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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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험버트 험버트..

 



그는 자신이 사랑한 아름다우면서 지저분한 롤리타의 영원한 맹아(萌芽)였다. 아니 오히려 험버트 험버트는 롤리타가 있었기에 죽는 그 순간까지 맹아로 살아갔다. 소설 롤리타는 2중 적인 구조를 가진다. 먼저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라는 러시아계 남자가 적은 글이고, 이 롤리타의 원고는 주인공 험버트의 일기를 토대로 존 레이 박사가 복원한다. 

이 작품에서 험버트는 막대한 벌을 받았다는 점과 그 벌을 받는 이유가 엄청난 죄악이 있었다는 사실과 또한 그는 자신의 죄를 모두 소화(消火)하기 전에 자신의 인생 자체가 소화(消化)해버렸다. 그렇다. 그는 지독한 알콜 중독과 심통증으로 인해 이미 자기 자신을 영원히 하려던 롤리타 곁이 아닌 쓸쓸한 쇠창살이 가득한 추운 곳에서 인생을 마감한다.

험버트는 과연 불쌍할까 아니면 당연하게 벌받은 것인가? 책 마지막까지 읽은 나로서는 이 책에서 도덕적인 교훈 따위는 아무런 가치 없다는 말을 상기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롤리타라는 소설을 그런 뻔해 보이는 정의 - 겉으로는 정의로우나 속내는 사회적 이념이란 틀에 끼워 맞추기 바쁜 속물 - 보다는 험버트의 정의로만 이루어진 책이라 보았다.

이 책에서는 처음부터 인륜의 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열정적으로 혼자 병적으로 살아간 반미치광이 광대 같은 문학가인 험버트에게 모든 열쇠를 주어진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인간의 성적욕망(性的慾望) 혹은 그 성적욕망을 뛰어넘는 이야기에 흥미로웠다. 근친상간(近親相姦)과 치정(癡情)으로 얼룩져서 모두 파멸하는 클리셰라는 패턴적인 흐름에서 극적(劇的)으로 벗어난 것에 재미를 느꼈다.

대개의 작품의 서사에는 사건의 발달되는 부분부터 시작한다. 가령 어떤 인물이 사건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모든 이야기가 보통 우리가 보는 시나리오이다. 시공간은 일치하여 흘러가도 그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과 상황은 과거에 어떤 인물과 시대적인 사건과 상황에 따라 나타난다. 가령 어느 남자가 차를 몰고 가는데, 알고 보니 그 차의 트렁크 자리에 있는 얇고 넓은 판 아래 보조 타이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 대신 마약이 있다는 것이다. 본래의 차주인은 마약거래상이었으나, 마약을 돌리기 위해 그 차를 대포차로 변용하여 숨기다가 차의 특정 부위에 표시를 하여 다시 재구매하여 마약을 빼돌리는 수법 등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것이 없다. 단지 험버트의 시간과 공간의 연속적인 역사와 기록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단지 험버트 이외의 과거는 타인이 과거다. 험버트는 오로지 지금의 험버트에게 충직했다. 그리고 충직함은 모두 우리의 영원한 히로인 혹은 영원히 닿지 못할 수 있는 롤리타인 로!, 롤라!, 롤리타! 돌로레스 이었다.

험버트는 자신이 영원히 사랑했던 돌로레스를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Q라는 유명한 성불능 극작가 죽이고, 당장 가식적 사랑에 의해 결혼한 살로트를 뒤로 한 채, 아버지의 과도한 집착은 곧 롤리타의 주변사람들과 생활까지 피곤하게 하였다. 오로지 롤리타는 험버트 안에서만 모든 것을 이루어져야 했다. 

과도한 아동성도착증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파멸로 떨어진 험버트는 왜 그럴까? 위에서 그렇게 내가 적어 놓았지만, 본래 작품의 시점은 사건을 중심이나 여기는 인물의 일기를 중심으로 간 것이다. 어린 시절 험버트는 어머니의 사랑을 실컷 받아야할 3세에 어머니가 어이 없이 돌아갔다. 그것도 벼락을 맞았다는 설정에서 말이다.

피크닉에서 벼락을 맞다니(피크닉을 비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을 때 간다는 자체가 이해가지 않는다)? 보통 맑은 날씨를 가진 하늘에 벼락 치는 일은 없으며, 설사 일기현상이 어지럽게 산란해도 벼락이란 것이 인간의 몸에 떨어질 확률은 더욱 낮다. 게다가 벤저민 프랭클린 이후 과학이 계속 발달되면서 번개가 지면으로 떨어지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피뢰침이 설립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의문이다. 나는 솔직히 인스턴트 식품인 햄버그를 먹다가 병이 들어버린 험버트의 과거에서 그의 어머니는 자연 재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재해로 죽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했고, 험버트는 뭇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미남형이다. 그렇다면 험버트 아버지 역시 미남이 아닐까? 많은 여성들이 험버트의 아버지를 에워 있었고, 그녀들은 어린 시절의 험버트를 귀족아이처럼 대해주었다.

사실 험버트를 보면 나는 이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와 느끼는 부분을 많이 넣은 것으로 보았다. 가령 그가 귀족 출신 아들이란 점, 또한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자기네 가족들이 이주를 간 것이다. 그의 이주는 곧 프랑스에서 자신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발레리나의 정부 러시아 장교를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험버트에게 거짓 사랑으로 대해준 그 프랑스의 뚱뚱하고, 험버트가 멍청하다고 생각되던 발레리나는 결국 러시아의 퇴역장교와 눈이 맞았다.

그러나 그런 작가의 울분이 있는지 2명의 정부들은 1945년 미국 어느 실험에 의해 죽게 된다.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결혼초기에 그 프랑스 발레리나의 묘사에서 험버트는 마라(프랑스의 혁명의 지도자)처럼 보았고, 그녀가 즐겨보던 신문을 거론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소비에트 혁명에 의한 자신과 자신의 가족사에 암울함을 내비춘 듯하다. 

그런 암울함을 어떻게 소설에서 묘하게 롤리타로 우리를 자극할까? 불우한 험버트 소년은 자신보다 몇 달 연상인 애너벨을 사모했다. 험버트는 어머니도 없이, 아버지는 낯선 여자에게 빠지고, 그 낯선 여자는 험버트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아량을 떤다. 가식적이고 욕망으로 가득찬 어른세계에 그는 숨을 쉬기가 짜증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있다. 애너벨 그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소년시절의 님펫이었다.

마치 울창한 숲속의 작은 공터에 자연의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아름답게 미소짓던 그 작고 귀여운 천사같은 요정 님펫! 순수함과 어설픔을 동경하던 험버트는 애너벨에게 푹 빠졌고, 그녀로 통해 성적 만족을 배운다. 그리고 그 만족은 해변에서 들리던 파도소리, 그리고 애너벨의 육체로 통해 영혼을 위로했다. 하지만 애너벨과 헤어지고, 그녀는 얼마 후 병으로 죽는다.

험버트는 오로지 암흑이었다. 그는 자신의 공허함을 메우려 했다. 10대 창부(娼婦)와 돈으로 사랑을 나누었지만, 10대 창부는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결국 험버트는 9~14세의 님펫 즉 롤리타 소녀를 찾기 위해 창부알선처로 가고 어느 낮선 집에 간다. 그러나 그 소녀는 님펫도 아니고, 님펫라고 여기지 못할 추잡했다. 그런데 이 집의 마귀할멈과 무식한 2남자는 험버트에게 돈을 내라 한다. 사실 험버트는 돈을 주기 싫었으나 15세의 뚱뚱한 소녀의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돈을 주고 가버린다. 험버트는 물론 폭력적인 2남자가 두려웠으나 더 두려운 것은 15세의 돼지 같은 추잡한 소녀의 모습이 애처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고통과 슬픔은 잠시 험버트는 미국으로 가면서 어느 조용한 마을로 간다. 거기는 흑인들이 종살이를 한다. 아마 작가는 미국이란 국가는 흑인은 하인, 운전기사, 심부름꾼 등 따위의 백인들의 수족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험버트는 1910년에 태어나 1923년 슬픈 사랑 이후 1935년의 발레리나의 합법적인 동거 그리고 1937년 마침내 자신의 있을 곳을 찾는다.

자신의 영원한 롤리타인 로, 돌로레스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12세인 롤리타에겐 크나큰 장벽이 있었다. 담배를 피면서 집요하면서 똑똑한 살로트라는 로의 어머니가 있었다. 험버트는 자신은 롤리타를 사랑했다. 하지만 롤리타와 롤리타의 어머니는 험버트에게 모든 것을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 험버트는 오로지 롤리타의 모습을 합법적으로 다가가서 어느날 몰래 성적 유희를 즐기기 위해 살로트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 결혼은 살로트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롤리타를 다가가기 위해서다. 살로트는 남편 없이 살아가는 과부다. 그녀의 어린 딸인 로는 아버지 없이 사는 소녀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기고, 남편이 생겨버린 2여자는 성적욕망이란 대립관계가 펼친다. 물론 엘렉트라 콤플렉스에서는 딸과 아버지의 사랑이 강하다. 어머니를 로에 대한 질투, 그리고 지적이면서 미남인 험버트를 차지하기 위해 로를 캠핑 보낸다.  

그리고 험버트를 차지하고 결혼하나, 결국 그의 마음은 오로지 롤리타임을 알고 낙담한다. 그런 후에 자신의 성난 기분을 참지 못해 살로트는 우체통으로 뛰어가나 우체통 옆의 아스팔트 도로가 포장작업 미완료로 자신의 발에 앞으로 넘어지고, 거기에 간사한 남자의 차에 치어 즉사한다. 평생 로에게 아닌 사랑스런 롤리타에게 아무런 희망을 찾지 못할 것만 같던 험버트에겐 큰 행운이었다.

그렇다. 험버트는 로를 데려 오기 위해 캠프장에 가고, 그녀를 태우고 계속 여행을 다니고, 잠시 정착하다가 여행을 떠난다. 처음에는 보는 것으로 냄새 맡는 것으로 살짝 스킨쉽에서 모든 만족을 느낀 남자는 이제는 로를 자신의 딸이 아닌 자신의 정부로 만들어 버린다. 이미 캠프에서 12세의 로는 처녀가 아니게 된다. 그런 로를 보며 험버트는 처녀가 아닌 처녀인 로의 그런 공간을 채우겠노라 하며 그녀를 자신의 모든 성적욕망의 천국계단으로 여겼다.

그리고 험버트는 성적욕망과 환상적인 사랑도피에서 기쁨을 느꼈지만, 그만큼이나 많은 초조함에 시달렸다. 어느 낯선 대머리 남자가 따라와 로를 유혹하고, 그 로를 어느 병원에서 데려가 마치 3류 포르노가 나올 법한 공간에서 포르노 배우처럼 행동하길 바란 것이다. 그는 유명한 극작가에 시나리오 작가인데 말이다. 하지만 로는 그것을 거부하고 도망치고 여행의 종착지인 어느 외팔이 남자의 아내로 된다. 그 아내는 성이 처음에는 헤이즈에서 험버트 이제는 리처드 실러부인으로 생을 마감한다. 

피가 이어지지 않은 부녀간의 정욕과 그 정욕에서 벗어나려던 롤리타 돌로레스는 처음에 어머니를 질투하여 의붓아버지 험버트를 얻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집착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변남자에게 시선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런 시선과 외면은 오히려 험버트에게 질투와 집착만 올릴 뿐이다. 이에 반해 롤리타 역시 험버트에게 질투를 느낀다. 험버트가 학교에 잠시 정착하여 살 때 그에게 롤리타 학교친구가 와서 서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롤리타가 보고 은근히 험버트를 무시한다.

그가 어린 님펫을 좋아해서라는 특징일까? 아니라면 자신만 보다가 다른 여자를 보고 있다는 하나가 걸리는 것일까? 물론 험버트는 중간에 돌로레스 험버트가 실러 부인으로 되면서 리카라는 정신이 산만한 여자에게 빠진다. 3번 이혼에 7번째 기사에게 버린 받은 불운의 여인에게 말이다. 로를 찾는 것에 지쳐 빠진 리카이나 그녀는 롤리타의 그늘에서 험버트를 구해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외팔이 목수와 살던 로는 자신의 삶이 가난하고 추잡해도 외팔이 옆에서 외팔이의 다른 팔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까지 임신해 버렸지 않은가? 그렇지만 로의 입에는 담배가 하얗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가 사산아(死産兒)를 낳고 죽은 이유는 아마도 그런 인과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지는 않으리.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조금 생각난 책이 있었다. 로가 비어즐리 여학교에 다닐 때 약간 의아하게 여긴 부분이 있었다. 1947년 로와 방랑을 떠난 험버트는 1년 동안 과소비를 하면서 1948년 미국 동부에 머물면서이다. 1948년이라면 미국에서는 세계 제2차 대전 이후라는 점이고, 또한 당시 미국에서는 자본주의화가 가속되었다.  

예전에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도서 “섹스와 돈”이란 서적을 보며 이때의 미국 사회상에서는 전역군인들이 많았고, 이 군인들에게 많은 전쟁후원금이 주어졌으며, 여자들의 결혼연령이 낮아졌다는 통계자료가 있었다. 여자들은 이전 기성세대와 달리 화장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잡지와 영화로 통해 데이트를 즐김으로서 대기업은 이익은, 남성은 여성을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속박을 강요하던 시대이다.

그런 모습을 비어즐리 여학교에서 보인다. 교장은 험버트에게 명랑한 소녀를 데이트하기 좋은 아이, 사교적으로 춤도 추고 노래도 하며 또한 상대방과의 대화도 잘 하기 바라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그것은 여자아이가 마치 남자에게 사랑스러운 애인으로 갖추어야 덕목을 가르치던 느낌이었다. 물론 작가는 그런 느낌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시 사회의 당연시 여김 하나의 사회적인 분위기였다. 그것을 아는 부분은 바로 로의 어머니다. 그녀는 남편 없이 담배를 그저 하나의 권위적인 모습으로 피워 문학가이면서 향수회사의 도움을 받는 험버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물론 이미 죽은 미스터 헤이즈의 경제적인 여력이 있었겠지만 말이다.

오늘날에 와서 여전히 롤리타는 끊기지 않고 입에 오르고 내리는 신화적인 도서다. 아니 그 도서에서 험버트가 열정적으로 집착하는 롤리타는 이른바 롤리타 콤플렉스, 즉 로리콘으로 변용되었다. 어린 소녀에 대한 열정적인 성인남자의 집착, 사랑, 질투, 강요 그것은 자신은 이미 더럽혀진 존재임에도 더럽히지 않은 존재에 대한 동경이고, 그 동경마저 더렵히고 싶은 충동이 어긋난 사랑으로 틀어진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영원한 롤리타는 없다. 비록 험버트의 기억 속에서는 돌로레스는 영원한 롤리타로 기억되어 심장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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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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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악의(惡意)라는 소설을 보면서 생각이 나는 것은 악의가 있다면 분명히 악의에 반대되는 선의(善意)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악의를 품는다는 것은 분명 그 악의의 감정을 품는 대상이 처음부터 악의를 단순히 감정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아주 나쁜 마음으로 그것도 비겁하고 치사한 마음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때 나는 순간 예전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다산 정약용은 원래 정조 시절의 매우 뛰어난 정치인이고, 사상가였으며, 철학가였으며, 또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어떻게 본다면 한국의 고전철학사에서 그 종점은 다산 정약용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다산 정약용은 정치적인 붕당정치(朋黨政治)로 인해 남인(南人)이라는 이유로 벽파(僻派)인 노론(老論)에게 심한 정치적 보복을 당한다.


그런 보복을 당하기 전에 다산의 옛날 친구가 다산을 모함하려다가 오히려 역으로 들통 나는 바람에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다산은 예전 친구가 배신했다고 해도 그를 원망하거나 책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위해서 감옥에서 방면시키도록 사방으로 알아보았다. 또한 그 친구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그의 가족생계(家族生計)를 위해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에 있으며, 또한 그런 친구는 어디 있으랴? 아마 현대에 살아가는 나로서는 이런 친구가 단 1명이라도 있다면 분명 내 인생은 성공했다고 본다.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친구는 억만금의 보화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라는 차가운 생각들은 결국 친구라는 존재 역시 이용가치로 전략해 버렸다.


이런 슬픈 현대사회의 외로운 인간 속에서 나는 이 악의라는 소설의 비극을 본 것이다. 일단 다산 정약용은 그 친구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 친구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다산을 배신했다. 그는 1800년 학자군주 정조가 붕어하게 됨에 다산을 마지막까지 내몰린 것을 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짓된 음모까지 꾸몄다. 다산은 1801년 신유사옥과 황서영백서로 인해 정치적·사회적인 권리를 모두 빼앗겨 버렸다.


물론 다산의 친구가 모든 것을 공모하고 주도한 것은 아니나 적어도 자기에게 호의를 베푼 것도 모자라 용서해준 친구에게 악랄한 행동을 한 점에서 이런 슬픈 우정의 비극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믿지 못하게 하는 최악의 불신을 낳게 한다. 그런 불운의 이름을 가진 다산처럼 이 악의라는 소설에서 불운을 가진 주인공 히다카는 그야말로 선의로 베푼 자기의 마음에 오히려 악의라는 거대한 음모에 휘말린다.


사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소설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고, 매우 치밀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던 사람이다. 그 이유는 만화와 애니메이션만 본 것이 아니라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서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서사라는 것은 결국 인간과 인간이 어느 공간적, 시간적, 역사적인 상황에 아울러 진행되는 이야기다. 그런 공간적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인간에게 던져지는 운명의 굴레에서 다양한 담론들은 서사구조를 가진 체계라면 당연히 감을 잡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사건의 해결과 관련하여 범인의 공표는 너무 이르게 나오고, 나 역시 범인이 노노구치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 이유는 노노구치가 히다카의 살인현장을 보고 난 뒤에 단순히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모니터에 비춰진 소설의 문구였다. 히다카의 소설에서 노노구치는 그의 작업속도와 분량을 잘 알았다는 점과 그리고 죽기 전의 히다카의 원고는 평소 이상으로 높아져 있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그 원고를 손질한 사람이란 것이다. 사실 판단의 기초는 조금 핀트가 벗어나 있었다. 왜냐하면 추잡한 인간을 소재로 한 “수렵 금지구역”에서 그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후지오 마사야라는 남자의 죽음에서 그녀의 동생 미야코가 오고 난 후에 노노무라는 히다카의 집에서 나간다. 그리고 나서 그 날 저녁 히다카는 죽음을 맞이한다. 히다카의 갈등이 되는 정점은 바로 후지오 마사야라는 남자이며, 히다카 옆집에 사는 고양이의 죽음과 비교하여 히다카의 죽음에 대한 인과적인 부분은 후지오 마사야라는 남자에 대한 부분이 크다고 생각했다.


또한 더 중요한 사실은 히다카 죽기 전의 작품인 얼음의 문이다. 그 작품에 대해 히다카의 팬들은 모두 기대하고 있겠지만, 히다카의 원고작업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히다카의 편집자, 아내, 그리고 친구인 노노구치이다. 노노구치가 어떻게 그토록 원고에 대하여 잘 분석하고 있었으며, 단지 원고 페이지만으로 그가 이상한 상태라는 점을 알았는가이다.


그런 내 생각에 달리 문제의 해답은 다른 방향에서 나왔다. 그것은 형사 가가의 등장에서 부터이다. 나는 사실 게이고 히가시노라는 작가를 잘 모르고, 거기에서도 가가 형상 시리즈는 더욱 더 모른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모든 서사의 흐름은 이 가가 형사의 등장에서 모든 것이 반전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가 형사가 범인을 추적하는 동안 모든 사건의 원흉은 노노구치라는 점까지 밝혔다.


물론 서사구조에서 범인의 지목은 초반부가 중반부에 가기에 너무 빨리 다가왔다. 그렇다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잡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은 범죄자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그것으로 얻는 그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것이 들통 나고 노노구치는 겉으로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인척하나 사실 그가 가장 악랄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사실 나는 이 작품에 대한 서사구조에서 보이는 플롯과 반전, 그리고 집요한 추적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이 작품을 적은 작가가 그리고 그 작가의 애정 어린 캐릭터인 가가 형사로 통해 보는 세상의 담론이라는 점이다. 사실 피해자와 가해자인 히다카와 노노구치의 경우를 본다면 어린 시절의 조금 알고 지낸 학교친구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질투라는 이름에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나, 그것은 표면에 지나지 않은 이야기다.


그 작품의 내면에서 내가 보고자 하는 사실은 왜 노노구치가 그런 인간이 되었는가이다. 노노구치는 공부도 우수하고 국문학을 매우 잘하던 수재였다. 그리고 히다카는 노노구치만큼은 아니나 나름 우수한 인재였다. 그런 2사람 사이가 왜 이리 되었나에서 나는 다산 정약용의 이름을 떠오른 것이다. 가령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매우 위대하고 아름다우면 고귀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 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자신의 책무와 의무를 버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많은 인간들은 그를 좋아하겠으나 역으로 그것을 시샘하고 혹은 배척하는 경우가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리면서 당대 명사를 찾아갔으나, 오히려 당대 명사들은 소크라테스의 언변에 자신의 어리석음 수치를 느껴야 했다.


그 덕분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지로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그리스의 시민으로서 고귀하게 죽음의 독백을 삼켰다. 과연 소크라테스는 남들에게 악을 끼칠 만큼 강한 힘을 가졌고, 사악한 행동을 공모할만큼 악랄하고 지략가였는가?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사랑했으나 그만큼 증오한 사람도 많았다는 점이다. 그런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바로 히다카의 과거이다.


그는 학교에 가장 문제가 되는 학교폭력에 저항한 사람이다. 장난을 넘어 죽음의 위기에 턱에서 그는 학교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의 소설 수렵 금지구역의 모티브가 된 남자가 어느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나체의 사진까지 찍었다. 그 후 그런 인간이었는지 후지오 마사야는 어느 창부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칼에 비명사한다. 후지오 마사야는 히다카가 중학교 다닐 무렵 가장 그를 괴롭히던 사람이다.


그런 후지오가 성폭행 문제로 전학 가버리자 히다카는 편안한 중학교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히다카가 학교를 다닐 시절에 분명 노노구치도 후지오의 전학으로 약골인 자신에게 유리한 학창시절을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노노구치는 중학교의 히다카와 편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노노구치가 히다카를 그렇게도 괴롭히던 후지오의 편에 있었다는 점이다. 노노구치는 히다카가 괴롭힘을 당해도 그저 방관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를 외면한다.


또한 정말 문제가 되었던 여학생의 성폭행 사건에서 나체의 사진에 찍힌 여학생 뒤에 어느 남자가 찍혔는데, 그것은 중학교 시절의 노노구치였다. 그는 매우 비열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런 행동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히다카가 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히다카는 노노구치를 위해 아동문학 작가에 입문하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자기에게 악랄한 짓을 한 후지오 옆에서 자신을 무시하려던 그에서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이런 느낌이다. 어느 사회적인 약자가 자신의 약함을 강자에게 내맡긴 것도 모자라서 그런 부정의한 인간으로 통해 자신에게 없는 강함을 내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노노구치는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히다카와 어울리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2사람은 어울렸으나 그런 자신의 마음속에는 히다카에 대한 열등의식(劣等意識)에 사로 잡혔다는 것이다.


열등의식에 갇혀버린 인간은 자신보다 더 나약한 인간을 찾아 우월감(優越感)으로 대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기 보다는 힘을 가진 인간에게 모인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정의가 된다. 타자를 생각하는 윤리(倫理)가 없는 정의(正義)는 곧 폭력(暴力)이다. 폭력이 정당화되고 미화되면 이른바 파시즘으로 치닫는다. 그런 문제에 대해 작가는 가가 형사로 통해 추적하고 혹은 가가 형사가 밝히고 싶지 않은 지난날의 교사생활까지 언급한 것이다.


나는 이래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이 정의로운 인간이 되기보다는 자신들이 정의롭게 되어줄 희생양을 찾는다고 말이다. 그런 희생자로 히다카가 선택되고, 그런 정의의 사도로는 노노구치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의 핵심이 해체되자 그런 행동들은 멈추었다. 인간의 이성은 과연 진리를 찾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권력을 향하는가?


악의라는 책에서 그런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비열한 면들을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보여주는 작품이다. 거기의 악의를 저지른 노노구치는 단지 그런 인간들 중에서 가장 나약하면서도 히다카의 이름을 부러워하는 인간이다. 왜 그는 그토록 히다카를 향해 집요한 행동을 했을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애증관계이다. 그는 히다카처럼 되고 싶으나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와 옆에 있으면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실망만 한다.


그것은 마치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이야기처럼 살리에르는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모차르트가 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영화에서 음모를 꾸며 모차르트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 악의에서의 노노구치는 살리에르처럼 악의를 가진 것은 분명하나 재능보다는 자신에 대한 노력은 없었다. 살리에르는 그가 만들고 보여주어도 모차르트에게 가려진 것이지 노노구치처럼 아예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대한 문학적 능력보다는 타인의 문학의 능력까지 훔쳐서 마치 떳떳하게 병으로 죽어가는 고스트라이터로서 마치 명예롭게 인생을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그런 거짓된 명예의 성취조차 가가 형사에 의해 밝혀진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 작품에서 밝혀지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 무엇이 인간이 그토록 극으로 가게 하면서도 결국 그것으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걸어도 왜 이런 일은 생기는가이다.


혹시나 누가 알고 있을까나? 허구로 조작된 고스트라이터가 아닌 많은 어둠의 갈린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게 한 빛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고스트라이터도 아니면서도 고스트라이터인 것처럼 행동하는 노노구치의 비열함이 숨어있으나 정말 세상에는 그런 빛을 보지 못하는 많은 고스트라이터가 존재하지 말란 법은 없고, 이들 역시 노노구치와 다른 진정한 악의를 표출하지 않을까라는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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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위화 지음, 조성웅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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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전율편
전율 편은 보는 나의 입장에선 뭐라고 할까나? 그냥 이제 나이가 43세에 들어선 남자와 그 남자보다 7살 어린 여자가 오랜만에 만나서 둘이 회상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모든 이야기의 결말을 보인다. 한때 엄청난 인기를 받고 모든 여자에게 선망의 대상이던 시인인 자우린은 이제 과거의 영광은 커녕 현재의 암울한 삶에 살아간다. 

첫 장부터 책을 잡지 않았다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비롯한 철학도서와 각종 문학도서를 집어 들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우연히 잡은 책에 종이쪽지가 나온다. 아주 오래 전에 보낸 쪽지인데, 거긴 마란이란 여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그 여자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고 다시 편지고 오고 둘은 다시 만나기로 한다.

이때 그의 갇혀있던 자신의 삶에서 밖으로 나간다. 귤이 먹고 싶은데 귤을 집어들 때 그는 귤이 얼마인지 몰랐다. 게다가 귤장수는 그에게 귤값을 내놓기 보다는 귤 하나를 주고 나가라고 한다. 그의 입장은 화려한 과거와 달리 참혹한 인생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겉은 비루하고 가난한 시인이었다.

그가 그런 몰골로 마란과 만나 과거를 회상한다. 둘은 주로 귤장수에게 귤을 얻어먹은 비참한 그는 마란과의 이야기에 꿈 같은 청춘을 맛본다. 잘생긴 외모와 화려한 말투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많은 여자들, 자우린은 과거에 많은 여자와 연애를 즐겼다. 자기 침대에서 혹은 상대의 침대나 다른 장소들 그리고 다양한 여자를 만나고 나서 마란과의 만남도 있었지만, 당시 마란에게 자우린은 눈길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하지만 영원한 화려함은 없다. 자우린은 어느 순간 여자들에게 인기 없는 남자였고, 그래도 자우린은 여전히 여자에게 손을 대려 했다. 그러는 동안 그렇게 작업을 계속 거는 와중에 그 자리에 마란은 있었다. 하지만 자우린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자우린의 사랑을 원했으나 자우린의 무관심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예전의 아름답던 청춘을 대신해 중년의 여자로서 그를 접한 것이다.

자우린은 솔직히 말해 타고난 작업남이었다. 흔히 여자에게 음흉한 작업을 거는 남자들은 대놓고 원하기 보다는 말을 돌려 말한다. 그렇게 언제나 여자에게 “너만은 특별해, 너니깐 이렇게 마음이 아픈거야” 라는 미사어구들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란 말처럼 시인의 입에서 나온 시의 언어는 청자로서 활동하는 여자에게 당연히 개연적으로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모든 여자들이 그의 포로로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포로로 되는 것은 그의 모습이 화려한 공작새와 같을 때다. 나이가 40대인 자우린 그것도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에겐 더 이상의 매력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30대의 마란도 마찬가지다. 중년의 여인답게 몸이 둔해짐을 나타남은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가길 바란 것이다. 그런 2사람의 과거사냥 다운 모습으로 침대 위에 놓인 외투에서 교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자우린의 외투 한쪽 팔이 마란의 어깨를 은근스레 건들고 있었다. 자우린이 직접적으로 야한 작업을 걸지 않았으나 그것이 하나의 제스쳐가 된 것이다. 그리고 2사람은 아주 열정적인 육체적인 관계에서 서로간의 과거를 되돌아가려 한다. 이때 그녀가 자우린에게 원한 것은 자우린의 얼굴표정이었다. 과연 자우린은 어떤 얼굴을 짓고 있는가?

자우린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쾌락이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자우린이 마란이란 여자에게 과연 전율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과거 잊혀진 얼굴로 기억된 자신에게 육체적인 관계로 통해 전율을 느껴 잃어버린 지난 시절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또한 자우린은 모든 과거로부터 멀어진 자신에게 과거로 가는 길을 가고 있었다. 2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탐닉하면 과거의 욕망을 채워간 것이다.


2편 우연한 사건  

이 사건은 어느 카페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토대로 장퍄오와 천허의 편지를 왕래한 이야기다. 살인사건의 발단은 어떤 조용히 휴식을 취하던 남자가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어떤 불안한 시선을 가진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의 가슴에 칼을 꼽고 나서 경찰을 부른 것이다. 살인의 동기는 알 수 없이 말이다. 

그날 현장에 있던 장퍄오와 천허는 경찰의 심문에 의해 신분증을 맡겼는데, 그것이 서로 엇갈리게 가버렸다. 그래서 편지를 주고 받는데, 그 내용은 살인사건에 대한 내용이었다. 천허는 그 사건의 희생자가 여자에게 바람을 피게 만들어 죄는 받은 것이고, 장퍄오는 그것은 처음부터 여자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일 수 있고, 또한 천허의 일방적인 추론을 일일이 비판적으로 사고하여 답변한다.

그러는 와중에 장퍄오는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여자를 품에 안고 성적희롱을 즐겼다. 또한 그런 여자 이외에도 다른 여자도 말이다. 장퍄오는 전형적인 바람둥이었다. 하지만 천허처럼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성적인 사고로 통해 천허하고 편지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장퍄오가 만난 여자이야기와 그 편지 내용과 일치해 가는 부분이다.

그리고 살인과정과 동기 그리고 차후 처리까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이 편지를 보낸 천허가 장퍄오가 만나는 여자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2사람은 만났고, 둘이 처음 살인을 목격한 카페에서 그 때 듣던 “당신은 왜 나를 쫓지 않은가”란 노래가 나오자 장퍄오의 가슴에는 칼이 꽂혀 버린다. 

솔직히 이 작품은 어느 결백증적인 남편이 자신의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고 그 의심이 되던 남자에게 의도적으로 다가가서 그런 부정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서 자신 역시 그런 살인범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결국 천허는 자신의 살인동기와 살인목적을 그렇게 찾은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앞의 살인은 치밀하지 않은 계획이라면 후자는 매우 치밀한 계획이었다. 자신이 죽일 남자에게 그 살인의 과정을 토론한 장퍄오는 참으로 허무하게 칼에 맞아 죽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 대해 크게 논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작품의 결말이 너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너무 내가 판단하던 결착으로 가게 되어 그런 여흥이 많지 않은 작품이었다.


3편 여자의 승리

이 작품은 여자의 사랑이 어떻게 질투로 변하고 어떻게 승화되는가이다. 린홍이란 여자는 평범한 주부로 남편인 리한린과 결혼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어느날 린홍은 리한린의 서랍에서 칭칭이라 하는 여자사진과 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결혼생활은 위기에 닥친다. 리한린의 여자에게 린홍은 순간 열등감에 사로 잡힌다.

그녀의 강박관념은 자신과 리한린의 주변 사람에게 전화하여 이것을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그 중에 아주 예전에 린홍에게 관심있던 남자에게 전화하자 그는 린홍에게 최대한 남편을 절벽에 몰게 하라고 한다. 그리고 린홍은 그렇게 따르고 처음에 자신의 외도를 누설당한 것을 생각지 못한 남편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칭칭의 사진을 보자 남편은 당황하고, 남편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매우 조용한 집안살이를 시작했다. 같이 자던 침대에서 나가고, 쇼파에서 눈치보면서 책보고 게다가 TV조차 못본다. 그러나 린홍은 그런 자중하는 태도의 리한린을 꽤씸하게 여긴다. 린홍은 남편이 자기에게 아주 열렬히 사과하고 잘못을 토하고 아니라면 격정적으로 대하길 바랬다. 하지만 오히려 리한린은 보통 남자처럼 아내를 배려하는 척으로 잘못을 인정하려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린홍에게 감정의 폭발로 이어진다. 이 장면을 보니 나도 과거의 내가 생각난다. 나 역시 그렇게 크게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나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이 상대편에게 큰 화를 부른 것이다. 오히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냄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최악으로 치닫게 되자 2사람은 이혼을 하러 관공서로 간다. 이때 마지막으로 카페에서 서로 커피와 사이다를 마시려 한다. 과거 2사람은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커피와 사이다를 마시면서 행복의 미래를 기대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얼굴조차 마주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린홍은 사이다를 마시다 다른 자리에 어디서 많이 본 여자 얼굴을 마주친다.

그 여자는 린홍의 라이벌인 칭칭이었다. 칭칭이 있자 남편도 놀랐으나 아내의 행동은 더욱 놀랐다. 린홍은 남편에게 대낮의 카페에서 자신에게 안아달라고 한다. 남편은 그렇게 하고 린홍은 남편을 더욱 강하게 안고 남편을 몸을 감싸고, 그녀의 혀를 남편의 입안으로 다가가서 남자의 미각을 황홀경으로 이끌어낸다. 그리고 마치 보란 듯이 칭칭이를 노려본다. 칭칭이는 보다 못해 나가버리고, 린홍은 이혼대신 집으로 가자고 한다. 그녀는 칭칭이를 두고 남편에게 자기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만약 이혼한다면 칭칭이에게 가라고 말이다. 

남편은 자신은 칭칭이에게 가도 할 수 없음을 알기에 다른 사람이 눈치에도 아내의 유혹을 따랐다. 결국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칭칭이에게서 모두 가져간 셈이다. 아내의 사랑이 질투로 변하고 질투는 투쟁으로 변하여 결국 사랑으로 돌아왔다. 결국 질투는 여자의 힘이란 것일까?


4편 무더운 여름

무더운 여름은 여자의 가식을 두고 서로 허풍을 떤다. 결국 2여자는 친구사이이나 알고 보면 경쟁자였다. 그녀들은 아주 착하고 성실한 리치강이란 남자를 두고 서로간의 허풍을 다툰다. 서로 리치강이 자기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자기에게 호감을 보인다고, 또한 리치강이 문화국에서 일하면서 인기가수 홍화의 공연에 관계되자 2여자는 리치강에게 서로 티켓을 달라고 한다.

리치강이란 남자는 아주 착하고 좋은 남자이지만, 나쁜 여자에게는 그저 단순하고 이기적인 희생양이 되는 남자였다. 50위안짜리 홍화공연 티켓을 2여자에게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녀들과 헤어진다.

2여자는 서로 리치강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고, 또한 리치강이 홍화와의 스캔들을 이야기했다. 그런 와중에 홍화의 애인으로 여기던 리치강은 어느 순간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어느날 2여자 중의 리핑은 그 2여자 중의 원홍과 이야기하다가 리핑이 남자친구가 생기고, 그와 데이트하러 간다고 하는 것이다.

리핑은 그가 누군지 알려달라고 하나 당장은 아니나 나중에 보여준다고 한다. 결국 그 남자는 리치강이었다. 그러나 그가 오기 전에 리핑은 거짓으로 인기가수 홍화가 리치강과 스캔들이 있고, 마치 자기에게만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원홍 역시 되받아치기 했다. 하지만 결국 팔짱을 끼던 리핑과 리치강에서 원홍의 거짓말은 탄로났다. 서로 리치강에게 관심있었지만 마치 서로 없는 것처럼 말하다가 결국 리핑이 선수친 것이다. 내숭적인 2여자 사이에서 리치강은 그저 내숭싸움의 승자에게 자신의 한쪽 팔을 내어주게 된 것이다.

처음에 2여자가 말하듯 남자를 사귀면 그 남자가 밥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주고, 데이트 비용도 내어주는 어장 같은 남자를 바랐다. 그런 점에서 리핑은 승리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본다면 리치강은 승리자의 노예가 된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에서 여자의 승리는 유혹의 여신에게 돌아간 것인가? 그런 것을 증명하듯 원홍은 흥하면서 리핑과 리치강이 가는 길 반대로 가고 있다.


5편 다리에서

자기보다 1살 어린 25살 트럭운전사는 자신의 아내가 임신여부를 끝없이 물어본다. 그는 아내가 임신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아이를 가지면 당장에 집안 가정생활이 어렵다는 이유다. 그래서 매일처럼 아내의 임신여부를 묻는다. 여성은 제2차 성징기가 오면 월경을 시작한다.

그래서 임신하게 된다면 월경이 중단되니 월경이 된다면 임신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처음에 아들을 가지고 싶다는 트럭운전수의 소망과 달리 이제는 왠 불임사실을 기뻐한다는 말인가? 남편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 아이를 가지면 돈을 벌지 못하거나 혹은 보모를 사용해서 돈이 많이 들어간다던지 혹은 아이를 일찍 가지면 50대에 할아버지 할머니로 돼서 그게 좋냐고 말이다.

그런 우려를 역시 잘 해결되었는지 아내는 결국 월경을 했고, 그 월경은 남편에게 반가운 친구로 다가왔다. 이에 아내는 힘든 과정을 극복한 후에 자신에게 그저 편안한 일상과 작은 남편의 상이 있기를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의 입에서는 나온 차가운 말은 이혼이었다. 남편은 이혼을 하기 위해서 아이가 없어야 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그 다리에서 사라지는 남편을 보며 아내를 절망해야 했다. 결국 여자는 무엇을 위해 결혼하였다는 말인가?


6편 그들의 아들

이 작품은 어렵게 힘들게 살아가는 노부부가 아들 하나를 두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노부부는 힘들게 공장에서 일하고 집에 갈 때는 만원버스를 타고 가며, 오늘 아들이 오기로 한 날에 일찍 가기로 했으나 버스 안의 사람들의 밀침에 혹은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의 방해로 일찍 집에 못가게 된다.

게다가 버스에서 떨어져 둘 다 심한 멍과 상처를 입는다. 그래 힘들게 일하면서 한 달 월급이 600위안도 되지 않으나 이에 반해 아들에게 한 달 300위안을 보낸다. 이런 부모의 고생에 아랑 곳 없이 아들은 그저 TV 보면서 음악을 듣는다. 게다가 오늘 집에 올 때 아들은 버스 대신 택시를 타고 온다. 버스는 사람 많고 비위생적이라 병에 걸릴 것 같고 토할 것 같다고 말이다.

처음에 아들의 행동에 분개한 부모는 아들의 말에 이제는 오히려 동조한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자신들은 버스를 타는데, 아들에겐 버스를 타지 말라니. 이게 어찌 보면 중국의 현대 젊은 사람들의 인식이다. 부모의 고생은 관심 없이 자신의 이익이나 관심을 최고로 하고 또래 아이들의 눈치만 보는 것이 말이다. 

그것은 한국에서 마찬가지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보다는 누가 어떻게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고 뒤쳐져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 한심한 태도에 부모는 고치기보다는 오히려 동조한다. 힘들게 일하면서 그래 키워서 무슨 소용인가? 이제 어머니는 4년 이후에는 돈을 벌 수 없다고 한다. 대신 아들은 퇴직금을 받으면 된다고 한다. 빵이 없으면 고기 먹으라고 하는 어느 어리석은 임금처럼 말한다. 그건 결국 현대사회의 젊은이들의 허영심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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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나를 사랑할 건가요? -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의 리얼 연애 클리닉
김태훈 지음 / 시공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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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나는 사랑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

라고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랑 그 단어는 매우 많이 남발되는 말이다. 그리고 사랑은 많이 남발되는 만큼 말하기가 매우 쉬우면서도 어려운 단어다. 왜냐하면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얼굴에 심취하여 한 송이의 수선화로 태어난 나르시스적인 인간이라면 몰라도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 살 수 없다. 즉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영원한 정치적인 동물인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기술발달로 인해 인터넷이란 매체가 발달되어 직접적인 대면은 안하더라도 인터넷으로 통해 계속 소통이란 인간의 기본 욕망을 실현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토리텔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 내 이야기를 하고 싶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재미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 소재를 두고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재미있으면서 가장 스릴이 넘치는 이야기는 아마 사랑이 아닌가 싶다. 

사랑이란 단어는 이미 세상에 넘쳐버린 단어이듯이 말이다. 그런데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닌 2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이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사랑은 게임이라 지칭한다. 게임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2명 이상의 사람이 하는 것이 즐겁다. 하지만 게임이란 것은 승자도 있듯이 패자도 있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구분되어 있기가 애매모호하다. 사랑의 승리자가 된 사람은 그 게임의 대전자를 패배자로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같이 승리하는 길을 추구하는 것이 사랑이란 게임이다. 

하지만 게임에는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실전에 대한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런 사랑에 대한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 어떻게 본다면 사랑은 커녕 인간사회에서 사람들과 지내는 행동 자체도 어긋난 인간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인간은 생각하는 바와 행동하는 양식이 다르니 말이다. 그래도 인간은 사랑이란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인간은 혼자라는 공간에서 외로움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길 수 없는 거대한 외로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오로지 사람과의 만남과 그 만남에서 꽃 피우는 이성과의 사랑이다. 물론 사랑의 최종목표는 결혼이란 크나큰 의례가 있다. 하지만 사랑의 최종목표가 결혼일망정 사랑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1가지 거대한 서사가 끝나면 그 서사를 이어받는 거대한 서사가 다시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거대한 서사 속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많은 이야기를 낳는 것이다. 이 책에서 위대한 문학가 도스토예프시키의 말을 인용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걸작을 쓸 수 있다. 자신이 이야기를 쓰면 되니까..” 그런 말 중에서 사랑이란 이야기는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걸작이다.

사랑은 인간을 행복하게 혹은 절망으로도 보낼 무섭고도 아름다운 양면의 동전이다. 그런 동전에서 우리는 언제나 좋은 희망적이고 즐거운 사랑을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우리는 자세를 취하야 하는가에서 이 책의 주요 핵심사항이다. 

누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두 그렇지만 나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타자에게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보편적인 사회와 인간살이에서 이 책에서는 그런 상황에 대해 어떤 일이 있는지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대한 에피소드를 묶은 책이다.

다소 이론적인 부분보다 실재 있던 일을 이론적인 도서로 묶은 실용적인 도서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라도 여기에 모두 해당 내지 해당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는 특별하나 사회적으로 보편적이다. 그러나 뭔가 사람과 사람에서 일어나는 일은 엄청나게 클리셰적이다.

옛날 그리스 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이 책은 어떻게 본다면 어느 개인 즉 한 인간의 역사들을 모아 만든 책이나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한편의 비극시 혹은 서정시와 같다. 사랑의 파멸은 절망이고 사랑의 이어짐은 희망이니 말이다.

ps 나를 위해 멀리서 내려와 이 책 한권을 준 어느 동생 녀석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 책을 보고 난 뒤에 내가 사랑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었는데, 도서 품평만 적고 실천하지 않으면 참 부끄러운 형이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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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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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리기별을 읽는 것은 왠지 모르게 조금 내 가슴에 담고 있는 허무와 알 수 없는 반항의식이 동감하고 있는 듯하다. 유명한 작가로 활동하시는 황석영 선생님이 본인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젊은 시절의 여담을 하나의 이야기로 꾸민 개밥바라기는 허무함과 알 수 없는 자신을 혹독하게 하려는 어느 청춘(靑春)의 눈물이 보인다.

그 청춘은 단순히 남들처럼 혹은 시대적인 흐름에 살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저 먼 발치에 있기를 원한다. 그런 것이어서 그런 것일까? 이 소설의 서사적인 구조는 조금 특이하다. 보통 소설은 1인칭 내지 3인칭 시점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는 1인칭이 3인칭이 되고 3인칭이 1인칭이 되기 때문이다.

1인칭의 시작은 베트남전에 떠나가는 준이다. 그는 분명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행동을 했어도 많은 것을 허비한 사람이다. 그런 자신을 찾아 계속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고 모험도 하였다. 그런 준이에게 세상이란 그저 허무한 공간이었다.

개밥바라기별, 어느 유랑노동자인 대위의 말에서 준이는 자신의 운명은 저기 초승달 옆에 떠이는 금성처럼 작고 희미하고 누구에게도 띄지 않은 별이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을 보면 황석영이란 작가가 어린 시절 그리고 철부지 같은 청춘이 얼마나 덧없이 보냈었고, 그것이 다시 돌이켜 보면 얼마나 우리나라에 큰 상처를 들어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제주도 산자락을 올라가는데, 준이는 수박을 잘못 먹었는지 산자락 정자에서 그저 쉬고 있었다. 그런데 잘생긴 어느 한 여자가 서울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는 말에 그는 허무한 느낌을 최대한 보인 듯이 친구가 죽었다고 한다. 바로 옆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말이다. 준이는 어둡고 무서운 과거 속에 친구를 잃었다. 그것도 눈앞에서 말이다. 

준이가 미친 듯이 자기를 힘들게 하는 것이나 첫사랑 미아의 눈으로 통해 그가 사실은 미아를 좋아했으나 미아 그 자신은 준이에게 질렸다는 것을 나는 주목한다. 준이는 미아를 사랑했으나 미아는 준이가 미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준이의 눈에는 항상 어딘가를 향하고, 대화를 이어가기 보다는 뭔가 다른 것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준이는 그렇게 마음속에 큰 공간을 담을 수가 없어 정처 없이 방황한 인물이었다. 그런 상처로 준이는 자퇴를 하게 된다. 도저히 이 사회라는 공간을 그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이다. 사실 준이를 볼 때는 마치 나는 상황주의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심장병에 걸려 마지막 최후의 순간을 자신의 심장에 권총을 대고 총알을 때려 박은 기 드보르처럼 말이다.

사실 준이가 자퇴할 때 준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준이에게 있어서 정말 구역질나는 존재였다. 준이가 자퇴를 위하여 국어선생인 황새에게 자퇴사유서를 낼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준이는 스펙타클의 사회 즉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가 적은 사유서는 마치 이 사회와 학교는 권력자들의 존속을 위한 감옥이라는 것이다.

세계적인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친구가 감옥에 갇힌 피카소에게 감옥에 갇혀 안되었다고 했지만, 피카소는 친구에게 감옥에 갇힌 것도 모르고 감옥에 살아가는 것보다 났다고 말이다. 준이는 그것을 심각하게 느낀 것이었다. 왜 그토록 느끼고 싶었을까? 아니면 어느 사회학자 말을 빌려 감옥의 존재는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의 감옥에 갇힌 사실을 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준이는 분명 그나마 살림이 안정된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님과 같이 살아가다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준이에게 좋은 직장에 살아가기를 그리고 노동자의 자녀들과 부랑자 같은 아이들과 놀기 바라지 않았다. 그들과 멀리 있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준이는 오히려 그들의 세계(世界)로 녹아 들어갔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천대받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는 준이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몰래 타는 무전여행(無錢旅行) 기차 칸에 만난 약초상들, 농가에서 만난 농민, 바다에서 만난 어부들,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은 친구들 준이에게 주어진 인생의 전부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낯선 곳에 가서 고생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가려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까지도 맛봐야 했다. 백제의 의자왕이 당나라와 신라에게 패망하여 치욕을 당하는 모습과 한일회담 반대, 독재의 그늘에서 아직까지 일제잔재와 625전쟁의 그늘은 여전히 당시 젊은이들에겐 크나큰 짊이었나 보다.

그런 세계에서 오로지 사람들은 바라는 것을 무엇일까? 나는 선이와 선이의 아버지 이야기가 유독스럽게 기억난다. 선이가 그림쟁이 정수의 만남과 동시에 집에 들어가지 않자 선이의 아버지가 정수를 때리면서 차후 그를 데릴사위처럼 데려가는데, 선이의 아버지가 증이 없으면 안되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증은 건축과에 나와 취득하는 자격을 말하는 것이다. 자격증은 기술을 배워 사회적인 인정받은 하나의 상징이다. 결국 능력이 중시되는 자본주의 체계 속에 근현대 역사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가중시키는 듯, 준이가 야간 공업고등학교 다닐 적에 한강의 기적을 말한 후에 미국의 어느 도시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준이는 모든 것을 속박하고 속박당해야지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싫어 했나보다. 어머니가 그토록 가까이 하지 마라는 사람들과 어울리니 말이다. 준이는 바른 사람이 되기가 싫어했다. 오히려 바르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바르지 않아야 오히려 세상이란 기계부속품에서 벗어날 기회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려운지 혹은 그것 자체를 포기하는 것도 어려운지 준이는 수면제를 과다복용으로 5일 만에 눈을 뜬다. 분명 지겹고도 지루한 세상에서 해방되기 위해 죽으려 했는데, 해방되지 못한 채 다시 세상을 살아가야 했다. 게다가 그는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방랑인생을 뒤로 한 채 군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떠나야 했다.

전쟁터에 가기 전에 서울에 있는 집에 가서 가족들과 보내고, 친구들과 보내며, 또한 떠나간 미아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대로 있는 것들은 없었다. 집에 가니 점포를 정리하여 이사하려 하고, 친구들은 모두 자신의 길을 찾아 현실에 살고 있으며, 미아는 눈내리는 그 공원에 돌아오지 않았다. 지나간 그 시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런 허무한 과거를 보내고 준이는 기차를 타고 어둠 속의 터널로 간다. 어둠 속의 터널은 프로이트적인 부분으로 성적인 묘사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알 수 없는 내일이고 그 내일은 오늘이란 혹은 현재란 시간의 코앞이다. 앞이 알 수 없는 지금이야 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삶이란 늘 알 수 없는 세계이다. 그 속에 개밥바라기는 알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두고 허무함을 달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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