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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수다 1 : 뇌 과학에서 암흑 에너지까지 - 누구나 듣고 싶고 말하고 싶은 8가지 첨단 과학 이야기 ㅣ 과학 수다 1
이명현.김상욱.강양구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6월
평점 :
담론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은 이른바 spectacle에 의해 결정지어 진다. 그 말의 뜻은 어느 미디어나 혹은 다른 유행에 의해 흥밋거리가 끊임없이 변경된다. 자신이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누군가 하니까? 그게 대세이니까? 라는 질문과 대답이 계속 이어진다. 물론 평소 관심이 없다가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고 찾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라 여긴다. 인간은 누구나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지식을 쌓고 인격을 배양한다. 그런 것들을 유지하지 못하면 지금에 비해 더 좋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과학수다 1권>, 과학에 대한 담론은 솔직히 잘 볼 수 없다. 평소 TV를 즐겨 찾지 않기 때문에 요새 무엇이 대세인지 유행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없다. 기껏 내가 TV를 보면 즐겨 보는 장르는 논픽션이나 영화 정도이다.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이다. 다양한 종족과 문화, 자연의 다양한 모습과 야생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은 인간이 사는 우리 세계란 매우 좁은 곳이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넓은 곳이다. 하지만 당장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면 세상은 넓게 보이면서 좁다는 것을 느낀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것에 대해 더 노력한 만큼 알아가는 것이다. 지식은 무조건 아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어제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 이제는 거짓 내지 오류로 결정 나는 일들이 다분하다. 책 제목이 <과학수다>인 것처럼, 과학의 시작은 어디인가? 현대사회는 이른바 지성과 이성의 사회로 구축해 왔다. 인문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했지만, 과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은 그렇게 인정될 수는 없다. 과학이란 것은 증명되어야 하고, 귀납적인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연역적 검토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라면 영원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지동설을 주장하던 이들은 교회권력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들이 인정받는 날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야 교회라는 종교사회에서도 과학의 검토를 인정받았다. 과학이란 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검토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감정적이고 무의식적인 요소에 더 많은 결정권을 내려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란 학문이 시작된 것은 어디인가?
현재 우리가 과학과 철학을 대조해보면 서로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원래 과학과 철학은 하나였다. 책에서 탈레스가 과학의 시작점이라 하지만, 탈레스는 과학자 이전에 수학자와 철학자까지 겸비했다. 고대 그리스 유명한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했다. 플라톤은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추구하고, 유물론적인 가치를 배제한 인간이다. 그가 스승 소크라테스를 책에 등장시킬 때, 과학적인 지식이 등장한다. 플라톤은 기하학을 모르는 이들을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기학학은 수학에서도 중요한 학문이고, 과학에서도 중요하다. 세상의 흐름은 직선이나 곡선처럼 단순하게 이어지지 않는다. 복잡한 형성으로 계속 변화한다. 기하학적인 라인은 과학적으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서적 중에 하나가 <형이상학(Meta-Physics)>이 있다. 형이상학은 과학과 물리학을 의미하는 Physics에 Meta라는 어두를 붙인다. 즉 물리학 너머의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은 그 무언가를 말이다. 형이상학을 읽으면 인간의 혈액과 남녀의 존재성에 대해 등장한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약간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 등장하지만, 당시 이 책은 철학, 과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에서 세포와 혈액의 구조를 관찰하지 못하기에 형이상학이 되었지만, 현대과학 특히 생물학에서는 세포와 혈액은 과학적으로 정리가 완료되었다. 당시에 현미경이 존재하지 않기에 눈에 보이지 않은 인간의 세부구조를 알 수 없었다. 생물학에서 생리학이나 해부학의 지식이 없었기에 인간 그 자체의 연구는 과학의 진보가 덜 된 점에서 한계점이 있었다. 그러나 과학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형태, 세상의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과학적인 담론은 이미 거기서 부터다. 우리 인간이 현대문명의 혜택을 얻으면서 과학은 빠질 수 없는 서사이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전기나 전파 관련 과학자를 찾아가는 작품을 본다. 벨, 에디슨, 헤르츠 등등의 과학자를 보면 그들의 발명이 없다면 우리는 어둠속에서 밤을 보냈을 것이다. 문명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 생활 속에 밤이란 시간을 없애주고, 어떤 산물이나 재화에 부여되는 인간의 노동력을 줄이는 양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과학이 일상생활에 밀접하게 연결되면 그것은 과학이란 학문을 넘어 문화생활이란 영역으로 넘어간다. 사람들이 정전이 나면, 두꺼비집의 퓨즈가 나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전기가 끊기는 이유는 제어장치가 필요이상의 전압이 오거나, 전봇대의 전기송신장치의 이상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단지 우리가 느끼는 것은 불편할 뿐이지 그 근본은 모른다.
과학에 대한 담론이 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일까? 철학이나 인문학은 우리가 일상생활에 자주 겪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자연재해가 아닌 사고로 죽었다면 우리는 그냥 사람이 죽었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철학에서 윤리학적인 개념을 생각하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죽은 자의 입장과 그 사람의 생활환경과 주변 조건들, 그런 사고를 일으킨 사회적 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점이다. 일반적인 현대인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다. 나와 상관없기를 바라며, 스스로 기만적인 의지로서 현실 문제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일상생활 그 자체이다. 달리는 출근버스에서 차가 움직이는 원리,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인터넷의 원리, 요리하는데 필요한 도시가스의 출처와 제조방식은 대부분 모른다. 그저 이용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과학수다>에서는 이런 과학적인 지식을 지식인(내가 볼 때 엘리트들이다)들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과학이 왜 알아야 하는가? 과학이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솔직한 말로 지구에서 발사한 우주선에서 사람이 장기간 생활한다 하여 우리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문화적인 요소와 앞으로의 취업노선과 연결되면 말이 다르다.
미국 영화 중에서 재난이나 재앙이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은데, 그 영화의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해 할리우드 제작진들은 NASA에 조언을 받는다. <인터스텔라>같은 영화 역시 우주의 원리나 새로운 개념을 찾기 위해 항상 NASA의 협조를 받는다. 재난영화에서 지진, 해일, 토네이도에서 기상학, 지질학, 해양물리학을 모르고선 개연성이 연결되지 않는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은 시간여행에 대한 작품이 나오는데, 작품에서 SERN이란 기관이 나온다. 그런다 <과학수다>에서 그 기관이 유럽에 실존하는 연구기관이란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SF 내지 재난영화에서 과학기술이 뒷받침되어 상영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하다못해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요소도 연관된다. 사실 철학에서 특히 근현대 형이상학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같은 경우, 인간의 존재를 시간적 존재라고 명칭하고, 인간과 세상의 가능성을 새롭게 확장하는데 필수적인 요건이 되었다. 우리 인간이 사는 세계는 이른바 비가역적 세계이다. 인간이 과거로 날아갈 수 없고, 미래로 더 빨리 날아갈 수 없다. 하지만 시간에 대한 철학적 사고와 거기에 호응하는 과학적 상상력이 어울려져 다양한 이론이 나온다. 흔히 오타쿠 계열에서 중2병에 걸린 친구들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가능성이란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니라 일단 열어봐야 안다. 모든 게 0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설사 0.001%조차도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성을 향하여 계속 과학기술을 발전해온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지 그 결과성에 대해서는 무척 어려운 맹점이 있다. 과학은 실험과 결과를 통해 자신의 이론과 가설을 맞추어 나간다. 책에서 80% 관측이 나오면 결과로 볼 수 있는 점에서 그 결과가 나오는 순간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 것인지 중요하다.
사람을 죽이거나 생명을 파괴하거나 지구를 오염시킨 것이라면 그것은 과학의 진보성이야말로 오히려 인류의 역사를 후퇴시키는 것이다. <과학수다>에서 복제인간의 문제도 대두하고, 특히 유전자 이식과 관련하여 정자와 달리 난자를 구하기가 어렵고, 보관하는 방법도 어렵기에 20대 젊은 여성의 배란일에 맞추어 구해야 한다. 그러나 법적으로 자국에서 구하기 어렵다면 외국의 가난한 여성들의 난소를 돈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다. 실험의 목적에서 윤리성이 부재된다면 그 과학의 결과가 과연 옳은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일까?
한국에서 과학적인 문제가 바로 핵에너지 발전소이다. 개인적으로 핵에 대해 배웠다면 핵에너지 개발과 이용보단 환경과학적인 방법으로 관찰했다. 초반에는 핵에너지가 청정에너지로 대체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대부분 전기에너지가 발전소를 통해 제공되나, 수력발전은 10%도 되지 못하고 대부분 화력에 의해 전달된다. 석탄과 석유를 연소하여 얻는 에너지는 처음에 대기오염을 비롯하여 산성비, 산성비로 인한 토양오염과 수질오염까지 이어진다. 게다가 대기오염물질이 인체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다이옥신이나 퓨란 같은 다단계 결합 화학물질 역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최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사고나, 한국에서 경주에서 발생된 5.9의 지진현상은 한국 역시 일본처럼 핵사고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 경주 인근에 위치한 울진, 영덕, 기장 같은 경우 핵사고가 일어날 경우 동해남부 쪽의 거주민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고 환경오염까지 더해진다. 핵발전소 건설은 전문기관만 가능하고, 거기다가 핵발전에 필요한 운영기술과 자재 역시 특정 전문기관에만 가능한 업무다. 그것은 독점과 상업적 이윤이 연계되어 있다. 우리가 일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서 송전탑이나 핵발전소 건설은 단순히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의 정치적 경제적 이윤이 깊게 묶인 점이다.
<과학수다>에서 제시한 것처럼 우리가 이런 사안을 두고 뭔가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사회적인 담론을 하려면 뭔가 지식이 필요하다. 과학적 지식은 철학이나 인문학과 다르게 복잡한 답을 말하지 않는다. 과학 역시 어느 영역에 대해 일방통행적인 답을 주는 게 아니다. 단지 서울서 부산으로 갈 때 철도, 고속국도, 항공기 중에서 고를 수 있는 방안을 준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해결해야할 모든 것에 대한 대안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단지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과 자본력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과학적 지식이다. 과학지식이 없다면 우주나 지구재난 같은 영화, 혹은 시간여행 같은 유쾌한 이야기도 풀어갈 수 없다.
아니라면 추석연휴를 지진으로 고민하는 경주시민들의 마음 속 깊이 의문을 풀어가는 것도 과학적 지식이다. 하지만 과학지식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상세히 알아가는 것은 그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면 완벽히 이해하기 힘들다. 단지 이런 것들이 있구나! 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과학수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쉬운 책은 아니다. 공대출신인 나라도 접근하기 힘들 과학이론과 실험, 결과 등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든다. 한국처럼 국토가 넓지 않고, 인구수에 비해 직업의 선택권이 적으며, 지하자원이 없는 국가에선 오로지 인간의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
인간이 가진 과학기술력, 혹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예술과 문화적 생산력만이 새로운 산업과 미래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문학적 소양보단 돈을 먼저 요구하고, 과학적 기술보단 정해진 기술력에 의존하는 레드오션에 치중한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은 새로운 인력을 요구하고, 새로운 영역을 창출하려면 기존의 인력에 의한 인프라 조성이 우선되는 효과가 있다. 과학이란 단어가 <과학수다>에서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다양한 사람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기도 하나 나쁜 책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과학전공이나 공대전공자도 아니다. 더구나 여기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명문대학에서 엘리트코스를 거친 사람이다. 대중에 의한 과학적 사고가 일반적인 현상이 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한 것이 아닐까? <과학수다>란 책은 누군가 관심을 가지거나 우연한 기회가 되지 않으면 결코 접할 수 없을 책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작은 시작은 그런 것이지만 작은 시작이 모든 시작이 될 수 있지만, 안 될 수 있는 점이 높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