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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를 갖춘 양반의 나라 ㅣ 조선의 사대부 5
김강식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5년 10월
평점 :
리뷰를 다시 작성한 시간이 너무 오래 된 것 같다. 그동안 글을 올릴 수도 없었고, 글을 올리기 위해 책 1권조차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동안 말기 암으로 고생하다 결국 다시 넘어올 수 없는 머나먼 세계로 떠나갔다. 아버지와의 지난 추억을 생각하면, 그렇게 좋은 기억은 없다. 아버지는 배를 타는 선원이고, 집에 있는 시간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1년 12달 중에 1~2개월 정도, 집에 온다고 해도 여유는 없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업무를 해야 했고, 집에 가만히 쉬는 게 아니라 오래된 집을 수리하기에 바빴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고, 같이 있는 시간이 길지 않기에 유대감이 다른 집안의 아이들보다 크지 않았다. 어느 정도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20대 후반 회사에 취업하면서이다. 그때는 배도 멀리는 가지 않았고, 집에 자주 왔으며, 나도 하사 군복무를 마친 후라 집에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생 고생만 하신 분이다. 어린 시절은 추위와 배고픔, 청장년은 배만 탔고, 노년은 그동안에 고생한 삶에 의해 암으로 마감했다.
이런 아버지이기에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와 추억은 별로 없다. 단지 예전에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삶을 살았고,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가족의 내력만 자주 들었다. 기억나는 일화 중에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우리 친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 유산 중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고, 오로지 집안의 족보만 가져갔다. 어린 시절 집에 족보가 있었는데, 한지로 된 책이 3권이 있었다. 할아버지도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고, 농부로 살아왔기에 한자를 제대로 읽지는 못한다.
아버지도 배운 것이 없지만, 그래도 혼자 독학하여 한자를 어느 정도 읽으시고, 집안의 족보를 이야기해주었다. 집안 제사를 지내면 나는 8대조 할아버지를 시작하여 증조할아버지까지 제사를 지낸다. 시제를 올리면 할아버지의 이름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족보를 읽어야 했다. 아버지나 형도 요새 같은 시대에 무슨 조상의 덕을 보겠냐고 하나, 그래도 아버지는 족보를 챙기시던 분이었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집안의 족보, 즉 자신이란 존재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정체성이 유일한 끈이고, 그 끈은 나와 형, 그리고 형의 아이까지 이어진 것이다.
제사를 지내면서 제일 먼저 가는 8대조 할아버지(그 이상의 할아버지는 큰댁에서 먼저 제사를 가져가므로)는 조선시대 벼슬을 했다. 첨지(僉知),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정삼품 무관이었고, 통정대부라는 직책이 주어진다. 아마 대략 영조시대 정도인 것 같은데, 무덤을 보면 묏자리는 정말 좋으나, 그렇게 권력이나 재산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비석이나 묘비는 없고, 단지 봉만 존재했다. 우리 집안은 조선시대 붕당계열에서 남인(南人)에 속했다. 남인은 정조대왕 이후 거의 몰락했으며, 남인 지식인들이 천주교와 많은 연루된 관계로 정치적으로 박해를 당한 일도 많다.
아버지 말로는 천주교 박해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경우 다산 정약용의 제자나 주변인들이 화를 당했다고 하는데, 거기에 우리 집안도 끼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해사옥과 황사영백서가 일어날 때 당시 우리 할아버지와 조금 먼 친척분이 관아에 끌려가 문초를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시대 양반이 뭐고, 상놈이 무엇인가에서 의미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역사가 있다는 것은 버려서 안 될 기록이다. 그것은 한국이 그동안 가진 역사이란 점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과거의 기록과 역사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나의 가계를 알아가는 것은 과거를 보는 것도 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나에겐 아무 것도 남긴 것도 없이 그저 고생만 하다 저승으로 가신 아버지가 그나마 그분께서 마음속으로 지켜오던 것을 계속 유지시켜주는 가교에 불가하다. 이런 내 모습이 고지식하다 여겨도,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조선시대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그런 것을 볼 이유는 없다.
한국에 태어난 이상 한국인이란 점과 한국의 역사에서 우리는 멀어질 수 없다. 또한 한국 이전에 조선이란 국가,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사대부가 통치하던 국가가 어떤 곳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태 문치를 내세웠지만, 나름 조선도 무예를 중시한 점이 의외였다. 내가 집안의 내력을 다시 돌아본 계기도 그런 점이다. 양반(兩班)은 문관인 동반(東班), 무관이 서반(西班)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 무관의 이름보다 문관의 이름을 많이 알지만, 무관이 문관을 하고, 문관이 무관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의 직급이나 업무에서 문무를 오고가는 것이 많았다.
조선역사를 보면 600년이다. 600년 동안 유지한 단일 국가는 세계에 내놓아도 좀처럼 없다. 물론 고조선 역사가 2,000년이란 말도 있지만, 그래도 600년이란 역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시간이다. 어리석고 잔인하고 교만한 양반사대부가 많은 점은 확실하나,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관들이 직접 목숨 걸고 전쟁에서 싸우고, 문관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인의예지를 지켰다. 대신 그런 집안의 가족들은 큰 화를 당했고, 그런 가족들의 후손들까지 그 여파가 닿기도 했다.
이 책에서 우리가 흔히 아는 인물인 서애 류성룡이 나온다. 류성룡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극복한 명재상이고,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뛰어난 책략가이다. 그러나 선조와 반대 당파의 논쟁으로 고향인 안동으로 은거하게 되었고, 친구인 이순신도 전쟁터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병법이나 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위기를 모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왜구의 침입을 어느 정도 예상했는데, 명종 때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때 재상이면 동고 이준경이 직접 군사를 정비하여 적을 무찔렀는데, 그는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탄수 이연경의 사촌동생이었다. 이준경이 전남 연안에서 적을 칠 때 우연히 우리 집안의 어른도 계셨다. 그 당시의 할아버지의 동생, 만호(萬戶)라는 무관을 지녔고, 이준경의 막하에서 무장을 맡으며, 왜구를 소탕했다. 그리고 만호를 지낸 분의 형인 나의 직계 할아버지는 본래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시작한 무관이었고, 나중에 순천부사로 부임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실 순천부사를 지낸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는 문과 급제하여 현감을 맡았고, 당상관인 통정대부까지 이르렀다고 말해주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대부분 할아버지들이 문관일줄 알았는데 오히려 무관들이 더 많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개국 전에는 군기소윤(軍器少尹, 군수를 관리하는 참모)을 하신 분이 있었고 그분의 형은 대호군(大護軍, 수도방위를 책임지는 참모)으로 무관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으로 넘어가자, 군기소윤의 아들이 무관 창신교위(彰信校尉), 그 창신교위 아들이 진위장군(振威將軍)과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을 맡았다. 무관이면서도 사간원에서 언론을 맡은 사간을 맡은 것이다. 문무를 동시에 수행했던 것이다. 그 다음은 무관이 아닌 문관 중 하급관리인 참봉, 그 다음은 현감, 그 다음에 순천부사를 지낸 분이었다. 그 다음은 진사로 성균관에서 학업을 하시다 정암 조광조를 따르는 이유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후 몇 십년 뒤 영의정 동고 이준경의 천거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신 분이 계셨다.
어모장군의 동생은 만호를 지냈고, 어모장군의 아들은 무관 훈련원 사정(司正)을 맡다가 훈련원정과 북청군을 지키다 변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분이 명종 때 무관으로 임관하여 광해군 2년 때 돌아가셨는데, 나이가 70세가 넘은 노장이니 조선시대 이 나이에 변방에서 근무해서 운명했다면 순국하신 것과 것이다. 이때까지 보면 순수 문관은 2분이고, 나머지는 다들 무관을 맡았다. 변방에서 순국하신 분의 아들은 동몽교관(童蒙敎官,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이였고, 그 다음은 가선대부 좌승지이었다.
좌승지를 하신 분의 아들은 벼슬하지 않았지만 그분의 아들이 중추부첨지사를 맡게 되어 벼슬하지 않은 분이 증 동부승지로 되었다. 이 뒤로는 벼슬한 분은 없고, 마을에서 훈장선생을 하신 분은 계셨지만, 남인세력이었기에 그대로 몰락양반이 되었다. 몰락한 양반의 가계가 지금까지 거의 200년을 안고 갔다. 아버지나, 할아버지, 증조부나 고조부조차 가난한 농부로 살아야했던 운명은 조선시대에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위에 말한 것처럼 조상의 덕을 본 게 없다면서 형은 집안내력에 신경 쓰지 않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집안내력을 소상히 나에게 말해 주었다. <문무를 갖춘 양반의 나라>를 읽은 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음날에 읽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나와 형이다. 어떻게 보자면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도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지만, 그래도 아버지만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다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20세기를 걸쳐 21세기 대한민국은 물질만능주의 사회이다. 민주주의라고 해도 돈에 따라 인생의 굴곡이 달라진다. 그래서 돈이 넉넉지 못한 한 개인이 이런 피폐한 세상에 살려면 무엇을 의지해야 할지 난감하다. 조상을 잘 안다고 해도 돈이 나오거나 출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이유는 내가 지금 살아있는 현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농공상이 얼마나 심각한 폐단이 있었는지 알고, 개혁론자 사대부들이 천민들도 능력이 되면 벼슬을 줘야 한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하고 몰락한 사례도 많았다.
지금도 사회적 문제가 만연하고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배워야 하고, 무엇을 찾아 배워야 하는가? 결국은 역사를 알아야 한다. 개인가족이 지닌 역사와 국가가 지닌 역사의 규모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 개인가족이 전승해온 기록에서 당시 살아간 인간들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문무를 갖춘 양반은 필요했다. 비겁하지만, 문자를 알아야 지식을 찾고, 지식이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지난 과거가 멀다 하지만, 우리도 먼 미래 후예들에게 단지 과거의 존재일 뿐이다. 과거라는 이유로 우리가 앞을 것을 모두 부정하면, 먼 미래의 주인공 역시 우리를 부정할 뿐이다. 존재의 부정성은 곧 다시 자신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정체성 없이 산다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 우리가 어떤 존재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미궁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 티베트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한 예술가를 보았다. 티베트의 흙을 가지고 와서 티베트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만든 마을공터에 뿌려주었다.
티베트의 유민들은 그 흙을 기리며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언젠가 다시 돌아가기를 약속했다. 예술가 본인의 아버지는 이미 사망한지 옛날이고, 어머니 역시 노년에 이르렀다. 과거가 좋든 말든 그 과거 자체는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선택이다. 그래야 어떤 삶을 살아갈 건지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양반의 사회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문제가 심각했다. 그래도 병자호란 이후 근 270년 정도를 유지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섞어도 나라가 굴러간 점에서 그 근원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후로 갈수록 무예를 소홀해지면서 일제에 조선이란 나라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지금도 삼면이 바다고, 북한과 러시아, 일본, 중국, 미국 등 수많은 나라와 접한 이 환경에서 우리나라가 문무를 고르게 가지지 못한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반면교사, 온고지신이란 단어는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켜온 집안의 내력을 생각했다. 조선개국 아래 할아버지 9분이 계속 벼슬자리에 올랐으며,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도 삶의 흔적을 발견했다.
인간의 진정한 죽음은 육신이 다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인지는 각자의 가치관마다 다르지만, 아버지의 삶을 내가 기억하고 싶다면, 그 이전의 사람도 기억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 앞에 살았던 자들은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