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다리 포목점 - 오기가미 나오코 소설집
오기가미 나오코 지음, 민경욱 옮김 / 푸른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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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따뜻한 유자차와 무릎 담요가 생각나는 겨울로 가는 이 계절에 표지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들었다. 딱 이 시기에 만나 정말 다행인 책이다. 게다가 최근에 '고양이'를 정기적으로 볼 일이 생겼다.

 

이제보니 <안경>, <토일렛>을 만든 오기나미 나오코의 소설집이네. 나온 지는 꽤 되었는데 이제야 이 책을 알아 약간 억울하다.

 

모리오

 

모리오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유품인 재봉틀에 애착을 느낀다. 그는 어릴 때 보았던 궁극의 꽃무늬를 찾아 '사부로 씨'가 있는 히다리 포목점을 찾는다. 그곳에서 이상적인 무늬를 찾아 무작정 스커트를 만들게 된다.

 

나는 사온 꽃무늬 옷감을 좁은 아파트 가득 펼치고 자로 치수를 쟀다. 그것만으로 방 전체가 꽃무늬에 푹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행복했다. 재단을 끝내고 앞뒤를 맞춰 컬러풀한 시침바늘을 꽂았다. 나는 재봉틀 앞에 앉아 조금 긴장한 채 바늘을 옷감에 댔다. 그리고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바늘이 리드미컬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실이 옷감을 통과했다. 다다다다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스커트를 만들었다. 똑바로 재봉질이 되지 않으면 그때마다 실을 뜯고 다시 했다. 주의 깊고 조심스럽게, 나는 오로지 스커트를 만드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나는 어머니의 발판 재봉틀을 마주하면서 그때까지 맛보지 못했던 평안함으로 가득 찬 시간을 보냈다. 36쪽

 

모리오는 완성된 스커트가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입을 스커트를 다시 만든다. 만들었던 첫 작품을 고쳐 재봉틀 소리에 안정을 찾는 동네소녀 카트린느에게 준다. 둘이 치마를 입고 거리를 거닐기도 한다.

 

나와 소녀는 해가 저문 길을 나란히 걷고 있다. 갑자기 소녀가 내 손을 잡았다. (중략)

소중한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흙과 풀의 뜨뜻한 냄새, 조용히 우는 벌레 소리, 통통한 붉은 달, 땀이 살짝 밴 소녀의 손, 스커트 속으로 들어오는 여름밤의 바람. 나는 두근대는 가슴으로 하나하나를 느끼고 있었다. 73쪽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포목점의 '사부로 씨'가 실은 검은 고양이라는 것과 섬세한 남성 모리오가 어머니를 잃고 재봉틀을 돌려 치마를 만들어 입으며 치유받는 과정이 울림을 준다.    

 

에우와 사장

 

<에우와 사장>에서도 <모리오>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양이를 인격체로 동등하게 대한다. 우연한 계기로 이비인후과 의사 요코와 그녀의 고양이 "나카무라 사장"과 살게 된 에우는 고양이가 가족에게 할 수 없는 말을 표현할 수 있도록 이끄는 일을 맡게 된다.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게 반드시 최선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잠자코 있어도 서로를 아는 사이라는 것도 지나치게 사이가 좋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그만큼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말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을 듣는 것이 당신의 일입니다."

100쪽

 

잠을 열 시간은 자야 기운이 생기고 특별히 잘 하는 게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던 에우는 낯을 가리는 사장과도 단번에 통했고 히다리 포목점 아주머니가 소개한 가정의 고양이들과도 소통해서 고양이들의 어려움을 잘 풀어준다. 

 

"고양이에게는 반드시 경어를 사용하세요. 고양이에게 아기말을 써선 안 됩니다. 이따금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콧소리를 내며 아기를 대하듯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착각입니다. 고양이는 인간보다 훨씬 나이를 빨리 먹는 존재입니다. 모두 듬직한 성인입니다. 아기가 아닙니다. 당신은 성인에게 아기 말을 사용합니까?" 100쪽

 

사부로 씨와 암에 걸린 나카무라 사장은 동물병원에서 조우한다. 사부로씨와 포목점 아주머니는 여기에서도 여전히 품위 있다. 사장도 역시 품격 있게 투병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느닷없이 사장이 말했다.

"낮잠은 푸르구나." (중략)

 

"어째서 암 같은 거에 걸린 거야?"

사장은 귀를 긁다 말고 에우의 눈을 물그러미 봤다.

"어쩔 수 없어. 유전인걸."

"유전?"

"전 주인도 암으로 죽었어."

"그런 걸 유전이라고는 하지 않잖아?"

"유전이야. 누가 뭐라든 유전이야. 너는 몰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면, 예컨대 그 사람과 피로 이어져 있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과 종족이 다르더라도 다양한 것이 옮겨져. 전염되는 거지."

"그래서 네 암도 전염되었다."

"맞아"

사장은 이불 위에서 꾹꾹이를 시작했다. 148-149쪽

 

아...꾹꾹이라니.

정말.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사장은 죽음을 맞는다.

죽는다는 건 결국에는 꾹꾹이를 멈춘다는 뜻이다.

그렇게나 사랑스러운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된다.

 

이후 사장의 망해는 수많은 터키도라지꽃에 둘러싸인다. 요코와 에우는 무사히 장례를 치르고, 요코는 에우의 귀를 파주기로 한다. 역시 예상한 결말이고 이게 전부이다.

 

*

 

눈에 띄지 않는 소년, 소녀들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소통하며

하루하루 그들만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엄청난 상실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렸다.

 

이런 담담함과 섬세함, 배려가 보이는 소설류가 일본 가정식 장르라고나 할까.

좋기는 한데 굉장히 뭔가 이질적인 정서이다. 일본 가정식을 먹으러 가서 한 상 잘 받고는 아 뭔나 개운하지만은 않다, 그런 느낌.

 

그래서 별 하나를 빼고 나니 뭔가 또 허전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소품.

SNS 사진발도 잘 받을 책이다.

 

사족-책을 읽고 나서 고양이 장난감 이름이 캣 댄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검색해서 어떻게 만드는지도 알게 되었다. 사지 말고 딸이랑 만들어서 시댁 꼼냥이들과 놀아주어야겠다. 책을 읽고 나니 고양이들 이름을 너무 유치하게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연이',  기연 씨

이렇게 다시 이름 지어 부를까?

 

전남 방언 '기연히(기어코)' 다시 한다 이런 느낌으로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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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과거와 헤어지는 법 - 자꾸만 떠오르는
미즈모토 가즈야 지음, 최려진 옮김 / 마일스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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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나 감정 자기계발서 등을 최근에 많이 읽기 시작했다. 이 책도 제목에 이끌려 집어든 책이다.

 

이 책은 쉽게 말하자면 이불킥 많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오버싱킹' 책에서는 '맴돌이 생각'이라고 표현했는데 별것아닌 사소한 것에 자꾸 매달리게 되는 사람들에게 약간 도움이 될 수 있다.

 

살다보면 납득할 수 없는 일,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겪게 된다. 납득할 수 없는 일도 '맴돌이 생각'의 씨앗이 된다. 26쪽

 

어떤 사건을 자꾸만 반추하는 사람들은 평소 도덕성, 성실성, 책임감이 남달리 뛰어나고 자기만의 기준이 높은 경우가 많다. 나도 사소한 공중도덕을 어기거나 내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을 보면 탄식하며 저들은 왜 그럴까 오래 생각한 적이 많다. 요즘의 결론은 그냥 그들은 생각을 별로 깊게 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이다. 

 

어떤이는 명언을 남겼다. 왜 저한테 뭐라 하세요. 같이 버려요, 그냥.

 

*

나쁜 기억이 자꾸만 떠오를 때는 잠들기 전이나 단순 노동, 샤워 같은 일상활동을 해서 뇌가 한가하고 쉬고 있을 때라고 한다. 이 부분은 맞기도 하고 조금 수정되어야 할 듯하다.

 

일상의 활동이라도 잡생각 없이 하나하나 공들여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난 설거지할 때나 청소할 때도 안 좋은 기억을 반추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일 자체에 집중해야겠다.

 

조금이라도 나쁜 기억과 헤어지고 싶다면 아주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거나 새로운 가게에 가 보거나, 아니면 평소에 가지 않던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흥미로운 곳에 가 보는 것도 좋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나쁜 기억을 떠올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83쪽

 

이것도 필요하다. 거창한 게 아니라 평소 가던 길 말고 다른 길로 간다거나 평소 먹던 음료가 아닌 걸 마신다든가 하는 정도여도 충분하다. 소심한 사람이라면 마음이 번잡한 시기에 해보지도 않은 일을 벌였다가 사고를 수습하느라 애먹을 수 있다.

 

무언가에 자극을 받아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끼어들 때 주문을 외우거나 노래를 하는 것도 추천하고 있다.

 

인도 사람들의 이름은 외국 사람이 보기에는 이름 자체가 주문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영화 <세 얼간이>의 주인공 이름은 '란초다스 샤말다스 찬차드'다. 자, 여러분도 외워 보라. 자기 나름대로 억양을 넣어서 외운다.         86쪽

 

우리의 기억은 오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헤어진 연인의 향수를 맡거나 그가 좋아했던음악을 우연히 듣거나 하면 기억이 재생된다. 따라서 기억 속 이미지나 기억 속의 감각을 변환시키는 것을 추천한다.

 

잘못 사용하면 기억 조작이나 왜곡이 될 수 있지만 총천연색 기억을 흑백으로 바꾼다거나 선명한 목소리를 잡음 가운데 두거나 하는 트레이닝을 말한다.

 

사실 이게 트라우마의 영역이거나 하도 반추해서 이미 장기기억으로 남은 경우에는 바꾸기가 쉽지 않다. 아, 뭐 좋은 기억이라고 나쁜기억 반추 고시대회에 나갈 것도 아닌데 외울듯이 되새겼는지 후회가 된다.

 

잊어버리고 싶은 나쁜 기억이라도 기승전결을 갖춘 에피소드가 있는 데다가 감정을 실어 반복해서 기억하면 장기기억으로 정착된다. 하지만 한번 정착된 기억이라도 떠올리지 않기를 계속하면 언젠가 뉴런의 네트워크는 끊어지고 점점 떠오르지 않게 된다. 157-158쪽

 

뇌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우리 기억은 뇌세포인 뉴런의 네트워크를 달리는 미약한 전기 신호(임펄스)일 뿐이다. 학창시절에 본 느슨하고 빈 공간이 많았던 그림들이 떠오른다.

 

우리 뇌라는 건 날마다 모습과 형태를 바꾸는 바이오 컴퓨터이고 뇌세포는 150억 개 정도인데 매일 10만 개 정도가 죽는다. 3년에서 6년 정도면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바뀐다고 한다. 다만 몇십 년 전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은 세포가 교체되며 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특정한 기억을 떠올리더라도 기억이 강화되지 않으려면 흥미도 없고 별다른 감정도 느껴지지 않게 자꾸 훈련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손톱 압박법과 눈 사방운동 같은 것을 추천하고 있는데 왜 그것이 효능이 있는지 특별한 근거는 없다. 책 전체가 워낙 소프트해서 전문적 내용 없이 가벼운 실천만 소개하고 있다.

다만 저자가 NLP, 신경 언어 프로그래밍(Neuro-Linguistic Programming) 전문가라 이런저런 방법이 나오는가보다 하고 추측할 뿐이다. 인간도 컴퓨터같이 어떤 명령어가 들어가면 딱 그렇게 프로그래밍되면 좋겠지만 아니다. 인간은 예측불가능하다.

뇌에 관해 밝혀진 것이 일부라서 뭔가를 해서 효과가 있다면 그게 그 사람에게 들어맞았기 때문이지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그 방법이 유용한 게 아니다.

 

마지막 4장 나를 바꾸는 심리훈련 장이 좋았다.

 

지금껏 소개한 사소한 방법은 나쁜 기억이 떠오르지 않게 도와주고 증상을 없애는 데 주목한 것이다. 다시 나쁜 기억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본질적인 사고를 바꾸어야 한다. 애초 기억이 자리잡지 않게 죄책감이나 부정적 생각은 버려야 한다.

 

증상이라는 것은 번거로운 대상이지만 뜨금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고방식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곤란한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표면적인 문제해결에만 얽매이지 말고 근본부터 자신의 사고방식과 신념, 가치관 그리고 자아상을 바꾸어 보자. 187쪽

 

아래 부분 읽다가 그냥 해방감에 크게 웃었다. 내가 수면 패턴 찾는다고 전전긍긍하던 게 떠오르고 뭐든 바른 방법으로 청소나 운동 그런 걸로 잡념을 없애려 하면서 스트레스 받던 게 생각나서.

 

규칙적인 생활은 좋지만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계속 자기 부정을 하고 있거나 실패했던 일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을 질책하고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면 그 사람은 본질적으로 바뀔 수 없다.

(중략)

반면 별달리 운동도 하지 않고 생활리듬도 엉망이며 식사도 대충 편의점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으로 때우고 아침햇살을 보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발고 즐겁게 보내는 사람도 세상에는 있을 것이다. 178-179쪽

 

마지막으로 저자는 완벽한 인생은 없고 현재만이 있으며

지금, 조금 앞만 보며 나아가라, 고 조언한다.

 

책을 읽고 뇌과학, 명상, NLP에 좀더 관심이 생겼다.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데 유사과학 같기도 하고 역사도 짧다.

명상이나 상담 루트를 통해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접근한다고 하니 신중히 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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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 10인의 작가가 말하는 그림책의 힘
최혜진 지음, 신창용 사진 / 은행나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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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년기를 세 단어로 요약한다면 나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프랑스, 벨기에를 무대로 활동하는 그림책 작가 열 명을 저자가 직접 방문하여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좋은 질문을 해야 가치 있는 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상상력, 창의력, 작가의 유년기, 부모와의 관계 등을 통해 창작활동과 삶에 대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서구의 그림책을 보고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강할 것이라 짐작만 하는데 그림책 저자들의 유년기가 마냥 행복하고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연배 있는 분은 우리나라 60대같이 전쟁을 겪기도 하고 냉정한 엄마 슬하에서 불우하게 자란 분도 있다. 희망적이고 고무적인 건 유년기나 학창시절이 인생과 창작에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불완전하며 그 불완전을 딛고 시도해보는 데서 예술, 창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터뷰 면면을 살펴보자.

 

 

‘관찰하는 시선’ 조엘 졸리베

 

 

관찰력을 기르려면 '좋다', '예쁘다' 하는 식의 첫인상에 머물러서는 안 돼요.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어디에서 온 이미지인가', '누가 만든 것인가' 주체적으로 정보를 소화하고 판단하면서 보려고 하는 것이 관찰력과 시각적 문해력을 기르는 첫걸음이에요. 26쪽

 

관찰력은 보는 대상에 감정이입을 하거나 감탄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감탄하는 마음이 관찰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관찰이라는 행위 안에는 사랑의 성분이 분명 들어 있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째 카페나 지하철에서 관찰 크로키를 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못생겼다고 치부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면 전 그 사람만이 가진 선과 형태감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요. 그림 그리는 사람들 특징 같기도 한데 사실 전 모든 존재는 아름답다고 믿습니다.

27쪽

 

 

관찰력을 기른다고 자연백과를 들이거나 무리하게 나들이를 다닐 필요 없이 일상에서 만나는 이미지를 진지하게 살펴보면 되는 거다. 아들 어릴 때 강원도 국도변에서 하루종일 여러 차들과 화물트럭을 오가는 걸 지켜보던 때가 생각이 난다. 차바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던 아들의 눈망울이 떠오른다.

 

 

‘상상을 만드는 질문’ 키티 크라우더

 

키티 크라우더는 선천적 난청을 통해 사람들의 말과 표정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 너머의 감정을 자주 상상했다. 저 가면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키티 크라우더는 요즘 학생들이 몸을 쓰는 수업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글을 쓸 때 기억을 관장하는 뇌가 자극을 받는 편인데 손글씨도 잘 쓰지 않는 실정이다.

 

키티 크라우더가 좋은엄마 상을 제시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30년 후에 두 아이가 저를 좋은 엄마였다고 회상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엄마 이전에 자신만의 삶을 가진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요. 아무리 음식을 잘하고 뒷바라지를 잘 한다고 해도 그 안에서 엄마의 열정과 영혼이 안 느껴진다면 아이는 껍데기 엄마만 만나는 겁니다. 뭔가에 열정을 지닌 살아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표를 모으거나 봉사활동을 다니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그 대상은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엄마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요.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은 나 자신의 행복을 디자인하는 과정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61쪽

 

 

 

‘공감의 쓸모’ 올리비에 탈레크

 

 

부모님이 가족과 친구, 이웃을 섬세하게 돌보는 타입이어서 어느 정도 보고 배운 것도 있겠지만 관찰로도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어릴 때 동네 친구들 관찰하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81쪽

 

 

탈레크는 자의식 강한 예술가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다. 혼자 작업실에 있다 보면 과장된 자의식이 생기기 마련이다. 밖에 나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지 상상해보는 게 공감 능력의 본질이라고 한다.

 

‘치유하는 상상’ 클로드 퐁티

 

 

클로드 퐁티는 부모님의 불화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유년기를 어렵고, 슬펐고, 혼자라는 세 단어로 정리할 정도였다. 작가는 딸 아델에게 선물하기 위해 그림책을 만들어 지금도 꾸준히 작업하고 있다. 아델을 키울 때 완벽한 부모는 없다는 것과 아이는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세웠다고 한다.

 

   

“시도해보고, 감탄하고, 수정하고, 배우고 다시 해보면서 변화하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거짓말이에요. 그 말 좀 믿지 마세요.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산다는 건 예측 불가능한 난관을 통과하는 과정이고, 우리는 언제든 그 과정에서 배우고 수정하고 진화할 수 있습니다.” 103쪽

 

 

아이는 조부모, 부모의 양육방식과 세계관에 영향을 받지만 인간은 그것에 절대적으로 지배될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

 

 

‘작은 용기’ 세르주 블로크

 

알자스 시골뜨기, 행복한, 뛰어놀다를 유년의 키워드로 택한 작가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최고의 자산으로 이것을 꼽는다.

 

 

매일 정육점으로 출근하는 아버지를 보며 규칙적으로 일터로 나가는 것의 의미와 무게감을 배운 것요.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기복 없이, 대단한 기대감이나 불안감 없이, 어제 노력했던 일을 오늘 또 해보는 태도. 그건 예술가에게도 꼭 필요한 태도거든요. 사실 창작 활동에서 ‘반복’은 피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마음에 드는 선 하나가 나올 때가지 똑같은 짓을 계속해야 하는데 그걸 지겨워하거나 진도가 안 나간다고 좌절하면 성장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140-141쪽

 

 

똑똑하고 가진 게 많은 부모가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게 아니라 묵묵하게 자기 일을 불평 없이 해나가는 평범한 부모가 자식의 삶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작가의 부모님은 작가의 불안정한 작업을 묵묵히 바라봐주었다. 세상의 속도대로 살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살아본 사람은 좀더 용기를 낼 수 있다. 작가는 창의성이 뭔가를 해보는 용기, 잘 안된다 하더라도 시도해보는 용기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학창시절에 쉬는 시간에 놀 때 큰 결심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니듯이 그냥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결점에서 태어난 창의성’ 벵자맹 쇼

 

벵자맹 쇼는 참고 자료를 전혀 보지 않고 생각한 것을 그리는 작가이다. 그의 성장기는 완벽주의자로 살던 시기와 결점을 받아들이고 결점과 함께 일하는 지금으로 나뉜다고 한다. 부모님은 시골 농사꾼 장남이 불확실한 예술을 한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으신 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말수가 적었지만 항상 아들을 믿고 있다는 걸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 역시 아이들이 보호가 필요할 때 나서고 대개는 믿고 기다리려고 한다.

 

그의 스케치 노트는 학창시절 깜지같이 빽빽하게 선과 형태들이 채워져 있다. 마음에 드는 선을 찾기까지 시도하고 또 시도할 뿐이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나타나는 선은 없으니.

 

‘깊은 심심함’ 에르베 튈레

 

스마트폰, 상업적 놀이공간으로 가득한 요즘을 사는 아이들은 심심할 겨를이 없는데 심심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은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했다. 저자가 창의력을 기르려면 더 무얼 해야 하냐고 묻는데 튈레는 오히려 뭔가를 하지 말라고 한다. 창작하는 데에는 “결핍과 심심함, 불확실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다르게 보기, 오래 보기’ 안 에르보

 

아이들 어릴 때 많이 읽었던 안 에르보라 너무 반가웠다. 특히 이 인터뷰가 좋았다. 책에 커피포트가 자주 등장하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전 자기만의 몸가짐을 가진 물건을 좋아합니다. 의자나 커피포트가 그래요. 220쪽

 

딱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여기에 텀블러나 책도 더해서.

 

“저는 책에 질문을 많이 넣습니다. 하지만 답은 절대 적지 않습니다. 인생의 본질이 그래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정답은 아무도 모른 채 나아갑니다. 우리를 발전하게 만드는 건 인생의 그 모호함입니다.”

 

안 에르보는 창의력이란 자신만의 답을 찾는 과정의 불편과 막막함을 견디는 데서 시작한다고 본다.

육아철학마저 신선했다. 아이를 내 삶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놓으려 한다는 것. 아이 중심으로 가족의 삶이 짜이면 아이가 막강한 무게를 느끼게 되고 겁이 많아져 결국 뭐든 제대로 시도할 수 없게 된다는 걸 한국의 부모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아이를 삶의 주변에 놓는다는 건 아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아이의 삶을 분리하고 자신의 삶에 더 충실한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의 나. 명심하고 명심해야 할 말이다.

 

‘시간 사용법’ 이치카와 사토미

 

이치카와 사토미는 일본에서 정규 예술교육을 받지 않고 프랑스로 건너와 보모를 하며 그림책을 배우고 작품을 내놓고 있다. 아프리카와 개발도상국을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스케치하며 여행하고 있다. 시간을 들여서 할 일이 세상에 많은데 그중 어느것에 시간을 더 많이 들일지 자신이 정하는 게 중요하다. 좋아하는 일을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하라는 충고가 와닿는다. 전부터 난 뭐든 빨리 많이만 하려고 했다. 요즘 책읽기도 그런 편이다. 몇 권 안 되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자주 공들여 읽어야겠다.

 

‘자기 믿음’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유년기를 즐거움, 여행자, 관찰자로 설명한 작가는 완벽주의를 가진 아버지로부터 끈기와 투지를 배웠다.

 

“행복에 대해 말하는 창작물을 짓고 싶다면 우선 자신이 행복했던 느낌을 떠올려 그걸 전달해야겠죠. 그런 의미에서 창의력은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창의성이 최초로 태어나는 순간은 우리가 보고 느끼고 경험할 때입니다. 그 느낌과 생각, 충동, 자기 안의 목소리를 믿고 그리로 자신을 던지는 것. 저에겐 그게 창의성입니다. 자기 믿음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불가능해요.

303쪽

 

인터뷰 끝까지 하나하나 버릴 장이 없는 책이었다.

 

창의력이나 상상력이라고 하면 뭔가 어떤 특별한 환경에서 길러진다고 믿는다. 특히 한국의 획일적인 교육환경이며 문화가 어떻고 비판하며 한국은 이래서 안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인터뷰를 읽다보니 서구 작가들이라고 해서 크게 자유롭고 풍부한 환경에서 자란 것만은 아니다. 몇몇 작가는 부모가 믿고 지원해주었고 몇몇은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면서도 예술과 내면의 힘으로 극복했다.

 

유년기나 부모가 어떻든 간에 작가들의 공통적 특질은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버틸 줄 알고 매일매일 꾸준히 작업을 하며 불확실한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아이를 키운다고는 하지만 부모도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용기를 주고 믿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나를 믿고 내 삶에 여유를 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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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어릴 때 작가님 작품을 읽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쓰실지 잘 몰랐다. 난 응팔의 성동일인 것이다. 촉이 엉망이다. 풋.

 

이번 작품집을 읽고 여러 작가들 이미지가 겹치기도 했지만, 당대의 현실에 밀착한 작품을 쓰려고 하신듯해서 흥미롭게 보았다. 기차에서 단번에 읽었다. 간간이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나를 스쳐갔던, 내가 지나왔던 어떤 시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앞으로 내게 펼쳐질 삶도 그려지는 듯했다.     (다음 단락부터 스포 주의)

 

<오직 두 사람>

 "오직 두 사람만이 느꼈을 어둠"에 대해 담담히 서술한다. 대학교수이자 딸바보인 아빠는 부인이나 다른 가족들을 제쳐두고 생애 내내 현주에게 집착하고 그녀의 삶을 구속한다. 아빠가 원하는 전공을 택하고 아빠와 주말마다 영화를 보거나 데이트를 하고 남자친구를 만나도 대개 피상적인 만남에 그친다. '아빠 딸'로 살았던 현주와 그런 둘의 기이한 결합에서 한참 벗어나 각자 살아가는 다른 가족들.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은 결코 소통할 수 없다.

 

'딸바보'라는 용어는 어느 아나운서 공개채용 프로그램에서 지원자가 아빠한테 보낸 편지에서 처음 들었다. 그때도 오싹했고 지금도 딸바보라는 말은 싫다. 바보같은 맹목적인 몰두의 끝은 언제나 파멸이다. 다행히 현주는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어 허전하고 두렵긴 하지만 잘 헤쳐나가리라 다짐하며 편지의 끝을 맺는다.   

 

<아이를 찾습니다>

오래 전 마트에서 실수, 부주의?로 아이를 잃은 부부의 황폐한 삶이 펼쳐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부주의가 아닌 유괴로 아이를 잃었다. 그러나 친엄마로 알아온 유괴범이 사망하고 다시 그들 품으로 돌아온 친아들 성민은 자신의 뿌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이를 찾느라 가세는 기울었고 성민의 친엄마는 조현병을 얻어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불운은 겹쳐 성민이 돌아왔으나 아내는 실족사하고 성민은 크고 작은 말썽을 일으킨 끝에 다른 핏덩이를 남기고 자취를 감춘다. 

 

그토록 바라왔던 일이 일아난다면 인생이 뭔가 달라질 것 같았으나 오히려 더 나락으로만 떨어지는 인생의 아이러니.

 

성민이와 사귀었던 여자애가 성민이가 왜 그랬는지(여자애를 임신시키고 돈을 훔쳐 달아나버렸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자

성민이를 비난하고 사과하는 대신 윤석은 "인간이란 원래 이해가 안 되는 족속"이라고 하며 돈을 건넨다.

 

그렇다. 인간은 참으로 미묘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존재다. 인간이라면 남의 아이를 그렇게 데려가서도 안 된다. 또 인간이라면 친부모를 원망하지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유괴범인 친엄마를 그리워하고 계속 엇나간다.

 

인간이, 참. 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듯하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 하는 의미도 있고 인간이니 저럴 수도 있지  하는 체념도 든다.

 

<인생의 원점>

의료기기 업체 사원인 서진은 어릴 때 친했던 여자아이 인아를 만나 불륜관계에 빠진다. 어린 시절 동무를 인생의 원점이라 과도하게 포장하고 만남을 지속한다. 그러나 서진은 인아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사내에게 습격을 당하고 인아를 포기한다. 이후 지속적으로 폭력 남편에게 시달리다 남편을 골프채로 후려친 인아는 서진을 불러 처리하려 한다. 피를 흘리던 남편은 살아 있었고 서진은 119를 부르라고 하며 도와주기를 거부한다. 결국 인아는 남편이 퇴원하고 나자 투신한다. 다친 남편을 인아의 또다른 내연남이 습격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보고 서진은 인생의 원점 따위가 무엇이 중하냐며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하다 되뇌인다.

 

반전이라면 처음에 서진을 습격한 괴한이 인아의 남편이 아닌 또다른 내연남이었다는 것!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고 세 남자 중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인아였다.

 

"행복감의 토로를 후회처럼 말하는 능력이 인아에게는 있었다. 그럴 때 그녀의 얼굴을 보면 과분한 행운을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어서 서진은 늘 헷갈리곤 했다. (중략) 관계에 대한 불안이 심한 서진으로서는 그녀의 후회하는 듯한 말투와 행복한 표정 사이의 불일치가 더 달콤했다."   88쪽

 

지극히 통속적인 관계에 대한 묘사와 통찰이 돋보인다. 결국 생의 중요한 시기마다 이런 관계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고 또다른 혼돈으로 이끌 뿐. 사랑으로 누가 누굴 구원한다고, 삶이 이렇게나 질긴데. 참혹하게 당한 사내 앞에서 자신의 행운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서진을 보고 인간이, 참. 하게 된다.

 

<옥수수와 나>

문학상을 받았던 작품. 창작의 고통을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동원해 그렸지만 나의 경험세계와 달라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남성작가의 로망인 것인가.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상상이라면.

 

<슈트>

폴 오스터 소설 같은 설정. 오래 전에 헤어진 아버지가 외국에서 여러 여인을 전전하며 살다가 유품으로 명품 슈트를 남긴다면? 그런데 정말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다면?

 

우리는 모두 어떤 옷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사랑은 때로 매우 굳건하다. 190쪽

 

생면부지의 아버지의 유골은 어쩐지 부담스럽지만 확고한 브랜드의 몸에 꼭 맞는 슈트는 탐이 난다. 인간이, 참.

 

<최은지와 박인수>

'박인수'가 맡긴 회사를 인수한 출판사 사장이 '최은지'라는 여직원 때문에 곤경에 빠진다. 암에 걸린 박인수의 부탁으로 그의 옛사랑도 찾으러 다니고 회사마저 맡았지만 일은 꼬여만 간다.

 

"살아오는 동안 내 영혼을 노렸던 인간이 너무나 많았다는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이 갑자기 주먹을 뻗었다. 병자답지 않은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피했다.

"그렇지. 주먹이 날아오면 이렇게 잘도 피하면서 왜 영혼을 노리는 인간들에게는 멍하니 당했냐는 거야."  199쪽   

 

이 말을 해야 할 사람은 출판사 사장인듯하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는 바가 결국 진실이 되어간다. '영혼'에 타격을 입고 나서야 사장은 현실로 돌아와 그들이 믿는대로의 사람이 되어간다.  

 

<신의 장난>

언젠가 영화 <큐브>를 보고 한동안 흰 방에 들어서기 무서웠던 적이 있다. 앞뒤 꽉 막힌 큐브에 갇힌 듯한 요즘 세대들의 암울한 현실을 풍자했다. 그들이 인생의 중요한 사건, 즉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고 하지만 사실 기회를 박탈당하는 세대 아닌가!   

 

“정은씨, 난 언제나 현재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여기만 지나가자. 그럼 나아질 거야. 그런데 늘 더 나빠졌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나이가 어릴수록 더 행복했어요. 그럼 지금 이 순간도 최악이 아닐 수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이 그래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에서는 가장 젊고, 제일 괜찮은 순간일 수 있다는 건데…… 우리 모두 여기서 늙어가다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처음 들어왔던 때가 그래도 좋았어. 그땐 젊었고, 희망도 있었다.” 257쪽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도 언제나 힘들었던 예전의 시기를 그리워하며 여기만 지나가자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를 되뇌인다. 그러나 언제나 지나가버린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것들이 그들 앞을 기다리고 있다.

 

*

 

'작가의 말'을 따라가면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라고 했다. 나만 해도 겨우 마흔을 넘겼을 뿐인데 남에게 편하게 들려주지 못할 이야기가 늘어만 간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특별히 불운이 겹치고 겹친 것도 아닌데.

 

여러 단편을 가만히 따라가보면 개운하지 않다. 막막하고 답답하다. 명쾌하게 선악이나 니편내편이 나뉘는 것도 아니다. 확실한 것을 찾아 발버둥치다 모호한 채로 그렇게 흐지부지 사라져간다.

그런 게 본래 삶이고 인간이라 생각하니 씁쓸하기만 하다. 인간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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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어른일 리 없어 - 할머니 선생님이 알려 주는 어른들의 거짓말
시미즈 마사코 지음, 이주희 옮김 / 티티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이런 게 어른일 리 없다고!

 

제목부터 도발적인 분홍 표지의 책에 부제는 할머니 선생님이 알려 주는 어른들의 거짓말이라니. 큰 기대 없이 들었는데 중간중간 정신 없이 서표를 붙이며 읽어나갔다. 독박육아니 똑게육아니 하는 육아서 대신에 부모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무엇보다 ‘나’를 길러줄 책이다.

 

01 귀여운 할머니 따위 되고 싶지 않아요

 

 

어른들에게 A 같은 아이는 얼마나 편한 존재일까요. 그런 아이들과 마주하는 어른의 지위는 언제나 안정되고 위협을 느낄 일이 없습니다. 질문 세례를 받는 일도 없고 스스로를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어쩌면 권력자들은 자신의 칼과 지배력에 어떠한 해도 가하지 않는 것을 ‘귀엽다’고 하는 게 아닐까요. 18쪽

 

 

일본 전설에 나오는 모모타로를 그림 A는 귀여운 그림체로, B는 아기장수 스타일로 투박하게 표현한 것을 보고 학생들은 늘 귀여운 A쪽을 선호한다. 그런데 저자가 A와 B 중 누가 먼저 엄마 무릎에서 벗어나려 할까, 라는 질문을 하면 학생들은 그제야 ‘귀엽다’라는 말의 맹점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귀여운 아이, 귀여운 소녀, 귀여운 여자, 귀여운 아내가 되어 자립할 기회를 쉽게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02 화를 내야만 할 때가 있어요

 

 

화의 밑바닥에는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 짜증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대신 희망 없는 인내가 있고, 포기가 있고, 무력감이 양쪽을 덮칩니다. 비굴함과 증오, 모멸과 오만이 우리를 갉아먹어 버립니다. 24쪽

 

 

‘화’는 교육현장에서는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다루어지고 보육현장에서는 교사의 중재로 ‘미안해’, ‘괜찮아’가 남발되고 있다. 자신이 무시당해도, 맞아도 상대에게 화를 드러내기보다 교사에게 이르고 중재받는다. 일상에서 건강하게 화를 낼 기회를 잃어버린 아이들은 커서 부당한 압력을 받아도 화를 낼 줄 모르고 짜증을 내거나 애먼 상대에게 분풀이를 한다. 저자는 엄마에게 등굣길에 화내는 여중생을 보고 ‘화내라, 화내라’ 몰래 응원할 정도이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전혀 납득하지 못하면서 감정의 앙금을 가득 안은 채 ‘미안해’. ‘괜찮아’ 이후 포옹을 강요당한다. 오카 켄 교수는 “싸움이야말로 상대의 생각을 배울” 기회라고 한다. 우리는 어쩌면 아이들이 감정을 처리할 기회를 쉽게 박탈하고 있는 건 아닐까.

 

03 혼자 조용히 있는 게 뭐가 나빠요?

 

요즘에는 말수가 적은 아이, 혼자 있는 아이는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고 뭔가 다가서서 도움을 주어야 할 아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일상을 떠들썩한 이벤트와 배움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도무지 아이가 혼자 있을 틈을 주지 않는다.

 

서두에서 저자는 “인사를 하지 않게 된 소녀가 있으니 성장이란 이렇게 완성되는 것”이라는 단가를 소개했다. 인사를 하지 않는(못하는) 아이를 이렇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어른이 있어 감동했다. 어른을 만나면 곧잘 쾌활하게 인사하던 꼬마도 사춘기가 되어 자의식 과잉으로 힘겨울 때도 있고 혼자가 편할 때가 많다. “적어도 등하교 시간.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는 시간만큼은 자기 자신으로 있어주면” 좋겠다고 한다. 가만 보면 인사에 목숨 거는 직군 중 하나가 교사 집단인데 참 별난 선생님이셨다. 무리해서 친하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다가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04 자신감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자는 흔히 ‘자신감을 가져!’라고 할 때의 그 자신감의 정체가 궁금해 여러 사전까지 뒤져보다 결국 자신감의 근원은 자기 평가라는 점을 깨닫는다.

 

타인과 비교했을 때 조금이라도 뭔가가 낫다고 보이면 금세 자기 평가는 높아지고,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면 자신감은 순식간에 사그러지고 자기 평가는 낮아집니다. 그런 자신감 따위 가질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 것에 휘둘리다니 바보 같지 않나요? 69쪽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좋아해주라고 말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아, 할 수 없지. 이런 나라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이 정도여도 충분하다. 그건 체념과는 다른 있는 그대로의 나로 충실히 살아가는 걸 말한다.

 

05 어둠과 슬픔이 있는 삶의 한가운데로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빛이 있고, 슬픔이 있어야만 기쁨이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둠도 슬픔도 처음부터 있어서는 안 되는 것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 취급합니다. 이게 얼마나 큰 불행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결심을 하고 한 발짝 내딛었을 때의 상쾌한 긴장과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요. 74쪽

 

 

학생이 문제를 일으키면 “원래는 밝은 아이라고” 편드는 척 말을 한다. 마치 어두운 아이라면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는 듯이. 잠깐 봤지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은 언제나 밝아 보였던 아이들 쪽이었다. 정말 무서운 아이들은 힘든 일을 겪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감정을 덮고 애써 밝은 척 하는 아이들이었다. 저자는 CM송을 쓸 때는 반음을 쓰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다. 윤형주의 CM같이 조그만 그림자나 망설임도 없는 밝음. 피아노 검은 건반을 전혀 쓰지 않는 상태. 그것이 올바른 심리상태일까?

 

06 규칙을 잘 지키는 어른이 어떤 세상을 만들었는지 보세요.

 

 

마음이 풍요롭다는 것은 단지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만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에요 (중략) 마음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은 천국을 보는 것과 동시에 지옥을 보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96쪽

 

07 정답을 말하기보다 좋은 질문을 하세요

 

 

질문은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만 하는 게 아닙니다. 해답에는 결국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질문을 통해 세상과 연결됩니다. 112쪽

 

 

저자는 지식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세상과 타인에 대한 관심을 확장하는 질문이 좋은 질문이라고 말한다.

 

 

08 그렇게까지 드러내도 괜찮아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이나 느낌까지 없을 리는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자주 겉으로 활발하게 표현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내면의 활동을 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126쪽

 

 

문학 시간에 저자는 학생들에게 감동을 받은 부분을 이야기하라고 재촉하곤 했는데 어느 날 별로 친분이 없는 학생이 일부러 나오더니 지금은 말하지 않겠지만 몇 년이 지나 이야기하러 가겠노라고 한다. 학생이 스스로 감동을 받은 바가 있고 내면이 변한다면 꼭 교사에게 확인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외눈박이 고양이>의 네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지만, 겉으로 조용한 네드의 내면은 사실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저자는 또 카운슬링에서 범하는 잘못을 지적한다. 이른바 ‘털어놓기 놀이’와 같이 자신의 내면을 함부로 유출하고 속절없이 함부로 자신을 남에게 내맡기고 있다는 것이다. ‘클라이언트’라는 말 자체가 예속자, 측근을 뜻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내면을 이야기하는 게 어딘지 지배당하는 느낌이 들어 상담이 두렵다고 한다.

 

09 그래 봐야 상처받는 건 너뿐이라는 거짓말

 

저자는 학생들에게 건방져보라든가 기지개를 펴라고 주문하는데 건방진 건 좋지만 시건방지게 되는 건 곤란하다고 한다. 말장난 같지만 오묘하다. 기죽지 말고 어른들에게 자기 의견을 솔직히 말해도 되지만 오만해지지 말라는 뜻이다.

 

 

"인생에서 진짜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말고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는 작은 무엇인가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 로즈마리 서트클리프 (추억의 푸른 언덕 저자)

 

 

10 누구나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요

 

저자는 가족이 위안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있을 때 어떤 가정에서든 그런 일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가정이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다 해서 아이를 불쌍하게 보지 말라고 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약하지 않다! (물론 영혼을 파괴하는 학대가정의 경우를 얘기하는 건 아니다) 다만, 아무리 돌아가기 힘든 가정이어도 어느 한 순간이라도 따뜻함을 느꼈다면 희망은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라도 따뜻함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가정이라면 아동의 성장에 악영향을 끼칠 뿐이다.

 

 

11 당신의 세상은 그렇게 작지 않아요

 

작가는 존경하는 사람이 부모나 선생님인 학생은 좁은 세계에 갇힌 것이라고 한다. 아들이 청년기가 되어 키워 주셔서 감사하다느니 하면 자신은 어리석은 존재니 바짝 기쁘긴 하겠지만 아들이 한심하게 여겨질 거라고 한다. 얼마나 쿨한 엄마인가! 또 자신을 편하게 만드는 사람만 만나지 말고 불편하게 하는 존재들과 부딪혀야 성장한다고 조언한다.

 

12 심심할 때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

 

03번과도 통하는 이야기이다.

 

선생님이나 부모는 학생들을 혼자 내버려 두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과제를 부여한다. 그러나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고 그런 시간을 스스로 만드는 훈련 없이 어른이 되어서 요즘 아이들이 제대로 못 사는 건 아닐까?

 

또 요즘은 일상을 하찮게 생각하고,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정체와 동의어로 취급한다. 학교나 가정에서도 늘 특별한 체험을 준비하고 아이의 일상을 1년 내내 축제처럼 기획하려고 한다. 여기서 뜨끔했다. 내가 어려서 제한된 경험을 해서 용기가 없고 제한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 애들 어릴 때 여행도 많이 다니고 이런저런 기획된 행사에 많이 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충분히 혼자 지낼 법한 초4, 초2인데도 주말이면 심심해, 오늘은 어디 안 가? 를 달고 산다.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배려 경쟁에서 빠져나오기로 했다는 말도 인상 깊다. 예를 들어 손님이 오셨는데 내가 미처 차를 준비하지 못했을 때, 나보다 먼저 하는 사람이 칭찬을 받는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멋진 사람들의 조용한 배려를 지켜보기로 한다고. 맞다, 정말.

 

이 멋진 할머니 선생님은 내가 먼저 스스로 바로 서야 비로소 타인과 연결될 수 있다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또한 스스로 서려면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K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데 반복되는 이야기가 많기는 하지만 교육을 할 때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를 던져준다. 특히 귀여움 받으려 하지 말라는 말은 나에게 하는 이야기. 아이들에게조차 귀여운 엄마가 되려고 한 적이 있다. 깊이 반성...

 

*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 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하고......무언가를 많이 해야 행복해진다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사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그랬듯이 10대는 허공의 시절, 비우고 또 비워야 행복해진다. 꽉 차서 넘치는 잔이 되기보다 크게 비어 있어 어느 것이든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갈 수 있는 큰그릇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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