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 되찾은 시간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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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시간’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지나간 시간은 아쉽고 남은 시간은 불안한 법이다. 100년 전 사람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느 날 문득 “문학 작품의 모든 소재는 내 지나간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난 시간 여행에서 되찾은 건 무엇일까. 늦가을에 시작한 소설이 봄에야 끝이 났다. 13권 5,700쪽에 달하는 분량의 소설을 읽는 동안 계절이 달라졌고 해가 바뀌었다. 콩브레를 읽는 동안 검은 머리는 옹브레가 되었다. 누구나 시작하지만 아무도 끝내지 못하는 소설이라는 소문부터 세상에는 이 소설을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풍문까지 떠도는 책은 과연 그러했다. 지루하고 황망한 디테일에 숨이 막혔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수십 쪽은 기본으로 되새김질을 하는 문체에 독자들이 어떤 느낌이었을지 실감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프랑스의 사교계와 살롱 문화가 공간과 시간을 넘어 21세기 한국인에게 ‘감동’을 주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도서관이든 3권부터 새 책인 이유가 있는 법.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그 찐득한 답답함도 익숙해진다. 그리고 기나긴 만연체가 편안해지고 묘한 매력을 품기 시작하면 프루스트의 그물에 걸려든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지루한 서사가 오히려 마음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며 읽는 사람의 추억 속으로 안내하는 듯하다. 읽은 문장을 다시 읽고 또 몇 쪽 앞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은 복잡한 사건 전개나 난해한 문장 때문이 아니라 개별 독자의 ‘추억’과 프루스트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지나간 삶을 돌아보며 어쩔 수 없이 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되살아나거나 선택적 기억이 엉켜 사건을 재구성하는 동안 우리는, 아니 나는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견하며 삶에 엉뚱한 의미를 부여한다. 소설을 읽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읽는 독자는 ‘고르지 않은 포석의 감각과 뻣뻣한 냅킨과 마들렌의 맛’과 같은 각자의 소리와 향기와 감각에 집중한다. 과거를 소환하는 트리거는 선물이나 일기장만이 아니다. 인생을 반추하는 사람은 시간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기억과 추억 사이에서 ‘시간’을 되찾지 못한다면 마르셀 프루스트는 왜 읽고 싶은 것일까.

「스완네 집 쪽으로」 시작한 기나기 이야기는 7편 「되찾은 시간」으로 마무리 된다. 드레퓌스 사건(1894~1906)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함께 마무리 된다. 1909년부터 1922년까지 집필된 이 소설은 주관적 기억과 사랑, 질투, 열정에서 객관적 서사와 늙음과 죽음 그리고 예술과 글쓰기에 대한 성찰로 마무리 된다. 7편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이제 병들거나 늙고 죽는다. 그들을 닮은 다음 세대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동성애자이며 성도착(사드마조히즘)자인 샤를뤼스의 죽음과 전장에서 숨을 거둔 생루의 대비된 삶은 모렐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전편을 통해 끝끝내 성과 사랑의 문제는 베일에 쌓인 듯 모호한 추정과 해석만 난무한다. 불로뉴숲 가로수길의 게르망트 살롱에서 유년시절을 추억하는 회상의 회상 장면만큼 인상적인 장면과 깊은 성찰을 담아낸 문장을 옮겨 적다가 이 소설은 결국 기나긴 프루스트의 예술론, 작가론과 20세기 초 유럽 예술계의 이론과 흐름을 톺아보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삶과 죽음에 관한 서사가 소설의 본질이라면 프루스트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꼼꼼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게르망트 대공 부인 살롱의 후일담, 세월의 흐름 속에 늙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로 7편을 마루히 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이 아니겠는가.

‘스완 부부의 살롱이나 게르망트네의 살롱, 또는 이와 정반대편에 있는 베르뒤랭네의 살롱에서 보낸 사교계에서의 내 모든 삶’을 기록하는 거대한 문장들 사이에서 독자들은 길을 잃기 위해 책장을 펼치는 게 아닐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되찾을 수 없는 시간을 위해 프루스트의 문장뒤에 숨어버리는 건 아닐까. 왜냐하면 프루스트는 “오로지 유추의 기적만이 내게 지나간 날들을,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 주는 힘을 가졌고, 그 앞에서 내 기억과 지성의 노력은 언제나 좌초했다.”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인상을 파헤치고 규명하고, 자신의 언어로 옮기는 번역가이다.”라는 김희영의 해설은 “나는 본질적인 책, 유일하게 참된 책은 이미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위대한 작가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발명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번역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의 임무와 역할은 바로 번역가의 그것이다.”라는 문장에 기인한다.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책을 번역하는 시간을 위해, 바로 그 시간을 찾기 위해 우리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다.

세월은 흘러가며, 젊음은 늙음에 자리를 내주며, 가장 단단했던 재산이나 왕좌도 무너지며, 명성이 순간적이라는 걸 알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방식이, 말하자면 ‘시간’에 휩쓸린 그 유동적인 세계의 사진을 찍는 방식이 모순되게도 그 세계를 고정하기 때문이다. - 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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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기쁨 - 세상을 구할 과학자의 8가지 생각법
짐 알칼릴리 지음, 김성훈 옮김 / 윌북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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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객관적 진실일까. 인간의 호기심은 때때로 비극을 낳는다. 그것이 자연과 사회로 향할 때는 탐구와 관찰로 이어지나 개인을 향할 때는 관음과 무례를 빚어 관계의 파탄을 만든다. 인문, 사회과학과 달리 자연과학자들은 전혀 다른 관점과 언어를 사용한다. 짐 알칼릴리는 과학의 기쁨은 결국 과학적 방법론을 터득한 후에야 얻을 수 있는 판단과 선택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 이해도scientific literacy가 짧지만 강렬한 이 책의 특징을 요약한다. 사회학과 심리학에서 언급되는 체리피킹cherry picking, 탈진실post-truth,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등의 개념은 인간의 습성과 타성적 사고 특성을 나타낸다. 적응과 생존을 향한 몸부림은 다양한 인지 부조화를 극복하도록 각자의 뇌를 재구조화한다.

어쩌면 진실truth에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외치는 사람처럼 팩트fact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객관적 사실을 강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지 않을까. 우리는 개인이 속한 다양한 공동체의 도덕적 기준을 내면화 하지만 실제 그 경계는 모호하며 각자의 선택과 결과도 차이가 있다. 자연과학에서 주장하는 객관적 진리가 설 자리는 도덕적 진리의 대척점이 아니라 최소한 합의해야 하는 사회, 정치, 경제 등 교집합의 영역이다. 옳고 그름이나 선악의 가치판단에 관한 논쟁은 종교와 이념 논쟁만큼 소모적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과학적 방법론의 결정적 특성은 칼 포퍼의 주장대로 ‘반증 가능성’이다. 블랙 스완이 등장하는 순간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주장은 부정된다. 따라서 우리가 합의 혹은 동의할 수 있는 최솟값이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결과여야 한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진리가 사회적 과정을 통해 구성된constructed 것이다. 대개 사회적 대립, 정치적 갈등, 이념 논쟁은 이 구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통과 문화적 다양성에 기반한 인간 사회는 지역과 국가와 민족에 따라 합의의 기준과 영역이 다르다. 허나 시대와 공간을 가로지는 공통 언어를 우리는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의견이 아닌 증거에 집중하라는 조언, 타인의 관점을 평가하기 전에 할 일 등 저자는 ‘생각 바꾸기’를 두려워하지 말자고 독려한다. 기준틀이 의존적reference frame dependent보다 무서운 건 기준틀이 독립적 reference frame independent인 사람이다. 주체적인 사고, 판단 능력을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의 겸손을 모르는 우월감이 더 큰 비극을 낳는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는 이제 통계의 계절이 돌아왔다. 데이터에 기반한 확신과 주장이 넘치고 해석과 관점이 판을 친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정치와 생활의 틈에서 과학이라는 빛이 들 수 있을까.

우리가 나눈 각자의 경험 혹은 자기 성찰과 반성 그리고 세상을 향한 시선은 과학적 방법론에 기반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은 복잡하게 흔들리고 엉뚱하게 선택한 후에 황당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다. 아주 먼 바닷가에서 책 이야기를 나누기 올라 온 분의 열정 앞에 생각이 많아지는 건 가까운 거리에서 치열하게 사람들의 고민이 적어 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책과 현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섬이 있다. 그 섬에는 갈 수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다. 그 거리를 인정하며 아주 조금 가까워질 수 있는 다음 모임의 기회를 엿볼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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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라는 착각 -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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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진실성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안다면 말과 행동을 삼가게 된다. 그러다 대부분의 사람은 신념과 확신으로 가득하다. 타인을 단순하게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며 자신은 복잡하고 신중한 사람으로 착각한다. 모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며 생존 게임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한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의 불합리한 요소도 버릴 게 별로 없다. 이질적 존재에 대한 경계와 편견, 나와 다른 집단에 대한 적개심은 종족 보존과 항상성 유지에 도움이 된다. 끼리끼리의 카르텔은 깨지지 않을 것이며 그들만의 리그는 계속되리라.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신경과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필리프 슈테르처가 쓴 이 책은 과학의 영역조차 음모론이 난무하는 현실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망상, 조현병조차 적응과 생존에 유리한 점이 있다는 점이 놀랍지만 ‘정상’과 ‘비정상’, ‘미친’과 ‘제정신’ 사이에는 경계가 없고 연속선 위에 놓여 있다는 지적은 새삼스럽지 않다. 언제나 경계 위에서 흔들리는 사람, 고민하고 질문하는 사람은 성장과 변화의 희망을 품어도 좋다. 그러나 현실은 모두, 각자 ‘제정신’인 사람뿐이다. 반대편 사람들, 즉 정치적 신념, 종교 등이 다르면 공생이 불가능한 적으로 간주한다. 몇몇 극단주의자의 태도가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과 취향을 가진 타인을 비난하는 모든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는 왜 타인을 인정하기 어려울까. 아니, 어느 지점까지 허용할 수 있으며 협력과 공존이 가능할까.

짐 알칼릴리는 『과학의 기쁨』에서 “확신이 몰락을 불러온다.”고 지적했고, 저자는 이 책에서 “확신은 본질상 가설에 불과하다.”라고 강조한다.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가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장착될 가능성은 없을까. 생존 기계에 불과한 인간의 유전적 본성에 반하는 데도 인간은 왜 스스로 합리적, 이성적 존재로 ‘착각’할까.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느라 하루 해가 짧다. 근대 이후 과학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성과 합리성은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으나 개인은 모두 ‘제정신이라는 착각’에 빠져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합리성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비합리성이 진화한 이유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이라는 시스템은 인식적 합리성 원칙을 표방한다. ‘인식적 합리성’은 확신이 증거에 부합해야 하며, 이런 부합성에 맞춰 확신을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실용적 합리성’은 어떤 확신이 자신에게 실용적 이익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마치 탈진실post-truth,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처럼 실용적 합리성은 뇌피셜과 합리화의 다른 이름일까. 비합리적 확신은 종교와 미신 그리고 음모론의 바탕을 이룬다. 미스터 스포크는 “나는 훈련 없는 지성에 반대한다.”고 선언했으나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인식적 비합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인지 왜곡’을 인지 편향 또는 인지 착각이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의 생각이 체계적으로 실수를 저지른다는 의미다.

대표적으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을 들 수 있다. 오직 모를 뿐!이라는 겸손은 옛말이 되었고, 인터넷 시대의 인류는 스스로 전문가가 되어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점차 확신을 갖게 된다. “우리의 인간적인 확증 편향이 인터넷에서 에코 체임버가 생겨나게 할 뿐 아니라, 에코 체임버가 확증 편향을 부추기는 것이다.” 필터 버블Filter Bubble과 체리 피킹cherry picking은 에코 체임버echo chamber로 확신을 신념으로 강화한다. 대니얼 카너먼이 말한 ‘네게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다What You See is All There is’라는 무서운 팩트fact와 진실truth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절대 네비게이션을 창작한 신인류가 등장한 건 아닐까.

‘예측 처리 이론’을 소개하며 왜 우리가 대체로 인식적 비합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지, 심지어 망상과 조현병조차 적응과 생존의 방편이 될 수 있는지 살피는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그’ 혹은 ‘그들’의 생각과 태도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인간일 뿐 로직logic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나 로봇이 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는 과정은 곧 나의 착각과 확신을 점검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인간은 예측 기계라는 저자의 주장은 인간이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에 포섭된다. 의심과 질문은 겸손한 태도를 만든다. 공부하고 살피며 매일 조금씩 조정하고 수정하며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삶은 불가능할까. 목청 높여 노래 부르던 가수의 외침이 새삼스럽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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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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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넝쿨이 뒤덮인 낡은 건물 같은 인간 그레고리우스. 후줄근한 옷과 벗겨진 머리에 고도 근시로 시계처럼 정확한 일상의 루틴은 골이 따분하다. 고전 문헌학자가 언어에 쏟는 예민함은 다른 감각을 무디게 한 것일까. 비 오는 날 그녀를 만난 ‘우연’이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트리로 작동하면서 ‘문두스’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고 떠난다. 독자들은 자연스레 그녀가 남긴 전화번호가 600쪽이 넘는 장편을 읽는 내내 언젠가 등장할 거라고 ‘기대’한다. 대개 욕망은 스스로 끓어오지만 타인 혹은 외부 세계의 자극으로 발현된다. 히치콕이 노린 맥거핀MacGuffin 효과를 기막히게 차용한 작가의 솜씨에 놀란 게 아니라 로맨스 소설일 거라는 선입견만 생긴 거 같아 뒷맛이 쓰다. 클리셰를 파괴하는 클리셰로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기막힌 반전이나 놀랄만한 결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긴 장편을 읽는 동안 독자에게 챙겨줄 기프티콘이나 무료 이모티콘 이벤트 정도는 준비했으면 어땠을까. 도입부의 주목할 만한 장면 이후에 소설은 인간과 삶에 대한 부조리를 성찰한다. 기록 vs 기억, 여행자 vs 향수병, 리스본 vs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대결과 갈등은 프라두의 과거와 그레고리우스의 현재 시점을 오가며 끊임없이 이상 vs 현실을 묻는다.

『파리 대왕』이나 『동물농장』 혹은『이솝우화』는 거대한 알레고리로 선악과 인간 본성을 구체화한다. 고도 근시의 안경 교체로 인한 프레임 전환은 새로운 관점으로 새로운 세상을 본다는 점에서 낯설지도 새롭지도 않지만 생존 인물의 기억을 통해, 그들의 시점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또 상징적이다. 오래된 소설적 장치들 이를테면 은유와 상징, 알레고리로 엮인 액자 구성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김영호의 외침과 다를 바 없는 과거 회귀형 인물과 원점 회귀형 공간 구성으로 버무려져 마치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둔 소설처럼 곳곳에 다양한 장치들이 혼재한다.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건 복잡하고 난해하여 해석의 다양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표면적으로 단순해 보이는 서사구조에 숨겨 놓은 재미와 의미를 독자마다 다르게 해석해도 좋다는 뜻일 게다. 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는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 ‘신뢰에서 오는 협박’, ‘멜랑콜리’와 추상적 개념과 언어에 대한 천착이다. 그녀가 “포르투게스Português.”라고 소리 내어 발음하지 않았다면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지 않았을까. “‘오’는 ‘우’처럼 들렸고, 올리면서 기묘하게 누른 ‘에’는 밝은 소리를 냈다. 끝의 무성음 ‘스’는 실제보다 더 길게 울려 멜로디처럼 들렸다. 하루 종일이라도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라는 독백은 시니피앙signifiant이 시니피에signifié 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며, 시니피앙의 효과에 의해 시니피에가 만들어진다는 라캉의 주장을 증명한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포르투케스’가 결국 그레고리우스를 프라두에게 이끈다.

잊어버렸던 호메로스의 단어 ‘리스트론’은 홀 바닥을 청소할 때 쓰는 쇠 밀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던 철학자의 말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의 자의적 해석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지적했던 비트겐슈타인도 다르지 않다. 프라두가 남긴 텍스트는 오롯이 되살아나 현재화되고 무덤 속의 프라두와 고레고리우스의 삶에 나타나 칼 융의 ‘동시성synchronicity’을 극화했다고 하면 지나치다 할 것이나 어차피 오독이 독자의 특권이라고 우겨봄직도 하다. 철학자 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이나 『삶의 격』을 읽고 철학자의 또 다른 페르소나 파스칼 메르시어가 쓴 『언어의 무게』까지 살펴본 분들의 열정이 놀랍기만 했다. 독서 모임의 목적이 무엇이든 각자의 관점과 해석이 부딪치고 충돌하는 장면만큼 재밌는 지점은 각자의 확장성이다. 영화조차 보지 않은 나와 달리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분들의 이야기는 모임을 이어가는 가장 큰 이유다.

영화의 남주와 여주 이미지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작위적인 소설 장치들에 대한 비판도, 프라두의 직업인 의사와 아버지의 직업인 판사의 직업적 윤리 의식에 대한 견해 그리고 ‘도덕적 허영심’이라는 표현과 의견들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지점들이었다. 소설은 2004년 스위스 베른 시 키르헨펠트에서 시작되지만 포르투갈 리스본이 주 무대다. 살라자르 정권 당시 포르투갈 저항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해서 아쉬운 건 개인적 소회일 뿐. 이스타두 노부Estado Nobo(1933년부터 1974년까지 지속된 포르투갈의 비민주적 정치경제체제)를 배경으로 펼쳐진 과거와 현재의 대비가 아니라 프라두라는 개인의 서사로 풀어낸 점은 못내 아쉽다. 철학자에게 소설은 쉽게 풀어쓴 연구 보고서가 아니었을까. 목적이 무엇이든, 개별 독자가 어떻게 읽었든 모임에 참석하는 대신 리스본으로 떠난 분과 소설을 읽고 기차를 타고 온 분, 울릉도로 떠나 독도 소주를 마셨다는 분들의 뒷이야기가 더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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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역사 - 신의 탄생과 정신의 모험
카렌 암스트롱 지음, 배국원 외 옮김 / 교양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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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 바디스Quo vadis』를 읽은 건 초등학교 시절이었으니 아마도 문고판 축약본이었을 것이다. 신과 종교에 대해 무지했던 시기였으니 이 책이 그리 감동을 준 것도 아니었다. 사치와 향략으로 점철된 로마 문명과 숱한 박해와 고난에도 결국 인류의 보편적 종교로 자리 잡은 기독교의 대비가 인상적이지도 않았고,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에 대한 아우라가 영향을 미쳤을 리도 없다. 계몽사판 세계문학 전집 100권 중 하나로만 기억한다. 소설의 영향은 아니었겠으나 크리스마스 즈음에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가서 초코파이를 받아먹은 게 종교 경험의 전부다. 풍광 좋은 절에 들러 문화재를 둘러보는 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감동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엊그제 겨울 산, 돌계단을 디뎌 개심사에 다녀왔다고 마음이 열리거나 번뇌가 씻기지도 않는다. 종교에 대한 관심과 신에 대한 믿음은 별개의 문제다.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예수는 신화다』 등의 책을 보는 동안에도 해결되지 않았던 질문 중의 하나가 ‘유일신’에 대한 그들의 공고한 믿음이었고, 유대교와 이슬람과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의 일치 여부 혹은 배타적 태도의 근원이 궁금했을 따름이다. 신의 존재 여부와 종교적 도그마는 한 인간 혹은 인류 전체의 역사를 뒤흔든다. 여전히.

극단주의 테러와 종교 전쟁을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다. 숱한 사이비 논쟁이나 다양한 분파를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때때로 그 열정과 공고한 신뢰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그러한 삶은 그렇지 않은 삶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면 카렌 암스트롱이 작은 실마리를 제공한다. 첨부된 지도를 따라가며 신의 기원과 유일신의 탄생 과정을 시작으로 기독교, 이슬람의 신 뿐만 아니라 철학자, 신비주의자, 종교개혁가의 신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카렌 암스트롱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하나의 관점으로 신을 해석하거나 분석하는 대신 객관적 사실과 역사적 과정을 살피는 데 그쳐 객관적 거리두기에 성공한 듯하다.

아주 먼 옛날, 수천 년 전의 기록을 검토하고 예수와 무함마드를 대하는 태도 삼위일체의 해석 문제 등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의 뿌리와 차이를 확인하는 동안 인류가 걸어온 종교의 역사를 정리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 인간 이성은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합리주의 탄생의 바탕을 이룬다.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합리적 근거가 불가능한 신이 지배하는 세계에 균열이 발생하는 건 자연스러운 문명발달의 과정이다. 신이 설 자리가 좁아지기도 전 성급하게 신의 죽음을 외친 사람들이 많다. 시대를 앞선 자들의 삶은 괴로웠고 용기 있는 발언은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실존적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의 발언 내용이나 철학적 사유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종교가 사라지거나 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 이슬람 모두 유일신, 즉 우상 숭배 금지로부터 모든 갈등이 배태되었다. 아랍 민족의 문화적 전통을 부정하는 쿠란의 급진적 구절로부터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슬람은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조차 부정하는 극단적 유일성의 개념에 집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제국에서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가능했다. 종교적 배타성으로 인한 인류 역사의 고통과 눈물은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잔혹했다. 종교 전쟁과 마녀 사냥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벌어지는 편견과 갈등을 다룬 숱한 기록과 고민들은 여전히 난망한 문제다. 힌두교와 불교를 다루기는 하지만 저자는 주로 세 종교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간다. 종교와 과학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창조과학이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을 만큼 종교도 발전과 진화를 거듭한다. 나름의 설득력을 위한 노력은 종교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현실적 삶을 위한 인간의 정신적 보호 장비로 애용된다. 무엇을 믿는 어디를 바라보든 자유지만 신의 미래는 생각보다 밝아 보이지 않는다.

카렌 암스트롱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신의 미래를 신의 죽음과 인간의 해방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틸리히의 ‘신 위의 신’, 화이트헤드의 ‘위대한 동반자’ 개념을 논하지만 우리가 믿어온 신에 대한 부정이나 새로운 신을 위한 희망이 아니다. 신의 존재 유무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은 헛되다. 어느 쪽이든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과 종교에 대한 역사다.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지만 ‘태도’를 드러내지 않는다. 특정 지역과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기 위해 종교에 대한 앎은 반드시 필요하다. 타인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지만 말과 행동의 맥락과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지금, 여기의 삶이 중요하든 내세와 죽음 이후의 영생에 목숨을 걸든 아무도 그 선택을 가로막거나 방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의 사회, 정치적 기능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결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종교가 있든 없든 ‘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미래’를 고민하기 위해 피해 갈 수 없다.

인간은 공허함과 황량함을 견딜 수 없기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그 공백을 채울 것이다. 근본주의의 우상은 신을 대신할 수 없다. 미래를 위한 활기찬 새 신앙을 창조하려면 신의 역사에서 교훈과 경고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 6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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