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라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6
메릴린 로빈슨 지음,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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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생이면 여든이 넘었다. 1980년에 <하우스키핑>으로 데뷔하고 2004년에 <길리아드>, 2008년에 <홈>을 발간했다. 이 세 권의 책이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판되었을 뿐. 나는 이 세 편의 작품만 읽고 매년 전혀 가망이 없는 노벨 문학상 후보 투표하기에 매릴린 로빈슨한테 한 표를 던졌다. 살만 루슈디가 무슬림 원리주의자에게 테러를 당해 눈 하나를 잃은 해를 빼고는. 그렇게 로빈슨의 작품들은 알게 모르게 내 기억 속에 남았다. 십년의 세월이 흘러 작품의 스토리보다는 마음 속에 산산한 잔금으로 남은 유리창처럼 스산하고 쓸쓸한 광경으로. 이이가 2014년에 발표한 <라일라>가 번역해 나왔다는 걸 알자마자 희망도서 신청을 해 읽었다. 이 책 이후로 2020년에 <잭>이란 작품도 발표한 모양이다. 그것도 얼른 번역 출판했으면 좋겠다. 출판한 해로 따지면 40년 동안 장편소설 다섯 편을 발표했을 뿐인 과작의 작가. 사람의 마음 속에 든, 말하지 못할 불안을 표현하는 방면에서 탁월하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아니지만 책을 읽는 속에서는 쨍, 유리창에 금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는 이야기꾼.

  당신이 매릴린 로빈슨을 처음 읽는다면 이 책을 선택하기 앞서 <길리아드>와 <홈>을 먼저 읽어 두시라고 권하겠다. 이 두 편과 <라일라>의 무대가 아이오와의 작은 농촌 마을 길리아드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래된 계약인 구약에 나오는 “길르앗”의 영어식 표기가 길리아드. 지금 찾아보니 “치유의 도시”라는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그러면 <길리아드>, <홈> 그리고 <라일라>를 치유 3부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사실이 그렇다. 세 작품 다 길리아드에 돌아와, 도착해 지나간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치유의 전제조건은? 아파야 한다. 상당한 상실을 포함해서. 매릴린 로빈슨의 작품을 읽는 일이 금간 유리창을 품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갖게 하는 이유이리라.


  1930년대 작은 도시의 빈민 가옥. “아이는 어둠 속에서 현관 입구에 있는 계단에 앉아 추위에 떨며 자기 몸을 껴안고 있었다.” 이렇게 작품은 시작한다. 집에 부모가 있는지, 아니면 이 집에 맡겨진 아이인지 아직 모른다. 아이는 극단의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며 잠들기 바로 직전이다. 잠에 빠지기만 하면 곧바로 편안한 죽음이 아이를 품에 안고 떠나가버릴 것이다. 주로 밤에 도착해 집의 구석 어딘가에서 대충 잠을 자는 대신 집을 청소하는 것으로 집세를 갈음하는 나이든 여인 달Doll. ‘인형’이란 뜻을 가진 doll 맞다. 역자 박산호는 이를 ‘달’이라 표기해 잦은 빈도로 나오는 달moon과 조금 헛갈리게 하지만 읽을 때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얼굴에 큰 반점처럼 보이는 색이 바랜 흉터를 가지고 있는 달은 사실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날 밤 아이를 구조하고 날이 새기 전에 아이를 숄에 둘둘 말아 품에 안고 길을 나선다. 이 집에 계속 있다가는 무관심한 방치로 인해 며칠 안에 죽을 아이였으나 달이 아이를 맡기로 결심을 한 것. 하지만 달은 집안의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 부모, 또는 부모 가운데 한 명, 아니면 부모로부터 위탁을 받은 보호자한테도. 이렇게 해서 달은 아이 유괴범이 된 것이고, 얼굴에 나타나는 특징 때문에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이젠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달이 처음 향한 곳은 나이든 여자 혼자 있는 집. 그곳에서 여자의 친절을 받아 빵과 우유를 먹이고 몸을 씻긴다. 이가 득실거리는 머리카락을 삭발하고 비누칠을 꼼꼼하게 한 후, 나이든 여인은 아이에게 ‘라일라’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예쁜 이름을 지으면 예쁘게 클지도 모른단다.”

  여자의 집을 나와 유랑농민, 자기 토지도 없고 소작도 얻지 못해 노새가 끄는 마차에 짐을 싣고 농장 일이 있는 곳을 향해 유랑하면서 농사일을 도와 대가를 받아 먹고사는 일행에 끼어든다. 돈과 마르셀 부부와 이들의 딸 멜리, 그리고 아서와 그의 두 아들. 달과 라일라는 이들과 함께 유랑하며 함께 일하고 먹는 생활을 시작한다. 세월이 조금 흐르고 라일라도 훌쩍 커버리자, 달은 아이를 데리고 작은 마을에 정착해 라일라를 학교에 보낸다. 글을 읽고 쓰며, 더하기 빼기와 곱하기는 할 줄 알아야 세상 사는데 편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나 언제나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달은, 갑자기 라일라한테 공부는 필요한 만큼 다 했으니 다시 떠나자고 말하고 그날로 즉시 다시 돈과 마르셀 부부를 찾아간다. 라일라는 이때 즈음해서 달이 스타킹 위에 날이 바짝 선 단도를 매달고 다닌다는 걸 알았다.

  돈 일행이 정확하게 말은 안 했지만, 이제 미국에는 대공황이 밀어닥쳐 일감도 없고, 벌판엔 건조한 먼지와 황진Dust Bowl 현상이 극심해 날로 살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이 어느 날 사라졌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다. 자신의 피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의 피를 뒤집어쓴 채. 스타킹에 숨겨온 단도를 휘둘렀으며, 상대한 남자가 죽었는데, 남자는 라일라의 아버지이든지, 삼촌이든지, 아니면 그들이 부탁한 사람이었다. 늙은 달은 보안관에게 체포되어 나이 덕분에 관대한 구류상태로 있다가 도망해 넓고 넓은 옥수수 밭에 들어가 행방불명된다. 옥수수밭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시라. 시카고에서 세인트루이스까지 차로 운전해 여덟 시간 이상 달려도 계속 밀밭이 늘어선 곳이 미국이다. 바로 옆 아이오와의 옥수수밭은 악명이 더 높아 그 속에 들어가 길을 잃고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라일라도 달을 찾기 위해 옥수수밭에 들어갔다가 구사일생, 우연의 힘으로 살아 돌아온다.

  이제 돈 일행도 궁핍의 절정을 맞아 가족 단위별로 헤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 라일라는 이 와중에 달을 잃고 대도시 세인트루이스로 흘러든다. 한 마을의 상점 여자 주인이 준 주소와 10달러만 들고 간 곳은 세인트루이스의 윤락가였다. 그곳에서 ‘로지’라는 이름의 나이든 매춘부가 된 라일라. 길쭉하게 생기고 큰 손과 백 번도 넘게 햇볕에 탄 얼굴에 농사일로 억센 몸을 갖고 있는 라일라는 전혀 인기있는 매춘부가 될 수 없었다. 그는 그냥 그곳에서 나와 터미널에서 앉아 있는데 한 여성이 함께 타고 가지 않겠냐고, 혼자 운전해 가기엔 너무 멀리 간다고 해서 그냥 떠났고, 밤새 달려 도착한 주유소에서 내려 또다른 운전자를 만나 한 번 더 이번엔 그리 멀리 가지 않은 곳에서 내려 걸었다. 걷고 또 걷다가 그저 흘깃 본 곳에 버려진 오두막 한 채가 눈에 띄어 그곳에 자리 잡았다. 늦봄. 초가을까지는 머물 수 있을 듯. 조금 떨어진 곳에 강이 흘러 몸을 씻을 수 있고, 주변에 농가도 있고 마을도 있어 일을 해주고 돈을 받든지 음식을 얻을 수도 있을 것. 이 마을 이름이 바로 “길리아드.”

  여기까지 읽고 잠깐 정지. 책꽂이를 뒤져 이이의 전작 <길리아드>를 꺼내 들었다. 주인공 존 에임스 목사. 일흔일곱 살의 에임스 목사는 겨우 일곱 살 먹은 유일한 혈육에게 쓰는 편지. 오래 전에 아내가 딸을 낳다가 죽고 조금 후에 딸도 죽어 혼자 외롭게 살던 늙은 목사 앞에 도착한 젊은 여성. 그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고, 아들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 같아 글로 남기는 아버지. 에임스의 아버지 존 에임스 목사. 할아버지 존 에임스 할아버지. 어려서 죽은 둘째 형 존 에임스. 목사의 가장 친한 친구 보턴. <라일라>에서는 ‘바우턴’으로 표기하는. 그래서 앞에 이 책을 읽기 전에 <길리아드>를 먼저 읽어 보시라 권했던 것. <길리아드>에서 등장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아내가 바로 라일라다. 

  라일라는 오두막에 터를 잡고 농가 일을 해주기도 하고 자비로운 그레이엄 부인의 바느질, 다림질을 해주기도 하고, 목사 사택의 정원을 가꾸기도 하며 적은 돈을 모아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늦어도 겨울이 오기 전 떠날 수 있게 버스비를 모으고 있었다. 자기 정원을 솜씨 좋게 관리하면서 한쪽에다 감자와 콩을 심기도 하는 라일라에게 호감이 가는 목사. 그는 당연히 애정도 있겠지만, 늙은 목사에게 애정이란 단어가 어색하면, 끌림이 있었겠지만 이에 못지 않게 성직자의 돌봄에 이끌려 한밤중에 라일라의 오두막 근처까지 가보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야외생활에 익숙한 라일라는 오두막 근처에도 오지 않았건만 목사가 근방에 왔다가 조금 머물다 간 것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날이 흘러가고, 다시 오두막 근방을 찾은 목사. 이때 라일라는 강에서 큼직한 생선 한 마리 낚았고, 들고 오다가 미끄러뜨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는 도중에, 단 번에 생각도 하지 않았던 말이 라일라의 입에서 불쑥 쏟아져 나오고 만다.

  “나와 결혼해야 해요.”


  인연이 되려면 된다. 그리하여 당시엔 결혼 적령기를 넘은 여성과 일흔 고개를 앞에 둔 늙은 목사는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는다. 아내는 그러나 언젠가는 길리아드를 떠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남편은 어느 날 젊은 남자가 현관을 두드린 다음 즉각 라일라와 함께 집을 나서는 광경을 떠올리지 않기가 쉽지 않다. 두 명은 서로 다른 인생사를 겪으며 세상은 언제나 위험한 얇은 유리 위에, 살짝 언 얼음을 딛고 산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이들이 겪은 상처와 아픔과 아린 기억. 이것을 치유하는 곳, 거기가 길리아드였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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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4-03-15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면 재미없을 거 같은데 작가를 매우 상찬하시어서 매우 궁금합니다. 브라우티건 책 하나 주문하는 김에 길라아드도 주문해 보겠습니다!

Falstaff 2024-03-15 15:57   좋아요 0 | URL
옙. 재미 말고 하여간 분위기가 죽이는 작가더라고요.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소피의 일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딩링 지음, 김미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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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링. 1904년에 태어나 84년에 간 중국작가. 나는 적어도 한 편 이상 딩링을 읽은 줄 알았다. 굉장히 입에 익은 이름인데 그것 참, 뒤져보니 처음이네. 누구하고 헷갈렸을까? 얼핏 누군가가 떠오르는데 이름이 가물가물하네. 생몰연대를 보면 참 불쌍한 세대다. 청말(淸末), 군벌, 국민당/공산당, 중일전쟁 다 겪고 드디어 붉은 군대에 의한 해방 중국을 만났지만 기다리고 있던 건 대약진운동과 이어지는 문화혁명. 골로 간 세대. 딩링은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인텔리겐치아 답게 1930년에 좌익작가협회에 가입하고 날카로운 필봉을 과시하면서 스탈린문학상 2등상을 타기도 했지만 3년 후인 1955년(작가로서 최고의 전성기 시절에) 반당집단으로 비판을 받고 1958년엔 당적을 박탈당한 후 저 멀고 먼 흑룡강성 베이다황으로 쫓겨나 무려 20년간 노동개조를 겪는다. 하여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니까? 왜 민주 공산주의는 없는 건지. 공산주의는 극소수에 의한 종신(또는 축출될 때까지 한정적) 독재를 해야 하는 건지. 그러면서 모든 예술행위를 말살시키는 건지.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셔? 난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자체가 제일 큰 문제이며 암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150년 전쯤 태어났으면 무정부주의자가 됐을 거 같기도 혀, 글치?


  <소피의 일기>는 1928년작. 딩링은 이 작품으로 본격적인 필명을 날렸다고 한다. 작품은 12월 24일, 소피의 사상에 입각해 이야기하자면 종교는 분명히 아편이니까 딩링한테는 전혀 의미가 없었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작해 다음해 3월 28일 새벽 세 시에 쓴 것까지.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20대 초반의 베이징 청년들. 주로 경대京大, 서울에 있는 대학, 즉 베이징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들이며 연인 한 커플, 소피를 사랑하는 남자 둘. 그리고 친구 몇 명이다.

  일기를 쓰는 ‘나’ 소피는 폐병을 앓고 있다. 당시 폐결핵은 대단히 중한 질환인데 베이징의 황사를 견딜 수 있었을까? 뭐 작품 속이니까. 하여간 웨이디는 소피보다 네 살이 많지만 소피를 ‘누나’라고 곧잘 부른다. 어린 누나를 사랑하고 있다. 소피는 웨이디를 사랑할까? 거기까지는 아니고 가벼운 접촉도 할 마음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사랑은 분명히 아니다. 그냥 친한 동생 또는 오빠? 좋아, 그 정도야 뭐. 친구들 가운데 커플이 있다. 위팡과 윈린. 둘은 진짜 연인이다. 하지만 1928년. 아무리 당시의 선진국이자 문화국이라할지언정 이들은 사회의 양식에 따라 깊은 페팅조차 삼가한다. 하물며 혼전임신의 가능성이 있는 섹스야 말할 것도 없고. 소피는 이 커플을 보면서 비웃는다. 좋으면 하는 거지 뭘 또.

  이 그룹에 혜성같이 등장하는 조각같이 잘 생기고 키도 큰 남자 링지스凌吉士. 이름이 웃기다. 우리말로 발음하면 ‘능길사’. 싱가포르에 사는 화교. 베이징에 유학해 대학을 다닐 정도면 싱가포르에서 방귀 깨나 뀌는 집안이 틀림없다. 원래 결핵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인병이라고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도 해서 일종의 선망이 되기도 했다. 푸치니의 위대한 오페라 <라 보엠>과 베르디의 불멸의 작품 <라 트라비아타>를 떠올려 보시라. 이 능길사, 랑지스도 소피를 점점 사랑하게 된다. 소피 역시 웨이디 만큼 랑지스를 그냥 친구로 여기지 않아 저 뒤에 가면 부비부비 키스도 하는데 딱 그것으로 끝, 더는 진행시키지 않는다. 알고보니 잘 생긴 외모에 헌칠한 체격으로 베이징 골목마다 연인을 하나씩 숨겨두고 있다나? 확인한 바 없지만 풍문이 그렇단다.

  이게 다다. 친구들의 연애와 ‘나’ 소피의 연애, 그리고 병. 입원을 하고 퇴원을 하고, 베이징에서 벗어나 교외로 이사할 생각을 하고. 연애도 안 되고, 이사해봤자 병도 쉽게 낫지 않을 거 같은 1920년대 중국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젊은이들의 혼돈.


  도서관에서 발견하지 않았으면 안 읽었을 거 같다. 널럴하게 편집한 단편소설이라 본문만 98쪽에 2017년 정가가 14,500원. 1920년대엔 센세이셔널 했겠지만 지금 읽으면 뭐 별로 공감하고 말고가 없는 그냥 그런 청춘들의 고뇌, 괴멸. 당시에 쓴 작품 몇 개를 합해서 좀 두껍게 한 권을 냈으면 좋았을 듯. 그러나 그건 출판사 마음이니까, 너네 마음대로 하셔요. 책 한 권 읽는데 두 시간도 안 걸리면 문제 있는 거 아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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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14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딩링, ㅋㅋㅋ 창비에서 나온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 사두고 아직 안 읽은 거 같아요....읽은 줄 알았는데 안 읽었나 봅니다. 뭔가 배경이 답답해서 읽다가 덮었던 듯;;;; 그건 그래도 작품 수도 좀 더 있고 만원인데.....-_-;

Falstaff 2024-03-14 21:09   좋아요 0 | URL
저는 어이없게도 정말 형편없는 소설 <달팽이가 사랑할 때>의 딩모를 연상했다는 거 아닙니까. -_-;; 딩모 보다는 천 배쯤 낫습니다만.

stella.K 2024-03-14 0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값이 꼴값인뎁쇼? ㅎㅎ
딩링 저도 들어본 것 같은데. 제목도 그렇구요. 아, 소피의 선택과도 헷갈리겠어요. ㅋ

Falstaff 2024-03-14 21:10   좋아요 2 | URL
지만지가 자주 이런 짓을 합니다. 단편집에서 딸랑 한 두 작품 빼서 단행본으로, 그것도 비싸게 팔아먹는 거요. 아휴.... 옙. 소피의 선택도 헷갈리게 만든 거 가운데 하납니다.
근데 웃겨요, 표지 보면 ˝소피˝를 한자어로 ˝사비 여사˝라고.... ㅋㅋㅋㅋ

stella.K 2024-03-14 21:14   좋아요 1 | URL
아, 이제 보니 정말 그러네요. 웃겨요. ㅋㅋ

coolcat329 2024-03-14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총 네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내가 안개마을...>을 읽었는데 앞의 두 작품은 공산당을 비판하는 내용인데 마지막 작품은 또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한 주인공이 나와서 작가 딩링이 격변의 시대에 얼마나 작가로서 힘들었겠는지 알겠더라구요.

Falstaff 2024-03-14 21:12   좋아요 0 | URL
20세기 초중반에 출생한 중국 지식인 계급은 정말 험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근데 말하고 보니까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유럽인들도 마찬가지이긴 하군요. 하여간 20세기란.... 윽. 우리나라도 뭐 비슷하네요.
 
성 도밍고 섬의 약혼 서문문고 17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박종서 옮김 / 서문당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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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시절을 잘못 만나 하필이면 괴테와 실러의 전성기 때 작품활동을 하는 바람에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거나 공연하지도 못한 불운한 (극)작가 클라이스트. 군인의 아들로 자신도 근위대 연대에 들어갔다가 잠시 제대해 수학과 물리 공부를 했으나 뭔 병이 있었든지 요양을 위하여 산천초목 경계 좋은 뷔르츠부르크에 갔다가 산세 수려함에 반해 오래 억눌렀던 창작의 불꽃을 피운 작가. 그러면 뭐 하나. 아리따운 약혼녀, 장군의 딸인 미네 아가씨한테 파혼도 당하고 나폴레옹은 조국 땅을 초토화시켜, 군인 가계의 형제 가운데 한 명인 클라이스트는 몸과 마음이 번다했던 19세기 초엽. 이때 한 모임에서 재색을 겸비했지만 병이 깊어 늘 우울한 유부녀 헨리에테를 알게 되고 1911년 포츠담에서 헨리에테와 함께 모습을 감춘 클라이스트는 호숫가에서 이미 숨이 넘어간 연인의 시신 옆에서 자신의 관자놀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김으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니 당년 34세. 그는 몰랐지. 불과 1년만 기다리면 1812년, 프랑스 군은 러시아에서 수십만 명이 굶어 죽고 얼어 죽는 큰 패배를 당해 14년에는 부오나파르테가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가야 할 예정인 건. 그래도 백년이 더 지나 20세기 최고의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프란츠 카프카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라고 선언해주니 지하에서라도 조금의 기쁨을 누리기를.

  대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라고 하면 창비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미하엘 콜하스>를 연상할 듯하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클라이스트는 극작가로 더 유명한 것 같다. 책방을 뒤져보면 희곡 작품이 소설보다 단연 많다. 하지만 당대의 독일어 권 지역에선 거의 신격화 수준이었던 괴테한테 찌그러져 별로 공연도 해보지 못했다 하니 거 참. <깨진 항아리> 같은 건 꽤 괜찮은 데 말이지. 내가 읽은 클라이스트는 전부 다 유럽, 독일 지역을 무대로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도 이번에 알았지만, “성 도밍고 섬”이 어딘가 하면,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있는 섬이다. “산토도밍고”는 아시다시피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이다. 그러나 작품의 무대는 도미니카보다 아이티 쪽.


  모두 세 편의 중단편을 실은 작품집이다. 이 중에서 표제작품 <성 도밍고 섬의 약혼>에 대해서.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산토도밍고 섬의 한 시절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섬을 차지한 프랑스의 큰 고민 하나가 점령한 이후에 원주민들을 노예 이하, 짐승 수준의 노동을 강요하고 동시에 픽션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폭력과 학대와 학살을 서슴지 않아, 사실상 아이티 뿐만 아니라 서인도제도의 원주민은 멸종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가동시키려 하는데 농장일을 할 일손이 있어야지. 그리하여 당시 서인도제도를 점령한 영국, 프랑스, 스페인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대규모로 노예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제 버릇 개 주지 못한 유럽 백인들은 과거 원주민한테 했던 정도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여전히 폭력과 학대와 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과 노동, 그리고 성폭력을 저질러 흑인들의 불만이 꼭대기까지 쳐 올라왔다. 고통이 극단까지 치달으면 무는 법이다. 세상의 모든 민란과 마찬가지 경우로 서인도제도의 거의 모든 섬에서도 흑인에 의한 폭동이 자주 발생했다. 이들이 프랑스인, 영국인, 스페인인을 가릴 수 있지 못하여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는 표식인, 흰 피부를 가진 종족이 보이면 가차없이 죽여 없앴다. 마리즈 콩데의 소설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를 비롯해 숱한 소설 속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19세기 초, 흑인들이 백인을 학살한 산토도밍고 섬의 프랑스 영토 포르토프랭스의 기욤 폰 비누브 씨 농장. 이곳에 콩고 호앙고라는 이름의 늙은 흑인이 살았는데 아프리카 황금해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 노예선을 타고 왔다. 평소 성격이 착하고 정직한데다가 주인과 함께 쿠바 섬으로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가 불어 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주인 비누브 씨의 목숨을 건져주었다. 이 일에 감격한 주인은 당장 호앙고에게 자유를 부여했으며 집안과 농장 일체의 관리를 맡겼다. 그는 여전히 성실하고 정직해 셈이 흐트러지지 않아 더욱 호의를 품은 주인은 방대한 농토의 총 관리자로 임명하고 전처의 먼 친척뻘인 혼혈녀 바베칸을 아내로 맡게 하였다.

  호앙고가 60세가 되자 적지 않은 퇴직금을 주어 은퇴를 시키고 비누브 씨가 죽은 후에 유산의 일부로 연금도 배당하게 해주었으니 세상에 이런 주종이 없었다. 그러나 황금해변 출신의 강건한 전사의 피는 속일 수 없어서, 식민지 내 프랑스 국민회의의 경솔한 결정에 반대하는 흑인들의 복수가 농장마다 요원의 불길처럼 휘몰아치자 모든 호의와 배려에도 불구하고 비누비는 콩고 호앙고의 총구를 피할 수 없었다. 비누브 씨의 머리통은 호앙고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이 처음으로 닿은 곳이었다. 비누브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백인들과 피신했는데 호앙고는 기어이 그 농장까지 쫓아가 불을 지르고 건물을 파괴했으며 백인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이제는 흑인들이 몇 명씩 단위를 이루어 백인 여행자를 습격하고, 멀리 까지 가서 집 안에 틀어박혀 숨을 죽이고 있는 백인들도 습격해 죽이는 일이 늘 발생했다. 호앙고는 백인 격멸을 위하여 아내를 닮아 피부색이 연한 열다섯 살 먹은 딸 토니까지 이 일에 끌어들였다. 구 비누브 저택이 길가에 있어서 여행하는 백인들을 콩고 호앙고의 무리가 도착할 때까지 안심시키고 방비를 느슨하게 만드는 역할이었다. 이를 위해 친엄마 바베칸은 딸 토니에게, 직접적인 교접을 제외하고 백인이 시도하는 모든 애무를 허용하라고 지시를 내리기도. 1803년 경을 무대로 한 1811년 작품이다. 흑인들에 관한 인종 의식을 지금 수준으로 기대하면 곤란할 듯하다.

  콩고 호앙고가 약탈, 학살, 강도 업무차 출장을 간 시기의 한밤. 이 집의 현관을 두드리는 사람이 나타났다. 엄마 바베칸이 나가보니 백인 남자다. 백인은 흑인 남자들이 집에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경계를 멈추지 않는다. 바베칸과 토니는 그를 집으로 끌어들여 주민등록 조사를 먼저 한다. 그랬더니 프랑스 군인이기는 하지만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스위스인 장교. 구스타프 폰 데어리트. 포르도 항에서 내려 포르토프랭스를 향해 가는 중이란다. 흑인 군대를 거느린 데살린 장군이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하기 전에 가야 하는 명령을 받았지만 어느 곳에서 흑인들의 공격을 받을 지 몰라 밤에만 이동해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단다. 근데 혼자가 아니다. 점잖은 나이 많은 아저씨와 부인, 그리고 아이들 다섯, 하인 몇 명과 하녀. 다 합해 열 두어 명. 지금 1마일 떨어진 갈매기 늪 근방의 동굴에 숨어 있다고. 이들 모두 몹시 배가 고픈 상태여서 음식물을 급히 가져다 주었으면 좋겠다고 주문을 한다. 바베칸 노파는 마치 동정심 많은 순박한 시골 농부처럼 위장해서 구스타프를 옛 주인인 비누브 씨의 방에 들여 푹 쉬게 해주고 음식물도 아이에게 들려 갈매기 늪으로 보낸다. 그러면서 시간을 끌 속셈. 늦어도 내일 밤까지는 콩고 호앙고 일당이 도착할 테니까 그때가 되면 일은 끝난다.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구스타프에게 발 씻을 따뜻한 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간 열다섯 살 먹은 딸 토니. 얘가 문제다. 흑인들도 피부색이 진하고 옅은 차이에 따라 우월이 있는 모양이다. 토니 자신이 보기에 자기는 백인의 후예라서 지금 집에 있는 흑인들하고는 당연히 차별을 둘 만큼 다른 신분으로 착각하고 있다. 구스타프가 봐도, 원래 급박한 상황에 처하면, 마치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소나무가 솔방울을 많이 다는 것처럼, 전혀 희지 않은 피부를 가지고 있는 토니가 뇌쇄적으로 어여뻐 보여 순간적으로 테스토스테론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한다. 토니 생각에도 조금 후, 길어도 내일 밤이 되면 또 수 십 명의 피가 튈 터이니 감자기 에스트로젠이 분비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들은, 했다. 하고 나니까, 이게 원래 그런 건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또는 사랑한다고 오해하는 감정이 폭발적으로 넘쳐난다. 가뜩이나 피곤했던 구스타프는 곧바로 깊은 잠에 빠지고, 내일 밤이 아니라 오늘 밤에 난데없이 콩고 호앙고가 들이 닥친다. 토니는 깜짝 놀라 구스타프의 방에 가보니까 노끈이 벽에 걸려 있어서 그걸 이용해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는 구스타프의 손과 발을 묶어버렸다. 내버려두었으면 싸우려 들고, 그러면 여지없이 죽을 수밖에 없으니.

  이렇게 포로로 잡힌 구스타프. 그러나 늙은 삼촌과 아이들이 도착하는데, 자세하게 보면 “늙은” 삼촌의 아이들이라 해도 스무살에 육박하는 장정들이다. 폰 데어트리 집안이니 귀족 떨거지 자제들이었을 테고, 그러면 총칼 다루는데 아주 익숙할 것.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눈치를 탁 채고 오히려 콩고 호앙고 일당을 제압해버린다. 그리고 토니와 함께 구스타프가 묶여있는 이층 방에 올라가니 눈이 뒤집힌 구스타프는 묶이 손이 풀리자마자 피스톨을 들고 토니의 가슴을 쏴버린다.

  1811년의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그는 영낙없는 낭만주의자였다. 이 시기 소설 속 주인공들은 총을 심장에 맞아도 할 말은 다 하고 죽는다. 어떤 말을 했는지는 안 알려줌.


  이 작품 외에 1807년작 <칠레의 지진>과 1808년 작 <O 후작부인>이 실려 있다. 다 수준 이상의 작품이다. 다만 번역한 박종서 전 고대교수가 우리나라에 독일문학을 번역 소개한 공로가 지대한 양반이긴 하지만 생몰이 1922~1983이다. 그러니 번역하고 적어도 40년 이상이 지났다. 다른 번역이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젊은 분의 경우 읽다가 조금씩 어색한 곳도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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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3-12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창비세계문학에 클라이스트의 중단편 소설집 <미하엘 콜하스>가 있는데 이 책에 세 작품이 다 있어요. 한 번 찾아보시길요.

<미하엘 콜하스> 볼 때마다 그냥 지나쳤는데 어떤 분위기인데 알겠네요.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4-03-12 16:39   좋아요 1 | URL
앗 그렇습니까? 저도 창비 <미하엘...> 읽었는데 전혀... ㅋㅋㅋㅋ 오래 전이라서 그랬나요? -_-‘‘

coolcat329 2024-03-12 0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미하엘 콜하스>를 가지고 있네요! 🤣🤣

잠자냥 2024-03-12 09:28   좋아요 2 | URL
창비 <미하엘 콜하스> 엄청(?) 재미나요. 번역이 뭔가 박력 넘쳐서 전 더 재미나게 읽었는데, 번역 문장 아무튼 아직도 칭찬하고 싶습니다. ㅎㅎ (진짜 진짜 아니 번역을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신기& 감탄!)

coolcat329 2024-03-12 11:00   좋아요 1 | URL
오! 재미에 번역도 좋다니 사두길 잘했네요. 다음 읽을 책으로 찜!

Falstaff 2024-03-12 16:40   좋아요 0 | URL
음... 한 번 다시 읽어볼까.... 하다가, 안 그럴 거 같네요. 흑흑...

stella.K 2024-03-12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도 번역이지만 서문당 출판사가 아직도 있군요. 역자가 독일어 번역 1세대였을테니 그 공로는 인정할만 하지만 역시 혁신이 필요하긴 하겠네요. 저도 기회되면 창비걸로 읽어보겠슴다.

Falstaff 2024-03-12 16:42   좋아요 1 | URL
옙. 아직 연명은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에휴... 생로병사가 다 그렇지요.

그레이스 2024-03-13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미하엘 콜하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까지 생각나는 연쇄반응!

총을 맞고도 할 말 다하고 죽는...낭만주의! 그렇네요!^^

Falstaff 2024-03-13 16:24   좋아요 1 | URL
앗, 애너벨 리까지 연결이 되는군요!
라 트라비아타에선 20분 후에 죽어갈 비올레타가 극강의 고음으로 악을 악을 쓰기도 하는 걸요. ㅋㅋㅋㅋ
 
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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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헌책방에서 사놓고 일 년도 넘어서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싫었던 이유는 도서관에 오스터의 최근 번역서 <4 3 2 1>을 희망도서로 신청할까 말까 고민했던 이유와 같다. <4 3 2 1>은 한 달을 망설였다가 신청하지 않았고, 그래도 미련이 남아 다음 달에 결국 신청을 했다. 2월에 도착할 거 같다(지금은 3월, 다 읽었다). 1,550 페이지에 달하는 <4 3 2 1>을 읽기 전에 워밍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더 이상 미루지 못하고 드디어 <브루클린 풍자극>을 읽어 치웠다. 여태 미루었던 건 오스터의 글이 비록 무지하게 재미있을지언정 그가 주장하는 바에 도무지 동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이의 작품으로 <달의 궁전>과 <뉴욕 3부작>을 읽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뉴욕 전문 작가. 그래서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인 “버터 맛”을 오스터만큼 진하게 풍기는 작가도 드물다. B급 헐리웃 영화, 볼 때는 정말 재미나고 흥미진진하지만 늘 비슷한 결말의 해피엔드를 장만해 극장을 나올 때 벌써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 그와 같았다고 할까? 하여간 나한테는 그랬다. 그리고 <브루클린 풍자극>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만일 별점을 준다면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미 하나는 확실하게 보장하는 폴 오스터라서 별 넷은 주어야 마땅하다. 뻔한 미국식 스토리지만 오스터가 태평양 건너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팬 층을 확보하고 있는 이유 역시 천생 이야기꾼이라서 일 것이다.


  <브루클린 풍자극>의 주인공은 ‘네이선 글래스’라는 이름의 화자 ‘나’이다. 네이선, 애칭 ‘냇’이 비록 브루클린 태생이라도 세 살 때 부모 손을 잡고 뉴욕 교외로 나가 살다가 56년이 흘러 이제 쉰아홉이 된 중늙은이다. 몇 년 전에 폐암에 걸려 종양 제거술을 받은 다음 고통스러운 방사선과 화학요법을 거치느라 이런 병증을 겪은 거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기증, 탈모, 의지상실, 실직, 이혼의 과정을 겪고나서 이제 암은 조심스러운 낙관상태에 이르렀다. 31년 동안 미드애틀랜틱 생명보험회사의 맨해튼 사무실에 출근하는 생활도 종지부를 찍었고, 이름마저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전처 이디스와 이혼하면서 브롱크스빌에 있던 집을 판 돈을 각기 절반씩 나누기로 합의해, 은퇴와 이혼에서 비롯했을 것이 분명하게 이제 서글프고도 우스꽝스러운 삶을 조용히 마감할 수 있는 곳으로, 상처입은 개가 그러하듯이 태어난 본거지로 기어들어온 것이었다. 프로스펙트 공원에서 반 블록 거리에 위치한 1번가의 뜰이 딸린 방 두 개짜리 저층 아파트에 세를 들어가보니 은행잔고가 40만 달러 정도. 이 정도면 죽을 때까지 충분히 버티고도 남을 형편이다.

  중요한 전제사항이 바로 이거다. 은행잔고 40만 달러. 시공간이 2000년. 아무런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아침은 그냥 자기 손으로 샌드위치를 만들거나 달걀 프라이에 베이컨과 진한 커피로 때우든지 하고, 점심은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웨이트리스 마리너가 서빙을 하는 식당 코즈믹 다이너에서 해결한다. 저녁도 대충 식당에서 때우더라도, 사랑스럽기는 해도 골수 가톨릭에다가 의처증이 심한 남편을 둔 유부녀라서 전혀 가망이 없는 마리나한테 몇 백 달러짜리 목걸이를 기쁜 마음으로 선물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다는 거다. 이걸 우습게 여기지 마시라. 세상에서 가장 완고하고 보수적인 자본주의 나라 미국에서 남에게 비록 작더라도 선의를 베풀고 남을 돕고 살기 위해서는 Y2K 기준으로 은행잔고가 적어도 40만 달러는 있어야 한다는 거니까 독자여, 기만에 넘어가지 마시라. 근데 하는 거 보면 40만 달러가 아니라 4백만 달러 이상의 잔고가 있는 게 확실한 듯.


  은퇴자 네이선 글래스가 브루클린 1번가에 들어와서 하는 일은? 그는 남은 삶을 위한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나름대로 길고도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동안 저질렀던 모든 실수와 잘못과 어줍은 짓과 바보짓을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책>이란 제목으로 종이에 옮기는 일. 이제 남은 냇의 유일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쓰고 있다가 자주 들러 책구경을 하던 헌책방 “브라이트먼의 다락방”에서 누이동생 준의 외아들이자 조카인 톰 우드를 만나면서 한 순간에 책의 주인공은 조카 톰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냇보다 세 살 적은 준은 24세 때 뉴욕타임스 경제담당 기자 크리스토퍼 우드와 결혼해 톰과 오로라를 낳고 15년 후에 이혼한다. 2년 뒤에 두번째 남편 필립 존을 거쳐 성년이 된 딸 파멜라를 둔 주식 중개인과 세번째 결혼하고 마흔아홉 살 때 뜨거웠던 8월 중순의 오후에 정원을 손질하다 뇌출혈을 일으켜 다음날 죽어버린다. 딸 오로라는 엄마의 재혼 이후에 삐딱선을 타기 시작해 벌써 가출해버렸고, 아들 톰은 코넬 대학을 우등 졸업한 후 4년 풀 브라이트로 미시간 대학에서 미국문학 공부를 이어가다 박사 논문에 너무 어려운 과제를 다루는 바람에 학문 자체를 포기, 낙담해 브루클린의 헌책방에서 희귀본과 필사본에 관한 월간 카탈로그 작업을 하고 있던 거였다. 한 시절 똘똘이 스머프였으나 이젠 볼품없이 뚱뚱한 체격에 군턱, 두툼한 손에 총기가 사라진 눈에는 좌절한 기색이 철철 넘쳐 흘렀다. 박사 논문을 포기하고 뉴욕에 와서 꽤 오래,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특별히 혹독한 고행의 한 형태이자 가장 소중하게 품어온 야망의 붕괴를 애도하는 방식으로 택시운전을 하던 톰이 브라이트먼의 다락방에 와서 책구경을 하다 가게 주인 해리 브라이트먼에 의하여 스카우트되었다고.

  동생 오로라는 가출 소녀들의 전형적인 최악의 코스를 따라 포르노 배우까지 하는 막장으로 흘러갔다가 오빠 톰에게 구조되기도 하고, 약쟁이 기타리스트 빌리, 약쟁이 바이올리니스트 그레그와 함께 각지를 떠돌며 음악활동, 즉 길거리공연을 하다 딸 루시를 출산한다. 약물중독에 빠진 오로라는 기적적으로 같은 약쟁이 데이비드의 도움으로 마약을 끊고 그와 결혼하지만, 아뿔싸, 데이비드는 광적인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고 말았다. 궁지에 처한 오로라는 자기 딸 루시 혼자 뉴욕행 버스에 태워 오빠 톰에게 보내고 남편에 의하여 집안에 유폐되어 버린다.

  그리고 헌책방 주인 해리 브라이트먼. 양성애자에다 천부적인 사기꾼. 원래 이름은 해리 둥켈. 미국 중서부 지역의 기저귀 사업의 왕인 백만장자 칼 돔브로프스키의 못생긴 노처녀 막내딸 베트와 결혼해 아내의 돈으로 19년간 시카고의 화랑 “둥켈 플레르”를 호화롭게 운영하던 남자. 그의 복지와 사치를 보장해주던 천재 화가 알렉 스미스가 멕시코 옥사카에서 마흔 번째 생일날 술에 절어 지붕에서 뛰어내려 삶을 깨끗이 포기하는 바람에 덩달아 망할 처지에 속한 해리는 안 팔리는 추상화가의 제의로 알렉 스미스의 서명을 한 위조 회화를 세계 시장에 팔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꼬리가 잡힌 둥켈 씨는 결국 콩밥을 먹는다. 출소한 이후에도 자기 딸과 여전히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꼴을 보지 못한 장인 돔브로프스키 씨가 뉴욕에 작은 건물 한 채를 사주고 사업할 자금도 대주는 대신 이혼을 요구해 해리는 성을 둥켈에서 브라이트먼으로 바꾼 후 헌책방을 연 거다. 말이 헌책방이지 사실 희귀본과 작가 서명이 든 초간본, 필사본 같은 귀하고 비싼 책이 수입의 9할이 넘는, 우리가 아는 그냥 헌책방하고는 차원이 다른 가게를 열었다.


  이렇게 네이선 글래스를 둘러싼 세 명의 문제적 인간. 외조카 톰과 오로라(종손녀 루시 포함), 그리고 해리 둥켈인지 해리 브라이트먼인지 하는 사기꾼. 이 인간들이 작품을 이끌어가는데 어째 정상적인 인간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독후감 초입에 밝혔듯이 B급 할리우드 영화에서 너무 자주 본 것처럼 모든 것은 흘러가고, 결국 모두 잘 될 터이니. 해리는 지긋지긋한 사기와 양성연애 관계를 청산하고 드디어 즐거움을 찾아 구름 위로 올라가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하나밖에 없는 딸, 그것도 정신분열, 요즘 말로 조현병을 앓고 있는 서른한 살의 플로라한테가 아니라, 브라이트먼의 다락방 종업원이었던 톰 우드와 그곳에서 카운터를 보며 해리 자신과 플라토닉한 사랑만을 나누던 에이즈 환자 루퍼스에게, 재산도 그냥 재산이 아니고 전 재산의 98퍼센트 이상을 몽땅 유증해버린다. 사실 이건 스포일러가 분명하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이이의 소설 결말은 그렇게 흘러가니까.

  느닷없지는 않지만 하여튼 해리의 죽음으로 한 순간에 팔자가 바뀐 톰은 당연히 바로 직전에 한 아가씨와 사랑 비슷한 것을 시작했으니 이제 앞날엔 탄탄한 아스팔트 길만 남은 셈이다. 동생 오로라도 마찬가지로 새 삶과 새 사랑이 등장할 것은 뻔하고, 한 때는, 아니, 바로 직전까지, “하느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부르짖었던 화자 ‘나’ 네이선 글래스는 유리glass가 한 방에 깨지듯 다 늙어 새로운 연인이 등장하며 하느님과 화해하면서 미국인 누구나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이 완성된다. 역시 미국, 아니 신자유주의가 팽만한 세계의 모든 곳에서 꿈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매개는, 바로 돈이다.

  어때, 재밌겠지? 이보다 더 읽기 좋은 성인 동화는 아마 보기 힘들 걸? 너무 행복해져서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는 환상이 지랄로 변하는 현상도 겪을 수 있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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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3-11 07: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저 이 책 읽었는데 하나도 기억 나지 않아요ㅋㅋㅋㅋ폴스타프님 리뷰 읽고는 아주 희미하게 떠오를듯말듯 합니다 어쩜 이럴수가 있을까요ㅠㅠ

Falstaff 2024-03-11 07:21   좋아요 3 | URL
ㅎㅎㅎ 그래도 읽으실 때는 재미 있었을 겁니다. 이이의 작품이 대개 그렇더라고요. 저도 <달의 궁전> <뉴욕 3부작>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답니다. ^^

잠자냥 2024-03-11 13:21   좋아요 1 | URL
전 뭘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는데 다들 대단하십니다~!! ㅋ

Falstaff 2024-03-11 22:15   좋아요 0 | URL
잠자 님은 워낙 많이 읽으시니 그럴 수 있습지요. ㅎㅎ

은하수 2024-03-11 0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게 읽었죠~~^^
근데 읽고나면 어느새 스토리가 마구 섞입니다. 그래도 좋아하는 작가라... 일고 여덟권은 읽은거 같네요. 그래서 어떨땐 스토리가 섞이는데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 또 읽게되더라구요~~
첫책이 <뉴욕3부작>인데 대실망..
두번째 <달의 궁전> 읽었을때 충격..넘 재밌어서요. 그래서 지금도 저의 최애는 <달의 궁전>입니다♡♡♡

Falstaff 2024-03-11 22:17   좋아요 0 | URL
저는 3부작하고 궁전 다 어떤 내용인지 까맣게 잊었답니다. -_-;;
그저 ˝우연의 힘˝이 대단하구나, 했던 기억은 나는데 어떤 책을 읽고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아리송... ㅎㅎㅎ
몇 주 후에 천5백 쪽의 장편 <4 3 2 1> 올릴 겁니다. 흥미롭더라고요.

coolcat329 2024-03-11 08: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가지고 있는데 산 지는 십 년도 더 된 거 같아요. 물론 읽지도 않았죠. 😅
저도 위에 은하수님 처럼 <뉴욕3부작>은 대실망이었고 <달의 궁전>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도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주인공이 센트럴 파크 쓰레기통 뒤져가며 노숙한 부분 그 묘사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Falstaff 2024-03-11 22:18   좋아요 0 | URL
가지고 계시면 얼른 읽으셔요. 휙휙 지나갑니다. 재미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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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중국의 근대극에 관한 금기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차오위의 <뇌우雷雨>를 공연한 것이 신호였다고 한다. 1994년엔 한국, 중국, 일본의 연극인들이 뜻을 맞추어 베세토연극제를 창설해 제1회 베세토연극제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한 이후 삼국이 돌아가며 주최를 해 오늘에 이른다고. 베세토는 베이징Beijing, 서울Seoul, 도쿄Tokyo의 영문표기에서 앞자리 알파벳 두 개를 따와 BeSeTo라고 지었단다. 이후 2018년에 한중연극교류협회가 출범하여 매년 ‘중국희곡 낭독공연’을 올리면서 출판사 연극과인간을 통하여 “중국현대희곡총서”와 “중국전통희곡총서”를 간행하는데, 내 경우엔 중국현대희곡총서를 통해 중국 희곡의 현대성과 발전상을 보고 읽으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중국의 현대희곡을 읽으며 든 생각이, 어찌 그동안 우리나라 현대 희곡은 찾아 읽지 않았을까 하는 반성과 후회와 미안함이었다. 그래 우리나라 현대희곡도 검색해 읽기 시작한 바이며, 이왕 읽기 시작한 희곡이라 영미와 프랑스부터 시작해 독일, 스페인 등의 희곡에도 집중하게 된 내력이다.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공연 즉시 희곡을 출간하려는 노력을 그동안 (상대적으로) 등한시한 결과 기껏 찾아 읽어본 희곡집의 수준이, 연극인 및 극작가가 이 잡문을 읽으면 화를 내겠지만, 중국의 현대희곡만 하지 못하더라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그나마 희곡 작품집도 활발히 나오는 것 같아 (물량의 증가와 비례해) 좋은 작품도 자주 읽을 수 있어 다행이다.


  그동안 희곡을 자주 읽은 보람이 있어서 허지핑의 <천하제일루>를 읽어 내려가며 단박에 떠오른 건 중국 근현대문학을 거론할 때 전혀 뒤로 밀리지 않는 라오서의 희곡 <찻집>이었다. <찻집>은 1부가 청나라 말기, 2부는 아직 청이 망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군벌이 민중들을 피폐하게 만들던 시기, 3부는 국민당과 일제의 중일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한 찻집의 쇠락을 그리고 있었다.

  <천하제일루>는 베이징의 유명한 오리전문점 “복취덕”이 어렵게 명맥을 잇다가 총지배인을 새로이 고용해 경영일습을 맡겨 발전을 꾀했으나 창업자의 무능한 아들들에 의하여 다시 큰 곤란에 빠지는 내용이다. 시대는 쑨원의 신해혁명에 의하여 청나라가 문을 닫고, 위안스카이는 이 와중에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다 실패하고 곧 죽어버린 시절. 1910년대 후반이다. 중국은 이제 주인없는 무주공산이 되어 각지에서 군벌이 득세해 위세를 떨치고 있던 때, 장쉰(張勳)이란 작자가 나타나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다시 황위에 올려 놓는다. 청나라가 멸망한 줄 알았던 베이징 시민들은 얼른 시장에 나가 가발을 사 급하게 변발을 해 붙이고 다니고 옛 벼슬아치들이 잠깐 위세를 떨치던 시기가 1막 1장. 1837년에 산동성 사투리를 쓰는 당씨 젊은이가 도로 옆에 돌 두 개에 도마 하나 얹고 생닭과 오리를 파는 노점을 연 것으로 시작해 타고난 성실성과 정직을 바탕으로 장사를 잘 했고, 한푼 두푼 모아 작은 가게를 하나 사서 백년 기업을 마련했다. 세월은 계속 흘러 어느덧 20세기에 접어들었고, 조상들의 성실과 정직을 물려받은 당덕원이 늙도록 가업을 번성시켜왔다.

  당덕원 사장이 똑소리 나게 하지 못한 일이 있으니 바로 자식 농사. 맏아들 당무창은 가업 잇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경극하는 무리를 좇아다니며 가산을 아낌없이 뿌려가면서 자기도 극단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 둘째 아들 당무성 역시 오리 식당이 어떻게 꾸려가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무림 고수가 되기 위하여 온갖 권법, 술법 단련에만 여념이 없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업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하고, 형/동생이 쓸어가는 돈보다 결코 적지 않게 자신도 낭비하고자 하는 욕심. 어떤 집안인지 딱 감이 잡히시지? 세상이 하 수상한데 아들들은 정신 못 차려 속이 상한 아버지 당덕원 사장은 궁리 끝에 현명해 보이는 옆 가게 점원 출신 노맹실을 스카우트해 지금 개념으로 전문경영인의 자리에 앉히고 가게 경영의 전권을 맡긴다. 그리고 나서 잔뜩 속이 상한 노인은 절명해버리는 1막 1장.

  이런 와중에 장쉰에 의한 복벽 기간이 끝나 잠깐 봄바람이 불었던 청 시대의 옛 고관들은 다시 영락해버린다. 세상은 혼돈 자체이며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던 시절, 전문경영인 노맹실은 금, 은덩이를 자루에 넣어 보관할 정도로 가게를 성장시켰으며, 기세를 등에 업고 여러 금융업자의 돈을 빌어 복취덕을 확장해 크게 키웠다. 그러나 아무리 전문경영인으로 가게의 일 전반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기가 20세기 초반이라 월급쟁이 사장은 월급을 주는 가게의 진짜 주인들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여전히 경극단을 쫓아다니는 맏아들은 극단원들을 비롯해 자신과 관계가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오리 요리 한 두 마리 정도 선심을 쓰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노맹실에게 큰 돈을 요구한다. 이걸 알고 있는 둘째 당무성이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얼른 쫓아와 자기도 돈이 필요하니 내놓으라고 하고, 세상이 답답하게 된 노맹실은 돈이 없다 버티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금은 덩어리를 자루에 담아 보관한다는 말을 들어 당장 내놓으라고 호통을 치는 아들들. 끝까지 돈 주기를 거부하자 완력으로 돈자루를 나꿔채지만 자루가 튿어지면서 자루 속에 든 금, 은이 아니라, 그 속에선 황토가 푸르륵 쏟아지고 만다. 노맹실은 이렇게 오리구이 가게 복취덕이 장사가 잘 되는 것을 과시하며 저리로 많은 돈을 빌려 가게를 크게 확장하고, 씀씀이가 큰 고객들도 왕창 확보하여 나날이 크게 발전할 기틀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2막에 들면 복취덕은 확실하게 베이징의 최고 오리 요리점이다. 속칭 베이징덕의 대표 음식점. 이미 둘째 아들 당무성은 다른 도시에 분점을 차리고 영업 중일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당무성은 여전히 가게 경영은 나몰라라 하고 권법에만 관심을 쏟아 장사가 시들해지고 있던 중이다. 당장 베이징으로 달려온 당무성은 형 당무창과 뜻을 함께 해서, 어떻게 일개 고용인인 노맹실이 고향에 큰 땅을 살 수 있었는지, 돈을 무슨 수로 그리 많이 모을 수 있었는지 가자미 눈을 하고 따진다. 벌써 몇 십 년을 총지배인으로 일했으니 그동안 돈을 차곡차곡 모으기만 했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건만 자신들의 생활양식에 의하면 도저히 땅을 사거나 돈을 모을 수 없었을 테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 그러니 이제 사달이 나는 일만 남았다. 당연히 무슨 사달인지는 알려드리지 않겠지만 극은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세상은 다시 변해 이제 베이징엔 중국인 알기를 처마밭 애벌레 쯤으로 아는 백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낮에 중국인의 뺨을 갈길 수 있는 시대.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파국일 것은 분명한데 어떤 식으로?


  중국인이 읽었더라면 내가 느낀 감상보다 훨씬 좋았을 듯하다. 특히 중국 근현대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청말의 사회적 혼돈과 당시 세태를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실제로 등장하는 오리구이 가게 복취덕은 실제로 있는 베이징덕 음식점을 모델로 한 것이라 하고, 오리구이를 하는 방식, 베이징의 시설물, 거리, 복장, 인물과 사건 등 읽으면서 쉼 없이 각주를 내려다봐야 했고, 각주의 양도 만만하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흥미로워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라오서의 <찻집>을 워낙 근사하게 읽어, <찻집>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각 장면마다 당씨 형제들과 총지배인의 갈등 대신 사회적 문제를 조금 더 부각시켰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은 인터넷 책방 교땡문고, 너24에서는 팔지만 내 단골집 얼라땡에는 없다. 왜 없을까?


  올해 중국 희곡 낭독 공연은 3월 27일부터 31일까지 국립극단 명동 예술극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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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3-08 1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엇, 얼라땡에선 팔지 않는다니요. 으흠~ 찻집이 그렇게 좋군요. 저도 언젠가 읽어보겠습니다. 낭독공연 본적이 없는데 궁금하긴 하네요.
베세토가 그런 뜻이었군요. 글치않아도 궁금했는데.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4-03-08 16:12   좋아요 2 | URL
예. 이 책 좋습니다. 라오서의 <찻집>은 동아시아의 ˝희곡˝ 고전이 아닐까... 싶네요.

얄라알라 2024-03-10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Falstaff님 이 글은 대학교 문학 강의의 구어 버전 같아요^^

한국에서 중국 문학에 대해 보수적이었다는 데도 놀랐고, 그게 그리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었음은 더욱 놀라워요. 그나저나 ˝ BeSeTo˝ 이름 지으신 공무원(???)은 보너스 받으셨으려나요. 이름이 한 번 들으면 쏘옥 들어오게 좋네요.

일본의 백년가게들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자식에게 물려주기 여의치 않으면 ‘노맹실‘을 불러오듯 외부인사(?)를 집안으로 들여 가업을 잇는 전통 가졌나보네요. 이래저래 배워가는 게 많습니다. 고맙습니다. falstaff님

Falstaff 2024-03-10 17:08   좋아요 1 | URL
그냥 잡문인 걸 이리 친절하게 읽어주시니 고맙고 즐겁기 짝이 없네요. ㅋㅋㅋㅋ
편한 주말 맞으셨기 바랍니다. 저도 여유있게 휴일을 즐기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