 말랭이 비밀리에 사들인다. 말랭은 프랑스 혁명이후 격변하는 시기에 12번의 정부가 바뀔 때에도 끝까지 살아남는 인물이다. 어둠 속의 사건에서 발자크는 소설 속 인물과 실제 인물(나폴레옹, 푸셰, 탈레랑, 시에예스)을 함께 등장시키는데, 말랭은 푸셰의 페르소나로 보일 정도로 푸셰의 삶을 똑같이 답습한다.

 

드 시뫼즈 후작의 쌍둥이 아들과 그들의 사촌 로랑스 드 생시뉴는 나폴레옹 정권에 반대하고 왕정복고를 위해 투쟁하는 인물이다. 그들은 열정이 넘치고 의리가 있지만,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주위를 둘러보는 데 실패한다. 혁명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계속 누려온 기득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민중이 고통 받았는지를 돌아보게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지키고자 하고, 돌려받기 원한 것은 그들의 재산과 권위이며,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 가족의 명예인 것이다.

 

로랑스 드 생시뉴는 그 시대 여성답지 않게 당차고 용감하다. 발자크의 표현대로 로랑스는 오연(傲然)하다. ‘남성적인 결단력과 금욕적인 강인함(p.74)’을 가지고 자신의 신념과 가문, 가족을 지키려고 한다. 나폴레옹의 암살을 응원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사건에 휘말린 그들의 사촌을 구하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나폴레옹을 만나러 위험한 곳으로 가기도 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나폴레옹에게 굽히며 그들의 사면을 청한다. 자신을 끝가지 도운 미쉬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의 아들 프랑수아를 책임진다.

 

이 책의 표지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그림 <절망적인 남자>는 보기에도 강렬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머리 위로 손을 올린 그림 속의 남자에게 당혹감과 놀라움, 절망, 불안이 동시에 느껴진다. 아마 이 남자는 미쉬일 것이다. 보잘것없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미쉬를 거두어 관리인 자리까지 준 시뫼즈 후작 부인의 호의를 갚고자 그는 죽을 때까지 시뫼즈 형제와 로랑스를 위해 헌신한다. 발자크는 이 책의 초반에 미쉬에 대해 길게 서술한다. 미쉬의 미래에 대한 복선이 깔려있고, 독자는 미쉬가 정치와 법의 희생양이 될 운명임을 처음부터 알 수 있다.

 

발자크는 민중인 미쉬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모습과 그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격변하는 시기에 인간이 사는 방식은 다양하다. 미쉬처럼 충직하게 주인을 섬기거나, 또는 자코뱅당의 수장이 되어 귀족을 단두대로 보내는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 귀족을 도울 수도, 귀족을 감시하는 경찰의 끄나풀이 될 수도 있다.

 

미쉬가 완전 다른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혁명을 통해, 변화하는 역사에 발 빠르게 편승하여 민중에서 서민으로 자신의 신분을 바꿀 기회가 분명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쉬는 의리를 지키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남는 선택을 한다. 그런 미쉬같은 약자에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요구되는 것은 희생이다. 어떤 일을 처리하고 넘어가기 위해 한 사람 정도는 죽어줘야 하는 세상에, 그런 역할을 해야만 하는 사람으로 선택되는 것, 그것이 미쉬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집정정부 시대였던 1800923, 보베성에서 상원 의원 클레망 드 리가 납치되는 실제의 사건을 모티프로 한 소설 어둠 속의 사건은 각자의 인간이 추구하는 자신만의 신념과 정치적 선택이 격변하는 역사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와 작정하고 덤벼드는 무고적(誣告的) 악행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문학에서 인용할 수 있는 그 어느 것보다 탁월한 정치적 분석을 담고 있다(p.343)’는 알랭의 말처럼 발자크는 문학을 통해 그 당시 프랑스 사회와 정치를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지금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그대로 담은 발자크의 소설에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도출하고 분석하게 해준다. 그것이 발자크의 위대함이다.

 

[사회가 재판을 창안한 이후로, 사법 당국이 범죄에 맞서 누리는 권한과 동등한 권한을 사회가 무고한 피고인들에게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낸 적은 결코 없습니다. 재판은 쌍방향이 동등한 것이 아닙니다. 스파이도 경찰력도 갖고 있지 못한 방어 측은 자기 고객들을 위해 사회적 힘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무고함이 의지할 수 있는 건 논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배심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논리라는 것은 선입견을 가진 배심원들의 정신에는 무력한 것이 보통입니다. -p252]

 

[어둠 속의 사건은 인간의 삶이 역사의 굴곡과 얽혀 있어서, 인간의 운명이 결국은 역사적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패멸하는 역사의 희생물로 그려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p.342, 작품 해설 중에서]

 

소설 어둠 속의 사건은 실제 인물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조제프 푸셰를 빼놓고 읽을 수 없다. 이 두 사람은 소설속의 인물로도 등장한다. 푸셰는 말랭이라는 인물을 통해서도 등장하는데 발자크는 이 소설에서 이중적으로 푸셰를 등장시킨다. 발자크는 푸셰라는 인물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그의 본성을 정확하게 알아본 사람이다. 소설 속에서 그는 실제 인물 푸셰에 대해 정확한 평가를 하고 있다.

 

[그는 보나파르트의 비밀을 꿰뚫어 보고, 그에게 유용한 충고와 소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자신의 기량과 유용성을 증명해 보인 데 만족한 푸셰는 자신의 전모를 드러내는 것은 삼가면서 만사를 굽어보는 위치에 머무르고자 했다

P.98, ‘어둠 속의 사건중에서]

 

슈테판 츠바이크역시 푸셰를 완벽히 분석한다. 탁월한 전기 작가인 츠바이크는 혁명을 시작으로 빠르게 변화되는 프랑스 역사 속에서 기회주의자인 푸셰의 삶을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푸셰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배반을 밥 먹듯이 하고, 그 누구에게라도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인간이다. 수도사 출신이지만 종교를 저버리고, 루이 16세와 친구인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로 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리옹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무수하게 학살했다. 항상 본심을 숨기고 끝가지 기다리며 마지막엔 언제나 승리자의 편에 선다.

 

츠바이크는 푸셰를

-정치적 인간, 차가운 피를 가진 사람

-무미건조한 사무실형 인간,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히는 사람

-현실주의자, 기회주의자

-가장 교활한 사내,

-영리한 계산의 달인

-팔색조, 집요한 모사꾼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겠다는 일념

-탁월한 정치적 지성을 가진 사람

-철면피, 무쇠 인간

-이기적이고 냉정한 사람

-남을 우롱하기를 즐기는 사람

-비도덕적 인간형

으로 다양하게 묘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푸셰를 음모의 괴수라고 했으며

나폴레옹은

내가 아는 정말로 완벽한 배신자는 단 한 사람뿐이다. 바로 푸셰이다(p.297, 조제프 푸셰)”라고 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조제프 푸셰는 서로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10년 동안 관계를 유지하지만 그들에게 믿음은 없었다. 항상 서로를 의심하고, 언제라도 상대방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도록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푸셰를 불신하고 화를 내며 증오하기까지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푸셰에게 벗어나지 못하며 10년을 보낸다.(p.199)’.

 

푸셰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협박한다. 정적을 위협하기 위해 언제라도 써먹을 수 있는 숨긴 정보가 가득하다. 영화 더 킹에서 검사인 한강식(정우성)이 필요할 때 하나씩 써 먹는 수법과 같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더러운 세력과 손을 잡고 무자비하고 비열하게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은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며 물론 잘 살고 있다.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무엇일까? 신념과 의리, 도덕, 인간성을 다 버리면 행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택의 영역이다. 세상의 변화에 눈을 감아서도 안 되지만, 그 변화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며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망각하며 사는 것도 불행한 일이다. 사는 것, 살아내는 것은 매번 어렵다. 발자크도 츠바이크도 정확한 답을 주진 않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사람, 삶을 통해 또 한 번의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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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25 08: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 님하고 독서모임하신 줄 알았어요! 😹

페넬로페 2024-03-25 09:03   좋아요 2 | URL
앗, ㅋㅋ
이제 확인하고 왔어요.
그레이스님과 6년째 독서모임 하고 있습니다.
주로 고전을 읽고 있어요 ㅎㅎ

그레이스 2024-03-25 10:35   좋아요 1 | URL
^^

자목련 2024-03-25 13:41   좋아요 2 | URL
저도 혼자 두 분이 같이 읽으셨나, 우연인가 궁금했는데.

새파랑 2024-03-25 12: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제부터 ‘드 페넬로페‘ 님으로 불러야 할거 같아요~!! 요새 발자크에 빠진 페넬로페님~! 역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셔서 인지 다른 책들은 쉽게 읽으시는 군요~!!

제가 저번에 플로베르를 읽었을때도 느꼈던 건데, 발자크나 플로베르를 읽기 위해서는 당시 프랑스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페넬로페 2024-03-25 13:39   좋아요 3 | URL
‘드 페넬로페‘, 영광입니다 ㅎㅎ
어찌하다 보니 계속 프랑스 소설을 읽게 되었어요.
이왕 시작한 거 스탕달과 플로베르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희선 2024-03-26 0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다보니 일제 강점기 시대 때 사람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친일파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다 친일파(밀정)로 바뀐 사람... 지금도 다른 남의 뒤통수 치는 사람 있겠네요 어떤 시대든 그런 사람은 있지요 큰 뜻을 갖고 살지 않는다 해도 개인으로는 부끄럽지 않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해도...


희선

페넬로페 2024-03-26 09:50   좋아요 2 | URL
네, 어느 시대고 이런 사람이 수두룩해요, 지금도 그렇고요.
희선님 말씀처럼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모두 다 그렇게 살다 보면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을까요!
 
조제프 푸셰 -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전면 새번역 누구나 인간 시리즈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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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하고 파렴치한 정치적 인간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제프 푸셰‘는 실존 인물이고 그와 같은 인간은 태고로부터 지금까지 악명을 떨치며 살아 남는다. 그들의 거짓말, 협박, 폭력, 회유로 대중은 선동되고 권력은 유지된다. 츠바이크의 인물론은 언제나 탁월하고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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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15 16: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아아, 이거 재미날 거 같았는데 역시 5별이군요. 저도 얼른 읽어야지;;;

페넬로페 2024-03-15 18:51   좋아요 2 | URL
읽다 보니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이해도 잘 되고, 지금 우리의 상황과도 비슷한 면이 많더라고요.

coolcat329 2024-03-15 20: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는 정말 너무 좋지 않나요? 이 책 저도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페넬로페 2024-03-15 22:42   좋아요 2 | URL
츠바이크 작가는 글을 너무 잘 써서 결국엔 자신이 써 낸 인물보다 더 돋보이더라고요 ㅎㅎ

미미 2024-03-15 2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츠바이크👍 페페님 100자평 보니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이 책ㅋㅋㅋ📚

페넬로페 2024-03-15 22:46   좋아요 2 | URL
네, 믿고 읽는 츠바이크 작가예요. 글도 잘 쓰고 아는것도 많고요.
미미님, 반가워요^^

han22598 2024-03-17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고이 모셔둔 츠바이크 책들...ㅎㅎ 페넬로페님 안녕하세요!

페넬로페 2024-03-17 09:44   좋아요 0 | URL
알지요, 고이 모셔둔 책들을 가진 마음을요, ㅎㅎ
han님!
잘 지내시지요!

서니데이 2024-03-22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테판 슈바이츠가 쓴 책이면 인물을 잘 몰라도 재미없을 것 같지는 않네요.
페넬로페님,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4-03-22 21:50   좋아요 1 | URL
츠바이크가 워낙 전기문에 탁월한 사람이라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조제프 푸셰에 대해 잘 몰랐는데 이번에 새로 알게 되었어요^^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 -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 츠바이크 선집 3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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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선생님이 들려주신 프랑스 혁명에 관한 얘기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신비한 단어들에 프랑스 사람들이, 혁명이 환상적으로 보였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형편과는 다른, 인간 중심적이고 자유롭게 살고 있을 것 같은 그곳이 멋지게 느껴졌다. 똑같이 혁명이라는 단어로 시작했지만 사람만 바뀌면서 1인 독재 정치가 계속되고 있는, 여고생의 뺨을 수시로 갈기고 심지어 구둣발로 교실로 들어와 자신에게 항의한 여학생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선생들이 있는 학교에서, 자유와 평등은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서, 난 숨을 참으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프랑스 혁명은 민중이 아닌 부르주아 계급을 역사의 흐름의 중심에 서게 만든 것이라는 것을 어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 알게 되었다. 혁명은 굉장히 폭력적이었고 그 결과도 내가 상상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뿐만 아니라 혁명이라는 것은 모두 폭력적인 것이었다. 국민과 민중을 위한다면서 한 쪽이 다른 진영의 자리를 빼앗아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혁명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 누가 되었던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적들에게 대항해야하기에 민중은 안중에도 없었다. 민중은 또 어떤가? 당장 눈앞의 빵 한 조각이 급하니 그들은 성급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분위기에 휩쓸린다. 혁명에 늘 이용당해 맨 앞의 총알받이로 나서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 울분으로 싸구려 선술집은 항상 붐비고 그들의 자식은 다시 민중으로 살아간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다만 역사가 거의 그 결과로 말해지는 것이라 그녀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소설의 형태로 프랑스 혁명 속의 마리 앙투아네트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한다. 그는 그 시대의 모든 신문과 편지, 소송 서류들까지 조사(p.324)’해 사실적인 것들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조명했다. 츠바이크의 말대로 앙투아네트의 인생에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부침이 없었다면 그녀는 왕비의 자리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인간의 의지와는 다르게 나타나고 그녀는 불행하게 삶을 마쳤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은 두 왕가의 왕자와 공주의 결혼으로 오랜 경쟁 관계를 청산하고자 한다.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졌지만 공부와 생각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공주는, 아무런 재능이 없고 못 생긴 루이 15세의 손자인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위해 어린 나이에 프랑스로 건너온다. 재정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두 가문이지만 결혼식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다. 7년 동안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지 못하고, 황실의 숨 막힌 생활에 우울증이 걸린 앙투아네트는 드레스, 보석, 헤어 장신구에만 관심이 있었다. 트리아농 성을 자신의 도피처로 만들어, 그곳을 자신만의 연극장으로 꾸며 위안 받는다. 파리의 매력에 빠져 매일 밤, 오페라 극장, 가면무도회, 도박장에 드나들며 새벽에 귀가한다. 도박 빚은 늘어나고 향락의 생활은 끝이 없다.

 

[놀면서 세월을 보낸 그녀는 왕비의 이념에 정신적인 의미를 부여할 줄 모르고 다만 완성된 형태만을 가질 뿐이었다. 그녀의 손안에 들어가면 위대한 임무는 덧없는 놀이로, 높은 지위는 배우의 역할로 축소되어 버렸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왕비라는 것은 궁정에서 가장 우아하고 매혹적이며, 제일 귀한 대우를 받는 사람, 무엇보다 가장 행복한 여성으로 추앙받는 것, 즉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가장 영향력 있는 여인이 되는 것이었다. 20년 동안 그녀는 베르사유라는 무대 위에서 프리마돈나로서 우아한 로코코 왕비의 역할을 연기했다.

-p.62]

 

왕비가 백성을 돌보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무심했던 사이, 시민 계급 의식은 깨어나고, 대흉작과 물가 상승으로 서민의 삶은 힘들어졌다. 프랑스 왕국은 부채가 늘어나 재정이 파탄나기 직전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목걸이 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기극에 휘말리고,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던 재무대신 네케르마저 해임하여 국민은 왕실에 등을 돌린다. 뒤늦은 각성에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소집하지만, 1789714일 바스티유가 습격당하고 만다.

 

주관과 결단력이 없는 루이 16세도 문제가 많았다. 항상 무덤덤한 태도로 일관하며 사냥만을 즐긴 그는 왕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뿐 아니라 처음부터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루이 16세 역시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부족해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강압적이지 않고 양보만 하면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상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어도 혁명에 대한 개념이나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리앙쿠르 공작은 파리에서 일어난 사태를 알리려고 베르사유로 달려와 급히 잠든 루이 16세를 깨웠다.

바스티유가 습격을 받아 지휘관이 피살되었습니다! 시민들은 그의 목을 창에 꽂고 파리 시내를 누비고 있습니다!”

반란(révolte)이 일어났소?”

놀란 루이 16세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공작은

전하, 그렇지 않습니다. 혁명(révolution)입니다.”라고 답했다.

-p.157]

 

베르사유가 침입당하고 왕과 왕비는 파리의 튈르리 궁으로 옮겨 간다. 바렌으로 도주해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은 코뮌에 의해 탕플 탑에 감금된다. 9월 대학살이 일어나고 루이 16세는 처형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콩시에르주리에 수용되고 반역죄로 17931016일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식을 걱정했고 신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끝까지 왕비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했는가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왕권을 신의 선물로 여긴 그녀는 혁명을 통한 국민의 요구를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밖에는 박피공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다리가 달린 싸구려 마차였다....

공화국은 기요틴에서조차 평등을 요구했다. 왕비라고 해서 시민보다 더 편하게 죽을 이유가 없었다. 사다리 마차면 충분했다. 사다리 사이에 놓인 널빤지가 의자 역할을 할 뿐 깔개도 없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 마담 로랑, 당통, 로베스피에르, 푸키에, 에베르 또한 이 마차를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들도 모두 이 딱딱한 널빤지에 앉아 최후의 길을 갔다. 단지 그녀가 한 발 먼저 가는 것뿐이었다.

-p312~313]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뿐만 아니라 혁명은 사람을 너무 쉽게 죽였으며, 혁명으로 권좌에 오른 사람들마저 다 죽어야 했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이다. 츠바이크는 이 책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사실적으로 서술하며 대체적으로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지만, 그녀에게 정상 참작의 기회를 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녀로 태어나 다른 나라의 왕비가 되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당연히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국민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환호는 당연한 것이고 자유와 권리는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는 편안과 즐거움은 누군가의 희생과 빈곤으로 얻어지는 것이고, 자신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사람은 구제받을 수 없다. 그녀가 프랑스 혁명의 희생양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되지만, 앙투아네트는 근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비애와 어둠에 관해 무지함(p.63)’의 죄를 지었다.

 

츠바이크는 프롤로그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평범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천재나 권력욕이 강한 사람의 반대적 의미로 평범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순수하고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사명감도 없었고 거대한 역사적 운명과 싸우기에 한계가 많은 보통의 사람이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저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보통이 마리 앙투아네트와 연결되지는 않는다. 마지막까지 혁명의 선동자를 증오한 그녀는 대혁명의 과정과 결말에 많은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화북스의 츠바이크 선집 마리 앙투아네트는 번역이 좋지 않았다. 문장의 문맥이나 조사의 사용에서 틀린 부분이 많았다. 또한,

국왕을 위해 싸우다 쓰러진 전사들은 무시한 결정이었다’-p.163 전사들을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을 오로지 내 아이들 덕분입니다.’-p.192 그것은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무턱대로 윽박지르면 도리어’-p.193 무턱대고

(내가 여기에 적지 않은 것도 많고, 알아내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문장과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대혁명을 연결시킨 저자의 구성은 훌륭했다



**사진은 이 책에서 발췌했고 페이지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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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3-05 01: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왕녀, 왕비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마리앙투아네트는 그런 걸 생각하지 못했군요 집에서 가르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정략결혼이기는 해도 왕비가 됐으니 왕비로서 해야 할 게 있었을 텐데... 그런 건 거의 생각하지 않았군요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백성이 괜찮게 살까 해야 하는데... 루이16세도 다르지 않았군요 왕 자리는 무겁기는 하겠습니다 평범한 백성이 낫죠 조선시대 왕도 힘들었겠습니다 어느 시대나... 지금도 그건 다르지 않을 텐데...


희선

페넬로페 2024-03-05 08:48   좋아요 2 | URL
네, 요즘은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좋다는 생각을 해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왕권을 너무 당연하게만 생각하고 그것을 누리면서 산 것 같아요.
국민이 낸 세금을 자신의 돈인 것 처럼 사용한 것도 문제지요.

미미 2024-03-06 15: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 책으로 사두었었는데 이 책이 새로 나와서 마음이 좀 쓰렸습니다ㅎㅎ

하...저또한 여고때 몇몇 아이들이 끌려가 맞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다녔어요. 젠틀해 보이는 쌤들도...

저도 이 책 읽고 싶네요^^

페넬로페 2024-03-06 17:06   좋아요 3 | URL
역시 츠바이크의 글은 좋았어요.
역사와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물을 잘 연결시켰고 읽기에 재미 있었어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과정도 조금 알 수 있었어요.
여학교때 괴로웠어요.
물론 좋은 쌤들도 많았지만요.

레삭매냐 2024-03-09 0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놔, 이 책 읽다 말았어요 -
벌써 두 번째네요 ㅠㅠ

한창 회자가 되서 금세 다 읽을
줄 알았는데 더 재밌는 책들에
정신이 팔려서리.

리뷰 버프를 받아 다시 한 번 도
전해 보려구요.

페넬로페 2024-03-09 12:20   좋아요 3 | URL
제가 참가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올해 상반기에 발자크 읽기를 하고 있는데, 그 시대 프랑스의 사회와 역사를 모르고서는 발자크 읽기가 힘들겠더라고요.
그래서 참고 문헌들을 조금씩 읽고 있어요.
지금 《어둠 속의 사건》읽고 있는데 이 책이 도움이 되네요.
츠바이크의 구성력도 좋고 인물에 대한 해석도 공감되어 흥미롭게 잘 읽었어요^^

알파카 2024-03-16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해당 도서 출판사 담당자입니다! 리뷰들을 읽어보다가 답글 남깁니다. 저희 책 소개보다도 더 와닿고 깊이 있는 내용인 것 같아서 ㅎㅎ 정성스러운 리뷰에 감사의 말씀 드리려 댓글 달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오탈자 지적해 주신 부분은 독서하는데 지장을 드려 정말 죄송한 마음이고 저희도 내부적으로 발견하여 수정작업을 마쳐 다음 쇄에는 오탈자 없는 책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4-03-16 23:03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이화북스의 더 좋은 책 출간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