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스 페이지터너스
그레이엄 그린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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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인도 제도 산토도밍고 섬의 북쪽에 자리한 아이티 공화국을 배경으로 세 명의 영국인 남성이 펼치는 전형적인 백인 드라마. 그린답게 내놓고 대중소설이다. 대중소설도 얼마든지 좋을 수 있다는 걸 그레이엄 그린만큼 잘 보여주는 작가도 별로 없다. 이이는 세계대전 중에 첩보 부대에서 첩보원, 그러니까 스파이로 활약하기도 해서 그런지 권력 구조 안의 역학관계를 묘사하는 데 특별한 설득력을 가졌다. 다만 영국 백인 출신 작가라서 제삼세계 인물 가운데는 정의로운 사람이 별로 없는 반면 영국인이나 백인들 대부분은 적어도 악의로 똘똘 뭉친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즉 주인공과 주인공 주변인들이 아무리 유색인에 관해 관대하다 해도 이들이 유럽 백인들의 지배를 받은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인식도 눈에 띈다. 더구나 이 작품은 1966년에 출간했다. 미국에서 흑인 분리법인 짐크로 법이 폐기된 지 겨우 1년밖에 안 지난 시점이다. 반 세기가 흐른 다음 자기 작품에 대해 이처럼 이야기하는 독자가 있다는 걸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지금은 절판 상태인 다니 라페리에르가 쓴 좋은 소설 <남쪽으로>를 보면, 유럽의 유한 여성들이 휴가를 맞아 카리브해의 아이티 섬을 찾는다. 천국 같이 아름다운 해변과 길쭉길쭉하게 잘 생긴 흑인 청년들, 그리고 그들의 몸처럼 긴 생식기를 즐기기 위하여. 그러나 세월은 아름다웠던 옛 시절을 무정하게 지나쳐 지금의 아이티 공화국은 거의 완전한 무정부 상태로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로 꼽힌다. 내가 알기로 아이티의 비극은 1820년대 프랑스가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에 막대한 독립 보상금을 요구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더라도 위키피디아에서 아이티를 검색해보면 나쁜 방향으로 참 알뜰하게 말아먹었다.

  산토도밍고 섬을 점령한 스페인 군대와 그들이 지니고 온 바이러스는 섬의 토착민인 타이노인의 99%, 그러니까 모두 죽여버렸고 어찌어찌 생존한 극히 일부마저 학살해버렸다. 이후에 노동력이 없어져버리니 다른 서인도제도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아프리카의 기골이 장대한 흑인을 수입해 거대 플랜테이션 농장을 만들었으며, 우월한 체격과 체력을 보유한 흑인들은 후에 거꾸로 백인과 백인의 피를 물려받은 물라토를 제거하고 독립을 선포해 완벽한 흑인의 나라를 만들었다. 밖으로는 스페인에 이어 식민지를 경영하던 프랑스에 매년 거액의 보상금을 물어주느라 죽을 맛이었으며 안으로도 어려운 살림 안에서마저 곪아버린 부패 왕국이었던 건 어쩔 수 없었고.

  그래도 시계는 멈추지 않아 노베첸토가 찾아오고 7년이 더 흐른 1907년.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판사 집안에 똑똑한 아들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태어난다. 아이는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나 1934년에 아이티 대학 의과를 졸업하고 지방에서 의료봉사에 전념하며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공공의료에 관해 배우기도 한다. 귀국한 뒤발리에는 주로 머릿니를 매개로 하는 후진국형 전염병인 발진티푸스를 예방하고, 고질적인 열대병 가운데 하나로 세계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는 전염병인 말라리아가 확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말 그대로 “헌신적인” 노력을 해, 아이티 국민들로 하여금 아빠 의사, Papa Doc. 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파파독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비”라는 뜻으로 쓰였다니 그야말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었던 것. 그러다가 군부에 의해 탄압을 받아 시골에서 은둔생활도 하는 등 고난의 시간을 조금 보낸 후 1957년에 후진국에서 볼 수 있는 어떠한 부정도 없이 당당하게 비밀, 경쟁투표에서 72%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오른다.

  거의 모든 경우 거대 악의 근본 문제는 권력이라는 게 내 소신이다. 세상의 모든 자비를 베풀던 파파독은 권력의 단맛을 잠깐 맛보았음에도 단박에 단맛에 도취, 이후 감히 비교의 대상이 없을 정도로 잔혹하고 야만적인 학정을 시작한다. 과거 도라이 왕들도 쉽게 저지르지 못했을 만행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저지르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면, 아니, 예를 들기에도 잔인할 정도이니 차라리 조금 짬을 내 위키피디아 검색을 해보시기 바란다. 웃기는 거 하나만 이야기해보자. 1961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단다. 이때 투표자 1,320,748 명 가운데 1,320,748 명의 지지를 얻어 1백퍼센트의 득표를 해 당당하게 기네스북에도 올랐으니, 이거 북한의 김씨 왕조에도 없던 일이다.

  작품 속에는 한 번도 파파독이 직접 원고지 위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파파독 프랑수아 뒤발리에 대통령은, 거의 모든 독재자들이 그러하듯이 항상 죽음/암살의 두려움 속에 사느라 대통령궁에서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최후는 언제나 죽지 않기 위해 권력을 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는 비극이다. 파파독은 서인도제도의 가장 빈번했던 권력교체 방법인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친위 세력을 키웠으니 웃지 마시라, 이름하여 “통통 마쿠트.” 국가보안자원민병대. 민담 속 말 안 듣는 아이를 잡아가는 자루를 든 아저씨로 우리나라의 “망태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하면 딱이지만, 실제로는 대통령이 부리는 악귀로 여기면 된다. 날씨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검은 선글래스를 쓰고 다니는 무소불위의 집단. 군대보다 더 막강한 힘과 권세를 자랑했으나 참으로 다양하게 무식한 인간들의 집합이기도 했다. 왜 이렇게 상세하게 쓰느냐 하면, 작품의 큰 스토리가 영국인 등장인물(들)과 통통 마쿠트로 대변하는 아이티의 공포권력과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코미디언에 대하여. 누가 코미디언인가? 넓게 이야기하자면 전부 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가 코미디언일 수 있다. 살다보니 “웃기지도 않는” 일만 저지르고 다니는 지구 행성의 모든 이들. 작품에서는 대표적으로 세 명의 백인이 등장한다. 물론 콕 집어서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화자 ‘나’ 브라운은 1906년에 몬테카를로에서 영국인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나지만 아버지는 브라운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떠나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확실히 영국인은 아니었던 어머니는 어린 브라운을 기숙학교인 예수회성모방문 칼리지에 떠맡겨놓고 사라져 등록금도 치루지 않아 끝까지 학교에 대한 부채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한 시절엔 학년에서 가장 유력한 사제 후보생이었으나 어떻게 하다 예상치 못하게 총각 딱지를 떼게 됐고, 이 사실이 알려져 억지로 졸업만 한 후에 영국 각지를 떠돌며 사기 비슷한 행각을 하다 최종적으로 명함에 “라스코빌리에 백작부인”이라 파고 다니는 엄마가 암에 걸려 오늘 내일 할 때 아이티 공화국으로 불러 호텔 “트리아농”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처음엔 호텔이 드라마틱하게 호황을 만나 이게 무슨 대박인가 싶었다. 바로 이 시절이 저 위에서 말한 다니 라페리에르가 쓴 <남쪽에서>의 무대 같은데, 브라운한테는 이 시절이 딱 3년 갔다. 이후 파파독이 정권을 잡고 학정을 시작해 곳곳에서 불법체포와 고문과 학살과 시신 유기가 벌어지는 바람에 여차하면 브라운한테도 목발이라는 기념품이 전달될까 싶어 뉴욕으로 날아가 호텔을 팔아버리려 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짱구인가, 그걸 사게. 맨손으로 돌아오게 된 브라운은 네덜란드 왕립 증기선 회사의 화물선인 메데이아 호에서 1948년에 미국의 대통령선거 후보자였던 윌리엄 에이블 스미스 씨 부부와, 인도와 버마전선에서 대 일본 밀림 게릴라 전을 지휘했다고 주장하는 H.J. 존스 자칭 소령과 동승한다.

  순박한 시인이나 지방대학 총장 스타일의 스미스 씨 부부는 아이티의 사회복지부 장관 닥터 필리포의 초청을 받아 포르토프랭스에 채식주의 기념관을 짓는 등 채식주의 활동을 모색하기 위한 방문길이었다. 소설에서도 극히 드문 인자한 미국인 할아버지인 스미스 씨도 지금 말하기는 그렇지만 확실한 코미디언이다. 마음 좋고 선한 코미디언. 그는 당연히 아이티에서 하는 모든 일이 생각과 어긋나는 경험을 당할 팔자라서, 결국 일을 진척시키기도 전에 담당 장관만 거액의 부당 이익이 생기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좌절해 국경을 면한 도미니카로 가버린다.

  존스 소령은 ‘나’ 브라운과 비슷한 성향의 사기꾼이거나 적어도 사기꾼으로 보인다. 이이는 손보다 입과 혀가 앞서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고 자신만만해 결국 브라운에 의해 자기 덧에 걸려버려 어처구니없게도 과거 버마에서 경험한 게릴라전을 아이티에서 재현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버마 밀림은 바닥이 보들보들한 진흙이기라도 하지 아이티는 거의 산악 지형이라 존스 자칭 소령이 가지고 있는 평발로는 그리 쉽지 않을 걸?

  여기에 한 가지 더 흥미진진한 대중소설의 MSG, 사랑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우리의 주인공 브라운은 남미 어떤 나라의 대사 부인, 독일 출신인 마르타와 사랑에 빠진다. 대사 부인과? 그렇다. 사랑 이야기 가운데 가장 흥미를 돋게 하고 궁금증을 유발하고 유난히 재미있는 것이 불륜. 맞지? 수도 포르토프랭스 곳곳에 시퍼런 눈을 검정색 선글래스 뒤에 숨긴 채 도사리고 있는 통통 마쿠트를 피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어 설마 그곳에서 연애 행각을 벌일 것이라 생각지도 못하는 컬럼버스 동상 앞에 차를 세워두고 차 안에서 질펀한 몸의 유희를 벌이는 남녀. 근데 소설 속에서 연애 이야기는 뭐라? 맞다. 이별 이야기다.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란 거 보셨어? 이 책에서는? 흐흐,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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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막간극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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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Viva 오닐! 더 이상 드라마틱할 수 없는 끝장의 신파가 이렇게 멋있어도 괜찮은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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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 페이지터너스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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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올레타>는 2022년, 이사벨 아옌데가 여든 살에 발표한 장편이다. 2022년은 세계보건기구가 공식적으로 선언했듯 세 번째 펜데믹으로 전 인류가 불통의 시기로 진입했을 때이다. 아옌데는 이때로부터 백 년 전인 1920년의 라틴 아메리카를 떠올렸다.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1918년에 유럽을 휩쓸었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전장에서 죽어간 인명의 몇 배에 달하는 수천 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지만 유럽 열강들은 각국의 피해자 현황을 발표할 수 없었다. 국력 혹은 국격의 노출과 관련된 사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전쟁 당시 중립을 선언하고 정말로 세계대전에 참가하지 않았던 스페인이 유일하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발생을 인정하고 자국의 피해 상황을 발표하는 바람에 졸지에 “스페인 독감”이라 불리게 됐던 펜데믹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기승을 부리다가 2년 후인 1920년에 라틴 아메리카에 상륙했다. 그러니 라틴 아메리카에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한 펜데민은 백 년 만에 도래한 재앙이었으며, 아옌데는 이것에 착안해 1920년에 태어나 2020년에 생을 마치는 ‘비올레타 델 바예’라는 순혈 스페인/포르투갈 혈통 백인 여성의 한 생애를 소설로 구상하게 됐다.

  책의 판매 부수에 최대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출판사와 서점은 백 년 터울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펜데믹에 방점을 두어 책 광고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 1920년 펜데믹은 주인공이 이제 막 태어날 시기이니 굳이 질병을 연결시키려면 앞으로 펼쳐질 아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비유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20세기 초반에 태어난 전세계 모든 인류 가운데 파란만장하지 않았던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또한 2020년의 펜데믹 때 주인공의 나이는 백 살. 한 세기를 살아 이제 오직 편안한 휴식만 기대하고 있는 잘 늙은 노인하고 면역력이 생기지 않은 유행 질병과 그리 큰 연관은 없을 듯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사벨 아옌데 역시 두 번의 펜데믹에 걸쳐 생을 살았던 여성을 착안해 작품을 시작했을 뿐이었던 것 같다. 오히려 아예데의 시각에는 수백만에서 수천만의 생명을 앗아간 질병보다 20세기 여성운동에 더욱 관심을 집중했다. 교조적 가톨릭이 국민의 사상을 장악했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위해 개선, 개선을 넘어 혁신해야 할 관습과 행동, 법률은 넘치고도 넘쳤던 것이었으니. 그리하여 이 책을 읽기 전에 책 광고에서 초점을 맞추었던 펜데믹에 집중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알리고 싶다. 아옌데가 늘 그러하듯이 이 작품 역시 진보적,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읽어야 마땅하다.

  (여기까지 쓰고 마누라 님 저녁 드신다기에 아욱국 끓여드리고 겸사겸사 국 안주로 막걸리 한 통 해치웠다. 내가 끓였어도 진짜 맛있다. 장사할 만큼은 안 되지만 이 정도면 B+. 술 기운 퍼지기 전에 얼른 써야겠다. 속도를 올리자!)


  하긴, 벌써 독후감 쓴지 십년이다. 그간 2천 권 이상 읽었을 거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 동안 썼다. 이제 사실 지겹기도 하다. 그냥 훌훌 책이나 읽고 말지 싶다가도 여태 해온 지랄이 있는데 여기서 말긴 좀 아까운 생각이 들어 계속하고 있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 할 터. 무슨 광명을 보겠다고 여태 키보드를 두드려대고 있나, 한심할 때도 있다. 뭐라?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고맙습니다.


  “전염병이 발생한 1920년 폭풍우가 몰아치던 금요일에 이 세상에” 온 비올레타 델 바예는, 성인이 된 후, 즉 초경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삶이 연속되는 임신한 상태이거나 막 출산한 산모이거나, 그도 아니면 자연 유산에서 회복하는 시간으로 채워진, 한 때는 이 나라 수도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데뷔당트, 즉 이제 사교계에 정식 데뷔한 상류사회 처녀였지만 이젠 잦은 임신과 출산, 유산으로 체형이 바뀌고 기력마저 소진한 마리아 그라시아 델 바예 여사의 5남 1녀 가운데 막내로 세상에 비집고 나왔다. 이때 맏아들 호세 안토니오는 열일곱 살이었다. 맏오빠는 늙을 때까지 막냇동생 비올레타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며 세상에 둘도 없는 우호관계를 이어가다가 동생의 집에서 숨을 거두는데, 하여간 비올레타가 세상에 나올 때 어머니 마리아 여사가 나이를 아는 유일한 아들이 호세 안토니오 뿐이었다. 호세 안토니오는 수천 명이 사망한 최악의 지진이 발생한 해에 출생했으며, 생일은 물론이고 나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머지 네 아들들 역시 이 나라의 큰 환란이 생겼던 해에 태어났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즉, 어머니는 늘 출산 또는 유산 이후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출산할 때 무릎을 꿇고 앉은 상태에서 천장에 고정시켜 놓은 고리에 연결한 줄(또는 천)을 잡고 아이를 낳는 모양이다. 우리의 비올레타가 세상으로 나올 당시에 평생 숫처녀로 살게 될 피아 이모가 아이를 받았는데, 의학과 약초에 관한 지식이 대단했던 피아 이모는 정작 아이가 나올 때 제때 받지 못해 그만 거꾸로 떨어뜨려 바닥에 콩, 머리를 찍어 갓 나온 아이의 이마에 혹이 솟아버렸다. 당연히 아들일 것이라 생각한 아빠가 자신이 직접 조립한 라디오 통신을 통해 유럽과 북미를 휩쓰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소식을 듣고 집에 도착해 첫 딸 비올레타를 보았고, 이마에 솟은 희한한 혹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자 그때까지 처녀였던 필라르 큰이모는 매부한테 원래 그렇게 나오는 아이도 있는 법이라고 조금 있으면 가라 앉는다고,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고 (암시랑토 않다니께!) 안심시킨다.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은 할아버지 때부터 건사해온 집안의 부wealth가, 자신의 대에 이르러 열세 명의 남매 중에 열한 명이나 살아남아 부친의 재산 일부만 유증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속칭 “동물적인 감각”으로 남의 돈을 빌려 투기 비슷한 돈 놓고 돈 먹기 사업이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고, 형제 자매들의 신뢰를 깨면서까지 할아버지의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업을 하는 사람은 거대한 재산을 확보하고 있는 반면 가용할 수 있는 현금이 별로 없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저택은 조금씩 쇠퇴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생전 처음 딸이 태어났으니 얼마나 귀여웠겠는가. 아들만 키운 나도 전혀 몰랐다. 근데 손녀가 생기니까 집안에 딸이 있는 것이 얼만큼 축복인지, 이해한다, 이해해.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은 라틴 아메리카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상륙하자마자 라디오 통신을 통해 이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예방책을 미리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제재소의 신뢰할 수 있는 벌목꾼 두 명을 데리고 와 소총으로 무장시키고 아무도 저택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자신도 영국에서 밀수한 웸블리 리볼버를 한 정 사들여 혹시 모를 무단 침입 보균자를 막으려 한다. 이런 노력은 결실을 맺어 대가족 가운데 펜데믹 피해자는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거봐, 작품하고 펜데믹은 시대상 말고는 관련이 없다니까.

  이후 비올레타는 세상 버르장머리 없는 천방지축으로 성장한다. 아들한테는 도무지 볼 수 없는 딸 아이 특유의 다정다감이 아버지를 그만 녹여버렸던 것. 아버지가 얼마나 편애했는지 성격이 버릴 정도로 예뻐해주는 바람에 정말로 비올레타는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안하무인이 되어 버렸고, 이게 급기야 아버지를 향해 몇 번 터져, 화딱지가 난 아버지로 하여금 비올레타를 전담할 영국인 가정교사를 들이기로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가정에 들어온 미스 테일러.

  조세핀 테일러. 키가 조금 작고 대신 살집이 좀 있는 밀wheat색 금발의 20대 여성.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스 테일러는 비올레타의 반항기를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지만 사회의 바람직한 행동규범들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세핀 테일러는 영국인이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다. 차티스트 운동에 가담한 죄와 왕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되어 1846년에 교수형에 처해졌고 처형 후에 온몸이 난도질당한 아일랜드인 할아버지에 자부심을 갖는 여성이었다. 미스 테일러는 숨이 다 할 때까지 비올레타 주위에 머물며 조언과 도움을 멈추지 않는 인물이다. 몇 년 후에 비올레타와 함께 참석한 델 바예 가문의 파티에서 만난 남장 페미니스트 테레사 리바스와 연인관계를 이어가며, 테레사와 함께 부르주아가 된 비올레타의 인식의 각성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백인 부르주아 출신의 1920년생. 우리는 안다. 비올레타가 사춘기를 맞기 전에 특히 금융업에 전력하고 있는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한테 닥쳐올 역사적으로 높은 파도를.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1929년 9월이 오고, 미국의 주식시장이 한 순간에 폭락했으며 비올레타의 나라 역시 국가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삶의 급격한 하락을 맞게 된 시민들은 시위에 참여해 급격하게 정국이 심하게 불안해졌는데, 이 순간에도 맏오빠 호세 안토니오는 다섯 살 많은 비올레타의 가정교사 미스 테일러에게 석류석과 다이아몬드로 만든 반지를 동원한 청혼을 거절당하면서, 이후 30년 동안 반지를 품 안에 지니고 살게 된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자기 사업에 동참하게 했던 맏이 호세 안토니오는 그동안 수없이 자산 관리에 관해 사업주인 아버지에게 빚을 줄이라 고언을 해왔다. 그러나 모험적 투자의 매력에 빠진 아버지 아르세니오는 자신의 주관대로 사업을 밀고 나갔으며, 그 결과로 델 바예 집안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털터리가 된 상태.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소설작법 제 7장 3절, 작품에 총이 나오면 언젠가 한 번은 발사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 웸블리 리볼버에서 뛰쳐나온 총알이 자기 관자놀이를 관통시키게 만든다. 이 모습을 처음 본 아이가 바로 비올레타.

  그리하여 아버지도 잃고, 집도 절도 잃은 델 바예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두 이모와 외할머니, 어머니, 큰오빠 호세 안토니오와 비올레타는 가정교사 미스 테일러의 동성 연인 테레사 리바트의 시골집으로, 네 오빠는 친척집으로. 저 남반구 남쪽의 한대지방 농촌으로 내려간 델 바예 가족들은 말 그대로 유배, 또는 피난의 시절을 겪을 수밖에. 이후 비올레타가 살아야 하는 남은 삶은 무려 85년 이상이다. 그러니 나는 적어도 작품의 85퍼센트를 숨겨놓았다는 말이다.


  전형적인 라틴 아메리카의 부르주아 백인 시선으로 쓴 작품이다. 델 바예 가문은 애초부터 특혜를 안고 살았다.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돈을 버는 다양한 방법을 선천적으로 체득한 진골 가문이다. 비록 한 시절 불운을 만나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담을 겪었으나 다섯 아들 다 다시 사회의 훌륭한 지위와 부를 확보해 상류계급으로 복귀한다. 비올레타의 아들은 조국의 민주화 운동을 하다 공포정치의 희생자가 될 순간 극적인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로 탈출해 그곳에 정착한다. 딸은 미국에서 히피 생활과 중증의 마약중독이라는 지옥을 거치지만 악당이면서 지하의 막강한 권한을 지닌 생물학적 아버지의 도움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딸의 아들, 즉 비올레타의 손자 역시 좋은 교육을 받아 사회의 건전한 일원이 된다. 그리하여 이 책은 비올레타가 낼 모래 환갑을 맞을 손자 카밀로에게 주는 편지라고 해도 큰 까탈이 없다. 비올레타는 새로 사업을 시작한 오빠 호세 안토니오를 도와 남매가 다시 상당한 부를 축적하며, 이것을 이용해 여성의 인권을 확장하기 위한 사업을 모색한다.

  당연하지. 부를 이루는 법, 자신의 계급을 유지시키는 방법을 세습적으로 알고 있는 구성원들이니까. 하지만 이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좌파 작가라면 이 계급 구성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 대중들, 일반 시민들에 대한 미안함이랄까 겸연쩍음이랄까, 하여간 어떤 종류가 됐건 간의 유감또는 부채감은 적어도 한 번쯤 표시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곤란한 처지를 만나더라도 누군가 한 명은 이 가족을 도울 은인이 있고, 망해버렸을지언정 좋은 교육을 받아 다시 부흥시킬 아이디어를 낼 만한 사업계획을 꾸릴 수 있는 계급과 애당초 한 번 만난 환란을 피할 생각조차 못하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대중이란. 씁쓸하다. 하여간 나는 씁쓸했다. 자신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환경을 특권이라 생각하지 못하는 부르주아일 수도 있다는 씁쓸함. 내일 독후감을 쓸 그레이엄 그린은 “윗양반과 잡것”의 관계라고 했다. 윗양반과 잡것은 딱 한 방면에 국한하는 것이 아닐 터. 윗양반이 늘 당연하게 행사하는 권한과 습관과 인맥과 이를 다 합쳐 그들이 말하는 “능력”은 애초에 잡것들에게는 접근이 금지된 특권인 것을 그들은 모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좋다. 그러나 진보를 주장하는 작가라서, 활자를 통해 자기 생각이 드러난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져야 하는 것이……. 이런 의미로 읽으면 이 작품은 부르주아 계급으로 편향, 굴곡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별점으로 이야기하자. 생각 같으면 이런 한계 때문에 별 세 개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역시 이사벨 아옌데가 이야기를 꾸며 나가는 힘이라니. 차마 네 개 아래로 떨어뜨릴 수 없다. 이야기의 힘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대신 읽을 때는 눈을 똑바로 뜨시라는 말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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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4-02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흥미롭네요. 푹빠져서 읽었어요. 이야기의 힘과 눈 똑바로 뜨라는 말까지 담아갑니다.

Falstaff 2024-04-02 16:3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근데 꼭 잘난 척한 거 같아서 영 송구하기도 합니다. -_-;;

잠자냥 2024-04-02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4-02 16:37   좋아요 1 | URL
아욱국 잘 끓인 거요? ㅎㅎㅎ 거참 우연인지, 오늘 또 아욱국 끓여 먹었답니다.
잠자냥 님은 계속 쓰셔야지요. 바로 앞에 있는 거 같은데, 결국 순간이 오고야 말지 않겠습니까? ㅎㅎㅎㅎ

stella.K 2024-04-02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십년 동안 이천 권! 굉장하십니다. 근데 왜 안 쓰시려구요? 계속 쓰십시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또 모르잖습니까? 쓰고 싶어도 못 쓸 때가 올지. 계속 쓰시길 응원합니다.
이 책 언젠가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4-04-02 16:38   좋아요 1 | URL
안 쓰겠다는 건 아니고요, 이젠 독후감 쓰는 일이 자꾸 징글징글해져서 말입죠. 그럴 때가 됐다 싶기도 하잖아요? ㅎㅎㅎㅎ

Falstaff 2024-04-02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노무 서재는 우짜 휴대폰으로는 답글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놔서리.... 혹시 쓰는 방법을 저만 모르는 건가요?

stella.K 2024-04-02 16:45   좋아요 1 | URL
엇, 저 스마트폰으로 쓰는건데. 북플 까셨죠? 그럼 안될 리가 없을텐데요.

Falstaff 2024-04-02 17:28   좋아요 1 | URL
앗, 북플 안 깔았습니다. ㅎㅎㅎ 그렇군요. 그냥 지내는 걸로....

stella.K 2024-04-02 21:21   좋아요 0 | URL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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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화? 한자어로 繁花? 화려하게 핀 꽃, 만발한 꽃이라고 이해하면 될까?

  1952년 12월생. 중국에서 이 시절에 지식분자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팔자 참. 아니나 다를까, 열여섯 살이던 1969년에 헤이룽장성, 저 멀고 먼 북쪽의 꽝꽝 언 땅인 흑룡강성으로 하방을 당해 1976년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무려 7년 동안 어린 청소년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이 책 <번화>는 2012년에 발표해서 마오둔 문학상, 시내암 상, 루쉰 문화상 등을 탔단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상하이를 무대로 변호사 후성(滬生), 대 아프리카 잡화 무역업을 하는 후성의 친구 아바오(阿寶), 아바오가 열 살 때 영화표를 사러 줄 섰다가 친하게 된 샤오마오(少馬)의 이야기다. 두 권 1,156 페이지에 달하는 벽돌이지만 쇤네는 189페이지까지 읽고 때려 치웠다.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로 접어들지 않았겠지만, 독자로 하여금 확 몰입하게 하는 스토리 라인도 없고, 읽고 읽고 죽자사자 읽어온 연애 이야기도 진짜 별 거 없고, 전혀 야하지도 않으며, 젊은이들의 인생관이 심금을 울릴 것 같지도 않은 데다가, 옛 중국문학의 서술기법이라고 하는 화본話本 형식의 문장이, 적어도 189 페이지까지 읽었으면 이젠 적응할 만한데도, 도무지 그렇지가 않았다.

  화본 형식이 뭐냐고? <삼국지 연의>나 <수호전>이나 뭐 하여간 중국 고전 소설에서 사용하던 거라는데 갑식이가 말했다, 점period 찍고, 중얼중얼. 을순이가 물었다. 이렇고 저러냐? 이런 게 쉬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이걸 1,156 페이지까지 읽는 건 그만두고 2백 페이지도 못 가서 근육경련에 마그네슘 부족은 분명 아닌데 눈꺼풀까지 발발 떨리는 현상이 일어났으니, 만수무강은 못하더라도 괜히 서둘러 숟가락 놓을 일은 없어야겠기에 눈물을 머금고(진짜야?) 접었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한 거라서 웬만하면 죽자사자 읽는 것이 예의범절이요 에티켓인 건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어쩌냐, 당장 죽겠는 걸.

  내가 사는 도시 시민들에게 미안한 바가 작지 않다. 뭐 다 인생이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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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은 여자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4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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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자기가 인간으로 현현한 신인줄 아는 자만 덩어리 잡놈. 여자: 가스라이팅 당하는 걸 즐기면서 마지막 천사의 이름을 갖고 싶어하는 악마. 초대받은 여자: 눈에 뵈는 게 없는 소시오패스. 복장 여러번 터질 각오하시고 읽기 바람. 보부아르 이름 값으로 별 하나 엣다 먹어라, 더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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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30 20: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사실은 2별 보부아르 이별인가요?! ㅋㅋㅋㅋㅋ <레 망다랭>이 더 좋은가 봅니다?!

Falstaff 2024-03-30 21:26   좋아요 1 | URL
넵! 망다렝이 훨씬 좋았습니다! 이 작품 다음에 쓴 거라고 하더라고요.
근데요, <초대받은 여자>가 분명히 실존주의 작품이라는 거.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