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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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몇 년 전에 이소선 여사가 세상을 타계하셨다. 아마 하늘 위에서 한국 땅을 바라보는 그분의 아들인 전태일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에게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라 하여 귀천(歸天)이라 한다. 죽어서 사라지지 않았다면 분명 세상 밖의 어디서 바라보고 있다면 자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에 부끄러운 일을 남기면 후회하게 된다. 나라고 그렇게 올바르고 좋은 삶을 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려 하고, 만약 했었다고 느끼거나 주변에서 충고를 들으면 거기에 대한 반성을 조금이라고 실시하려 한다. 죽음 그 자체는 무서우나, 더 무서운 것은 죽음 이후의 세상이다.

 

나는 육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타인의 정신 안에서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전태일 평전>은 여러모로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책이다. 전태일이란 이름을 중고등학교 시절에 들어본 것 같았다. 당시 상당한 연기력을 가진 홍경인 씨가 드라마가 아닌 영화촬영을 한 것이다. 홍경인 씨가 연기한 배우와 영화 제목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전태일의 연기를 하기 위해 스턴트맨이나 대역 없이 홍경인 혼자서 했었다고 한다. 전태일의 모습을 재현하려면 가장 어려운 고비가 남았다.

 

전태일은 비참한 노동환경에 한탄하며, 이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에 절망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린 후에 불을 붙여 스스로 화형을 거행하였다. 노동근로기준법을 손에 잡고, 법전이 있어도 아무런 쓸모없는 그 책을 부여잡고 자신의 몸과 같이 불길 속으로 타올랐다. 홍경인 씨가 연기할 때 그 장면은 무척 위험했다. 하지만 그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고 모든 것의 의미였다. 더 이상 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희생하여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죽음조차 불사할 수밖에 없던 한 노동자의 슬픔은 우리 사회에 깊은 파동을 넘긴다.

 

사실 한국의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인권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그러나 노동문제가 매우 심각한 이유는 인간은 하루에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옷을 입고 다니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결국 삶의 목적을 위해 우리는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제적인 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현재 우리 사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되어 임금에 대한 갈등이 생기고, 최근 임금피크제도라는 이름으로 신구 간의 갈등이 일어난다. 자신이 일하는 곳이 자신의 가게가 아니라 대부분 고용되어 일을 한다.

 

일을 하면 임금에 의한 인건비가 기업으로서 많은 지출비용에 해당된다. 그래서 대부분 기업은 비정규직을 선호하고, 그들에게 장기계약보다 단기계약을 원한다. 퇴직금이나 휴가, 각종 복리후생 규정에서 비정규직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그나마 현대에 개선된 점은 아동노동이다. 그러나 아동이 현재 가혹한 노동을 하지 않을 뿐이지, 그들이 성장하면 가혹한 노동현장에 투입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자신의 자녀들을 좋은 근무조건에 일하게 하고 높은 수익을 받기 원하여 많은 부모들은 현실의 문제를 뒤로 한 채 자녀들에게 공부를 강요한다.

 

아무리 강요해도 일부 누구는 어려운 환경에서 분명히 일을 해야 한다. 지금은 일부일지 몰라도 전태일이 살던 시절에는 대부분이 그래 했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앞으로 미래에 그런 일이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임금의 문제가 계속 사회적으로 문제되어 근본에 대한 해결안이 나오지 않으면 나중에 피해보는 것은 힘이 없는 약자이다. 자신이 겪은 배고픔을 자식에게 주지 않겠다며 공부시켜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구조다. 이런 세상에 희망이란 무엇이고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린 시절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현실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경제적인 임금보단 노동환경에 대한 부분이다. 아버지가 선원 노동자로 일하면서 나이가 연로하여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퇴직금도 못 받는 일도 생기고, 일하던 중에 다쳐도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온 몸에 상처와 바늘자국 그리고 눈에는 세상에 대한 환멸감이 가득한 것을 볼 때가 있다. 노동자의 몸은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근로조건은 그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것이지 그의 인생과 인간성까지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을 외면하고, 설사 그것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 시끄러운 잡음만 들릴 뿐이다.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 그런 일을 없을 것이라 믿으면서 세상의 흐름에서 바닥에 내려오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에게 그것이 끝난 게 아니라 계속 영원히 되풀이는 된다는 점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주변의 도처에 쇠사슬에 의해 묶여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은 것을 쇠사슬 밖에 없다.”라고 했다.

 

인간은 분명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존엄하게 살아가야 하나 이미 세상은 불평등으로 가득하다. 선천적 자연적 불평등은 어쩔 수 없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거나 또는 특별한 신체능력을 가졌다면 누구를 탓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도덕적 사회적 불평등은 분명 문제다.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은 고의적인 요소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이 생각났다. <자본>에서 영국 공장 감독관이 작성한 기록이 나온다. 다행히 공장 감독관은 당시 암울한 공장노동자의 현실을 자세히도 기록했다.

 

대부분 공장에 어린 소녀들이 옷을 만드는 작업공정에 투입되었다. 이들에게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노동을 시켰으며, 하다못해 잠을 못 자게 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강제노동을 시킨 적도 다분했다. 이제 5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들은 기계의 사이 끼여 있는 불순물을 골라내기 위해 추운 날 맨손으로 쉴 새 없이 일을 한다. 환기가 좋지 않아 신선한 공기도 흡입하지 못하고, 음식도 볼품없다. 게다가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온갖 욕설과 심지어 구타까지 일어난다.

 

이게 인류가 발전했던 원동력 중에 하나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된 성과의 열매는 모조리 기득권에게 돌아갔다. 이것이 우리의 인류의 역사였고, 그 비극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1960년대 산업화란 이름으로 공장에서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터도 가열되면 고장이 나므로 쉬는 시간은 노동자들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모터가 돌면 노동자도 돌고, 모터는 기계로 이루어졌지만, 노동자는 그 모터의 부품 중에 하나였다. 사람이 휴식을 취하지 않고 일만 하면 몸에 병이 든다.

 

병자를 두고 가련하다고 말 한 마디로 못해줄망정, 그들에게 온갖 야유와 조롱을 퍼붓고, 그런 병자들은 낡은 골방에서 혼자 외롭게 죽어간다. 위선으로 넘치고 폭력적인 권력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비정한 현실에 자신과 세상을 저주하면서 사라진다. 전태일이 자신의 눈앞에서 입에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여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나이가 중학교에서 예쁜 교복을 입고 친구들이랑 수다 떨며 지내야 할 그 소녀들이 입에서 피를 닦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그런 노동은 한국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이어졌다. 외국에서 온 노동자 그것은 여성노동자에게 그때보다 설비와 제도가 발전했다고 해도 무서운 세상의 욕심에서 한도 끝도 없는 억압에 시름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전태일과 친구들처럼 당장이라도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거나 몸에 휘발유를 뿌리라고 권하지 않는다. 단지 이것을 읽고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세상이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런 세상에 자신이 올바른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세상은 언제나 비참한 최후의 비극을 맞이한 후에 깨닫는다. 우리의 앞날에 그런 비극을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전태일이란 이름을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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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시작 - 노무현에 관한 첫 구술기록집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생각의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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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神話)라는 것은 다양한 이야기를 대변한다. 우리가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은폐 및 왜곡하는 경우도 있으나, 도저히 믿기지 않은 사실조차도 신화로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화의 겉에 보이는 이야기와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다르다. 이번에 읽은 <노무현의 시작>은 한국 노동운동역사에서 노동자를 변호하는 변호인이 탄생한 것을 적고 있다. 물론 여기에 구술된 기록은 사실적인 관계에 의해 적시된 것이고, 구술관계자는 그 당시 역사에서 핍박받던 사람들이었다.

 

신화와 매치하면서 신화는 그 사회나 문화적 집단의 기원이나 혹은 정체성을 말해주는 메시지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에 대한 신화는 과연 보는 이에게 어떤 존재로 왔는가? 노무현의 변호인 시절을 다시 보는 것은 우리 사회를 다시 보는 것과 같다. 최근에 나는 역사학자가 저술한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라는 책을 읽었다. 노무현 변호인이 활동을 하던 시기는 1980년대이고, 내가 읽은 도서는 1910~40년대 일제 식민지를 중심으로 연구한 도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소름이 끼친 이유는 일제가 펼친 노동억압정책이 1980년대의 우리나라와 너무 흡사한 점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나라는 독립운동을 한 것만 기억했지, 노동운동을 한 것은 잘 모른다. 노동운동을 한 이유는 우선 생계수단이 우선이고, 다음으로 가혹한 노동시간이다. 집에 공장에 일하는 가족들이 있다면 잘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노동환경에서 얼마나 가혹하게 일하고 있는지를 옆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그런 문제가 이미 시작된 점이다.

 

기업과 공권이 결탁하여 노동자의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때에 따라서는 감금, 납치, 구속, 심지어는 살해까지 하였다. 사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조선 안에서만 아니다. 고바야시 다키지의 선집들을 읽어보면 일본 내에서도 일본인에 대한 노동운동 탄압은 매우 심각했다. 국가와 민족들은 다르고, 설사 남에게 빼앗긴 나라나 혹은 빼앗은 나라에도 늘 빈자는 빈자였다. 빈자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제대로 목격하기보단 또 다른 차별에 의해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려 했다. 타인에게 받은 억압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린 악순환이 연속된 것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1980년대는 가장 치열했던 순간이다. 물론 정부가 일본이건 한국이건 크게 변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안기부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그 가족들은 갖은 협박과 감시 속에서 시달려야 했다. 이런 시기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극단적인 수단으로 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생계가 달린 문제니 그 과격함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노동운동을 한 반면 시위과정에서 다치거나 죽은 경관도 있다.

 

둘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과 분노의 화살만 존재했다. 그러나 정작 그 문제에 대한 중재나 해결방안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살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과 명령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할까? 민주주의 제도는 포용성과 국민에 대한 최선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정부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정부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후대에 의해서 희비가 엇갈린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어른들은 70~80년대의 향수로 판단한다.

 

안타까우나 그것은 한국의 자유주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를 파괴하는 원동력인 파시스트다. 한국에서 아직도 파시스트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에서 그 역사적 철학적 가치관을 두고 깊이 고민하는 자는 없다. 사실 노무현이란 인물이 누군가에게 좌파대통령이라 하고, 누군가에게 우파대통령이라고 한다. 좌우 이념적인 부분에서 기본적 맥락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토론을 100분을 하든 200분을 하든 변한 것은 없다. 정치란 결국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성과 무의식의 발판이 되어 사람들을 자극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만 정치가 흘러가면 나라 상태가 말이 아니게 꼬이게 된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연대하는 자들이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권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확장한다. 그리고 확장된 사업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새롭게 이권으로 등록되나, 등록되는 순간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이권으로 자리 매김한다. 이런 악순환 고리가 반복되며, 그 과정에서 생긴 모순과 부조리는 누군가 떠맡게 되고, 결국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바로 80년대 노동운동의 역사였다. 내가 대학에서 전공하던 과목은 환경공학이다. 환경공학에서 배운 무서운 공해역사에서 런던 스모그현상, LA 광화학스모그, 일본의 미나마타병과 이타이이타이병이다. 일본에서 이타이이타이병은 카드뮴이 인체에 누적되어 인간의 근골계에 심한 질환을 준다. 이때 병으로 인한 통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타이이타이라고 말한다. 일어로 이타이이타이는 너무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병인 온산병이라고 한다. 울산의 온산공단에서 일하던 노동자에게 이 병이 걸린 것이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강제로 직장에서 내쫓김은 당하고 보상조차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내 옆에 누군가 그러면 언젠가 그 옆에 있었던 그 누군가도 똑같은 병에 걸려 서글픈 인생에 괴로워하며 증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분노는 필요할지는 모르나 증오는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아무런 희망도 빛도 없이 그저 억압을 받고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심정이란 그야말로 저주가 걸린 세계일 것이다.

 

신화적인 요소에서 어두운 세상을 찾아오는 한 줄기 빛을 기다리는 민중의 바램처럼 노무현의 시작 역시 그런 것이다. 다소 그에 대한 표현이 지나칠 수 있겠으나, 책을 읽든 안 읽든 만약 어떤 최악의 상황에 놓여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는 비참한 사람에게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손을 내밀어준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은 자신이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살아가고, 누가 불행한 일을 당하면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기만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그 기만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라면 도통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그런 일이 주변에 일어나도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은 그 이유만으로 별개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기만이 가득한 세상에 누군가를 향하여 아무런 사심 없이 도움의 손길을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그 일을 하는 것은 각종 박해와 억압, 심지어 자신이 쌓아온 부와 명성까지 모조리 버리는 것이다. 그런 희생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변호인 노무현은 좋아해도 대통령 노무현은 조금 꺼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와 입장을 들어보면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다고 해서 노무현이란 인간 자체가 변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노무현의 시작>에서 한국노동운동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소선 여사가 청와대에 방문하여 노무현 대통령과 이야기하던 모습이 나온다. 정말 그가 노동자들을 외면했다면 이소선 여사나, 노동운동인사와 노동관련 정당의 인사가 찾아올 리가 없다. 단지 오면 불평이나 정치적 사회적 한계성에 대해 토로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무현의 시작점은 부림사건이란 희대의 용공조작사건이고, 우리나라에서 근현대사에서 놓칠 수 없는 마녀사냥이다. 납치 구금되어 온갖 폭력과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사람들, 지금도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당시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뒤에 일어난 노동운동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해결해야할 급과제이다. 최근 군대 병력 감축으로 인해 예비군의 훈련기간이 23일에서 조만간 45일로 늘어난다고 들었다. 군대에 입영해야할 남성들이 수가 줄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남성이 아니라 한국의 출산율이 저하되어 앞으로 100년 이후 이대로 가면 한국이란 나라가 존재할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결국 한국사회를 유지하려면 인구가 재생산되어 유지 되어야 하나, 오히려 그것을 역으로 가고 있다. 그 원인은 결혼을 하는 것이 어렵고, 결혼 후에 출산과 육아가 더더욱 어렵다. 인구의 재생산이 되지 않으면 경제력이 축소되고, 군대에서 병력이 부족하여 이미 국방과 경제의 약화로 국가의 위기가 초래되는 것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월급쟁이들의 생활수준을 높여 인구를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계가 안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임금피크제도를 말하는 점에서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20대 청년이 50대 어른에게 자신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그만 일을 하던지 혹은 월급을 덜 받으라고 요구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이들이 취업노선에 달려든 후 20~30년이 지나면 한 가족의 가장이 되고, 그 가장은 가족들의 생계수단과 자녀의 육아를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때 되면 지금의 20대도 50대로 되어 추후에 나올 20대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미래를 보지 않고 현실에서 당장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 모순을 다른 부조리로 대체될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인력이 감축되는 것은 기계의 보급과 전자동 디지털시스템에 의해서다. 사람이 하는 일이 기계로 대체되고, 기계의 능률이 상승하여 많은 인력을 둘 필요가 없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시장과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다른 직종을 살리고, 인력중심의 노동시장을 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인건비 축소로 이윤을 지키려 하고, 기업의 유보금은 늘어간다. 현실적 문제는 알지만,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자들이 계속 현실적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부조리로서 모순을 대체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이미 절벽 앞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도래하면서 거리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정면으로 부딪히는 변호인들은 지금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변호인의 시작은 노무현이다. 노무현의 시작이 결국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시작이 된 것이다. 법으로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법 이외의 것으로 억압받던 시절에 유일한 대안 점은 법의 원칙에 따르는 것이다. 무지와 가난은 독재정부의 연속하게 해주는 힘이 된다. 가진 것도 없이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신화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항상 양면의 칼날처럼 대우받았다. 노무현을 두고 기존 권력자들의 시선에서 매우 귀찮고 짜증나는 인물일 것이다. 이에 반해 계속 당하기만 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속이 시원하고 통쾌한 인물일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은 신화로 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의 신화는 성공의 신화가 아니라 패배의 신화다. 승리의 이야기는 회자되지 않으나 패배의 이야기는 회자되어 우리의 기억을 자극한다. 그가 옳고 그른 인물인지 판단하는 것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차이일 것이다. 만약 적어도 현실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고 억울하게 그 일로 계속 피해를 본 사람이라면 노무현이란 이름은 영원히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노무현 신화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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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식물의 인문학 - 숲이 인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박중환 지음 / 한길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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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인문학>을 읽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이 환경공학 전공자인 점에서 많은 동질감을 느낄 것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식물을 다루는 것은 생태환경을 다루는 것이고, 생태환경이라는 것은 환경학에서 반드시 깊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사람들은 환경에 대해 여기는 것을 아주 간사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환경이 왜 깊이 봐야 하는 것일까? 환경이란 영역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면 아주 거시적인 부분을 생각한다. 자원고갈, 식수오염, 지구온난화 등등을 말이다. 그렇지만 정작 그래 말하면서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대안의식은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거시적인 영역보단 미시적인 영역에 치중한다. 환경은 단순히 환경 속에서 움직이는 분야가 아니라 인문, 경제, 사회, 정치 등 다양한 영역에서 관여한다. 특히 님비현상과 같은 경우 내 주변에 대규모 공사가 일어날 경우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집 근처에 대단지 아파트가 설립되면 2가지로 나누어진다. 1가지는 공사로 시끄럽고 먼지 날려 생활이 어렵다는 점과 다른 1가지는 집값이 올라 부동산시세의 혜택을 본다는 점이다. 환경은 이런 저런 논리에서 치고받는 논쟁거리로 올라선 것이다.

 

환경이 소중한 이유는 처음에는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물과 공기를 마시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단지 숨을 쉬는 이유는 이성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자율신경에서 조절하는 부분이고, 물을 마시는 것은 물의 맛을 음미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단지 목이 마르기 때문이다. 선택적인 부분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적 요인에 의해 물과 공기는 인간에게 전달된다. 그런데 이 물과 공기가 공급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당히 괴로울 것이다. 집 옆에 공사장에서 먼지가 날려 창문을 못 열고, 퇴근 길 버스를 기다리는 도중 배기장치가 불량한 자동차에서 뿜어내는 매연은 매우 괴로운 고문이다. 이때 비로소 공기의 중요함을 알지만, 공기를 마시는 시간 중 그 순간은 짧은 찰나와 같기 때문에 금방 잊어진다. 물도 마찬가지다. 4대강 사업 이후 하천에 녹조현상이 일어나고, 물고기가 떼죽음이 일어나도 눈도 꼼짝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 문제를 말하면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만약 당사자 그 하천유역에 사는 사람이라 가정하자, 물이 하도 오염되어 수돗물에서 악취가 발생하고 트리할로메탄이란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대거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반응이 순간적으로 바뀐다. 수돗물을 마시지 않고 슈퍼에서 구매한 생수로 식수로 활용할 것이다. 인간의 간사함에서 나는 가끔 어이없는 형태를 본다. 자연의 소중한 것을 망각하면서 막상 자기 집이 아닌 곳에 환경 분쟁이 일어나면 비난의 화살을 날린다. 내만 안 당하면 되지! 란 심보가 우리 사회에 인간성을 마비시킨 것도 모자라 자연까지 파괴한다.

 

자연이 왜 소중한가에서 자연이 없다면 생물이 살 수 없고, 생물이 살수 없는 곳에 인간이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새가 살지 않는 곳은 토지가 척박하고, 대지가 병이 들어 생명의 기운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 곳에 인간이 살 수 있겠는가? 인간의 행위는 이때까지 그런 것을 막기보단 오히려 가속화시켰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가난한 노동자들은 주거환경의 악화로 건강이 심하게 나빠졌다. 그런 사람에게 유일한 치료방안은 주거환경의 개선이겠지만, 사유재산인 부분이므로 수많은 노동자를 구제할 방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규모 자연을 보호하고, 공유지로 삼아 자연의 맑은 공기와 물을 노동자들에게 공급하도록 했다. 물론 그 곳에서 어떤 개발과 오염은 불허한다.

 

자연의 기운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존하고 연결되어 있다. 산소가 일정치 않으면 인간의 뇌만 아니라 신체조직도 망가지기 시작한다. 장시간 열악한 노동환경만이 문제가 아니다. 공기가 환기되지 않고, 밀폐공간에서 계속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해야 했다. 산소농도가 저하되어 면역력의 감소와 인구감소까지 일어난다. 인간에게 자연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미적으로 쾌락함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최소한의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연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건강한 대지를 지탱하는 토양, 그 토양 아래 머물고 있는 물과 식생이다. 토양에 언제나 지하수가 있고, 지하수가 없이는 토양도 존재하지 못한다. 물의 기능은 응력이란 것이 있어서 일정 수분은 지반의 붕괴를 막으며, 지반에 가해지는 충격도 완화한다. 그리고 그 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토지도 필요하나 그것과 동시에 갖추어야 할 존재가 바로 식물이다. 식물이 왜 중요한 것인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생태조건에서 식물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푸른색의 식생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의 삶은 유지될 수 없다. 이미 그것 오래전 우리 인류에 의해 증빙된 것이다. 인간은 하루에 1끼이든 2끼이든 식사를 하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대부분 우리 식단에 올라오는 것은 육류나 생선보다는 식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설사 육류가 올라와도 그 육류를 키우기 위해 식물이 필요하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키우는데 곡물과 여물이 필요하다. 결국 식물이 기반이 되어 고기가 우리 입으로 전달된다. 식물의 종말은 인류와 세계의 종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식생의 중요성을 잊는다. 너무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착오일까? 과거 인간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식물에서 곡식을 찾았고, 아픔 몸을 치료하기 위해 식물에서 약초를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성웅으로 받드는 이순신 장군이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부상당했을 때 조치한 방법이 버드나무를 이용하여 발을 고정시킨 것이다. 버드나무에는 진통제의 효과가 있다. 약을 만들 때 쓰는 식물을 보면 약초도 있지만, 일상에서 사용하는 채소가 있다. 도라지나 감 같은 식물은 약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반찬에 이용된다.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점에서 자연에 모든 약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물론 외과적인 시술도 필요하나, 내과적으로나 혹은 간단한 외상 약에서 식생의 도움은 화학약품보다 뛰어나다. 화학약품은 부작용이 매우 심하나, 예로부터 사용된 한방은 부작용이 거의 최소화한다. 인간을 하나의 우주로서 보고 그 조화를 맞추었기에 자연적 흐름에 인간을 다시 되돌리는 것이다. 억지로 무리하게 떼거나 붙이면 결국 탈이 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우리 인간이 자연에서 식생을 이용한 것이라 보나, 결국 우리 인간은 자연과 자연의 소생인 식물에게 도리어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자연은 변화와 흐름에 충실하게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고 간다. 돌연변이가 인간에게 흔하지 않아도 식물에게 흔하다. 인간의 돌연변이는 오히려 도태되거나 생존에서 불리한 조건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식물의 변이는 다른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종족을 보존한다. 식물은 토지 위에서 자란다. 그래서 토지가 한정된 영역이기에 서로들 싸우기도 하고, 공존하기도 한다. 그 대상은 같은 식물이기도 하고, 곤충 혹은 동물에 미생물까지 포함된다.

 

경쟁을 하면서 공존하는 이들은, 우리가 흔히 자연의 야생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하나, 그 투쟁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그 생태계는 붕괴되는 점이다. 토끼를 잡아먹던 늑대를 죽이자, 토끼가 처음에 많이 번성하다 어느 순간 멸종했다. 그 이유는 토끼들이 그 지역의 풀을 모조리 갉아먹는 바람에 풀이 자라는 시간이 이들의 식량공급과 일치할 수 없어서, 대부분의 토끼가 굶어 죽은 것이다. 억지로 자연에서 한 가지를 건들면 어느 순간 도미노현상이 일어난다.

 

인간은 이런 자연의 생태계를 이해하지 않아 과오를 범한다. 식물이 자라는 저 생태계가 왜 저렇게 되어 있을까 에서 저기는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균형이 있다는 점이다. 이미 균형이 파괴된 대도시에서 자연의 녹취를 잃어버린 지가 옛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이 있는 곳으로 여행하고, 거기에 자신의 심신을 회복하려는 순간, 물질만능주의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발동된다. 그리고 자신의 편리성을 위해 자연의 공간을 개발하고, 또 다른 개발자가 와서 또 개발하는 방식이 반복되어 천연자연의 명소는 어느 순간 그 자연의 색을 잃어버린다.

 

맨 처음 그곳에서 인간이 하는 행위는 부지정지작업이다. 바로 땅을 억지로 밀고, 땅위에 있던 나무와 풀을 강제로 철거하는 것이다. 자연의 파괴는 인간의 이기심과 무지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목을 옭아맨다. 중세 이전의 인간이 식생을 두고 정원을 삼은 이유는 미적인 감각도 있지만, 식물에게서 식량과 약을 구하기 위해서다.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자 인간은 자신이 모든 자연을 지배하는 군림하는 압제가가 된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인간이 도시화로 인해 지구이상기상현황이나 사막화 그리고 각종 질병은 자연의 식생을 스스로 잘라내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어디서부터 바라보는 것이 옳은가? 교육과 경제조차고 삶의 경쟁에 의해 모든 것을 배제시켜 승리독식을 향하여 서로 파괴시킨다. 자연에 향한 인간의 모습은 모든 것이 평등한 영역으로 흐른다. 교양서적으로 <식물의 인문학> 좋은 도서인 것 같다.

 

그러나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메탄과 탄산가스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실제로 화산폭발이나 지반에서 내뿜는 가스에서 탄소가스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자동차나 공장매연 같은 화석에너지 사용이 대기오염에 해당이 되는 것에 대한 부분은 조금 문제가 있다. 환경에서는 모든 것에 대해 일정 부분 자정능력을 갖춘 것으로 본다. 수질에서 BOD(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 SS(부유물질량), T-P(총인) 등과 같은 오염물질이 들어오면 물속에 있는 DO(용존산소)와 미생물이 오염물질을 제거해준다. 물론 미생물은 생물화학적 방법에 의해서라고 하나 물의 이동에 의한 와류현상이나 물속의 산소 그 자체도 산화하기에 화학적 처리가 일어난다.

 

그럼 오염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정능력 이상의 오염물질을 유입 돼서 부터다. 수질에서 비점오염원이 문제되는데, 비점오염원은 강우 시 지표면의 먼지나 토사 등이 하천에 유입되면 오염시키는 오염원이다. 그런데 도시가 아닌 농촌이나 다른 지역에서 비점오염원은 발생하고, 자연적으로 정화된 곳에서도 폭우가 내리면 산사태에 의한 토사의 대량유입이 일어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토사유출이 된 하천은 다시 원상복귀를 하지만, 도시는 그렇지 않다. 이미 자정능력의 한계가 도달했기 때문이다.

 

대기 역시 그렇다. 대기 중의 공기의 이동에 따른 확산과 나무와의 생물화학적 반응은 공기에 유입된 대기오염물질을 저감시킨다. 이때까지 그것이 균형을 맞추어 배출과 자정능력의 균열이 없었지만,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대기오염물질이 발생하여 이런 문제를 야기했다. 전 대기환경에서 다이옥신의 배출이 극지방의 동물에게 누적되어 있는 점에서 미량의 다이옥신도 그러한데 탄산가스의 경우 전혀 지구온난화와 극지방 빙하와 문제되지 않는다는 논리는 환경공학 전공자에서 의아한 부분이다.

 

그런 이론이 전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이론을 내놓은 연구소가 어느 대규모 자본력을 소유한 외국기업과 결탁한 것이 있으며, 특히 석유와 관련된 곳이 있다고 들었다. 자연파괴와 대기오염에서 석유를 팔아 이익 보는 쪽, 혹은 하이브리드차로 세금을 이익 보는 쪽에서 생각하면 조금 의아스럽다. 더 의아스러운 부분은 전 지구적인 영역이 아니더라도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 옆에 있으면 배기가스가 상당히 열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실효과가 없다면 국소적인 열오염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지구광역적이 아니더라도 국가 내부의 크고 작은 광역 범위를 생각하면 조금 논리가 성립되지 않은 문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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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baal 2015-09-0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럽게 써주신 서평 감사합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08 20:55   좋아요 0 | URL
더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쓰카 에이지 -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오쓰카 에이지.선정우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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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카 에이지는 일본에서 유명한 문화평론가이다. 그리고 그와 대담한 선정우 역시 한국에서 유명한 문화평론가이다. 한일 양국의 문화평론가 거기에 일반적으로 대중문화보단 하위문화라고 불리는 서브컬처에 대한 연구자들이 대담하는 것이란 뭔가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이전에 일본 문화평론가인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된 포스트모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보며 일본 하위문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하위문화까지 지평을 넓혀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작가의 입장에서 이론을 전개한다면 오쓰카 에이지의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한다>는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지식과 사유의 전달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비판과 담론을 이어간다.

 

국내에서 하위문화 연구자로 선정우는 명성이 있는 분이다. 하위문화가 한국에서 그동안 탄압받고 규제되어 왔으며, 단지 아이들이 즐기기 위한 킬링타임용으로 여겼다. 그러나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서사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하나의 문학성을 인지하게 되면서 하위문화에 대한 다방면적인 검토가 가능했다. 하위문화적 특성 즉 오타쿠문화에서 보는 내 입지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대중사회를 거치면서 자신에게 언제나 받아들여야 하는 것만 강조한다. 이에 따라 인간에게 자신의 취향과 성향 그리고 상황적 순간에 따라 그런 대중적 가치를 받아들이기도 하나 때론 거부하기도 한다.

 

인간의 성향과 취향은 모두 같을 수가 없지만, 대중문화 코드에서 언제나 일괄적이고 전체화된 문화적 요소를 대중에게 전달한다. 대중문화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모든 주변인하고 다 잘 지낼 수는 없다. 스트레스, 강박관념, 무의식적인 욕구 등이 인간에게 하나의 집착을 보이게 하고, 그 집착이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희비가 갈린다. 오타쿠문화에서 잘 인지할 점은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만족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길 원하는 점이다. 끊임없이 생기는 욕망은 현실에 대한 박탈감과 공허감이 자신들에게 창작 내지 생산적인 관점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과거 오타쿠문화는 그러했다. 일본 대표적 오타쿠이면서 현재 전 세계 오타쿠문화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있다. 그는 특촬물을 좋아했고, SF영화로 울트라맨 특촬영상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작품인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오타쿠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집착과 집중력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오타쿠문화는 하위문화로서 가지는 의미가 크다. 대중문화는 미디어의 영향력이 매우 크게 작용하여 정치적 경제적 입지가 매우 크게 작용한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경제적 입지가 크기 때문에 언제나 주제가 진부한 Cliche로 이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예전에 사람들과 만화애니메이션 등 하위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최근 한국에서 방영되는 TV드라마조차도 기존 대중문화가 가진 스토리텔링의 한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위문화 콘텐츠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웹툰은 그렇지 않다. 다음과 네이버 심지어 웹툰전문 사이트까지 등장하여 웹툰은 이미 한국 대중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하지만 웹툰의 작가는 기본적으로 만화작가라는 점이고, 그들이 만화를 만들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전히 한국에서 만화작가와 웹툰작가는 동일선상이 아니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웹툰이 인터넷 매체에서 흥행되자 드라마 각본이 되는 모습이 보인다. <식객>이나 <미생>이 있고, 일본 만화원작인 <노다메 칸타빌레>도 한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된다. 시나리오 제작에서 기존 드라마에서 제공되는 이야기는 흔한 주제에 흘러가고, 흔한 내용과 결말로 이어져간다. 대중들도 거기에 만족하기도 하나, 가끔 새로운 주제와 흐름 또한 재미를 요구한다. 하위문화에서 올라오는 이야기는 바로 대중문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새로운 흐름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 오타쿠문화가 한국에 오면서 많은 만화작가 및 애니메이터 또는 다른 문예계통 작업자들에게도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기존에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한 도전과 흐름이 하위문화에 숨어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거대서사에 의해 세계가 움직이고 개인이 그에 따라 움직인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의 도래는 개인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거대서사에서 작은이야기의 분할로서 매체가 발달된다. 대중문화는 작은이야기를 올리더라도 그 한계성은 거대서사에 맞추어진 작은이야기로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처음에 색다른 이야기가 결국은 안 봐도 비디오라는 것에 흘러간다. 단지 대중의 욕망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라는 점이 새롭게 보여줄 수 있다.

 

예전에 TV 드라마로 흥행한 삼순이 신드롬을 보자. 노처녀에 뚱뚱하고 잘 살지 못하는 삼순이가 재벌에 잘생긴 연하의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새로운 자태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한국사회에서 대중문화의 욕망을 보여준다. 과거에서는 계급에 따라 지위가 달라지지만, 현재는 자본에 따라 달라진다. 자본에 대한 욕망은 어느 자본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시야는 그 여성의 외모와 상관없이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은 분은 김선아 씨고, 본래 그 분은 날씬한 미인이었다. 단지 연기를 위해 살을 찌우고 미녀로 꾸미지 않을 뿐이다.

 

드라마 종영 후에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미디어세계 즉 가상의 드라마에서 김선아 씨가 연기한 삼순이는 뚱보이나, 현실의 김선아 씨는 미녀연예인이다. 대중문화에서 보여주는 한계란 바로 저런 현실과 가상의 간격을 대중으로 하여금 분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위문화라고 모두 좋은 것만이 아니나, 적어도 하위문화에서는 대중문화와 다른 분리적인 요소를 공격하는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의 좋은 예처럼 마이너리티의 문화가 하위문화에 엄연히 존재한다. 예전에 재미있게 본 가네시로 가즈키의 좀비 시리즈는 일본의 대표적인 마이너리티 계층을 보여준다.

 

마이너리티의 모습은 대중문화에서 나오기란 어렵다. 그곳에는 현실에 존재하나 현실의 인간들이 외면하고 감추려 하는 모습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revolution Number3>에서 문제아 고교집단이 나온다. 거기에 재일한국인, 이혼가정, 오키나와 주민, 혼혈인 등 다양한 사회적 소외계층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일본에서 비주류고 어떻게든 엘리트집단으로 들어갈 수 없어 밑바닥을 오고가는 사회적 약자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적 약자라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자였다. 그들이 이길 수 없었던 사회는 모순과 부조리의 연속이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좀비들은 열성인자 유전자를 아가씨 학교학생과 연애하여 이어가려 한다.

 

우성인자라도 계속 머물면 도태되는 것처럼 교류 없이 정체된 사회는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다. 오타쿠문화는 각자에 대해 정체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적 속성이나 취향에 상당히 깊게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 많은 이야기와 흐름이 요동친다. 대중문화는 아주 넓은 호수가 있지만, 호수의 수심은 1m 안 되는 곳이고, 하위문화는 관로의 직경이 1000㎜ 된다. 단지 어떤 사회인지 조건에 따라 관로 안의 물탱크는 1㎥도 될 수 있고, 1000,0000,0000㎥도 될 수 있다. 드러난 것은 수도꼭지이고, 수도꼭지 아래에 숨어있는 물탱크는 미지수다.

 

보통 사람들이 미지수의 수원이 자리 잡은 하위문화를 접하면서 생각하는 점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다. 하위문화 특성에서 오쓰카 에이지는 다른 작품들을 모르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과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좋은 작품으로 여기고 비평적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자기 비판적 태도이고, 어떤 주제에 대해 흔한 결말로 이어지는 Cliche를 벗어나고, 더 중요한 이유는 프로파간다를 벗어나 상상력을 우선 시하는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TV판 25화와 26화는 신지가 인류보완계획 이후 자신의 의지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이코드라마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신지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인식과 자기 안의 결단력을 세워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목표심이 생기자 주변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며 끝이 난다. 만약 이렇게 끝이 나면 서사의 완결은 갈등의 해결점, 어째 보면 카타르시스의 해소와 더불어 현실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가능하다는 회피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1997년에 <Death & Rebirth>와 <End of Eva> 2편이 상영된다.

 

<Death & Rebirth>는 TVA 1~24화까지 축약하고 거기에 다른 장면을 추가로 집어넣고, <End of Eva>는 인류보완계획으로 모든 지구생물이 멸망하고 신지와 아스카가 남는 것으로 끝이 난다. <End of Eva>의 절망적인 결말은 주인공 파일럿에게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고 오직 고립만으로 현실의 상황이다. 오쓰카 에이지는 바로 이런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보여주는 현실적 절망에 작품적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하위문화는 바로 이런 현실에 대한 단절성을 보여주고, 거대서사로부터 벗어나 거기에 대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 그런다고 모든 게 그렇지는 않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닌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작품 <반딧불의 묘>처럼 일본과 한국에서 보는 관점도 다르고, 거기에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의 의미도 보는 이에게 다르다. 최근 한국에서도 흥행한 <코드 기어스>도 한국에서 제국주의적인 요소로 비난당하고, 일본에서 극우세력에게 비난당하고, 미국에도 비난당한다. 자신들이 과연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오해가 있을지라도 보는 이에게 다른 관점을 주는 것이다. 작품을 만든 작가들은 의도하던지 혹은 의도하지 않던지 그 작품의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윤리성에서 작가에게 달린 것보다 소비자 즉 향유자에 의해 결정되는 게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다.

 

그 작품이 문제성을 보고 느끼는 것은 관중의 입장이지 제작자의 입장이 아니다. 제작자는 창의적인 사고에 의해 작품을 제작한다면 그것을 보고 비판하는 것은 향유자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는 관객이라면 작품에서 다가오는 이야기가 바로 현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관객에게 어떤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던지 혹은 관객에게 드러나지 않고 싶은 불편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도 제작자의 의지일 수 있다. 대중문화에서 현실의 대다수 관객에게 불편한 감정을 심어주려 하지 않는다.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에서 기존 일본인들이 피하고 싶은 것은 은근 집어넣는다.

 

하위문화에서 그런 이야기를 넣을 수 있는 조건은 바로 상상력을 억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쓰카 에이지와 선정우 씨의 대화에서 상상력에 대한 언급에서 나는 진중권 교수의 서적에서 본 말이 생각난다. 상상력이란 미래의 윤리라는 점을 말이다. 윤리적인 태도에서 상상력이 중요한 것은 어떤 현실적 상황에서 만약 이렇게 되었다면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되었을까? 그 만약이란 것은 우리에게 어떤 조건에 대한 사유와 판단을 하게 할 수 있다. 단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단순히 소비하고, 그 의미의 전후맥락을 놓친다면 단지 불편하게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불편한 것들에 대하 성찰은 내가 살아있는 현재를 말해준다. 하위문화는 바로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장점이지만, 한편으로 단점도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의 오타쿠문화는 자신들이 만들어가는 여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신들의 소비와 향락에 침식당하는 것이다. 과거의 오타쿠는 아키하바라에서 모여 무언가를 만들고 활동한다면, 지금은 아키바계 상업적 비즈니스의 고객으로 변했을 뿐이다. 물론 소비의 영역에서 창작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나, 오로지 소비에만 치중하여 오타쿠 문화에 유입되는 부류는 현실에 불만족에 대해 자신이 만족할 것을 찾기보단, 그저 현실적 문제에 눈을 돌려 자신만의 세계 갇히게 된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갇혀있는 사람에 대한 비판성이라면, 그것이 오타쿠문화 3번째 혁명이란 점이다. 그러나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 거대서사 해체 후 작은이야기의 진입에서 모에요소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모에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소비시장으로 계속 집중되고, 하위문화 향유자들은 현실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반발성보단 현실 그 자체의 부적응자에 의해 채워져 간다. 일본 넷우익이나 한국의 극우성향 사이트에서 애니메이션 소비자가 많다는 점은 자신의 현실을 인지하기보단 그 현실적 문제를 자신과 사회적 구조보단 어느 다른 누군가로 전가시키는 점이다.

 

오쓰카 에이지와 선정우 씨의 대담에서 계속 느끼나, 과거 내가 잠시 읽어본 가라타니 고진의 책들의 내용과 상당히 일치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일본은 기존 소설이 몰락하고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하위문화 계통의 이야기들이 앞으로 흥행할 것이라 보았다. 근대성의 종언, 즉 모더니즘의 종료는 거대한 역사적 맥락에서 단절되어 기존에 없었던 것들의 탄생이다. 오타쿠문화는 거대서사에 대해 생각하면 대중문화 기류에서 분리된 존재다. 그런다면 대중들이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대중들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대중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에서 새로운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이 나올 수 없는 점과 그 새로운 이야기의 원천지는 하위문화일 수밖에 없는 점을 나는 위에 언급했다. 그렇지만,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기에 극단적 행동도 불사하는 요소도 보인다. 과거 일본과 한국은 농경중심의 사회다. 가족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다. 결혼, 장례, 식사, 교육, 기타 수많은 문화적 유산이 가족들 안에서 해결되었다. 자급자족 사회에서 생산된 것이 교환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로 이환되면서 개인의 존재는 집단사회 즉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것이다.

 

개인의 영역에서 인간의 자신의 정체성 및 자아에 대한 혼돈에서 캐릭터적인 요소를 만들어낸 것이다. 어느 이야기를 보면 사회에서 보면 그 당사자는 매우 불합리적이고 악의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에서 그 인물 중심으로 전개될 경우 그만의 합리성과 이유가 있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윤리성의 영역하고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혹은 현실적인 부분과 괴리성이 생기는 원인도 된다. 하렘이나 미소녀연애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점에서 그것이 하나의 장르로서 이용하는 게 문제는 아니어도, 그 자체로 빠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남성은 왜소하고 특별한 것이 없지만, 어느 계기로 주변에 수많은 미소녀들이 모이고, 남자주인공 한 명을 두고 서로 질투하고 연애 공략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상력보단 자기 캐릭터를 합리화하기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들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대리만족으로 채워 나가고, 그 현실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한 이성적 판단력과 사회구조적 모순보단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이어지는 것이다. 약자라는 존재가 자신의 피해자 심리를 두고, 주변에 다른 약자에게 적으로 간주하여 피해자 심리로서 가해하는 것은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혔기에 그에 따라 보상 및 응징에 대한 대가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이다. 거대서사에서 응징의 용사는 가해자의 공격에 의해 피해를 봤기에 응징의 명분이 생성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응징은 실제의 피해를 주는 대상과 응징당해야 하는 대상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든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리고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캐릭터설정을 계속 부여한다. 하위문화는 대중문화와 다르게 억압된 것들이 표출되는 요소를 보여준다.

 

대중문화이든 하위문화이든 이제는 소비중심 사회로 이환되어 더 이상 사람들은 사고와 비판을 하지 않은 세상이 도래했다. 지나친 억압보단 오히려 지나친 물질적 쾌락에 길들여져 우리는 현실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응시하기 것보단 단지 현실에 안주한다. 당장 길거리에서 나가 투쟁하는 시기는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물질적 혜택과 재미라는 쾌락에 의해 그런 행위에 대한 반감만 불러올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현실에 대한 모순과 부조리는 감지한다. 주체와 대상을 분리되고, 그 문제를 볼 수 없거나 보지 않는 사회라면 어두운 사회가 될 것이나, 하위문화는 바로 그런 사회를 비꼬거나 뒤돌아 볼 수 있게 만든다.

 

강풀의 <26년>이나 최규석 작가의 <100℃>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건드는 작품이다. 역사의 왜곡과 수정 그리고 은폐가 이루어지는 현실사회에서 어떻게든 그런 불만들은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기억에 각인되고, 단절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가려하는 욕망이 일어난다. 이야기의 탄생은 바로 저런 거대한 흐름과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들에 의해 복잡하게 얽혀간다. 그런 이야기들이야 말로 오타쿠의 문화의 특성이며,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시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잘 안 되는 게 현실이고, 그것을 밝혀내어 새롭게 해석하는 게 중요한 일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의문이 작품에 드러나도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단지 스쳐가는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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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 세상을 읽는 4가지 방법 Great 인문학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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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를 두고 괴테는 그로 하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독일 최고 문학가이자 세계적인 인물인 괴테에게 루소도 그러하고,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세계적인 작가 톨스토이 역시 루소가 새겨진 동전을 목에 걸고 다녔다. 루소의 영향은 18세기 <신엘로이즈>로 여성들의 마을을 흔들었고, 19세기 혁명의 시대에서 <사회계약론>은 혁명가들의 복음서였고, 20세기 <인간불평등기원론>은 자본주의사회와 문명사회에 자연주의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주고, 21세기에 <에밀>은 교육문제에 파국으로 닥친 한국사회에 많은 것을 주고 있다.

 

루소를 다시 읽는 것은 우리에게 과거의 인간인 루소이지만, 그의 책에는 항상 미래를 향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맞이한 미래보다 더 먼 미래를 향하여 루소는 눈을 돌린 것이다. 인간에 대한 문구에서 <사회계약론>의 이 구절은 너무 유명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자유로웠는데, 어디서나 노예가 되어 있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기실 그들보다 훨씬 더 노예가 되어 있다.” 물론 출판사마다 다루게 번역되어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유롭다. 그러나 도처의 사슬에 의해 묶여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그들보다 더 심한 노예로 되어 있다.” 등으로 말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이 구절은 인간의 관념세계를 확장시키는 혁명적인 문구가 되었다. 왜냐하면 루소가 살던 18세기 그리고 이 책이 발간된 1762년은 프랑스에서 왕정사회였기 때문이다. 루이14세의 절대왕권의 선언과 그 이후 부르봉왕가는 왕족, 귀족, 성직자들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그 자체에는 모든 게 자연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인간의 불평등은 크게 2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신체적, 자연적 불평등으로 다른 하나는 정치적, 도덕적 불평등이다.

 

태어나는 인간은 아직 어떤 능력을 갖추지도 못하고, 그저 타인의 도움에 의해 살아가야 하는 약자다. 그런 인간이 정치적인 조건에 따라 성장하여 그가 어른이 되면 불평등한 세계의 일원으로 완성된다. 불평등의 세계에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인간에게 악덕을 주는 오만한 학문과 불필요한 도덕이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처럼 인간의 문명과 기술은 이미 인간에게 물질적 혜택을 주는 것 이상으로 불행과 고통을 선사한 것이다. 진보적인 사상가이면서도 반진보적인 가치를 가진 루소는 인간의 역설적인 존재로서 우리에게 살아가야할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라면 누구라도 불평등하게 서로를 구속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라는 조직은 그저 우리 인간이 서로를 위해 만들어야 할 계약에 의해 설립된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사회라는 공간은 우리가 계약에 의해 존재된 것일까?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는다면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남김없이 고발한다. 마지막에 갈수록 그것은 자본에 대해 비판한다.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18세기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산업혁명과 동시에 가속화된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아니었는지는 소수의 거부인 부르주아와 그 밑에서 일하던 농민과 노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루소는 마르크스 시대 사람이 아니기에 자본가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중심으로 삼지 않았으나, 루소 역시 자본가 존재에 대한 경제적 착취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 자본에 의해 혹사당하고 억압당하는 가난한 프랑스 국민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루소가 자연적 인간을 추구한 이유는 문명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그 자연에 살고 있는 주민을 내모는 인클로저 현상을 목격한다. 빵을 만들 사람들이 빵을 구하러 도시에 가나, 그들에게 오는 것은 비참한 현실과 절망이다. 자연에서 살아가면 인간은 산속의 열매를 따먹고, 강가의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도시에서 심각한 노동착취에 의해 고생하고, 더러운 주거환경에 병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자연의 공간이 공유지에서 사유화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내쫓기게 된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 도시로 가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그저 거지처럼 구걸하거나 좀도둑처럼 물건을 훔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밖에 없다. 아니라면 아침부터 밤늦게 열악한 환경에서 심신을 소모하는 과격한 노동에 시달린다. 자연인으로 태어나 자연에서 살아가는 게 행복한 이유는 적어도 자신의 육체에 가해지는 억압도 없으며, 정신적으로 영혼에 병이 들지 않는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자연인들을 볼 때 아마 볼테르와 많은 프랑스 사람들은 사람이 어찌 숲 속의 곰하고 같이 살 수 있을까라고 조소했을 것이다.

 

루소가 그것을 점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가 본 도시의 삶이란 척박했고, 민중의 삶은 고달픔으로 가득하여 서로의 이기심을 위해 불속에 향해 달려드는 나방과 같았다. 숲 속에 사는 곰이 될 수 없고, 농사만 짓고 살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대 그리스사회는 이른바 폴리스를 형성하여 살았다. 폴리스 도시국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주인이 되어 결정하고 의결하여 국정을 운영했다. 그렇다면 결국 직접민주주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시민들의 가치를 공공의 이익에 반영하여 그 의지를 일반의지 혹은 보편적의지로 삼은 것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바로 그런 의지를 위해 만들어진 책이고, 그것으로 정치를 움직이게 만들려는 책이다.

 

루소 이전에 법철학 서적이 있었지만, 귀족이나 왕족 중심이었지 일반 민중에게 법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 건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초시라고 볼 수 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은 21세기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절대적 가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기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은 그 반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대혁명을 만들고, 오늘날의 민주주의 이념적 가치가 되었다고 하나, 막상 사람들은 루소에 대해 잘은 모른다.

 

신자유주의가 세계에서 지배하면서 다시 루소의 사상을 돌아보면 루소의 가치와 많이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팔정도로 너무 가난해서는 안 된다고 하나, 오늘 우리 주변에 자신의 몸을 비참한 운명에 파는 인간이 너무 많다. 루소가 바라본 과거와 지금 내가 바라본 현실에 차이점은 그다지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공공성에 대한 의지성이 필요하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에게 주권을 절대로 누군가에게 줄 수 없고, 파괴될 수 없으면, 인간의 주권이 파괴되는 것은 그 존재의 죽음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 21세기 민주주의에서 주권에 대한 의식에서 과연 우리는 제대로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정치적 체계에서 직접이 아닌 간접적 대의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있다. 루소는 당파의 존재는 필요할지 모르나. 그 파당의 이익에 대하여 정치적 입지가 갈리는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일이 일어났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마치 성경 이상으로 여기던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당도 비극이 일어났다. 단순히 누군가 소수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계약론>을 읽으면 모든 사람들에게 공공성에 대한 보편적 의지를 담아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민들이 모두 정치적으로 현명한 판단을 내려 훌륭하게 만들어간 나라는 거의 없었다. 루소도 그런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예전에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정의론>을 읽은 후 <만민법>이란 책을 읽어보았다. 만민이란 시민도 되고 인민도 되는 책이다. 어느 특정지역에 살아가는 인간이기보단 만민은 전 세계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만들어보자고 권하는 게 롤즈의 철학이다. 물론 롤즈의 철학이 칸트로부터 시작하고, 칸트는 루소의 영향을 받는다. 21세기가 와도 여전히 국가와 사회는 존재하고, 세계와 개인도 존재한다. 그 사이에 인간은 타인과의 정치적 입장에서 늘 선택을 한다. 그러나 좋은 선택보단 잘못된 선택이 많을 때가 많다.

 

루소 이후 민주주의 철학은 발달하고, 사회적으로 발전을 계속해도 그 정치적 이상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루소의 책은 18세기는 분명하나, 21세기에 읽어봐도 그렇게 부족하거나 시대적인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서 문명적 혜택은 분명 차이가 나겠지만, 인간 본래 존재적인 가치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고전을 읽으면서 과거에 만든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는 이어져야갈 필요가 있다. 보편적 사고가 멈춘 곳에선 어느 모략을 가진 자가 나타나 독재자로 군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으면서 가장 놀란 점은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 공화국을 만드는 과정과 방식보단 그것을 파괴하는 전제군주와 정치제이다. 루소의 책을 읽으면 좋은 국가를 만드는 이상적인 방향보다 오히려 그렇지 못할 경우 나타날 비참한 현실이 더 인상적이다. 모든 국민이 복종할 것은 오로지 법이지만, 독재자는 법을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든다. 법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과 그 무리가 나타날 경우 시민들의 권리는 축소되어, 자유의 의지가 박탈된다. 전제군주라는 그 자체는 21세기에 거의 사라져도, 거기에 버금가는 자들은 많다. 그런 전제군주와 같은 사람이 판을 치는 곳에서 인간의 자유는 과연 어떻게 될까? 사슬의 고리는 결국 자신의 원하지 않아도 묶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 사슬이 묶이게 되는 동기는 제공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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