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와사랑.데미안 - 한권의명작 7
문화광장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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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와 사랑을 읽으면서 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관계를 주시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나타나기 보다는 골드문트의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모든 것은 골드문트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모든 갈등과 환희, 슬픔, 기쁨, 그리고 초월 역시 골드문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르치스는 그저 골드문트와 상반되는 개념의 인간이었다. 그는 매우 똑똑하고 냉정하였으며, 게다가 현명하였다. 그는 완벽한 이성주의자였고 그런 완벽함에 따라 수도원에서 아직 20살 정도의 나이였으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그 완벽한 이상의 세계를 닮아가던 나르치스에게 골드문트가 수도원으로 온 것이다.

골드문트는 매우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하얀 얼굴에 금발의 머릿결 그리고 그런 인상을 가져서인지 골드문트의 감수성과 깊은 심연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오히려 그와 친분을 나누려 하면 할수록 골드문트는 주변 학생들과 멀어지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변 학생들에게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완벽한 이성과 이성의 세계를 원하는 수도원의 원장, 신부님, 그리고 위대한 학자 나르치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골드문트는 사실 완벽할 정도로 감성적인 인간이었다. 왜? 수도원의 높은 이상을 가진 그들은 골드문트를 아끼고 있었을까? 그리고 나르치스라는 고고한 인품을 소유한 수도자는 이 골드문트에게 사랑을 베풀었을까? 그것은 아마 진리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골드문트는 어느 여인과의 격렬한 육체적 사랑에 따라 수도원에 나가고 많고 많은 여행과 모험 속에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다. 수도원에 귀향하면서 골드문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인생경험을 살려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킨다.

그 예술은 매우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가치관을 지닌 나르치스를 감동시킨다. 아니 나르치스만이 아닌 다른 수도원 사람들에게 크나큰 마음의 파동을 전달한다. 그러나 분명 나르치스는 오로지 수도원이란 세계에 머물던 인간이었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와 달리 그 사회에서 모든 공간을 누빈 외로운 나그네와 같았다. 그런데도 왜 이들의 관계에서 진리의 길을 같이 볼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남성적인 이성세계가 중시되던 그 공간에서도 이성에 의해 배제되던 감성과 자연, 그리고 자연과 동일하게 보이는 그 어머니라는 이름에서도 진리라는 거대한 장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골드문트가 왜 그토록 이성의 세계에 들어서지 못했을까? 나르치스와 달리 골드문트는 매우 섬세한 성격을 가진 사나이였다. 그는 언제나 작은 것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미친 광기가 속한 세계를 보면서 분노하고 울기도 하고 심지어 거기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골드문트를 잡아두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을 받을망정 머물지 못하였다. 그의 매력은 너무 거대하여 많은 여성들의 육체적 사랑과 감성적 사랑을 만족시켜줄 뿐이지 그의 안정된 공간에 다가가지 않았다. 그런 외로움을 깊이 슬퍼하던 골드문트이었으나 이제는 오히려 외로움을 알고 그것을 털어버린다. 페스트로 인해 죽음이 가득한 마을에서 어느 아름다운 처녀를 구해 옆에 있던 겁쟁이 방랑자와 자연의 세계로 간다. 거기서 골드문트는 그 처녀에게 자신의 옆에 머물기보다는 페스트가 가라앉으면 다시 원래의 곳으로 가라고 했다.

그녀는 싫다고 했지만, 골드문트는 설득시킨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아름다운 처녀는 매우 수척한 모습으로 죽어간다. 어느 부랑자가 그녀를 능욕하다가 그 부랑자의 음산한 치아가 그녀의 젖가슴 주변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골드문트는 부랑자의 목을 비틀어 버려 이 세상과 하직하게 하였으며, 그 시체 역시 그냥 자연으로 보냈다. 그렇게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버리게 한 것이다. 그런 노력에도 골드문트는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부랑자의 이빨자국에 페스트가 감염된 것이다. 골드문트는 부랑자의 능욕에서 구출해주었으나 결국 페스트로 죽어간 그녀를 위해 그녀가 숨결을 듣지 못할 그 마지막까지 지켜주었다,

최후의 숨소리마저 멈추자 골드문트는 매우 슬퍼하며 그녀가 누운 오두막에 붉은 불씨를 던져 붉은 장미와 같은 불꽃이 춤추도록 하였다. 골드문트는 정말 많은 여행을 했다. 여자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면서 죽음의 위기에 빠지고,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또한 불쌍한 유태인 여성을 만나 그녀에게 미움도 받았다. 사랑만을 원한 것은 아니다. 길가면서 페스트로 죽은 가족과 페스트로 인해 땅에 매장조차 허락되지 않은 그들을 위해 삽으로 그들의 얼굴에 한줌의 흙을 계속 뿌려 주었다.

골드문트는 생명이 살아가는 대지위에 누비고 또한 생명이 꺼져 사라지는 순간 그들을 대지로 보내주었다. 그런 골드문트이었기에 어느 산부의 해산에서 위대한 생명의 탄생을 보았고 한편으로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아름다운 처녀의 순정을 노린 두 명의 사나이를 죽임으로 생명의 허무함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골드문트 이 모든 감정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새겨 그가 위대한 예술가로 변모하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계속된 여행에서 어느 수도원에 세워진 마리아상을 보며 예술가의 길에 접어든 골드문트는 그 예술의 경지에 올라가면서 자신의 감정을 채우고 있던 그 모든 기억, 숨결, 눈물, 기쁨, 우울을 폭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많은 경험과 인생의 모험 속에 골드문트는 자신이 그토록 동경의 대상이었던 나르치스를 만난다. 사실 예술가로 들어서면서 그가 만든 예술작품은 요한의 상인데, 요한은 사실 나르치스를 생각하면서 만든 것이다.

그의 완벽한 감성이 최고의 이성을 지닌 나르치스 신부를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만남을 아주 극적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마을의 무서운 권력가의 집에 들어가 그의 애첩과 사랑을 나눈 골드문트, 그는 권력가의 감시에 걸려 결국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갈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때 나르치스가 때마침 머물러 있어 그의 목숨을 자유와 예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둘은 예전의 스승과 제자보다는 친구로서 대등한 사이로 머문다. 그리고 오랫동안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있는 수도원에서 예술가의 혼을 불태운다. 그의 예술혼은 어머니의 그리움과 나르치스에 대한 동경심이 어우러져 위대한 예술작품이 나온다. 이런 예술가의 혼으로 이루어진 감성의 예술품이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한 이성을 지닌 나르치스를 감동시킨다. 아니 이제는 나르치스가 골드문트가 없으면 못 견딜 외로움과 허무함에 빠진 것이다. 골드문트는 오랫동안 수도원에 머물었지만, 그가 혼을 담은 작품을 만들면 다시 수도원을 나와 여행을 하려했다. 그의 작품은 그의 경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부상을 당하고 병에 걸렸으며, 오래 연명할 수 없었다. 그 마지막 여행은 결국 그에겐 죽음이라는 어머니라는 자연의 품으로 갈 수 있게 한 여행이었다. 골드문트의 여행을 기다리던 나르치스에겐 아마 그때만큼 괴롭고 외로운 시간이 없을 것이다.

결국 나르치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골드문트이나, 그의 가슴에 새겨진 것은 기쁨보다는 슬픔이었다. 골드문트의 귀향은 결국 골드문트의 유언을 들은 셈이었다. 평생 신을 위해 이성을 위해 학자적으로 살아온 나르치스가 어떻게 감성과 경험에 살아온 골드문트와 이토록 깊은 교감과 유대감을 나눌 수 있을까? 진리라는 세계에서 이성과 감성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어도 본질은 진리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세계가 만나는 접점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오랜 여정처럼 기나긴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 소설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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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중학생이 보는 금오신화 중학생 독후감 따라잡기 (중학생 독후감 필독선) 46
김시습 지음, 성낙수 엮음 / 신원문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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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를 읽으면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보통 인문학에서 철학, 문학, 역사학이라는 3가지 대표적인 학문이 떠오르는데, 이 금호신화라는 서적을 보는 것은 결국 이 3사지 부분을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먼저 시대적인 배경에 따른 것을 본다면 김시습이란 인물은 1435년(세종 17)~1493년(성종 24).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인, 생육신의 1사람이었다. 당대 최고의 명군이신 세종대왕 시절부터 시작하여 역사적 풍파와 비극을 앓던 세조시대를 지나 성종을 이어온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비극이란 역사적 현실을 승화할 방법은 현실에 보이지 않으나 현실의 욕망을 투영하는 신화라는 문학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런 시대적인 흐름과 그런 역사적인 배경에서 김시습이 만든 금오신화는 많은 요소를 여기저기 배치하였다. 만복사저포기의 이야기를 들어다보면 먼저 서생이란 선비가 있는데, 그는 아주 학문적으로 우수하고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 어느날 절에 가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슬프게 시를 읊었는데, 여기에 어느 아름다운 아가씨가 응답해준다. 그녀와의 첫 만남 그리고 당시 사대부 사회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은 뜨거운 사랑, 하지만 이 모든 러브스토리는 허망한 스쳐가는 일이었다.

물론 허생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나, 사실 허생이 천상배필이라 여기던 그 아름답고 숭고한 여인은 허무하게 억울하게 외적의 침입에 목숨을 잃은 한 많고 외로운 여인이었다. 자신의 청춘과 사랑을 펼치기 전에 꽃다운 나이로 칼에 맞아 그저 저승에 가지 못하고 이승을 외로이 떠돌고 있었다.

그런 허생에게 그런 운명같은 슬픈 사랑이 다가온다. 겉으로 본다면 분명 이 작품은 그냥 러브스토리로 볼 수 있으나 사실 그 이면에는 이 산과 강이 아름다운 이 조선에 외적의 잦은 침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가족들이 비통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이다. 그런 한이 맺힌 이야기를 두 남녀의 사랑으로 보여준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위해 서생은 평생 결혼 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고, 세상 사람들을 피해 먼 산으로 숨는다. 그가 죽은지는 아닌지는 모르나 이 작품 내에서 서생은 아마 김시습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세상의 속세를 잊고 산으로 강으로 떠나 세상의 시름을 잊어가는 그의 방랑자의 인생을 말이다.

이생규장전은 처음에는 매우 애틋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노래하는 신화다. 가세가 기울어진 사대부 남자 이생, 거기에 비해 부잣집에 귀한 양반 규수인 최랑은 분명 당시 사회나 혹은 지금 사회나 이루어지기 힘든 빈부격차를 둔 집안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빈부 격차와는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서로의 인격과 학문, 그리고 자질로서 사랑을 확인했다.

사랑을 하는데 조건은 그저 조건일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현대사회처럼 모든 물질적인 기준으로 삼는 사랑과 차원이 다른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들의 가치였다. 그러나 현실은 무서웠다. 최랑에 빠진 이생은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은 채로 며칠 최랑의 집에 살다가 추후 귀가 뒤에 밤과 새벽공기를 마시며 만난다. 세상에는 꼬리가 길면 밟히는 것처럼 그의 행동을 주시하던 이생의 아버지는 아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그를 시골로 보낸다.

그러나 어찌 하오리?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한 순수한 불꽃처럼 타오른 두 사랑을 이토록 멀리 유배생활하게 하여 최랑은 병에 걸리고,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외동딸을 세상 그 모든 보물보다 아끼던 최랑의 부모님은 자신의 외동딸을 가난한 선비인 이생에게 시집보낸다. 물론 어렵고 긴 어두운 터널로 들어간 심정이었으나, 길고 긴 터널을 지나면 밝고 화사한 풍경이 있었다.

학문도 출중하고 성품도 올바른 이생이 나라님이 계시는 구중궁궐에 들어가서 국무를 보지 않을 소인가? 허나 이런 기쁨도 잠시, 이듬해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국은 전쟁의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가족과 하인들은 모두 흩어지고, 외로운 아낙네 최랑은 사랑의 기쁨도 잠시 뒤로 한 채 오랑캐의 칼에 한을 품고 죽는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사랑인 이생을 위해 정절을 지켰다.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직접 스스로 성사시킨 사랑인 만큼 모든 것을 승화했다. 그 죽음이란 극단적인 비극으로 말이다.

하지만 죽음은 남아있는 이에겐 절망의 씨앗만 심어줄 뿐이다. 아내 잃은 이생에겐 모든 것이 암흑이다. 그래도 죽어도 죽은 것을 아는 이생이라도 최랑의 혼백은 이생에게는 살아있는 인간과 다름없었다. 죽어나 사나 같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전쟁 통에 죽은 식솔의 차가운 몸과 갈기갈기 찢어져 들판에 뿌려진 최랑을 운구하여 묻으니 저승에 가지 못해 남은 이승의 혼백은 결국 한을 남겨둔 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명계로 떠난다.

이생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듯한 마음으로 병들어 죽음을 기다리다 결국 그녀에게 떠난다. 어떻게 보면 김시습의 마음속의 군주 문종과 단종이 죽을지라도 자신은 영원히 그들을 따를 것이라는 깊은 맹세가 있음이 아닐까 싶다.

최유부벽정기는 홍생이란 젊고 잘생기고 학문이 뛰어난 청년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이야기보다는 그가 있던 배경이 인상 깊다. 김시습이 살던 조선, 그가 그리던 고조선, 이것은 결국 잃어버린 역사 그리고 그 아름다운 시절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홍생과의 시를 주고 받으며, 아름다운 그 시절을 추억한다.

그 추모의 시가 오고가자 어느 순간 하룻밤의 꿈처럼 새벽의 닭이 울자 모두 사라져 간다. 홍생은 그 아름답고도 고귀한 고대왕가의 여인을 사모하다가 결국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순수히 맞이한다. 고조선을 그린다고 하나 사실 홍생에겐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공간이 없어진 것에 대한 김시습의 기분이었으랴.

남염부주지는 정말 김시습의 기분일 것이다. 시대적 배경은 세조 11년이고 경주에 박생이란 선비를 두고 말한다. 박생은 학문적인 기질은 훌륭하고 인품 역시 온후하나 정치에 발을 들일 수가 없었고, 세간에 그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은 박생이 그저 거만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다. 그것은 그가 정말 선비로서 훌륭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세계에서는 그는 그저 마음에 깊은 뜻을 품어도 답답하고 원통할 뿐이다. 그의 원대한 꿈은 현실에서 그저 꿈같은 이야기이므로 오히려 꿈의 세계에서 그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랴? 그는 어느날 이상한 세계로 간다. 그곳은 인간의 세계가 아닌 요물과 뜨거운 염화가 불타는 곳이다.

박생은 거기 가서 염라대왕을 만나고, 세상 모든 이치와 존재에 대해 말한다. 이 신화까지 보면 금오신화의 사상적인 배경은 많은 것이 섞여있다. 일단 우리나라는 무속신화에 담겨 있니는 무속신앙, 그리고 불교사상, 조선의 정치이념인 유학, 또한 도교사상까지 깃들여 있으나 아주 복잡 다양한 세계관이 펼쳐져 있다.

그 중에 최고의 가치는 유교사상으로 주공과 공자의 덕을 최고로 여기며, 다음으로 석가의 도를 칭송했다. 유학은 정론적인 학문이고 불교는 사론적인 학문이나 모든 학문의 최종 목표는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함에서 목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목적이 있는 사상과 학문이라도 현실에서 임금은 백성의 뜻을 거르고, 오히려 백성을 힘으로 누른다는 말처럼 김시습이 여기는 현실에 대한 원망과 한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다행히도 염라대왕은 주자와 공자의 유학이란 덕을 이어 감에 따라 자기의 임기를 채웠고, 이제 새로운 염라대왕을 여기에 앉혀야 한다. 모든 것을 공정하게 봐야할 인물이 필요하고, 그것은 박생이었다. 하지만 박생이 염라대왕이라 함은 결국 김시습이 국록을 먹던 시절에 자신의 군주를 지키지 못한 채 죽어버리게 한 세조와 그의 무리였을 것이다. 결국 현실은 몰라도 저승에서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하는 김시습의 깊은 복수심이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다.

용궁부연록은 위의 이야기와 다르나, 사실 남염부주지와 비교하여 그 내용적인 가치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용궁에 간 박연이 용왕을 만나 자신의 필력을 넓게 보이고 용왕이라는 엄청난 신에게 예우를 받아 신과 대등한 인간임을 내세웠다. 신이 존경하고 신이 우러러 보는 인간, 그 박연은 결국 김시습 자신의 이야기임이다.

그는 용왕에 가서 진지상과 즐거운 잔칫상을 받고, 용왕의 보배를 본다. 그 보배들은 번개를 치고 바람을 불고 물을 넘치게 한다. 재앙을 부를 수 있는 도구였다. 박연이 그것을 유심히 보는 이유는 아마 당시 살고 있는 현실을 부수고 싶다는 깊은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그것이 불가능한 하나의 꿈은 아마 잘 알 것이다.

그런 모양인지 박연이 용궁에서 나올 적에는 비단상장에 보관할 진주와 비단이었다. 현실의 부조리를 없앨 수가 없어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나 그것도 되지 않음에 김시습은 아쉬운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지만 진주와 비단과 같은 보배처럼 이것을 그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고 산으로 떠난 박연처럼 김시습은 평생 보배 같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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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비극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셰익스피어 연구회 옮김 / 아름다운날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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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에 이야기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대한 극작가로 알려져 있다. 나는 그의 이름만 들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잘은 모른다. 단지 아는 정도라곤, 언제나 클리셰처럼 나오는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햄릿왕자가 광대에게 전해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수준일 것이다.

따라서 내가 셰익스피어를 대해 말하라고 누가 물어본다면 그렇게 많은 답을 줄 수 없다. 아니 나는 그렇게 문학을 많이 읽어본 사람이 아니다. 최근에 문학서적을 읽게 되었고, 현대문학도 좋지만 고대문학에도 손을 잠시 대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고전문학 중에서 연극대본처럼 만들어진 셰익스피어의 극을 읽어 본 나는 이 비극들 속에서 오늘날에도 계속 고뇌되고 있는 인간상을 볼 수 있다.

일단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처럼 “리어왕”, “멕베스”, “오셀로”, “햄릿”이다. 사실 처음 책 안을 잠시 볼 때 그냥 일반 소설문체일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또 다시 언급한 것처럼 연극대사본이다. 따라서 작품 서사 전반적으로 당사자 내지 제3자의 관점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상황을 떠오르면 보았다.

물론 연극을 보는 관객이나 연극대본을 보는 독자 입장에서는 관찰하는 제3의 입장이 분명하나 연극대본을 받고 그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은 제3자 사람을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렇다. 그것은 모방이라는 것이다. 연극무대 위에서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재앙과 저주처럼 그 많고 많은 인생의 위기를 아주 강렬하게 구슬프게 때로는 아름답게 표현해야 한다.

그런 것처럼 배우가 청중에게 강렬한 느낌을 주기 위해 배우들이 외치는 대사가 상당히 매력적인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서 전해오는 느낌은 그런 강렬한 문자가 마치 음성으로 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혹은 누군가의 모략으로 또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의해 인간의 운명은 농락당한다.

그 농락의 대상인 4명의 남자는 권력과 사랑 그리고 우정과 신의 앞에서 울고 우며, 또한 분노하고 열을 내며, 다시 차갑고 얼음 같은 심장으로 전개한다. 사실 책을 보면서 비극적인 플롯이 너무 강하게 몰아쳐서 읽기가 낯설었다. 그렇지만 그런 몰아치는 듯한 전개와 그 전개에 따른 인물들의 강한 감정 이입은 4대 비극이 결코 그들만의 비극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번째 작품인 리어왕은 아버지의 권위와 딸의 배반, 그리고 치정의 관계, 거기서 피어나는 왕가의 몰락! 그것은 단순히 우리 인간사를 풍자하는 듯한 느낌이다. 효란 무엇인가? 태어나면서 천륜이라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막내 공주 코데리아만이 그녀의 아버지 리어왕을 진심으로 섬겼다. 하지만 리어왕은 어리석게도 이기적인 코데리아의 2언니를 믿었다. 결국 코데리아를 내치고 후에는 2언니에 의해 거지 왕이 되어 참혹하게 살다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사랑하는 딸을 잃는다.

하지만 이 작품의 중요성은 과연 효란 무엇인가? 그것을 말로 특히 미사어구적인 표현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오히려 사람에게는 가져야할 도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를 원한다.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서사적인 존재이므로 그런 비극이 닥친 것이다.

2번째인 멕베스는 형을 죽이고, 사랑하는 동생까지 죽이는 비극이다. 리어왕처럼 이것 역시 왕권에 대한 욕심과 거기에 얽매인 형제의 비극이다. 멕베스는 그는 영웅이고, 충직하나 마녀의 속삭임을 듣고 거기에 홀린다. 물론 마녀의 예언으로 멕베스는 자신의 군주이고 형이고 친구인 던컨을 차가운 칼로 베여 버린다. 왕족의 후예답게 왕이 되었으나 그는 진심으로 왕이 되지 못했다. 죽은 자신의 형이 유령이 되어 그를 정신병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멕베스가 과연 마녀의 말만 믿고 했을까? 아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마녀가 살아 있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오만과 방종을 자신의 세계에서 찾기보다는 자신의 외적인 영역에서 찾는다. 멕베스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인물은 언제나 운명의 신에 의해 농락을 당한다. 마치 완벽하게 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결국 죽음으로 이르는 병으로 말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은 멕베스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마녀의 예언에서 멕베스는 영주가 되고 왕이 되지만, 멕베스의 충직한 부하요 친구인 벤쿠오에게는 멕베스를 왕이 된 후에 스코틀랜드 왕은 멕베스의 후손이 아닌 벤쿠오의 아들인 폴리언스라고 한다. 하지만 그 권좌는 던컨의 아들인 멜컴이 되었다. 마녀의 마지막 예언은 틀린 것이다. 마녀는 요상하게 인간을 유혹하고 있었고, 예언을 맞추었으나 최후의 예언은 빗나갔다. 결국 마녀는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회피하기 위한 장치임을 보여준 것 같았다.

3번째 오셀로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솔직한 인간이 어떻게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가를 보여주었다. 오셀로는 멕베스처럼 정달 대단한 영웅이고 용감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다. 게다가 용기와 힘뿐만 아니라 이 세상 최고의 미녀인 데스데모나라는 여인이 오셀로의 영원한 사랑의 피앙세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이란 누구든 자신이 열심히 한다고 해도 만족하거나 혹은 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좋은 것이 오기를 바란다. 그게 바로 이아고의 간악한 처세술이다. 우리는 이아고라는 극단적인 악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서사구조에서 안정된 세계에 외적인 침략이 들어와 이것을 극복하여 내부의 결속을 다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외부의 갈등이 있음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멕베스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난 평화는 오히려 평화가 아닌 저주의 그림자로 드리워진다. 이아고는 그런 평화로운 세계에서 평화가 과연 있을까라고 여기게 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이아고를 보면서 우리들은 “정말 저 사람은 나쁘고 추악하고 이기적이야” 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이아고야 말로 우리 인간들이 보이는 그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들추는 것이 아닌가?

우리 인간들은 항상 자신들이 착하기 위해 자신들만 피해자인 것처럼 자신들이 정의를 가진 존재인 것처럼 위선을 떤다. 그 위선은 가식과 속임수를 만들어 상대방에게 풀어내지도 못함 올가미를 만들어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낸다. 그런 이아고를 보면서 과연 이아고만의 문제일까? 인간의 사소한 감정과 상대방에 대한 야유와 시기, 그리고 거기서 꽃처럼 피어나는 비극의 물꼬들!

그런 비극을 만들어 가면서 모든 희극적이야 할 존재들은 비극의 저주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죽어야할 이아고는 죽지 않고, 계속 그들의 죽음 속에서 살아남은 채로 존재한다. 물론 모든 음모는 발각되어 이아고의 죄는 어떻게든 보상받으려 하나 그 보상할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그를 잔인하게 어떻게 고문하였는지 혹은 높은 나무걸이 위에 숨이 쬐어 오는 고통도 맛보게 하지 않고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이아고의 부정은 발각된 망정 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그가 사라지야 할 자리에는 죄 없는 많은 어리석은 바보들만 사라져간다. 하지만 이 바보들의 죽음은 이아고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바보들은 자기만 옳다고 여기고,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사람만 믿었다. 진정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좋은 말만이 아니라 진실의 말도 필요하다.

마지막 햄릿은 비극적인 요소를 참으로 장치적으로 보여주었다. 햄릿을 사랑하는 많은 백성과 친구, 그리고 어머니, 하지만 햄릿에게는 많은 관심과 인심이 비추어도 그는 기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오히려 슬프고 좌절했다. 그가 사랑하고 존경한 인자하고도 훌륭한 국왕이 죽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모자라 자신의 어머니는 상복을 벗어 던지기가 무섭게 햄릿의 아버지 동생인 클로디어스와 결혼한다.

국왕이 죽자 국왕의 동생이 국왕의 아내와 결혼했다. 어떻게 본다면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일 수도 있고, 권력에 대한 욕망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비극이 원통하게도 죽은 이의 혼이 사라지지 못할 정도로 햄릿의 아버지는 유령이 되어 성안에 출몰한다. 그의 원통한 죽은 햄릿에게 전파되고, 햄릿은 이전부터 여긴 아버지의 부재로 고뇌하던 것이 이제 그를 미치게 한다. 물론 그는 미친 것이 아니라 미친척을 했다.

그것은 가짱 아버지인 클로디어스를 속이고, 자신이 살아남아 복수를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의 물증과 심증을 잡기 위해 미친 척을 하고, 자신이 진정 사랑하던 아름다운 여성 오필리아를 상처주면서 말이다. 햄릿이 미친 사람처럼 헛소리할 때 오필리아에게 내뱉은 그 장난도 아닌 농담들은 오필리아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최후에 오필리아가 자살할 때 햄릿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 오필리아의 죽음에 깊은 비통을 겪는다.

햄릿은 자신의 대의와 아버지의 복수, 그리고 어머니를 되찾기 위해 미쳤다면, 가엾게도 오필리아는 정말로 미쳐서 죽었다. 그것은 슬프게도 그녀가 가장 사랑한 햄릿의 손에 죽은 오필라이의 아버지 사건 때문이었다. 어떻게 서로가 사랑해도 사랑을 진실로 표현하지 못하고 광기에 쌓여 한쪽은 연극으로 한쪽은 진실로 나온다는 말인가? 게다가 오필리아 아버지 클로니어스의 죽음에 복수심을 다지던 오필리아의 오라버니인 레어티스는 햄릿과 가까운 사이고 좋은 남자였지만, 그 역시 순간적 이성을 놓치고, 자신의 간악한 꾀에 스스로 파멸로 이끈다.

햄릿과의 최후의 결투에서 독을 바른 칼을 서로의 손에 잡고 서로에게 상처 내어 죽음으로서 서로를 화해한 2사람의 우정은 서로 친한 친구라도 순간의 악의와 오류로 되돌리수 없는 비극을 보여주었다. 그런 비극을 만든 클로디어스는 햄릿을 논에 가시처럼 여겨 포도주에 독을 탔으나, 그 포도주는 햄릿의 축배로 햄릿을 독살하려 했으나, 그 독배는 클로디어스와 햄릿이 사랑하던 아내요 어머니인 거트루드의 입에 들어간다.

결국 햄릿의 어머니는 햄릿이 보는 앞에서 독이 온 몸에 퍼져 죽고, 햄릿의 친구인 레어티스는 자신의 독칼에 죽고, 이것을 보고 분노한 햄릿은 그 모든 원흉을 죽이고, 자기 역시 칼에 묻은 독에 의해 운명한다. 자기 운명을 결코 이렇게 비극으로 갈 생각이 없었으나 세상은 혹은 거대한 인간의 욕망은 결국 모든 것을 잡아 삼켜 그들을 하데스의 지하궁전으로 데려가 버린다.

그러나 이 모든 비극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만 숨쉬는 것이 아니다. 비극적인 연극에서도, 이 각본을 이용한 영화에서도, 혹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도 일어난다. 비극은 멈추지 않는다. 비극이 이토록 쉽게 일어나는 것은 우리는 누구를 너무 시기하거나, 너무 쉽게 믿거나, 쉽게 화를 내거나, 쉽게 남을 우습게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희생자들은 자신에게 악의가 없이 선의로 가득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우리도 죽음이 아니더라도 이런 비극은 비켜가는 것이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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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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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의 주인 여러분, 당신들에게 다스려야 할 하급 동물들이 있다면, 우리 인간들에겐 다스려야 할 하층 계급들이 있습니다”. 이 <명언>에 온 좌중이 함성을 질렀다. 필킹턴 씨는 다시 한번, 동물농장이 식량 분배는 줄이면서 노동시간을 늘린 것을 축하하고 그가 본 대로 이 농장에는 동물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축하했다.

위에 적힌 긴 문장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적힌 결론부의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흔히 반공사상(反共思想)이라는 것을 들었다. 그렇다! 과거 실패하고 돌아오면 안 될 소비에트 연방의 문제를 거론이란 점이다. 전에 다른 책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틀린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그런 최후의 일격은 20C 말에 다가오는 쯤에 동독이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한 역사적인 기념일이다.

그런다고 이런 승리를 누린 자본주의(資本主義) 역시 승리자인가?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은 공산주의(共産主義)도 자본주의 모두 패배자이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표방한 소비에트 독재자(獨裁者) 스탈린을 연상케 하는 돼지 나폴레옹의 폭력정치(暴力政治)와 또한 대표적인 자본주의국가인 영국을 상징하는 필킹턴 씨의 최후의 이야기들이다. 늙은 암말인 클로버는 앞 눈이 침침하나 동물농장의 주인인 나폴레옹과 필킹턴의 카드놀이에서 마치 비웃는 듯한 느낌이 살아있다.

인간이나 돼지나 모두 똑같았다. 그들은 서로 스페이스 카드만 내밀고 있었다. 사실 소련은 공산주의라고 하나 그것은 허구적인 공산주의이고, 국가자본주의였다. 해설에도 나오지만, 이제 막 죽기 일보직전이 늙은 돼지인 메이저는 영락할 것도 보이지 않은 듯 칼 마르크스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과 공산주의 선언으로 통해 노동자의 인권(人權)을 보장해 보려 했다. 물론 그의 진정한 의도는 훌륭했으나, 문제는 그의 생각은 어느 순간 변질되어 버린 사상이 되었다. 바로 스탈린 같은 폭력적인 독재자 돼지 나폴레옹 때문이었다.

또한 동물농장의 배경이 아일랜드의 점도 중요하다. 아일랜드 사실 영국에 의해 압박받던 곳이다. 게다가 아일랜드 역시 영국에 의해 각종 잘못된 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공간적으로 영국과 밀접한 장소, 그리고 영국은 마르크스가 최후의 임종을 지킨 곳이다. 단지 분명한 사실은 영국에서나 혹은 기존 유럽국가에서는 노동자의 착취가 상당했다는 점이다. 갖은 고역, 비위생적인 음식과 생활, 비인간적 대우 등 그래서 이 소설에서 혁명은 당연한 역사적인 과정을 인증한다.

그러나 혁명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하나의 거대한 서사가 이루고 나면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서사가 흐른다. 메이저의 죽음과 맞바꿈 정신은 결국 스노볼과 나폴레옹의 갈등으로 인해 파탄난다. 스탈린이 스노빌같은 트로츠키를 몰아낸 것처럼 여기서 스노블은 나폴레옹의 충실한 견공들의 위력에 쫓겨난다. 그리고 평생을 동물농장에 나타나지 않으나, 무슨 일인지도 몰라도 스노빌의 유령은 다시 나타난다. 또한 거기에 메이저의 유령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 유령은 결코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돼지의 군주인 나폴레옹을 그들의 유령을 계속 생산하고 또 생산하여 하나의 거대한 악으로 구축했다. 이것은 독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희생양을 내듯이 말이다.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숨기려 해도 그 문제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동물농장은 갖은 가난과 추위 그리고 빈곤과 차별에 시달린다.

평등을 중시한 동물농장이 어느 특정대상을 평등을 중시했다. 어긋난 소비에트를 비웃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웃기게도 조지 오웰은 그들의 공산주의를 비웃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도 비웃었다. 영국이란 국가는 과거 식민지 활동과 더불어 제국주의(帝國主義)적인 면을 나두고도 민주주의 틀에서 과거의 수탈범죄를 감추려 했다. 그렇다면 동물농장에서 비웃고 비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크게 세계적으로 2원화된 정치·군사·외교적인 대립이었다. 그 대립에서는 서로들은 자국민들, 즉 많은 대다수의 약자 편이라 외치나 그 실상은 서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순수한 영혼을 악령(惡靈)으로 변모하고, 악령 그 자체는 성령(聖靈)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도 그런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세상이어도 그 체계는 잘 굴러가고 있었다.

순진하다고 소문난 동물인 양은 처음에 “네발은 좋고, 두발은 나쁘다”라고 하여 정치적인 선전에 아무런 비판 없이 흘러간다. 그런데 나중에 “두발은 좋고, 네발은 나쁘다”고 한다. 그 네발에서 두발로 된 존재는 나폴레옹을 비롯한 많은 돼지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가식적이다. 두발로 서는 인간을 혐오하다 결국 자신들이 두발을 가지고, 옆 동네 농장주와 맥주를 마신다.

게다가 많은 동물들은 나폴레옹의 수하 돼지 스퀄러의 말을 모두 믿었다. 거짓된 통계와 홍보 그리고 음모까지, 이 모든 것을 본다면 조지 오웰은 무비판적인 대중들에 향한 비판의식이 보인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대중들만큼 지식인에 대한 비판도 개의치 않은 듯하다. 돼지들은 모두 이렇게 명분을 댄다. 모두 여러분들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이런 문구는 당시 조지 오웰이나 현재 세계 어디에서의 거짓된 정치가(政治家)들이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어떻게 본다면 정치체제는 단순히 겉모습일 뿐인지 모른다. 단지 그 체제 속에서 어떻게 해가는 것인가이다. 아니라면 단순히 흑백논리(黑白論理) 이원화(二元化)적인 사고로 통해 이념적(理念的) 대립(對立)을 외치며 정작 중요한 숙제를 잊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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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록 고려대학교 청소년문학 시리즈 6
하인리히 하이네 지음, 김재혁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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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感性)적이고 따뜻한 영혼(靈魂)을 가진 하인리히 하이네를 생각하면 조금 나는 의아한 기분이 든다. 나는 하인리히 하이네라는 시인(詩人)을 다른 경로로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맑스·엥겔스 평전에서 맨 뒤에 나오는 아주 불같이 일으키는 분노와 매우 슬픈 우울(憂鬱)함과 비참(悲慘)한, 그리고 절망(絶望)의 시로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직조공의 노래, 정말 이 시는 정말 그 분노가 하늘을 뚫고 슬픔을 바다보다 깊고 깊었다. 그들의 비극(悲劇)과 절망은 우주(宇宙)의 암흑(暗黑)과 같이 넓게 팽창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런 우울함과 비참함을 해결할 수 없었다. 단지 저주스러운 베를 짜는 기계에 음율(音律)에 맞추어 이 세상을 저주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 “회상”이란 서적을 들었을 때 바로 그런 19C 독일과 유럽의 이야기를 적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 내용을 열어 보았을 때는 그의 인간적인 면과 그리고 그가 살아온 인생에서 옆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 적은 글이다. 그렇다, 이것은 하인리히 하이네가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로 통해 비추어지는 회고록인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한 회고록은 아닌 듯하다. 약간 감성적이고, 유머로운 느낌이 드는 문체 속에는 그가 어떻게 오늘날 살아왔는지, 혹은 독일이란 역사에서 어떻게 변모되는지, 또한 그가 마르크스를 만나기 전후로 독일에서 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또한 차별받던 인간백정의 손녀 이야기를 다루었다.

내가 인상 깊은 것은 하인리히 하이네의 부모였다. 어머니는 전형적으로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으나, 현대사회에 보이는 어머니와 비슷한 점이 보였다. 아들의 출세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는 어머니라는 점이서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달리 그에게 매우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것 같다.

외모는 아주 부드러우나 말이 없고 남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하이네가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닐 때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할머니에게 친절했다. 특히 주변에 사는 말썽꾸러기의 할머니에게는 의자를 직접 건넬 만큼의 친절함이 보였다. 그리고 때로는 호탕함도 있었다. 동네 경비대장을 맡으면 자신의 몸을 감싸는 제복에 흡족함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하이네의 어머니에게 강력한 얼굴로서 거수경례를 날리는 아버지, 또한 장사에 큰 수단능력은 없으나 자신의 장사로 통해 자신의 가치를 찾는 아버지, 아버지는 분명 좋은 마음을 가진 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20년이 지난 후인데도 하이네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기시키면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컸을까?

이 책에서 인상 깊은 것은 하이네의 모험담이다. 그는 자신의 첫키스를 자신의 첫사랑보다는 자신이 느낀 세상의 부당함에 날렸다. 자기 집에 자주 찾아오는 어느 노파가 있었다. 그 노파는 사형집행인 즉 도부수의 아내였다. 그녀에겐 조카딸 제프헨이었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마치 석상에 그대로 옷을 입은 듯한 소녀, 그 소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마음을 가져도 단지 사형집행인의 혈통이란 이유로 당시 배척받은 듯했다.

난 그 소녀의 무용담을 아주 흥미롭게 보았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어느 노인들과 같이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들이 어디 숲에서 몰래 모여 서럽게 울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떤 천에 감추어진 물건을 땅에 묻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도부수들이 사형에 집행할 때 사용한 큰 칼이었다. 사람 머리 100명을 자르면 그 칼에 악령이 깃들기 때문이란다. 사람 머리 100개를 자른 칼을 묻어서 슬퍼하기 보다는 나는 100명이나 죽이야 하며 살아야 한 그들의 눈물이 인상 깊었다.

정말 그들이 슬퍼하던 것은 칼 그 자체를 묻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들의 설움을 칼이란 매체에 통한 것이었을까? 제프헨은 이 칼을 자기집에 보관되어 있음을 하이네에게 말하고, 하이네는 그녀에게 그칼을 보여달라 하였고, 제프헨이 그 칼을 하늘높이 치세울 때 하이네는 제프헨의 입술을 맞춘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갇힌 현실적인 모순에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도전한 것이다.

그렇지만 하이네와 아름다운 붉은 머리 제프헨이 서로 읊어주는 시는 아름답고도 슬프다.

<사랑하는 오틸리에, 나의 오틸리에예,
내가 마지막 여인을 아니겠지-
말해줘, 넌 높은 나무에 매달릴 거니?
아니면 푸른 호수에서 헤엄칠 거니?
아니면 사랑하는 신이 내려주는
반짝이는 칼에 입 맞출 거니?>

이에 대해 오틸리에가 대답한다.

<난 높은 나무에 매달리고 싶지 않아,
푸른 호수에서 헤엄치고 싶지도 않아,
나는 사랑하는 신이 내려주신
반짝이는 칼에 입맞추고 싶어!>

아마 이 시는 사형집행인이 사형당하는 어느 여자를 두고 하는 시인듯 하다. 높은 나무에 목을 거는 교수형, 물에 빠져 죽이는 익사형, 그리고 입에 칼을 입맞춤 하게 하는 참수형. 아마 이 시는 사형집행인이 사랑하던 여인을 자기 손으로 베야 하는 어느 청년을 슬픈 연가(戀歌)이리라. 그것은 독일 전통 민요 중에 하나라고 했다. 어찌나 슬픈 제프헨과 하이네의 포옹을 눈물로서 1시간 이상 거대한 비가를 불렀다.

그리고 하이네는 붉은 머리 제프헨에게 입맞추고 나서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에 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을 탐닉한 이야기에서 왠지 모를 여운이 느꼈다. 독일의 격변기에서 직조공의 노래로 당시 국민들의 분노를 토한 하인리히 하이네의 모습에서 조금 슬프기도 조금 재밌기도 조금 섭섭하게 들리는 이 회고록에서 정말 그가 시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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