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 나의 고전 읽기 3
김성은 지음, 장 자크 루소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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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교수나 혹은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진 지식인 내지 엘리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주장하거나 말하는 내용의 공정성이다. 어떤 사안을 토대로 일방적인 요소만 보여주고, 전후맥락적인 상황을 누락하여 오류로서 혹은 일부로 왜곡시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짓이다. 특히 학자가 그런 전후맥락을 무시하거나 일부로 적시하지 않으면 정보가 이상하게 엮이는 상황이 이르게 된다. 한국에 그런 학자들이 제법 많은 것 같다. 미국 자유주의 철학 사상가로 가장 유명한 학자로 존 롤즈가 있다. 최근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화제가 되었던 마이클 샌덜은 하버드 대학교 철학과 교수다.

 

샌델의 정치철학 강의, 그런데 샌덜의 이론은 결국 존 롤즈로부터 나온 것이고, 롤즈는 인간의 이성을 기반으로 자유로운 인간을 추구한 칸트주의자였다. 독일 관념론 철학의 거두인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선험적 이성에 의해 사물을 판단하여 그 어떤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이성의 영역을 침범해서 안 된다고 했다. 결국 <순수이성비판>을 읽다보면 인간의 관념적 이성에 대해 칸트는 인간의 의식과 논리에 대한 이성의 영역을 연구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의 인간은 순수하게 이성적 영역을 논리로서 보는 게 아니라 어떤 입장과 이익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의 논리에서 논리가 논리로서 작용하기 위해서는 윤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익은 개인적인 영역이나 혹은 집단적인 이익을 노릴 수 있기에 윤리적인 도덕성과 무관할 수 있다. 그러나 입장의 차이는 분명히 다르다. 만약 병이 들고 가난한 노인이 어린 손자를 데리고 거주하고 있다. 노인은 더 이상 병으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하고, 아들과 며느리는 사고로 인해 세상을 뜨고 만다. 그러면 남은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추구하는 정의적 가치는 경제적, 정치적, 교육적, 문화적 등 사회 전반적으로 입장이 불리한 약자들이 최소한의 사회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이른바 최소수혜자들에 대한 지원이다.

 

자유주의의 진정한 시작은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자들도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배려라고 한 것이다. 칸트의 철학에서 시작된 롤즈의 철학은 위로 가면서 루소와 로크까지 이어진다. 문제는 <정의론>이란 서적을 롤즈가 제작하더라도, 국내에서는 누가 번역하는가가 중요하다. 이 책을 번역한 분은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서울대에서 철학과 교수를 맡았다. 국내 최고의 서울대에서 철학과라면 엄청난 인물이다. 그런데 사실 서울대가 대단한 것은 인정하겠지만, 롤즈의 도서를 번역한 교수의 행적과 <정의론> 및 다른 도서의 머리말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롤즈에게 배웠다는 사람이 사실은 롤즈가 제시한 가르침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것이다. 권력에 아부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자유주의철학을 강연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기만을 어떻게 여길 것인가? 비단 이런 문제만은 아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중우정치를 비판하는 철학 교수가 그 중우정치의 해당하는 자는 누군가? 라는 점이다. 시민사회인가? 아니면 어느 정당에 지지하는 사람인가? 군사독재 시절에도 편안히 교수자리에 앉아있던 철학과 교수가 정치철학에서 어떤 사회적 명제를 두고 글을 쓰는 것을 보면 읽고 내가 부끄러워진다.

 

최근 그런 비슷한 인물을 인터넷에서 본 것 같다.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인류학적 영역에서는 정치사회의 역사적인 요소에서 민주주의 정체라면 프랑스대혁명 이후 자코뱅당의 공포정치가 어느 정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체에서 프랑스대혁명만이 아니라 사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인 역사적 비극 역시 귀족적 민주주의를 실행한 아테네 역시 그렇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를 배신하여 아테네가 큰 위기에 빠진다.

 

과두정 이후 민주정이 쿠데타를 성공시켜서 독재를 막을 내린가 싶으나, 정치적으로 불안한 아테네는 그 잠재적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다. 소크라테스의 독배는 무력으로 아무 힘도 없는 늙은 노인을 정치적 이익에 의해 희생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를 제거하고 싶은 사람에게 매수된 많은 아테네 시민은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중우정치의 한계는 아마 권력과 재산에 의해 매수된 시민, 그리고 그것을 용납하는 사회가 아닌가 싶다. 플라톤의 도서를 번역한 그 교수님은 아주 높은 지성을 갖추고 있지만, 그런 윤리적 의식에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다.

 

대부분 철학책이 기원전부터 현대까지 이어져온 지식의 보고이나, 항상 현대인들에게 혹은 미래의 인간에게 읽혀진다. 생각하자면 지나간 시대의 책이 무슨 현대에 들어맞는지 모르나. 그대로 나타나고 있으며, 수많은 지성인들과 교육기관에서 고전을 추천하는 이유도 그러한 것이다. 이번에 내가 발견한 웃긴 사례는 바로 프랑스대혁명과의 전체주의 기원, 그리고 히틀러의 파시즘이 루소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점이다. 경제학이 아닌 경영학 교수였다. 다른 글까지 읽지 않았으나, 경제학자가 철학을 할 수 있어도 경영학은 철학을 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일단 히틀러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전혀 이행하지 않은 점이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국가에서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으로 개별의지와 전체의지를 제외한 순수한 의지다. 히틀러의 독재국가가 일반의지라고 말한다면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몽키스키외와 루소의 이론을 토대로 헌법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헌법조차 루소의 사상이 기반으로 했는데, 한국의 헌법이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란 말인가? 사실 히틀러가 추구한 사상은 초인사상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에게 달라는 자들을 싫어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인간의 길을 찾아갈 것을 외치나, 자신을 따라 오란 소리는 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전체주의 나치즘이 과연 니체가 말한 사상인가? 히틀러는 니체의 책을 읽어도 니체를 오용했고, 루소의 사상에서 일반의지로 들먹인다면,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폭력으로 행해진 정치는 결코 정당할 수 없다고 한다. 폭력으로 얼룩진, 그리고 독일국민들의 정치적 감시를 소홀히 한 덕분에 나치가 정권을 잡았다. 루소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하는지를 시민이 감시해야 한다고 했다. 하다못해 영국인들은 투표를 하기 전에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라 하지 않았나?

 

이런 이유는 아마 경영학과 경제학이 다르면서 비슷한 점이 돈에 대해 다루기 때문이다. 경영학은 business management, 즉 경영하기 위해 관리하는 것이다. 경제학은 관리를 하는 학문이 아니다. 자본을 관리를 할 수 있는 것은 개별적인 경제에서는 기업이나, 사회적 국가적인 영역에서 국가정부다. 정부는 국민을 관리하는 초점이 상급자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정부는 국민에 의해 선출된 자이므로, 정부가 국민을 지배하는 관리대상이 아니라 국민이 역으로 정부를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루소의 그런 부정적 견해는 루소의 사상을 어느 누가 이어받았느냐 하는 것이다. 루소의 사상은 자연주의 교육학, 낭만주의 문학과 미술, 근대민주주의 정치사상, 음악과 연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루소의 후예, 즉 루소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로 로베스피에르 같은 프랑스대혁명의 선구자, 체 게바라와 같이 활동했던 피델 카스트로, 남미해방의 아버지인 시몬 볼리바르, 문학의 톨스토이, 실러, 괴테 등이 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인물은 카를 마르크스일 것이다. 우연히 유네스코 사이트에 가보니 카를 마르크스가 유네스코에 지정한 인물로 선정되어 그의 저작들은 세계문화유산 중에 소중한 것으로 등록되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1990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허망하게 끝난 것으로 보였지만, 21세기 금융위기와 전 세계적인 경제적 문제는 마르크스가 예견한 게 그대로 드러났다. 문제의 경영학 교수가 루소를 경계한 이유는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경제학에선 애덤 스미스이겠지만, 그의 선동적인 팸플릿과 구호문은 루소의 서적과 매우 흡사하다. 엥겔스의 서적을 읽다보면 <인간불평등기원론>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 <자본> 1권에 보면 루소의 <정치경제론>에서 제기한 신랄한 풍자의 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부유하고 당신은 가난하니,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 서로 합의하자. 내가 당신에게 명령하는 수고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사소한 것을 내게 준다는 조건으로 나를 섬기는 영예를 허락하노라.”, 루소의 정치사상은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보단 도덕적 사회적 불평등을 주장했다. 경제적인 빈곤도 있지만 계급사회가 존재한 왕정시대인 점을 고려한 점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더 세세하게 나아가 경제적인 빈곤을 토대로 사회를 비판한다. 어찌 되었건 루소와 마르크스는 18세기와 19세기에서 가장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가장 위험한 사상가였다.

 

그러나 루소의 사상이 없으면 왕정은 계속 유지되었고, 루소 그 자체를 부정하면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사상 그 자체를 부정하게 모순에 이르게 된다. 그런 모순조차 사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모르고 지나갈 일이다. 그렇지만 학자라면 제대로 전후맥락을 보고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경영학 교수가 만약 칸트와, 롤즈가 주장한 이성적 자유를 추구한 자유주의를 제대로 숙지하고, 괴테와 톨스토이의 문학성을 제대로 생각했다면 조금 다르게 전개되지 않았나 싶다.

 

이런 글이 된 이유는 <인간을 위한 약속>이란 책을 보면서다. 저자는 내가 방금 전 내가 비판했던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자다. 다행히 철학과가 아니라 그 교수와 만났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루소에 대해 깊이 연구한 것 같다. 엘리트인 점은 분명하겠지만, 엘리트 안에서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그 엘리트의 지성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같이 바꾸어갈지를 아는 분이었다. 루소는 백과사전학파나 볼테르가 무시한 농촌의 농부를 매우 존경하고 그들의 자연성과 도덕심을 존중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그런 농촌도 없고, 농촌 역시 그때의 농촌은 아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 모두 인간이 살고 있고, 그 인간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보장받을 권리는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사회계약론이다. 사회계약론은 정치철학의 이론서보단 하나의 제안서에 가깝다. 현대철학이나 정치학 도서와 비교하면 그렇게 분량도 많은 편도 아니고, 심각하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 담고 있는 내용은 매우 강렬하다. 국가기반인 헌법의 토대가 되면서도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혁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공자의 <논어>조차 군왕이 군왕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군왕으로서의 자질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군신간의 관계는 신하가 받드는 게 아니라 신하의 받듦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군왕은 군주의 자격이 없는 것과 같다. 밑에 신하가 없으면 정사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역시 그렇다. 정부행정기관보다 중요한 것은 입법권자의 올바른 의지다. 입법은 심장이고, 행정은 두뇌다. 두뇌가 죽더라도 심장을 움직여서 살아있지만, 심장이 죽으면 모든 것이 죽는다. 이런 말을 하는 루소가 과연 히틀러의 인도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인진지 망상력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인간을 위한 약속>이란 서적은 루소의 사상을 매우 알기 쉽게 적은 책이다. 처음 루소를 입문하는 사람에게 루소가 제시한 사상을 어느 정도 쉽게 접근하고, 루소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여준 책이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장에서 조금 내가 말한 부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등장한 인물은 루소가 아니라 마르크스다. 대영제국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마르크스는 루소의 진정한 후계자란 점을 이 책에서 보여준다. 루소의 연표에서 루소의 사망 이후 1848년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루소는 좌우 사상가에게 찬사와 비판을 받는 사상가다. 자유주의 철학자 롤즈의 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이 여기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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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6-02-24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본 리뷰중에 제일 멋있습니다. 철학이나 인문계통 일하세요?

만화애니비평 2016-02-24 22:45   좋아요 0 | URL
아니오. 그냥 엔지니어 업체 다녀요. 오덕질 하다가 이래 되었지요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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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군사전략을 생각하면 이미 항공기의 우수성에 따라 달려있다. 항공기의 우수성에 의존한다는 것은 현대전쟁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개되던 백병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병전ㅇ의 양상은 20세기 걸프전에서 보듯이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확실하게 못을 박은 사례는 이라크 오사마 빈 라덴 제거작전이다. 항공기로 이용한 적의 기지 타격, 지하기지의 붕괴, 무인 전술기를 이용한 암살, 공중정찰을 위한 조기경보통제기 등, 현대사회 공군력은 전쟁의 우위를 바꿀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전쟁에서 항공작전은 비단 전투기의 성능만이 아니라 조종사, 정비사, 군사시설을 관리하는 시설인, 공중작전을 지원하는 관제사 등의 역량으로 이어졌다. 공군이 차지하는 전체 군사력에서 인원은 적으나, 공군 장병 및 장비에 들어가는 예산은 엄청나다. 전투기 1대의 가격은 수 백 억에 호가하며, 전투기 조종사 1명 양성하는데 수 십 억이 소요된다. 전투기에 들어가는 각종 무기하고, 전투기를 공중에 보내기 위한 활주로공사는 많은 예산과 공사기간을 요구된다. 서평을 쓰는 본인 역시 공군출신 예비역이고, 활주로를 비롯한 항공작전시설을 유지보수 및 시공을 맡은 건설기술자로 활동했다.

 

한국에서 징병제를 추진하고 있기에 일반 남성들은 육군에 자동적으로 입영하게 된다. 그러나 공군의 경우 지원으로 입대하고, 공군에 많은 부대 및 특기가 있으나, 항공기에 대한 로망 때문에 공군 지원자들이 제법 많다. 물론 항공기를 운영하는 점에서 기지시설이 평지에 위치하고, 지원시설이 타 군에 비해 좋은 편이며, 교통이용도 편리하기에 여러모로 공군에 입대한 장병들은 그런 혜택을 받는다. 공군비행장에 배속 받으면 가장 눈에 보이는 게 역시 비행기다. 한국의 군사공항은 민간공항에 입주하여 활주로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민간항공기 전용 공항은 군사공항 수보다 적다.

 

비행기를 직접 눈앞에서 나는 장면과 이착륙하는 장면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항공기를 탑승할 때 항공기까지 이동할 때 옆에서 보겠지만, 직접 눈앞에서 커다란 항공기가 이착륙하는 모습은 상당히 박진감과 멋진 장관을 보여준다. 그러나 생각하면 항공기는 높은 고도에서 운항하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기계이다. 이런 기계가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공군복무에서 공군의 작전은 1분 1초 먼저 항공기를 이륙시켜 적의 군사기지를 타격하는 것이다.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공군전투기이다.

 

한국에서 공군이 처음 창설되어 운영된 것은 한국전쟁에서다.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남침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적을 무력화시키는 방도로 당연히 항공기의 운영이다. B-29 폭격기의 등장은 다량의 폭탄을 투하하여 적의 기지를 무용화 시키는 무서운 전략이다. 그러나 폭격의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지금처럼 레이더가 발달하거나 위성에서 실시간적으로 조종사에게 정보를 주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운항거리가 그렇게 긴 것도 아니다. 결국 부정확한 정보와 작전수행 중의 변수는 본래 원하는 방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전을 수행하게 만든다.

 

폭격의 가장 무서운 점은 수 천, 수 만에 이르는 폭탄을 지면에 충돌하여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한다. 폭탄이 터지면 우선 열에 의해 화상을 입게 되고, 폭발에 의한 공기압으로 폭풍이 몰아치며, 폭탄에 의해 건물이 붕괴된다. 군사작전지역과 민간인거주시설은 장소와 때에 따라 같이 붙어 있기도 혹은 분리되어 있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육군을 제외한 나머지 공군이나 해군은 도심지 및 항구, 교통이 용이한 곳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지리적인 특성과 보급물자의 수급에서 육군과 공군은 한정된 위치에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도심지 내부에 군부대가 있거나, 혹은 군부대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는 전쟁이 발발하면 공격 목표가 되는 장소는 군사기지가 아닌 민간인이 사는 장소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폭격의 역사를 본다면 폭격은 단순히 적의 전투력을 마비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민간인들을 폭격할 경우 상대국의 사기가 저하되고 혼란에 빠진다는 점이다. 제 아무리 군인들이 작전을 수행해도, 군인들이 입고 먹는 식량과 의복은 민간인의 생산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경우 많은 군사기지와 더불어 민간공장들도 폭격으로 대파되었다. 민간공장에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금속, 기계, 화약 등을 다루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는 군인이 아니라 군수물자를 생산하기에 공중폭격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전설적인 패배는 결국 미공군이 떨어뜨린 2개의 핵폭탄이다. 핵폭탄으로 손해본 것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 더 많았다. 전쟁에서 민간인을 가해지는 비인도적인 살상은 국제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일들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늘 피해보는 인간들은 군인보다 민간인이었다. 군인에게 정보가 있었고, 저항할 수 있는 무기도 있었지만, 민간인에게 가진 것이란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순박함이다. 공중폭격에서 민간에게 가해진 잔인함은 보통 윤리적인 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해불가다.

 

그러나 전쟁에서 가해지는 군사적 이익과 전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에서 민간인을 제거하는 것보다 효과적인 게 없었다. 일단 자원을 모울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건장한 남성은 징병할 수 있으며, 민가에서 은신하여 적의 눈을 속일 수 있다. 게릴라전법에서 민간인들 사이에 잠복하여 적을 불시에 공격을 가하는 방식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민간인에 대해 무차별적인 살상, 피난민에 대한 공격은 인간의 의식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윤리적인 영역으로 가버렸다.

 

한국전쟁에서 폭격으로 확실히 북한국은 많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21세기에 도래하면서 당시 공군력이 없던 북한이 공군력을 가지게 되었고, 언제라도 조종간의 스위치를 누르면 강력한 미사일이 지면을 강타한다. 문제는 지면의 강타가 적의 소탕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북한의 전쟁사를 <폭격>에서 본다면 미공군의 폭격작전은 북한을 정전을 하고 싶게 만든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북한의 반미의식이 되게 만든 트라우마였다. 미군정과 미국무부의 비밀문서를 참고하면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의식을 충분히 볼 수 있다.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수행하던 방식과 의식수준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상대로 폭격하던 양상과 거의 흡사했다. 인종주의적인 마인드와 공군조종사들의 자질이 일반 육군과 해군보다 못했다는 점이다. 현재 공군 조종사들은 우수한 두뇌와 신체를 소유한 인재이나, 당시 한국전쟁에서 미공군의 조종사는 학력이 매우 낮고, 인문사회적 지식이 적었으며, 위스키를 언제나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방탕했다. 체계화된 전투조직보단 개인의 출세와 이익에 치중한 나머지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 하나가 민간인 폭격에 대한 부분이다.

 

분명 적군에 대한 살상과 타격은 군사작전에서 추구하는 제일의 목표다. 그런데 민간인들에게 퍼붓는 총격과 폭탄은 군사작전이 아니라 단지 학살에 불과한 일들이다. 여름철 하얀 삼베옷을 입은 마을부락에 폭탄을 투하하는 사진과 군사문서 기록을 <폭격>에 접하면서 전쟁의 섬뜩한 모습을 다시금 느낀다. 폭격의 잔혹성은 철학자의 서적에서도 나온다. 20세기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유주의 철학자 선구자로 손꼽히는 존 롤즈는 2차 대전 시 장교로 출전하여 개인적 회고를 <만민법>에서 다룬 적이 있다.

 

이때 롤즈는 폭격이 가해지는 지역의 민간인에 대한 인권이 무참하게 외면된 점을 목격했으며, 제 아무리 일본이 군사적 저항이 심해도 미군에 의한 원자 폭격은 옳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권력이 없이 폭압적 조치에 의해 움직이는 신민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점이다. 물론 어떤 혜택과 지위를 보장받았다면 그 죄를 물어야 하겠으나,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강요로 움직이는 인간에게 과연 죄를 물어야 하는가이다. 그 인간들도 압제의 의한 희생자였던 것이다. 전쟁은 이런 인간의 기본적 원칙을 무시한다. 단지 적을 더 죽이거나 어느 순간 전쟁이란 이름 아래 인간은 전투기계로 변하고, 오늘 폭탄을 민간인이든 적에게 투하하는 것은 자동차정비소의 노동자가 차의 타이어를 교환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전쟁은 인간의 도덕심을 무디게 만들며, 인간에게 기만적인 자세까지 만들어 버렸다. 민간인을 폭격한 조종사들은 모두 적의 스파이 내지 적의 은신처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의 조사만이 아니라 세계피해조사단이 방문한 결과 죄 없는 민간인이 다수였고, 대부분 어린아이, 여성, 노인 등과 같이 폭력에 저항할 수 없는 약자들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수행한다고 하나, 그 이면에 가려진 민간인의 희생은 한국전쟁의 신화를 창조했다. 만약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라면 민간인들이 그 가치의 수혜자이다.

 

국가와 정부는 다르다. 정부는 국가의 한 부분이고, 국가의 구성이 되는 것은 국민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입장은 국민이 아니라 정부에 의해서다. 미정부나 한국정부가 보여준 행태는 국민의 국가가 아니라 단지 어느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한 국가였다. 20세기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1차 및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베트남전쟁과 더불어 잊을 수 없는 전쟁이다. 이 모든 전쟁의 슬픔은 가장 많이 피해본 사람은 민간인이란 점이다. 무기체계가 발달되면 전쟁의 신속하게 끝낼 수 있지만, 전쟁의 후속조치는 신속하지 못하다.

 

전쟁의 시기에 타국을 점령한 군부대가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잘 생각해야 한다. 설사 그 국가의 정부가 독재자 내지 전제군주라고 할지어도 국민들의 시선은 다른 방식으로 볼 필요가 있다. 16세기에 이르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전쟁을 일으킬 경우 점령국가의 국민에게 공포를 심어줄망정 그들의 안정된 생활을 파괴하면 안 된다고 했다. 칼과 방패를 두르며 싸우는 시대에는 농작물을 건들지 못하도록 했다. 어째 보면 식량의 보급에서 장거리 운송이 힘들기에 정해진 조치다. 현대전은 수송이 언제라도 가능할 정도로 교통이 발달했다.

 

생산력의 발달은 군수물자를 신속하게 제작하여 내보낼 수 있다. 사람보다 기계에 의한 전투는 백병전이 아닌 첨단장비의 성능차이에서 판가름이 난다. 그래도 군인보다는 민간인의 피해가 심각하다. <푹격>에서 제시한 것처럼 21세기는 분단이 60년을 지나가고 있다. 앞으로 40년 후면 100년이 된다. 한국과 북한이 같은 민족이라 하나, 그것은 심리적으로 같은 동족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문화적인 동물이기에 살아온 체제와 경제, 사회 등이 존재하므로 이미 북한과 한국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책에서 1952년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북한주민이나 혹은 최근 전쟁박물관에 방문한 북한주민이 본 폭격의 참상은 모두 피해자의식을 만들어낸다. 즉 역사라는 것은 어느 정치적 입장에서 하나의 내러티브(Narrative)를 생성시킨다. 내러티브는 평화로운 세계에 적의 침입으로 어떤 해결사가 등장해 해결한다는 패턴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보는 전쟁 혹은 액션장르가 눈에 선한 스토리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폭력이란 이름을 마치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우리의 가장 큰 착각이 있다. 분명 북한은 독재국가이고, 북한 국민들은 가난과 압제에 시달리고 있어도 대부분의 북한주민들은 군사교육을 받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예비군제도가 있어서 만약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 발령되면 예비군들은 소집되어 전쟁에 투입된다. 한국의 남성에서 현역(여군, 보충역)과 예비역(민방위)을 포함하면 인구의 30% 정도 될 것이다. 한국에서 전쟁병력이 이 정도면 군국주의적인 정치체계를 가진 북한은 이보다 더 많은 수의 군사력을 보유한 셈이다. 결국 전쟁이 나면 북한 주민 대부분이 전쟁에 동원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인명살상이 일어날 것은 분명한 일이다.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 현실적인 관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폭격>이란 책을 본다면 과연 그 생각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사료를 정리한 부분에서 북한은 미국과 사이좋게 지낼 수 없는 형태가 되었다. 한국 외교정책이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의 관계망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먼저 그 날카로운 증오의 칼날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리되기가 어렵다는 생각만 든다. 북한과의 외교문제는 단순히 정치적 이익만이 아니라 국내 경제까지 침체시킨다.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이 한국만이 아니라 타국의 자본을 오고가는 점에서 한국이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사라지지 않으면 발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강경론자이 주장하는 북한의 도발도 고려해야 하나, 전쟁이 발발할 경우 과연 누가 가장 피해를 보는지 생각하면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생활을 하면 전쟁영화나 전쟁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이 커맨더가 되어 지휘하는 것으로 생각하나, 막상 전쟁나면 커맨더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졸병이나 혹은 전쟁터에서 무참하게 죽어나가는 행인 A, B 정도만 될 뿐이다. 왜냐하면 폭격기에서 떨어지는 폭탄은 목표물이 되는 대상이 누구냐를 가라지 않고, 있는 그 자리를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거기에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머저리 같은 일이라고 저승에서 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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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5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5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국부론 -상 - 경제학고전선 애덤 스미스, 개역판 국부론 시리즈
아담 스미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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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經濟學)과 경영학(經營學)은 서로 다르다. 경제학은 사실 앞에 단어가 생략된 말이다. 우선 소개한 도서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있다. 하지만 루소의 서적은 그것만이 있는 게 아니라 <정치경제론>이란 서적이 있다. 루소를 떠오르면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근대민주주의 이론을 만들고, 세계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는 자이다. 그런 루소가 경제론에 대해 논했다는 것은 의아한 내용이다. 18세기는 이른바 17세기를 지나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다. 16세기부터 유럽에서 아시아와 신대륙에 대한 식민지 개척은 새로운 시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각 국가에서는 식민지 개척에 따른 금과 은의 수확을 원했다.

 

이른바 중상주의(重商主義)로써 상대방 나라에게 금과 은을 주지 않고, 국가정부가 직접 수출입을 통제하여, 국가재고에 금과 은으로 넘치게 하는 것이다. 당시 입장에서 군주들과 많은 봉건영주들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군자금이 필요했고, 금과 은의 비축은 전쟁 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자금으로 될 수 있다. 하지만 중상주의를 본다면 한계점은 금과 은의 사용처는 금화와 은화 같이 화폐로 통용되지 못하면, 귀금속이나 혹은 식기류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이런 사치품들을 이용할 수 있는 범주는 한계가 있다.

 

은과 금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 정작 부국을 위한 방법은 금과 은으로 넘치는 왕실의 창고가 아니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잘 먹고 잘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바로 나라의 부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는지, 그런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이때까지 화폐의 가치와 물가, 무역, 세금 등 다양한 경제적인 관점을 서술하는 서적이다. 전에 EBS 자본주의에 대한 5부작 다큐멘터리에서 맨 처음 나온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에서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창시자로 등장한다.

 

경제학과 경영학의 차이는 사실 한자로 본다면 별로 우리에게 큰 차이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은 영어로 economics, 경영학은 business management이다. 영문 단어를 보더라도 둘은 분명하게 다르다. 그리고 18세기의 경제학은 단순히 economics이 아니라 political economy로 시작했다. 그런 단어의 의미는 루소의 <정치경제론>에 등장하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도 그러하다. 오늘날 현실에서 내가 바보인지 주변 사람들이 바보인지 나도 혼돈되는 경우가 많다. 논점은 틀리지 않으나, 어쩔 내 나의 명제가 틀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논점에서 경제학의 시초가 애덤 스미스고, 애덤 스미스가 18세기 영국 사람이나, 그의 경제학의 연구내용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기본 연구도서고, 그가 제시한 내용은 현대 자본주의 시장에서 돌아가는 방식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사실 몇 세기 이전의 정치, 경제, 행정 등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많이 차이난다고 생각하나, 막상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 적어도 한국에서 행정구역에서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등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행정구역이었고, 하다못해 경상남도와 충청북도 등과 같은 행정구역 역시 조선시대부터 존재한 지역명이다.

 

우리는 21세기에 살아가도 14세기부터 존재한 행정구역에 따라 움직이고 있고, 그 당시에 만들어진 도로를 기반으로 주요한 철도와 도로, 항만 등의 교통시설을 만들었다. 과거와의 시간은 단절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것은 누적되어 하나의 기반으로 되었을 뿐이다. 우리가 길거리를 지나가면 보통의 진흙이나 자갈, 바위 혹은 암석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도로 밑에 콘크리트나 나무목재 보도 아래, 모래 및 자갈 기층이 있고, 그 기층 아래 보조기층과 암반지역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았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도 많은 경제학보단 경영학을 추구하는 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등장하는 “보이지 않은 손”을 주장한다. 시장경제가 만능처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은 손”은 단 1번만 등장하고, 전후맥락을 보면 모든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돈의 순환을 계속 돌고 돌아 많은 이들에게 필요한 상품과 재화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절은 프랑스혁명도 있었지만, 산업혁명 도래의 시대다. 기계의 발전은 다양한 진보와 문제를 일으켰다.

 

기계화의 단점은 가내수공업자들의 상품경제력을 저하시킨 점이고, 장점은 많은 물품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관계에서 상품이 필요한 사람들이 넘치나 물품이 부족할 경우, 항상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제때 공급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가 강조한 무역의 자유화와 시장경제의 발전은 독점과 화폐의 고정화가 아니다. 화폐는 계속 이동되어 상품이 존재하지 않은 국가에게 필요한 재화를 공급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농부가 농기구를 제대로 구할 수 없거나, 도시의 사람들이 밀을 구하지 못하거나,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석탄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없다면 엄청난 생활고를 겪게 된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국부의 조건은 국가의 창고에 금과 은으로 가득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프랑스 의사 케네를 만나, 그의 중농주의(重農主義)에서 국부론을 시작했다. 농사를 짓게 되면 당연히 농작물이 나오고, 그것은 농부의 잉여물들이 도시로 유입되어 식량문제를 해결된다. 거기서 나아가 충분히 잉여량이 생산되면 타국에 수출하여 이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영국이나 다른 국가에서 밀의 농사가 흉년일 경우, 식량을 들이야 하는데, 중금주의 요소로 정책을 펼치면 그 나라의 국민들은 식량문제에 허덕일 것이다.

 

단지 중농주의 한계점은 농사, 즉 1차 산업이 중심으로 보기에 18세기 자본주의 시장체계와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스미스의 관점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분업이다. 매뉴펙쳐, manufacture라고 불리는 시스템이다. 가령 공사현장과 기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물품에서 쇠못이 있다. 쇠못은 한 사람의 대장장이가 만들면 하루에 대략 100개를 만들 수 있지만, 각 과정을 담당하는 사람이 10~20명이 있으면, 그 생산량의 100배 이상을 생산할 수 있다. 대장장이의 손에서 나온 쇠못은 하루에 제작되는 개수가 한계가 있고, 대장장이의 인원에 한도가 있다면, 공급의 부족으로 제대로 현장을 움직일 수 없다.

 

가끔 국내에서 금속의 부족으로 건설현장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금속이 없다는 것보단 금속의 자재 가격이 너무 올라 자신들이 도급받은 내역과 일치하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유는 공급의 문제다. 금속가격이 오른 것은 재화의 공급이 부족하나, 수요량은 일정하다. 그렇다면 상품은 오른다. 한 해 배추농사가 흉작이면, 배추가격이 1포기당 가끔 만원에 육박하는 경우가 있다. 작년 겨울 어머니와 같이 마트에 가면서 1망에 3포기의 배추 가격이 6,000원 정도 했다. 결국 지난 김장철에 내가 사는 동네의 배추는 1포기당 2,000원인 것이다.

 

배추 같은 자연적인 토지에서 생산되는 물품은 기상과 환경 등과 같은 자연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쇠못의 경우는 자연적인 조건보다 생산라인의 공정에서 그 차이를 보여준다. 20명의 노동자가 1명의 대장장이에 비해 만들 수 있는 쇠못은 20배가 아니라 사실 200배 이상이다. 일의 효율이나 생산성을 본다면 쇠못이 필요한 사업체는 분명히 원활한 자재유입으로 집을 세우는데 유리하거나, 기계를 제작하는데도 막힘이 없다. 그러나 생각할 점은 스미스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에서 생산되는 양의 차이가 다르다는 점이다. 스미스의 시대는 항상 모든 사회는 진보하는 시대, 즉 각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품이 늘어나고, 그 물품은 외국에 교역되며, 국내에 부족한 물품은 수입이 원활하게 진행되려는 시기다.

 

그런 시대에 여전히 많은 국민들은 물품들이 부족하고, 때에 따라서 흉년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단지 적어도 경제공황은 당시에는 없었다. 물품이 부족한 것은 계속 생산되면 거의 다 팔린다는 의미다. 스미스의 경제학의 시간적 공백은 경제공황의 현실을 맞이하지 않은 것이다. 경제공황은 카를 마르크스와 케인즈의 시대로 오면서 연구된다. 즉 지나친 생산물이 시장에 나와도 소비되지 않는다는 것부터 문제다. 시장에 물품은 넘치는데, 구매자가 없다면, 기업은 자금압박을 받게 되어 결국 도산한다. 기업의 도산이 문제되는 것은 EBS 방송에서 보여준 사례를 보고 확연히 알았다.

 

은행에 만일 1억을 예금하면, 은행은 그 1억을 다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보관하고 나머지는 대출한다는 점이다. 만일 한국은행에서 일반 시중은행에 5,000억원을 제공하여 그 돈의 3.5%만 보관하고 나머지는 계속 대여해주고, 대여자는 그 돈을 다시 다른 은행에 입금하여 사용하고, 그 은행에 다른 대여자를 찾아가서 최종에 이르러, 시중에 들어간 5,000억원은 6조를 넘는다는 점이다. 물론 60조에 도달하지 않으나, 적어도 조 단위로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빌린 돈을 갚아야 한다. 그러나 갚을 능력이 없다면 그 돈을 빌려준 은행도 갚지 못해 부채의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큰 문제를 일으킨다.

 

유럽에서 은행에서 현금보유량을 전체 입금비율의 10%라고 하는데, 한국은 3.5%라고 한다. 만일 은행에서 큰 문제를 일으켜서 고객이 현금을 인출하러 가는데, 막상 자신이 예금한 돈을 다 찾지 못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연유다. 스미스의 생각대로 본다면 필요한 곳에 자본이 돌아야 하나, 우리는 불필요한 곳에 자본이 돌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친구와 한국경제상황에서 물가가 왜 오르는지 이야기했다. 나는 두 말하지 않고 부동산이라 했다. 지대가 상승하면 점포 임대료가 상승하고, 임대료의 상승이 된다는 것은 부동산세를 납부하는 사람에게 추가적인 세금부담을 안겨준다(물론 임대료의 상승이 부동산세에 비해 더 높은 수익을 주지만).

 

만원에 팔던 통닭에 닭의 원자재 가격, 인건비, 그리고 각종 세금과 경비, 마지막으로 임대료가 포함되어 있는데, 임대료가 가령 100%가 오르면 그 임대료 상승만큼 상품가격으로 투하된다는 것을 말했다. 사실 마르크스의 <자본>도 그렇지만, <국부론>에서도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은 위에서 계속 입금과 대출관계에서 볼 수 있다. 우리의 돈은 우리의 현금보관소에 보관하는 게 아니라 은행의 계좌에 보관된다. 물론 5만원권이 발행한지 얼마 되지 않은데도 벌써 많은 화폐가 은행으로 입금되지 않고, 어딘가에 가만히 있다고 들었다. 17세기 왕실의 중금주의가 21세기 개인의 욕심에 의해 새로운 중금주의로 된 모양이다.

 

돈의 발행이 된 후 만일 회수가 되지 않으면, 계속 화폐를 시중으로 들어갈 수 없고, 시중에 화폐가 유입되면 입금과 대출, 그리고 기타 상거래로 인해 화폐 총량이 확장되어, 인플레이션이 닥친다. 돈은 시중에 없는데, 물가는 오르는 이상한 현상이 발현된다. 그런데 여기에 이익의 3대 요소인 임금, 이윤, 지대에서 부동산의 상승은 지대를 올린다. 아파트 가격이 10년 전만 해도 3억만 하면 좋은 집이나, 지금은 3억이라면 서울에서도 조금 낮은 수준의 집이 되었다. 아파트 구매, 전세대란으로 화폐의 시중에 유입이 확장되면서 부동산가격이 증가하고, 지대의 상승은 물가에도 반영된 것이다.

 

내 친구는 다른 원인이 있을 것이라 하나, 지금 임금의 상승폭이 10년 전과 비교하여 얼마나 올랐는지? 원자재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 세금이나 경비가 얼마나 올랐는지? 하다못해 달러와 외국환의 환율이 얼마나 변동되었는지 생각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크게 변동된 것은 없다. 오히려 2015년 말에는 계속 올라가던 석유가격이 내려가고, 지금은 오히려 10년 전보다 휘발유 가격이 저렴하게 되었다. 휘발유 가격은 국가정책의 혜택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지의 배럴당 석유가격이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물가는 오르는가?

 

사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경제학과 경영학의 차이점을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경제학을 원래의 학문적으로 본다면 거시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회전반적인 요소로 보고, 경영학은 개인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시야로 보는 것이 옳다. 경영의 영문처럼 management란 관리라는 것이다. 관리라는 것은 사업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고, 경제라는 political economy로 보는 게 정당하다. 그러나 공공성이란 결국 사적인 이익이 공공의 이익에 침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개인의 이익이 사회의 이익을 넘어 다른 개인의 이익까지 침해하는 경우가 현실사회에서 다분히 일어난다.

 

스미스는 남에게 해를 주지 않을 정도이고, 그 남이란 대다수의 국민이고, Nations이란 단어가 들어간 것처럼 영국(그의 지역은 스코틀랜드지만)만이 아니라 세계에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가야 한다고 국부론에 제기한다. 그러나 막상 그런 경제적인 관점은 보이지 않고, 시장경제의 낙수효과를 주장한다. 사실 경제학자 소개도서에서 자유 시장경제를 철저히 주장한 하이에크나 밀턴도 지나친 사적인 이익추구 및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의 임금에 문제가 생기면, 상품의 소비자가 자신의 업체가 아닌 다른 업체의 노동자인 것처럼, 결국 경제적 순환이 멈추게 되어 문제가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국부론>을 읽은 후 스미스와 하이에크에 대한 차이점은 위에서 언급하나, 스미스의 시대는 많은 물품들이 부족한 사람들이 넘치던 시대고, 지금은 넘치는 시대다. 당시는 사고 싶어도 물품이 없어서 못사는 시대라면, 지금은 물품이 넘쳐도 구매할 화폐가 없어서 못사는 시대다. 사회적 재생산, 그리고 사회 전체적인 생산에서 기계의 발달과 기술의 발전은 상품의 공급에 큰 혁신을 주었으나, 문제는 상품이 팔리지 않는 것이 문제다. 뉴스에서 서민지갑이 꽁꽁 얼어 경기가 좋지 못하여 정책을 새롭게 펼치나, 근본은 해결되지 않는다.

 

18세기의 애덤 스미스는 국가의 중상주의를 비판했다면, 지금은 기업의 독점적인 중상주의가 문제가 되었다. 사실 국가의 창고에 보물이 넘쳐도 그것은 왕실의 물건이지 국민의 물건이 아니고,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면 기업의 이익이지, 그 나라의 국민의 이윤이 아니다. 사람들의 착각은 바로 이윤의 창출에서 기업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그대로 국내로 재순환되는가 마는가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이다. 그 기업에 고용된 자가 있더라도, 그들이 사용하는 금액은 우리나라 전체 경제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율에서 과연 %일까?

 

국가의 경제학과 기업의 경영학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시작하나, 솔직히 어느 부분에서 서로 유사한 부분이 있다.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결국 사회활동의 일환이고, 사회활동에서 기업의 생산품은 수요자에게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고, 소비자로부터 이윤을 창출한다. 스미스가 제기한 것처럼 식빵가게 주인이 빵을 파는 것은 결코 자애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기심이고, 식빵을 구매하는 사람은 식빵가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다. 그런 서로의 이해심이 일치하고, 식빵의 소비는 식빵가게의 주인과 노동자, 밀을 생산하는 농부와 운반하는 상인에게 큰 이익을 준다.

 

적어도 스미스의 경제이론은 다다익선이고, 서로의 이기심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어야 하는 사회적 도덕관념을 강조한다. 사실 스미스의 <국부론> 이전에 <도덕감정론>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바로 스미스가 경제학의 창시자이나, 본래 윤리도덕학을 가르치던 학자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자세를 통해 경제성을 발견하여 필요한 재화들을 계속 융통될 수 있기를 추구했다. 오늘날 “보이지 않은 손”을 주장한 사람에게 도덕과 감정에게 무슨 의미로 전달될 수 있을까?

 

사실 그런 주장보단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물론 그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청약통장에 300만원을 넣고, 아파트분양을 원한다. 물론 분양권을 받아 돈을 벌면 좋겠지만, 그들은 항상 불평을 한다. 마트에 가면 물가가 너무 비싸서 살 게 별로 없다고 말이다. 그게 바로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은 손”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만들어놓은 “보이지 않은 손”이란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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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1-13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학과 경제학이 분리되는 순간 경제학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고 하던데요. 저도 깊이 동감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1-13 09:24   좋아요 0 | URL
분리되어 현재 이 꼴이죠. 경영학 마인드로 경제학을 다룬다는 게 참..

2016-01-13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1-13 11:00   좋아요 1 | URL
어허허허... 오덕오덕하게...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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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저번주에 산업재해로 죽었다. 안전보호구의 미재, 안전관리자의 부재, 이 모든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에 내 친구를 빼앗겼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이 생각났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정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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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09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괜찮을 지란 생각도 들구요. 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해 친구들도 공사현장에서 죽은 친구도 있습니다. 노무사 공부를 하면서 판례나 이런 것들을 배우고 있지만 `낙수효과`라는 이름 아래 모든 노동자들은 희생을 강요당하더군요.

요즘 발생한 구의역 사건이나 이런 면들이 모두 젊은이의 죽음을 담보로한 자본들의 생명 연장이라는 점에서 무지하게 화가 납니다.

전 노무사가 되어 미약하게라도 자본가들 면상을 찡그리게 만들고 싶은 각오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6-09 08:38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 구의역 사건을 보면서 또한 지하철공사 붕괴사건을 보면서도 생각하면 참 답이 없는 나라입니다. 노동자의 삶이 비참한 사회만큼 지독한 병폐가 있다는 것이죠.

어이 없이 죽은 것도 열받지만, 마치 당사자가 아무런 조치나 예방사항은 보지 않았다고 몰아가는 식이 더 열받더군요. 그렇게 일하게 만들어 놓고 돈을 아끼려다, 보상금조차 깍자고 하는 저들의 머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

친구분의 죽음 참 아프시겠습니다....

트리클다운, 사실 애덤 스미스 <국부론>에서 트리클다운의 만능성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여성의 종속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4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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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군복무시설 내가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건물 다른 사무실의 사병 하나가 간질 발작으로 새벽에 죽은 일이었다. 원래 지병이 있었지만, 자대에서 안타깝게도 젊은 삶을 마감한 것이다. 부대에 사망한 사병의 어머니가 오시고, 듣기론 화장까지 해서 장례를 마쳤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이상한 숙제가 있었다. 그 사병이 죽고 난 후 그의 앞으로 택배가 왔다. 사병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에게 물건을 보냈던 것이다. 수취인은 분명 이름이 적혀 있지만, 그 수취인은 영원히 그 택배를 받을 수 없었다. 주임원사가 나를 부르더니, 나보고 그 택배를 다시 집으로 보내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수취인의 이름 대신 발송인의 이름은 나로 하여 그의 집으로 다시 택배를 보낸 기억이 난다. 진중권의 <레퀴엄>이란 책을 보면, 군대에서 자살한 사병이 차가운 군병원 영안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사병의 어머니가 차갑게 식어버린 아들의 몸을 보자 오열을 하기 시작한다. 진중권 교수가 사병 시절과 그는 옆에 있던 사병들과 같이 욕을 했다고 한다. 왜 자살 하냐고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녀 간 문제를 거론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여자는 임신, 남자는 군대다. 남녀사이에 갈등에서 내가 가장 불만을 느끼는 것은 남녀갈등의 사회적인 영역에서 갈등을 겪는 부류는 미혼 중심으로 담론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10년 전인가? 어느 유명 명문여대에서 많은 여학생들이 군대에서 복무 중인 남성들은 여성들을 언제라도 성폭행할 수 있는 잠재적 예비범죄인이라 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바가 있다. 여대에 다니는 분들이니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군대에서 남자들이 죽거나 크게 다치면 누가 가장 힘들어하는가? 그의 학교친구나 군대 안의 동료들일까? 아니다. 그의 가족들이다. 특히 그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가장 괴로워하신다. 한국에서 남녀문제는 기혼여성을 배제하는 경우가 많다. 기혼여성과 미혼여성에서 둘 다 여성이고, 둘 다 인간이다. 기혼여성의 문제가 사회적 등장하면 남녀문제보단 오히려 가정문제로 이어진다.

 

한국사회에 남녀문제 해결을 보는데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가정에 속한 기혼여성, 그리고 그녀와 같이 사는 기혼남성에 대한 사회적 함의를 배제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화성에 사는 남자 금성에 사는 여자라는 방식으로 남녀문제를 보는 한국사회의 감정적 방식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갈등만 증폭시킨다. 작년 가을, 서울과 부산에서 어느 한 여성과 데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분에게 내가 가진 책으로 매릴린 옐롬(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인문학자로 저명한 페미니즘 학자다)의 <유방의 역사>와 그 뒤에 <아내의 역사>를 드렸다.

 

이런저런 한국 사회의 여성과 남성에 대한 사회적 입장에서 그분은 나에게 한국의 여성은 참 불리하고 불쌍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대답했다. 한국에서 불리한 남성이 불쌍하고, 불리한 여성이 불쌍하다고 말이다. 즉 불리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 불쌍한 것이 나의 주장이다. 하지만 물론 여성이 불리한 것은 많은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대상은 미혼의 여성이 아니라 기혼의 여성이다. 예전에 <4천원 인생>이란 비정규직과 식당식모 아줌마들의 생활을 보여준 책이 있었다. 한국의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1시간당 몇 천원도 안 되는 일당으로 10~12시간 정도 일하는 수백만 기혼여성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남녀문제에서 미혼여성의 입장에서 남녀문제를 말하는 것에 대해선 상당히 답답하게 여긴다. 남녀가 사회생활하기에 필요한 것은 가정과 학교의 교육과 지원이다. 만약 가정에서 어머니보고 자식이 남자가 좋냐 여자가 좋냐?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겠는가? 이미 어머니에게 모든 자신의 아이들은 소중한 존재다. 여자인지 남자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하지만 사회에서 대립되는 미혼남녀의 입장은 첨예하게 다르다. 서로에게는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를 찾기 위해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 라이벌은 남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남녀가 속한 가정의 조건에서 달라진다. 가정이 부유하고 여유가 있다면 학업을 유지할 수 있지만,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 생계수단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다면 상황이 다르다. 물론 그런 와중에 우등생은 존재하나, 그것은 확률적으로 아주 낮고, 그것이 될 가능지수는 아주 낮다. 로또복권을 샀으니깐 1등에 당첨될 기회가 있다고 해서 된다는 보장은 없다. 막연한 가능성에 현실적 조건을 무시하는 것만큼 오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인 성공에서 남녀는 서로간이 적이 아니라 현재 자신이 속해져 있는 상황에 따라 변해가는 것이다.

 

어째 보면 이런 말은 당연할지도 혹은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하나, 이번에 읽은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에서는 이런 내 생각에 상당히 닿아있는 맥락이었다. 19세기 존 스튜어트 밀이 살던 시절은 한창 영국의 공업화시대였고,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세계의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군사적으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이때 19세기 때 영국의 통치자는 빅토리아 여왕이었고, 영국에서 가장 통치를 오래한 왕이었다. 그 앞에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이 유럽에서 최강의 국가로 옹립된 시기다.

 

위에서 나온 나의 의견, 그리고 밀이 살던 시절, 빅토리아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등장에서 연계성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점에서 여성도 역시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갖추면 남성 이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이다. 밀이 살던 시절에 아직까지 노예제도 흔적이 있었으며,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다. 20세기에 도래해서 서구사회에도 여성에 참정권이 생겼다. 여성에게 강요된 인생만 있었고, 그런 시대에 밀은 자유주의 사상가로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보여준 게 <여성의 종속>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도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에게 태어날 때부터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라는 이유로 차별당하는 것은 부당하고, 단지 그에게 공평하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 인간에게 생물학적 기능이 있기 때문에 남녀 간의 생리적인 구별은 필요하다. 가령 여성들이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 브래지어를 착용하는데, 남자도 인간이니 남자보고 착용하라는 논리도 이상하고, 남자들이 전쟁에서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우니, 여자들도 인간이니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우라는 논리도 이상하다. 인간의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은 분명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밀의 지적한 것처럼 영국의 빅토리아나 엘리자베스나 훌륭히 통치할 수 있는 것은 그녀들이 여자이든 혹은 남자이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녀가 태어난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 글자를 배울 수 있던 중세 내지 근대 초기 시대의 여성은 거의 드물었고, 일반 평민 남성들도 드물었다. 단지 여성에게 열린 길이 더 적었다.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은 여왕이라 가능했지 평민여성뿐만 아니라 평민남성도 역시 어렵다.

 

밀의 자유주의적 관점은 <자유론>에서 드러난다. <자유론>에서 자유란 자신의 이성으로서 선택하는 것이고, 이성의 의지로서 타인과 조우하는 것이다. 자신만이 모든 권리를 누리는 게 아니라 타인의 권리도 누리게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밀의 아버지인 제임스 밀은 공리주의자 벤담과 친분이 깊었다. 밀의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는 현대 민주주의 제도에 큰 공헌을 한다. 밀의 자유주의는 만일 타인에게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을 도와주고, 누가 잘못했다면 그 자에 대한 처벌도 필요하나,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주변에서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했다.

 

밀의 자유주의는 철저히 이성과 논리로서 대했기 때문에 만일 이성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남자나 여자나 상관없었다. 단지 이성적 능력이 없는 자가 정치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이성적 영역에서 윤리적 가치관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 가치관에 여자 역시 동참이 가능한 점에서 <여성의 종속> 번역자는 밀의 대표작인 <자유론>보단 오히려 <여성의 종속>을 우위에 두는 것 같았다. 사실 밀은 자신의 아내 헤리엇 테일러를 만난 후로 엄청난 발전을 했다.

 

천재적인 지식인이던 밀에게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헤리엇의 만남은 운명 같을 것이다. 밀은 영국사회에서 자신의 이상적인 자유주의 가치관을 보여주었으나 현실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대학의 문을 가는 것은 극히 일부 부잣집 영애만 가능했고, 일반 남성조차 가난에 의해 대학은커녕 중고등학교 문도 못 가신 분도 많았다. 지금에 와서 여성보고 대학에 가지 말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정신병원에 먼저 가라고 할 것이다. 밀도 역시 그런 시대를 겪었다. 밀이 죽고 난 뒤 몇 십 년이 지난 후 영국에도 여성에게 참정권이 생겼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참여에서 문화인류학 영역에서는 전쟁이 원인이라 한다. 국가기관에서 경찰, 소방, 의무 같은 시스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활동에서 남성이 주도했지만, 전쟁이 일어난 남성들이 참전하여 그 체계들이 무너지거나 손실되었다. 과거 구식무기를 사용하던 시대는 농민들이 평소 생업에 종사하다 어느 순간 징집되어 칼과 창을 들고 전쟁터에 나갔다. 하지만 산업사회 도래 후 농민들은 대거 축소되어 도시로 가게 되었고, 공업화와 서비스 직업에 몰리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남성이 있다면 그 옆에 같이 살던 가족에서 여성도 있다. 그 남성의 빈자리를 여성이 대체하는 방식이 20세기에서 여성의 권리에 큰 전환점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사회는 유지되었고, 여성의 능력은 결코 남성에 못지않고, 어떤 분야에서는 더 탁월한 성과를 보인다. 여태까지 보일 수 없던 이유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던 점, 그런 기회가 없으므로 어떻게든 활동할 수 없었다. 기껏 해보았자 옆에 있던 남성이 그럴 기회가 주었다면 가능했다. 남성의 힘으로 여성의 능력을 발휘하면 그 수준의 정도는 한계점이 다다른다.

 

물론 기회가 있다면 능력을 충분히 보일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남자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귀부인과 애인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수많은 귀부인이 젊은 남성을 이끌고 있는 것이 파리의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귀부인 귀족의 무리에 속한 사람이란 점이다. 18~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책 1권이면 어느 평범한 식구가 2주 동안 생계비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보는 것에 엄청난 재원이 필요한 점에서 결국 밀의 서적을 다시 생각해도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남녀가 태어난 사회적 조건이란 점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때까지 지구역사상 가장 용맹한 남자는 스파르타의 전사라고 한다. 그들은 그 누구의 명령을 듣지 않는 불굴의 전사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부인에게만 복종한다고 했다고 한다. 세상을 지배한 것은 남성인지 아니면 그들이 진정 복종시키는 부인인지는 보는 관점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밀도 남성이 가지는 미개한 이성적 수준이 인류의 진보와 문화를 파괴하고 퇴보시킨다는 점이다. 그 중 하나가 여성에 대한 심한 착취행위다. 제도적으로 재산은 여성에게 주지 못하고, 여성이 가진 모든 것은 남성이 갈취한다. 어느 순간 아내를 버린 남자가 어느 날 다시 와서 그 여자가 혼자 힘으로 얻은 성과품을 갈취하던 게 과거의 산물이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밀은 자유주의자이나 페미니즘은 밀과 동시에 살던 마르크스에 의해 만들어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후에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과격하고 급변적인 사이보그 페미니즘도 등장한다. 밀의 시대적 환경과 후대의 상황의 변화는 다양한 의견과 사상으로 발전했으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단지 그렇게 태어난 이유로 노예 같은 삶을 강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노예 같은 삶을 사는 자에겐 그 삶에서 굴레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다. 본래 페미니즘은 소외된 계층에 대한 해방철학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만 인간이고, 이방인과 외국인, 노예와 아이들에겐 인간적인 권리가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 논쟁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논하는 게 아니라 이익에 집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조건은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인 트로츠키의 도서인 <배반당한 혁명>에서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은 그 사회가 경제적인 빈곤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적인 문제를 전반적으로 해결해야지 남녀문제가 해결되는데, 그 문제의 본질을 내버려두고 서로간의 입장만 내세울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가끔 이상한 나라에 왔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페이스 북에서 나를 아껴주시는 영화학 여교수님이 올린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 글은 여자가 남자들에게 알려둘 점으로, 여자를 그냥 단순히 즐기기 위해 대상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감성과 이성을 존중하고 서로 뜻을 나누고, 그렇게 하기 위해 남자들에게 좀 더 자신을 향하여 성찰을 하고, 상대 여자를 위해 남자가 되라고 하는 내용이다. 딱히 덧글을 남기지 않았으나, 내가 하고픈 말은 그것이 만일 거대사회의 남녀라면 그럴 수 있으나, 남녀관계가 그런 거대한 사회에서 거대한 틀로 만나는 게 아니라 일상적 생활에서 만난다. 남자 역시 자신을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나, 처음부터 그런 남자를 선택했던 것은 여자란 점이다.

 

만일 상대 남자의 인격이나 가치관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인줄 모르고 계속 만난 것이라면 그 여자가 남자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대한 점이고, 설사 알았다면 그것은 엄청난 기만이다. 누가 누구보고 노력하란 점이 아니라 둘 다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밀의 <여성의 종속>처럼 남성이 억지로 만든 야만적인 사회체계도 문제지만, 그런 문제적 사회가 사라지는 세상에서 남성에게 억지로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도 문제다. 하지만 생각해본다면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지만, 이성보단 오히려 감성과 무의식에 의해 더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을 서로 감수하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분쟁만 일어날 뿐이다.

 

밀은 연애관보단 결혼관에서 밝히나 남녀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었다. 여성이 처음에 젊고 예쁠 때는 남성은 정력을 당하여 그녀를 위해 행동하나, 그것이 다하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여성이 사치와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허황된 망상만 추구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밀의 조건은 여성도 충분히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전제를 둔 것이다. 솔직히 생각하여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만, 세상의 일이란 말처럼 쉬운 법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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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12-26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게 있는데 간질 정도면 군 면제가 아닐까요 ? 이상하네.....
그나저나 멜클스마스입니다.. 아 지났구나...ㅎㅎ

만화애니비평 2015-12-29 23:30   좋아요 0 | URL
아 고옴발님도 새해복많이요. 간질기질이 있어도 자원입대해었다군요. 전역후 거기 사병이 죽은자리에ㅡ 자며는 심령현상이 일어나는 전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