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흑역사 - 이토록 기묘하고 알수록 경이로운
마크 딩먼 지음, 이은정 옮김 / 부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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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 신경과학을 대중과학서로 읽으면서 배울 수 있을까, 20세기에는 엄두가 안 나는 상상 같았지만, 이제는 재밌게 배울 수 있는 책도 출간된다. 우주만큼 어려울 것도 같지만 그만큼 흥미로울 연구 주제다.

 

솔직히 암보다 뇌질환이 더 무섭다. 아니 굳이 특정 질환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조금씩 이상한 뇌(기능)를 가졌다. 그러니 사례들은 얼마나 Bizarre(원제)한지

차근차근 읽고 배워 볼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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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고장한 사례에 관해 이렇게 다양한 진단과 명칭이 존재하는 줄 몰랐다. 그나마 익숙한 건 서번트 증후군 정도. 내 뇌는 이게 정말일까, 사실일까, 내가 읽는 게 읽고 있는 게 맞나, 하고 놀라며 문장을 따라갔다.

 

인간은 누구나 뇌를 가졌지만, 문제의 양상을 보면, 일반적이고 공통적이라기보다는, 사회 문화적 요인이 커 보인다. 꿈이나 전생, 사후세계에 관한 사회 문화적 묘사가 모두 다르듯이.

 

뇌가 기능하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것부터 큰 도전까지 가능하지만, 뇌기능 중에는 인류를 큰 함정에 빠트리고,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하는 방식도 적지 않다. 무엇을 문제로 간주하는가는 각자의 가치판단에 따라 또 다를 것이지만.

 

최근에 유전자의 무자비한 생존과 번식 욕망과 프로그램에 대해 읽었기 때문에, 못마땅한(?) 뇌기능 방식에 대해 이전처럼 화가 나거나 불만이 먼저 튀어나오진 않는다. 그럼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묻고 살피고 싶다.

 

정상성이란 무엇이며 얼마나 엉터리일 수 있는지.’

 

동일 분류에 속할 수 있는 뇌가 두 개도 없다는 측면에서 - 모두 다른 존재 - ‘정상이란 개념 자체가 상당히 무의미해진다. 뇌 연구자(마크 딩먼)정상적인 뇌라는 개념 자체가 비현실적이라고 말해줘서 안도한다.

 

읽기 시작할 때 증상들에 놀랐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의 근거가 이상하지 않은정상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이렇게 선을 그어 나누는 버릇을 없애고 싶은데, 오랜 버릇이라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까, 이상한 사례들은 인구수만큼 커다란 스펙트럼 어딘가에 분포한, 종종 이상한 내가 보이는 사례들과 별개의 것이 아닌 것들이다. 우리 모두는 뇌가 펼쳐낸 하나의 우주 어딘가에서 모두 이상하게 살아가고 있다.

 

정신의학은 전통적으로 양자택일식 접근법을 취해왔다. (...) 그러나 어떤 유형의 행동이든 인간 성향의 범위 안에 속하며 (...) 중간 영역에 머무르는 사람 중에서도 비정상적인 경향은 있으며 우리도 가끔 이러한 경향을 보인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경험하지 못한 사례에는 앞으로도 낯설어하고 놀라기도 하겠지만, 그건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회 문화적 차이와 영향 때문일 것이다. 복잡하고 불안하고 불완전한 뇌가 만들어내는 조합은 무궁무진하니까.

 

다 알 수 없으니, 이런저런 방식으로 조금 더 이해해보려 애쓰는 것도 조금은 덜 적대적인 세상을 만드는 편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내 뇌가 언제까지 이 정도라도 기능할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한 뒤 보이는 모든 풍경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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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잔혹사 - 약탈, 살인, 고문으로 얼룩진 과학과 의학의 역사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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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이란 좋은 것일까요. 저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애국이던 시절에 태어나고 자란 과학 세대로서, 무한 긍정만이 존재하는 과학적 사고방식과 태도로 구성된 세계관으로 대부분을 살았습니다.

 

현재까지 인류가 획득한 지식을 착한 외계인이 공짜로 가르쳐줬을 리도 없고, 누군가 깨달음을 통해 많은 비밀을 알아낸 것도 아니니, 당연히 오랜 세월 탐구하고 실험한 세월이 있었겠지요.

 

분야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실패 끝에 드문 성공을 하는 것이 필연적인 학문인만큼, 시행착오가 수없이 많았을 것이고, 와중에는 지나친 태도와 무자비한 시도, 잔인하고 악랄한 일들도 다반사였을 거라 충분히 짐작합니다.

 

다정하고 배려가 뛰어난, 생물학을 전공하던 친구가, 어느 날 기르던 개구리를 세제를 푼 물에 삶아 뼈모형을 만들었다고 보여준 일이 있었습니다. 몇 번 척추를 어떻게 부러뜨리면 즉사가 가능한지도, 개구리 발가락이 몇 개인지도 즐거운 표정으로 알려 주었습니다.

 

나쁜 사람이라서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과학을 한다는 것과 호기심이 인간을 충족시키는 힘 등에 대해 고민이 되었던 추가된 순간이었습니다. 유전자 복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와 부작용을 알아도, 관련 연구자 모두 지원만 된다면 끝없이 연구하고 싶다고 고백하던 학회의 그날 풍경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일반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인권을 짓밟는 과학은 예외 없이 제대로 된 성과를 얻지 못한다. (...) 최악의 경우에는 과학을 하는 데 필요한 문화적, 정치적 자유를 위축시킨다.”

 

그렇게 얻은 지식으로 인류가 건강과 수명을 개선시키고 늘렸다는 점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결과가 행위와 역사를 모두 정당화하는 건 아닙니다.

 

이 책이 단죄적 어조로 쓰인 것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들은 바가 적지 않은, 과학전공자인 제가 읽기에도 방대한 범죄의 역사로 보입니다. 이만한 자료가 기록된 것이 놀랍습니다. 인류가 이렇게 스스로를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이 개선 가능성을 입증한다고도 보입니다.

 

잔혹하고 무섭고 역겨운 내용만이 아니라, 엉뚱하고 어이없어 웃고 마는, 어리석고 안타까운 모습들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과학과 의학의 역사로 쭉 둘러본 인류의 이야기들을 만나서, 우리가 무엇인지를 더 잘 이해할 자료가 늘어나는 충실한 공부가 됩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점이란, 이렇게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펴보고, 우리가 향하는 방향이 어떤지, 도착지에 무엇이 있을지, 점검하고 반성해보는 조심성을 기른다는 점입니다.

 

불행하게도 사회가 점점 더 기술과 과학에 의존함에 따라 이 문제들은 더 악화될 것이다. 흥미진진한 새 과학적 모험은 나쁜 짓을 할 새 기회도 제공할 것이다.”

 

지금은 과학기술이 유일한 동력처럼 미래를 전망하는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숨고르기를 하며 인류가 어떤 역사를 거쳐 현재에 도착했는지, 왜 이런 미래기술에 집중하는지를 연결해서 고민해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주는 시간입니다.

 

세계에 새로운 힘을 도입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완화시킬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료로서도 가이드로서도 역사서로도 이야기책으로도 부족한 점이 없습니다. 분량만큼 든든한 반가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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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변호하는 일 - 무너진 한 사람의 빛나는 순간을 위하여
김예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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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욕망의 도구로 깔아뭉개는 이 문제는 칼로 무 자르듯이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 적어도 우리 주변에 이런 일들이 무수히 벌어지고 있음을 함께 알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는 일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소개할 페이지수를 줄이는 것이었다. 아무리 줄여도 며칠 간 30쪽 이하로는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고민하는 대신 멈추고 매일 다시 읽었다. 밑줄 친 내용 모두가 중요해보였다.

 

그러다 내게 중요한 것들과 저자가 공들여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조금씩 분리되고, 이젠 금방 잊어버리지는 않을 만큼 기억될 내용들도 늘어갔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즐겁게 고민하며 열장의 이미지를 남겼다.

 

김영란 전대법관과 은유 작가의 추천사에 읽기 전부터 몹시 설렜는데, 읽기 시작하고 곧 저자의 이야기들로 심장이 쿵쿵 좀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대환장출생기는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였는데, 표지에서 환하게 웃는 저자의 표정 그대로 저자를 조금도 좌절시키지 못한 듯하고, 오히려 감동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살아가는 삶의 계기와 동력이 되어 준 듯하다.

 

이는 저자가 등록된 자신의 장애를 적극 호소해서 설득과 성취를 했다는 말이 전혀 아니다. 장애가 있던 없건 저자는 반짝이며 웃으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동행했을 것 같다. 다만, 5살 아이를 실명시킨 범죄를 판결하는 그 법정에서의 변론은 실명하여 의안을 한 저자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발언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놀라서 몸을 바짝 웅크리고 모든 문장에서 배우며 법정에 앉은 시민으로 그 발언을 읽고 또 들었다.

 

복잡할뿐더러 엉망이기도 하고, 때론 강렬한 적의와 맞서 사는 일에, 법은 마지막 의지(依支)이자 무기이기도 하지만, 불완전하고 결과의 변동이 클 때도 있다. 그래서 모든 사례가 아슬아슬했다.

 

때론 너무 두려운 사건 내용이라 읽지 말고 넘길까 싶은 생각이 드는 범죄도 있었다. 그럴 땐 읽기를 멈추고 가만 생각해보았다. 그 범죄를 당한 사람, 그 어려운 이야기를 증언한 사람, 그 난장판에서 함께 싸운 사람... 어려운 것, 두려운 건 이들이 다했고, 나는 안전하게 읽기만 하면 되는데... 할 수 있다고.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너져 있는 한 사람이 보입니다.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천천히 함께 걷다보면 느리지만 조금씩 자기를 돌아보는 모습도 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편처럼 활동하는 변호사를 만났다. 나도 모르게 배우고 간직한 편견, 동정, 배척, 거부 등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누구나 그럴 수 있으니, 자책 대신 이 책을 많이들 읽으시면 좋겠다. 그 감정과 생각을 돌아볼 신나는 계기가 되어준다. ‘말에는 힘이 있다는 말을 믿으며 열심히 추천을 말해볼 결심!

 

마지막으로,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면, 부록에서 잘 정리된 내용을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장애인인권법센터> 유튜브를 방문해서 피해자가 꼭 알아야하는 여러 내용을 확인하고 북마크해두는 일도 필요하다.

 

죄를 저지르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그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들어갑니다. (...) 범죄 피해를 당해 막막한 사람 누구에게라도 널리 공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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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B의 은유 - 윤슬빛 소설집 꿈꾸는돌 38
윤슬빛 지음 / 돌베개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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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솔직하다는 청소년 문학의 장점은 물론, 묘사는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고, 인물은 드라마처럼 단편마다 금방 구체화되고, 스토리는 아름답고 애틋하면서도 성장하는 힘이 있어서, 감탄과 속상함을 번갈아 느끼며 읽었다.

 

예외 없이 등장하는 부끄러운 어른들 모습에 낯을 붉히기도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다칠 수밖에 없는 어리고 여린 마음에 마음이 아프다. 현실 같은 7편마다 전형적인 악당이 없이도 살면서 얼마나 상처가 쉽게 나는지를 따끔거리는 기분으로 목격한다.

 

어떤 신호도 없이 훅 선을 넘어 후려치는 어른들의 말에 대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 뜨겁고 차갑고 뾰족하게 날 선 말들이 몸속을 온통 휘젓고 할퀴고 다녔다.

 

엄마가 아주 오랫동안 투명 인간처럼 살았다면, 나는 누굴 보고 웃고 떠들고 사랑한다 말했던 것일까.”

 

그래도 아무도 철저히 고립되지는 않아서, 누군가()가 늘 곁에 있어서, 다행이고 안도하고 고마웠다. 혼자가 아니라고 여럿이라고해서 모두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아니지만, 더 소중한 건 삶의 내용, 방식, 추억, 그리고 나눈 모든 것들.

 

짊어진 게 무거워도 당장 내려놓을 수 없다면 더 씩씩하게 걸어 볼 것. 함께 걷는 사람이 있다면 보폭을 맞춰 같이 걸을 것.”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으면, 남들 걸을 때 넌 날아가면 되지. 땅이 밟고 싶어지면 내 발등 밟고 서.”



 

마음이 저릿해서, 우리 집 십대들이 살아갈 세상이 불안해서, 눈물이 고이다 마르다 했지만, 살아있는 존재라는 건, 성장하는 힘이란 것은 문자로도 빛이 난다. 힘이 느껴진다.

 

단편마다 다루는 주제 - 부모의 성정체성, 나의 성정체성, 일상적이고 흔한 혐오, 한양육자(, , 조손)가정, 편견, 가족이라서 가하는 상처 등 - 는 어른이라도 쉽지 않다. 살아보고 늙어보니 어른이라고 참 별 거 없어서 자책 같은 안타까움이 크다.

 

그렇게 사는 것. 아빠는 나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아빠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아빠의 사랑에는 조건이 너무 많이 붙었다. 절대로 내가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조건들이. 그래서 나는 매번 그 사랑이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실 아득하기만 하고 잘 모르겠다. 그런 악의와 공격성은 어디서 비롯되고 유지되는지를. 책도 읽고 글도 읽었는데 그래도 망연하다. 한 존재가 제 모습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에 무슨 욕할 거리가 있는지. 무슨 근거로 권리로 자격으로 이러저러하게 살아야 맞다고 할 수 있는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 인해 각자 결이 다른 고통을 안고 자라 온 시간을 헤아리자 깊숙이 속이 쓰렸다.”



 

대단한 건 못하니, 누가 나로 살고 싶다고 하면 힘껏 응원할 것이다. 플랜B가 잘 안 되었단 소식을 듣게 되면, 다음, 그다음 플랜들을 계속 응원할 것이다. 할 얘기가 있다고 하면 열심히 들을 것이다. 걱정이 된다고 사랑해서 그렇다고 무례하게 상처를 내는 일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살 것이다.

 

, 비유지. 직유, 은유 할 때 그 은유. 서로 다른 AB 사이에서 어떻게든 공통점을 발견해 내려는 마음. 되게 간절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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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내게 말을 걸면
신호철 지음 / 지식과감성#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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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반기지 않는다, 는 말을 너무 자주해서 그게 미안한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목련이 피어나는 짧은 계절엔 설렌다. 잎이 없는 꽃을 올린 가지들의 서늘한 체온이 좋다. 올 해엔 병에 걸린 듯 졸고 자느라고, 실사 목련보다 목련 사진을 더 많이 보았다. 봄을 찬미하는 시를 읽고 더 찾아 읽는다. 그러다보면 나도 봄을 찬미하는 법을 배우게 될지 모르니.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어느새 4월이었고, 비가 자주 왔다. 어제도 오늘도 비가 왔다. 4월엔 내가 좋아하는 라일락이 피니까, 봄비가 주는 느낌이 좋으면서도 꽃이 아깝다. 산책길 라일락은 비에 젖어서도 어찌나 향기롭던지. 몹시 설레며 덕분에 행복했다. 비와 꽃향기가 슬픈 꿈같아서 친구의 안부를 물었다.

 

3월에도 4월에도 여름을 미리 만난 듯한 날이 있었고, 손발이 차가워지는 일교차도 맛보았다. 아직은 남아 있는 계절이라지만, 절기는 의미를 많이 잃었다. 도둑맞은 계절이라기엔, 인간 스스로 저지른 짓들이 너무 많다. 자신을 지성적인 존재라고 여기면서도 생각 없이 하는 수많은 것들. 알람보다 10, 20분 일찍 일어나 여명을 보는 하루는 종종 남은 시간의 가늠자 같다.

 

내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 여기저기의 통증과 흉터라면 여전히 운이 좋은 편이다. 시 속에 등장한 맹인을 나는 한동안, 아니 아주 오래 보지 못했다. 다들 어디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420일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에도, 장애인들은 구속당했다. 누구누구는 이동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회, K-국격.

 

가을에 지는 잎들을 보면 속이 후련하다. 마치 할 일 다 하고 쉬러 가는 모습이랄까. 무거운건 마지막 하나까지 다 벗어버리고 개운하게 가볍게 존재하기만 하면 평온의 시간. 봄에 지는 꽃도 마찬가지겠지만, 낙화는 늘 조금 서럽다. 개화한 모습 그대로 떨어져 밟히는 장면이 덧없다. 봄비가 오고 난 다음의 축축함은 더 그렇다. 말릴 방법은 전혀 없지만. 누구의 삶처럼 꽃도 그렇게.

 

기억하지 못하는 건 누구에게나 있다. 잘못 기록되었거나 잘못 출력되는 기억들도 누구에게나 있다. 섬망과 치매와 파킨슨이라는 명명을 가진 것들만 어딘가에 갇힌 기억은 아닌 것 같다. 그건 약이라도 있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나지 않는 빈 공간이 숭숭 많아서, 걷다 한참을 앉아 망연해했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할 것들, 기억할 것들은 많아서, 4월엔 더 많아서.

 

시집 한 권으로 모든 계절을 만나고, 비슷한 삶도 만나고. 이제 산책을 나갈 시간이다. 흐린 일요일 오후의 산책은 대개 고적해서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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