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서 수도회라고 불릴 만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은둔자들로 대표되던 초기 수도적 삶은 이제 함께 모여 살면서 서로를 돌보고(또, 서로를 감시/경계하는 측면도 있었으리라) 수도원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등장한 것이 베네딕투스가 정리한 것으로 알려진 수도규칙. 기도와 노동으로 특징 지워지는 이 규칙서는 중세 기간(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수도회들의 표준규칙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점이 나타났다. 애초에 세속화를 경계하면서 시작된 수도회였지만, 그렇게 모인 수도원이 각종 기부 등으로 너무 부유해져버린 것이다. 클뤼니 수도원이니 시토회니 하는 수도회들도 모두 처음에는 청빈과 경건을 강조했으나, 그 유명세가 높아지면서 결국 애초의 이상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온 것이 탁발 수도회였다. 말 그대로 구걸을 통해, 즉 다른 사람의 호의에 의존해 생존을 유지하면서 기독교의 이상을 설파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가장 유명한 건 역시 프란체스코 수도회. 이들은 앞선 수도회들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측면이 강했던 데 반해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수도회적 이상을 실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이 강력하게 주장했던 청빈을 위한 구걸은, 부유한 사람들의 기부에 의지하는 평안한 삶으로 변질되었다. 이미 프란체스코 생전부터 청빈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두고 엄격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싸웠고, 결국 현실적인 문제를 인정한 온건파가 승리한다. 다시 한 번 초기의 이상이 희미해진 것.
이런 일은 수도회 역사에서 쉴 새 없이 반복된다. 혹자는 ‘그것 봐라’, ‘처음부터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와 같은 논조로 비난을 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좀 다른 관점을 보인다. 처음부터 수도회 운동은 제도 교회의 한계로 인한 문제에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본다면, 수도원의 역할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각 시대의 교회가 놓친 부분을 일깨웠다면 수도회 운동은 성과를 거둔 것이지, “급진성에 지속 가능성의 짐까지 지우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다. 일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