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 게임 믿음의 글들 383
랍비 데이비드 포먼 지음, 김구원 옮김 / 홍성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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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저자 이름에 주목하자. 데이비드 포먼. 여기까지는 그냥 미국인 이름이구나 싶지만, 그 앞에 붙어있는 호칭이 흥미롭다. ‘랍비’, 유대인 교사를 가리키는 칭호이다. 출판사에 알아보니 저자는 유대인이고, 정식 랍비라고 한다. 이 책은 랍비가 유대교의 관점으로 출애굽 이야기를 풀어낸 내용이다. 유대교와는 적어도 몇 단계에 걸쳐 멀어져 있는 한국의 개신교인으로서 일단 기획 자체가 흥미롭다.


사실 출애굽 이야기는 구약 성경 전체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주제다. 이건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출애굽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예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독교적 해석 말고, 이 책은 유대교에서 이 주제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꽤 인상적이다.


물론 이런 접근은 단순히 저자의 독창적인 발상은 아니고, 유대교 성현들로 불리는 앞선 세대 랍비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본문의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오경 내 다른 본문들과의 연결성까지 이어가는 작업에는, 물론 저자의 글솜씨도 한 몫을 했을 거고.





우선 책에서 저자는 기존에 접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질문을 출애굽 본문에 던진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출애굽 과정에서 나타난 열 가지 재앙들(이집트 측에서 보면)과 관련해서 우리는 흔히 재앙의 종류와 강도에 대해 집중하곤 한다. 그런데 저자는 파라오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강도가 아니라 정확도였다고 지적한다. 정확한 시점에 정확한 강도로 재앙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에 관한 논의라는 것.


또, 출애굽 본문에서 가장 곤란한 부분 중 하나인, “하나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본문에 대해서도 저자는 흥미로운 해석을 제안한다. 히브리어로 이 구절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단어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어떤 이의 마음에 “용기를 주었다”이고, 다른 하나는 “완고하게 하다”이다. 저자는 이 중 하나님은 파라오가 두려움에 (유일신에 대한 아무런 생각의 변화도 없이) 그저 뒷걸음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마음에 용기를 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출애굽 본문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하지만 그냥 쉽게 지나치곤 하는) 장자됨의 개념에 대한 강조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에 따르면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로 확인되는 사건이었다. 이는 하나님과 하나의 큰 가족이 되는 의미도 내포하는데, 흥미롭게도 여기서 저자(와 유대교 성현들)는 이 이야기를 요셉의 이야기와 연결시킨다.(전형적인 유대교적 접근 방식이다)





우리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들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은 묘한 재미가 있다. 특히 그 대상이 성경일 경우 이건 단순히 재미만이 아니라 큰 유익을 주기도 한다. 성경을 “새롭게” 읽는 것만큼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일도 몇 없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유대교의 관점으로 출애굽 사건을 능숙하게 읽어내는 이 책은 꽤 도움이 될 것 같다.


다만 저자 자신이 유대교 랍비이기에, 이 책의 접근에서 기독교인들이 원하는 그런 내용으로의 전환은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 사건이 십자가와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하지만 뭐 이런 부분이 크게 문제가 되는 내용은 아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활동하는 저자답게, 초강경파 유대교인들(유대교 내에도 수많은 분파들이 존재한다)과 같은 식의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인 정서는 보이지 않으니까. 사실 개인적으로는 극단적인 현대주의자들보다 이쪽이 기독교인들에게 좀 더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저자의 주장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는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로 소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 하는 독자의 역량에 달렸다. 책 후반 저자는 요셉의 이야기를 출애굽의 프로토타입으로, 요셉의 채색옷에서 장자권의 전달을 읽어내는데, 흥미로운 주장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받아들일 지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데 뭐 그건 이 책만 그런 건 아니니까.


간만에 홍성사에서 흥미로운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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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초월한 공동체 믿음의 글들 353
최종원 지음 / 홍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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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눈에 띄는 저자인 최종원 교수의 책이다. 나온 지는 좀 됐는데 이제야 손에 들렸다. 좀 더 최근에 나온 두 권의 책(“공의회, 역사를 걷다”, “수도회, 길을 묻다”)을 통해서, 교회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던 저자인데, 이번에는 좀 더 “일반적인 주제”를 다룬다. 앞서 언급한 책들에서는 교회사 가운데서 공의회나 수도회 같은 특정한 주제를 정해서 접근을 했다면, 이 책은 하나의 시대를 다룬다는 점에서 좀 차이가 있다.


하지만 단순히 초대 교회사를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는 식은 아니다. 보통 이런 경우 교리의 발전 과정을 초반에는 성경 형성사와, 중반에는 이단대처사와, 그리고 종반에는 공의회사와 연결 지어서 설명하는 게 보통. 물론 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집중하는 지점이 여느 책과는 좀 다르다. 이 책의 제목에 “다시 읽기”라는 어구가 붙어있는 이유다.





책에서 저자가 힘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 중 하나는 이 시대의 교회사를 읽는 독자의 시야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1장부터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데, 교회의 시작에 관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그리고 세속 사회학자들의 서로 다른 기준점을 보여주면서, 이 문제가 지극히 당연한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로소 저자의 전공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제대로 살피게 되었는데, 아, 저자는 신학을 공부한 게 아니라 역사학자였다. 저자의 책에서 느껴지는 신선한 관점의 이유는 아마도 그가 신학자들이 서술한 교회사보다는 기독교적 관점을 지닌 역사학자로서 서술하기 때문이었나 보다.


2장부터 4장까지는 초대 교회의 빠른 성장에 관한 분석을 담고 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고립주의, 폐쇄주의를 넘어 보편주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민족의 침입으로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던 당시 로마제국에, 대안적이고 안정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이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정교회)의 역사와 특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 후,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운동으로서 초기 이단들을 살핀다. 이 부분은 이단에 관한 기존의 설명보다 좀 더 “우호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런 느낌은 저자의 책에서 계속 이어지는데, 초대 교회 시기 이단들이 모두 뭔가 악독한 집단이라기보다는 당시 상황에서 나름의 합리적 해결책을 내려고 했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비슷한 내용은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글에서도 본 적이 있다.


책의 후반부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나타난 변화에 할애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는 급속도로 제국의 체제 안으로 편입되어 들어간다. 저자는 이 사건이 가진 공헌 못지않게 부작용도 심했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교회와 권력이 밀착하면서 부패가 시작되었고, 이에 거부반응을 보이며 나온 것이 수도회 전통이라는 설명.





초대 교회사에 관한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연대기 순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아서(종종 주제를 따라 중세나 그 이후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전체적인 윤곽을 한 눈에 그려보기에는 어렵지만, 신대원이나 교회에서 전형적인 설명만 들어 알고 있었던 사람에게는 생각의 깊이를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확실히 조금은 다른 관점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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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의 성경
후스토 L. 곤잘레스 지음, 김기철 옮김 / 복있는사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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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 관해 믿고 보는 저자 후스토 곤잘레스의 새 책이다. 서문에 팬데믹 상황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정말로 최근에 쓴 책인가 보다. 제목에 나와 있듯, 이 책은 성경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성경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는지, 초기 기독교 시기를 배경으로 탐색해 보는 쪽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성경이 만들어졌는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1부가 가장 재미있었다. 구약은 대체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일부 아람어 포함), 신약은 그리스어로 쓰였다. 하지만 포로기 이후 신약시대까지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언어는 아람어였다. 신약은 처음부터 번역의 과정을 거쳐 쓰였던 것.


구약의 경우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거룩한 글로 사용해 온 책들과 대부분 겹친다. 하지만 여기에 외경이라고 불리는 주로 포로기 이후 쓰인 책들의 성격을 두고 이견이 생겼다. 70인 역에서는 이 외경도 중요하게 여겼기에, 전통을 따라 가톨릭교회에서는 외경도 제2의 경전으로 여긴다. 하지만 원문에 대한 연구를 중요시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유대인들의 인정해 온 히브리 성경에 실려 있는 책들의 권위만을 인정하려 했다. 결국 구약의 목록에 차이가 생긴 이유다.


처음 성경은 가죽 위에 써서 두루마리 형태로 말아 보관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코덱스’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책과 같은 형태를 일찌감치 널리 사용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고 하지만, 사실 성경과 같은 책을 쉽게 찾기 위해서는 코덱스 형태가 훨씬 편하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성경을 장과 절로 구분하는 관행이 어떻게 나왔는지, 성경의 필사본들이 어떤 식으로 전달되면서 오류 생겼고, 그것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인쇄술이 발명이 교회의 신앙생활 방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등이 이어진다.


2부에서는 성경이 다양한 정황 가운데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3부에서는 성경의 내용에 대한 초기 교회의 해석법으로 시작해, 당대 중요하게 여겼던 성경 속 주제들 몇 가지를 검토한다.





책이 얇기도 하고, 자연히 내용도 개론에 가까운 쉬운 수준인지라 금세 읽을 수 있었다. 위에서 얘기했듯 흥미로운 내용들이 적잖이 담겨 있어서, 읽는 내내 큰 부담 없이 즐거웠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말씀”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각각의 시기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최선이라고 여기는 태도로 말씀을 귀하게 여겼지만, 또 지금 보기에 그들의 모습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을 띨 때가 있었다.


우선 인쇄기의 발명과 그로 인한 성경의 대략 출간이, 그 이전 시기 필사라는 방식을 통해 성경을 제작해온 사람들의 반발을 샀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 중 일부는 이 새로운 발명품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성경의 필사 자체를 영적 훈련의 하나로 여겨왔던 이전 시대의 관념을 반복하며 큰 문제가 생겼다고 우려를 표한다.


본질과 부수적 유익을 혼동하거나,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세대의 저항으로 볼 수도 있지만, 누구나 성경을 값싸게 손에 들 수 있는 오늘날, 그렇다고 사람들이 성경에 더 익숙해졌는지를 자문해 보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말씀을 읽고 쓰고 하는 행위 속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것들을 훈련하고 익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은 몸으로도 예배를 해야 하는 존재이니 말이다.


또 하나는 말씀예전과 성찬예전의 긴장관계에 관한 서술이다. 이방인들이 대거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 시기에는 성경의 내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라도 말씀을 굉장히 강조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와 함께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는 논리로 말씀이 오히려 약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였다. 개혁자들이 가톨릭의 성찬 교리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가했던 데에는 어쩌면 이런 이유도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초기 교회 시기에 관한 내용이 주가 되지만, 자연스럽게 그와 연결된 이후 시기에 관한 내용도 언급되니 더욱 좋다. 저자의 간명한 문장이 복잡할 수도 있는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개론서에 가까운 책인지라 좀 더 자세한 세부사항을 알고 싶으면 다른 책을 펴야겠지만, 또 그렇다고 아주 단편적인 정보만 실려 있는 건 아니다. 성경에 대한 상식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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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의 대상에서 사랑의 도구로 그리스도인의 일상 중심 잡기 1
손성찬 지음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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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의 저자와는 학부 4년, 신대원 3년을 같이 다닌 친구다. 몇 년 전 개척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어느 샌가 책을 한두 권씩 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법 인기 있는 작가가 된 듯하다. 그 사이 한두 번 만나기도 하고 했던 것 같은데, 정작 책을 제대로 읽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이런 친분 관계가 서평에 영향은 전혀 주지 않았다. 물론 뭐 내가 정한 중립성을 지켜가며 리뷰를 써 온 것도 아니기도 하고, 이게 무슨 대단한 글도 아니니 애초에 상관 없기도 하지만.


한 해에 백 여 권 정도 책을 읽고 있지만, 그 중 설교집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작년 같은 경우 딱 한 권을 읽었는데, 유진 피터슨의 “잘 산다는 것”이라는 책이다. 그나마 그 책도 설교집이라기 보다는 교인들에게 쓴 일종의 목회서신 비슷한 것이었고. 그 전 몇 년을 검색해 봐도 설교집 리뷰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설교집에 따로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설교라는 자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로 인해, 전개할 수 있는 내용의 범주와 깊이가 제한되기에, 탁월한 무엇을 얻기 쉽지 않기도 하고, 내가 그 자리에서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있지 않는 이상은 온전히 그 내용을 내 것으로 수용하는 게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제한된 시간 속에서 읽을 만한 설교집을 만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손성찬 목사가 쓴 이 설교집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평가를 내려도 될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앞서 말한, 설교라는 자리가 안고 있는 상황적 한계 때문에 논지를 좀 더 깊게 들어가지 못하거나, 너무 날카롭지 않게 다듬었던 게 아닐까 싶은 부분이 보이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이 주제에 대해 깊은 고민과 그로부터 나온 통찰이 잔뜩 묻어난다.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설교는 제목처럼 돈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처음 세 편은 일반론적인 고찰로, 돈이라는 것이 기독교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다룬다. 그것은 그 자체로 복의 상징이라거나, 반대로 무조건 멀리해야 할 악의 결과물이 아니라 중립적인 도구로서의 성격을 강조한다(물론 과연 돈이 “중립적”인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들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도구로서의 돈은 쉽게 목적으로 치환된다. 이른바 돈이 신(우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매우 경계하며, 특히 복음서에서는 이런 방향을 바꾸어 돈을 하나님을 향해 사용하는 법에 관해 일부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반복이지만, 그 안에서도 저자의 통찰력이 언뜻언뜻 튀어나온다.


예를 들어 저자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에서, 주님이 그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시자 “심히 근심”했다는 구절에서, 그가 이제까지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겨왔다고 자부하던 생각이 허상임이 드러났다(58)고 지적한다. 또, 같은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다 팔아 나누어 주라는 명령에 관해 저자는 이를 “네가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을 버리고 비우라”는 명령으로 읽어내기도 한다(67).


책의 후반부인 4장부터는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를 다룬다. 사실 이 책의 진가는 이 부분에서 좀 더 두드러지는데, 단순히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을 하면 된다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오늘날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인 근로소득과 자본소득의 비대칭성, 그리고 그 대표적인 부작용인 투기의 문제까지 직접 지적한다(해본 사람은 안다. 이런 주제를 설교의 자리에서 꺼내는 것이 어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그리스도인의 돈벌이에 관해 저자가 마무리 부분에서 하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윤의 결과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보다 조금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걸 기억하라는 부분이다. 이 정도면 젊은 목사 치고 꽤 용감한 발언이 아닌가.





이 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인상적인 구절들이 적지 않다. 사실 돈에 관한 성경 본문이라는 것이 은근 해석하기가 난해한 것들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용기 있게 그런 구절들 앞에 서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이 주제에 관해서 교회 안에 온갖 얼치기 진단과 처방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만 해 줘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쉬운 부분은 여덟 번째 장에서 시도했던, 희년을 고리로 해서 좀 더 큰 사회 경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도가 그리 인상적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뭐 한 편의 설교에서 다루기엔 조금 큰 이야기였기에,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쉽고 짧은 문장에, 논리 전개에도 뭉개짐이 없다. 또, 책에서 중심에 두고 있는 돈이라는 주제에 대해 피해가는 바 없이 담백하게 직면하는 부분도 좋다. 썩 괜찮은 설교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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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위한 음악 - 교회음악의 역사, 고대 이스라엘에서 현대 가스펠까지
요한 힌리히 클라우센 지음, 홍은정 옮김 / 좋은씨앗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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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의 역사에 관한 책은 오랜만이다. 아마 학부 시절에 한 권 본 것 같으니 시간이 꽤 지났다(사실 그 책은 교회음악사만 담겨 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구약 시대의 종교음악부터 시작해 현대(20세기 초중반)의 가스펠 음악까지, 말 그대로 찬송이라고 불릴만한 음악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훑어가는 책이다.


그리고 앞서 교회음악이라는 단어로 시작했지만(실제로 책의 대부분은 여기에 할애되어 있지만), 방금 언급했던 것처럼 저자는 이를 단순히 교회 안에서 연주되고 불리는 음악만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찬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이 부분은 성경에 언급된 악기나 곡조에 관한 기록 등을 언급하는 정도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 시기의 찬양에 관한 언급을 간단히 한 뒤, 본격적으로 교회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에 관한 내용이 따라온다. 흔히 이 성가들은 대교황이라고 불리는 인물들 중 하나인 그레고리우스 1세 때 교황청이 주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저자는 당시 교황들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었으며 오히려 이 노래들은 (당시 서부와 중부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프랑크족의 것이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아일랜드 출신의 수도사들이 이 작업에 큰 공헌을 했다고.





그 다음은 종교개혁 시기 개혁자들의 음악이었다. 개혁자들의 성격에 따라 교회 음악에 대한 입장도 달랐는데, 어지간한 건 그대로 남겨두었던 루터와 모든 걸 다 새로 만들기를 원했던 츠빙글리,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칼뱅은 교회음악에 대해서도 꼭 그처럼 차이를 보였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를 거치며 청중은 그저 듣기만 했던 교회음악이 청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함께 부르는 식으로 발전한 것은 큰 변화였다.


한편 그레고리안 성가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단선율의 음 위에 성경 속 가사를 얹은 것이었다. 쉽게 말해 하나의 음이 이어지는 노래였다는 것이다. 노래라기보다는 시처럼 들리기도 하는 독특한 형식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더 많은 음이 함께 어우러지는 다선율 음악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런 변화의 대표자로 팔레스트리나라는 작곡가를 꼽는다. 참고로 이 장부터는 주요 작곡가들(바흐, 헨델, 모차르트, 멘델스존)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바흐와 헨델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교회음악은 점차 교회 밖으로 나와 세속화의 길을 걷는다.


책의 마지막 장은 가스펠 음악에 할애되어 있다. 저자는 몇 번이고 “아프로아메리칸”이라는 학술적 용어로 부르는, 그러니까 흑인들의 음악에서 시작된 가스펠은 노예로 끌려온 그들의 역사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특유의 소울과 브루스 리듬, 독특한 창법 등이 더해지면서 곧 가스펠은 교회음악은 물론 세속 음악계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어떤 것의 역사를 공부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고작해야 수십 년을 사는 인간이 절대로 다 경험할 수 없는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훑어가는 건 마치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는 문을 살짝 열고 한 발을 내딛는 느낌을 준다. 내가 역사를 읽을 때마다 설레는 이유다.


이 책은 교회음악에 관한 오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좀 전문적인 음악 이론과 관련된 내용이 나와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책을 읽어갈 땐 그런 부분은 과감히 쓱 훑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사실 이 책의 중심은 그런 세부적인 음악 변화보다는 그런 변화들이 어떤 사회적 양상의 변화와 연결되어있는지를 살피는 것에 있으니 말이다.


다른 모든 제도나 문화, 양식들처럼, 교회도 시대적 상황에 맞춰 다양한 옷을 입어왔다. 교회 음악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단지 이전 시대의 음악을 반복하기만 한 게 아니라, 자기 시대에 맞는 음악을 새롭게 만들어 냈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음악이 경건하지 못하다고 경계하기도 하지만, 그런 식의 반항은 역사의 큰 파도 앞에서 곧 묻혀버린다(하지만 여전히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주제가 주제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자의 신학적 입장도 묻어나올 수밖에 없다. 독일에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하고 한때 루터교 목사로도 일했던 저자는,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계몽주의의 세례를 축복으로 여겼던 초기 자유주의자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으로 보인다. 물론 이 부분이 전체 역사를 훑어가는 데 큰 지장을 주지는 않지만,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거나 모두를 어느 정도 시니컬하게 평론하는 태도가 최선인 것은 아니니까.


교회음악에 관해서 이만큼 정리된 책도 없는 듯하다. 관련 정보를 위해서 한 번 읽어볼 만한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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