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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깍지 사랑 - 추둘란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수필집
추둘란 지음 / 소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이름 : 콩깍지 사랑
- 글쓴이 : 추둘란
- 펴낸곳 : 소나무(2003.12.13.)
- 책값 : 8000원


 ‘신년하례회’가 무엇을 하는 자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이 모인 ‘신년하례회’ 자리에 온 국무총리와 총리 경호원들이 일으킨 자그마한(어찌 보면 큰) 잘잘못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활동가로 일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올 한 해에도 힘내어 잘 일해 보자는 뜻으로 마련한 자리이니, 이 자리는 다름아닌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이, 또 시민사회단체에 도움을 주는 우리들 보통사람이 주인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어쩌다가 ‘초대’가 되거나 ‘손님’으로 온 정치인과 행정관료가 주인처럼 굴곤 합니다. 더욱이 이들은 ‘한 말씀’ 하는 인사도 다른 사람보다 자기들이 먼저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 자기들은 ‘일정이 바빠서’ 빨리 한 말씀한 다음 다른 자리에 가야 한다면서. 그리하여 이들 정치인과 행정관료는 남들 앞에서 자기 할 말만 실컷 한 다음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안 듣’습니다. 정치인과 행정관료가 보여주는 이런 모습들은, 그 사람들이 정치나 행정을 어떻게 하는가를 잘 알려주지 싶습니다. 사람들이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무엇이 문제라고 그렇게 힘주어 외쳐도 귀기울여 한 번이라도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잖아요. 문화정책이든 경제정책이든, 또는 자전거정책이든 교통정책이든, 보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목소리가 한 번이라도 정치와 행정에 제대로 담긴 적 있을까요. 허울뿐인 세미나를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하는 때에 후다닥 치르고 대충 밀어붙이고만 있지 않은가요.


.. 빨리, 또 크게 자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민서는 민서의 속도대로 자라나, 이 사회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민서가 장애인이라고 해서 넘치는 보호에 익숙해지지 않기를,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차별에 주눅 들지 않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선 민서 스스로 자신의 자리에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할 것입니다 ..  〈52쪽〉


 사회가 사회다운 모습으로 굴러가지 않는 이 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일이란 참 팍팍하고 고단합니다. 그런데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일 못지않게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일도 팍팍하고 고단합니다. 여자로 살아가는 일도 고단하지만 남자로 살아가는 일도 고단하며, 대학교까지 마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일도 고단하지만 가방끈 짧은 무지렁이로 살아가는 일도 고단합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누구한테나 다 다르게 있는 재주와 솜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갈리기 때문에, 이제 좀 나은 자리에 올라서면 옛일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는’ 모습 때문에, …….

 자전거로 시내를 달리노라면, 곧잘 뒤에서 빵빵거리는 자동차를 만납니다. 이때는 으레 깜짝 놀랍니다. 자동차 경적이 얼마나 큰가요. 차에 탄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누르는 경적이지만, 앞뒤 왼쪽 오른쪽 차근차근 마음쓰며 달리던 자전거꾼은 난데없는 큰소리에 심장이 벌렁벌렁합니다. 자동차가 빵빵거리는 까닭은 자전거가 길에서 거치적거리기 때문, 그러니까 ‘자동차님이 나아가는 앞길을 막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는 자동차끼리도 빵빵거립니다. 건널목 신호가 바뀌자마자 바로 부웅 하고 지나가지 않으면, 뒷차는 1초도 안 기다리고 바로 ‘빠아아∼ㅇ’ 하고 몇 초 동안이나 경적을 울립니다.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빠져나가는 앞차한테도 빵빵거리는 자동차요, 씽씽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도 자기보다 느리게 가는 앞차한테도 빵빵거리는 자동차입니다. 이들 자동차꾼은 차에서 내려 길을 걸을 때, 자기 앞에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있어도 ‘뷁!’, ‘꽥!’, ‘야!’ 하고 소리지르며 비키라고 할는지.


.. 오히려 누군가 틀린 답을 칠판에 쓸라치면, 마치 자신이 틀리기라도 한듯 위로해 줍니다. “알믄 여기 왔것슈? 모르니 배우러 왔쥬.” 겨울이라고 해서 할머니들이 마음 편히 쉬는 것은 아닙니다. 농사철엔 농사철대로 뼈빠지게 일하고, 겨울엔 도라지를 까거나 냉이를 캐 돈 사는 것이 할머니들의 일입니다. 그렇게 오십 년, 육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올겨울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그 아까운 시간을 쪼개 한 자 한 자 글자를 읽고 쓰고 있습니다 ..  〈40쪽〉


 우리 세상이 다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돈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남 앞에서 우쭐거리거나 마구 날뛰지 않으면서, 돈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쪼들리거나 고달프지 않으면서 함께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글을 아는 사람은 아는 대로 좋은 이야기를 한가득 들려주려고 애쓰고, 글을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해도 넉넉하고 즐거이 함께 어울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1등만, 첫째만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 2등이나 10등이나 꼴등도, 둘째나 넷째나 막내도 잘사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콩깍지 사랑》은 천천히 걷는 걸음을, 나즈막하게 읊는 이야기를, 한 손을 슬쩍 옆사람 한쪽 어깨에 얹고 어깨동무하며 함께 살자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4340.1.1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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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책을 즐겨 읽어 볼까요?
 [책이 있는 삶 2] 껍데기가 아닌 속살을 살펴봅시다


 저는 없는 이야기를 꾸며서 지은 책은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없는 이야기를 꾸민다고 할 때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진득하게 담아내면 눈길이 쏠립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만 엮어낸 책은 달갑지 않습니다.

 뜬구름 잡는다는 이야기가 `공상과학'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터무니없는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 앞뒤가 어긋나는 소리, 우리 삶을 비틀거나 한편으로 치우치게 보는 소리가 바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소리 또한 뜬구름 잡는 소리이며 우리 삶에 눈멀고 귀멀게 하는 이야기 또한 뜬구름 잡는 소리입니다.

 털털하게 털어놓는 글이 좋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자 흉허물없이 다가오고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가 좋습니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곱고 멋있게 쓰거나 지으려는 글, 그림, 사진은 입맛에 안 맞습니다. 언뜻 보면 무언가 남다르거나 멋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두고두고 다시 곱씹으면 영 아닙니다. 때깔만 곱다고 맛있는 사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자기를 드러낸 글은 소설이든 수필이든 희곡이든 시든 동화든 무엇이든 좋습니다. 없는 걸 있는 듯 그려낸 글은 영 와닿지 않습니다. 억지로 불러오는 웃음과 어거지로 쥐어짜는 눈물은 그야말로 지겹습니다. 그런 글을 볼 때면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 삶이 억지 웃음을 불러와야 할 만큼 재미가 없는가? 우리 삶이 어거지 울음을 쥐어짜야 할 만큼 눈물나는 아픔이 없는가?


 .. 고등학교를 갓 졸어한 겨울 오후였다. 집에서 선창가에 내려간다고 가니까 한 달 전에 팔려간 우리 집 소가 양지 쪽 말뚝에 매어져 서서 되새김을 하면서 눈을 버꿈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소 앞으로 다가가서 소를 쓰다듬어 주면서 `마침 우리 동네에 있어서 좋다'며서 중얼거리다가 선창가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가서 보니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도저히 그냥 내려갈 수가 없어서 한참 동안 머리랑 등이랑 쓰다듬어 주면서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달래 주면서 선창가로 내려갔다. 소가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 .. <우리가 뽑은 대장>(지식산업사,1985) 130쪽


 소가 흘리는 눈물을 본 사람은 얼마쯤 될까요. 소가 흘리는 눈물을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며 사는 사람은요. 우리는 우리가 즐겨 먹는 고기가 되는 고기소들 아픔과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 밥통으로 들어오는 온갖 남새며 곡식을 생각할 틈도 없습니다. 꾸역꾸역 집어넣기 바쁩니다. 돈을 잘 세서 알맞은 값으로 밥과 고기와 물을 사서 뱃속으로 집어넣습니다.

 문득 드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리 밥통으로 집어넣는 밥처럼 우리 머리와 가슴에 담고 느끼는 책도 그렇게 보지 않는가 해서요. 그 책 하나를 애틋하게 느끼면서 사는지, 그냥 돈이 있으니까 사는지, 남들에게 교양 있어 보이려고 흐름에 쫓기고 이끌려가면서 사는지...

 책을 책대로 제대로 느끼는 눈이 얕으면 새책방에 가든 헌책방에 가든 도서관에 가든 읽을 책이 없습니다. 맞춤법이 오래된 책이라고, 세로쓰기 책이라고, 낡고 떨어진 헌책이라고 줄거리가 나쁘지 않습니다. 책은 겉껍데기가 아무리 깨끗하여도 줄거리가 엉망이면 책 값어치가 없습니다. 겉껍데기는 걸레와 같다 해도 그 안에 담은 줄거리가 아름답고 알차면 그 책은 아름답고 알찬 값어치를 갖고 대접을 받습니다.

 사람은 어떠할까요. 옷차림새가 말쑥하고 돈이 많아야 참 사람일까요? 말은 번듯번듯 잘하고 또박또박 말을 잘하거나 듣기 좋은 말을 예의바르게 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일까요?

 책을 보는 눈, 사람을 보는 눈, 뭇 목숨을 보는 눈은 다르지 않습니다. 한 흐름입니다. 함께 흘러가는 느낌입니다. 사람을 아끼는 눈과 마음으로 뭇 목숨을 아끼고 보살필 수 있습니다. 뭇 목숨을 아끼고 보살피는 눈과 마음으로 애틋하며 아름다운 책을 골라낼 수 있습니다. 책을 아끼고 보살펴서 애틋하며 아름다운 책을 살필 수 있고 골라낼 수 있는 마음은 새책방이나 헌책방이나 도서관으로 가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줍니다.

 책 겉모습이나, 책을 쓴 사람 이름이나, 펴낸 곳 이름이나, 글감에서 자유로울 때 자신에게 알맞고 좋다고 느낄 만한 책이 보입니다. 겉껍데기가 아닌 즐거리를 보고자 책을 삽니다. 겉보기가 아니라 몸에 좋고 맛이 좋은 먹을거리를 삽니다. 보기에만 좋은 아무 먹을거리나 사서 먹을 수 없듯 겉껍데기만 고운 책을 사서 맹탕인 줄거리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책방에서 사거나 빌려서 읽고 느끼는 책 하나는 우주입니다. 온 목숨입니다. 지구입니다. 삶입니다. 우리 삶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 자신이 골라서 읽는 책 열 권 가운데 빠지거나 모자란 책 하나 없습니다. 헌책방이든 새책방이든 도서관이든 어느 곳에서 만나는 책이든 마찬가지이고요.

 다만. 요새는 날이 갈수록 껍데기만 번들번들 뒤집어씌워서 눈가림과 눈속임으로 책 장사로 팔아치우는 책이 참 많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겉발림 책에 속아넘어갑니다. 씁쓸한 요즘 모습입니다. 아무 먹을거리나 사 먹을 수 없듯 아무 책이나 사 읽을 수 없게 되었거든요.

 잘못하면 거짓되고 치우치고 비틀리며 우리 삶을 눈멀게 하는 `농약에 물들 열매들'과 같은 책을 골라서 살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읽을 책이라면 `호박과 같은 책'이어야지 싶습니다. 겉보기는 못생겨도 맛은 좋고 몸에 좋은 호박 말입니다. (2003.2.21. 처음 씀 / 2004.9.9. 고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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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2

 
 누군가 저한테 “베스트셀러를 어떻게 생각하셔요?” 하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베스트셀러라, 저도 고등학교 다니던 옛날에는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책을 빠짐없이 읽으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더군요. 그때그때 조금씩 바뀌는 순위에 맞추어 책을 읽자니, 정작 제가 바라는 책, 제가 읽고 싶어하는 책은 못 읽게 되더군요. 그래서 제가 바라거나 좋아하는 책을 읽자니 베스트셀러 순위에 든 책하고 멀어지고요. 그래서 저는 다부지게 금을 그었습니다. 이러다가는 이도저도 안 되겠구나 싶어서 말입지요. 그래, 어찌했느냐? 그때,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베스트셀러라는 책’은 죄 끊었습니다. 아예 순위표도 안 보았고, 그런 책들이 잘 팔리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이런 책들 이야기를 해도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누군가 베스트셀러라는 책을 선사해 주면, 앞에서는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받았지만, 바로 그날 헌책방 한 곳 찾아가서 슬그머니 책방 아저씨 책상 위에 얹어 놓거나 그냥 선물이라면서 드리곤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지 어느덧 열대여섯 해쯤 되었군요. 그동안 베스트셀러라는 책을 느끼고 돌아보노라니, 이 책, 베스트셀러란 ‘자기 품 안 들이고 대충 읽을 책’이 아니겠느냐,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자기한테 참말로 반갑고 고맙고 즐겁고 기쁜 책은 못 보게 막는 책’이 아니겠느냐, ‘자기가 볼 책을 스스로 찾는 몸가짐을 싹뚝 꺽어 버리거나 없애 버리는 책’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4339.12.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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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님의 "1972. 8. 3. 개정 금리 안내 (상업은행)"

1997년에 아이엠에프 터진 뒤, 다시 한 번 저 금리가 나타난 적이 있읍죠. 저는 그때 여자친구한테 "돈없는 남친은 필요없다"면서 차여, 새삼 돈없이는 서러워 못살겠구나 싶어 없는 월급 탈탈 털어 적금을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금리가 24%에다가 한 해에 한 번씩 생일보너스라고 해서 웃돈을 얹어 주기까지 했습니다. 고작 다달이 10만 원 붓는 적금이었는데 말이지요. 나중에 은행권 분한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농협에서는 1000만 원 1년 거치 하면 1년 뒤에 이자를 1000만 원 주는 적금도 있었다고 합니다. 뭐, 그래 봤자, 돈있는 사람만 돈놓고 돈먹기를 할 수 있던 그때였지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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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어때서? - 65세 안나 할머니의 국토 종단기, 2009년 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황안나 지음 / 샨티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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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9 - 내 나이가 어때서?
 : 예순다섯 황안나 할머님 걷기 여행

 
- 책이름 : 내 나이가 어때서?
- 글쓴이 : 황안나
- 펴낸곳 : 샨티(2005.8.5.)
- 책값 : 10000원

 
 〈1〉 익산 사는 할머님

 
 익산에 사는 할머님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만두게 되었지만, 이오덕 선생님 원고 갈무리를 하면서 알게 된 분입니다. 이 할머님은 이제 여든에 가까운 나이인데, 일흔 넘은 나이에 글쓰기에 눈을 떠서 당신이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틈틈이 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쓰는 글이 아니라 ‘우리 말 다듬기’까지 하면서 쓰는 글입니다. 할머님 나이와 대면 반도 안 되는 젊은 사람들은 ‘우리 말 다듬기’는커녕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엉망인 글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가실지 알 수 없는 익산 할머님은 부지런히 국어사전 들여다보고, 《우리 글 바로쓰기》나 《우리 말 살려쓰기》 같은 책을 뒤적이면서 당신이 여태껏 잘못 알고 잘못 쓴 말이 없는가를 살핍니다.


.. 그곳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우리는 통일전망대를 찾았다. 2천 리 길을 걸어서 도착했던 곳. 그 먼길을 걸어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나는 내 발로 내 일기를 땅 위에 꾹꾹 눌러 쓴 거였다! ..  〈252쪽〉


 익산에 사는 그 할머님은 눈이 안 좋습니다. 늦은 나이에 ‘책읽는 재미’를 붙이셨다는데, 눈이 아파서 책을 보기 어려우니 참 슬프고 힘들다고 하소연합니다. 젊을 적에는 딸아들 뒷바라지하느라, 또 남편이 정년퇴직하고 집에서 지내는 동안 집안살림 꾸리랴 책 한 권 읽을 사이 없이 지냈다고 합니다.


.. 나는 지금까지 남에게 해 끼치지 말고 신세지는 짓은 하지 말자며 살아왔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남의 신세 안 지고 살 수가 있나? 돌아보면 모든 게 다 신세진 일뿐이다. 농부들 덕에 먹고, 옷 짓는 분들 덕에 입고, 신발 만드는 분들 덕에 이렇게 몇날 며칠을 걷고 있으니 ..  〈78쪽〉


 낮에는 조그맣게 가꾸는 밭에 나가서 밭일을 하고,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어두운 눈에 힘을 주어가며 셈틀 자판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글을 쓰신답니다. 반 해쯤 앞서는 인터넷도 배우셨는데, 아직은 인터넷편지만 보낼 줄 알고 다른 것까지는 못 배우셨다고 하더군요.


.. 사람 하나 볼 수 없는 호젓한 산길을 걷는다. 고요한 길을 걷자니 마음이 절로 경건해진다. 대자연은 그 자체로 큰 예배당이며 사찰이 되어 주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가식이 없고, 억지가 없고, 포장이 없는 자연 앞에 서니 나 역시 발가벗고 나를 마주하고 싶어진다. 지금껏 살면서 알게 모르게 저지른 잘못들, 남에게 준 상처들이 얼마나 많았으랴. 사람에게뿐 아니라 이 자연의 뭇 생명들에게는 또 어떠했을까? ..  〈166쪽〉


 익산 할머님이 못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농사지을 줄 알고, 집안일 할 줄 알고, 집안일에서도 장 담그기부터 옷짓기까지 두루 할 줄 압니다. 언뜻 보면 ‘돈되는’ 일이란 없다고 하겠지만 하나같이 ‘사람되는’ 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보듬고 돌보는 일이지 싶습니다. 남 앞에서 자기를 뽐내거나 내세우거나 드러낼 만한 자랑거리는 없지만, 당신 스스로 좋아하고 즐기고 홀가분하게 삶을 가꾸거나 꾸릴 일거리와 놀이감이 넉넉한 분이라고 느낍니다.

 
 〈2〉 온갖 세상사람들

 
 내일쯤 서울로 책방 나들이를 떠날까 합니다. 이레 동안 시골집에서 조용히 글도 쓰고 책도 읽고 혼자서 밥하고 빨래하고 이불 털고 지냈습니다. 여럿이 함께 먹는 밥도 맛있지만, 고구마 송송 썰어서 누런쌀로 지어 혼자 먹는 밥도 맛있습니다. 반찬은 배추속이나 김치나 참치. 때때로 된장 푼 국수를 삶아서 먹습니다. 이렇게 지내노라면 익산 할머님처럼 돈벌 일이란 없지만 돈쓸 일도 없습니다. 돈 나갈 구석이 있어야지요. 돈 나갈 구석이라면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 술 마시는 자리에서, 책방을 찾아가면서 책을 사면서, 사진을 찍으면서뿐. 이때 빼고는 돈쓸 일이 참 없습니다.


.. 찻길 옆으로 걷다보면 군인들을 가득 태운 차가 지나가기도 했는데, 짓궂은 군인들이 던진 건빵에 얼굴을 맞은 적도 있었다. 꽤나 아팠지만, 뭐라고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고개 숙인 채 걷기만 했다 ..  〈34쪽〉


 자전거를 타고 충주에서 서울까지 가는 길은,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습니다. 올봄부터는 거의 자전거로만 다니는데, 틈틈이 고속버스도 탑니다. 여름과 가을에는 고속버스를 한두 번 탔던가. 겨울 들어 날이 추워진 탓에, 자전거가 몇 번 고장나는 바람에 고속버스를 타기도 했지만, 고속버스를 타면 텁텁한 공기가 마뜩지 않아 힘듭니다. 외려 자전거로 서울을 오갈 때가 시원하고 좋습니다.

 다만, 자전거로 318번 시골길을 지나 38번 국도를 잠깐 탄 뒤, 17번 국도를 지나고 42번 국도로 접어들어 용인 시내를 가로지른 뒤 탄천 자전거길에서 서울로 들어서기까지 자동차와 수없이 부대껴야 합니다. 마음씨 좋은 자동차 운전수도 많지만, 마음씨 고약한 찌질이 운전수도 많습니다.


.. 절뚝이며 식당을 찾아갔는데, 혼자인 걸 보더니 두 손 홰홰 내저으며 식사가 안 된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먹고 있는데…… 내 꼴이 거지꼴이었는지 몰라도 기분이 엄청 나쁘다. 아니, 진짜 거지라도 그렇지 ..  〈48쪽〉


 그런데 찌질이 운전수만 있지 않고 찌질이 자전거꾼도 있어요. 한강 자전거길을 탈 때 더러 부대끼는데, 값비싼 자전거에 장비를 갖추고 다른 사람들을 놀리는 이들, 또는 얕보는 이들, 또는 다른 사람 위험하게 마구 내달리는 이들. 이런 찌질이 자전거꾼을 보면, 이들이 자가용을 몰 때에도 찌질이 짓을 하지 않겠느냐 싶어 안쓰럽고 불쌍합니다. 한 번 살다가 가는 이 좋은 삶을 왜 저렇게 얄궂게 보내는가 싶어서요.


..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다가 ‘사회복지’라고 쓴 팻말 앞으로 갔는데, 담당 직원인 듯한, 머리를 들까불러서 올려붙인 총각이 끝도 없이 전화를 해대고 있었다. 가만 들어 보니 업무용 전화도 아니다. 할머니라고 깔보나? 눈꼬리에 살짝 힘을 줬더니 옆자리 아가씨가 무슨 일로 오셨냔다. 손에 들고 있던 신청서와 주민등록증, 통장과 도장을 쓱 내밀었더니, 받아들면서 “할머니, 통장 사본을 가져오셔야죠.” 하며 톡 쏘는 거다. 시치미 뚝 떼고 “사본이 뭔데요?” 했더니 나를 힐끗 바라보고는 말 없이 통장을 복사해서 접수를 시켜 주었다 ..  〈73∼74쪽〉


 서울 나들이를 와 보면 모두모두 놀랍습니다. 저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기는 했지만, 서울 같은 큰도시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직도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시골놈 느낌을 지우지 못하겠습니다. 높은 아파트와 건물을 보면 ‘우와’ 하면서 고개가 젖혀지도록 올려다봅니다. ‘저 높은 아파트를 어떻게 올렸을꼬?’ 하는 말도 절로 나옵니다. 으리으리 비싼 자동차를 보면 ‘이야’ 하면서 ‘저런 비싼 차를 어떻게 찻길에 끌고 나올 수 있을까. 다치면 어쩔꼬?’ 하는 말도 쉬 튀어나옵니다. 길거리를 가득 메우며 바삐 걷는 사람들을 보면 ‘어어’ 하면서 ‘이 사람들한테 휩쓸려서 저리로 가면 안 되는데, 난 다른 데로 가야 하는데’ 하며 땀을 삐질삐질 흘립니다. 그래도 한 가지, 시골에는 없는 헌책방이 있기 때문에, 시골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반가운 책들이 곳곳 헌책방에 많이 있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숨이 막히는 매캐한 배기가스라든지, 구역질이 절로 나오는 소독냄새 짙은 수도물 세상인 서울이지만, 며칠만 잘 견디면 다시 맑은 바람과 물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꾹꾹 참고 견딥니다.


.. “아이구, 괜찮습니다. 전 강원도까지 걸어가려고 합니다.”
 두 손을 모으고 절까지 하면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에 난 할 말을 잃었다.
 “아, 제가 아주머니를 어떻게 할까 봐 그러세요?
 그는 불쾌해 하고 있었다. 자기 딴에는 선의를 베풀려고 한 건데 마치 내가 자기를 믿지 않고 의심해서 타지 않는 걸로 알았나 보다. 그랬다면 언짢을 만도 했을 거다. 나는 그저 연방 굽실대며 고맙단 말만 했다. 차는 먼지를 끼얹으며 떠났다. 차도 화난 듯이 보인다 ..  〈136∼137쪽〉


 사흘이나 나흘쯤, 때로는 닷새쯤 서울에서 나들이를 쭉 다닌 뒤 충주로 돌아갈 때면, 가방은 터질 듯이 꽉 찹니다. 짐수레를 끌고 왔다면 짐수레가 묵직해서 잘 끌리지 않을 만큼 책뭉치를 채워 싣습니다. 이리하여, 처음 자전거를 타고 서울로 올 때는 일곱 시간 안팎 걸리던 길이, 서울에서 충주로 돌아갈 때면 으레 아홉 시간은 넉넉히 걸립니다. 가다가 쉬고, 또 가다가 쉬고, 다시 가다가 쉬면서. 여름날 아침 일찍 떠나도 저녁에 해 다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닿습니다. 옷이고 가방이고 온통 땀범벅이요,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제 몸에서 나는 땀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언젠가 어느 술자리에서 제 옆에 앉게 된 어느 분은 “땀냄새 너무 나서 싫다”고 손사래를 치더군요. 그래서 저는 “화장품 냄새도 너무 싫어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 내가 먹은 건 대량 생산된 인스턴트 라면에 단무지에, 누가 먹을지 생각도 않고 만든 커피다. 그러니 그 안에 무슨 기운이 담겨 있겠는가. 배가 불러도 허전한 건 당연한 일일 게다 ..  〈179쪽〉


 올봄부터 자전거로 충주와 서울을 오갔으니,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을 한 번뿐이기는 하지만 두루 겪은 셈입니다. 그동안 죽 겪어 보기로, 시골에는 참 사람이 없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뭐, 다 아는 이야기지요? 시골에 사람이 없다는 소리는. 젊은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더러 있다면 다방에서 커피 나르는 아가씨쯤 될까나. 한창 바쁜 농사철에도 논이나 밭에서 사람 구경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없는 사람품으로 농사를 짓자니 농약을 지치도록 뿌리는 농사를 지을 테고, 이런 농사가 아니고는 지금 농사일을 버틸 수 없구나 싶습니다. 말이 좋아 유기농이지, 도시사람들 입맛 돋군다는 유기농이지, 실제로 논밭에 엎드려서 풀을 뽑고 김을 맬 농사꾼 처지를 생각해 보셔요. 요새 배추 한 포기에 얼마 하는지 아나요? 10년 앞서 배추 한 포기 값이 얼마인지 아나요? 스무 해 앞서 배추 한 포기 값이 얼마인지 아나요? 자그마치 스무 해 앞서하고 지금하고 배추값이 ‘똑ㆍ같ㆍ습ㆍ니ㆍ다’.


.. 나는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반갑고 고맙다. 한 사람이 자유로워진다면 그만큼 이 우주도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 자유로 인해 행복해지는 만큼 이 우주에도 행복의 기운이 생기는 거니까 ..  〈200쪽〉


 제가 사는 시골도 공기가 많이 나빠졌습니다. 땅값이 싸고 서울하고 퍽 가까운 편이라 그런지 온갖 공장이 다 들어섰거든요. 제가 사는 산기슭 집에서도 새로 공장터를 닦는 모습이 내다 보입니다. 아마, 충청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이지 싶어요. 경상도도 전라도도 비슷하겠지요. 아니, 전라도는 좀 덜한 듯해요. 하지만 어느 시골이라고 다르겠어요. 더구나 땅 일구어 먹고살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이 나라에서, ‘일하는 시간은 가장 길고 받는 일삯은 가장 적은’ 농사꾼이 되도록 가르치는 교사도 학교도 하나 없는 이 나라에서, 무슨 시골에 어떤 희망이 있을는지요. 희망도 없지만 나날이 공기와 물이 더러워집니다. 오늘처럼 구름 한 점 없는 깊은 밤에는 쏟아져내릴 듯 별이 보여야 하고 은하수도 보여야 하는데, 웬걸요, 별만 좀 많이 보인다뿐이지, 또 이 별도 지난해만큼 보이지도 않아요. 게다가 밤에 울던 소쩍새와 휘파람새는 이제 이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3〉 살아갈 길이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길일까요. 어떤 삶이 잘 꾸리는 삶일까요. 꼭 알맞는 답이 있을까요. 저부터 제가 잘 살고 있는지 못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제 몸이 가자는 대로 살 뿐입니다. 더럽고 나쁜 것하고는 담을 쌓으려 하고, 좋고 깨끗한 것을 찾으려 할 뿐입니다. 소중한 제 삶을 알차고 아름다운 것으로 채우거나 가꾸려고 할 뿐입니다. 먹고살자면 어느 만큼 돈이 있어야 하기에 밥벌이가 되는 일을 하기는 하지만, 돈 많이 버는 일은 안 합니다. 제 살림에는 많은 돈까지 있지 않아도 되니까요.


.. 내가 살아온 길 옆에서 본 사람들은 말한다. 어떻게 이혼하지 않고 살았느냐고. 그건 내가 남보다 참을성이 많다거나 대단해서가 아니다. 남편이 그토록 오랫동안 말못할 고생을 내게 안겨 줬지만 그가 노름을 한 것도 아니고, 술이나 여자로 재산을 탕진한 것도, 게으른 것도 아니다. 다만 하는 일마다 운이 따라주지 않은 것뿐이다 ..  〈95쪽〉


 자전거 고장이 잦기 때문에, 고장 적고 튼튼하고 잘 나가는 자전거 한 대, 아니 두 대쯤 장만하고픈 마음 굴뚝같습니다. 두 대를 번갈아 타면서 틈틈이 손질해서 오래오래 타고픈 마음 하늘같습니다. 하지만 값싼 자전거 한 대 새로 장만할 살림이 안 되고, 지금 타는 자전거를 알뜰히 손봐서 타야지 싶기도 합니다. 그래, 저는 자전거 타기를 즐기는 사람이지, 자전거 모으기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 나 역시 아직도 과거의 아픔을, 증오를 움켜쥐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나의 미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올가미가 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살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내 남은 소중한 시간들을 미움과 원망으로 허비하랴. 이만 하면 됐다 싶다. 바람 한 줄기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  〈170쪽〉


 아무튼. 자전거 타기를 즐길 때 어려운 일이 있다면, 앞서 이야기한 찌질이 운전수와 찌질이 자전거꾼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교통정책이 오로지 자동차 중심으로 되어 있는 형편, 자전거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환경이 하나도 없는 대목, 자전거가 다니는 길이 너무 울퉁불퉁하고 많이 패여 있을 뿐 아니라, 거님길엔 턱이 너무 높아서 아찔할 때가 잦기도 한 일도 걱정입니다. 이리하여 즐겁게 자전거를 타다가도 ‘에이, 썅!’ 하면서 입에서 궁시렁궁시렁 욕이 튀어나오고 이맛살을 찌푸리곤 해요. 걷는사람도 자전거꾼도 자동차모는이도, 다 함께 즐거울 길이란 없을까요. 이런 일은 마음쓸 만하지 않을까요.

 
 〈4〉 고이고 싶지 않은 마음

 
 한 자리에 고이고 싶지 않습니다. 한 곳에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제가 있는 자리가 아주 느긋하고 높으며 멋들어졌다고 할지라도. 제가 머물고 있는 곳이 돈 걱정 없고 언제나 홀가분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얼마만큼 즐길 수 있는지 부딪히고 싶습니다. 제 마음에 쏙 드는 책 하나를 골라서 두고두고 읽을 수도 있어요. 많은 분들이 성경을 품에 안고 살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마음에 쏙 드는 책을 한 권만이 아니라 백 권쯤, 아니 천 권쯤, 아니 만 권쯤, 될 수 있다면 십만 권도 좋고 백만 권도 좋습니다. 제 힘이 닿는 만큼 만나고 싶어요. 만나기 힘들다면 제 손으로 제 마음에까지 들 만한 책을 써내고 싶습니다.


.. 그렇다! 나는 많이 변했다. 평생을 삶의 짐에 눌려서 지냈다. 그러나 이제 앞으로는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다. 남들은 나더러 늦었다고 말하지만 뭐가 늦었단 말인가! 나는 지금이 좋다. 나를 얽매게 하는 게 없고, 거칠 게 없는 나이, 어딜 가서 혼자 머물러도 좋은 나이, 아무 옷이나 편하게 걸쳐도 좋은 나이, 아무도 경계하지 않는 나이, 그래서 더없이 편한 나이…… 내 나이가 나를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지! 나는 지금 내 나이가 참 좋다 ..  〈244∼245쪽〉


 사진 한 장을 찍어도 ‘오늘 찍은 사진보다 더 나은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올 한 해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보다 더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사진 여러 만 장을 찍었어도, 어느덧 10만 장 넘게 찍었는지 몰라도, 사진찍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아니, 그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손아귀에 힘이 있다면 앞으로도 사진기를 늘 꾹 움켜쥐면서 제 눈길에 살가이 다가오는 우리 삶터를 고이 담아내고 싶습니다.


.. 이제는 뭐든 사 달라면 사 줄 수 있는 영감이 되었는데, 이젠 내가 갖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뭘 입어도 어울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  〈21쪽〉


 예순다섯 나이에 남녘당을 두 다리로 가로지른 황안나 할머님이 쓴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책을 한 해하고도 석 달 만에 다 읽어냈습니다. 2005년 8월 16일에 첫 장을 넘겼고, 2006년 11월 25일에 마지막 쪽을 덮었습니다. 참 더디 읽은 셈인데, 더디 읽고 싶었습니다. 아니, 마음먹고 붙잡으면 두어 시간에도 읽어낼 수 있지만, 일부러 야금야금 읽었습니다. 야금야금 읽다가 책꽂이에 꽂아둔 채 잊기도 했습니다. 좀 묵히려고요. 묵혔다가 다시 꺼내어 읽으려고. 다 읽고 한 번 더 읽을 수도 있지만, 한꺼번에 황안나 할머님 삶을, 황안나 할머님이 그동안 어렵사리 어깨에 올려놓고 있다가 스무사흘 만에 가까스로 통일전망대에 내려놓은 짐을, 찬찬히 헤아려 보고 싶었습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책은 황 할머님이 스무사흘에 걸쳐서 땅끝마을부터 통일전망대까지 혼자서 두 다리로 걸어간 이야기를 적바림한 책입니다만, 고작 스무사흘 겪어냄을 적바림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예순다섯 해 삶을 스무사흘 동안 돌아본 이야기로 이 책 하나에 오롯이 담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나이 서른둘 어설픈 나이로는 이 책을 함부로 읽어제낄 수 없겠더군요.

 길을 걷다가 펑펑 울기도 하는 할머님 삶을 어찌 한숨에, 한달음에, 후다닥 읽어제낄 수, 읽어버릴 수 있나요. 할머님 걸음걸음 하나하나 조곤조곤 함께 따라 밟으며 차근차근 지근지근 차곡차곡 따라 읊었지요. 할머님이 웃을 때는 나도 따라 웃고, 할머님이 눈물 흘릴 때는 나도 따라 울면서. 서운한 일을 겪을 때는 저도 따라 서운하고 반가운 일을 만날 때는 저도 따라 반가우면서.

  책이란, 책을 써낸 사람 삶이 담기기 마련이니까. 책에 담긴 글을 써낸 사람 삶을 헤아린 출판사 사람 삶도 함께 담기기 마련이니까. 책펴낸 사람들 마음을 헤아려 땀흘려 일한 책마을 사람들(인쇄-제본소-지업사-코팅회사-배본사 들) 손때도 함께 묻어나기 마련이니까. 책마을 사람 모두가 바라는 마음을 고이 담은 책방 사람 손길이 마지막으로 배면서 책꽂이 한켠에 꽂히기 마련이니까. 이런 책을 그저, 내처, 빨리빨리 읽어내릴 수는 없습니다. 늘 곁에 두면서, 가방에 언제나 넣어 다니면서, 똥누러 뒷간에 가더라도, 술 한 잔 걸칠 동무를 만나는 길에도, 졸려서 잠자리에 들기 앞서도, 밥 한 그릇 뚝딱 비우는 사이에도, 한결같이 옆에 놓고 즐기는 책인걸요.

  아쉬움 한 가지. 황안나 할머님은 남녘땅 가로지르기를 해낸 뒤, 남녘땅 바닷가 훑기까지 해냈습니다. 남녘땅 바닷가를 황해, 남해, 동해에 걸쳐 죽 훑은 이야기도 책으로 묶어내마 하고 다짐하셨다는데, 아직 이 다짐을 몸으로 옮기지 않으셨더군요. 하지만 기다립니다. 예순다섯 해가 지나고서야 겨우 남녘땅 걷기를 할 수 있었는데, 예순다섯 해 삶이 비로소 책 하나로 묶여 나왔는데, 바닷가 걷기 이야기도 기다려야 만날 수 있겠지요. 아직 앙금이 가시지 않고, 채 털어내지 못한 아픔과 힘겨움을 선뜻 내려놓을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황안나 할머님 둘째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겠지요. 기다립니다. (4339.12.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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