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 오아시스 도시의 숙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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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리즈와 다르지 않게 이번 중국편도 섭할 정도로 잘 읽힌다.


그래서 잠시 빈둥거릴 시간이 날 때마다 눈에 띄게 둔 덮은 책을 다시 여기 저기 들춰 보곤한다.


문장도 내용도 가볍지 않으면서도 읽을 때마다 이렇듯 흡인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부럽고도 대단하다.


그것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어느 편을 읽어도 대동소이하다.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다시 보면, 사진을 오래 들여다 보는 여유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읽을 때와는 다르게 아쉬운 점도 커져간다.


너무나 인상적인 막고굴 하나만 해도 몇권 분량의 내용이 나올텐데 한정된 시공간에 몇개의 석굴을 답사하고 한권에 다 담으려니 더 알고 싶은 그 지점에서 억지로 종결이 되어 버린다.


유홍준 선생님 아시는 것 다 이야기하시려면 백과사전이 백권쯤 되어야 할 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다.


함께 답사여행에 참가할 기회를 가진 분들이 모두 입을 모아 하는 답사후기가 선생님의 입담과 즐거운 이야기에 대한 칭찬이 대부분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때 나의 답사는 이보다 더 생생할까...


느리지만 시야가 조금은 더 넓게 넓게 확대되는 공간감도 기쁘다.


다음 출간되는 3권은 어떤 내용일지 매일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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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는 노래 창비 노랫말 그림책
유희열 지음, 천유주 그림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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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5월 가정의 달, '어린이날'은 이미 이번 주말부터 시작되었다. 그 주말 약속과 일정과 기대를 조율하느라 실은 이번 주 내내 전화도 마음도 기분도 분주했다. 그러고 나면 숨 쉴 틈 없이 '어버이날', '스승의 날', '생일' 등이 잇달아 온다. 이런 캘린더주의에 맞추는 삶이 끔찍하기 하지만, 아이들과 노인들이 있는 가정에서 섭섭한 분위기 없이 공감하고 이벤트 없는 평안한 날을 보내는 것은 신급 스킬이다.


그렇다면, 이왕 치러야 하는 것, 선물이라도 '좀 덜 쓸모없고,' '좀 덜 상업적이고,' '좀 더 마음이 담기고,' '좀 덜 시간과 비용이 아까운' 품목이 없나 하는 마음의 타협을 치러야 한다. 그래서 '매년' 인기는 없지만, 아름다운 책, 공감할 수 있는 공연, 관광지가 아닌 느긋한 여행 등을 제안하곤 하는데, 이번엔 9년 전 눈부신 봄,5월에 태어난 막내 꼬맹이의 지원을 기대하며 이 책을 골랐다. 막상, 이젠 시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지셔서 큰글자 책만 잠깐씩 볼 수 있는 부모님이 더 좋아하실 지도.

 

꽃보다 아름다운 그림이 가득하고 따뜻한 마음도 한 가득 담겼고, [딸에게 보내는 노래]라는 노래도 있는, 이 책은 화환보다는 적어도 좋은 선물일 것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처음 살고 있는 그대들에게 바칩니다(유희열)

아이 덕분에 새로운 세상에 초대받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천유주)

 

예전, 꽤 오랫동안,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란 노래가 불릴 때면, 좋아하며 박수치고 따라 부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매번, "뻥치시네, 꽃이 더 아름답지!"라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보석들, 세상에 사람보다 아름다운 것 천지였다.


그런데...

꼬맹이들이 태어나고, 처음 눈을 마주치고, 그 조그맣지만 완벽한 모습을 보고, 나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워~" 신봉자가 되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들이 있구나~ 개안을 한 것은 물론, 늘 부러워하였지만 불가능했던 "사랑에 빠지는 일"도 겪었다. 출근길, 횡단보도 앞, 승강기 안, 침대 속, 어디서든 꼬맹이 모습이 떠오르고, 뭐라도 나쁜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심장이 터질 듯 뛰기로 했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지 못한 자책이 무겁게 밀려들고, 그 모습이 떠오르면 언제든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게 되었다그야말로, 고단함도 괴로움도 물리치는 실패 없는 막강 엔돌핀이 매일 새롭게 업데이트 되는 일상이 생긴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생각하면 누군들 세상에 새로 찾아온 '이 작은 생명'에게 진심을 담아 사랑과 축복을 전해 주고 싶지 않을까. 한 장면 한 장면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그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추억이 된다.

 

천유주님은 이 책에 빛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간들을 차곡차곡 그려 담아 주었다.

"엄마의 눈부신 젊은 날은 너란 꽃을 피게 했단다 너란 꿈을 피게 됐단다"

 

세상 힘든 일이 육아지만, 세상 제일인 '모든 순간들'도 그 시간에 있다고 믿는다. 울었던 기억만 말고 행복한 기억들이 더 오래 남길, 새로 태어난 생명, 나이 드신 부모님, 엄마, 아빠, 이모, 고모, 오빠, 언니, 모든 이들에게 축하와 감사와, 따뜻한 기억과, 사랑과 힘이 되는 노래로 만나게 되길 바란다서로서로 좀 더 알아주고 위로해주고 위안이 되어 주는 그런 시간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음의 장면이 생각났다.

그가 있어 '눈이 부시게' 행복한 날들이 늘어난 것은 확실하다.

감사합니다. 당신.

 

 

삶은 때로는 불행했고 때로는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백상예술대상. 김혜자 

...............................................​

 

* 창비 노랫말 그림책 시리즈: 한국 대중가요를 그림책을 펴내는 시리즈. 

* [딸에게 보내는 노래](2007년 발표, 토이 6[Thank you]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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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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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에 비해 너무나 빨리, 기대에 비해 너무나 빨리 읽어버린 책.


여름의 무더위가 지나도록 그 상큼함이 그치지 않는 추리전집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고 아쉽다.


평온하게 이어지는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주적인 힘들이 신비롭게 균형을 맞춘 기적인지는, 그 일상이 깨어져봐야 비로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건은 극적인 사건일 필요도 없다. 가장 흔한 예로 가족 중 누가 아프다면 단박에 일상이 산산조각날 수도 있다.


평범하길 원했지만 평범할 수 없어서 평범한 척이라고 하며 살아야했던 이들의, 누군가의, 우리고 우리의 살아가는 순간들.


레몬, 레몬, 레몬.


여름에 레몬사탕을 입에 물고 무더위 짜증을 부리는 대신 만약 비교적 평온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면, 제대로 그 순간을 감사하며 다시 읽을 것이다.


레몬, 레몬, 레몬.


입 안이 아니라 머릿속에 레몬의 맛과 향이 퍼지는 듯하다.

가제본에 이은 단행본 뒷 부분 마지막 인용을 올린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식당 주방에서 일한다는 그들 남매의 엄마는 난쟁이였다. 선우를 좀 더 가혹하게 눌러놓은 것처럼 작았다. 그 엄마를 보자 이상하게도 내가 앞으로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졌다. 내가 살아갈 방향도 정해졌다. 일단 엄마에게서 독립할 것이다. 엄마는 어떤 일에도 연루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다시 엄마에게 돌아갈 것이다. 145


결국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이에요, 라고 다언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 저쪽, 나머지는 이쪽, 이런 식으로. 위대하든 초라하든, 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그 사람과 나머지 전 인류 사이에 무섭도록 선을 긋는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라고, 탄생이 나 좀 끼워달라는 식의 본의 아닌 비굴한 합류라면 죽음은 너희들이 나가라는 위력적인 배제라고, 그래서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도록 단절시키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언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179


죽음은 우리를 잡동사니 허섭스레기로 만들어요. 순식간에 나머지 존재로 만들어버려요. 179


그해에 일어난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어쩌면 다언의 삶이 끝난 후에도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끔찍한 무엇을 멈출 수 없다는 것, 그게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무게일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190


소리는 이렇게 귀로 듣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소리는 소리일 뿐이다. 194


나는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198


찰나에 불과한 그 순간순간들이

삶의 의미일 수는 없을까. 199

내용이 결말이 레몬의 의미가 궁금하시다면 책을 읽으셔야 한다.

어찌나 앙증맞고 재미난 지 누구에게라도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무더위가 몰려 오는 여름에 [레몬] 한 권 맛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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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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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트의 작품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진정한 발견의 기쁨을 누릴 기회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르몽드

 

제발트를 이야기할 때 '위대한', '경이로운', '전 세계적인' 같은 수식어사 붙는다. 미리 밝히자면, 나는 소위 '제발디언(Sebaldian)'은 아니다. [이민자들]을 열 번은 열다 덮다 했지만 내용이 마음에 닿지 않는다거나 번역품질로 난독이 온 것이 아니라 집중력의 문제였으므로 완독을 했는데, 감동보다 묵직한 무게감이 너무 커서 다시 읽어볼 엄두가 안 났다.

 

[토성의 고리]는 배경, 소재, 제목 모두가 와 닿았지만, 첫 독서의 영향이 가시지 않아 미뤄두고 있다가, 본문 전체를 다시 다듬고 표현도 오류도 바로잡아 새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동했다. 설마 더 난해하게 다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도 감동의 대열에 합류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대와 함께.

 

제발트는 현재 세계환경수도라는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가르쳤다. 다시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하고 영국에서 교수로 임용되어 영국문학번역센터를 창립했다. 성취도는 다르지만, 독일과 영국을 번갈아 다니며 공부를 하고 여행을 한다는 점에서, (한 때 그리 살았던 나도) 많은 공감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토성의 고리] 독일어판 부제는 '영국 순례'이며, 그 중에서도 영국 동남부 지방이야기이다. 우리는 그냥 '영국', '영국인'이라고 하지만, 영국과 영국인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U(nited)K(ingdom),England, (Great)Britain, English 등으로 나뉘는 것을 이해하려면, 이 지역 영국 역사와 지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학자의 문학고고학적 여행기라니, 여타의 여행기와는 다른 신기하고 독창적인 문학임에는 틀림없다. 책을 읽어본 이들은 경이와 함께 깨달을 수밖에 없겠지만, 마치 정밀묘사처럼 풀어나가는 작가의 섬세하고 순도 높은 표현은 독보적이다. 장면은 가장 정확히 표현한 사진에 초일류급 해석이 달린 느낌이다.

 

어쨌든 그 여행 뒤로 한동안 나는 멋진 자유로움의 기억뿐만 아니라, 그 고적한 지방에서도 모습을 드러내던, 오랜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파괴의 흔적들을 보며 느낀 먹먹한 전율의 기억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10

 

, [토성의 고리]는 여행기가 아니라 '소설', 그것도 '인류의 역사소설'이라 극찬을 받는 작품이며, 먼 거리를 이동하는 '정신적 여행'을 기록한 최고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며, 쓸쓸하고 묵직한 비가로서 문화, 문명, 자연, 인간사를 넘나드는 깊디깊은 이성적 성찰을 다룬 작품이다.

 

(...) 현실 자본주의에 모든 것을 걸었던 대처 남작의 집권기간 동안 점점 부풀어 올랐던 이 희망은 결국 투기광풍으로 변질되더니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손실은 처음에는 지하의 화재처럼, 이어서는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고, 보트 조선소와 공장이 하나둘씩 문을 닫았으며, 결국 로스토프트가 내세울 것이라고는 영국 지도의 가장 동쪽을 표시하는 지점이라는 사실만 남게 되었다. 55

 

매년 수천 톤의 수은, 카드뮴, 납과 산더미처럼 많은 비료와 농약이 강을 거쳐 독일의 바다로 흘러든다. 대부분의 중금속과 여타의 독성 물질이 도거뱅크(영국 동부의 해역의 얕은 수역에 침전되는데, 여기서 사는 물고기의 3분의 1은 이미 이상발육과 기형을 안고 태어난다. 면적이 수십 제곱킬로미터에 이르고 깊이가 9미터에 달하는 해안 가까이에 독성 해초 무리가 자주 형성되는데, 바다 동물들은 여기서 떼로 고통스런 죽음을 맞는다.(...) 번식과 관련된 의식은 이제 기껏해야 죽음의 무도에 지나지 않는다. 68-69

 

살랑 팔랑 유쾌 상쾌 술술 읽히는 작품은 분명 아니다. 내 경우에는 익숙하다고 예단한 부분에서 난데없이 내가 아는 바의 얕은 깊이, 바닥을 들춰내는 다소 버거운 작품이기도 했다.

 

이 재현은 시선의 위조에 기초한다. 살아남은 자들인 우리는 모든 광경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모든 것을 동시에 보면서도 실제로 현장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150-151

 

폐허에 가까이 갈수록 망자들의 신비로운 섬에 와 있다는 생각은 점점 사라졌고, 그 대신 미래의 어떤 대재앙으로 파멸한 우리 자신의 문명의 잔해를 보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사회의 본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가 남겨놓은 금속과 기계의 쓰레기더미 사이를 돌아다니는 미래의 이방인처럼 나 또한 도대체 어떤 존재들이 여기서 살고 일했는지 () 이해할 수 없었다. 278

 

재앙과 거대한 폭력으로 파괴되고 남은 잔해와 유적과 폐허에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독자라면, 꼿꼿이 서서 마주하고 성찰할 수 있는 독자라면, 함께 하기에 이만한 여행기는 없을 것이다. 또한 어느 물질문명은 이렇게 사라져갔지만, 어떤 독자의 정신문명은 창조되고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의 모든 작업은 결국 생각에 기초할 뿐이고, 생각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 바뀌는 법이니, 이렇게 바뀐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이미 완성했다고 간주한 것들을 다시 부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290

 

물론 이는 독자가 역사를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가능하면 학살과 파괴의 고통을 겪고 희생된 희생자들의 입장과 관점에서 바라봐주면 좋겠다. 반복적인 역사적 잔혹함은 실제로는 보상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허무하게 잊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목숨이 붙어 있던 아이들 중 많은 아이는 배가 고픈 나머지 목에 걸고 있던, 개인정보가 적힌 마분지 판을 씹어 먹었으니, 결국 극도의 절망 속에서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 그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기억의 그림자들이 여전히 계속 배회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20-121

 

때때로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사는 데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고,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259

 

체력과 지력과 기력이 충분하여 이 책을 완독하게 된다면, [토성의 고리]라는 제목에 대한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럴 때 이 책의 서두를 다시 펼치고 제발트가 인용한 부분을 찾아보거나, 아니면 서양에서 '토성'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찾아보는 것도 즐거운 부록이 될 것이다.

 

멈출 줄 모르고 머릿속을 맴도는 끝없는 생각, 잘못된 실을 붙잡았다는, 꿈속까지 파고 드는 느낌이 사람을 어떤 막다른 골목과 낭떠러지로 몰아가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331

 

이토록 구체적이고 사실적이고 섬세한 묘사에 공을 들인 작품은 흔하지 않다. 연상능력이 뛰어난 독자는 뇌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지도. 손바닥보다 좀 더 큰 이 책이 담고 있는 순도와 밀도가 높은 문장들이 얼마나 충실한 지, 절대 대충 읽을 수가 없다. 집중력이 흩어지면 바로 난독 증상이 따라온다. 함께 책을 읽어 내는 모든 동료 독자들에게 문득 문득 친근함을 느낄 정도다.

 

쉽게 권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함께 읽은 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단언하건대 이토록 정성스럽고 충실하게 써 내려간 독창적인

인류역사자연사정신문학여행서는 다시없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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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명사산 명불허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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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3천년의 역사, 한반도 약 40배의 면적, 남북한 인구의 약 20배의 인구, 중국(문화유산) 답사기이다. 과문한 탓도 있지만 유홍준 선생인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 아닐까 한다. 과연 몇 권으로 나올 것인지가 기대되고, 개인적 소망은 앞으로 한 십년 쭉 써주셨음 좋겠다. 대중교양서로 이런 수준의 출판물이 나온다는 것은 대단한 선물이자 축복이다.

첫 번째 대상은 역시 문화유산이 집중되어 있는 역대 왕조의 수도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는 무려 8대 고도에 이른다.

전공이 미술사인 작가는 당연히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있는 미술사적 명소를 즐겨 찾아다녔다고 하는데, 실제 감동은 사상사, 문학사의 고향에서 받은 것이 더 컸다고 한다. 그 감동을 제대로 나누려면 아무래도 "아는 만큼 보인다"의 명제에 걸맞은 '아는 만큼'이 필요할 것이어서, 조금 위축이 되기도 한다.

일송정을 비롯한 독립운동유적지가 많은 연변조선족자치주와 길림성은 부모님과 직접 관련이 있어서 개인적인 기대가 더 높다. 이에 더해,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인 올 해는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 가흥, 항주, 중경과 서안 종남산의 광복군 제 2지대 등 독립운동현장에 대한 내용도 포함된다.

알려진 것만 해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 간 끊임없이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더욱 풍요롭게 이룩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질 것이란 기대도 높다. 근거 없이 주눅이 들거나 비난하는 방식을 놓고 규모의 차이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중국 문화유산을 깊이 이해할수록 당연히 우리 문화의 가치에 대한 감상 또한 새롭게 깊어질 것이다.

'국사' 뚝 떼어내는 방식 말고, 우리도 동아시아 문화권의 일원이라는 당연한 지위를 재매김하며 폭넓게 역사적 연관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저자 역시 중국 답사기를 쓴 소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의 중국행은 언제나 즐거운 여행의 놀이터이자 중국 역사와 문화의 학습장이면서 동시에 우리 문화의 특질을 동아시아의 지평에서 재인식하는 현장이었으며, 나아가서 오늘날 국제사회 속에서 우리의 좌표를 생각게 하는 세계사의 무대였다.

이를 위해 저자는 최소한의 중국 역사의 흐름을 아는 것이 좋고, 그 최소한의 최소한은 시대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중국 역대 왕조의 순서라고 한다. 조선족 중학생들이 노래로 만들어 외우는 것이라는데 가능하다면 함께 외워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중국편 1은 돈황과 하서회랑, 명사산 명불허전이다. 저자에게는 꿈에 그리던 돈황/실크로드 답사였고, 그냥 명불허전이 아니라 감동의 울림이 진하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그런 장대한 답사를 꿈꿔본 적도, 꿈꿀 만큼 지식이 있거나 호기심이 있지도 않았다. 다만, 작가가 받은 감동과 체함 내용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견문과 정보들이 이 책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을 것이고, 언제라도 그것들이 나의 길라잡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남은 날 끝까지 그런 기회가 없더라도 최고의 간접경험이 될 것을 믿는다.

다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가 하나같이 그러했듯이.

다음의 내용은 잘못 알려진 상식이나, 알면 재미있을 듯한 상식 관련 내용을 눈에 띄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유홍준 선생의 입담은 예전부터 유명했으나, 이런 소소한 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답사기를 자칫 고루하게 만들지 않은, 연령대에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큰 매력이자 장점으로 보인다.

달리는 차창 밖의 풍광을 바라보면서 역사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은 답사의 즐거움이자 작지 않은 배움의 기쁨이다. 지나가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게 되면 그 순간 자연 풍광이 역사의 현장, 전설적인 이야기의 고장으로 바뀐다(...). 돈황 답사를 하면서 내가 국내답사와 다르게 느낀 점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상상한다'는 것이었다. 35-36

풍수에서 산의 경우는 남쪽이 양이고, 강의 경우는 북쪽이 양이다. 그래서 함양 땅은 산과 강의 양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모두 함, 볕 양, 함양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서울의 강북을 '한양'이라 부른 것도 마찬가지다). 37

진나라의 수도 함양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진시황의 아방궁이다. 아방궁이 하도 유명해서 사람들은 진사황이 짓고 살던 호화로운 황궁의 이름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아방궁은... 궁궐의 이름도 아니었다... 아방의 아는 가깝다는 뜻이고 방은 곁 방 자와 같은 뜻으로 합쳐서 근방이라는 뜻이다. 즉 함양궁 근방에 있어서 아방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한 '지붕 낮은 집'인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집을 아방궁이라고 헐뜯은 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37-39

중국의 모든 유적지에는 반드시 명시가 따라붙는 한시의 전통이 이어 문화유산의 가치와 의의가 더욱 드러난다. 한시는 중국이 세계에 대놓고 자랑할 만한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두목지가 불과 20대에 지은 [아방궁부]는 아방궁의 호화로움을 표사한 것도 절창이지만 마지막에 세상을 향해 던진 대목은 가히 명구로 삼을 만하다.40

(상당한 분량이라 여기서 올리진 못하지만, 절창이라는 점에 동의하며, 많은 분들이 읽어 볼 수 있길 바란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족들이 세운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등 역대 왕조들은 한사군과 한구군의 울타리 안쪽을 강역으로 삼았다. 오늘날 중국의 영토가 그때보다 3배나 더 넓어진 것은 아주 예외적이고 최근 일이다. 이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한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변강민족과 동질성을 내세워 티베트를 흡수하고 위구르 지역에 신강성을 설치한 것을 중화민국이 그대로 계승한 결과이다. 오늘날 중국이 소수민족 문제로 골치 아파하는 것은 이들을 자율적인 삶에 맡기지 않고 직접 통치하면서 생긴 문제이다. 50

(기회가 있다면 티베트의 역사와 독립운동, 티베트 승려들의 죽음을 담보로 한 저항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답사객들과 중국을 답사하다보면 중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 정도에 따라 자연풍광에서 인문풍광으로 옮겨가는 강도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경험적으로 말해서 [연의 삼국지]를 읽은 사람과 아닌 사람은 차이가 많다(...). 그중 최고로 나는 [비데오 삼국지]를 꼽는다. 56-57

(...)사실 중국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위대한 무형유산이 한시라면 유향유산은 도자기와 청동기다(...). 그리고 주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 문화의 뿌리이고 원천이다. 공자님도 정치의 이상으로 생각한 것이 주나라였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제기의 원형은 모두 주나라 청동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내가 서울 답사기에서 예찬한 종묘의 제기도 따지고 보면 주나라 제기의 조선적인 세련미었다(...). 경복궁 건설의 모델로 삼은 [고공기]는 [주례] 마지막 편에 나오는 것이다. 63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오히려 인생의 자산으로 삼은 이들을 이야기할 때면 꼭 사마천을 빼지 않고 말해왔다.

"주나라 문왕은 구금 중에 [주역]의 64괘를 풀이하였고,

공자는 진과 채 사이에서 액을 당하고 [춘추]를 펴냈고,

굴원은 방축되고 [이소]를 지었고,

손빈은 다리가 잘리고 [손자병법]을 썼고,

쿠마라지바는 18년간의 유폐 생활 중 한문을 배워 불경을 번역했고,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 [사기]를 펴냈다." 85-86

평생 유배객 신세를 면치 못했던 소동파는 [세아희작, 아이를 씻기며 장난삼아 짓다]에서 이렇게 읊었다.

사람들은 자식을 키우며 총명하기를 바라지만

나는 그놈의 총명함 때문에 일생을 그르쳤다네.

이에 원하노니 우리 아이는 어리석고 미련하여

아무 탈 없이 무난하게 정승판서(공경) 되거라. 89

(...) 저녁 후 한잔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이백의 술 권하는 시를 하나 읊겠다고 했다(...), [월하독작,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 4수 중 두 번째 노래였다.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이 없었을 것이고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응당 주천이 없었겠지.

천지가 술을 사랑했으니, 술 사랑하는 것 하늘에 부끄러울 것 없네.

듣건대 청주는 성인에 비길 만하고, 탁주는 현자와 같다 하니

성현들도 이미 마셨거늘, 굳이 신선이 되길 바라겠는가.93-94

중국술을 고고학적으로 말하자면 갑골문자와 청동기에도 술 주 자가 새겨져 있으니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을 알 수 있는데, 1983년에 역시 우리가 오늘 지나온 섬서성 보계시 미현(양가촌)에서 신석기시대 앙소문화의 술 전용 도기가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대략 6천 년 전부터 이미 술을 빚었다는 얘기다. 95

잔도는 2천여 년전, 진한시대에 전란을 치르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삼국이 쟁패를 다투는 내전으로 전국이 싸움터로 변했던 [삼국지]의 전투현장에서 정정에 달하여, 검각도에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잔도가 가설되었다. 잔인한 전쟁이 낳은 유산인 셈인데, 이것이 나중엔 험준한 산길을 닦는 데 이용되어 전국의 유명한 명산엔 다 잔도가 가설되어 있다. 108-109

(...)바야흐로 우리는 잔도를 따라 본격적으로 답사에 들어가게 되는데 221개의 석굴의 7천 8백 불상 중 과연 어느 굴의 어느 불상을 눈여겨볼 것인가(...). 무엇을 어쩌자고 하나의 절벽에 천년을 두고 그렇게 많은 석굴을 조영했던 것이며, 시대마다 불상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고 가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상이 그 불상으로 보여 나중에 머릿속에 남는 것이라곤 '불상 한번 많구나!'라는 인상뿐이다. 이럴 때는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할 수 있다. 110-112

"맥적산석굴을 보았으면 중국엔 참으로 위대한 석굴문화가 있었구나라고 감동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지 왜 우리나라에 이런 전통이 없냐고 기가 죽어야 합니까. 이는 자기 문화에 대한 자신감 내지는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문화란 그 나라의 자연환경에 맞추어 구현되는 법입니다. 불교는 인류가 낳은 위대한 종교로 이를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임으로써 동아시아의 민족들은 고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였고 신앙의 형태는 그 나라 그 시대, 그리고 자연환경에 맞게 만들어져갔습니다. 138-139

이제 우리는 남의 문화를 볼 때 그 자체의 생성과 발전과정을 보면서 세계사적 견문을 넓혀야지 그것이 우리나라에 있나 없나를 생각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나는 꼭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올바른 생각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지만 공연히 민족적 자괴심을 갖는 것은 진실로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중국의 석굴사원을 찾아가고, 일본의 사찰정원을 감상하고, 한국의 산사를 답사하는 보편적 시각을 가져도 좋을 만큼 우리는 문화적으로 성숙해 있다고 믿고 있고, 또 그만한 국제적 위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41

중국 답사기의 1권은 돈황 답사'까지'의 내용이며, (유홍준 교수가 첫 답사 시의 아쉬운 점을 보완하기 위해 2차로 떠난 답사) 2권에서 '돈황'답사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독자의 흥미를 돕기 위해 조금 소개하자면, 2권에서는 돈황 약탈자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드라마스러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특히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발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으며, 먼 과거가 아니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는 문화재들이 어떤 약탈 과정을 거쳐 도착했는지 등, 현재의 우리와 관련이 깊은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꼭 2권까지 많은 분들이 읽으시길 바란다.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늘 기대 이상일거란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의 다음 편을, 중국편 3권을 애타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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