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안국진, 이정현 외 / 아트서비스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소설은 아마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앨리스가 살아가는 세상은 환상과 재미가 있는 세계이다. 우리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 현실이 단지 꿈이라면 혹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꿈이라면 말이다. 혹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 즉 이데아란 존재하지 세계가 존재하면 어떤 것일까 라는 희망 아닌 희망을 품어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저서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가 적은 것은 정치철학 도서로 군림하고 있지만, 책을 보면 대화체로 이루어진 소설 같은 형식이다.

 

플라톤의 대표도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이데아(Idea)에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 공간 자체가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관념적인 가치관이 존재하던 세계와 달리 현실은 물질적 가치관이 강하게 작용하는 세계이니 다소 인식의 간극이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물질적 세계, 유물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도 관념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현실은 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우리가 이상적 가치를 삼아야 하는 그 이념조차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해진 가치관을 우리 인간들은 말을 하고 있어도 전혀 반대로 움직이지는 이상한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고 있자면,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1세기 한국에 살아가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상상력이 돋기 시작한다. 물론 앨리스 그 자체가 그런 성향일 수 없으나, 소설 속의 앨리스는 상상 속의 인물, 즉 현실에 없는 가상적 존재이다. 하지만 가상적 존재이기에 마치 어느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기에 우리 인간들은 그들에 대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말에서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하나의 필연성을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우리 현실을 다룬 이야기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앨리스라면, 당연히 환상적 가치관이 녹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다. 오히려 너무 적나라하기에 게다가 그 현실이 우리에게 낯설고도 외면하고 싶기에 더 환상일지 모른다. 우리는 21세기 현대사회를 거치어 오면서 지난 20세기의 흔적을 외면하려 한다. 공장이나 산업노동자는 1960~80년대의 대표적 서민의 삶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는 공업 중심의 노동생산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계속 서비스 중심의 사회로 산업체계가 바뀌었다. 21세기를 살아가도 산업노동자는 존재하고, 산업재해 역시 존재한다.

 

우리가 감추고 싶은 이야기, 우리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우리 인간들 마음속에 숨겨진 지저분하고 추악한 모습을 이 영화에서 여지없이 보여준다. 바로 앨리스란 여성이 그동안 세상이 자신에게 대해준 부조리에 대한 반동으로서 말이다. 영화초반 주인공의 모습이 나오기보단 주인공이 타고 있는 오토바이와 그녀가 신고 있는 신발이다. 보통 한국의 여성이 신고 있는 신발을 생각해보자. 주말의 시내가 아니더라도 보통 평일의 주거지 주변을 돌아다니면 어린 학생들은 운동화, 20대 내지 30대 직장인들은 구두, 중년 여성들은 운동화, 구두, 슬리퍼 등을 신고 다닌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앨리스는 다르다. 앨리스 동화책에서 귀여운 에이프릴이 달린 원피스와 아기자기한 구두가 아니다. 공사장이나 공장에서 신고 다니는 안전화였다. 안전화를 신어본 경험이 있다. 물론 공장보단 공사장 쪽 안전화를 신어봤지만, 기본적으로 신발이 아주 무겁고 매우 튼튼하다. 안전화를 신고 다니는 앨리스 수남은 신문배달, 식당, 청소 등 하루에 몇 가지의 일을 하는 슈퍼 우먼(Super woman)이다. 보통 남자도 체력이 감당되지 않은 노동시간을 그녀는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단 1가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남편, 인간 규정과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수남을 보면 2가지의 삶에서 갈등한다. 하나는 여중을 나와 여공으로 취업하느냐 아니면 고등학교로 나와 엘리트(나는 앨리스라고 생각한다)로 되는 것에서 엘리트(앨리스)를 선택한다. 문제는 학교에 가서부터다. 자격증을 많이 따고, 주판과 타자기를 잘 사용해도 그녀에게 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정현 씨가 연기한 앨리스의 고등학교시절은 아마 1980년대 정도일 것이다.

 

1980년대 컴퓨터 XT가 나오고, 1990년대 386486, 21세기 오면 펜티엄과 그 이상의 컴퓨터가 등장했다. 인간이 손으로 직접 계산하고 타이핑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컴퓨터 엑셀이 계산하고, 컴퓨터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에서 문서를 만들어낸다(지금 내가 하고 있는 리뷰 작업도 컴퓨터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에서 작업 중이니 말이다). 인간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이 사회적으로 문명발전이 더해지면 기존의 기술력은 아무 것도 쓸모 없는 잡동사니가 된다.

 

앨리스가 가진 기술은 모두 별 볼일 없는 게 되어 버렸고, 졸업 후 그녀가 처음 들어간 회사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곳이었고, 결국 그녀는 작은 공장의 사무직이 된다. 하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영화배경에서 앨리스의 고등학교 시절이 1980년대라는 점에서 당시 대학을 안가고 취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취업을 해도 전문적으로 기술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공장에 가게 되고, 사무실에 가서는 보조요원만 되었다. 학교선생은 앨리스에게 가슴을 풀어헤치면 그래도 인정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막상 공장에 가니 자신보다 더 볼륨을 가진 여직원이 있었다.

 

앨리스가 가진 자격증도 필요 없으나, 앨리스가 가진 여성적 매력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매일 공장에서 구박받고, 고독한 삶을 살아온 앨리스, 그녀에게 규정이 다가온다. 규정은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노동자고, 처음 앨리스에게 다정한 손길을 내어준 사람이다. 영화에서 2사람의 출생이나 배경을 말하지 않지만, 나는 이 2사람 모두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버려진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앨리스가 고교진학과 여공 사이에 고민한 점에서 그녀는 원래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고아인 확률이 높았고, 규정 역시 청각장애인인 점에서 부모에게 버려진 사람일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보면 부모와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이거나, 의역하여 생각하면 부모의 도움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즉 아무런 경제적 지원 없이 살아가는 오늘날 수많은 N포 시대의 청춘이었던 것이다. 단지 더 나아가 남편 규정은 청각장애인이었고, 우리의 앨리스는 약간의 지적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영화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앨리스란 제목이 들어간 순간부터 영화 속 세계에서 앨리스는 성실하나, 앨리스란 인간의 성향은 이미 앨리스틱(풀어 말하면 현실적인 감각이 약간 동떨어진 인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구의 사랑을 받지 않고 그저 먹고살아갈 길만 생각하던 그녀가 세상의 쓴맛(소주를 마시며)을 느낄 때 옆에 규정이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오직 규정만이 자신을 위로해주고 사랑해주었다. 여기서 앨리스는 스위치가 off 모드 on 모드로 교체되었다. 앨리스는 사랑하는 규정과 소박하지만 행복을 만들어가는 삶을 원했고, 규정은 자신의 아이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집을 사야 한다고 했다. 규정은 청각장애에 가난한 청년이었다. 보잘 것 없는 2사람, 그들은 동상이몽을 꾸었지만, 그래도 같이 의지해야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청각장애가 심해진 규정은 난청상태가 심각해지고, 결국 귀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디지털 기기들은 전자기기 주변에 있으면 부작용이 생기고, 작업도중 규정은 절단기에 손가락을 잃고 만다. 부서진 보청기, 그리고 억지로 앨리스의 손에 수리된 보청기, 이때부터 앨리스는 힘겨운 사투를 벌인다. 앨리스는 남편이 원하는 집을 구하기 위해 밤낮없이 열심히 일한다. 보통 사람이면 포기하지만, 수남은 앨리스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사회구조의 모순을 본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집을 살 수 없다.

 

자신이 버는 돈보다 집값의 시세가 더 올라가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도 100% 적금이 불가능하다. 급료 내에서 전기세, 물세, 세금, 전화세, 식비 등등이 나가기 때문이다. 생계 때문에 집을 구하지 못하다가 결국 140,000,000원을 대출받는다. 금융자본주의에 노출된 우리 서민이 10년 넘게 일해도 집을 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집을 사서 남편이 기뻐할 것이라 여긴 앨리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앨리스는 집을 사자 남편이 앨리스의 손을 잡아주며 슬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다. 카메라(남편의 시선)로 보이는 앨리스 손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손가락과 손바닥에 베인 굳은 살, 그 옛날 부드러운 손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이다.

 

그런 아내의 손을 잡아주며 슬프게 우는 남편을 보자, 앨리스는 남편의 손가락이 잘린 이유가 자신 때문이란 죄책감과 그동안 자신에게 무심하게 보인 남편이 아직까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자 기뻐한다. 하지만 남편은 벽에 드릴을 뚫고, 뭔가를 설치한다. 드릴사용법에서 마지막 그림에 어떤 남자처럼 그림이 당신도 멋진 남자라며 말을 건네는데, 남편이 집 안에 봉을 설치한 이유는 자살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아내인 앨리스에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집을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그것을 포기한 남편이 집을 아내에 의해 구하게 되자, 자신이 아내의 삶에 장애물 1호라는 것을 스스로 여겼다.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편지를 쓰며,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규정, 오히려 그것이 앨리스의 스위치를 Normal에서 High로 전환되게 만들었다. 앨리스는 집을 전세로 내놓고 자신은 원룸 고시촌에서 살아간다. 좁은 방에 침대 하나에 방의 3분의 2는 차지하고, 나머지는 작은 수납공간만 있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 후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힘든 일과 외롭게 고시촌에서 살아가는 앨리스, 그녀가 이런 선택을 결정하게 된 동기는 자신의 동네가 도시계획구역에서 금회 시범적으로 도시개발계획에 속하게 된 것이다. 도시재개발사업이 이루어지면 당초 그 지역이 철거되고 새로운 아파트나 상가 그리고 도로가 신설된다. 그러면 순간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부동산투기나 시세차입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된다. 영화에서 앨리스가 살아가는 지방자치단체는 해정구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서울시 영등포구 목동 일원이다. 목동문화체육센터 옆에 있는 임야공원, 한강 옆으로 안양천이 흐르는 동네였다.

 

도시개발사업이 이루어지면 부동산시세 차이 내지 혹은 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문제는 그 도시계획 구역계에서 앨리스가 사는 동네만이 우선적으로 시범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때부터 앨리스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인내가 아니라 세상 그 자체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구청 소속 상담실을 운영하는 경숙이 자신의 동네에 유리한 조건을 받아내기 위해 전문시위가 최도철 예비역원사를 이용한다. 전문시위 횟수가 300번이 넘은 그는 이른바 행동대장으로 활동하면서 도시개발사업을 자신들의 동네로 옮기기 위해 조작한다.

 

국가와 주민이란 이름 아래 경숙과 최원사는 대대적인 공작활동을 펼치고, 구청직원은 경숙이 구청에도 알력을 행사하고, 최원사라는 전문시위가의 권위의식으로 마을주민들을 포섭해갔다. 앨리스는 자신의 남편을 구하기 위해 결국 이 2사람과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최원사의 집에 가서 구타를 당한다. 최원사 역시 이 시대의 희생양 내지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그는 평생 군에 몸을 받쳐 살아왔으나, 가족도 없이 혼자 독방에서 살아가는 노인이었다. 게다가 생계를 위해 길가에 버려진 종이박스를 모아 폐품가게에 팔며 돈을 버는 사람이었다.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국가를 위해 살아왔지만, 국가는 그에게 고독과 가난만 주었고, 남은 것은 오로지 생고집인 그에게 전문시위 활동과 폐품수집으로 생계를 이어간 것이다. 왠지 모르게 더우나 추우나 2만원을 받고 현장에 출동하는 어르신들이 생각난다. 다 같이 못살고 배고프고 힘든 서민이나, 진짜 적은 싸우지 않고, 자신들의 세계에서 힘겹게 투쟁해야 하는 이 사회의 그림자들이 보이는 것이다. 경숙은 그런 사람들을 이용하여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최원사가 죽은 후, 경숙은 최원사가 분신자살했다고 주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평소 잘 아는 세탁소 사장을 이용한다.

 

최원사가 죽기 전에 청년부장에서 이제는 최원사의 행동대장으로 임명한다. 영화에서 경숙은 세탁소 사장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한다. 전화는 자기만 하고 약은 3개에서 1개만 먹으라고 한다. 상담소 운영을 하면서 세탁소 사장을 알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은근히 보여준다(왜 자신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손을 세탁소 사장의 얼굴을 쓰담아 주는 것일까?). 세탁소 사장이 경숙의 말을 잘 듣는 이유는 단순히 약을 전달해주는 상담원이 아니라는 점이 내 생각이다.

 

이렇게 앨리스는 다수의 적들과 상대해야 한다. 두뇌파 경숙, 행동파 최원사와 세탁소 사장, 그리고 더 나아가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린 형사들까지 말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 살인용의자로 수사대상에 올라간 앨리스에게 형사가 찾아온다. 형사가 찾아오는 장면에서 좁은 고시촌 침대는 3사람이 앉기에 너무 좁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성형사 2명 사이 중간에 끼인 그녀의 작은 몸은 더 작은 몸으로 보인다. 형사가 그녀의 고시촌을 방문 후 서로 대화를 한다. 고참형사는 신참현사와 대화 중 이런 말을 한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범죄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 가난한 사람은 고의로 범죄를 일으키는 것보단 우발성에 의한 사고에서 많이 발생한다. 그 말은 범죄가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점,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은 개인에게 주어진 가혹한 현실에 대해 아무런 구원이나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거기에 대한 분노와 저항에는 매우 가혹하다. 안 그러면 앨리스가 최원사와 세탁소 사장에게 심한 몰골을 당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의료현실의 모순도 나온다. 사람이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을 때 의사들은 환자의 호흡기를 떼라고 한다. 뇌사 판정을 받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자살시도로 뇌사가 된 남편이 계속 병원에 입원하면 병원비가 눈처럼 불어난다. 그러나 병원입장에서 죽기 일보 직전의 환자를 강제로 내보낼 수 없다. 환자가족이 파산해도 빚만 계속 늘어나도 병원은 끝까지 환자의 생명을 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지 그런 부담을 안기 싫어 앨리스에게 안락사와 존엄사를 선택하도록 한다.

 

뇌사판정을 받으면 생존에 대한 권리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모르나, 한국에서는 아직 안락사라는 제도가 없다. 일부 선진국에서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된다. 더 이상 살아갈 가망 없이 병마의 고통에 의해 끔찍한 아픔을 느끼는 사람에게 오히려 죽음이 축복일지도 모른다. 앨리스는 의사에게 언제나 존엄사란 극단의 선택만 요구받는다.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사실 보호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경제적인 조건에서 생활은 파탄 나고, 오랫동안 지켜본다고 마음까지 지친다. 하지만 앨리스의 선택은 너무나도 달랐다.

 

영화를 보면서 엽기적이고 끔찍하고 때로는 측은하고 고소하기만 했던 영화 같았다. 앨리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점에서 우리라고 앨리스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세상을 살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자신이다. 하지만 자신이 소중하다고 해서 그 소중한 것을 알게 해주는 사람들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나를 찾아주는 사람, 앨리스가 그토록 잔혹한 동화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나를 찾아주는 사람을 찾아오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선악의 도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선과 악이라 도덕적 가치는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권력에 의해 조성된다.

 

물론 극단적 행위에 대해선 윤리적인 문제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리를 말하려면 그 윤리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제3자 역시 심판대에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앨리스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앨리스는 세상의 룰과 자신의 룰에서 자신을 선택했다. 도저히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조차 못할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예술적으로 상당히 높다고 본다. 현대사회에서 예술적 가치는 기존에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촬영기법이나 연출에 대해서는 저예산이므로 그다지 높은 평가는 어렵다. 단지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엄청난 반전과 흥미가 있다. 생계밀착형 잔혹동화이고 현대사회 한국이니 N포 세대에겐 낯설지는 않으나 낯설게 되어가는 이야기가 흐른다. 행복해지고 싶은 게 죄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죄를 박살낼 수 있을까? 앨리스의 적으로 나온 이들을 보면 대부분 가난하고 집안 사정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딱하다. 딱한 사람끼리 싸우는 현실에서 우리 사회 자체가 이상한 나라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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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일신 베스트북스 16
나다니엘 호손 지음 / 일신서적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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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씨>란 책 제목은 항상 많이 들었다. 내용을 잘은 모르나, 제목 자체가 <주홍 글씨>이기에 그것은 분명히 낙인이란 이름을 말하는 것이란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번에 읽은 <주홍 글씨>, 역시 낙인이 찍힌 여성의 이야기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왠지 무서운 기억이 떠올랐다. 영국에서 왜 미국으로 많은 이주민들을 보내야 했는가? 청교도적인 가치관이 어째 검소함과 더불어 미국의 탐욕적인 식민지개발과 이어졌는가?

 

예전에 마녀사냥을 연구하던 실비아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가 있다, 그 책에서 영국의 인클로저 현상을 다루고 있다. 영국에서 16세기부터 공유지를 귀족과 왕족들이 사유화했다. 공유지 사유화는 공유지를 이용하던 농민 입장에서 치명적인 타격이고, 심지어 공유지 주변에 있던 농민의 농지까지 귀족들은 빼앗아간다. 농지가 없는 농노는 부랑자가 되든지 도시의 노동자가 되든지 혹은 도적이 되어야 했다. 경제적 흐름에 따라 영국에서 잉여적인 인구가 늘어가고 있었고, 이들을 처리하기 좋은 방법은 바로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이민정책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주홍 글씨>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런 현상을 말하지 않으나. 나사니엘 호손의 일가의 역사가 나올 때 대략 그 의미를 확신할 수 있었다. 호손의 직계조상은 17세 말에 마녀사냥을 집행하던 관료였던 것이다. <주홍 글씨>의 배경이던 뉴잉글랜드는 그 지명의 이름처럼 새로운 잉글랜드를 말한다. 결국 영국사회에서 격리된 자들이 영국에 대한 향수로 젖어 생긴 식민지 사회인 것이다.

 

식민지사회의 열악한 요소는 잘 보여주듯이 주인공 비운의 여인 헤스터가 살던 마을에 의사와 목사가 매우 귀했다. 원래 헤스터의 남편이던 칠링워드, 헤스터의 딸 펄의 아버지며 그녀가 진정 사랑하던 목사 딤즈데일은 뉴잉글랜드에서 귀한 인재였다. 칠링워드는 실력이 좋은 의사였고, 딤즈데일은 영국 본토 명문대학에서 공부를 한 목사였다. 기독교 사회에서 목사의 권위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추모하는 점에서 왕권은 교회와 밀접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다.

 

여왕의 시대로부터 격리되어 있지만, 뉴잉글랜드 사회는 아직도 영국의 향수병으로 젖은 매우 수구적인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사회에는 종교가 하나의 사회적 법률로 통용되고, 법률이 교회의 권력에 의해 움직이므로, 종교적 가치관이 문화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여주인공 헤스터는 어두운 감옥에서 나왔으며,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A자 주홍색 자수가 따가운 햇빛과 군중의 눈빛에 의해 반사되었다.

 

그녀의 죄는 남편이 있어도 다른 남자와 간음하여 아이를 낳은 죄였다. 문제는 남편은 정확히 누군지 알 수 없었으며, 사람들은 헤스터에게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이야기하라고 말한다. 이미 나는 이 작품 초반에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성난 군중과 무서운 보초병의 눈빛이 그녀를 질타할 때, 오로지 마음 약한 목사가 그녀의 입장보단 그녀의 존재성을 인정해주었다. 그게 바로 딤즈데일이었다. 왜 헤스터가 젊은 목사에게 도취했는지에 대해서 작품 안에서 설명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호손의 작품성은 기존 사회의 답답한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상을 찾는 것을 원했다. 본래 헤스터는 명문집안 출신 여성이란 점도 알 수 있었고, 그녀가 당시 사회로썬 용납되기 어려운 죄를 지었다고 하나, 그녀의 인품은 고고하고 아름다웠다. 오직 딸 펄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였지만, 때로는 불우한 이웃을 위해 자선을 마다하지 않았던 용기 높은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가슴에 A자는 평생 그녀에게 지워진 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짐조차 승화시켰다.

 

A가 어떤 의미인지 잘은 모르겠다. 나쁜 의미 내지 정상적이지 못한 것이라면 Abnormal 정도일까? 하지만 그녀의 AAble, Angel까지 변해간다. 도덕을 위반한 그녀가 오히려 인간의 정신이 되어야할 가능성과 천사라는 칭호까지 받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오로지 사회적 관습에 의해 매여져 있었다. 낭만주의 소설이라 하니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다소 영향 받을지도 모른다. 소설 중간에 나온 쇠사슬이란 단어는 <사회계약론>에서 항상 나오는 말이고, 쇠사슬이란 의미는 물리적인 의미로써 사슬이 아니라 인간사회에서 인간 스스로 억압하고 있는 굴레라는 점이다.

 

헤스터는 처음에 남편을 밝히지 않았고, 그동안 죄수의 낙인 A를 가슴에 새기며 다녔다. 그녀는 치욕적인 일을 저질러도, 그 죄에 대한 처벌과 자숙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 위에 A를 새기지 못한 남자는 어떤 심정일까?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도덕적 입장에서 딤즈데일은 오히려 큰 쇠사슬이 되었다. 그리고 질투에 젖은 칠링워드는 아내의 부정과 딤즈데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간다.

 

그가 처음 뉴잉글랜드에 왔을 때 인상 좋은 노학자이나, 7년이 지나자 그의 얼굴은 험악하고 악의로 가득했다. 헤스터는 이런 2사람 사이에서 죄를 지은 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죄를 받아들였고, 그 모습을 바라본 딤즈데일은 스스로 자신을 해방하기로 한다. 그 결실은 딸인 펄의 존재다. 진주와 같은 펄은 사랑과 죄악의 결정체였다. 부정에 의해 태어난 존재, 하지만 사람들은 펄의 행동과 모습에서 천사의 재림처럼 느껴졌다.

 

펄의 존재가 모순되고 역설적으로 보이는 점에서 우리는 죄와 사랑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고, 거기서 태어난 사랑과 증오가 순식간에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딤즈데일을 병들게 하여 마지막에 그의 부정을 밝혀 비참한 죽음을 유도하려 했지만, 딤즈데일이 죽은 후 그 역시 딤즈데일에게 간다. 칠링워드가 이런 모습을 보여준 이유는 그에겐 학식과 재산이 있어도 생명의 연결고리가 없었다. 불구자인 그는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삶의 의미가 바뀐 것이다.

 

딤즈데일의 죽음에서 칠링워드는 그동안 자신을 속박하던 쇠사슬에 해방된다. 그것을 인정하는지 미국과 영국에 남아있는 재산 모두를 헤스터의 딸 펄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죄의 결정체에게 그의 마지막은 사랑의 결정체로 승화된다. 현실에서 만일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만일 21세기 자유주의국가라면 이미 불구자인 칠링워드 옆의 헤스터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가며, 딤즈데일은 헤스터를 다시 아내로 받아들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회는 교회의 권력이 우선되는 시기고, 딤즈데일 목사는 나이가 어려도 마을에서 나이가 최고령 신자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고, 뉴잉글랜드의 최고 통치자인 총독에게도 존중받는 자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최고의 지위에 있은 자가 딤즈데일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위치에서 숭고한지, 아니면 자신을 내던져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여 모든 것을 고백하는 인간이 더 숭고한지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적어도 딤즈데일의 마지막은 인간에게 주어진 죄가 많은 이들에게 드러나지 않은 것보다 평생 자신만 안고 가는 게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소설은 낭만주의이지만, 나름 서구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한국과 같은 동양은 인간의 사고방식이 인간의 관계성에 시작된다. 하지만 서구는 인간의 사고방식은 신과 인간의 관계이다. 신 앞에서 인간은 과연 자유롭고 진실한 존재인가라는 의문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목사는 모든 죄와 거룩한 자리를 초월하여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뉴잉글랜드를 떠난 후 다시 돌아온 헤스터는 A가 달린 드레스를 입은 후 평생 타인의 위해 살아간다. 마지막장면에서 헤스터는 천명을 다하여 딤즈데일이 묻힌 곳의 옆으로 집을 옮긴다.

 

무덤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으나 희미한 한 점의 빛은 A란 글이 보였다. 살아서는 같이 할 수 없었으나 죽어서는 영원히 A를 나눈 두 사람에서 낭만주의 문학성의 백미를 보여준다. 현실에서 인정되지 않기에 새로운 세상에서 이상을 펼칠 수 있다는 신념을 말이다. 헤스터는 단지 그런 이상을 자신만의 환상이 아니라 늘 봉사하는 삶으로 보여준다. 왜냐하면`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은 비문을 만들 수 없고, 무덤사이에 A란 글자를 만들 수 없다. 딤즈데일과 헤스터의 관계는 그들이 살아생전에 용납할 수 없었지만, 그걸 용납받을 수 있었던 것은 헤스터의 용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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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08-28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통, 간음을 뜻하는 adultery의 A라고 하던데요? 성인과 간음이 어원적으로 연관 있는게 재밌지요.

만화애니비평 2016-08-28 23:25   좋아요 0 | URL
그건 몰랐네요. 영어에 약히다보니 감사합니다.

syo 2016-08-28 23:26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좋은 글 읽을수 있어서 제가 감사합니다.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9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켈러번과 마녀, 요거 읽을까 말까 생각 중인데 어떻습니까. 재미있쓔?

만화애니비평 2016-08-29 10:30   좋아요 0 | URL
마녀사냥 연구도서로 최고의 서적이죵. 재미보단 깨우침으로 ㅎㅎ
 
경제학 마스터 - 위기에 더욱 빛나는 경제학 고전 16권
존 메이나드 케인.헨리 조지즈 외 지음, 서경호.정명진 외 옮김 / 부글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으면서 책제목을 조금 변경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책제목은 <경제학 마스터>, 사실 책을 읽으면 경제학자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인문사회 철학자까지 등장한다. 그들의 이름과 책들, 그리고 사상까지 소개한 것 까지는 좋겠지만, 책을 읽으면 책속의 내용은 엮은이가 직접 그 책을 토대로 판단하고 요약 정리한 게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책들을 골라잡아 그 속에 있는 어느 주요 부분만 선택하여 그대로 실어 넣었다.

 

그런 점에서 <경제학 마스터>란 책제목은 어불성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양한 경제학자 및 사상가들의 책 내용을 소개하고 알려준 것은 좋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경제학이라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필두로 정치경제학 연구 분야로 존 스튜어트 밀과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론을 제시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자본주의 경제가 세계적으로 넘어가면서 등장한 경제학의 기린아인 하이에크와 케인즈가 주요 경제학 흐름 골자다.

 

여기에 리카도나 슘페터, 멜서스 같은 정치경제학자들까지 가세하면 나름 정리된 경제학 이론도서가 되기도 한다. 물론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본다면 나라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제란 단순히 돈만 벌고 도는 것보단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원과 자원 그리고 노동력 등을 연구하여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제란, 그들의 호주머니 속의 지갑에 많은 지폐가 들어가기만을 원한다.

 

경제학적으로 그 부분도 놓칠 수 없는 점이지만, 그 점은 단지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 거대한 물결은 아니다. 이 책을 엮은 저자는 그 거대한 물결을 가지고 책을 논한다. 문제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은 경제학 도서가 아니라 정치사회학 도서에 가깝다. 따라서 이 책이 <경제학 마스터>라고 보기에 어려운 것은 경제가 정치사회적인 요소와 맞물려 돌아가는 게 사실이나, 단순히 경제라는 단어에 치중했다면 몰라도, 책은 경제만을 다루지 않는다. 토머스 페인의 <인권의 정의>같은 경우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논하는 책이다.

 

그렇다면 경제를 무엇으로 보는 게 정답인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경제성과 자유성에서 인간의 빈곤이 해결되지 않은 진정한 자유는 없다. 경제라는 것을 돈이나 자본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나 사회적 합의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제학 마스터>란 책제목이 전혀 어울릴 수가 없는 것이다.

 

경제라는 용어는 어느 사회가 어디에 있든지 존재할 수밖에 없는 단어이다. 인간이 살면서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을 먹으려면 농사를 통해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 식량을 보유하지 않으면 노동력과 생산력조차 없어진다. 인간의 삶에 필요한 그 요소가 경제라는 점이다. 민주주의 정치체계나 간활한 군주의 정치공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국가라는 체계는 국민이란 인간들로 구성된 커다란 사회체계이다.

 

사회체계 내 살아가는 인간은 재원과 자원을 필요로 한다. 경제성은 그런 말이기도 하나, 그 경제학이란 학문적 가치에서 인간의 오만과 고정관념이 오용될 가능성이 높다. 환경생태학적으로 인간의 합리성에 의해 우리는 문명의 편리를 누리는 대신 목이 마르면 안심하고 하천의 물을 마실 수 없다. 아스팔트 차로에 빠르게 달려가는 차 안에서 다른 차의 매연과 다른 운전자의 흡연으로 인해 창문을 열고 다닐 수가 없다. 에어컨 바람은 잠시 상쾌하겠지만, 탁한 공기는 인간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법이다.

 

인간의 욕심은 타인의 재산을 노리고, 자신의 재산을 신성시 여긴다. 책 안에서 부모님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자신이 빼앗긴 재물은 잊어지기 어렵다는 홉스의 말에서 소름이 끼친다. 경제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정작 도움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을 잡아먹는 동굴 속의 외눈박이 괴물인가? 경제학을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재화에 대한 욕구와 욕망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표출되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책 자체가 여러 저자의 내용을 고스란히 옮겼기에 처음 접하는 분에게 이게 경제학 입문서 내지 정독서로 추천 드리고 싶지 않다. 단지 경제학을 알려면 어느 사람을 찾아보면 좋을 지에서 나름 추천 드릴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1/3 가량이 경제학 서적이 아니다.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 정치, 문화, 역사 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지 경제학 도서가 아닌 것까지 경제학 도서로 포함한 게 아쉬울 뿐이다. 차라리 <정치경제학 입문 마스터>로 만든 게 훨씬 좋다고 여긴다. 아래 목차를 제시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1장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2장 이반 블로흐의 전쟁의 미래

3장 에드워드 벨러미의 과거를 돌아보며

4장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5장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6장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

7장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철학강의

8장 토머스 로버트 맬더스의 인구론

9장 토머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

10장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

11장 제러미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들

12장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13장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14장 몽테스키위의 법의 정신

15장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16장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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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8-2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경제입문론 정도...마스터는 한권으로 마스터가 될수 없었나 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20 13:50   좋아요 1 | URL
입문정도도 어렵습니다. 걍 소개~ 정도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애비 님 요즘 상종가를 치십니다그려.. ㅎㅎㅎ 가을 되면 한 잔 아시죠 ?

만화애니비평 2016-08-20 14:21   좋아요 0 | URL
서울 유진식당이 목표지점인겁니까!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0 14:24   좋아요 0 | URL
다음에는 만애비 님이 지정하신 곳에서 하죠... 야외 식당 좋은 곳 있으시면 추천하십시오.

yamoo 2016-08-20 21:38   좋아요 0 | URL
에이, 곰발 님만하겠습니까?! 연일 상한가를 치셔서 `제한폭`을 실시해야 할 듯한데욤^^ㅎㅎ

yamoo 2016-08-20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차를 보니, 정치경제학 입문론 쯤 되는 거 같습니다.

제가 공부한 바로는 하이에크의 경우 주류 경제학자가 아닌 거 같습니다.
보통 경제학에서 주로 언급하는 학자를 보면, 케네, 애덤 스미스, 멜서스, 리카도, 밀, 프리드리히 리스트, (구스타프 슈몰러, 베르너 좀바르트,) 칼 마르크스, 베를런, 칼 멩거, 왈라스, 마셜, 피구, 케인즈, 슘페터, 로빈슨, 돕 등을 많이 꼽습니다. 뭐, 다수설 쯤 된다고 봅니다.

하이에크는 정치경제학자로 분류되어 주류 경제학에서 많이 언급되지는 않는 듯합니다.(교과서 차원에서..)

현대경제학으로 분류된 학자들을 보면, 새뮤엘슨, 프리드먼, 갤브레이스, 뮈르달, 스라파 등을 언급합니다. 물론 교과서적이죠.

하이에크와 미제스는 오스트리아학파로 분류되어 경제학이 아닌 정치경제학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거 같습니다.

물론 위의 책에 대한 만애비 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책 자체가 경제학 마스터라는 타이틀을 달기에는 너무 범위가 넓어, 그 부분을 언급하시고자 했겠지요.

제가 한 때 미제스와 하이에크를 읽으면서, 이 학자들은 왜 교과서에 잘 언급이 안 되는지 의아해서 교과서를 많이 찾아 봤는데, 이들을 다루는 교과서를 본 적이 별로 없는지라...그 부분 때문에 주저리 많이 쓰게 됐네욤^^;;

개인적으로 경제학은 `희소성의 원리`를 구현하고자 성립된 학문 같아요. 아미티아 센같은 학자는 경제학에서의 철학의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경제학이 인간에 대한 학문으로 자리매김할려면 교과서 자체에 `소비자`를 대체하는 학술어가 빨리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경제학 어떤 교과서를 봐도, `소비자`만 있지 `인간`은 없는지라..

만화애니비평 2016-08-20 23:54   좋아요 0 | URL
야무님 말씀이 거의 맞습니다.
오스트리아파로 하이에크 미제스 이름은 밀의 정치경제학에서 봤는데, 신자유주의 노선에선 하이에크 이론을 가져와도 그것이 교과서로 되지 않은 점은 조금 의아하네요.

소비자란 용어에서 소비자가 우선인지 소비자는 바보인지 의문되는 현실인지라 어째보면 경제학에 철학이 가장 필요한 것 같습니다.

루쉰P 2016-08-20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는 읽을 때마다 재미지네요 마치 제 관심사를 꿰뚫고 있으신 듯 해요 전 지금 고향에 내려와 친구와 술 한잔하고 집에 가고 있어요 전 파스칼의 팡세 리뷰 쓸거에요 만화애니비평님이 감탄할 정도로 쓸겁니다 이얍

만화애니비평 2016-08-20 23:52   좋아요 0 | URL
술을 맛나게 드시는 겁니다,. 니빠앙~ㅁ
 
루소 - 시공 로고스 총서 31 시공 로고스 총서 31
로버트 워클러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최근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을 읽었다. 랑시에르의 책에서 말하는 요지는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대중을 수동화 시키는 점이다. 수동적인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욕망에 서식한다. 한 마디로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프레임이 갇혀 거기서 나오지 못하고, 그 틀 안에서 열렬하게 돌고 도는 인생을 만끽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없는 인간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도덕이란 가치가 있다. 그런데 도덕적 가치는 사회적 합의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회적 합의는 그 시대의 풍미와 조류에 의해 움직인다. 건전한 사회에서 흘러나오는 도덕은 매우 아름답고 사람들은 행복의 미소로 가득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한 사회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서로 경계하고 미워하며, 조금이라도 작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성난 이리처럼 으르렁거릴 것이다.

 

인간이 진정 행복한 시대란 도대체 언제라는 것일까? 사소한 일에 인간들은 수지가 틀리면 친구에서 적이 되고, 돈 앞에서 우애 좋았던 형제자매마저 법적 소송까지 벌인다. 심지어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관계가 비틀린 모습도 TV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인간의 행복은 무엇으로 망가지는가? 마르크스이라면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했으니 자본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 이전이라면 루소는 개인의 이기심이라 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루소를 다소 비판적 관점에서 대하고 있으나, 마르크스의 서적들을 읽은 후 루소의 서적을 읽으면 상당한 유사한 요소를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친구인 엥겔스 같은 경우 루소의 서적을 세심하게 읽었고, 노동자에 대한 현실의 비극은 루소가 보던 것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 발견자, 루소>에서 루소는 마르크스, 로베스피에로의 아버지라고 한다.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서적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이전에 존재하던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찾아간다.

 

그 원류는 애덤 스미스의 제자인 데이비드 리카도 좌파와 또 하나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활약하던 자코뱅 좌파였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고전경제학의 발전과정이고, 마르크스의 정치학은 계몽주의 운동가의 발전과정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의 고전경제학은 마르크스의 <자본>에게 이론적인 요소를 전달했지만, <자본>이 가진 정신적 가치까지는 아니다. 산업혁명 당시 메뉴펙처라는 분업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그의 제자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자본>에서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생산력은 발전시켰으나, 분업은 인간은 도구화시켰고, 임금의 질을 하락시켰다. 분업이 만약 노동자들이 하나의 합동체계로 만든 회사면 모르나, 분업은 자본가 하나에 의해 운영되는 곳이다. 노동자가 기계부품처럼 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임금이 생계수단의 한계점으로 이어지고, 가혹한 노동환경은 직업병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부분에 대해 루소는 조금 다르게 보았다. 인간이 분업이 되면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거기에 메여진 것들만 가능하다.

 

인간의 직업이 시인, 벽돌공, 수리공, 교사, 의사 등으로 세분화되면 인간의 인생은 매우 한정적이고, 지나친 전문화는 인간에게 부조리한 권력한 명예 그리고 허영을 쫓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논조는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밀>에서 언급된다. 위에서 언급한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이 루소의 주장에서 시작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스펙타클화 된 인정투쟁은 인간 스스로의 감옥을 만들어낸다.

 

루소의 직업에 대한 고찰은 후에 가면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로 이어진다. 사회적 분업은 비단 노동자의 임금만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마저 분리시킨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의사의 손에, 교육은 교사의 손에, 결혼도 예식매니저, 죽음도 상조전문가에게 맡긴다. 인간 본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전혀 없어지게 된 세상이다. 인간 스스로가 노동자, 교사, 시인, 비평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은 없다.

 

루소의 경계는 바로 현대사회에서 드러난다. 영국 정치사상학자 로버트 워클러의 <루소>는 근대민주주의 꽃을 피우던 프랑스대혁명 전야에 존재했던 루소에 대하여 연구한 도서이다. 그의 말대로 18세기를 가장 과격하여 비판한 사상가이고, 가장 심하게 박해를 받았던 사상가 중에 하나이다. 루소의 철학을 보면 관념적으로 칸트로 넘어가고, 유물론적인 요소는 마르크스로 넘어간다. 그러나 루소가 보던 시기는 언제나 스파르타의 절제된 간소함이고, 로마의 민주정이었다. 과거를 바라보던 루소는 플라톤의 정치사상을 담고 있으나, 오히려 전도시켜버린 광기의 천재였다.

 

루소의 사상이 오히려 현대사회에 더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은 철학의 시작이나 인문학의 시작일 수 있겠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공감대로 이어지는 것에서 다소 벽이 느껴진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를 이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오면서 루소가 주장한 내용이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의 입으로 나온다. 루소 이전의 사회는 종교가 정치와 결부된 사회다. 종교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삶의 가치를 강요했고, 인간의 운명은 이미 신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 한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의 삶은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 움직이고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이라도 루소는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일반적 계몽주의자처럼 지식인 엘리트들이 무지한 대중을 계몽하여 이끌어간다는 것과 다르게 루소는 오히려 민중의 선한 감정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처럼 기계화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불가능하겠지만, 자연이 있는 농촌인간들의 순박하고 정직함이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의 도서는 당대 엘리트에게 많은 공격을 당하고, 지금도 그의 사상을 두고 말이 많다. 죽어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은 사상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루소가 보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자아성찰과 자아반성만의 영역이 아니다. 루소의 <에밀>처럼 어린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면 타락한다고 보았다. 아이의 비위를 너무 맞추면 그 아이는 버릇이 없어진다. 루소는 직접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한 적은 없으나, 루소가 말하는 자연이란 인간의 본연의 세계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기 전부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을 빼앗겨버렸다. 주입식 교육으로 수동적인 인간이 되었고, 주변 사물에 대한 판단은 누군가의 경험으로만 대체되었다. 선험적인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이성의 영역은 모조리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서평 머리부에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이 나온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미 어릴 때부터 우리의 눈을 빼앗았고, 어른이 되어 다시 이어진 것이다. 루소는 그 이유는 부패한 사회와 문명이라고 했다. 그 문명의 교육이 다시 아이에게 이어지고, 다시 재생산되어 인간 본연의 세계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소를 읽는 것은 18세기가 아니라 21세기의 우리가 보는 세계를 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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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6-08-07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 애니 비평님 글은 만화 애니가 아닌 사회 문화 비평글일때 더 재미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8-07 22:15   좋아요 0 | URL
아니고, 오타쿠가 실천해야할 본연의 임무가 이렇게 되다니요..ㅎㅎ

루쉰P 2016-08-07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도대체 이런 글을 어떻게 쓰시는지 원...감탄을 하고 갑니다 ㅋ 루소 정말 정말 매력적이네요 ㅋㅋㅋ 읽고 싶은데 왜이리 저는 읽을 게 많은지 ㅋㅋㅋ

역시나 재미난 글 잘 보고 갑니다 ㅋ

만화애니비평 2016-08-07 22:16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지금도 루소가 적은 도서를 다시 읽는 중입니당..ㅎㅎ

루쉰P 2016-08-08 10:16   좋아요 0 | URL
항상 독서를 하면서 느끼지만요 ㅋ 한 명의 사상가를 온건히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더라구요 ㅋ 전 톨스토이, 간디, 마틴 루터 킹, 루쉰 이렇게만 파고 들고 있거든요 ㅋ 어찌나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정말 루소의 전문가이신게 대단하신 것이라 느껴집니다. ㅋ

2016-08-07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7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9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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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회적인 영역으로 항상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사는 세상을 연구하는 사회학을 찾아가면 그래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눈으로 돌아가는 현실이나 그 원리는 눈에 보이지 않은 거대한 조류로 휘말려 있다. 마치 수수께끼로 얼룩진 미스터리 현상처럼 우리가 사는 일상은 늘 익숙하면서도 그 익숙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궁금해지기 시작하면 머리에서 에러 신호가 깜빡인다. 사회학이란 영역을 내 개인적으로 독학을 했다.

 

사람들은 나보고 독한 놈이라 한다. 돈도 안 주고, 봐도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왜 하냐고 묻는다. 책을 읽으면서 넉넉하지 않은 시간을 내어야 하고, 초반에 책을 살 때는 박봉을 나누어야 했다. 지금은 도서사이트의 포인트가 총알이 되었지만, 그 총알이 장전되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총알을 공중으로 뿌려야 했다. 어째든 사회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란 결국 내가 모르는 세상에 대하여 내 스스로가 그 곳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의 투쟁이다.

 

책을 읽다보면 왜 그런 논리가 되는지가 이해가기도 하고, 가끔은 이해가 가지 않을 경우가 많다. 책이란 지식의 보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읽혀지는 책도 있고, 그렇지 못한 책도 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읽히는 책들은 그 안에 무엇인가 숨겨져 있는 함의가 현재도 통용되고 앞으로 통용될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책을 읽은 후 세상 안의 인간들을 만나면 순간 낯선 나를 발견한다. 사회에 살아가는 것은 그 안에 머물러가는 존재지만, 안에 머무는 것은 그 안에서는 자신이 어떤 세상인지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

 

사회학을 두고 현실적인 도구로 대체하자면 반투명 유리라고 생각한다. 자신 주변의 벽은 색으로 가려진 벽이나, 사실 그 밖은 안을 볼 수 있다. 단지 안쪽은 거대한 용기이기에 보는 사람은 그 벽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안에서 움직이는 인간을 볼 수 있는 규모가 작고, 너무 멀리 있으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멀리서 봐야지 다양한 인간군상을 알고, 세상만사를 알 수 있다. 만일 그렇게 멀리서 자세히 보려면 좋은 안경이 필요하고, 다시 확인하려면 녹화장치도 필요하다.

 

인간이 살고 있는 거대한 반투명용기에서 사람들은 출구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도, 그 문을 여는 것은 주저한다. 문을 열면 시간을 괜히 낭비해야 하고, 그 문까지 찾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게 귀찮다. 그래서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은 참으로 난감한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이 이미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에 자신이 느끼는 바를 이야기하는 것과 멀리서 바라보는 인간이 말하는 것과 너무나 큰 차이점이 있다. 물론 멀리서 보는 인간들도 다 좋은 의도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하이에나 같은 시시탐탐 기회를 보면서 자신의 잇속을 채울 수 있는 사냥감을 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회에 살면서 부조리와 모순에 부딪힐 때 아무 것도 모른 채 바보처럼 가만히 있어야 할 경우, 그 위기를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살며 걱정을 한다. 돈을 벌고 연애를 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말이다. 단지 눈앞에 이익과 즐거움만 원한다. 나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이기심과 쾌락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리 원하고 찾으려 해도 마치 신기루처럼 자신의 손에서 멀어져 간다. 신기루는 사라져가도 그 이미지의 상을 더 크게만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헛된 욕망과 스펙타클의 열렬한 선수가 되어 허상 위의 경기장에서 미친 듯이 뛰어다닌다. 현대사회는 모든 척도가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경제적인 빈부는 인간의 인성과 가치마저 형성하고, 그 사람이 가진 의식과 판단력조차 돈으로 결정된다. 좋은 옷과 좋은 잡화류는 자신의 신분이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이미지에 상당히 집착한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은 기호이다.

 

백화점 고급핸드백에 빚을 내고 구입하는 여성들, 기름 값과 보험료에 고민하면서 고급 차량을 구매하는 남성, 이 모두가 자신의 처지와 실용성보단, 세상의 조류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다. 하지만 그 애절한 움직임은 이미 무의미한 것이다. 단지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자신이 마치 낙오되지 않았다는 것을 억지로 보여주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 위한 하나의 기만이다. 기만의 세계는 언제나 열려 있다.

 

사회성에서 책에서는 인정투쟁을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인정받지 못한 채 언제나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는 게 현대인들의 슬픈 초상이다. 책에서 오타쿠가 차라리 나아보이는 이유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 없다. 힘없는 사람 앞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위에 권력자에겐 바른 말 한마디 못하고, 아부를 밥 먹는 것과 유사할 정도로 잘 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지 못해 고립된 상태이기에 남의 이목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남에 시선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지 경계나 이형의 존재로 보이기는 싫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움직이는 이상한 세계의 인정투쟁,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해야지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한다. 대놓게 내가 입고 싶어서 혹은 지나가는 누군가 잘 보이려 입은 게 아니라 하나, 막상 그들의 정신분석을 해보면, 그들의 입장을 옳으나 그 입장에 숨어있는 타인에 대한 욕망은 인정하기가 싫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도서모임에서 이런 대화를 자주 나눴다. 한국인은 개인주의화가 덜 된 나라 사람이다. 개인주의보단 오히려 개인적 이기주의와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활보치는 세상이다.

 

따라서 뭔가 이익이 목적되지 않은 이상, 뭔가 자신을 돋보이거나 더 좋은 것이 오지 않은 이상 더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에서 타인의 입장보단 나의 이익에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문제는 포커스가 남에게 무의식적으로 사소한 피해가 아닌 생존의 박탈 앞에서 무덤덤할 수 있는 자세다.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의 세계다. 주변을 돌아보기보단 자신의 주변을 스스로 뱅글뱅글 돌아야 한다. 한국사회가 가진 공동체 사회에선 인간은 소외되지 않은 존재였다.

 

태어나면 마을에서 크고, 마을에서 일을 하며, 마을에서 결혼하여 아이를 가졌다. 죽어서는 마을에서 장례식을 지내고, 마을 산자락에 있는 언덕에 시체를 묻었고, 그 과정을 되풀이 했다. 그런다고 과거의 유산이 모두 좋다는 게 아니다. 적어도 과거의 인간에게 외로움이란 고독에 스스로를 보내지 않았다. 지금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직장과 학원으로 소원해지고, 아파트 이웃은 다정한 사람보단 집값을 위한 동원될 정예군이고, 층간 소음에 따른 불천지 원수가 되었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만족해야 하나, 막상 감옥은 같은 규격이 아니라 돈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와 오브제로 구성되어 있다.

 

서평을 적어가는 동안,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 왜 말이 연결되는 것처럼 적어가나, 내용은 계속 여기저기 튀는 것일까? 사회학을 연구하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순은 사회란 것은 단순하고 명쾌한 영역이 아니라 매우 복잡 다양한 미로라는 것이다. 미로를 찾아갈 때 미로를 향하여 발자국을 남길 수밖에 없다.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새처럼 다 볼 수 있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신이 아닌 이상, 새는 새대가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꾀꼬리가 노래 한 수 불러주면 감사할 따름이나, 도시에는 꾀꼬리 대신 닭 같이 생긴 비둘기만 펄럭거린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이런 복잡 다양한 사회상의 문제를 파트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러나 작가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더구나 자유롭게 서평이나 적는 독자이기에 이렇게 적을 뿐이다(나보고 이딴 식으로 글 적는 것에 불만 있는 분은 나에게 월급을 주면 된다. 적어도 내 글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이상 말이다). 사실 사회학 관련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엘리트의 시선은 왠지 피곤하게 느낀다. 이 책은 엘리트가 적은 글이나 그나마 엘리트라도 수면 아래서 코와 입을 밖으로 내놓은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한 글이다.

 

어떤 사건과 문제가 발생하여 거기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최대한 중립적으로 비판하여 최종적으로 어떤 대안과 가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전혀 상관없거나 상관하기 싫거나 또는 별천지에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판단내릴 수 없다. 사회학은 위에서 보는 게 아니라 차라리 아래로부터가 더 좋은 것이다. 거대한 반투명유리에서 위에 보다는 아래에서 보는 게 좋다. 빛이 내리면 모든 사람들이 일광욕을 하는 게 아니라 일부는 그늘에 가려 태양에 가린 채 살아간다. 그래서 사회학은 아래서부터 바라보는 시각이 있어야 문제의 원인과 해결대안을 찾을 수 있다.

 

이미 자신은 어떤 문제에 대해 겪을 일도 없고, 겪을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공감이란 단어는 물 건너갔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직접 노동자의 삶을 보고 저술했다면, 현대인 중에 엘리트들은 그저 마르크스의 저서가 어렵고 엘리트로서 볼 책 중에 하나로 취급당하면 난감한 상태가 발생된다. 물론 마르크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는 실천적인 연구자세가 필요하다. 이론이 있어야 생각을 할 수 있는 판단력이 갖추어지나, 그 판단력이 어떤 판단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 글을 보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잘 때까지 세상살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거리는 많다.

 

단지 어떤 원리이고, 무엇이 문제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가 귀찮아진다. 이슈는 신경이 가지만, 현황에 대해 지겨워한다. 세상물정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세상물정에 대해 돋보기로 보는 것은 불편한 것들에 대한 연속적인 만남이다. 대신 눈을 돌리면 지금은 편하지만, 나중에 더 불편한 것들이 찾아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계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세상물정은 어떤 맛인지는 직접 보고 판단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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