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막간극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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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1월에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작품. 당시 오후 5시 30분에 시작해 1부 공연하고, 디너 브레이크 한 다음 다시 2부 공연, 11시에 막을 내렸단다. 실제 공연에만 다섯 시간을 훌쩍 넘긴다는 대작이다. 소설보다 읽는 속도가 빠른 희곡 읽기도 하루 가지고는 무리다. 이 책 본문이 472페이지에서 끝난다. 그러나 독자는 몰입한다. 얼마나 막장인지 한 번 빠지면 헤쳐 나올 수 없다니까. 역시 드라마는 막장으로 갈수록 재미있다. 뭐가 막장이냐고? 미리 좀 알려드리지. 주인공 니나 리즈의 방종한 프리섹스. 결혼 후 남편 가계의 정신병력, 유전으로 정신병의 내리 물림을 막기 위한 낙태, 혼외자 임신과 출산 등등. 이리하여 <이상한 막간극>은 애초부터 유진 오닐의 대표작이라는 극찬과 3류 멜로극이라는 혹평을 동시에 받았고, 특정 주state에서는 공연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는 뭐 누구나 쓸 수 있겠지만, 이만큼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극작가는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쓴 유진 오닐이 유일하다는 게 내 의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섯 시간을 넘기는 큰 작품이라 아직 시도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가까운 미래에도 초연할 거 같지 않으니 오늘은 마음대로 스포일러 신경 쓰지 않고 써보겠다. 하긴, 연극 공연은 미리 줄거리를 알고 가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이래저래 부담 없네.


  뉴잉글랜드의 작은 대학 도시에 있는 리즈 교수 댁의 서재가 1막의 무대이다. 리즈 가문은 소위 와스프 중에서도 와스프, 미국판 귀족 가문이라는 자만심에 도취된 집안이다. 그런데 이집 따님 니나 양이 겨우 시민계급인 고든 쇼와 연애를 했다. 교수께서 어떻게 하면 둘을 갈라놓을까 아무리 궁리를 해도 방법이 없어 애만 태웠다. 그러다가 교수에게는 하늘의 도움으로 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미식축구와 조정 등 대학스포츠의 별이자 학업성취도 최고 수준이었던 고든 역시 참전 신청을 했다. 전쟁을 앞둔 청춘남녀는 뜨거워지는 법. 니나와 고든은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결혼을 하려고 한다. 이때 리즈 교수는 고든을 불러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한다. 만일 고든 자네가 전쟁에 나가서 전사라도 하는 날이면 니나는 어쩌면 아이 하나 딸린 과부가 될 것이고, 자네가 재산이 없으니 정부에서 주는 쥐꼬리 만한 전사자 연금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뱅이가 될 터. 니나 정도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자네가 돌아와 자리를 잡은 후에 결혼하는 것이 정당하고도 공명정대하며 명예로운 일 아니겠느냐, 하는 거였다. 평민계급에겐 개념이 없지만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된 일부 귀족들의 명예, 공명정대,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젊은 커플은 둘 다 몸의 교환을 뜨겁게 바랐으면서도 결혼도 하지 않고, 침상에 오르지도 않은 상태로 유럽행 배에 올랐다. 고든이 무사히 귀환해 결혼을 해버렸으면 드라마가 생기지 않았을 터인데, 전투기를 몰던 고든은 적군의 기총소사를 받아 기체에 불이 붙어 좁은 조종석에 앉아 새카맣게 타 죽어버렸다. 고든의 전사는 니나에게 더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고, 고든이 무슨 이유 때문에 결혼도, 섹스도 하지 않았는지 알고 있던 니나는 아버지의 처사에 강하게 반발해 뉴욕의 군인병원 간호사로 취직해 집을 나가버린다.

  여기까지 1막이다. 근데 한 명이 빠졌다. 끝까지 별 무게감 없는 조연이지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찰스 마드슨. 이이도 귀족. 게다가 소설가이다. 예비학교에 다닐 때라니까 우리식으로 하면 고등학교 시절일 거 같은데, 열여섯 살 때 친구 따라 사창가에 가 나폴리 출신의 못생기고 뚱뚱하고 분가루와 립스틱을 처바른 나이든 창녀에게 동정을 던져버리고 침대에 엎어져 엄마 생각하면서 질질 짰던 인간이다. 찰스는 이 첫경험, 딱 하루 때문에 심각한 생식기 질병이 생겨버렸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입 밖에 내기 어려운 곤혹스러운 병이라서 거의 미신에 입각한 민간치료에 기댔다가 그만 생식불능을 넘어 성기능 불능이라는 치명적인 장애를 겪게 된 인간이다. 니나가 어렸을 때부터 예뻐하고 늘 가까이에서 관찰해 로즈 가족에게는 아주 친숙하다. 찰스 마드슨은 니나가 고든의 전사로 인해 크게 충격을 받았고 이 상흔이 니나의 전 생애를 걸쳐 크게 작용할 것이라는 점도 간파했으나, 자신이 니나의 상대일 수도 있는데, 혹은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그는 극이 끝나는 순간까지 니나에게 충실한다. 니나를 둘러싼 세 명의 남자, 죽은 고든, 남편 샘 에번스, 연인 에드먼드 대럴을 초월해 어쩌면 니나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인지도 모른다.


  뉴욕의 군인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자신을 원하는 거의 모든 환자에게 무료로 몸을 제공하는 니나는 아마도 그것이 죽은 고든을 위한 씻김굿이라고 생각했는지도. 이때 니나의 나이 스무 살이 채 안 됐다는 것도 감안하자. 사고가 극단으로 치닫는 시절이 아직 끝나지 않을 때였으니. 방종한 뉴욕 생활을 1년 하다가 아빠 로즈 교수가 죽어 다시 뉴잉글랜드 고향집으로 온 니나. 이때 죽은 고든 쇼의 대학동창 샘 에번스가 찾아온다. 대학을 졸업한지 3년이 된 스물다섯 살 총각. 니나가 오기 전까지 집을 보고 있던 마스든 씨가 관찰하기에 똑똑하지 않고 그냥 웃자란 사내 아이지만 호감가는 면이 있는 그저 보통 수준. 고든과는 달리 스포츠에 젬병이요, 공부도 그냥 그럭저럭 했던 범재 출신이다. 하도 꺼벙해서 학창시절 룸메이트이자 3년 선배였던 에드먼드 대럴이 심장 전문의로 근무하는 군인병원에 놀러갔다가 니나를 만나 알게 된 사이로, 니나가 아무한테나 치마를 걷어올린 건 몰랐다. 로즈 가에 오기 전에 벌써 니나에게 청혼해 둘은 결혼한다.

  니나는 샘과 결혼해 북부 뉴욕주에 있는 에번스 가문의 농장으로 엄마를 보러 간다. 니나는 임신 2개월차. 니나는 샘의 엄마이자 시어머니인 에이머스 에번스한테 천둥 같은 말, 에번스 가의 저주를 듣는다. 샘의 할머니는 정신병원에서 죽었고 외증조할아버지 역시 정신병원에서 죽었으며, 샘의 고모도 정신에 문제가 있어서 집의 꼭대기 층에서 자신이 돌보고 있다고. 샘의 아버지는 발병을 하지 않아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고나서 자기한테 집안의 비밀을 이야기해주었단다. 그러나 샘이 여덟 살이 되자 아버지에게도 증세가 나타나 샘을 기숙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같은 증세로 생을 마감했다고. 심각한 정신병 내력이 있는 가문이었다.

  샘을 임신한 어머니는 정신병을 유전시키지 않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으로 낙태를 시도했지만 아직 증세가 나타나지 않은 아버지의 권유로 샘을 낳아 이제 결혼을 시켰더니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어머니는 심각하게 유산을 권한다. 그러면서 샘의 안정을 위해서, 즉 정신병의 발현을 막거나 늦추려면 샘의 아이를 낳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같은데, 그렇다고 정신병 유전자가 있는 샘의 아이를 낳을 수는 없으니, 혼외로 다른 괜찮은 유전자를 가진 남자와의 사이에 아이를 만들어 샘의 호적에 올리기 권한다. 어때? 진짜 막장이지? 정신병에, 낙태에, 혼외정사에, 혼외자 출산 권유까지 한 방에 다 몰렸다. 나는 이 때 소름이 좍. 곧바로 떠오른 것이 알코올 중독 증세가 농후한 어머니가 등장하는 <밤의로의 긴 여로>. 그게 괜히, 우연히 나온 드라마가 아니었던 거다.

  그리하여 충격을 먹고 니나가 고른 애인이 에드먼드 대럴. 심장외과 의사에다 빵빵한 체격에 제법 잘 생긴 외모.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을 때 데럴 역할을 클라크 게이블이 맡았으니 알아서 상상하시라. 나 같아도 좀 모지리 같은 에번스보다는 대럴이 좋겠네. 하여간 낙태를 하고 다시 생리가 터지자 곧바로 대럴과 동침해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고, 아들한테 차마 몸의 교환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생전 처음 사랑을 한 남자 ‘고든’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섹스라는 것이 그렇다. 좋아서, 사랑해서 섹스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섹스를 하고난 다음에 사랑하게 된 커플도 있다. 딱 니나와 대럴이 그랬다. 특히 대럴이 그랬다. 그러나 유부녀이고, 친한 후배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 대럴은 니나를 포기하기 위해 도망치듯 유럽으로 가 몇 년을 머무른다. 자기 연인과 아들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대럴의 가슴이라니. 메지다 못해 아주 무너지지 않겠어? 크.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1부 5막이 끝난다.

  1부 5막 끝나고 뭐? 디너 인터미션. 밥 먹고 2부 6막이 올라 9막에서 대단원을 맞는데, 2부는 아무래도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좋지 않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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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5-03 0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찬쉐, <격정세계>
수요일. 셸리 리드, <흐르는 강물처럼>
금요일. 츠쯔젠, 《가장 짧은 낮》

stella.K 2024-05-03 09:57   좋아요 0 | URL
엇, 일주일에 세 작품으로 줄이셨네요. 암튼 기대하겠슴다.^^

Falstaff 2024-05-03 16:58   좋아요 1 | URL
넵. 4월 들어와서 가만 보니까 여차하면 재수 없게 1년에 2백 권 넘게 읽을 거 같더라고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1년 2백 권 이상이랍니다. 그리하야... 두꺼운 책을 집중적으로 털었습죠. ㅋㅋㅋㅋ 뭐 다 제 맘 아니겠습니까! ㅋㅋㅋㅋ

은하수 2024-05-03 0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아침부터 너무하시네요 ㅠㅠ
이리 끝내버리시다니... 몰입최고조였는데 말이예요!
이상한막간극2로 후속리뷰 어떠세요?~~ 하하하하

Falstaff 2024-05-03 07:50   좋아요 0 | URL
ㅎㅎㅎ 내용을 다 밝히는 건 좀 그렇잖아요. 혹시 읽어보실 분이 미리 내용을 알게 될까봐요.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읽어보셔요. 이 출판사 책이 워낙 비싸서 직접 구입하면 어질어질 하거든요. ㅋㅋㅋ

stella.K 2024-05-03 0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극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야회 나온 것 같고 재미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감히 시도하기는 어렵겠죠. 코로나 전인가 카망마조픈가? 4시간인가 몇시간 하는 작품 울나라에서 올렸다는데 다시 그런 시도 안하잖아요. 3시간이 맥시멈인것 같습니다. ㅋ

Falstaff 2024-05-03 17:01   좋아요 1 | URL
들리는 말로는 ˝까라마조프...˝ 일곱 시간 했다는데 그건 일단 열외로 봐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이건 작품 자체가 정말 재미나요. 시엄마가 며느리한테, 얘야 애 뗴고 다른 멀쩡한 남자 씨 받아라, ㅎㅎㅎㅎ 막장 자체라니까요. ㅎㅎㅎㅎ

잠자냥 2024-05-03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하. 두껍다고 진짜 비싸게 받아처먹네요.
저 그래서 이거 출간 때 도서관에 신청했다가 거절당했어요. -_-;
전자책으로 사봐야겠습니다.......근데도 2만원 넘음... 흐아.

Falstaff 2024-05-03 17:03   좋아요 1 | URL
아효, 저 사는 소도시에서도 냉큼 사주는데 서울에서 그리 야박해요? ㅎㅎㅎ 고향 뜨기 잘 했네. ㅋㅋㅋㅋ
재미나요. 근데, 그래도 <밤으로의...>가 더 좋더라고요. ㅎㅎㅎ 첫정이야, 첫 정.

잠자냥 2024-05-03 17:40   좋아요 1 | URL
한정된 예산 안에서 좀 더 많은 독자들이 읽을 책으로 구입한다…. 고 ㅋㅋㅋㅋㅋㅋㅋ 아, 유진 오닐도 까이는 세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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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쓴 작품집인데, 이거 참 난감하게 됐다. 책 읽은 느낌을 솔직하게 쓰면 많고 많은 애독자한테 얻어터질 것 같고, 그래서 한 사람한테 꿀밤이라도 한 대씩 맞는다 쳐도 워낙 팬들이 많아 최하 중상일 터인데 이제는 그까짓 것, 하고 버틸 깡다구도 없어졌으니 이걸 워쪄? 글쎄, 당신도 백수 돼 봐. 매사에 저절로 그렇게 된다니까. 좋다, 좋다. 이번이 마지막으로 솔직하게, 최대한 공손하게 쓰는 독후감이겠거니, 하고 최은영의 팬께서는 양해하옵시어 그저 딱 한 번만 쇤네의 입방정을 참아주시면 황감하겠으니, 그리 아셨으면 좋겠다. 물론 이까짓 잡문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작가한테는 굳이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되겠지 뭐. 이런 마음이었지만 그냥 간단하게 써야겠다.


  최은영의 문장은 거미줄처럼 섬세하다. 고운 결로 가로 세로에서 영롱하게 빛을 반사하는 듯한 애잔함.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소설 다 그렇다. 이런 아름다운 실로 묶인 관계들. 너와 나. 일인칭과 이인칭. 그리고 인칭을 벗어나면 곧바로 들이닥치는 악의 밀림. 이 틈 안에서 너와 나는 관계를 만들고, 자잘한 오해도 생기고 상처를 받고,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를 이해하거나 그저 상처를 간직하는 마모. 섬세한 아름다움은 연약할 경우가 많아 이들은 거의 언제나 폭력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이어 흉을 가진 채 남은 생을 살아야 하고. 최은영은 이 단계 이후 전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또래 작가한테 많이 익숙한 문법이다. 전형적인 단편소설의 구성은 교과서적이라 할 수준. 표제작 <아주 희미한…> 속에 등장하는 학보사 등 학교 건물이 익숙한 걸로 봐서…….

  문득 드는 의문. 비슷한 분위기의 문장을 구사하는 비슷한 연령대 작가들이 많(은 것 같)다. 이들 작가군을 읽으면, 이들에게 교사 혹은 롤 모델이 한두 명 있는 것 같다. 물론 억측이겠지만. 억측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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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5-02 15: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그 이후의 전망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과 또래의 여성 작가들의 글이 비슷하다는 것을요.

서재 분위기상 남들이 좋다는 작품을 비핀하기가 저도 쉽지가 않네요 ㅎㅎ

Falstaff 2024-05-02 21:02   좋아요 1 | URL
에휴, 최은영만큼 굉장한 팬덤을 누리는 작가도 흔하지 않잖습니까. 좀 길게 썼다가 확 줄이고, 무려 한 달 동안 그나마 짧은 글도 숱하게 다시 써서 결국 어줍짢고 하찮은 조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얻어 터질까봐 속으로 걱정했었는데요. ㅋㅋㅋ

공쟝쟝 2024-05-02 21: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은영의 광란의(?) 애독자!! 동세대 여성으로서… (중요합니다!! 동세대 여성!) 그나마 최은영은 남성독자도 설득할 수 있는 포지션이지 싶은데요.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녀의 모든 문장은 제 맘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제가 섬세하고 영롱합니닼ㅋㅋㅋㅋ) 거기에 공명할 수 밖에 없는 세대적 경험(!)이 저를 마그마구 흔들어 놓기 땜에 저는 애껴 읽습니다. 모든 기억들이 소환되고 거기에서 나의 무고하지 않음이 나의 부족했던 성찰이 같이 헤집어져서. 전 최은영만의 어떤 윤리적 감수성으로 ‘답을 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건 언제나 화나있는 (ㅋㅋㅋㅋㅋ 사는 게 너무 바쁘며 구원따윈 없는 계속해서 돌겠는 현대 여성) 제 맘을 순하게 해줍니다. 내가 순해진다고요.

킹덤이랑 지옥을 봐야 성질이 풀리는 이 각팍한 시절에. (뭐 더 각팍했던 시절이 있었겠지만 저는 안 살아봐서 ㅋㅋㅋ) 그것 말고. 문학이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저는 최은영 없으면 안되는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ㅋㅋㅋㅋ 소포클레스 퐐님의 평가에 반발 합미다!ㅋㅋㅋㅋ (반발이래봤자 ㅋㅋㅋㅋㅋㅋ 이게 다임 ㅋㅋㅋ)

Falstaff 2024-05-02 22:07   좋아요 1 | URL
넹.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문학은 언제나 자신이 느낀 것이 제일 중요합지요. ㅎㅎㅎ 그래서 소포클레스와 최은영이 동격이 되는 겁니다. 이의 없습니다.

공쟝쟝 2024-05-02 22:26   좋아요 1 | URL
하지만 최은영을 카슨 매컬러스나 뒤라스에 비교하면 반칙입니다 ㅋㅋㅋ!! 물 건너온 거 말고는 한국의 다른 세대 여성작가들과 비교해보고 싶은데 읽은 게 읎어요… 아쉬운대로 조만간 양귀자라도 읽고 올까봐요?ㅋㅋㅋ 퐐님의 추천받습니다!
 
시체의 거리
오타 요코 지음, 정향재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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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시체의 거리>를 보고 으시시, 일본 전래 민담에 유난히 음산한 귀신이 많이 등장한다. 일본 시골에 가면 어떻게 그리 하나같이 검정색 나무집인지. 집마다 묘지도 있고 귀신 섬기는 작은 제단도 있어서 아마 세계에서 가장 귀신이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이야기인 줄로 지레짐작했다가 책 소개 읽어보니 히로시마 원폭의 참혹한 실상을 그린 작품이라 해서 호기심 돋았다. 지만지 책이 엄청 비싸 직접 사기에는 주저할 수밖에 없어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읽었다.


  작가 오타 요코는 1903년 또는 1906년에 히로시마 현의 부유한 지주 후쿠타 씨와 두번째 아내 토미 여사 사이의 맏딸로 태어났다. 토미 여사는 <시체의 거리>에서 요코와 여동생, 여동생이 낳은 갓난 딸과 함께 피폭 당해 살아남았다. 작가는 원자폭탄 피폭 경험을 바탕으로 몇 편의 작품을 발표하고 50년대 중반 이후엔 주로 어머니와의 관계, 겪을 일을 소재로 사소설적 경향으로 선회한다고 한다.

  토미 여사는 오타의 친부 후쿠타 씨의 두번째 아내이며, 1910년 오타가 일곱 살 또는 네 살 되던 해에 이혼하면서 어린 아이를 아무도 키우지 않고 오타 씨 집의 양녀로 들여 후쿠타 요코가 오타 요코가 되었던 거다. 토미 여사가 재혼을 하고 또 이혼을 하고, 삼혼을 해서 심신이 안정됐을 때 다시 요코를 데려와 함께 살았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와있다.

  오타 요코는 1939년에 지식계급총동원 현상에 <해녀>를 응모해 입상했고 아사히 신문 창간 50주년 기념 현상공모에 <벚꽃의 나라>로 또 입선했다. 시대가 시대이니 이 작품들은 천황에 대한 충성과 중국침공 등 전쟁 정책을 선동하는 내용이었다. 세월이 흘러 1945년 8월 6일이 오고, 오타가 사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지상 5백미터 상공에서 터져 여태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재앙을 경험한 후에 <시체의 거리>를 쓰면서 군국주의의 맹목적성과 후진성을 격하게 주장하게 되었으니 이를 어쩔꼬. 오타 요코는 자신의 초기 대표작이자 현상공모 수상작인 두 작품을 명함에서 파버리게 된다. 이런 변신은 일본 독자로 하여금 오타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지만, 사람이 다 그렇지 뭐. <해녀>하고 <벚꽃의 나라>를 응모할 당시에 혹시 알아? 밥 사먹을 돈도 없을 정도로 배고팠는지? 아니면 일단 말석이라도 문단에 한 자리 깔고 앉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강렬했는지. 1939년에 전쟁에 질 줄 알았던 일본인이 몇 명이나 됐겠어? 미국하고 붙는다는 건 생각도 못했을 걸? 그렇다고 이이가 잘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세월이 지나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거 이상은 아니다.


  이 작품은 1945년 11월에 원고를 끝냈다. 이 시절 유럽에서는 완전히 전쟁이 끝나 뉘른베르크 재판을 진행하던 시기였다. 리틀보이가 히로시마 상공에서 터지기 석달 전인 5월 8일에는 독일이 미국, 영국, 프랑스에 항복했고, 5월 9일엔 소련에도 항복해 전쟁은 폐허만 남기고 완전히 끝난 상태였다. 1941년 12월에 겁 없이 진주만을 공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도 열도를 제외한 모든 도서를 점령당해 사실상 항복선언만 남은 상태였지만 군부의 수뇌부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인상적으로, 폼나는 항복을 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국민에게는 마지막 한 명까지 죽창을 들고 싸우자고 격려했다. “하늘에서는 공중요새 B29가 소이탄을 퍼붓는데 죽창이라고?” 누가 이 한 마디를 했다가 일본 육군의 분노를 사 코피 깨나 터졌다. 이건 실화다. 국민은 절대로 일본의 왕이 항복선언을 할 줄 몰랐으며, 만일 패전을 한다면 일왕과 군부의 수뇌들은 전부 항복 대신 할복을 선택할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미국이 왜 일본에 원자탄을 터뜨렸는지 진심이 궁금하다. 전쟁이 지긋지긋해서, 독일이 항복하자 오히려 갑자기 몰려오는 허탈감에 휩싸여 얼른 전쟁을 끝내야겠다는 조급증이 오히려 더해지는 바람에 그냥 한 방에 보냈을 거라고 짐작한다. 말이 쉽지 국토의 80퍼센트 이상이 산악지역으로 되어 있는 일본에 정규군이 상륙하면, 일본 군부가 쉽게 저항을 포기하겠느냐 하는 우려, 상륙작전에 따른 우군의 피해도 감안했을 거라고 본다. 흔히 생각하는 피부색 차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하여튼 1945년 8월 6일 아침에 B29가 딱 한 대 모습을 드러냈다. 공습경보도 울리지 않은 것도 겨우 한 대의 폭격기로 히로시마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해서 그랬을 지 모른다. 그럼에도 시민들 중 몇몇은 폭음을 울리며 도시 상공에 진입한 폭격기에 눈길을 좇았는데, 기체에서 검은 색의 물체 하나가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패러수트, 낙하산에 매달려 동동 뜬 채로 낙하하고 있는 거였다. 거 참 신기한 일일세. 그러더니 한 순간에 번쩍, 파란 빛이 히로시마 전 지역에 섬광을 뿌리면서, 피해자들이 확실하게 말하건데, 우리가 경험해서 아는 불길이 아니라 그냥 확, 한 방에 뭔가가 지나가는 섬찟한 느낌이 들었으며, 이때 가까이 있던 시민은 그 자리에서 새까맣게 4도 화상으로 타버렸고, 3도 화상도 있었지만, 많은 시민들은 2도 화상을 당했다. 물론 근거리에서 정말로 번쩍, 하는 순간을 본 사람들은 즉각 결막, 각막, 홍체, 시신경에 영향을 받아 앞을 볼 수도 없었고.

  이후에 오는 건 폭풍 형태의 충격파. 거대한 충격파가 히로시마 시내의 건물을 휩쓸어 유리란 유리가 다 터져버리는 바람에 숱한 사람들이 자상을 입는다. 피폭 후에 또다른 공습이 있을 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직선거리 23킬로미터 떨어진 구지마에 도착한 ‘나’ 오타 요코 역시 자상을 입었다. 요코의 동생도 자상. 구지마의 개업의사 S 선생의 말에 의하면 신기하게도 자상 환자 대부분이 상처가 가로로 나 있다는 것. 압력이 위에서 아래로 가해져 유리가 횡으로 날아간 거 아닌가 추측한다.

  이런 건 내 기억으로 다시 쓰기가 쉽지 않다. 내용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처음에는 그것이 화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불이 나지 않았는데 어디에서 저렇게 데었을까. 이상하고 기묘한 모습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슬프고 비참한 것이었다. 센베이(과자) 기술자가 쇠로 굽는 기계로 한꺼번에 센베이를 구운 것처럼 모두가 완전히 똑 같은 모양으로 화상을 입었다. 일반적인 화상과 같이 붉은 기가 있는 부분과 허연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잿빛이었다. 구웠다기보다는 그을린 것 같고, 그을린 감자 껍질을 홀딱 벗긴 것같이 그 잿빛 피부는 살에서 늘어져 있었다.” (75쪽)


  그리고 처음 듣는 원자폭탄증에 관하여. 작가가 고향 구지마에 돌아와 알게 된 ‘긴찬’이라는 이름의 청년을 이렇게 묘사한다.


  “머리가 빠지고, 치아는 치주농루(齒槽膿漏. 한자어의 우리말 발음은 ‘치조농루’)같이 흔들흔들 무너져 내리고, 그리고 바짝 말라 찍은 나무 같다. (중략) 전신의 피부는 폐결핵 말기인 사람과 같은 색에다, 더욱 더 절망적으로 불투명한 구운 가지와 비슷한 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중략) 이렇게 되어 버리면 2~3일, 길어도 5일밖에는 살지 못한다,”


  책의 뒤편에 나오는데, 2도 화상을 입은 자와 3도 화상이지만 넓지 않은 부위의 환자가 오히려 더 생존하는 반면, 자상 환자의 사망률이 더 높았다고 한다. 1945년 11월 현재 과학자, 의사의 지식 수준으로는 이런 결과가 화상 환자의 피부에 있던 우라늄 잔분들이 열에 의하여 타버려 날아간 결과라고 추론한다. 글쎄, 아마 아닐 것 같다.

  이 외에도 아무런 피폭을 받지 않았지만 히로시마를 구원하러 온 지원자들 역시 픽픽 쓰러져 죽었단다. 비록 즉시 죽지는 않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증세와 함께 그냥 시름시름하다가 간다는데 틀림없이 방사능에 피폭되어 그랬을 것이다.

  또한 살아남은 자들의 정신적 공황도 무시 못하리라. 하지만 때는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고 이에 따라 온갖 험하고 복잡하고 바쁜 상황이 들이닥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까지 관심을 쏟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게다가 천년이 넘게 수동적으로, 지배층이 하라면 할 뿐이었던 일본인 특유의 신중함은 히로시마의 불행에 신속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내용이다. 당연히 반전, 반핵 의식도 좀 들어 있고 그런데, 알지 못했던 피폭 광경을 알 수 있다는 것 말고는 큰 울림은 덜하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촘촘한 필터를 사용해 평가하려는 건 삼가했으면 좋겠다. 1945년 11월에 쓴 작품이다. 아직 피해자들의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한 상태인 것을.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읽으면 좋겠다.



오타 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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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은 여자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4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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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의 여자>를 떠올리게 만든 장편소설. 그러면 남편의 외도가 나오겠네? <초대받은 여자>에서 주인공 프랑수아즈 미켈과 피에르 라브루스 커플은 면사포 입고 교회에서 식 올린 정식 부부가 아니라 보부아르-사르트르처럼 “계약결혼” 관계인 것처럼 보인다. 작품 속에서 이런 말은 전혀 나오지 않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여자>에서 남편 모리스가 바람을 피운 것과 “유사하게”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힌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피에르는 초대받은 여자 그자비에르 파제스 양을 커플 사이에 끼워 자신의 사랑을 나누어준다. <위기의 여자>도 그렇고 <초대받은 여자>도 그런데, 이 두 작품에서는 남자가 외도를 하고, 그로 인해 여성이 고통을 받는다.

  <초대받은 여자>를 읽고나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사이에 있었던 다른 여성들을 검색해봤더니 천일야화 같은 일이 있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보부아르는 1929년에 프랑스 역사상 최연소로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하는데 차석이었고, 당시 수석은 사르트르가 했단다. 물론 전부터 눈이 맞았겠지만 이 해, 1929년에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시작해, 서로의 연애에 관여하지 않고 정직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2년 단위의 계약을 갱신해 나가기 시작한다. 하여간 이래서 보부아르는 고등학교 철학 교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교직 기간에 적어도 세 명의 제자와 동성애 관계를 맺는다. 첫번째 상대가 러시아 출신 당년 18세의 올가 코사키예비치. 보부아르는 올가와의 관계를 계약의 의거하여 거짓 없이 사르트르에게 보고했고, 사르트르 또한 올가에게 애정이 가는지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올가 코사키예비치가 보기에 이거 뭐 복잡하고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거 같아서(짐작이다) 거절을 하니, 사르트르는 꿩 대신 닭이었을까, 올가의 동생 완다 코사키예비치와 관계를 맺어버린다. 하여간 보부아르는 적어도 세 건에 달하는 제자와의 동성애 때문에 교직에서 쫓겨났으며, 사르트르는 올가가 결혼하기 전까지, 완다는 사르트르 자신이 죽기 전까지 후원자로 있었다. 그러니까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이 계약 부부 사이에 올가와 완다 코사키예비치 자매가 있었던 건 확실하다.

  보부아르가 허리 아래쪽으로 ‘추악’한 것이 자유 연애를 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제자에게 직위를 이용해 관계를 맺었다는 것도 있고, 게다가 상대 올가는 혁명 후에 조국을 탈출한 러시아 출신, 두번째 동성애인인 비앙카 비넨벨트도 폴란드 출신이었으며 세번째로 교직에서 쫓겨나게 된 결정적 계기인 나탈리 소로킨은 가난한 이혼/이주가정의 딸로 다방면으로 사회적 약자를 직위와 돈으로 착취한 거였다. 나탈리 소로킨의 어머니한테 고발당한 것이 1941년이니 파리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했을 때인데, 보부아르는 이때 가난한 동성의 고등학생 제자 성착취 해야지, 레지스탕스 일 해야지, 철학공부 해야지, 작품 써야지, 와, 정말 철인이었다, 철인. 실제로도 매사에, 다양하게 성실하고 부지런해 ‘비버’라는 별명도 있었다고.

  어쨌거나 교직에서 추방당한 보부아르는 올가와 완다를 한 사람으로 축약해 계약 부부로 보이는 커플 사이로 초대한 것으로 상정해서 쓴 장편소설이 <초대받은 여자>이다. 만일 위키피디아 검색을 해보지 않았다면, 작품의 주인공인 프랑수아즈가 어린 그자비에르를 기어이 자기 품에 두고 무한정으로 후원하는 이유를 끝내 몰랐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끝까지 책을 읽고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프랑수아즈-피에르 커플에 얹혀 살면서도 그렇게 파렴치하고 뻔뻔스럽게 까탈을 부릴 수 있었겠지. 이런 작품이야말로 본문 시작하기 전에 역자 서문 같은 거 붙여주면 좋았을 뻔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자비에르가 하도 프랑수아즈의 속을 썩이길래 그냥 후원을 끊고 고향인 루앙으로 보내 버리면 깨끗할 것을 왜 저리도 지지리 궁상일까, 당대의 지식인이자, 시대의 양심이자, 철학박사들은 다 저래야 하는 모양이지? 내 속창아리 썩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호메로스가 저 위대한 <일리아드>에서 사용한 방법,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부터 불쑥 시작하는 인 메디아스 레스 in medias res를 보부아르는 자신의 바람직하지 않은 과거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써먹어 버렸……다?


  극장의 작업실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새벽 두시. 프랑수아즈는 소설가를 겸하는 극작가이다. 이이는 셰익스피어의 <율리우스 시저>를 각색하고 있다. 아침에 도착할 극단 연출가이자 주인공 시저를 연기할 피에르에게 대본을 건네야 한다. 프랑수아즈가 손으로 작성하면 대기하고 있는 제르베르가 타이프 한다. 제르베르. 젊은 조연출자. 아름다운 청년이지만 눈 밑 그늘 때문에 스무 살은 더 먹어 보인다. 처음 소개할 때 젊은 청년이란 말 없이 “스무 살은 더 먹어 보인다.” 라고 해서 한 서른 중반 정도의 (1930년대 말 시점으로) 중년 남성인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예쁜 여성보다 더 속눈썹이 길고 부드러운 머리결의 미남 청년이다. 프랑수아즈의 마음 속엔 어느 새 풋풋한 사랑의 마음도 샘솟지만 피에르를 죽자사자 사랑하기 때문에 새파랗게 젊은 청년을 마음 속에 들여놓은 빈 터가 없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작품 초장에 이리 초를 쳐 놨으니 저 뒤로 가면 무슨 사달이 나도 나겠군. 허벅지 탁! 그렇다. 한다. 피에르 네까짓 것이 하는데 나라고 못해? 뭐 이렇게 홧김에 서방질 식은 아니지만. 명색이 지식인이고 장안에 이름이 떠르르한 작가가 설마. 설마? 그리고, 큰 기대 마시라. 하나도 안 야하다.

  두번째 씬은 프랑수아즈와 그자비에르. 루앙에서 파리로 올라온 그자비에르는 제르베르와 비슷한 젊은 또래의 여성으로 아랍풍의 카페에 앉아 있다. <초대받은 여자>는 파리 좌안을 무대로 한다. 이게 아마 일반적으로 지도를 그릴 때 센 강의 왼쪽 편에 있는 동네를 칭하는 걸로 알고 있다. 다양한 문화생활 공간과 대학, 카페, 술집, 댄스홀 등 인텔리겐치아들이 서로서로 잘난 척하기에 여념이 없는 지성의 진검승부가 벌어지는 곳. 이 카페에 둘이 앉아 아무런 설명 없이 프랑수아즈가 루앙 촌년 그자비에르에게 파리에 머물면서 속기 타이핑이라도 배우기만 하면 자기가 일자리를 알아줄 수 있으니 머물러 있으라고 권유한다. 이 시점부터 끝날 때까지 독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도대체 30대 프랑수아즈와 20대 그자비에르가 무슨 관계일까? 그자비에르는 싫단다. 손재주가 없어 속기도 타이프도 못 배울 거라고 지레 짐작한다. 프랑수아즈는 자기한테 신세지기 싫어 핑계대는 거라 생각하지만 곧 밝혀지니 오산이다. 그자비에르는 애초부터, 이왕 프랑수아즈와 살며 구차하게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거다. 저는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게 없어요. 반드시 뭔가를 해야만 하나요?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면 안 살면 그만이예요. 독자 입장에서 더 가관인 것은 입고, 자고, 먹고, 술과 담배, 춤 등의 기호와 취미, 이동, 생리현상, 기타 등등에 필요한 모든 돈이 프랑수아즈의 계좌에서 나오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전혀 부족함 없이 향유한다. 게다가 사람 관계에서도, 혼자 누구를 독점하면 마음이 놓이지만 살면서 재미있는 대상을 하나 만들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족속이다. 독점하기 위하여 지독하게 질투를 부리며, 모든 사고 방식이 오직 자신을 위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전형적인 소시오패스. 너무 독한 평가 아니냐고? 천만에. 읽어 보시라. 이게 독한 건지 아닌지.

  드디어 날이 밝고,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한 피에르는 곧바로 극장으로 온다. 그는 극장의 분장실에서 먹고 산다. 물론 거의 프랑수아즈가 살고 있는 호텔방에서 잠을 자지만. 나이트 가운 차림으로 분장실에서 쉬고 있는 피에르에게 프랑수아즈는 그자비에르 문제를 상의한다. 그 아이는 도통 내 신세를 지려고 하지 않아. 피에르는 도저히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법한 난처한 상황 속에서 순수한 미래를 발견해 자기만의 방식대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을 자신의 임무라고 여기기도 하는 잘난 척 대마왕이다. 그가 해법을 일러주기를, 그자비에르에게 들어가는 자금은 프랑수아즈가 빌려주는 것이니 후에 직업을 갖게 되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말하라 한다. 그래서 그자비에르는 프랑수아즈가 사는 호텔의 아래층 방에서 살게 된다.

  프랑수아즈와 피에르. 피에르가 말하기를 당신과 나, “우리”는 하나이며 함께가 아닌 우리는 우리라고 할 수 없는, 우리말로 일심동체라고 한다. 다른 사람과 엑스터시를 체험하는 일이 있더라도 진정한 사랑은 “우리”의 것뿐이라고. 그러나, 피에르는 심드렁하게 그자비에르를 면담하고 한 방에 눈이 홱, 돌아간다. 한 번 봤더니 정말 예쁘거든. 그러다 프랑수아즈가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둘만 카페에 가서 오랜 시간동안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고, 입술에 가볍게, 마치 새 부리로 쪼듯 키스도 나누고 돌아와, 프랑수아즈에게 자신들의 계약에 의거해 솔직하게 선언한다. 프랑수아즈, 우리는 서로 사랑하게 됐어.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밖에 모르는 소시오패스 젊은 처자 그자비에르가 이들 사이에 정식으로 들어앉아 세 명의 앞에는 본격적으로 지옥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당연히 프랑수아즈도 사람이니 아무리 계약에 있더라도 질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그건 피에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계약 부부는 싸움이라기보다 다툼을 하는데 역시 많이 배운 시대의 석학들은 싸울 때도 말이 참 근사하다.

  “당신은 눈치조차 못 챈 거군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에요. 우리 사랑을 몹시 소중히 여긴 나머지 시간을 초월하고 수명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 그 무엇의 영향도 받지 않는 곳에 보관해 왔을 테니까. 그런 당신에겐 이따금 우리 사랑을 떠올리며 만족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죠. 그러다 보니 변해 버린 우리 사랑의 실체를 단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는 거라고요.”

  거참. 부부싸움도 열라 형이상학적이다. 

  “그렇지만 당신으로 가득 찬 순간들, 그게 바로 내 인생을 이루고 있어요. 만일 그 순간들이 비어 있다면, 그것들이 하나의 충만한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당신이 아무리 말하더라도 난 받아들일 수 없을 거예요.”

  “내가 당신과 함께 충만한 순간들을 수없이 맛보고 있음을 모르겠소? 마치 내가 무신경한 잡놈이라도 된다는 듯 당신은 말하는군.”

  어이, 피에르. 또는 사르트르, 당신, 잡놈 맞아!


  작품은 프랑수아즈라고 읽는 보부아르의 입장에서 서술한다. 그러니 어쩌겠어?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결말의 딱 한 장면만 빼고 프랑수아즈는 천사 자체다. 적어도 피에르가 그자비에르와 (눈치로 봐서) 깊어지기 전까지 우리가 아는 계약이 허용함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정절을 지키고, 그자비에르의 모든 비용을 온전히 감당하면서도 아이가 자신에게 가하는 질투와 멸시와 정신적 학대에 이르는 가해를 견뎌내며, 프랑수아즈 스스로 판단하기에 자기가 무슨 현현한 신인줄 오해하고 사는 피에르가 가하는 가스라이팅도 기껍게 다 받아들인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도 그래서 아주 가끔은 그자비에르와 피에르가 필요 이상으로 나쁜 배역을 맡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의심도 든다는 말이다.

  근데 우습게도 이거, 명백하게 실존주의 소설이다. 현재 실존하는 것의 중요함. 결국 결론은 이렇게 끝난다. 그래서 어떻게 끝나냐고? 에이, 참. 안 알려드리는 거 뻔히 아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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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4-29 06:2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게다가 보부아르의 연애 상대였던 자크 로랑 보스트라는 사람과 올가가 나중에 결혼하죠..

공쟝쟝 2024-04-29 12:46   좋아요 2 | URL
역시... 작가들이란 자기 인생을 파서 글을 쓰는 종족들일까요?~ 나는 왜 보봐르에 대한 사적인 관심으로 이 책이 읽고 싶은 것인가.... (하지만 졸릴 것 같다....)

Falstaff 2024-04-29 16:02   좋아요 1 | URL
으... 답글이 늦었습니다. 오후 네 시도 안 돼서 벌써 꽐라... ㅋㅋㅋ 인생이 천국입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지까짓 것들이 해봐야 작가 밖에 더 됩니까, 읽어주는 말 그대로 읽어 ˝주는˝ 독자 없으면 다 찌그러지는 것들 ㅎㅎㅎ
 
달콤한 목요일
존 스타인벡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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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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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연말에 전편 격인 <통조림 공장 골목>을 읽자마자 <달콤한 목요일>이 다음 차례 스타인벡이 될 것이라고 확정했다. 그리고 석 달 만에 읽었다. 3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캐너리 로 유일의 식품점 사장 리청이 재산을 싹 정리해 현금으로 바꿔 남태평양 섬으로 들어갔다. 남은 평생을 신선처럼 지내기로 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엉뚱한 사고뭉치 영웅 맥이 생각하기를, 지금쯤 야자나무 그늘에 걸어놓은 해먹에 누워 흔들거리고 있을 텐데 틀림없이 리청의 옆엔 생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옷만 입은 남태평양 미녀가 다소곳하게 앉아 있을 거라나? 그리고 나중에 ‘세계대전‘이라 불릴 큰 전쟁이 나서 옛 어분 창고였지만 엉뚱하게 “팰리스 플롭하우스 앤드 그릴”이란 이름의 맥 일당 숙소 일원이었던 게이가 폭격기를 몰고 런던 근교를 날다가 대공포화를 맞아 폭사해버렸다. 마음 약한 플롭하우스 일당들은 게이의 침대와 물품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어서 그가 펼쳐 놓은 책도 여태 26페이지를 가리키지만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오기나 할지 원. 화이티 No.1은 오클랜드 군수공장에 군역 대신 들어갔다가 이틀만에 다리를 다쳐 석달 동안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다 의병 제대했고, 화이티 No.2는 제1해병대를 지원해 교체요원으로 복무했다. 청동성장星章을 받았다고 하지만 훈장을 직접 본 사람은 없다. 작은 유리병 속에 1쿼트의 브랜디를 부어 절인 적군의 귀를 가지고 있다가 검열관에 빼앗긴 걸 안타까워한다. 미친 놈인 거 맞다. 맥은 나이가 많아 징집대상이 아니었고, 에디는 진짜 나이보다 신체 나이가 워낙 많다고 측정이 되어 부적합 판정을 받고 아직도 ‘와이드 이다’의 바텐더를 하고 있다. 술꾼들이 남긴 술을 주종에 관계없이 단지에 담아 가득 차면 땅 속에 묻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팰리스 플롭하우스 앤드 그릴”이란 이름을 지은 장본인인 헤이즐은 사람이 조금 모자라 여전히 아무 생각 없다.

  후덕한 포주, 훌륭하고 큼지막한 여장부 도라 플러드는 유곽 베어 플래그를 유산으로 남기고 잠 자다 죽고 말았다. 유곽은 친언니 플로라가 물려 받았는데,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맞아서 플로라 역시 동생 도라 못지않게 선한 품성을 지닌 포주다. 매춘 아가씨들에게 교양 교육을 시키고 욕을 금지하며, 열두세 개에 달하는 식탁의 포크와 나이프 사용법을 익히게 하는 등 몸 파는 아가씨들에게 숙녀교육을 지속적으로 시켜 정상적인 결혼을 통해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안다. 아가씨 한 명이 결혼해 나갈 때마다 벽에 사진과 더불어 별을 하나씩 붙여 놓는다.

  리청이 사라진 식료품점은 멕시코인 조지프 앤 메리 리바스가 인수받았다. 터프한 인간으로 조지프 앤 메리에 비교하면 맥 패거리는 순결하고 성실한 어린 양 수준이다. LA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십대들의 길거리 깡패 조직을 이끌면서 동산current asset의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었다. 즉 내 돈이 내 돈이고 네 돈이 내 돈이었다. 12세에 소년원에 들어가 2년 후 퇴소할 때는 현존하는 모든 범죄 수법을 섭렵했으나 하여간 외모는 슬프고 순진해 보이는 눈을 가졌다. 돈을 모아 과거를 정리하고 몬터레이에 정착해 존 스타인벡 이웃에 살게 된 사내.


  전편 <통조림 공장 골목>에서 맥과 더불어 투 톱을 이루었던 닥은 <달콤한 목요일>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쟁이 터져 징병이 되는 바람에 웨스턴 생물학 연구소를 부자 친구 올드 징글블릭스에게 맡기고 기술하사관으로 복무했다. 무제한 공급되는 군용 술과 친구 사귀기에 여가시간을 몽땅 사용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재고 문제를 해결하는 보직을 맡아 2년을 더 복무하고 제대해 연구소에 복귀했다. 그동안 부자 친구 징글블릭스가 거의 손을 놓고 있어서 폐허가 된 생물학 연구소를 앞에 놓고, 금방 군역을 마친 닥은 좀처럼 길을 찾지 못한다. 전에는 부드럽고 유쾌한 삶을 영위하며 음악과 다양한 해양생물을 수집/배양해 대학과 박물관에 납품을 하며 연구하는 데 자신의 인생을 걸었었는데, 이제는 닥 안에 세 명의 닥이 있어서, ①연구, ②생각해보고 결정해, ③외로워,를 연발하고 있다.

  뭐라? “외로워”를 연발한다고? 그럼 사랑, 아니면 적어도 여자가 문제겠네? 그렇다. 여전히 인간이 이룩한 업적 가운데 가장 뛰어난 두 가지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바흐의 <푸가의 기법>이란 생각은 변하지 않았건만, 통조림 골목 시절엔 상상도 하지 못하게, 젊은 여자와 640킬로미터 떨어진 라호야로 여유롭고 긴 채취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가는 도중, 오는 도중 쉼 없이 두족류 생명체인 문어 이야기만 죽자사자 해서 상대 여성으로 하여금 정이 똑 떨어지게 만들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해 문제지만.

  새로 수지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몬터레이에 도착한다. 낮은 코에 큰 입을 가진 예쁜 아가씨로 21세에 키 165센티미터이며, 큰 가슴을 가지고 있다. 엣다 모르겠다. 확 깨놓고 말해, 수지 아가씨는 당장 먹고 잘 곳이 없어서 애칭 ‘포나’로 불리는 플로라 여사가 운영하는 유곽 베어 플래그에 자진해 들어가 매춘부가 되는데, 매춘부를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가슴을 가지고 있다. 또 처음 알았네, 프로 매춘부는 가슴이 크면 불리하단다. 산전수전 다 겪은 조지프 앤 메리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믿어야지 뭐. 그가 몬터레이에 도착해 간이 음식점인 포피 식당에 들어가자 곧바로 수지의 뒤를 따라 식당에 들어서는 이가 있었으니 몬터레이의 선량한 경찰 조 블레이키. 그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하느님이냐고? 아니, 아니. 워낙 좁은 마을이라 동네 경찰 또는 보안관은 누구네집 빨래하는 날짜까지 훤하게 알고 있는 거다. 식당 주인 피곤한 엘라한테 커피 한 잔을 주문한 조 블레이키는 수지와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에, 만일 돌아가고 싶은데 차비가 없으면 기꺼이 꾸어 주겠다고 말한다. 괜찮다고 하고 취직한 곳이 베어 플래그.

  <통조림 공장 골목>을 읽은 독자는 안다. 베어 플래그가 식료품점과 공터 하나를 경계에 두고 반대편에 있으며, 이 가게들과 삼각형을 이루는 꼭지점에 우리의 닥이 사장으로 있는 웨스턴 생물학 연구소가 있다는 것을. 연구소에서 연구가 안 되어, 혹은 어떤 연구를 할까 고민중인, 그것도 아니면 외로워, 외로워서 못 살겠어요 타령을 하던 닥이 2층에서 무심코 내려다보는 거리에 발랄한 발걸음의 베어 플래그 아가씨의 뒷모습이 보인 것은 당연하겠지? 아가씨가 팔랑팔랑 길을 걷다가, 제발 조금만 더 계속 앞으로 죽 갔으면, 하는 닥의 바람과 달리 모퉁이를 돌아 모습이 사라져도 닥의 눈에는 치마와 종아리와 어깨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대강 그림을 그려지는 거다.


  하나 더. 악당이 살지 않는 이 작은 동네 통조림 공장 골목에 대하여. 전쟁은 몬터레이 풍경도 바꾸어 놓았다. 자국 청년을 징집해 유럽과 태평양으로 보낸 미국은 자국 국민뿐만 아니라 생산활동을 할 수 없는 유럽인들도 먹여 살려야 했다. 당연히 아시아인은 중요 고려대상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미국에서도 생산활동에 참여할 노동력이 줄어들었으니 이걸 우짜? 무조건 대량 생산. 농산물은 당연하고 수산물도 어획량 제한이 철폐되어 어부들은 생선의 씨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통조림 공장이 하루 스물네 시간 힘차게 돌아가다가, 돌아가다가, 돌아가는 듯했는데, 어느 새 조금씩 가동 시간이 줄어들더니, 드디어 거리에 모터 도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골목은 텅 비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생산활동이 줄어들면 기업의 이익이 줄고, 그래서 정부는 걷어들일 세금이… 물에 빠진 할배 그거처럼 쪼그라들어버렸다. 정부가 가만히 있나 어디? 세무서는 새로운 세금원을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고, 집집마다 생각도 못했던 세금 고지서를 받기 시작하자, 천하에 가진 것 없는 맥이 엉뚱한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지금 살고 있는 팰리스 플롭하우스 앤드 그릴이 떠나버린 중국인 리청이 소유하고 있었으니 분명히 조지프 앤드 메리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을 텐데, 아직까지는 그게 자기 건물인지 몰라 월세 받을 생각을 안 하고 있지만 세무서에서 청구서가 날아들면 득달같이 월세는 물론이고 자기가 가게를 인수했던 시점부터 오늘 이때까지의 월세를 추징해 달라고 할 게 분명하다, 분명할까? 아마 그렇겠지? 그러면 아무 수도 없이 그냥 쫓겨나야 한다. 함부로 덤볐다가는 몬터레이 뿐만 아니고 캘리포니아의 멕시칸 커뮤니티에서 한 성깔 하는 종족들을 불러오는 일도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하니 이걸 어쩌나. 이렇게 저렇게 맥은 조금 부족한 두뇌를 짜기 시작하고, 이 계략에 다른 의도로 선량한 포주 포나가 가세해 또 한 편의 난장판, 당연히 전편과 마찬가지로 실패로 끝날 운명인 난장판을 준비한다.

  이때까지도 <달콤한 목요일>의 히든 히어로, 백치 천사, 헤이즐의 기가 막힌 마지막 한 방이 뭔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걸? 그거 읽으면서 조용한 평일 열람실에서 미친 놈처럼 키득거렸다. 역시 스타인벡은 날 배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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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4-26 05: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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