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 게임 믿음의 글들 383
랍비 데이비드 포먼 지음, 김구원 옮김 / 홍성사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 저자 이름에 주목하자. 데이비드 포먼. 여기까지는 그냥 미국인 이름이구나 싶지만, 그 앞에 붙어있는 호칭이 흥미롭다. ‘랍비’, 유대인 교사를 가리키는 칭호이다. 출판사에 알아보니 저자는 유대인이고, 정식 랍비라고 한다. 이 책은 랍비가 유대교의 관점으로 출애굽 이야기를 풀어낸 내용이다. 유대교와는 적어도 몇 단계에 걸쳐 멀어져 있는 한국의 개신교인으로서 일단 기획 자체가 흥미롭다.


사실 출애굽 이야기는 구약 성경 전체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주제다. 이건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출애굽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예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독교적 해석 말고, 이 책은 유대교에서 이 주제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꽤 인상적이다.


물론 이런 접근은 단순히 저자의 독창적인 발상은 아니고, 유대교 성현들로 불리는 앞선 세대 랍비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본문의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오경 내 다른 본문들과의 연결성까지 이어가는 작업에는, 물론 저자의 글솜씨도 한 몫을 했을 거고.





우선 책에서 저자는 기존에 접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질문을 출애굽 본문에 던진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출애굽 과정에서 나타난 열 가지 재앙들(이집트 측에서 보면)과 관련해서 우리는 흔히 재앙의 종류와 강도에 대해 집중하곤 한다. 그런데 저자는 파라오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강도가 아니라 정확도였다고 지적한다. 정확한 시점에 정확한 강도로 재앙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에 관한 논의라는 것.


또, 출애굽 본문에서 가장 곤란한 부분 중 하나인, “하나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본문에 대해서도 저자는 흥미로운 해석을 제안한다. 히브리어로 이 구절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단어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어떤 이의 마음에 “용기를 주었다”이고, 다른 하나는 “완고하게 하다”이다. 저자는 이 중 하나님은 파라오가 두려움에 (유일신에 대한 아무런 생각의 변화도 없이) 그저 뒷걸음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마음에 용기를 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출애굽 본문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하지만 그냥 쉽게 지나치곤 하는) 장자됨의 개념에 대한 강조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에 따르면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로 확인되는 사건이었다. 이는 하나님과 하나의 큰 가족이 되는 의미도 내포하는데, 흥미롭게도 여기서 저자(와 유대교 성현들)는 이 이야기를 요셉의 이야기와 연결시킨다.(전형적인 유대교적 접근 방식이다)





우리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들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은 묘한 재미가 있다. 특히 그 대상이 성경일 경우 이건 단순히 재미만이 아니라 큰 유익을 주기도 한다. 성경을 “새롭게” 읽는 것만큼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일도 몇 없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유대교의 관점으로 출애굽 사건을 능숙하게 읽어내는 이 책은 꽤 도움이 될 것 같다.


다만 저자 자신이 유대교 랍비이기에, 이 책의 접근에서 기독교인들이 원하는 그런 내용으로의 전환은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 사건이 십자가와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하지만 뭐 이런 부분이 크게 문제가 되는 내용은 아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활동하는 저자답게, 초강경파 유대교인들(유대교 내에도 수많은 분파들이 존재한다)과 같은 식의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인 정서는 보이지 않으니까. 사실 개인적으로는 극단적인 현대주의자들보다 이쪽이 기독교인들에게 좀 더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저자의 주장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는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로 소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 하는 독자의 역량에 달렸다. 책 후반 저자는 요셉의 이야기를 출애굽의 프로토타입으로, 요셉의 채색옷에서 장자권의 전달을 읽어내는데, 흥미로운 주장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받아들일 지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데 뭐 그건 이 책만 그런 건 아니니까.


간만에 홍성사에서 흥미로운 책을 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니스트 티의 기적 - 코카콜라가 감동한
세스 골드먼 & 배리 네일버프 지음, 이유영 옮김, 최성윤 그림 / 부키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의 한 음료회사 창업기를 그래픽 노블로 그려낸 책이다. “어니스트 티”는 공동 창업자들의 문제의식에서 시작된다. 너무 달지 않고, 진짜 차 맛이 나는 음료는 어디 없을까 하는. 그래서 예일대 경영학 교수인 배리 네일버프와 그 제자였던 세스 골드먼이 의기투합해 만든 회사가 바로 어니스트 티였다.


책은 스타트업을 시작하면서부터 거쳐 온 온갖 사소한 단계들부터 그려진다. 단순히 설탕을 적게 넣은 차를 만드는 게 끝이 아니다. 그걸 팔려면, 우선 담아낼 병을 준비하고, 제품을 드러낼 수 있는 라벨을 디자인하고,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공장 설비를 갖추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판로를 개척해야 했다.


가장 눈에 들어왔던 부분은, 단순히 차를 팔아줄 가게를 찾는 게 아니라, 안정적으로 제품을 배급할 유통망을 갖춘 회사와 파트너십을 맺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흔히 유통업이라는 걸 중간에서 물건 값을 떼어 먹는 사람들 정도로 평가절하 하는 경향이 있지만,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그걸 제대로 유통시키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제품을 만든 사람이 일일이 모든 지역에 그걸 납품하러 다니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코카콜라 같은 대형 업체라면 자체 유통망을 갖출 수도 있겠지만, 물류와 유통이라는 건 단기간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그 또한 중요한 사업의 영역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리고 또 하나 마케팅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부분도 눈에 들어온다. 역시 아무리 좋은 제품이 있어도, 그걸 제대로 홍보할 수 없다면 당연히 많은 사람들에게 팔 수가 없고, 그건 사업의 지속성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하지만 스타트업이 어디 홍보비가 충분할 수 있을까. 이 점에서 어니스트 티는 뜻밖의 행운을 몇 차례 만난다. 오프라 윈프리나 버락 오바바(당시는 상원의원이었다)가 어니스트 티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 것. 물론 여기에는 그만큼 언제나 (물이 들어오기만 하면 노를 저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회사의 자세도 분명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공동 참업자인 두 사람의 성격도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교수인 배리는 논리적이고 조직적인 사고가 특징이었고, 세스는 타고난 낙관성과 열정의 소유자였다. 이 두 사람이 서로 각자의 장점을 적용시켜 사업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극복해 과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일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사람들의 차이점은 너무나 자주 갈등으로 비화되곤 하니 말이다.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문제들이 생긴다. 그건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했느냐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어니스트 티의 경우 제품을 담는 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큰 위기가 닥친다. 애초에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을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 인수한 공장이 도리어 온갖 불량 등으로 회사에 큰 어려움을 가져왔던 것. 또, 경쟁업체들의 방해나 음료 속 이물질 같은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재정적인 문제도 닥쳐왔다.


사실 어느 것 하나 스타트업으로서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앞서도 언급한 공동 창업자들의 장점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이 모든 걸 개인적인 자질 덕분이라고만 치환할 수는 없다. 이들이 초지일관 견지해 왔던 경영학적 원칙들은 사업을 성공하는 데 중요한 요인들이었다. 무엇보다 뚜렷한 미션과 정직함이라는 회사의 가치를 끝까지 지켜내려 했던 점이 인상적이다.





하나의 회사를 일궈내고, 그 회사를 통해 좋은 가치를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일은 은근 매력적인 작업이다. 어떻게든 사람을 쥐어짜서, 원가절감을 하는 게 목표인 B급 경영 대신, 기업의 구성원 모두를, 나아가 그 기업의 제품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유익한 가치를 전달하려는 노력은 기업이는 조직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공헌이다.


물론 경영이라는 게 여기 나온 에피소드들만으로 구성되는 건 아닐 것이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온갖 일상적인 일들, 눈에 띄지는 않지만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 때로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거나 정신을 멍해지게 하는 일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리라. 그 모든 것들을 헤쳐 나가면서도 끝까지 사업의 미션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란 얼마나 힘들지.


최근 이런저런 경로로 스타트업 대표들, 기업을 운영하는 분들과 교제를 할 기회가 많아졌다. 이분들 모두가 사업에 성공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좋은 가치를 실현하는 좋은 회사들이 우리 사회에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초월한 공동체 믿음의 글들 353
최종원 지음 / 홍성사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눈에 띄는 저자인 최종원 교수의 책이다. 나온 지는 좀 됐는데 이제야 손에 들렸다. 좀 더 최근에 나온 두 권의 책(“공의회, 역사를 걷다”, “수도회, 길을 묻다”)을 통해서, 교회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던 저자인데, 이번에는 좀 더 “일반적인 주제”를 다룬다. 앞서 언급한 책들에서는 교회사 가운데서 공의회나 수도회 같은 특정한 주제를 정해서 접근을 했다면, 이 책은 하나의 시대를 다룬다는 점에서 좀 차이가 있다.


하지만 단순히 초대 교회사를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는 식은 아니다. 보통 이런 경우 교리의 발전 과정을 초반에는 성경 형성사와, 중반에는 이단대처사와, 그리고 종반에는 공의회사와 연결 지어서 설명하는 게 보통. 물론 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집중하는 지점이 여느 책과는 좀 다르다. 이 책의 제목에 “다시 읽기”라는 어구가 붙어있는 이유다.





책에서 저자가 힘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 중 하나는 이 시대의 교회사를 읽는 독자의 시야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1장부터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데, 교회의 시작에 관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그리고 세속 사회학자들의 서로 다른 기준점을 보여주면서, 이 문제가 지극히 당연한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로소 저자의 전공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제대로 살피게 되었는데, 아, 저자는 신학을 공부한 게 아니라 역사학자였다. 저자의 책에서 느껴지는 신선한 관점의 이유는 아마도 그가 신학자들이 서술한 교회사보다는 기독교적 관점을 지닌 역사학자로서 서술하기 때문이었나 보다.


2장부터 4장까지는 초대 교회의 빠른 성장에 관한 분석을 담고 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고립주의, 폐쇄주의를 넘어 보편주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민족의 침입으로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던 당시 로마제국에, 대안적이고 안정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이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정교회)의 역사와 특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 후,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운동으로서 초기 이단들을 살핀다. 이 부분은 이단에 관한 기존의 설명보다 좀 더 “우호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런 느낌은 저자의 책에서 계속 이어지는데, 초대 교회 시기 이단들이 모두 뭔가 악독한 집단이라기보다는 당시 상황에서 나름의 합리적 해결책을 내려고 했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비슷한 내용은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글에서도 본 적이 있다.


책의 후반부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나타난 변화에 할애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는 급속도로 제국의 체제 안으로 편입되어 들어간다. 저자는 이 사건이 가진 공헌 못지않게 부작용도 심했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교회와 권력이 밀착하면서 부패가 시작되었고, 이에 거부반응을 보이며 나온 것이 수도회 전통이라는 설명.





초대 교회사에 관한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연대기 순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아서(종종 주제를 따라 중세나 그 이후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전체적인 윤곽을 한 눈에 그려보기에는 어렵지만, 신대원이나 교회에서 전형적인 설명만 들어 알고 있었던 사람에게는 생각의 깊이를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확실히 조금은 다른 관점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너와의 연애를 후회한다
허유선 지음 / 믹스커피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나이에 연애 에세이 같은 걸 읽는 게 살짝 어색하긴 하지만, 제목이 재미있어서 골라봤다. 오래 전 읽었던 비슷한 제목이 살짝 기억이 난다. 미디어에도 자주 보였던 심리학자 김정운이 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라는 책이었는데, 지금 내용은 거의 기억에 남지만 제목은 10년 넘도록 기억나는 걸 보면 잘 지은 것 같긴 하다.


아무튼 이 책 역시 제목을 보고 손에 들었다. 어느 정도 예상이 되듯, 연애에 관한 에세이인데, 결국 연애라는 것도 단순히 남녀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좀 더 크게 보면 사람과 사람이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니 만큼, 나는 이미 그 시기를 지났다거나 연애에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소구하는 지점이 있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도 그랬고.





책은 연애라는 관계를 어떻게 시작하고, 유지할 것인가에 관한 다양한 조언이 중심이 된다. 구체적인 팁에 해당하는 내용도 있지만, 좀 더 큰 그림에 관해서도 자주 말해준다. 여기에는 작가가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무려 칸트 전공이라고) 배경이 강하게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참고로 책의 부제가 “나를 철학하게 만드는 사랑에 대하여”다.


예컨대 작가는 에리히 프롬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정신을 놓거나 얼이 빠져버리는 건 상대가 천생연분이거나 유일한 사랑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지금까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일 분이라고 말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상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도 곱씹어 볼 만하고, 지나치게 다른 사람, 혹은 상대방을 인식하면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기보다, 중심을 잘 잡고 자신을 잘 살펴야 한다는 말에서는 살짝 칸트의 흔적이 보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어려운 이야기만 나오는 건 아니니, 그리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손에 들어도 괜찮을 만한 책이다. 기독교적 배경 위에 쓰인 것 같지는 않으나, 교회 안에서도 청년들과 함께 읽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이라는 세계
이종태 지음 / 복있는사람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세 말 나타난 계몽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이전의 무지몽매했던 시대를 끝낸,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의식으로 가득했었다. 그들을 “계몽주의자”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여전히 이런 과잉 자의식에 기초한 평가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은 시대를 계몽시킨 선구자들이었다, 뭐 이런.


그들이 이전과 좀 다른 방식의 접근을 시도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중세 기간 안에도 그와 비슷한, 혹은 그 선구적 탐구가 존재했었다. 물론 그 시대 등장했던 여러 지식인들이 가져온 공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과학적 사고의 발달로 이전 시대의 각종 주술적(혹은 미신적) 행태를 몰아내는 계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명이 있으면 암도 있는 법. 이 책의 저자는 계몽주의 시대가 낳은 가장 큰 문제로 이 세계에서 “경이”를 함께 몰아내버린 것을 꼽는다. 사실 이건 앞서의 공헌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계몽주의자들은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일들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연을 감싸고 있던 신비의 영역,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경험하는 경이의 순간이 사라져 버렸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과정이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면 무지개를 여전히 신의 활 정도로 믿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냐, 그건 단지 빛의 굴절일 뿐 아니냐.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을 애써 무시하라는 뜻이냐 하고. 당연히 그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과정에서 세상의 의미,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전 시대 사람은 자연을 어떤 의미가 있는 곳으로 보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텔로스(목적)를 찾아 철학을 시작했고, 동양에서는 도(道)를 찾는 이들이 비슷한 시기 나타났다. 신의 섭리나 로고스와 같은 원리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에게 우주는 어떤 의미도 없는 말 그대로 그냥 있는 것(자연), 나아가 어떤 필연적인 의미도 없는 텅빈 공간(the Space)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세계에서 인간은 살 수 없다(물론 그런 어려운 것은 생각 안 하고 내키는 대로 살겠다는 사람들은 늘 존재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라는 주장이다. 심지어 대표적인 신(新)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 조차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책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우리가 다시 한 번 세상을 경이로운 곳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을 반복해서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에 핵심적인 변호인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C. S. 루이스다(사실 저자는 루이스의 가장 유명한 책 “순전한 기독교”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저자는 루이스의 다양한 작품들을 인용하면서 루이스가 간절히 찾았던 경이를(루이스의 표현으로는 joy) 살펴본다.(물론 그 이외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언급된다.)


경이가 사라진 세상은 “노래가 불리지 않는 세상”이 될 거라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노래라는 것이 애초에 대상의 경이로움에 대한 찬탄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말이다. 모든 것을 물질로, 재물로 환산하는 환금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오늘날 더더욱 부각되고 있는 다양한 인간성 상실을 떠올릴 만한 사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라 꽤 오래 전부터 그 전조가 있었던 것. 시와 노래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메마르고 답답할까.


저자는 왜 우리가 경이감을 회복해야 하는지, 세상을 단지 기계론적으로만 보는 것이 어떤 한계가 있는지를 다양한 방향에서 조망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세계관을 여기에 접목시킨다. 다만 이 지점에서 조금 아쉬웠던 것은, 그렇게 경이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으나, 세상을 경이로운 곳으로 인식하게 될 때 나타나는 변화가 단지 우리의 심리적인 부분에 한정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 또한 그런 다분히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도움인 것처럼(물론 저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보지만) 볼 여지가 있다는 점도. 물론 이 책이 기본적으로 EBS라는 공영방송에서 한 강의를 모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긴 하다.



우리는 경이를 회복할 수 있을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시인도 있고, 가수도 있으니 조금은 안심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미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감정과 경이, 신앙을 모두 2층 다락방 구석으로 몰아넣은 시대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날마다 더 알아간다고 생각하면서, 날마다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일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