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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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죄가 없습니까?” 그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K가 말했다.

자신의 모든 유고를 불태워달라는 카프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던 막역한 친구 막스 브로트 탓에 우리는 카프카의 장편을 읽는 고역을 감내하는 걸까.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장을 덮고서도 해결되지 않는다. ‘내가 널 안다.’, ‘내가 그걸 이해했다’라고 생각한 순간 오해가 시작되어 스스로 불신을 만들고 배신감에 몸을 떨기도 한다. 스스로 자신의 원고를 태울 용기가 없었거나 미련을 남긴 카프카에게 요제프 K가 묻는다. 미완의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하고픈 말은 아도르노의 분석대로 “모든 문장이 ‘나를 해석해보라’고 하면서 어떤 문장도 그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이게 뭥미?

소설 도입부를 읽다 내려놓은 책들이 꽤 많다. 어디 소설뿐인가. 첫인상에 기대 선입견을 갖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모든 텍스트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고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독자에게 발화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읽었다는 만족감을 위해, 또 누군가는 문제를 해결하고 색다른 방식의 위로를 받으려고, 그리고 누군가는 망각과 도피의 수단으로 책 속에 숨기도 한다. 목적이 무엇이든 내게 50쪽을 넘기는 책은 나와의 인연이 없다고 판단한다. 카프카의 『소송』을 꺼내 다시 읽기 시작한 건 필연을 가장한 우연일 테다. 인생 전체가 우연히 휘말린 소송에 불과하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고, 아무 상관없이 욕을 먹고, 영문도 모른 채 불이익을 감내하며, 남의 잘못으로 손해를 보는 게 인생이라면 지나치게 부정적일까. 낭만적 사랑과 긍정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 곁에 머물러야 행복도 전염된다면 요제프 K 같은 사람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아야 한다. 바틀비는 물론.

소송의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소설이 끝난다. 공소장을 확인하지도 못한 주인공은 건물 꼭대기층 다락에 설치된 법정을 기웃대며 이들의 피를 빠는 훌트 변호사와 법원 중재인 화가 티토렐리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이어지는 음울한 분위기의 소설을 읽는 내내 식은땀으로 젖은 속옷을 벗지도 못하고 뜨거운 선풍기 바람이 오히려 온몸에 열기가 올라오는,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밤에 읽지 말아야 할 소설 맨 윗자리에 올리고 싶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주의로 흘러가는 현대 관료 체제는 매일 뉴스를 통해 목도한다. 상식과 합리에 바탕을 둔 판단과 선택과 거리가 먼 경찰과 검찰과 법원의 판단이 오로지 증거와 법리에 따라 선악을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싶다. 원고와 피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억울하다고 아우성인 세상에서 요제프 K가 선 법정은 종교 혹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 혹은 종교적 가르침에는 인과관계가 성립할까. 비인간화된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느끼는 소외와 불안은 법정으로 상징되는 권위, 가치, 규범들이 내면화된 죄의식을 만들어 낸다.

1883년 체코에서 태어나 1924년 겨우 40년을 살다 간 프란츠 카프카는 파혼으로 인한 죄책감, 자기 증오, 자기 처벌의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을 것이라는 추론은 그의 생애와 무관치 않다. 제1차 세계전을 일으킨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빌렘’과 ‘프란츠’로 등장시켜 우회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1914년의 세계를 반영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겠다. 그러나 세계가, 아니 우리 삶 전체가 법정과 다름없다는 설정은 공화정 아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 산다고 믿는 근대 이후 인류에게 던지는 카프카의 질문이다. 넌 괜찮으냐고, 과연 그게 맞는 거냐고.

“개 같군!” 그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


* 등장인물

요제프 K :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은 은행 재무담당 부장, 주인공 화자

감독관 : 요제프를 감독

프란츠, 빌렘 : 감시인

그루바흐 부인 : 하숙집 주인

뷔르스트너 양 : 타이피스트, 건너편 방 거주자

라벤슈타이너, 쿨리히, 카미너 : K의 은행 동료들

엘자 : 술집 여종업원

법정 정리, 그의 아내 : 법정이 열리는 장소를 제공하며 살아감

베르톨트 : 법학 전공 대학생, 예심판사 밑에서 일하며 법정 정리의 아내를 짝사랑

알베르트(카를) : 요제프의 숙부

에르나 : 사촌인 숙부의 딸

훌트 변호사 : 숙부의 동창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자

레니 : 홀트 변호사의 시중 드는 아가씨

사무처장 : 홀트 변호사의 지인

티토렐리 :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이자 비공식적 법원 중재인

블로크 : 상인으로 변호사의 의뢰인

*

체포

그루바흐 부인과의 대화 이어서 뷔르스트너 양

첫 심리

텅 빈 법정에서 / 대학생 / 법원 사무처

태형리

숙부 / 레니

변호사 / 제조업자 / 화가

상인 블로크 / 변호사와의 해약

대성당에서

종말

**미완성 장들

B의 여자친구(몬타크)

검사(하스테러)

엘자에게로

부행장과의 싸움

관청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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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스트로 사는 법 - 삶이 무겁고 힘든 사람에게 니체의 니힐리즘이 전하는 지혜
문성훈 지음 / 이소노미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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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nihil은 ‘없다無’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기존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니힐리즘을 실천하는 사람이 니힐리스트라 하겠다. 임승수는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그 이유와 태도를 설명한 적이 있고, 지승호는 유시민을 ‘소셜 리버럴리스트’로 규정한 적이 있다. 라벨링 혹은 낙인이론은 한 인간을 프레임에 가두는 못된 방법인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삶의 가치와 목표를 설정하고 인간과 세계를 향한 삶의 방법을 결정할 수 있다는 건 숭고한 일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과 선택의 문제라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자기 삶의 창조자가 되어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으로 가득 채우려는 주체적인 사람은 아름답다. 그것은 학벌과 직업, 명예와 권력, 부의 척도로 가늠할 수 없는 인간적 향기와 가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특정 이념에 가두거나 몇몇 프레임으로 가두기보다 나름대로 각자 만들어가는 삶의 방법과 태도는 그래서 소중하다. 인상 깊게 들여다봤던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의 번역 소개자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던 철학자 문성훈의 글은 단단하게 여며져 있다. 합리적이고 빈틈없는 논리로 무장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깊은 사유와 오랜 경험이 녹아있지만 주관에 치우치지 않고 담담하게 저자의 생각을 사례와 함께 풀어내고 있어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에세이다. 좋은 글은 결국 깊이와 넓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니힐리스트는 세상의 허무함 속에서도 ‘사자의 꿈’을 꾼다!”라는 문장과 함께 시작하는 이 책은 니체 철학에 바탕을 두면서도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 공자와 마르크스, 김예슬과 푸코, 법정 스님과 존 롤즈까지 다양한 사상가들과 실제 사례가 소개되어 현실적인 삶의 지침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한 사람의 생각과 주장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가늠할 수는 없다. 그가 가진 이력과 삶의 궤적과 무관하게 개별 독자의 현실 적용 가능성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지, 그 태도와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다. 각자 선택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족과 연인, 절친과도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할 때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누적된 말과 행동의 결과는 그대로 자기 인생이 되고 돌이킬 수 없는 거리를 만든다.

삶이 무겁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특별히 ‘니힐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더라도, 아니 그 어떤 이념과 주의, 주장으로 설명할 수 없더라도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 점검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배부른 돼지와 다를 바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자는 건 아니다. 문성훈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법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 자유 정신을 되찾고 자기 창조적 삶을 권한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김연자도 외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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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 우리 몸 안내서
빌 브라이슨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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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하게도, 대한민국 헌법 제12조 신체의 자유를 떠올렸다. 인간의 몸은 자유의 본질이며 출발이다.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은 물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적 합의는 인간다운 삶의 기본이다. 건강한 몸을 유지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 또한 인간의 기본권이다.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아야 할 권리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꿈꾸는 세상과 거리가 멀다. 시대와 맥락에 따라 매력적인 몸이 다르고 특정한 몸을 추앙하던 사람들도 변한다. 질병과 장애로 일그러진 표정과 뒤틀린 몸을 로트렉이나 에곤 실레처럼 색다른 관점으로 표현한 화가도 있으나 대개 몸에 대한 미의 기준과 사회적 관점은 본능에 가까운 직관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니 몸과 관련된 주제는 정치, 사회, 역사, 예술 분야에서 조금씩 다르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빌 브라이슨은 이렇게 다양하게 변주되고 흥미로우며 미지의 대상인 인간의 몸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피부에서 뇌와 머리 입과 목, 심장과 피, 면역계와 소화기관뿐 아니라 음식, 잠, 직립 보행과 심호흡에 이르기까지 몸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은 ‘우리 몸 안내서’라는 부제답게 외계인을 위한 인간 이해 매뉴얼 같은 느낌이다. 해부학 도판으로 충분한 설명을 굳이 텍스트로 설명할 이유는 없다. 『그림과 함께 읽는 바디』가 따로 출간된 사실을 토론 도중 알았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이 시대에 ‘라디오 드라마 극장’을 듣는 느낌이었으니까. 물론 빌 브라이슨의 목적이 인체 해부도 설명에 있지 않았으리라는 건 누구나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입증한 지식과 정보의 편집력, 유려한 문장과 매끄러운 설명력, 재치 있는 입담과 적절한 비유를 무기로 다양한 인문학적 양념이 뿌려진 책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 책 또한 의학 분야로 분류할 수 없을 만큼 잡학 다식한 읽을거리로 가득하다. 과장하거나 주관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새로운 시선으로 인간의 몸을 바라보며 다양한 고민거리를 제공하는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무나 쓸 수도 없다. 지식과 정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글쓰기 능력을 우리는 숱한 책에서 매일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생명을 담보로 한 의료 대란은 어느 쪽이 옳고 그름으로 판정할 수 없다. 응급 의료 체계부터 진료 과목 편중, 지방 의료 붕괴 등 이해관계로만 따질 수 없는 의료 문제는 교육보다 더욱 심각하게 공공성을 따져 거시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토론에서 다뤄진 ‘좋은 의학과 나쁜 의학’ 뿐만 아니라 ‘건강과 노화’, ‘뇌와 기억’ 등 우리는 몸을 통해 자기 삶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의대 증원 문제가 숫자놀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성적순으로 의대에 진학하는 동안 무너진 기초 과학, 특정 직역의 상상을 초월한 이기주의, 의료 보험의 보장성과 실비보험 문제 등 이야기는 결국 현실과 닿고 우리 몸이 곧 삶이 되는 현실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더 오래 살기 위해 불노초를 캐오라던 진시황제를 떠올렸을 테고 누군가는 덧없는 삶에 대한 환멸로 자살한 숱한 예술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건강수명은 기대수명과 다르다. 우리는 언제까지 직립보행하며 살 수 있을까.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존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아니 그렇게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인 실존적인 몸과 건강 문제 앞에서 누구도 예외가 될 순 없다. 헌법에 보장된 신체의 자유만큼 건강권도 소중하다. 아프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오늘을 살 수 있는 ‘행복’이 허락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두 발로 사유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남은 시간에 경의를.

문 : 건강한 사람을 정의한다면?

답 : 아직 검사를 받지 않은 사람. - 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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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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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구름이 몰려오니 조심하라 인간들이여!

이렇게 그대가 말할 때,

창조하는 자들은 모두 가혹하다,

이렇게 그대가 가르칠 때,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날씨의 조짐에 대해 얼마나 조예가 깊은지!

_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칼 슈미트의 『땅과 바다』는 인류사를 땅과 대양의 힘이 부딪치는 ‘투쟁’으로 요약한다. 자연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곧 문명의 역사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이성과 합리성의 지배를 받지만 인식론과 존재론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순 없다. 여전히 ‘감정’ 혹은 ‘감성’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 아니 특징과 개성을 전제로 선택과 판단을 가늠할 수 있으며 삶의 목적과 가치, 즉 “뭣이 중헌디?”를 결정한다.

바람이 머물 순 없다. 오늘처럼 구름 낀 하늘에도 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철학은 날씨를 바꾸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날씨가 철학적 관점을 흔드는 게 아닐까. 서동욱의 에세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밀란 쿤데라의 『불멸』, 황지우의 〈거룩한 식사〉, 플라톤의 『국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장자크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헤로도토스의 『역사』, 마틴 버낼의 『블랙 아테나』등 고전과 문학과 사회학의 명저가 망라한다. 풍요로운 지적 산책에 동참하면 눈과 귀가 즐겁고 시야가 트이며 생각은 깊어지고 생각은 맑아진다. 현실을 벗어난 자리에 철학이 놓이는 게 아니라 철학적 사유로 현실을 긍정 혹은 부정하려는 태도가 낯설어 보이지만 자기 삶을 향유하고 그 깊이를 더하는 건 순전히 독자의 몫이 아닌가.

달콤한 말 한마디의 위로는 적지 않으며, 공감을 이끄는 한 문장이 힘을 주기도 하지만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현실과 매번 좌절하고 마는 연약한 결심과 ‘노오력’의 결과를 차분히 살피려면 생각의 근육이 필요하다. 닭가슴살과 계란을 챙겨 먹는 노력만큼 중요한 철학적 사유는 어떻게 채워질 수 있을까. 대개 책을 읽는 행위가 가장 무용하지만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을 도피하거나 망각을 위한 독서를 즐기는 사람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가장 치열한 투쟁의 도구로서 책, 자기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한 독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서동욱의 에세이는 기생충과 예술, 우울과 여행, 남녀관계, 인공지능, 근대와 주체, 염세주의, 느림과 환생, 나이듦과 죽음 등 매우 현실적이며 철학적인 주제를 고루 다룬다. 형식과 내용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가 두서없이 펼쳐지지만 각각의 주제에 천착하는 사유의 밀도는 단단하다. 끝끝내 밀어붙이지 못하고 ‘타협’하는 게 옳은 선택이 아닐 때가 많다. 언제나 경계에 서성이다 금을 밟고 후회한 적이 많다. 그 결정적 순간들, 선택의 무게와 책임 앞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거나 적당한 합리화 과정을 거쳐 인지 부조화를 극복한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내일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위안의 말 대신 산책을 권한다. 걷고 움직이며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죽는다. 의학적 죽음이 아니라 성장을 멈추면 존재론적 사망 선고를 받는 법이다. 아무도 손 내밀지 않아도 혼자 걸을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현실은 잔인하고 미래는 암울하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일은 결국 지금, 여기 각자의 생각과 태도가 결정하는 게 아닌가. 흐린 날이다. 이런 날 황지우는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온갖 고생에서 서리 같은 귀밑머리가 많아짐을 슬퍼하니,

늙고 초췌해져 이젠 흐린 술잔마저 멈추었네.

_두보, 〈등고登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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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안다는 것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이경식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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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안다는 게 가능한가. 예를 들어, 내 아이는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엄마의 착각이 아이를 망친다. 식성과 습관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으나 성장 과정에서 생각과 감정은 하루가 다르게 차이가 난다. 우리 애가 그럴 리가 없는데 친구를 잘못 사귀었다는 도시의 전설은 여전하다. 부모 자식뿐 아니라 연인과 부부 관계만큼 오해가 심각한 경우도 드물다. 많은 사람이 에리히 프롬을 소환하고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거라고 되뇌지만 내가 바라보는 그, 혹은 그녀는 자신의 기대와 거리가 멀거나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그럴 리가 있다’는 게 디폴트 값이다. 리처드 니스벳의 탁월한 저서 『사람일까 상황일까』는 인간의 양면성을 상황 논리로 설명한다. 누구나 그럴 수 있고 사람은 앞뒤가 다르며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말과 행동을 한다.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하는 건 특정 직역, 정치인, 행정가, 공무원, 과학자의 논문 정도가 아닐까.

사람을 안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전제로 데이비드 브룩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관점이 달라진다. 우리, 아니 당신이 믿는 인간 혹은 세계는 어떤가. 서로를 깊이 알면 우리의 세계는 어떻게 넓어지냐고 묻는 저자에게 서로를 깊이 알면 다칠 뿐이라는 시니컬한 답을 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소셜 애니멀』부터 관계에 집중했다.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며 인생의 태도를 점검하려는 사람들에게 지적 영감과 성찰을 준다는 점에서 공상과학에 가까운 자기계발서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저자의 지향점과 전제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바라보는 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사례 중심으로 철학과 심리학, 문학과 신경과학을 넘나들며 소설과 영화를 가로지른다. 읽는 재미는 충분하며 인사이트도 충분하다. 모든 사람에게 ‘타인과의 관계’는 풀리지 않는 숙제다. 적당한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운 건, 사람마다 초점 자동 조절 기능으로 피사체를 선명하게 바라보는 기능을 장착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에 기대고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소환하고 템플 스테이와 명상을 시도하기도 하는 걸까. 정답이 없으니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자기만의 ‘태도’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며 자기 정체성이다.

차이는 극복하는 게 아니라 견디고 조절해야 한다. 하나가 되려는 허튼 노력과 우리가 남이냐는 호소가 깊은 상처를 남기지만, 때로는 인맥과 인연을 강조하며 관계를 이용한다. 남이 하면 이기적 집단주의 카르텔, 내가 하면 처세술에 능한 성공한 인맥 관리일까. 정서적, 개인적 1차 관계와 공적 영역의 2차적 관계를 구분하는 공정한 세상, 합리적이고 평등한 사회는 ‘꿈’에 가까운 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최소한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에서라도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한 나름의 노하우를 익히며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간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지혜로움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조언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책이 그러하듯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개별 독자의 몫이다.

“사람들은 개인의 정신적 경험을 세상에 투사한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감각기관과 개인사, 목표, 기대치에 의해서 특정한 지각이 형성되었음을 망각한 채, 자기의 정신적 경험을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이라 착각한다.” - 프로핏/드레이크베어 『지각Perception』 재인용,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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