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체 (반양장) -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64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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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으로 시작한다. 일명 난쏘공으로 불리는 소설. 유명한 소설인데, 그 소설은 비극으로 끝난다. 난쟁이들이 난쟁이가 아닌 삶을 살기 힘든 세상을 보여준 소설이다.


이렇게 난쟁이로 시작하면 난쏘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난쟁이들의 비극을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이 소설에서도 아버지 역시 난쟁이라 할 수 있다. 쌍둥이 아들 둘인 합과 체도 난쟁이라고 놀림을 당할 만큼 작은 키를 지니고 있다.


작은 키. 신체가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는 사회. 그것도 청소년기에 작은 키는 여러모로 불리하게 작동할 때가 많다. 특히나 번호를 키 순으로 정하는 학교에서는 번호가 곧 키 순서가 되니, 대놓고 신체로 차별당하게 된다.


이런 차별의 요소가 소설의 초반에 등장한다. 이건 아니다 싶은 반인권적인 모습. 어쩌면 과거 우리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인권을 중시해야 하는 학교에서 비일비재로 일어났던 차별이기도 하고.


아이들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신체를 비하하는 말을 하거나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신체에 따른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교과서에나 존재하는 말이었다. 


자신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들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모르고 있는 상태. 이는 교사라고 다르지 않다. 


소설에서 난쏘공을 작품으로 수업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뜩이나 작은 키로 서러움을 당하는 체에게 하필 그 부분을 읽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교사가 그 부분의 내용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조금만 생각하면 다른 아이에게 읽힐 수 있을 텐데, 그런 배려를 하지 않는다. 어쩌면 교사는 그게 뭐? 키 작다고 난쏘공의 아버지는 난쟁이였다라는 부분을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그런 부분에 신경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놀림거리를 찾아 눈을 번뜩이며 찾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는 그 놀림이 자신들의 유흥거리에 불과하겠지만 놀림을 당하는 아이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주게 된다.


작은 것을 고려하면서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교사들도 힘들겠지만, 그것이 바로 교사들이 지녀야 할 자세 아니겠는가. 그래서 교사라는 직업은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상처를 받은 체. 합과 체는 쌍둥이지만 합은 공부로 작은 키에 대한 놀림을 어느 정도는 모면한다. 성적이 좋지 않은 체에겐 더 많은 놀림이 따라오고. 


그래서 우연히 만난 이상한 노인에게서 계룡산에서 33일을 지내면 된다는 말을 듣고 체는 합을 데리고 계룡산으로 간다. 거기서 둘은 노인이 말한 수련을 하는데...


우연히 들은 라디오에서 노인이 치매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33일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달라진 것이 없다. 하긴 키가 한 번에 큰다면 뭐가 문제겠는가. 소설 역시 개연성을 얻지 못할테고.


2학기 체육시간. 농구 시합. 누구도 같은 편으로 하기 싫어하는 함과 체. 이번엔 다르다. 둘은 정말 열심히 한다. 골도 넣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말 열심히 뛰었으니까. 열심히 뛰다보면 이들의 실력을 의심해도 이들에게 공을 건네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합도 마찬가지고.


이제 자신들의 키를 그렇게 의식하지 않고 나름 학교 생활을 하는 합과 체. 어느 날 키가 커진 자신들을 발견한다로 소설은 끝을 맺고 있는데...


얼마나 컸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이들에게 키는 이제 자신들의 모든 것이 아니니까. 자신들이 처한 자리에서 노력하고 그에 만족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으니까.


합과 체는 이제 신체로 자신들을 가두지 않는다. 무엇보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으니까. 바로 이것이다. 자존감.


이 자존감은 그냥 키워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자존감이 강할 수도 없다. 자존감은 자신의 약점을 알고 그 약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을 때, 그래서 약점에 더 이상 마음을 쓰면서,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이겨냈을 때 생긴다.


약점이 없는 사람이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약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다. 합과 체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신체를 인정하고, 거기에서부터 최선을 다하는 것. 이때부터 그들에게는 자존감이 들어찼고, 이제 그들은 당당하게 지낼 수가 있게 된다.


조세희가 쓴 난쏘공과는 달리 소설은 합과 체의 이런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청소년 소설답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기적이 아니라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로 소설이 전개되고 있어서 마음 졸이고 읽지 않고, 함과 체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 그 점이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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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3-13 0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합, 체, 이름이었군요!
이 책 아이들하고 읽어봐야겠어요.
같이 생각할 부분이 많은듯요!
감사합니다 ~^^

kinye91 2024-03-13 08:38   좋아요 1 | URL
박지리 문학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박지리 작가 작품을 읽어봐야지 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괜찮은 작가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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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면서 '도덕적 감정'은 내려놓아야 한다. 도덕적 감정을 앞세우면 읽기 힘든 소설이다. 살인자들의 이야기라니... 그것도 살인을 방역이라고 지칭하다니. 살인자들을 방역업자라고 하다니.


세상에 죽어야 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사람을 마치 해충 취급하면서 방역을 해야 한다는 의뢰를 받고 청부살인을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라니... 자신이 죽였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까지는 없애지 못하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무감각해지고, 죽은 이들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그런 주인공이라니...


읽으면서 주인공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그런데 소설에는 반전이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청부업자가 어느 순간 마음 쓰는 사람이 생긴다. 일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우선은 버려진 개를 데려와 키운다. 변화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마음이 약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생명을 자신의 곁에 둔다는 것은 피가 돌고 눈물이 있는 존재로 바뀌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다 또 신경쓰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 부분부터 주인공의 변화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한다. 살인청부업자에게 감정이 생긴다? 이는 살인청부업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영화 '똥파리'가 떠올랐다. 청부업을 하는 주인공이 지켜야 할 것들이 생기면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이 소설 역시 그렇다. 지켜야 할 것이 생기면 자신의 죽음에 이르게 된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이런 변화를 보인다.


그렇게 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소설이 죽음으로 끝나면 너무 단조롭다. 하여 또다른 살인청부업자가 등장한다. 이름을 투우라고 한다. 투우, 우리가 먼저 떠올리면 싸우는 소 아닌가. 상대에게 달려드는 그런 존재. 이 투우가 주인공인 조각의 삶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조각이 마음에 두고 있는 존재들을 제거하려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조각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결국에는 조각을 파멸에 이르게 하려는 것. 투우의 아버지가 조각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투우 역시 살인청부업에 뛰어들었으니, 그에게서도 어떤 도덕을 찾을 수는 없다.


이제 투우가 조각에게 어떻게 접근하는지, 조각은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소설의 중심 내용이 된다. 끝까지 가는 과정에서 조각이 마음을 주고 있었던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고, 조각이 계속 살아남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제목이 '파과'인데 파과란 말이 여자와 남자 나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떨어진 과일, 또는 흠집이 난 과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흠집이 나기 전에 과일은 좋을 때를 지닌다. 좋은 때,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좋은 때는 그것이 지나갔을 때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을 하게끔 한다.


하여 살인자의 삶은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보면 '파과'에 해당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도 찬란한 삶의 한 순간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하고.


소설을 읽으면서 살인을 실행하는 사람보다 그것을 사주하는 사람들에게 더 분노를 느끼게 된다.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지만 다른 사람을 이용해 피를 묻히는 그런 존재들. 


돈이나 권력을 이용해 남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 그런 사람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살인청부업자들. 이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살벌한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살인으로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그런 권력들이, 돈이 얼마나 많은 파멸(죽음)을 이끌어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삶은 이지러진 삶이라고 할 수 있고, 흠집이 있는 과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이 이지러지는 것을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이지러진 삶에도 기댈 존재들이 등장하고, 기댈 존재들로 인해 변해가는 모습들을 통해서 사람이 변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누군가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이 이지러진 삶이 아닌 한창의 삶, 찬란한 삶임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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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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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릴린 먼로일까 생각했다. 뜬금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마릴린 먼로, 섹시 심벌로 유명한 미국 배우 아니던가. 우리나라하고 인연이 있다면 6.25전쟁 때 방문했다는 정도.


소설 속에서 마릴린 먼로는 사진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많은 것을 함의한다. 마릴린 먼로를 남성들이 좋아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자신들의 환상에 맞았을 때만이다. 마릴린 먼로가 주체적으로 행동할 때는 온갖 비난을 쏟아부었다.


그것은 마릴린 먼로는 남성들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행동해야 하는 사람. 그런 존재가 마릴린 먼로였다. 즉,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사람으로만 존재해야 했다. 결코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이어서는 안 되었다.


소설은 이 점을 마릴린 먼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라는 말은 다른 존재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존재로만 있겠다는 말일까? 아니다. 마릴린 먼로를 통해 여성들이 겪는 억압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단지 여성들만이 아니라 다르다는 이유로, 약하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배제당하는 존재들을 드러내고자 이런 제목을 붙였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사라진 사람(셜록)으로부터 메시지가 온다. 그 메시지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소설의 서사다. 서술자는 둘. 한 명은 성형외과 의사인 구연정, 또 다른 한 명은 윤설영. 


셜록의 친구인 설영은 셜록이 사라지기 전 8개월 간의 기억이 없다. 분명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을 터. 소설은 이 기억 상실의 공간을 메우는 일로 내용이 전개된다. 그 상실의 부분을 채워주는 존재가 성형외과 의사인 구연정이다.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은 곧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깨달아가는 여정이다. 소설 속에서 선택과 배제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선택과 배제를 누가 하는가?


누가 선택하고 누가 배제하는가? '하다'란 말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이 말에 해당하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다. 위계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으로 국한시키면)


그런 사람들은 누구인가? 권력을 쥔 사람, 경제적 부를 축적한 사람, 명예를 획득한 사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이것도 아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도 다시 위계가 나뉜다. 바로 성별에 의해서.


위계의 피라미드 가장 윗층에는 권력을 쥔 이성애자 남성이 속한다. (나머지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같다고 가정하자) 중간층에는 권력을 쥐지 못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이성애자 남성이 속한다. 하층은 또 나뉘는데, 이성애자 여성이 하층의 맨 위를 차지한다. 그 밑에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자리잡는다.


(성별로 나누지 않았을 때의 위계는 여기서 생각하지 말자. 전쟁이 났을 때 또는 위급상황일 때 어떤 존재들이 가장 피해를 입는지 살펴보면 이 위계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위계의 피라미드는 시시때때로 작동한다. '위계에 의한~'이라는 말이 붙은 억압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럼 마릴린 먼로는 어디에 속할까? 하층에 속한다.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라고 불리는 배우도 그들의 위계 속에 있을 때만 선망의 대상일 뿐이다. 위계를 벗어나고자 하면 곧장 배제와 탄압이 들어온다.


'선택하다, 배제하다'라는 말의 상대 편에 '선택당하다, 배제당하다'라는 말이 있다. 주체적으로 생동하지 못하고 다른 존재에 의해 행동을 하게끔 당하는 상태. 피동이나 수동이라고 부르는 상태다.


위계의 밑에 있는 사람들은 선택하지 못하고, 배제하지 못하고 선택당하고, 배제당한다. 소설은 바로 그 점을 보여준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다르다는 이유로 선택당하고 배제당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렇다고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비록 지금은 선택당하고 배제당하지만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능동적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배제당한 존재인 도영의 말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 말이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라는 말의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 강아지가 한 마리일 때는 힘이 약하잖아요. 근데 호랑이가 욕심껏 먹어서 강아지들이 오히려 더 많아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강아지들이 힘을 합칠 수가 있었대요. 강아지들이 힘을 합쳐서 호랑이를 물리쳤대요!"(371쪽)


이때 호랑이에게 먹히는 강아지들이 바로 마릴린 먼로다. 그러니 마릴린 먼로임을 인식했을 때 힘을 합칠 수가 있다.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되고, '마릴린 먼로들'이 된다. 그럴 때 선택당하고 배제당하는 존재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다고 똑같이 선택하고 배제하는 존재로 살아가지 않는다. 마릴린 먼로들은 선택과 배제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안는 존재가 된다.


설영이, 연정이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은 다름을 인정한다.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사랑이 된다. 또한 이 사랑은 배제된 사람들에게 배제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


연정과 설영이 서로 소통하는 트위터 비공개계정 이름이 왓슨들이다. 왓슨은 셜록 홈즈가 사건을 해결할 때 같이 있으면서 그가 어떻게 사건을 해결했는지를 기록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기록이 중요하다. 기록은 남는다. 기억은 지워질 수 있어도 기록은 남는다. 기록은 결국 사건을 해결하게 한다.


그들이 계정 이름을 왓슨들이라고 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건의 전모를 기록해두겠다는 결심. 단지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기록을 통해서 변해간다. 자신들의 삶을 찾아간다. 


소설은 이렇게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그 과정을 통해서 다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추리 소설의 기법을 택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만연하는 '위계에 의한 폭력'이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연정이 성형외과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사라는 이유로 특별한 까닭없이 당하는 일들과 설영이 박사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대우, 그리고 일본인 남성 신바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받는 배제는 소설 속 사건이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음을 생각하게 한다.


하긴 우리가 힘이 있다고 여기는 직업에서도 성별이 얼마나 위계로 작용하는지는 몇 년 내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일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선택과 배제가 일어났고, 얼마나 많은 마릴린 먼로들이 있었는지를...


법을 통해 정의를 구현한다는 사법부에서 벌어진 온갖 성추행들, 사람을 살린다는 의사를 양성한다는 의대에서 벌어진 성추행들, 이렇게 사회적 위계에서 위에 있는 집단들에서도 다시 위계를 나누어 폭력이 행사되고 있는데, 사회적 위계에서 아래에 있는 집단들에서랴.


그러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을 없던 것으로 묻어버리는 일이 없게 기록하는 왓슨들이 필요하다. 이런 왓슨들로 많아져 배제당했던 사람들이 배제당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소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을 보게 된다. 박진감 있게 전개되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느끼는 현실감, 그리고 분노. 단지 분노에 머물지 않고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선택과 배제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 작동해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소설이다. 그러므로 왓슨은 바로 '사랑'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소설 뒷부분에 있는 설영이 하는 말,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건 하수나 하는 일이죠."(376쪽)

이것이 이 땅의 왓슨들이 하는 말이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게 한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을 쓴 작가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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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기담 수집가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 지음 / 프시케의숲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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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주 즐겁게, 또는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때로는 낄낄거리며, 때로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때로는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면서 읽게 되는 책.


책 자체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이야기의 힘으로 책은 디지털 시대에도 살아남았다.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책이 지닌 이야기를 디지털로 만나는 것보다 직접 손으로 만지며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까.


이 책은 헌책방을 운영하는 저자가 책과 관련해서 만나게 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형식을 택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헌책방을 운영하는 주인장 이야기다. 자신이 그 책과 관련해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를 이야기해 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 문학작품이 계속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에 관한 이야기부터 책에 관련된 사람들 이야기, 이 책에서는 책찾기에 도움을 주는 사람 두 명이 나온다. 한 명은 시계 수리를 하는 N씨, 시계 수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지만 헌책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헌책방 주인장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이 사람과 함께하는 장면도 무척 흥미롭다. 여기에 책 보부상이라고 할 수 있는 H씨. 이 사람에 관련된 이야기도 재미있다. 세상 괴짜들 정말 많다.


한 분야에 정통한 사람도 많고, 그들이 교수랍시고, 박사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보다도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 집중해서 실력을 쌓고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훨씬 더 멋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경제적 부유함을 추구하지도 않고, 그냥 즐기는 모습들이다.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


이 책에서 '독창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N씨와 H씨의 삶은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는 책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사람들의 사연이 이 책의 핵심이다. 왜 그들은 그때 그 책을 구하려고 할까? 새로운 판본이 나온 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자신이 그때 읽었던 또는 지니고 있었던 책이어야 할까? 이것이 이 책에 나온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준다. 그 책에 얽힌 사연이 삶의 일부분이라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분이 바로 자신의 삶이기 때문에 꼭 함께해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공짜로 들을 수는 없다. 때문에 주인장은 자신이 책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 하는 수수료 대신 이야기로 대체한다. 어쩌면 이야기가 더 값질 수 있는데, 책을 구하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다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게 되고, 주인장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삶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좋은 거래 (? 이 말은 쓰고 싶지 않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짜는 없다는 말에 대응하는 취지에서 그냥 쓴다)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나같은 독자들은? 책값을 내고 사서 읽고 있으니, 역시 그 대가를 치르고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단지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셋째는 바로 책이 주는 이야기다. 책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문학작품이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철학책이나 기타 다른 책이라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소개된 책들의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으니, 자연스레 그 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관심을 가지면 언젠간 읽게 되지 않을까? 아니, 읽을 운명인 책이라면 읽게 되겠지, 이렇게 [헌책방 기담 수집가]라는 책을 통해 만난 책들의 이야기도 만나게 되겠지. 그러니 이 책을 읽은 것도 역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간혹 소개된 책 중에 읽은 책도 있지만 안 읽은 책이 더 많다. 또한 읽은 책이라도 책을 구하려는 사람이 경험한 것과는 다르고, 살아온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그가 구하는 책과 다른 판본인 경우도 있다. 책 속의 이야기는 같을지 몰라도 판본에 따라 느낌은 다를 것이기 때문에 각자 다른 읽기를 했다고 봐야 한다.


책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는 똑같지 않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다. 이처럼 세 가지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는 책. 하나하나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 이야기들이 합쳐져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한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 속에 이야기. 


읽는 내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다음 편도 나왔다고 하는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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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다가 한 구절을 발견한다.


  그 구절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른 시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그 구절뿐,


  그런데 그 구절이 왜 이렇게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 때문이 아닐까.


  많은 일들이 동영상으로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동영상 중에서 한 장면이 멈춘 듯, 마치 사진처럼 남아 있기도 한다.


그런 사진처럼 남아 있는 장면.


좋은 장면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꼭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황학주가 처음 펴낸 시집을 다시 복간한 시집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시는 다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래야 시다.


한 시대가 지났다고 잊혀져서는 안 된다.


이 시집에서도 많은 시들이 다시 지금을 환기시키고 있지만, '단단한 벙어리를 깨고'란 시에 나오는 이 구절이 가슴 속에 들어와 박혔다.


'평화보다 잘 찍힌 불행은 역사에 많다'(황학주, '단단한 벙어리를 깨고' 중에서. 23쪽)


평화. 평화가 유지될 때 우리는 평화를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중국에서 태평성대라던 요 임금 때 누가 임금인지 모르고 지냈던 사람들처럼.


그냥 평화롭기 때문에 특정한 장면으로 남길 필요가 없다. 그런데 불행은?


불행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불행은 우리의 눈을 잡아 놓는다. 그래서 불행은 사진으로 남는다.


평화보다 잘 찍힌 불행이라는 표현에서 그런 불행들은 결코 우리를 스쳐지나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방송되는 여러 일들 중에 기억에 오래 남는 것들... 그런 장면들이 하나의 사진처럼 남아 있게 되는데...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 들으라고 했다가 온몸이 들려 끌려나가는 장면. 불행은 평화보다 잘 찍힌다.


이 시 구절이 확 들어온 이유가 이런 장면들 때문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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