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 우리 시대 여성을 만든 에멀린 팽크허스트 자서전
에멀린 팽크허스트 지음, 김진아.권승혁 옮김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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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라는 책을 본 동기는 블로그 이웃 중에 도서출판사에서 근무하신 분 때문이다. 현실문화연구라는 출판사는 나에게 다소 익숙한 출판사이다. 내 방 책상 작은 서재에 꽂혀있는 책으로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한창완 교수님의 <저패니메이션 하드코어>와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세기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논하는 <이것은 미술은 아니다>와 오타쿠 문화연구가 및 자크 데리다 연구자로 유명한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이 있다.

 

생각해보면 현실문화연구 출판사는 이른바 오타쿠 문화에서 일본애니메이션에 대한 서브컬처 연구도서 그리고 예술과 미학 그리고 사회학에 대한 연구도서로 계속 접한 출판사이다(아마 이것을 보시는 현실문화연구 블로그 담당자 분은 미소를 살짝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담당하는 분의 블로그를 보면 항상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라는 책과 동시에 영화 <서프러제트>가 개봉된 것을 홍보했다. 아무튼 그분이 계속 이렇게 소개하고 있으니 분명 볼만할 책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아니 이 책을 읽었기에 이 서평을 쓰기 전 도서관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의 원리> 1권을 대출받았다. 페미니즘 운동사에서 과격파 중에 하나인 에멀린 펭크허스트 여사의 자서전인데, 왜 존 스튜어트 밀의 책을 빌렸으며, 그것도 정치사회학이 아닌 정치경제학이란 말인가? 사실 존 스튜어트 밀이 영국에서 살던 시절에 그는 자유주의 철학을 전파하던 이성의 성자였다. 그에게 왜 성자라는 말이 붙었냐면, 존 스튜어트 밀은 아주 성격이 다정하고 친절하며, 이성적 판단을 준거로 하여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대하지 않았다.

 

영구 19세기 불세출의 천재는 정치사회학만이 아니라 경제학까지 마스터했다. 그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이후 고전경제학 중에 하나였고, 자유주의 사상가였으며, 그의 자유주의 사상은 사회주의 사상까지 맥락이 연결되어 있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책 중에 가장 유명한 서적으로 <자유론>이다. 한국을 보면 자유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에는 그에 대한 사상적 기초를 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자유주의 철학사상과 대조비교해보면 그저 코미디에 불과할 뿐이다.

 

자유주의 사상에 철학이 없다면 자유주의이란 이름으로 가려진 파시즘에 불과하다. 오늘도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이 자유를 외치는 현실에서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다시 와서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어째든 존 스튜어트 밀에게 <자유론>이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그의 저서 중에서 <자유론>보다는 차라리 <여성의 종속>이 훌륭하다. <여성의 종속>은 존 스튜어트 밀이 자신의 아내인 헤리엇 테일러를 만나고 나서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적은 저서이다. 책은 그래 굵지 않고 분량도 인문학 서적치곤 짧은 편이다(대부분 정치철학 도서는 페이지가 500 내외이니 말이다).

 

그 책에서 보면 당시 영국의 여성, 특히 아내라는 신분을 가진 여성이 처한 운명이 엄청 가혹했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 적은 내용은 이미 나는 <여성의 종속>에서 읽은 바가 있었고, 그런 비참한 현실은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 특히 주부에게 전가된 것이다. 물론 <여성의 종속> 이전에도 이런 내용들은 알고 있었다. 펭크허스트 여사가 태어난 곳이 영국 맨체스터 지역이고, 그 지역은 영국 내에서 공장이 매우 많기로 소문난 곳이다.

 

당시 영국에는 대영제국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며 장기방문객이 있었다. 그자는 매우 악평 높은 붉은 박사 카를 마르크스다. 그의 저서 <자본론>은 한국에서 불온서적 취급당하나, 세계문화유산 UNESCO에서는 아주 가치 높은 책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유럽 철학과 사상을 공부하고 있으면 마르크스를 넘고 가지 않으면 도중하차할 지경이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 당시 가장 많이 참고한 서적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고 그 밖으로 리카도 데이비드와 존 스튜어트 밀의 서적이다. 고전경제학 서적을 연구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하면서 자본주의 시작은 어디서냐는 연구가 시작된다.

 

최근에 읽어본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담론에서 자본주의 정치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에서 시작되고, 자본주의 경제는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시작된다. 내가 이것을 거론하는 이유는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는 그녀의 자서전이기고, 약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하나의 객관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그녀의 기록은 인류학적인 관점은 없다. 단지 현재 상황에 대한 저항과 그에 대한 투쟁의식을 확연히 볼 수 있다. 마르크스 <자본>을 보면 그런 역사적 흐름에 대한 변증법적인 관찰을 볼 수 있다.

 

<자본>을 읽으면 영국의 역사까지 알 수 있는데, 영국에서 전 자본주의적 체계에서 영주나 국왕은 자신이 관리하던 토지를 농노나 차지농에게 임대했지만, 양털사업이 발달하면서 모든 농지를 양 사육목장으로 전환시키고, 거기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는다. 마녀사냥이 이루어진 16~17세기 공포는 이른바 공공토지의 인클로저 운동과 시기적으로 많은 일치성을 보여준다. 그 당시 가장 피해자는 늙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했고, 육체적으로 병들었다. 누군가 의지하거나 혹은 구빈소에 의지했으나, 모두들 점차 그녀들에게 차가운 태도만 보였다.

 

숲속의 마녀는 사실 늙은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식량을 키우거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초를 재배했다. 숲속의 마녀가 약을 잘 만드는 이유는 바로 약초를 잘 아는 여성 노인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들을 밀어버리는 이유는 숲을 목장으로 만들고, 재정적으로 손해만 끼치는 노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다(<캘리번과 마녀>를 보시라). 마녀사냥 이데올로기는 바로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위해 약탈을 일삼다가 주변 군중의 눈치를 보고 그 책임을 약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이다.

 

어느 시대이고, 욕먹을 자를 미리 준비해놓고 마치 자신에게 불리하면 그 구원투수를 마운드로 올리는 경우는 다분하다. 정치사회적으로 뭔가 구린내가 내면 항상 연예인들의 구원구가 던진다. 대신 그들은 <공포의 외인구단>의 오혜성처럼 팀을 이기게 만들지만 어깨가 망가져 투수마운드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이런 상태에서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흘러가고, 도시빈민이 생기고, 그 중에서 양털에 대한 제조업에 따른 노동자가 탄생한다. 영국에서 기계가 발달되자 메뉴팩처가 발달하고, 점차 남성 노동자가 임금이 높아지나, 너무 기술이 좋아져서 임금이 하락한다.

 

임금을 하락하는 원인은 숙련공 남자 대신 비숙련공 여성과 어린아이에게 과도한 노동을 가한 것이다. <자본>에서 보는 끔찍함이란 상상해도 마음이 아프다. 이제 5살 된 어린아이가 공장에서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며, 심지어 야간철야까지 한다. 젊은 아가씨들은 공기가 통하지 않은 좁은 방에 먼지를 마시고, 바느질을 18시간 가까이 한다. 남자아이들은 30대가 되면 모두 병으로 죽고, 여자들은 신경질환과 폐병으로 젊은 청춘을 마감한다. 예전에 읽은 <전태일 평전>에서 이제 갓 중학교 졸업한 어린 여공들이 가혹한 환경에서 근무하다 병에 시달려 자취방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이야기를 볼 때 참 마음이 아팠다.

 

물론 여자만이 그런 고생을 한 것은 아니나, 여자에게 가해진 폭력적 처사가 다분하다. 문제는 그런 폭력을 시달리는 여성에게 사회는 관심을 주지 않으며(심지어 일반 여성조차도 그렇다), 듣는 것조차 불편할 것이다. 그런 비극은 이미 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어 19세기 초절정을 이룬 것이다. 19세기 공장은 비숙련공 여자와 아이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남자보다 임금이 적었고, 힘이 약한 이유로 저항조차 못했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 자세히 읽어보면 가장 곤혹스러운 대접을 받는 여성은 주부다.

 

아이들이 7명이 있는데, 불결한 집안에서 살고 있는 것도 모자라 영양실조에 걸릴까 애 어머니는 조바심을 낸다. 아이 5명이 있는 어머니는 아이 2명이 군대를 갈 수 없을 정도로 병들었다고 슬퍼하는 모습이 보인다. 조금 지금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미안한 소리지만, 현대 여성들과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여성은 너무나도 다르다. 아니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만이 아니다.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혁명을 보면 혁명이 시작은 어디인가? 라는 질문에서 그 시초는 주부였다. 그들이 분노한 이유는 집에 어린 자식에게 먹일 식량이 없는 이유다. 여자들이 오히려 혁명 때 남자이상으로 난폭하고 무서운 이유는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 어린 자녀들의 생존에 분노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펭크허스트 여사에서 볼 수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해진 남녀차별에 분노했지만, 그녀에게 더 큰 분노감을 안겨주는 이유는 자신의 아이들과 먼 미래를 살아간 여성에게 이 굴레의 지옥이 가해진다는 이유다. 펭크허스트 여사에겐 딸이 3명이 있고, 그녀들 역시 어머니를 도와 여성의 정치참여운동에 헌신한다. 펭크허스트 여사의 여동생은 운동 중 감옥수감으로 인해 사망했을 정도이니, 왜 그녀들은 목숨을 걸어가면서 싸우는 것인가?

 

영국의 구빈소와 고아원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입을 것과 먹는 것이 부족하고, 열악한 환경과 제대로 되지 않은 관리로 인해 오히려 거기에 들어간 어린아이의 목숨을 단명 시켰다. 펭크허스트 여사가 고아원에 가서 소녀들을 돌보는데, 이제 13살 된 어린 소녀가 아이를 임신했다. 애 아버지는 대부분 그녀들의 애인이거나 친구였으면 다행이다. 소녀들의 아버지거나 친척들 중에 하나였다. 사실 여성인권에 대해 내가 생각한 것은 펭크허스트 여사와 유사했다. 여성인권이 부실하면 아동인권 역시 부실하다.

 

최근 어린이집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보육비와 양육비 문제에서 부모들은 신경이 날카롭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부모가 있으면 모르나, 고아나 편부모를 가진 아이들이라면 그 입장이 참으로 난감해진다. 한국사회처럼 미혼모나 편부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자칭 선진국은 많이 없다. 펭크허스트 여사가 싸우는 이유는 바로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개척이다. 또한 여성의 인권이 보장되면 그들은 남성과 같이 사회적 같은 책임의식과 연대감을 짊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게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보면 여성이 만약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다면 충분히 남성과 같은 업무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빅토리아시대나 엘리자베스시대도 그렇겠지만, 그녀들은 여왕이었고, 일부 특권을 지닌 왕족과 귀족 여성만 가능했다. 사실 왕족과 귀족을 제외한 하층민에게 능력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단지 거기서 여성이 조금 더 심각한 부조리에 시달리는 사실 외에는 말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계급투쟁적인 요소다. 펭크허스트 여사가 자신의 가족도 그러하나, 사실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해진 여성들은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빈민이었다. 남편이 전쟁 중에 사망한 여성들에게 만일 자녀가 있다면 이에 대한 지원이나 대안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여성의 종속>에서 폭력적이고 거만한 남편은 그동안 아내가 모아둔 돈까지 빼앗고, 그것을 저지하면 폭력을 가한다. 문제는 그것이 분명 나쁜 일이라도 사회적으로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정에서 그런 폭력을 용인한다면 그 사회는 더 심한 상황이 발생한다. 펭크허스트 여사와 많은 여성들이 여성참정운동을 하고 있을 때, 그녀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가혹행위는 참으로 심각했다. 말을 타고 있는 경찰들이 말발굽으로 위협하고 말로 위협하며, 때로는 구타까지 했다. 감옥은 환경 위생적으로 취약했고, 금식운동을 벌일 때 억지로 호스를 넣어 음식을 주입했다. 고문 같은 처사는 오히려 더 심한 저항의식으로 이어진다.

 

불굴의 의지로 자신들을 방해하는 정치인들에 대하여 투쟁하고, 늘 집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전달했다. 책은 1차 세계대전에 멈추고 후기로는 1928년 그녀가 보수당원으로 가입하다 병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얼마 후 여성참정권이 승인되었다고 전한다.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여성참정권을 도입될 수 있는 배경은 아주 복잡다양하다. 인권을 위해서라 하지만, 그 동기는 그동안 공장에서 노동대상이 남성이었다면 그 범주가 여성에게 이전되었다.

 

경제적인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적인 권리까지 이행해야 했으며, 정치적인 결정으로 통해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전쟁의 발발은 그런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쟁이 나면 언제나 젊은 남성들은 전장에 간다. 많은 청춘들이 사망하고, 도시는 고요한 침묵을 지킨다. 그 자리를 메우는 자들은 여성이다. 여성들이 경찰관, 소방관, 공무원에 나간 것은 전쟁이 나도 사회는 유지되어야 하고, 그들이 그 사회를 지켜도 남성 못지않게 능력을 보여주고, 어느 부분에서 남성보다 우월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현실적 상황에 대해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겠지만, 재래식 사회에서는 언제나 무거운 기계를 들고 무거운 장비를 다루어야 했기에 남성위주의 노동으로 이어졌고, 그것으로 인해 남성에 대한 지배권을 주어졌다. 전쟁이 나면 미사일과 총으로 사격하는 것이 아니라 창과 방패를 들고 갑옷까지 입을 경우 전쟁의 주도권은 남성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성의 특권의식은 귀족부터 시작하여 하층민까지 분포했으니, 그 차별사회에서 싸우던 펭크허스트 여사의 일기는 예사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남녀차별은 있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픈 것은 영국에서 남녀차별이 있다고 해도 왕족과 귀족의 여성은 그 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점이다.

 

엘리자베스여왕이 여성인데도 왜 침묵을 지키고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가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사회적은 생물학적인 요소도 있지만 계급적인 요소 즉 정치적인 요소가 반영된 것이다. 내가 이것을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최근 여성가족부에서 위안부 문제를 국가가 아닌 민간으로 떠밀고, 정부는 일본의 망언에도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다. 위안부에서 성폭행 당하신 분들과 현재도 성폭행 당하는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나 시선은 안타깝다.

 

예전에 프랑스 앙굴렘 만화전시회에서 위안부 여성들의 비극을 다룬 <지지 않은 꽃> 전시회를 열어 성공리에 마쳤다. 많은 만화작가들은 억울하게 인생을 빼앗긴 분들의 한을 세계에 알리려 했는데, 이때 여성가족부에서 한 것은 실적관리로 내세운 것이었다. 성폭행을 당한 것도 모자라 입막음까지 당한 여성들은 무엇이고? 그런 그녀들을 외면한 여성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 투쟁의 대상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이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없었다면 아마 현재의 여성인권이란 많은 벽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녀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이유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먼 미래에 살아간 후예들의 행복이다. 자신 혹은 자신 이전 시대에 살아간 인간들과 같은 삶을 반복되거나 그보다 못하다면 그녀들은 그렇게까지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여성의 인권을 지지하는 조건은 사회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를 같이 해결할 의지가 있을 경우다. 현재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고통과 책임의식을 외면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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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7-0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항상 느끼지만 만화애니비평님의 글을 읽으면 이것이 리뷰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요. 전 사실 리뷰를 빙자한 추억팔이를 하거든요;;; 진짜로 책을 읽고 쓴 것은 바로 이런 글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해요 아 부럽다...진심...

근데 진짜 회사 다니시는 거 맞아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책더미에 파묻혀 뿔테 안경을 쓰고, 이리 저리 고민을 하는 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네요 ㅋ

혹시 글을 어떻게 쓰시나요? 집필 방법이라고 할까요? 무쟈게 궁금합니다. 요즘 `신의 나라는 네안에 있다`를 읽고 있는데 이런 식의 글로 쓰고 싶어요. ㅎ 리뷰 꿈쟁이를 도와주세요!!!!

만화애니비평 2016-07-03 13:53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맥주도 마시고, 핸드폰 게임도 하고, 애니메이션도 많이 봅니다. 환경공학 전공자인데 환경이 인류학과 많은 연계성이 있어서 어쩌다 이런 식을 되었네요.

저 이것 리뷰 쓸 때 네이버에 어떤 이상한 (아마 여성인듯) 블로그에게 되게 짜증나는 덧글로 답글해주었는데...아무튼...리뷰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독서의 토대인 것 같습니다...철학 책부터 읽어야 사고의 확장이 일어나는듯..ㅎㅎ
 
자유인 루쉰 - 위대한 지식인의 초상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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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이란 이름은 예전부터 들어본 이름이었다. 내가 알게 된 동기는 그의 소설인 <아Q정전>이 제법 유명했기 때문이다. 어떤 유명 대학교나 독서 관련 사이트에서 루쉰의 <아Q정전>이 올라온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루쉰의 이름을 인터넷의 독서목록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접한 것은 2015년 2월이었다. 내가 사는 지역 옆에 누구를 만나러 가서 루쉰의 이름을 들었다. 차가운 공기가 온 몸을 감싸고 있으나, 조용히 하천강변에 조성된 공원을 걸으면서 어느 한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상대방에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서적을 몇 권을 주었다.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인문학자이면서 페미니즘 연구가인 매릴린 옐롬의 서적 2권, 인류학자가 저술한 도서, 취미생활과 관련된 도서였다. 내가 가진 책을 몇 권 주었기에 그 사람도 나에게 책 1권을 주기로 했다. 그때 받아야 했던 도서가 <루쉰평전>이었다. 그러나 그때 본 이후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루쉰이란 이름은 나에겐 인간에 대한 다소의 회의감을 안겨준 채 내 기억 속에서 묻혀 있었다.

 

인간에 대해 나는 다소 비관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나 최근에는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인간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나? 그렇게 믿는 편도 아니고, 이래저래 사람들이랑 교류를 하더라도 깊이 있게 지내고 싶지는 않다. 가뿐한 마음도 아니지만 그런다고 무거운 마음도 아니다. 물과 기름이 서로 층을 분리하여 존재하고 있다면, 나는 층 가운데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점이 많았다. 어차피 내가 관심이 가는 분야나 좋아는 것들이 일반적인 대중의 시각이 아니기에 한편으로 고립된 관념적 세계에 놓여있다.

 

고립에 대한 사회적 영역에서는 직장을 다니기에 외적인 관계성에서는 고립은 아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을 볼 때마다 느끼는 이질감과 이율배반적인 가치관에서 나는 고립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생활을 하던 와중에도 나는 계속 도서사이트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내 글을 올리거나 타인의 글을 본다. 그리고 내 글에는 타인의 덧글이나 타인의 글에는 내 덧글과 또 다른 타인의 덧글이 올라온다. 이때 우연히 내 블로그 작성 글에 어느 분의 아이디가 루쉰의 이름을 사용했다.

 

루쉰에 대해 잘 모르지만, 루쉰에 대해 뭔가 과거에 찜찜한 기억에 남은 나로서는 다른 블로거와 덧글과 답글을 나누면서 루쉰에 대한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추천받고 이번에 읽은 책이 박홍규의 <자유인 루쉰>이다. 내가 아는 정도는 루쉰이 중국의 문학가 정도이지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잘 몰랐다. 하지만 읽어본 내내 루쉰이 남긴 중국의 유산, 그리고 그가 보고자 했던 가치관이 상당했다는 것은 알겠다. 루쉰을 읽을 때 조금 생각나던 한국인 아니 조선인이 떠올랐다.

 

단재 신채호 선생으로, 그는 한국의 민족주의자이면서 한편으로 아나키스트였다. 조선의 고대역사를 밝히면서도 한편으로 무정부적인 가치관으로 항일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단재 신채호나 루쉰이나 직접 몸으로 투쟁하지 않았다. 그들의 투쟁은 글로써 투쟁하여 만민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전파하여 스스로 행동하는 것을 추구했다. 물론 방향성은 조금 달라 보이지만, 평생 그런 생활을 했기에 언제나 고민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루쉰이나 신채호나 둘 다 동북아시아의 나라에서 그것도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유교의 문화가 자리 잡은 시대에 유학의 가치는 이미 타락할 때로 타락했다. 루쉰이 본 그것이나 혹은 박홍규 교수가 본 시대적 흐름에서 1900년대나 혹은 2000년대는 큰 변화는 없어 보인 것 같았다. 인간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것이 바뀌지 않는다고 여겨 그대로 눌러앉을 수만은 없다. 바뀌지 않은 세계가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세상이 멈추는 게 문제가 아니다. 멈추는 순간 계속 퇴보하여 마침내는 소멸의 길에 도달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변하는 세상에 나를 변화하지 않을 경우 나는 나를 유지할 수 없다. 루쉰이 본 중국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오랜 전통과 문화는 중요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하나의 주박이 되어 발목을 잡고 있으면 그것만큼 심한 독은 없다. 루쉰이 언제나 비판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상한 집착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연연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사형수들의 시체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에 기대하는 군중을 보면서 아연실색했다. 사형집행에서 전쟁 중이면 대부분 총살하는 경우가 많다.

 

총으로 사람은 죽이면 심장을 관통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군중은 그런 방법보단 참수형을 원했다. 목이 잘라나가는 순간과 그 목이 효수되어 걸리는 장면을 말이다. 사람이 죽는 장면을 보면 당시 공개처형장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형장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구경 온다. 교수형이나 참수형이나 능지처참이나 사람이 고통 받고 죽어 가는 장면이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 루쉰은 인간의 본성을 비관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만은 옳고 타인 중에 누군가 잘못된 사람이 등장하길 바란다.

 

나와 내 주변 인간들이 합심하여 무차별적으로 비난하고 욕할 수 있는 희생양을 말이다. 그런 자가 죽을 때가 왔으니 정의의 철퇴를 내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아Q정전>에서 바로 이런 인간들이 살아가는 중국을 말한다. 아Q는 반혁명자였다가 어느 날 혁명자로 바뀌고, 나중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에게 혁명이나 사회나, 혹은 국가에 대한 가치관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익과 군중심리에 도취하여 벽 뒤에 숨기를 바란 것이다. 물론 가장 폭력적으로 타인을 칠 때는 선두에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군중심리의 문제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딜레마 증세, 루쉰은 항상 그것과 싸운 것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이란 인간에게 가질 수밖에 없는 숙제다. 인간에게 자신이 그런 것들로 에워 쌓인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언제나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세계 속에만 생각하고 말하려 한다.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가치관이 자신에게 찾아오면 거부하려고 한다.

 

물론 새로운 것들도 받은 만큼 기존에 가지고 있는 가치관 역시 잘 적절하게 소화할 필요는 있다. 너무 새로운 것만 받는데 집중하면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게 된다. 정체성은 바로 자신이 누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루쉰이 비판하는 것은 간단히 지나간 것에 모순과 부조리가 많다면 마땅히 그것을 고치야 하나, 거기에 얽매이는 점, 새로운 바람이나 혁명이 온다 해서 그 조류에 휘말릴 것이 아니라 거기서 자신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혁명이 중국에서 계속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럽은 프랑스대혁명을 필두로 19세기는 에릭 홉스봄의 책제목처럼 <혁명의 시대>이였다. 하지만 동양은 이제 20세기 초반에 혁명이란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일소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문제를 앞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만 준 것이다. 기회를 줘도 그 안에 머문 자들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저히 방도가 없다. 루쉰의 사상을 보면 그가 특히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사상에서 많은 것을 받았으며, 루소를 두고 그런 미치광이는 중국에서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루소 같은 미치광이가 나와야 새로운 물꼬를 트는데 중국이란 곳은 그런 사람을 만들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자신 안에 숨겨진 진정한 자유를 찾는 과정에 대해 루쉰은 니체의 사상처럼 그 자신이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루쉰은 자신에 대한 어떤 기념품이나 기념행사를 기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루쉰 사후 20주년이 되던 날 성대하게 루쉰을 기리는 날이 생겼다. 루쉰이 정녕 원치 않은 것은 바로 지나간 것들로 현재의 인간에게 사슬을 남겨주는 것이다.

 

물론 고전의 가치와 고전의 저자나 실제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본받을 필요가 있으나,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지, 거기에 머물러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만큼 나쁜 것은 없었다. 루쉰이 그렇게 현실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점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유교의 문화에서 각종 혁명을 지나 현재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세상이 왔다. 그러나 공산당은 있어도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는 없다. 중국의 자본주의 시장체계는 그 어떤 국가보다 더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빈부격차를 비롯한 각종 사회의 모순을 타파하려 했지만, 그 모순의 벽이 더욱 견고하게 높이 세워졌다. 지금의 시대를 보고 루쉰은 무엇이라 말할까? 아Q가 모든 것을 점령 시켜버린 세계에 그의 외침은 깊은 어둠에서 나오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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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27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브라보!!! 정말 정말 루쉰 선생에 대한 리뷰 중에서 역대급입니다. ㅠ.ㅠ 온 감동이 제 몸을 휘감고 있어요. 아!! 정말 이 글의 품격과 근본의 정신은 정말이지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에서의 문체가 떠 오릅니다. 전 그 책은 정말 내용을 떠나서 쓴 사람의 생명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런 글이었어요. ㅠ.ㅠ 너무 잘 쓰심...저 몇 번 읽었어요.

만화애니비평님께서 쓰신 것처럼 루쉰 선생은 어떤 고정적인 이렇다 라는 사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파악하기가 힘든 것도 있죠 ㅋ `인간`에 대해 그 암흑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에는 강하다고 할까요? `쩡짜` 저항정신이라 할까요? 모든 것에 있어서 암흑을 파헤치는 재주가 아주 좋은 분이에요. 항상 사람들은 루쉰의 글이 어렵다고 합니다. 물론 논쟁으로 시간을 보낸 적이 많기도 해요 ㅎ
하지만 전 `권력`이란 것에 대하여 격렬하게 싸우던 투사는 루쉰 선생 뿐이지 않나란 생각을 해요. 정신을 날카롭게 만들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는 영원한 진격자라고 할까요?

아Q정전은 아Q는 인간의 가장 볼품없는 쓰레기 같은 생명에 대해 형상화한 것으로 보여요. 자기 기만이라고 할까요?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자세, 실패를 하고서는 내 탓은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 `정신승리법`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자기에게 눈을 감아버리는 그런 인간 내면의 악적인 생명에 대해 명확히 소설로 펼쳐 놓은 것 같아요.

역시나 만화애니비평님 대단하십니다....ㅠ.ㅠ 이 글 정말 너무 좋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6-27 08:36   좋아요 0 | URL
루쉰p님을 생각하며 서평을 적었지요...그런데 1권 보고는 대략 이 사람이 요 정도인가? 라는 생각만 했지 그 이상으로 모르겠더라고요. 안의 글이 어떤 식이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려면 결국 원래 책을 읽어야 하겠더군요....

루쉰P 2016-06-28 20:42   좋아요 0 | URL
아악...제가 여성도 아닌데...저를 생각하시다니...이거원(발그레)

개인적으로 박홍규 교수님의 저 책은 다른 루쉰 평전이나 루쉰의 글을 읽고 읽으면 좋을 듯 싶어요. 다양하게 루쉰을 조망하고 있거든요. ㅋ 저도 몇 번이나 읽었지만 루쉰에 대한 좀 더 넓은 시야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ㅎ

그리고 루쉰 선생의 사상은 참 뭐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저도 참 좋아하는 작가인데도 불구하고 ㅋㅋㅋ 어렵더라구요 ㅎ

만화애니비평 2016-06-29 08:34   좋아요 0 | URL
루쉰님이 그렇게 열변을 토하는데, 어찌 제가 책을 읽지 아니하고, 어찌 제가 그렇게 거론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아~ 그런데 여기 곰곰생각하는발님과 몇 번 만나 술을 마셨습니다...ㅎㅎ
 
소학 동양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14
주희 지음, 이기석 옮김 / 홍신문화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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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우리들은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자랄 것이다. 남녀7세 부동석, 백이숙제 굶어주는 이야기들 등등 말이다. 예전에 소학(小學)에 대한 부분을 조광조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면서 본 것 같다. 조광조는 소학군자로 불리는 자였고, 그의 제자와 제자의 후손은 소학을 토대로 실천주의적인 학문을 추구했다. 소학을 읽으면 정말 사소한 것에 대해 적어 놓았다. 솔직한 심정을 본다면 주희가 정리한 글이다. 소학을 보면 공자와 맹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특히 공자의 가르침이 많이 등장한다.

 

송나라가 거의 힘을 잃어 남송시대 등장한 주희가 주자학을 성립하면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주자의 유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주자의 소학을 보는 내내 평소 많이 듣던 말이나 내용이 많았다. 실제 아직까지 이루어지는 모습도 있다. 주자의 소학을 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군주에 대한 충성이다.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시작하여 정치권에서 높은 자는 낮은 자에게 경의를 받아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예전에 공자의 논어(論語)를 보면서 생각하나, 소학은 논어와 조금 차이점이 보인다. 공자의 논어는 소학과 다르게 실천도 있지만, 그 실천의 주체성에서 선비의 자격을 많이 따진다. 선비의 자격이 되는 것은 농민에게 즉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통치하는 방법론이다. 백성에게 농업기술을 잘 전파하는 게 아니라 농민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행정적인 절차를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모이면 마을을 형성하고, 마을을 형성하면 국가가 탄생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에서 인간의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규칙이 필요하다.

 

게다가 규칙이 필요하려면 그 규칙을 만들 수 있는 자와 규칙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군주와 신하는 바로 이래서 필요하다. 군신 간의 관계성에서 충심이 중요하나 제일 필요한 부분은 민심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다. 공자의 논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다. 소학이 역시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런 과정에 대한 설명은 현대사회와 많은 괴리감이 존재한다. 물론 소학에서 알려 주는 부분에서 공감대도 있다.

 

소학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이 와 닿은 문구는 풀이에서 나온 “부모의 나이를 알아야 하니, 한편으로 기쁜 마음으로 알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으로 안다.”로 어린 아이거나 혹은 아직까지 청춘일 때는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부모의 나이가 인간 평균수명의 2/3 정도 지나치는 순간 문득 느낀다. 부모님이 늙어 가시고, 예전에 비해 몸이 많이 불편한 것을 말이다. 부모의 나이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인간의 수명은 어쩔 수 없는 천운일 때도 있다. 병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면 집안 내력에서 7대조 할아버지부터 증조부까지 외아들(3형제 중 맏형과 중형은 후사 없이 돌아가셨다.)이었고, 그나마 증조부는 장수했지만, 고조부는 일찍 돌아가셨다. 고조모가 힘들게 외아들 증조부를 키운 점에서 아비 없이 자라난 후레자식의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조상의 제사를 두고 요새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게 여기나, 늙으신 부모님을 보는 순간, 언젠가 말없이 흙덩이 안에 누워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된다면 그 위의 조상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싶다.

 

소학에선 집안의 부모님에 대해 잘 모시라는 이야기와 제사를 통해 조상을 잘 모시라고 한다. 현대사회가 아무리 서구화되었지만, 한국인이란 문화적 정체성을 본다면 가족 간의 우애에서 나름 소학의 가르침은 유용하다. 하지만 소학의 한계점은 하층계급에 대해 너무 멸시한다는 점이다. 논어의 공자는 분명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고, 그 백성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학자의 의무다. 조선시대 유학자는 경구 문구에만 집착하다 전쟁의 화를 이길 수 없었고, 타국의 침략에 망했다. 진짜 공자의 가르침이라면 가렴주구의 비극을 제대로 해결해야만 했다.

 

조광조의 일화처럼 정암 선생이 도학을 실천하면서 소학을 중시한 이유는 국가의 대사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하는 점이다. 선비 된 자는 청렴해야 하며, 이유 없이 소와 돼지를 죽여서는 안 되었다. 소학에서는 선비가 자애로우며 밑의 노복만이 아니라 말 하지 못하는 짐승까지 교화된다고 했다. 인간의 선한 가치가 인간만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까지 덕이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 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아버지와 이야기 나누면서 조선시대에 남자가 여러 여자에게 장가가는 일부다처제가 옳다고 했다. 나 역시 그래 여긴다. 지금 관점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워낙 전쟁이 많았기 때문에 남자들이 전쟁터에 가서 목숨을 많이 잃었다. 대부분 병졸은 양인이나 농민이었고, 장수나 무관들은 양반계급이 많았다. 전쟁에서 군사들이 한 부대에 최소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고 대군은 수만 내지 수십만까지 이른다. 이긴 전쟁이 아니라 대부분 패배한 전쟁에서 반 이상은 죽고, 그 반에 반은 후유증으로 죽고, 겨우 남은 자는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소학에서 내가 가장 우려하고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여성에 대한 인권이다. 죽은 남편에게 가족 중에 늙은 노모나 어린 아이 같이 부양해야할 식솔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사람도 없이 한 평생 혼자서 수절하라는 식은 심각한 병폐다. 과부는 다시 시집갈 수 없는데, 남자는 새장가를 드는 점에서 아무리 그 당시 전쟁에 의해 남정들이 많이 죽었다고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부들도 출가시켜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는 게 좋은 것 같았다.

 

소학은 좋은 가르침과 더불어 아쉬운 부조리가 많은 서적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소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소학의 가르침에 그대로 따라가라는 것이 아니다. 소학에 나온 이야기들이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흔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가 잘못된 게 있다고 그것을 비판할 수 있어도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과거의 인간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소학을 보면서 우리 시대를 다시 본다. 자본주의시장체계는 가족관계를 대가족에서 핵가족화 시켰다. 대가족 아래 시집온 여성에게 많은 멍에를 씌우는 것은 맞다. 하지만 굳이 대가족만이 아니라 가족 간의 관계는 생각해볼만 하다. 옛날 농사짓던 시기에 마을에 대부분 집성촌이 위치하여 어디의 누구 집은 촌수는 멀어도 일가집안이라 곤란한 일이 있으면 서로 돕고 그랬다. 요새는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시대가 오니 가슴 아픈 일이다.

 

뭐든지 옛날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고, 뭐든지 새로운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지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에 대한 판단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소학을 보며 조금 아쉬운 기분은 한국의 현실에서 나이가 어리거나 손아래의 사람을 보면 무조건 연장자 내지 윗사람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방식이 안타깝다. 소학에서는 그런 방식을 다소 인정하는 분위기가 깔려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위쪽에 있는 자라도 자신의 도리를 밝히지 않으면 그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부정부패가 있어도 그 문제를 제대로 왈가불가하지 못한 사회라면 제대로 굴러갈리 없다. 말을 들을 때까지 계속 좋은 얼굴로 건의하는 것 역시 한계고, 그것이 되지 않으면 신하는 군주를 포기한다고 하나, 그 군주 아래 통치 받는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면 과연 옳은 말인가? 조선후기 주자학의 민폐는 바로 그런 점이다. 내가 누군데 감히 네가 그러느냐? 내가 누구의 측근인데 감히 어디서 무엄하게 말을 하느냐 등이다. 그런 꼰대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 아닌 어른은 한국에 너무 많이 있다.

 

한국에서 유학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선 소학의 가치는 조금 볼 필요는 있으나, 생각해보면 공자와 맹자 관련 도서 한권조차 보지 않은 이들이 어른의 도리를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아연해진다. 율곡 이이 선생은 자신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퇴계 이황에게 편지글로 토론을 하였다. 요새 같은 시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버릇장머리 없는 놈이라며 면박을 주었을 것이다. 소학은 어른의 입장에서 밑 사람이 의당 해야할 의무를 적어놓은 서적이다. 그런데 그 어른부터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누가 따라올 것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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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23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역시 만화애니비평님이 쓰시면 왠지 저걸 안 읽으면 큰 실수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ㅋ 유학은 루쉰선생이 워낙 강하게 까셔서 저도 좀체 읽어보지를 못 했어요 근데 이 글을보니 일본 사무라이처럼 우리 선비들 역시 자기수양에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점이에요 그런데 왜 그리 당쟁은 많은지 또 이해가 안 되기도 하구요 근데 전 십팔사략을 꼭 읽어보고 싶어요 ㅎ

만화애니비평 2016-06-23 11:35   좋아요 0 | URL
루쉰P님의 약속을 위해 현재 박홍규 교수의 <자유인 루쉰>을 초반부 읽고 있습니다.

아무튼 선비정신이 나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이덕일 선생이 무조건 옳은 게 아니라 우암 송시열과 그 일파들을 (노론세력) 엄청 비판하는데, 글자 하나 가지고 토달지 못하게 하고,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 세도정치와 부정부패가 들끓게 되죠.

정약용 선생의 글들을 보면 당시 정치권의 비리와 부정이 얼마나 심하면 왕조차도 도저히 감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를 보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분들이 많으 것 같습니다. 당쟁만이 아니라 옥사나 사화를 보면 수많은 선비들이 목이 잘려나가고, 능지처참되고, 사약을 마시고, 고문을 당하고, 집안이 몰락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도 바른 말을 멈추지 않았기에 그런 과거를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것 같네요. 남들에게 시대의 문제를 말하는 것조차 불편히 여기면서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답답하죠. 물론 그들은 나보고 네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냐고 하나, 결국 자신도 그 부조리에 갇혀 살아 답이 없는데 말이죠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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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화에서 우리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서사라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자면 문학과 영화는 문자서사인지 혹은 영상서사인지의 차이점이지, 안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은 같을 것이다. 단지 영상서사인 영화보다 문자서사인 문학이 조금 더 가치 있는 이유는 영상서사는 수용자의 시선을 향하여 정보만 주고, 그 이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부족하다. 물론 제작하는 이들의 노력에서 보자면 충분히 그 능력을 발휘하나, 수용자의 입장에서 영상이란 스쳐지나가는 잔상으로 지나간다.

 

문자서사인 문학은 이와 다르게 글자를 접하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항상 머릿속에 어떤 상황인지를 끊임없이 떠올려야 한다. 문학은 영화와 다르게 친절하지 않다. 친절함 영상미와 달리 문학은 내가 직접 보면서 어떤 것인지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물론 문학이 소설의 형태로 나오면서 소설 모든 것이 영화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나, 페이지를 넘기는 것에 대한 시간적 투쟁은 독자로 하여금 인내심을 요구한다.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은 나에 대한 또 다른 수련일 수 있고, 하나의 성찰의 길을 안내할 수 있다.

 

이번에 읽은 <스토너>는 아마 이런 문학소설에서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책이다. 그렇게 분량이 길지도 짧지도 않으면서, 책 내용을 봐도 뭔가 격정적이고 파행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물론 스토너가 살던 시절은 20세기 미국이다. 그는 19세기 말에 태어났으나, 그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은 20세기 미국이다. 미국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19세기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에서 북부의 연합팀이 승리한다. 하지만 전쟁이란 단순히 사람만을 전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전쟁이 발발하면 그 열화와 같은 공간에 스며들며, 자신도 모르게 그 안에서 허무한 아지랑이처럼 사라진다. 스토너가 대학에 오면서 그 상황에 처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수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를 향하여 움직였고, 많은 청춘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바람처럼 흩어졌다. 스토너가 대학에 오면서 친구 2명이 있었지만, 하나는 참전한지 반년도 못되어 죽는다. 그리고 고든은 돌아오고, 자신이 있는 학교의 권력자가 된다. 스토너의 인생은 그렇게 열정적이지 못하다.

 

미국을 떠오르면 아메리카 드림을 말하나, 그에겐 그런 것보단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인고의 삶을 지켰다. 스토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까지 계속 힘든 농장 일을 하고, 돼지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몇 리나 떨어진 축사까지 걸어간다.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에게 공부할 기회를 준 것은 인생의 대역전이다. 하지만 스토너는 그런 전환조차 하나의 기회보단 그저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토너의 인생은 처음에 수동적인 자세로 보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스토너는 오히려 수동적인 인간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같은 인생노선을 걷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대학에서 스토너의 모습이다. 대학에 있는 사람들은 시대적 조류에 너무 충실했다. 아니 그것을 따르는 편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빛을 내는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스토너는 그런 인생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고자 했다. 농학을 전공하여 농장 일을 제대로 계획하려다 오히려 영문학으로 발을 옮긴 스토너,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도 가끔 느낀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도 계시나, 부모님만큼이나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분들도 많다. 슬론 교수는 스토너에게 제일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단지 대학에 오고, 우연히 강의를 받던 스토너, 그는 슬론 교수에게 학자의 길을 걸을 것을 권유받고 교수가 되기로 한다. 그런 과정에서 소설은 격정적으로 보여주기보단 스토너에 대한 묘사에서 매우 아름다운 표현을 구사한다. 슬론이 말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문학에서 논리학과 수사가 중요한 게 아니나 어찌 보면 문법이 중요하다고 했다.

 

인간의 이성이 존재해도 그 이성에 자극을 주는 것은 글 안에 담겨있는 생생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왜 20세기 인간들은 아니라면 내가 살아있는 21세기 인간들은 영국 대문호인 셰익스피어의 글에 빠져드는가? 인간 스스로가 느낄 수 없는 감동과 삶의 의미를 문학은 연결해주고 있다. 인간은 생이 다른 동물에 비하여 길지만, 그렇다고 목숨 그 자체가 긴 것은 아니다. 옛날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다. 예술의 세계에 빠지는 것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새로움이란 주변에 보이는 사물들의 변화가 아니다. 새로운 것이란 내가 추구하는 길에 보이는 이때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이다.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문학과 예술이라면, 그 세계가 어떤 식을 가는지에 따라 다른 모습을 전해준다. 생각하면 문학의 매체로 소설 <스토너>에서 스토너는 느린 것에 대한 미학, 자신 안의 세계에서 넓은 우주로 가는 구도자 같다면, 스토너의 아내인 이다스는 순간적인 변화 쾌락적인 감각을 추구한다. 그녀는 잠시라도 가만히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다. 이다스가 결혼 후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다 나중에 그녀의 아버지가 죽자, 얼마간 집에서 나가있었다.

 

돌아온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예전보다 화장을 도발적으로 했으며, 연극 팀을 도와주거나 조각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지겨워지고, 그녀는 자신이 만든 최고의 예술인 딸 그레이스에게 집착한다. 그레이스를 대하는 모습에서 이다스는 집착이 지나치다 못해 정신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스토너가 그레이스의 어린 시절을 돌봐주었으나, 그레이스는 그런 스토너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은 채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절단시켰다. 스토너는 집에서 보면 항상 단절된 존재였고, 그 단절감은 가족의 시간에서 보였고, 심지어 공간적으로 차별되었다. 인간의 공간, 즉 공간은 인간의 사유와 사상이 그대로 반영된다.

 

스토너에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오로지 그가 머문 공간은 자신 안의 세계, 학자의 길이다. 우연히 그가 진정했던 사랑했던 대학원 출신의 시간강사 그녀만은 달랐다. 사랑을 깨닫는 것은 이다스를 처음 본 그날의 느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아주고,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반응해주는 것이다. 마음이 통하는 여성을 만나 서로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누고, 육체적인 교감을 나누는 것은 행복이다. 그러나 스토너에게 그녀의 등장은 너무 늦었고, 스토너의 행동은 모두가 알았다.

 

스토너가 시대적 조류에 쓸려가지 않기에, 언제나 그 모든 세계에서 중심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런 길을 걷기에 항상 스토너는 사방이 막힌 벽에만 갇힌 채 인내의 시간을 요구했다. 다른 교수가 추천한 워커 학생을 심사하던 중에 스토너는 그 학생이 기발하고 창의적인 것은 알지만, 학자로 성장하기에 너무 부족하고 기본적인 학업이 안 된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박사진학과정에서 워커를 인정하지 않으려다 영문학과 학과장에게 미움을 받아 노장 교수는 시간강사들이 관리하는 1학년의 수업을 맡게 되고, 시간표도 오전 아침과 오후 저녁에 배정받았으며, 강의실조차 엉망이었다.

 

스토너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나머지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연구와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에 향했다. 스토너의 모습을 보면 우리들은 모두 이럴 것이다. “왜 그렇게 힘든 길을 선택하지? 왜 그렇게 남의 말을 안 듣지, 적당히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인데 말이지.” 실상 우리 인생은 스토너의 모습을 나나 혹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길을 생각하고 스스로 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은 충실히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반증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생은 자신의 것이야 하나, 인간이 속한 사회는 개인 혼자가 아니라 개인들로 구성된 하나의 집단이다.

 

집단에서 언제나 정치적 갈등과 이권의 분쟁이 일어난다. 스토너는 바로 그 학교 내 정치적 갈등에서 권력을 따르지 않았고, 이권을 추구하지 않았다. 현대사회의 인간이라면 소소한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할 수 있고, 비겁한 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스토너는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았던 자다. 어린 시절 농사를 보면서 손에 박힌 흙의 자국, 대학을 다니면서 친척집 일을 도와주던 스토너는 남들처럼 좋은 옷도 없었고, 언제나 같은 옷으로 학교를 돌아다녀야 했다. 지독한 가난과 무기력하게 지나가는 인생의 길에서 스토너는 불행한 삶을 살았는가?

 

다르게 생각하자면 나는 스토너가 불행한 인간이라 보는 자들이 더 불행할 줄 모른다. 스토너는 결혼생활이 불운했고, 학교교직생활이 불편했다. 심지어 딸은 처음에 아내인 이다스와 다른 길을 갈 줄 알았지만, 이다스의 인생처럼 되어버렸다. 그레이스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으나, 술김에 잠을 자서 임신하고, 그길로 결혼한다. 하지만 그레이스 남편은 죄책감으로 견디지 못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사망했고, 그레이스는 혼자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어떤 삶인가? 위스키가 없으면 버티지 못했다.

 

이다스나 그레이스나 자신의 삶을 자기가 아닌 주변에 의해 조작되면서 모든 것이 불편해졌다. 스토너는 그런 삶과 다르게 담담히 자기만의 길을 걸었다. 집에서 외면 받고, 학교에서 무시당해도 말이다. 그러나 스토너는 마지막 모습을 보면 너무 침착하고 담담했다. 죽음의 심사를 의사로부터 들어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업무를 정리하고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비주류의 인생이 살아갔지만, 후회 없는 삶이라 말할 수 있다. 고통에 대한 인고의 세월은 길어도 그 결실은 고통의 시간처럼 보답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길을 걷는 이유는 자신의 삶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 <스토너>에선 예술적이라고 강요하지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굴곡은 뭐든지 화려하지 않다. 때로는 불행과 악운도 존재한다. 마지막 장신이 모든 것의 승리가 아니다. 그렇지 못한 삶이라도 얼마나 자신 스스로를 잃지 않고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게 구도자의 길일 것이다. 소설내용을 보자면 우리 삶과 너무 익숙하거나 친숙하게 보일 것이다. 일상세계에 머무는 인간은 이야기에서는 비일상의 세계를 원한다. <스토너>는 비일상이 아닌 완벽한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다. 바로 불편한 삶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런 불편한 삶을 관찰한 우리가 느낄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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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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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전공이 환경공학이 나는 환경부문의 여러 분야 중에서 수질 및 폐기물 쪽으로 공부했다. 그래서 자격증 역시 수질과 폐기물 관련 기사 자격증이 있다. 환경을 공부하면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모든 것을 접하게 된다. 인간이 먹고 살아가는 것은 곧 환경에 대한 파괴이고, 그 환경에서 다시 새로운 자원을 얻기 위해 환경을 복원해야 하는 이중적인 행위를 맺게 된다. 인간이 처음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식량을 찾는 것이었다. 대부분 수렵과 사냥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채집은 식물의 생존전략을 이어주는 방편이었다. 분변에 씨앗이 그대로 지면에 닿으면서 거기서 새로운 생명이 유지된다.

 

하지만 동물은 다르다. 동물은 잡히는 순간 도살당하여 뼈와 살이 분리되어 생명을 잃게 된다. 지나친 사냥은 숲을 황폐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사냥대상이 육식동물일 경우 작은 초식동물의 천적이 사라짐으로써, 초식동물이 모든 나무와 풀을 먹어버리는 상황에 이른다. 동물을 먹는다는 게 그래 간단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생태환경시스템은 어느 균형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인간의 역사에서 생태환경의 파괴는 결국 인간의 목숨을 좌우하는 아이러니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역사와 문화를 이어오면서 동물을 사냥하는 게 아니라 우리 속에 가두어 키우게 되었다.

 

최근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통 한국사회에서 주요 안주나 간식거리 중에서 치킨이 주요 음식이 되었다. 내가 어릴 적에 옛날통닭 즉 시장에서 파는 통닭을 사면 양이 엄청 많았으나, 지금은 그렇게 크지 않다. 몇 조각 안 되는 닭고기는 현재 45일 정도 된 어린 닭인 것이다. 과거 시장에서 파는 시골촌닭은 조금 다르다. 닭장 우리 속에 있는 닭은 옛날에 내가 먹어본 닭이 아니다. 그저 자동화된 공장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인스턴트식품이 되었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기 전에 이미 나는 <가축이 행복해야 인간이 행복하다>라는 책을 읽었다.

 

그래서 새삼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고, 생각보다 이전에 읽은 책보다 새로운 느낌은 없었다. 단지 전에 읽은 책은 가축인 소와 돼지 중심이라면 이번에 읽은 서적은 해양생물이 나온 게 마음에 들었다. 가축사육과 관련하여 최근 환경부 관할법령으로 “가축분뇨의 관리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 개정 반포되었다. 가축 중에 당연히 대표되는 동물은 한우, 젖소, 돼지, 닭, 오리, 사슴 등 다양한 가축이 있다. 가축이 내뿜는 분뇨의 양은 인간에 비해 많고, 대규모 사육은 밀집된 공간에 점오염원을 발생시킨다. 한국에서 주요 광역도시와 경기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가축이 사육된다.

 

가축사육은 주로 농촌의 농가에서 이루어지고, 농가 주변부에 하천이나 저수지 같은 수원지가 분포하는 경우가 많다. 비오는 날 강우유출수에 의해 지표면에 부착된 오염물질이 그대로 빗물에 휘말려 하천으로 유입된다. 가축분뇨의 어려움은 대부분 축사 영세한 농가인 점이다. 그러나 가축을 잡는 도살장은 다르다. 옛날에 시골 축제에서 돼지 1마리를 그대로 잡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지정된 도살장에서 가축들을 잡는다. 가축도살 과정을 들어보면 우선 소 같은 경우 전기 총으로 충격을 주어 기절시키거나, 그것이 되지 않으면 머리에 총을 사격하여 뇌를 관통시키는 경우가 있다.

 

실제 도살된 소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전기충격으로 인해 두 눈에 붉은 실핏줄이 보이고, 입은 크게 벌려져 있으며, 눈알은 조금 돌출되었다. 그 다음에 소의 목을 베었으니 그 모습이 참으로 엽기적이었다. 겉으로 본다면 징그럽고 무섭지만, 우리는 그런 과정을 거친 고기를 식당에서 매우 맛있게 먹는다. 그 절차가 잔인하고 끔찍하다 말하면서 식당에서 맛있게 입맛을 다지는 모습에서 상황적 간격이 있다. 문제는 바로 그 고기에 대해서다. 최근 시골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면 소 사육시설이 있다. 수많은 소들이 볏짚과 영양 사료를 먹고 성장하고, 작은아버지는 그것을 판매하여 생계를 꾸려간다.

 

그러나 내가 아주 어릴 때 적어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2분이 계실 적에 소는 우사에 1마리가 있었다. 그런데 소가 따로 외양간 건물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조부모님이 살던 집 지붕과 이어진 우사에 있었다. 작은할아버지 댁에 가도 그렇다. 작은방에 작은 문을 열면 우사에 소가 있었다.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우리집안은 농사일을 약 200년 전부터 시작한 것 같다. 증조부께서는 급사로 돌아가시기 그 전날까지 소에 쟁기를 끌고 다니면 논일을 했다. 소가 예전에는 한국농촌의 거대한 뿌리였지만, 이제는 소로 농사를 하지 않는다. 들판에 나가 여물을 먹거나 여기저기 움직이지 않는다.

 

돼지도 인간이 주는 잡식이 아니라 사료만 먹는다. 닭도 마당에 풀어 키우는 게 아니라 닭장 아래 갇혀 있다. 인간도 어디 나가지 않고 좁은 독방에 갇혀 사육되면 아마 몸이 먼저 무너지는 게 아니라 정신이 붕괴되어 자살할 것이다. 동물은 시간적 감각이 인간보다 덜하다. 인간은 시간을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단지 몇 시인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뿐이다. 전등기 빛으로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어 닭에서 알을 계속 뽑아내고, 돼지에게 수없이 사료만 준 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나마 위생적인 축사는 괜찮다. 축사 내 분뇨가 가득하여 냄새가 진동하고, 병이 나도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가축도 있다. 이런 가축의 육질은 떨어질 뿐만 아니라 게다가 몸에 질병을 앓고 있어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병균이 이미 심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물론 미국보다는 아니다. 적어도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은 미국 내 대형 공장식 가축사육시설을 두고 저술한 책이니 말이다. 하지만 국내도 미국식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그런 과정은 금융시장만이 아니라 공장도 마찬가지다. 사육시설은 공장처럼 기계화 되어 있다.

 

가축사육시설은 언제나 악취와 비위생적인 공간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운 좋은 기회가 있어서 여러 가축사육시설을 본 기회가 있었다. 물론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만큼 비참한 상태는 아니나, 영세한 축사 중에는 매우 심각한 상태도 있었다. 우리가 먹어야 하는 식량이 바로 이렇게 관리되는 셈이다. 이 글을 적는 와중에 내가 왜 닭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가? 예전에 우리가 이렇게 닭을 많이 소비하지 않았다. 닭고기 소비량이 최근에 들어 부쩍 상승했고, 일반 주택지역과 아파트 대단지 인근을 보면 치킨집이 즐비하다.

 

이 많은 가게들이 수많은 가정집에 닭고기를 요리해준다. 심지어 시내 술집과 식당을 가더라도 닭고기는 메인 메뉴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닭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45일 아니라면 최장 60일까지 성장한다면 닭은 대량생산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닭의 부리가 잘려나가고, 발톱도 잘려나가며, 수평아리는 그대로 처분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가축들의 희생 아래 그 위에서 서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보인 작가의 관점을 좋게 보지 않는다. 동물의 죽음에서 분명 잔혹한 것은 있다. 하지만 작가는 알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물가의 차이다. 자동차의 가격이 예전에 비해 수 천 %가 올랐지만, 그 기간에 고기의 가격은 몇 백%만 상승한 점이다.

 

왜 자동차와 식량인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것을 몰라도 쌀 가격은 올리지 않는다. 물론 고기가격은 많이 오른 편이라도 해도 식량에 대한 가격은 올리지 않는다. 작가인 조너선 샤프란 포어는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가축도살 현실에 대해 잘 지적한다. 그 기업이 펼치는 로비나 혹은 미디어의 작용도 거론한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기를 먹지 않아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니라면 고전의 경영방식을 답습하여 운영하는 농장주를 계속 키우는 것일까?

 

식물을 위주로 하면 식당의 판매가격이 낮아지는 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시장에 공급하는 대규모 경영업체가 보여주는 행동이다. 권력기관과 언론기관을 동시에 협력하여 눈속임하는 것, 그리고 공장 내 노동자의 인권문제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 시점에서 단지 고발만 하는 식은 좋지 못하다. 과정의 관계에서 대안의 설정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모든 음식이 그렇게 전달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시장구조는 제대로 맥을 잡아내지 못했다.

 

수 억명에 이르는 인구가 살고 있는 나라에 식량을 저렴하게 공급하려면 그 만큼의 자본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규모농장이 용인되지 않은 경제적 상황, 영세농가의 현실, 자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산업구조 변화에 대한 대안성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의 빈부격차는 어마한 것이고, 그 빈부격차에서 빈곤계층이 주어지는 식량은 고칼로리의 햄버그와 콜라다. 그들에게 신선한 건강식이란 벽에 걸린 그림이고, 더러운 공장에서 도축과정에서 잔인하게 죽는 동물의 피 때문에 살아간다.

 

작가는 미국 유명한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몇 년 동안 상을 받은 사람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 중산층에 있는 사람이고, 상당한 엘리트다. 엘리트이기에 그런 책을 서술할 수 있지만, 엘리트의 한계성이 드러나는 책이다. 그런 음식을 먹고 싶고 말고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으나, 선택권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도 있다. 미국 도심지 내 텃밭을 가꾸어 채소를 가꾸기란 무리고, 농촌에 자기의 텃밭을 꾸며서 자신의 생계를 꾸릴 수도 없다. 문제의 현실을 잘 지적해도 그런다고 대안성은 없다.

 

세계의 절반은 왜 굶는가? 미국 내 식량은 빈민을 모두 살릴 수 있지만, 모두 가축사료로 사용된다. 남는 것이 있어도 그렇게 하는 것은 절망적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하나의 숫자로 보는 자본주의시장경제의 비참함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선택지가 파괴된 인간에게 이 책의 논리는 그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공장식 사육시설 비위생적이고 비인도적인 도축시설이 사라져간다고 작가는 말하나, 그의 말은 너무 오점이 많다. 물론 가능하다. 지금 살아있는 빈곤계층이 사회적으로 재생산을 할 수 없으면 말이다.

 

경제적 능력이 따르지 못해 2세를 낳지 못하거나, 또는 출산율이 저하되어 부부 당 출산인원이 2.0 이상이 아니라 1.0에 머물면 인구는 확연하게 감소된다. 우리나라가 지금 그런 경제적 상황에 머물려 있다. 게다가 식량의 문제, 생계에서 주거비용과 의복도 중요하나 식단의 구성에서 작은 임금으로 식사를 해결하려면 저렴한 식품공급이 필요하다. 이런 현실에서 이 책은 상당히 낭만적인 발상만 넘치는 것 같다. 좋은 내용을 보여줘도 좋은 대안은 없다. 동물이 불쌍하게 죽어 우리의 입으로 오는 것은 안다.

 

특히나 대기업들은 자신들이 만든 환경오염문제를 자신들의 비용이 아닌 공공성의 영역을 침해한다. 이래저래 막지도 못하고, 현실을 비판하면서 뭔가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란 얼마나 답답한가? 문제의 근원은 어디부터 있지만, 그것을 건들기도 하지만, 그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옛날에 가난의 상징은 영양실조이나, 지금은 비만의 상징은 과도한 비만이다. 경제적 빈부격차는 음식에서 바로 차이난다. 영양제와 항생제가 듬뿍 들어간 고기를 먹는 게 나쁜 것은 잘 알아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은 훨씬 나쁘다. “내가 이래 잘 알고 있는데, 너는 왜 그것을 몰라? 아니면 모르지만, 이것을 알면 정말 놀라울 거야.” 라는 식은 결국 자기 만족의식이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에 대한 배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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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6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7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6-06-07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시간이 날 때 페이퍼를 쓰려 하는 주제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육식은 반-생태순환적이지만, 인류 역사 초기의 반-생태순환은 농업이었고, 친-생태순환은 사냥에 의한 육식이었죠. 사냥감이 줄어들면 인간은 굶어 죽음으로써 균형을 이루었는데, 인간이 굶어 (또는 이에 의해 2차적으로 다른 이유로) 죽는다는 것을 막은 것과 생태 순환과 어느 것이 더 도덕적인지 고민 중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6-07 16:06   좋아요 0 | URL
저도 진보성향이나, 가끔 진보라고 생각하는 분들의 가장 짜증나는 요소는
바로 대안이 없다는 점입니다. 현실에 대해 까기만 바쁘고, 근본원인과 대안책도 없고,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면 계속 뱅뱅이니...참 고민입니다.
이번 고기도 마찬가지죠. 자신들조차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모순과 혜택을 누리면서
거기에 대한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