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변호인 : 일반판 - 아웃케이스 없음
양우석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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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이 TV에서 방영된 사례를 보지 못했다. 알고보니 이 영화를 상영 후 CJ 부사장에게 엄청난 압력이 왔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짐작했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아픈 장면은 경찰에 끌려간 끌려간 아들을 보고 온 순애가 송변을 만나 변호를 애원하는 장면이다.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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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 고산자의 꿈
임나경 지음 / 황금소나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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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때 남자끼리 영화를 본 안쓰러운 기억이 든다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까지 이어온 옛날 친구와 극장가를 찾아가니 보고 싶은 작품이 매진이 되었다그래서 아쉬운 마음으로 다른 영화를 찾아보니 차승원 배우가 출현한 <고산자대동여지도>를 보았다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한국이란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자연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사실과 영화촬영 당시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란 점이다영화촬영 시 무대 세트 외에 현장 로케이션에서 촬영하려면 우선 바다 위에서는 배를 타야 한다만일 진짜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촬영했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우리나라의 해양 특성상 서해가 아닌 남해 측의 대한해협 그리고 독도가 있는 동해는 수심이 깊고수심이 깊기에 파도의 높이가 매우 높다.

 

그런 곳에서 촬영했다면 많은 배우와 스텝 분들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그러나 영화는 영상미도 중요하나영상서사에 드러나는 스토리텔링즉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중요하다영화 <고산자대동여지도>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다소 지겨운 감이 없지 않았다김정호 선생이 고생하여 전국을 돌고권력자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당시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많은 백성이 신음하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했다시대적 흐름에 대해 잘 반영한 것은 알겠지만김정호란 인물이 영화에서 권력자들의 입김에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심했고영화초반 차승원이 보여준 다소 개그적인 요소에 치중한 느낌이었다.

 

영화초반부터 재미를 주려다 후반에 갈수록 진지한 고통이 다가올수록 영화내용이 약간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김정호를 다룬 영화가 있다면 소설도 있을 것이다영화와 소설을 다르게 바라보면서 영화에서 김정호의 가족은 어린 딸 하나이고소설에서 가족은 망나니 아들 하나와 늙을 때까지 옆에서 보필해주던 딸이 있었다영화의 딸은 천주교 박해 때 고문으로 죽었지만소설은 그저 늙어가는 모습만 보여준다어느 모습이 김정호에 더 가까운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김정호의 기록은 여전히 미상이고그의 행적 역시 뚜렷하지 못하다단지 그의 기록만은 기록물로 우리나라 문화재에 큰 빛을 안겨주었다.

 

영화에서 김정호는 외적인 모습에 치중한 것 같았지만이에 반해 소설 <고산자의 꿈대동여지도>는 외적인 모습보다 그의 내적 심경주변사람들을 통해 보여준다소년 김정호는 어느 날 빛을 본다지도에 새겨진 많은 지리적 정보양반출신이 아닌 김정호가 한자를 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한자를 안다는 것그것은 책을 읽고 책을 쓸 수 있으며책으로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다당시 민란이 발생하고 정국은 어지러워도 그래도 민란을 막을 수 있는 이유는 지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글을 알아야 병법을 알고전략과 책략을 짤 수 있다또한 지리적 정보를 담은 지도를 안다는 것은 전술에서 매우 중요하다글을 안다면 또한 조선의 정치통치술인 유교를 알 수 있다조선의 유학은 공자와 맹자보단 오히려 주자의 성리학에 가까웠다다산 정약용 선생이 어느 한 사람의 말만 보고 잘못된 생각을 고칠 의지가 없는 당대 현실을 비판했다글자 하나를 다르게 해석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던 조선이었다문자를 안다는 것문자를 해석하는 것은 권력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소년 김정호는 한자를 보통 사대부양반보다 더 잘 알지만그의 신분이 한계였다조선의 후기는 그야말로 위기였고세도정치가 판을 치는 조선은 민중의 비명과 신음으로 넘치는 세상이다소년 김정호의 아버지는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한양으로 이사 온다그의 아버지는 얼음을 지고가면 목적지에 도착하면 돈 대신 매를 받는다얼음을 이미 다 녹아 소용없게 되었기 때문이다만일 정확히 길만 제대로 보고 간다면아무런 고생이 없는데 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 자신이 태어난 지리적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나는 인간이 공간의 구조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생각한다공간은 한편으로 문화적사회적정치적경제적 분리가 이루어진 최초의 영역이라 본다. <고산자의 꿈대동여지도>의 작가 임나경 소설 중에 <곡마>에서 북촌과 남촌이란 단어가 나온다북촌은 부유한 양반이 사는 곳이고남촌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곡마>의 남자주인공 종사관은 가난한 무관이라면세도가들은 북촌의 권력자들이다.

 

지금 서울에 북촌 한옥마을이 있다고 한다공간적인 영역에서 과거에 그들은 어떤 사람들의 피를 이어가고 있을까과거의 죄를 후손이 책임지는 것은 부당하나그 죄에 의해 혜택을 받는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공간이란 영역은 인간에게 벗어날 수 없는 주박을 걸어준 것이다주박은 과학적으로도 얽혀있지만오히려 비과학적인 논리에 얽매여 있다김정호가 지도에 목숨 거는 이유그것은 지도를 보고 살아야 할 인간들이 너무 고생한다는 점이다보부상들이나 상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이다추운 겨울 산에서 길을 잃으면 추위와 배고픔에 죽거나맹수와 산적에 의해 습격 받는다.

 

만일 제대로 된 길순라군이나 혹은 포졸들이 돌아다니는 길이 표시된 지도가 있다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김정호가 원한 지도란 바로 저런 것이다언제라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지도그것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만 백성의 손에 있어야 하는 점이다인간이 자신에게 재능이 있어도 본인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면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김정호의 인생은 자세히 모른다영화나 소설은 실제 인물은 허구의 이야기로 또 다른 영역으로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설에 많은 공감이 가는 이유는 소설에서 김정호의 슬픔은 김정호만의 것이 아니었다옆에 신분을 초월한 오랜 친구도 있었고그를 알아주는 학자들도 있었다사랑하는 여자존경스러운 청백리 상관오랫동안 정리해온 지도와 판본 등이 무참히 잘려나갈 때 김정호는 담담하게 받아낸 게 아니다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빛을 바라보며 눈물을 머문다김정호란 인물이 한국인 선조에서 위대한 인물이나소설에서 만난 김정호는 위대한 인간보단 미련하나 인간적이고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옆집 아저씨 같았다.

 

옆집에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과자 하나 주면서 친구하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할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하지만 마음이 아프게도 그렇게 마음만 착해빠진 사람은 항상 손해보고 고통을 받는다역사에서 그때의 패자는 먼 미래에서 승자라고 한다김정호란 이름이 지금 우리 현대인에게 계속 되새기는 점에서 그는 역시 역사의 승자이다승자의 이름이 짙을수록 우리는 그에게 가해진 시대의 슬픔을 알아야 한다소설에서 청일전쟁이 등장한다정말 청일전쟁에서 대동여지도가 사용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나적어도 일본의 지리학자는 지도의 진면목을 알았다단지 그게 조선의 민중이 아니라 조선의 민중을 탄압했다는 게 슬플 뿐이다.

 

조선시대 후기 정조시대는 그야말로 르네상스였다정약용 선생이 관직에 오를 때 우리에게 찬란한 문화가 이어질 듯하다정조대왕 서거 이후 신해사옥과 황사영백서는 피로 얼룩진 비극을 만들었다유학은 본래 만민 즉 백성을 위한 학문이다공자가 유학을 만든 이유는 유학자란 백성이 자신의 생활에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기 위해 존재하라는 의미이다유학자는 항상 열린 사고로 토론과 대화를 주고받으며윗사람은 오히려 아랫사람에게 모범이 되어 포용해야 한다공자의 유학 중 논어를 다룬 도서를 보니 그러하다.

 

하다못해 성리학의 시초인 주자가 만든 소학에서도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했다그런 점에서 소설의 실수는 성리학과 공자의 유학을 조금 잘못 배치한 것이 아닐까 하다민족의 스승인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는 성리학의 병폐를 항상 지적하고공자의 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실학이 왜 필요한가에서 백성에게 잘 살아가는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공자는 사실 논어에서 농민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했지만정약용의 사상은 농민에게 농사를 잘 짓는 방법이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정보를 연구했다.

 

양반출신의 정약용양민 출신인 김정호신분은 분명 차이는 있지만그들이 보고자 하는 미래와 그들이 손을 내밀어주고 싶은 사람은 같았다그들의 의지가 높은 이유는 그들이 원대한 꿈을 꾸는 게 아니라그 꿈에서 헤엄치는 이들이 조선의 백성이었기 때문이었다조선후기 양반이 아닌 자가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던 시대가 왔다신분이 양반이고행실도 양반이던 자들은 세도가들에게 미움을 받아 자리에서 쫓겨나고한적한 지붕 아래 책만 읽어야 했다김정호란 인물이 조선시대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그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작가 역시 현대인이고그분이 바라보는 조선시대라 해도 현재 살아가는 인간인 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집안문중 어르신들 중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나오기 150년 전 동국여지지도를 제작한 분이 계신다당파싸움에 밀려 한적한 시골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있었으나그분이 바라본 것은 중앙정부의 권력이 아니라 주변에 널린 것들에 대한 탐구였다하지만 주변을 바라보고 공부하고 연구해도 그것이 제대로 백성의 삶으로 녹아들기 위해선 행정적인 요소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분의 형제와 친구들은 당쟁에 휘말려 죽임을 당하고그 비참한 모습을 본 후 병으로 죽었다그분과 그분의 친구에 의해 한국 실학자 성호 이익에게 유지가 넘어갔으나성호 이익 선생 역시 백발의 선비로 인생을 마감한다이런 분들이 빛을 밝히게 된 건 한국인 역사에서 다행일지 모르나그 사실을 알면 알수록 아쉬운 마음만 가득하다권력 앞에 남을 희생시키는 세상돈 앞에서 양심을 파는 사회김정호 선생은 조선의 산과 강은 나라의 것이 아닌 백성들의 것이라 했다.

 

비록 군왕이 존재하던 시대라도 군왕은 군주로서 백성을 위해 정치를 펼치는 게 목적이어야 하는 도학을 추구해야 했다군주제가 존재한 조선이면 민주제가 존재하는 대한민국은 오죽할까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정부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시련과 실패의 통한에도 길을 찾아간 김정호 선생이나형제들의 목이 참수되고 귀양살이에서 빛을 보여준 정약용 선생 역시 만백성을 위해 살아갔다그들의 위대한 업적이라 하나그들이 살아온 인생의 맛은 너무나도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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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마
임나경 지음 / 황금소나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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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 <곡마>를 읽게 된 동기는 약간 사소한 이유가 있지만, 소설 <곡마> 발매 이전에 재미있는 그림을 보았다. 조선시대 무과시험을 보는 장면을 그려놓은 그림인데, 그 모습이 참으로 특이했기 때문이다. 말 위에 있는 사람이 온갖 이상한 자세로 말을 타고 가는데, 마지막 장면에 말 2마리 위에 서서 가는 것이 아닌가? 현대로 보자면 말 위에서 현란한 묘기를 부리는 서커스단의 모습이 생각난다. 아니라 서커스단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이들이 말위에서 보여주는 호기는 단순히 재미만이 아니라 무관이 전장에서 펼칠 전투에서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에 위대한 성인 중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다. 그가 무관시험 도중 말 위에서 낙마하여 낙방한 사례가 있다. 어릴 적에 단순히 승마를 하다 떨어진 것이라면 장군이 실수를 했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무과시험을 본 순간 낙마할 정도로 고난이도 기술이란 점을 알았다. 소설 <곡마>는 여해와 월하선이 무관 지기택 종사관을 두고 서로 기 싸움을 하는 것이 간단한 소설의 이야기 내용이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무관이 수행하는 마상재 행사라는 점이다.

 

마상재 행사를 조선의 무관이 모여 훈련하는 훈련원에서 주관한다. 훈련원과 관련하여 내 직계 할아버지 중 1분이 훈련원에서 훈련봉사(訓鍊奉事) 업무를 수행했다. 훈련봉사는 조선시대 군사 시재(試才)와 무예 훈련 및 병서 습독을 관장하는 무관이었다. 그 할아버지의 아들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었고, 그 할아버지의 손자 되는 분은 훈련원 사정(司正)을 맡았다. 기록을 찾아보니 무과시험에서 갑2위로 차석을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면 도대체 어느 정도 무예능력이 뛰어나기에 그런 마술(馬術)을 부릴 수 있는 것일까?

 

할아버지들의 형제나 사촌들을 보면 만호(萬戶)직을 맡은 분도 많았고, 임진왜란 당시 약간 촌수가 먼 친척들이 전장의 장수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하신 분들도 많았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하면 대부분 글만 읽고 상황이 닥치면 도망치는 거드름을 피우는 부류가 많았지만, 임진왜란 전후의 무관은 참으로 큰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한명기 교수의 <병자호란>이란 도서를 보면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무관의 반란이 두려워 결국 훈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완전히 청나라의 말굽에 밝혔고, 조선은 아무런 힘조차 내지 못하는 약소국이 되어 일제의 침략에 의해 멸망한다.

 

<곡마>의 소설은 보면 조선의 악운이 시작되던 찰나의 배경인 것 같았다. 시대적으로 조선이란 점은 나오지만, 그 시대가 언제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 여해의 어머니 기련은 지아비를 잃은 청산과부이다. 한국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 심각해지던 시절은 병자호란을 거친 후이다. 병자호란 이전까지 사대부 양반들의 무능함과 부패함이 극을 이루었고, 인조반정 이전 광해군이 만든 중립외교가 붕괴되면서 명·청 교체시기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항복 후 많은 조선인들이 청나라에 끌려갔는데, 그중에 여인들이 참 많았다. 몸값을 주고 풀려나거나 아니면 그냥 운이 좋이 조선에 왔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집에 오니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청나라 오랑캐에게 몸을 판 더러운 여자라고 욕하고, 친가에 가니 가족들은 여자가 시집이 가면 그 곳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도 가도 못하는 여성들은 죽음을 선택해야 했다. 이런 여자를 환향여(還鄕女)라고 하나, 우리는 속된 말로 화냥년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비극은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도 당한다. 전쟁 중에 성질이 포악한 군대가 마을을 접수하면 우선 남자들은 모조리 죽인다.

 

여자는 겁탈하고, 아이들은 노예로 삼는다. 집에 남편이 죽게 되면 조선시대 여성은 재혼을 하지 못한다. 그대로 청산과부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 조선초기에는 재혼이 가능했지만, 사회적 모순은 이렇게 억울한 사람만 만들어낸다. 남편이 죽으면 시댁에서 며느리에게 강요하는 게 있다. 그것은 열녀문을 가문에 세우는 것이다. 여해의 어머니 기련(성이 기씨인지 모르나)은 그런 시대의 조류에 태어난 여자인 것 같았다. 병자호란 이후 열녀문에 대한 집착,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담바고(담배의 옛말)가 유입되는 처음에 장죽(긴 대나무)에서 곰방대가 들어올 정도라면 17세기 후반 내지 18세기 초반으로 보이며, 더 중요한 점은 조선통신사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수교가 단절되다 광해군이 일본과 다시 수교를 놓았으며, 인조 역시 청나라와 명나라 관계에서 일본에 대한 외교 전략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궁궐의 당상관들이 흥청만청 주색을 밝힌 점을 본다면 숙종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효종과 현종은 평소 검소하고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신하들의 관계에서 마찰이 심했다. 개혁의 의지를 가진 2사람은 실세관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이익을 빼앗는 자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빼앗는 게 아니라 농민의 세금을 줄이거나, 사대부들의 특권을 다소 제한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구중궁궐 높으신 관료가 주색에 빠지려면 많은 재물이 필요하고, 그 재물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다. 왜구의 침입도 문제지만, 주색과 재물에 미친 탐관오리들은 더욱 문제이다. <곡마>는 이런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처해진 시대적 맥락과 상황은 반영된 점을 알 수 있다. 소설을 보면서 생각한 점은 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은 입장이나, 작가가 여성과 남성이냐에 따라 글의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 모두가 자기만의 세계관이나 혹은 이야기풀이 방식이 다르겠지만,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점에서 뭔가 색다른 점이다.

 

전에 정유정 작가 소설을 읽으면서 이야기 구조는 크게 다를 바가 없어도 섬세한 내면을 작은 표정과 행동을 묘사한 점에서 매우 독특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곡마>에선 조선통신사 행렬에서 마상재를 펼치는 건 양반출신의 무관이다. 시대적 조건에 종사관이 우위에 있지만, 소설은 여해와 월하선의 라이벌로 나오는 애정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양반과 천민, 승려와 역죄인의 등장에서 시대적 한계와 그 한계를 넘고자 하는 낭만주의적 관점도 보인다.

 

승려 명단과 사대부 청산과부 기련은 절대 맺어줄 수 없는 운명이다. <곡마>에선 주요 인물관계 속에서 복선과 암시를 많이 넣는다. 그래서 충분히 독자가 중간에 그 장치를 읽어내면 주인공들의 운명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 확인하고, 심지어 박수무당이 중간마다 날리는 말문에서 이미 운명이 정해져도 그들은 벗어날 수 없는 비극인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소설이 계속 이야기를 나가자고 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아간 흔적이 결코 헛된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월하선이 아무리 못된 계략을 꾸미고, 주색으로 고위관료를 유혹해도 그녀 역시 순수한 사랑을 원했고, 여해 역시 순수한 사랑을 원했다. 한쪽은 권력을 이용하여 몸을 빼앗으려 했고, 한쪽은 마음으로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길 원했다. 제 아무리 조선시대가 성리학의 좋지 못한 것만 유지하여 폐단이 심각했지만, 적어도 그 안에서도 자신이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 작가가 여성이기에 여성의 관점에서 많이 서술한 점이 많았다. 여해의 친구 장포가 전지수로 활약하자 많은 아낙네들이 장포를 두고 군침을 흘린 점에서 단순히 사랑이나 성욕을 남성만이 소유물이 아니라 여성들도 가지고 있고, 사랑을 위해서라면 여성 자체가 능동적으로 활약했다는 점이다.

 

시대적 벽을 알고 있다. 그런다고 마음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여우로 소문난 형조판서의 아내나, 기방의 명기 월하선, 군마장의 구경꾼 여해조차 자신의 마음이나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단지 그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형조판서 아내는 자신이 권력을 가졌고, 월하선은 주색으로 권력을 움직였다. 여해는 오로지 달리는 말을 통해 종사관으로 다가간다. 앞의 2여자와 달리 인간의 본능이나 혹은 집착에 매달리지 않는다. 마상이란 재주에 감동하여 거기에 마음을 다해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의 정성은 하늘도 감동시킨다고 했는가? 종사관 옆의 판관 이두홍도 처음에 여해를 두고 놀리거나 혹은 위협했지만, 극적인 상황에 이를 때 여해를 믿어주었다. 인간에게 믿을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쉽고도 간단하다. 사소한 철사 하나들이 계속 이어져 단단한 커다란 철근이 되는 것이다. 단지 철근을 놓을 수 있는 자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곡마>는 사실 마상재를 보여주기 위한 소설보단 마상재를 통해 인간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인간은 관계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서로가 원하는 사람이 있어주면 행복해한다. 하지만 만일 서로 같이 있어주지 못하더라도 그 상대방이 계속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아니나 안심은 된다. 소설 <곡마>에서 이미 단추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운명의 뒤틀림은 시작된다. 그래도 적어도 세상 어딘가 내가 살아있고, 나의 정인이 살아있다. 그리고 그들이 같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간이 흘러도 그 기억만큼은 살아있다는 게 삶의 흔적이다. <곡마>는 그런 삶을 살았을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지금보다 먼 과거라도 지금 우리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공감이나 감정이 없을 리가 없다. 단지 전해주는 방법만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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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말하기 - 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우는 설득과 소통의 법칙
윤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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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과 저번 정권을 지나오면서 한국사회는 이상한 조류로 흘러들어간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우리나라는 민주 공화국이어야 하는데, 만주 참주국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감이 든다. 사회적 변화와 정치권 파동에서 현실사회를 살아가는 국민들의 생활력이 계속 감퇴하고 있다. 정치에 대해 논하자면, 한국사회 특히 기성세대나 어른들은 정치학 9단이다. 정치학이나 철학, 기본적인 사회학 전공자도 아니요, 심지어 그런 책도 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만 모이면 정치이야기이다. 정치에 대한 이야기에서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TV에서 카드라 하는 이야기들이 모이고 모여 우스꽝스러운 형태를 야기한다.

 

한국 정치사회적 이슈에서 다룰 것들이 너무 많으나, 최근 가장 위험요소가 된 것은 지진이다. 지진이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지만, 경주에서 6.0 밑까지 흔들리는 다소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이 원인을 찾아 나선다. 지진이 일어나는 원인 은 우선 지구과학에서 찾아야 한다. 과거 주술사들이 피지배계층에게 충성심이나 신앙심의 부족이 원인이 아니라 지구 기상이변에 대한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지구 지표면 아래 맨틀이란 마그마가 움직이는 곳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지진이 인위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강한 폭탄이 폭발할 때이다. 그러나 화산활동에 의한 지진보다 위력이 약하다. 아는 동생이 추석 때 친척집에 가니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을 두고 북한 핵실험이라고 말하던 분이 있었다고 한다. 지구과학 전공자까지는 아니나, 지구과학을 고교시절 이과전공으로 선택하고, 환경공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본다면 웃음만 흘러나온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회적 이슈에서 과학적 근거를 두고, 정확한 사실성을 두고 이야기할 게 오히려 반대로 감정적으로 혹은 의구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일반 국민들이 이런 이야기를 믿고, 혹은 이런 이야기를 믿도록 뒤에서 부채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문제의 해결보단 오히려 문제의 회피를 노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제가 발생하면 우선 대다수 국민들은 정부부처의 정보를 기대한다. 일반 국민들이 기상을 관측하거나 지진정보를 판단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기술적 도구가 없다. 공공성으로써 기술력과 장비를 보유한 정부기관의 정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정부부처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또는 대응하지 못하면 국민들은 불신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 기관을 책임을 지어야 하는 정부수장 대통령이 어떤 말을 하는가에서 많은 희비가 엇갈린다. 국가는 정부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국회, 정부, 법원에서 입법, 행정, 사법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국가기관 중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는 대통령이다. 정부기관 수장이 각 정부부처를 관리하지 국회에서 정부부처를 운영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는 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행정으로 이어지고, 특히 재난의 경우는 생명과 직결된다. 대통령의 판단력이 많은 것들을 좌우하고 있는 것이다.

 

판단력이란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은 자신의 사고세계에 존재하지 타인의 관점에서 알 수 없다. 이때 판단력을 전달하는 방법은 말과 글이다. 글은 적는데 시간이 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계속 정보를 주고받기에 적정하지 못하다. 결국 실시간적으로 대응하려면 글이 아닌 말로써 사람들과 대화해야 하고, 그 상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보조차 말로 들어야 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인간에게 늘 있는 일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말 한 마디가 진짜 여러 사람의 목숨이 오고가는 일은 역사적으로 흔한 일이다.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대로 전달해야 하는 게 옳은 것인가? 정치사회적으로 대통령은 늘 많은 일들을 마주친다. 오랜 검토 후 판단을 내리는 사무도 있지만, 실시간으로 처리할 일도 많다. 급박한 재난이나 혹은 갑자기 조성된 회의나 만남, 상대편이 날리는 예측불허의 질문 역시 그렇다. 여기에 얼마나 잘 대응을 하는가? 여기에 얼마나 상대방을 이해하는가에서 발언자에 대한 평가가 내려진다.

 

<대통령의 말하기>, 참여정부시절 청와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로 활동하던 그가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연설, 대화, 회의한 내용을 모아 책으로 내었다. 정권에 따라 대통령 및 정부기관의 국무위원들이 잘 한 업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때는 좋아도 뒤에 가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당시에는 문제라고 여긴 것이 뒤에 가서 다시 재조명 받는 일들이 허다하다. 노무현이란 이름은 어떻게 볼지는 관찰한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단지 그가 비교할 부분은 역대 대통령과 비교하여 대화와 토론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대화와 토론은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꺾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을 토대로 상대방의 의견을 들은 후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하지만 한국은 토론문화가 엉망이다. 평소 자신보다 어리거나 직급이 아래에 있는 사람의 말이 더 좋을 때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자신이 답을 틀리거나 몰라도 그냥 그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대화는 결국 소통이고, 소통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다. 말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면 상대방에게 잘 이해되거나 공감되어야 한다.

 

진보진영의 문제점은 아마 이런 부분일 것이다. 한국의 보수는 논리와 이성이 없지만 감수성과 감정을 내세우고, 진보는 논리와 이성만 내세우는 것이다. 최근 진보진영은 논리와 이성조차 상실(아니 왜곡)하고, 감수성만 잔득 내세우는 산파 극이 되어버렸다. 자칭 엘리트나 지식인들의 글에서 보이는 내용은 잘난 문구나 용어만 들어가 있다. 대중을 상대로 하면서 대중을 호응을 얻지 못하면 정치적 기반이 붕괴된다. 평소 나처럼 그냥 자신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한국사회에 살아가는 국민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 말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죽은 말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하기>에서는 노무현이란 정치인이 대통령이 될 때와 집무할 때, 그리고 퇴임 후의 모습을 담았다. 대화에서 나오는 말이란, 그가 살아온 인생과 그가 가지고 있는 인생철학에서 나온다. 대화를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입장이 필요하다. 단지 말의 방식에서 거창하기보단 담백하고 소박하게, 어려운 문구보단 쉬운 단어, 강렬한 의미를 전달할 때는 반복적인 배치가 인상적이다. 이런 대화법은 반드시 대통령만이 아니다. 2015년 가을 나는 학술세미나에서 한국의 신화와 문화콘텐츠 관계성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었다. 발표를 듣는 청중들이 만일 국내 교수나 연구자, 혹은 학생들이면 몰라도 외국인들이 많았다.

 

외국인들은 한국의 문화를 잘 모르고, 그 국가나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인 신화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 신화는 더욱 낯선 존재다. 그때 나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대본을 만들지도 않았고, 내가 작성한 논문조차 보지 않았다. 오로지 화면에 올라간 자료를 보았으며, 대사는 머릿속으로 암기하여 발표했다. 이때 착안점은 외국인이다 점이고,한국문화가 그동안 서구문화에 의해 가려진 것과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탈근대 내지 탈서구화를 거치면서 한국 역시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했다는 점을 밝혔다.

 

공통적인 영역에서 한 부분으로 선택하여, 문화적 가치와 형태, 그리고 흐름전개 과정으로 설명했다. 생각해보면 계속 이런 것들에 대한 지적연구와 관련 문화콘텐츠 작품에 대한 리뷰와 글쓰기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말을 하면서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으려면 나 역시 제대로 완벽하게 이해해야 했다. 외국인들 특히 서구문화권 학자들이 동양에서 한국이란 나라가 어떤 신화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한 세계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식 문화에 적응되지 않기에, 내가 발제를 하고, 질의를 받을 때 한국의 지식이 아닌 서구의 지식으로 응대해야 했다. 물론 영어까지 소화할 수 없더라도 기본적으로 그들이 보는 시각은 분명 다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을 나만이 아니라 이 공간에서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대화는 타인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기에 어떻게 하면 흥미를 끌고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가? 위트와 유머, 그것을 만들어가는 재치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삶이란 오랫동안 정제된 시간의 축척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은 그의 얼굴에도 그의 표정에도 그의 말과 글에도 드러난다. <대통령의 말하기>에서 비서관 윤태영은 노무현의 말을 정리할 수 있고 그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어도, 그렇게 말을 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은 모두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말을 할 수 없더라도 말 그 자체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 거짓 없이 솔직한 맛이 필요하다. ()이란 한자어를 보면 사람 인()과 말씀언()자가 결합되어 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이 믿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을 듣는 사람에게 믿음을 준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말은 달콤할 수만은 없으며, 때로는 잔혹할 수도 있다. 상대에게 말을 할 때 그 어느 것보다 진실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진실이 담긴 말을 어떻게 상대에게 접근할지는 그것은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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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3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9-26 14:45   좋아요 1 | URL
슝~~~
 
과학 수다 1 : 뇌 과학에서 암흑 에너지까지 - 누구나 듣고 싶고 말하고 싶은 8가지 첨단 과학 이야기 과학 수다 1
이명현.김상욱.강양구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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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은 이른바 spectacle에 의해 결정지어 진다. 그 말의 뜻은 어느 미디어나 혹은 다른 유행에 의해 흥밋거리가 끊임없이 변경된다. 자신이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누군가 하니까? 그게 대세이니까? 라는 질문과 대답이 계속 이어진다. 물론 평소 관심이 없다가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고 찾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라 여긴다. 인간은 누구나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지식을 쌓고 인격을 배양한다. 그런 것들을 유지하지 못하면 지금에 비해 더 좋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과학수다 1>, 과학에 대한 담론은 솔직히 잘 볼 수 없다. 평소 TV를 즐겨 찾지 않기 때문에 요새 무엇이 대세인지 유행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없다. 기껏 내가 TV를 보면 즐겨 보는 장르는 논픽션이나 영화 정도이다.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이다. 다양한 종족과 문화, 자연의 다양한 모습과 야생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은 인간이 사는 우리 세계란 매우 좁은 곳이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넓은 곳이다. 하지만 당장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면 세상은 넓게 보이면서 좁다는 것을 느낀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것에 대해 더 노력한 만큼 알아가는 것이다. 지식은 무조건 아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어제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 이제는 거짓 내지 오류로 결정 나는 일들이 다분하다. 책 제목이 <과학수다>인 것처럼, 과학의 시작은 어디인가? 현대사회는 이른바 지성과 이성의 사회로 구축해 왔다. 인문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했지만, 과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은 그렇게 인정될 수는 없다. 과학이란 것은 증명되어야 하고, 귀납적인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연역적 검토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라면 영원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지동설을 주장하던 이들은 교회권력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들이 인정받는 날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야 교회라는 종교사회에서도 과학의 검토를 인정받았다. 과학이란 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검토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감정적이고 무의식적인 요소에 더 많은 결정권을 내려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란 학문이 시작된 것은 어디인가?

 

현재 우리가 과학과 철학을 대조해보면 서로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원래 과학과 철학은 하나였다. 책에서 탈레스가 과학의 시작점이라 하지만, 탈레스는 과학자 이전에 수학자와 철학자까지 겸비했다. 고대 그리스 유명한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했다. 플라톤은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추구하고, 유물론적인 가치를 배제한 인간이다. 그가 스승 소크라테스를 책에 등장시킬 때, 과학적인 지식이 등장한다. 플라톤은 기하학을 모르는 이들을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기학학은 수학에서도 중요한 학문이고, 과학에서도 중요하다. 세상의 흐름은 직선이나 곡선처럼 단순하게 이어지지 않는다. 복잡한 형성으로 계속 변화한다. 기하학적인 라인은 과학적으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서적 중에 하나가 <형이상학(Meta-Physics)>이 있다. 형이상학은 과학과 물리학을 의미하는 PhysicsMeta라는 어두를 붙인다. 즉 물리학 너머의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은 그 무언가를 말이다. 형이상학을 읽으면 인간의 혈액과 남녀의 존재성에 대해 등장한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약간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 등장하지만, 당시 이 책은 철학, 과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에서 세포와 혈액의 구조를 관찰하지 못하기에 형이상학이 되었지만, 현대과학 특히 생물학에서는 세포와 혈액은 과학적으로 정리가 완료되었다. 당시에 현미경이 존재하지 않기에 눈에 보이지 않은 인간의 세부구조를 알 수 없었다. 생물학에서 생리학이나 해부학의 지식이 없었기에 인간 그 자체의 연구는 과학의 진보가 덜 된 점에서 한계점이 있었다. 그러나 과학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형태, 세상의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과학적인 담론은 이미 거기서 부터다. 우리 인간이 현대문명의 혜택을 얻으면서 과학은 빠질 수 없는 서사이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전기나 전파 관련 과학자를 찾아가는 작품을 본다. , 에디슨, 헤르츠 등등의 과학자를 보면 그들의 발명이 없다면 우리는 어둠속에서 밤을 보냈을 것이다. 문명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 생활 속에 밤이란 시간을 없애주고, 어떤 산물이나 재화에 부여되는 인간의 노동력을 줄이는 양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과학이 일상생활에 밀접하게 연결되면 그것은 과학이란 학문을 넘어 문화생활이란 영역으로 넘어간다. 사람들이 정전이 나면, 두꺼비집의 퓨즈가 나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전기가 끊기는 이유는 제어장치가 필요이상의 전압이 오거나, 전봇대의 전기송신장치의 이상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단지 우리가 느끼는 것은 불편할 뿐이지 그 근본은 모른다.

 

과학에 대한 담론이 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일까? 철학이나 인문학은 우리가 일상생활에 자주 겪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자연재해가 아닌 사고로 죽었다면 우리는 그냥 사람이 죽었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철학에서 윤리학적인 개념을 생각하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죽은 자의 입장과 그 사람의 생활환경과 주변 조건들, 그런 사고를 일으킨 사회적 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점이다. 일반적인 현대인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다. 나와 상관없기를 바라며, 스스로 기만적인 의지로서 현실 문제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일상생활 그 자체이다. 달리는 출근버스에서 차가 움직이는 원리,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인터넷의 원리, 요리하는데 필요한 도시가스의 출처와 제조방식은 대부분 모른다. 그저 이용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과학수다>에서는 이런 과학적인 지식을 지식인(내가 볼 때 엘리트들이다)들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과학이 왜 알아야 하는가? 과학이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솔직한 말로 지구에서 발사한 우주선에서 사람이 장기간 생활한다 하여 우리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문화적인 요소와 앞으로의 취업노선과 연결되면 말이 다르다.

 

미국 영화 중에서 재난이나 재앙이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은데, 그 영화의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해 할리우드 제작진들은 NASA에 조언을 받는다. <인터스텔라>같은 영화 역시 우주의 원리나 새로운 개념을 찾기 위해 항상 NASA의 협조를 받는다. 재난영화에서 지진, 해일, 토네이도에서 기상학, 지질학, 해양물리학을 모르고선 개연성이 연결되지 않는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은 시간여행에 대한 작품이 나오는데, 작품에서 SERN이란 기관이 나온다. 그런다 <과학수다>에서 그 기관이 유럽에 실존하는 연구기관이란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SF 내지 재난영화에서 과학기술이 뒷받침되어 상영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하다못해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요소도 연관된다. 사실 철학에서 특히 근현대 형이상학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같은 경우, 인간의 존재를 시간적 존재라고 명칭하고, 인간과 세상의 가능성을 새롭게 확장하는데 필수적인 요건이 되었다. 우리 인간이 사는 세계는 이른바 비가역적 세계이다. 인간이 과거로 날아갈 수 없고, 미래로 더 빨리 날아갈 수 없다. 하지만 시간에 대한 철학적 사고와 거기에 호응하는 과학적 상상력이 어울려져 다양한 이론이 나온다. 흔히 오타쿠 계열에서 중2병에 걸린 친구들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가능성이란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니라 일단 열어봐야 안다. 모든 게 0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설사 0.001%조차도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성을 향하여 계속 과학기술을 발전해온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지 그 결과성에 대해서는 무척 어려운 맹점이 있다. 과학은 실험과 결과를 통해 자신의 이론과 가설을 맞추어 나간다. 책에서 80% 관측이 나오면 결과로 볼 수 있는 점에서 그 결과가 나오는 순간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 것인지 중요하다.

 

사람을 죽이거나 생명을 파괴하거나 지구를 오염시킨 것이라면 그것은 과학의 진보성이야말로 오히려 인류의 역사를 후퇴시키는 것이다. <과학수다>에서 복제인간의 문제도 대두하고, 특히 유전자 이식과 관련하여 정자와 달리 난자를 구하기가 어렵고, 보관하는 방법도 어렵기에 20대 젊은 여성의 배란일에 맞추어 구해야 한다. 그러나 법적으로 자국에서 구하기 어렵다면 외국의 가난한 여성들의 난소를 돈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다. 실험의 목적에서 윤리성이 부재된다면 그 과학의 결과가 과연 옳은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일까?

 

한국에서 과학적인 문제가 바로 핵에너지 발전소이다. 개인적으로 핵에 대해 배웠다면 핵에너지 개발과 이용보단 환경과학적인 방법으로 관찰했다. 초반에는 핵에너지가 청정에너지로 대체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대부분 전기에너지가 발전소를 통해 제공되나, 수력발전은 10%도 되지 못하고 대부분 화력에 의해 전달된다. 석탄과 석유를 연소하여 얻는 에너지는 처음에 대기오염을 비롯하여 산성비, 산성비로 인한 토양오염과 수질오염까지 이어진다. 게다가 대기오염물질이 인체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다이옥신이나 퓨란 같은 다단계 결합 화학물질 역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최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사고나, 한국에서 경주에서 발생된 5.9의 지진현상은 한국 역시 일본처럼 핵사고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 경주 인근에 위치한 울진, 영덕, 기장 같은 경우 핵사고가 일어날 경우 동해남부 쪽의 거주민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고 환경오염까지 더해진다. 핵발전소 건설은 전문기관만 가능하고, 거기다가 핵발전에 필요한 운영기술과 자재 역시 특정 전문기관에만 가능한 업무다. 그것은 독점과 상업적 이윤이 연계되어 있다. 우리가 일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서 송전탑이나 핵발전소 건설은 단순히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의 정치적 경제적 이윤이 깊게 묶인 점이다.

 

<과학수다>에서 제시한 것처럼 우리가 이런 사안을 두고 뭔가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사회적인 담론을 하려면 뭔가 지식이 필요하다. 과학적 지식은 철학이나 인문학과 다르게 복잡한 답을 말하지 않는다. 과학 역시 어느 영역에 대해 일방통행적인 답을 주는 게 아니다. 단지 서울서 부산으로 갈 때 철도, 고속국도, 항공기 중에서 고를 수 있는 방안을 준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해결해야할 모든 것에 대한 대안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단지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과 자본력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과학적 지식이다. 과학지식이 없다면 우주나 지구재난 같은 영화, 혹은 시간여행 같은 유쾌한 이야기도 풀어갈 수 없다.

 

아니라면 추석연휴를 지진으로 고민하는 경주시민들의 마음 속 깊이 의문을 풀어가는 것도 과학적 지식이다. 하지만 과학지식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상세히 알아가는 것은 그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면 완벽히 이해하기 힘들다. 단지 이런 것들이 있구나! 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과학수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쉬운 책은 아니다. 공대출신인 나라도 접근하기 힘들 과학이론과 실험, 결과 등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든다. 한국처럼 국토가 넓지 않고, 인구수에 비해 직업의 선택권이 적으며, 지하자원이 없는 국가에선 오로지 인간의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

 

인간이 가진 과학기술력, 혹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예술과 문화적 생산력만이 새로운 산업과 미래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문학적 소양보단 돈을 먼저 요구하고, 과학적 기술보단 정해진 기술력에 의존하는 레드오션에 치중한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은 새로운 인력을 요구하고, 새로운 영역을 창출하려면 기존의 인력에 의한 인프라 조성이 우선되는 효과가 있다. 과학이란 단어가 <과학수다>에서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다양한 사람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기도 하나 나쁜 책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과학전공이나 공대전공자도 아니다. 더구나 여기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명문대학에서 엘리트코스를 거친 사람이다. 대중에 의한 과학적 사고가 일반적인 현상이 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한 것이 아닐까? <과학수다>란 책은 누군가 관심을 가지거나 우연한 기회가 되지 않으면 결코 접할 수 없을 책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작은 시작은 그런 것이지만 작은 시작이 모든 시작이 될 수 있지만, 안 될 수 있는 점이 높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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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6-09-18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길고도 풍부한 과학적 상식을 키워주는 리뷰네요. 감사 ^^

만화애니비평 2016-09-19 08:49   좋아요 0 | URL
추석연휴 잘 보냈나요?
칭찬의 덧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