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 - 세상을 읽는 4가지 방법 Great 인문학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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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에서 지배이데올로기에 관한 도서는 줄기차게 발간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인류기록에서 아마 최초로 마녀사냥으로 죽었다고 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대화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렸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아테네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더불어 스파르타라는 국가정체를 도입하기를 바란 내용이 나온다. 플라톤의 저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분량이 많은 <국가(政體)>이다. 서양철학에서 플라톤이 시작이라고 한다면 그 끝이 볼테르고, 루소는 그 끝에서 새롭게 시작한 사상가다. 왜냐하면 볼테르가 프랑스대혁명에서 위대한 정신적 지주라고 해도 그는 결국 다른 누군가보단 우월한 지위와 부를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국내 루소 저서 전문번역가이면서 전문가인 김중현 교수가 말한 것처럼 루소 역시 가난하고 지위한 낮은 힘이 없었던 자였기 때문이다. 힘이 없었던 사상가인 루소는 그토록 많은 적과 싸우며 마지막에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갔다. 그의 몽상이란 단순히 자폐적인 망상이 아니라 자아성찰과 더 나아가 인생에 대한 명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루소의 마지막 명저 <고독한 몽상가의 산책>은 글이 매우 안정적이며 부드러운 반면, 이번에 다시 또 읽은 <인간불평등기원론>은 매우 글이 날카롭고 열정적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10번째 산책 글을 미완으로 남긴 채 서거한 루소이기 때문에 이미 그는 모든 것을 초월한 경지에 올랐다.

 

생각해보면 인류의 성인에서 소크라테스보다는 나는 차라리 루소를 선택하고 싶다. 소크라테스는 오로지 자신 안의 신과의 대화로 통해 진실과 정의를 추구했다면, 루소는 소크라테스를 넘어 신뿐만 아니라 자연이란 공간까지 동원했다. 소크라테스는 인류애적인 요소가 같은 아테네인 내지 더 나아가 헬라스(그리스)지역 사람 정도일 것이다. 노예와 어린아이, 여성, 그리고 이방인에게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은 소크라테스였다. 루소는 오히려 노예제를 경멸했고, 여성과 남성의 자연적 불평등을 인정해도 그는 결코 여성 그 자체를 내려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인종차별(<新엘로이즈> 참조)을 미워했고, 심지어 동물까지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했다.

 

서구사회에서 근대철학은 르네 데카르트부터 시작했다. 이성의 의해 과학적 법칙을 세웠지만, 인간을 구분하는 것도 모자라 인간 이외에 존재하는 것은 도구로 보았다. 심지어 동물은 인간처럼 이성능력이 없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생각했다. 기계론적인 철학관은 동물들을 무참하게 죽였고, 자연을 짓밟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루소는 인간의 자연성을 살리는 것에서 자연을 짓밟는 행위를 바르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인간의 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 이기심과 병폐만 안겨주고, 가난한 자들이 일하면 할수록 더 비참한 삶을 영위하여 마침내 차형을 당해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최후로 이어진다.

 

루소에게 불평등이란 자연적 신체적인 요소와 도덕적 정체적 불평등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도덕이란 가치를 윤리하고 같은 조건으로 보는 경우가 있지만, 윤리와 도덕은 명백히 다르고 도덕이란 단순히 옳은 가치가 아니라, 단지 그 사회에서 옳아야 했던 가치이다. 즉 사회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거나 모순이 있어도 그 어긋난 가치가 하나의 정당성을 가진 것이다. 정의라는 가치 혹은 도덕이란 가치가 그런 것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가치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무슨 과오가 있는지를 명확히 생각해야 하나, 그것이 용납되지 않은 점이다.

 

볼테르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은 후에 루소를 숲에 곰이나 같이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답장을 한다. 그러나 사실 인간불평등기원을 밝히는 것이란 결국 부와 지위, 권력과 명예에 대한 갈망에서 시작된다. 명예를 보자면 이미 위에서 언급한 플라톤의 저서에서 등장한다. 플라톤은 국가 혹은 그 정체에 대한 최고의 가치는 수호자들의 행동력이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더라도 오로지 심신을 단련하여 강력한 철인이 되어 적으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내국인에 대해서는 아주 훌륭한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 수호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물에 관심이 없어야 한다. 단지 그들에게 오는 것은 모든 이들의 존경과 무료 숙식이다. 하지만 이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명예로운 인간이 되어 영원히 추앙받는 존재가 된다. 명예욕에서 만약 인간이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타인을 위해 행동한다면 그 정도의 명예욕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 명예욕에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모두가 명예를 가지고 싶어서 명예를 가진 게 아니라 명예를 얻는 과정에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가치에서 명예가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부와 지위, 권력은 그것하고 다르다. 부와 지위, 권력은 자신의 명예를 올리기도 하나, 한편으로 땅 밑으로 추락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반대로 그것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의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갈망의 끝은 반대에 위치한 자들에게 파멸을 안겨준다. 농부가 땅을 일구지 못한 채 도시에 와서 빈민과 도둑이 되어 결국 비참한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란 국가의 멸망하고 있다는 전초를 보여준다.

 

<인간불평등기원론>을 루소가 저술했다고 해도 출판사와 번역자를 서로 다른 사람 것을 통해 읽고 있지만, 참으로 그 느낌이 인상적이다. 왜냐하면 망해가는 국가에 대해 루소는 그 나라는 부유할지 모르나, 농부와 시민이 가난하여 마침내 인구가 감소하게 되면 그 나라는 결국 분노에 가득한 시민들에게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 나라가 무너지지 않으면 그 나라의 시민은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소멸할 것이다. 국가의 토대는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다. 국가의 모든 주권과 권력이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면 그 시민이 없어지는 나라란 과연 존재하겠는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깨우치지 못한다. 그것을 몰라도 상관없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해결하지 않으려 하는 자들은 그런 불행을 교묘히 이용한 자들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자연적 조건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후천적인 정치적 불평등은 분명 선천적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인위적이라면 분명 고칠 수 있는 것이고, 고쳐야만 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을 주장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잔인한 폭력이다.

 

게다가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오히려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예로부터 마키아벨리도 말한 것이지만, 진정한 공화국이란 조용한 나라가 아니다. 지금 조용한 나라라는 말보다 차라리 침묵의 나라, 고요의 나라, 또는 전제군주 아래 모두가 시민(市民)이 아닌 신민(臣民)으로 되는 사회가 아니다. 늘 토론과 논쟁이 존재해야 하며, 그 사회의 작은 문제 하나하나 여기저기서 담론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공화국이란 우리가 추구해야할 민주공화국이란 가만히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각자가 하나의 운동력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힘이 적든 크든 혹은 넓든 좁든 최소한 사회적 문제를 공론화하여 그 사회의 문제점을 외면하고 은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해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누군가 그 문제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이고, 누군가 고통을 받게 되면 또 다른 사람이 고통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는 나만이 공간이 아니라 타인들에게 줘야 하는데, 그 이유는 만일 나만이 그런 공간을 가지고 타인들이 그 공간이 사라져 버리면, 최후에 나의 공간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공간의 침범은 단순히 정치적 관계로만 끝나지 않을 수가 있다. 치명적인 경우에 놓일 경우 나의 목숨 역시 보장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루소의 서적을 보면, 볼테르의 글을 보고 그가 혁명을 준비하고 있는가라고 하고, 혹은 자기 책처럼 프랑스 국민의 빈곤함을 보고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르나, 정말 그의 예언대로 혁명이 다가왔고, 프랑스 루이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루이16세는 압제자는 아니나, 압제자만큼의 고통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주었다. 봉건사회, 즉 왕족과 귀족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사회에서 그 외의 계급은 늘 착취와 억압만 당할 뿐이다. 그래서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은 19세기 마르크스 시대보다 100년 이전에 존재한 혁명적인 도서였다. 루소는 혁명을 하라는 말을 이 책에 적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넣었다.

 

21세기 전근대사회를 탈피하여 탈근대사회를 넘어온 우리에게 루소의 사상은 결코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여전히 이 책을 읽으면서 소름 돋는 문구는 많다. 하지만 이 문구는 너무 놀라 때로는 루소가 현재 살아있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또 지배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사람들을 갈라놓아 약화시킬 수 있으며, 겉으로는 사회의 화합의 분위기를 주는척하면서 실제로는 분열의 씨를 뿌릴 수 있으며, 신분들 사이에 권리와 이익을 서로 대립시켜 상호 불신과 증오심을 야기하여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를 억압하는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조장하는 것을 볼 것이다."

 

"전제군주제가 서서히 그의 추악한 머리를 들어 국가의 온갖 분야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하고 건전한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움으로써 마침내 법과 인민을 짓밟고 공화국의 폐허 위에 서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무질서와 대변혁들 속에서다. 이 최후의 변화 이전의 시기는 혼란과 대재앙의 시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모든 것이 그 괴물(전제군주제)에 의해 삼켜져 버릴 것이다. 인민은 더 이상 지도자나 법이 아닌 전제군주만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전제군주제가 행해지는 곳이면 어디서든 전제군주 외에 어떠한 다른 지배자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제군주가 입을 열자말자 고려해야할 청렴이나 의무는 없어져 버리고, 노예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미덕은 가장 맹목적인 복종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을 따르던 돼지들은 어리석은 양들에게 계속 이상한 문구가 외치도록 한다. 그 양들은 자신들이 착취당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돼지가 주입하는 대사가 되새김질 한다. 노예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미덕은 가장 맹목적인 복종이란 말처럼 말이다. 루소가 살던 시절에 전제군주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이었지만, 우리가 사는 현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그래도 전제군주제는 사라져도 전제군주 같은 자들은 계속 나올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계몽주의 이름 아래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그렇게까지 마음이 들지 않으나, 적어도 계몽적인 현실자각은 필요하다고 여긴다.

 

계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억압은 계몽이 아닌 압제이겠지만,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파악 그리고 거기에 대한 판단력은 참으로 중요하다. 루소가 문명인이 오히려 미개인보다 못하는 것을 말하는 이유는 문명인들은 도구와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자신을 스스로 속박시킨 점이다. 자신의 편리함을 쫓을수록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된다. 즉 뭔가 자신에게 없어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바보가 되는 것이다. 우리 현실은 우리 인간을 바보로 만드는 것들로 가득하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망각한 채 계속 흘러간다면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인구가 계속 감소하여 최후엔 그 국가의 기능이 제대로 운영하지 못할 상황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계속 기차는 탈선한 채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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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갈등과 불평등
최병두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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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생각해보면우리는 기본적으로 환경에 대한 철학적인 혹은 사상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따라서 <환경갈등과 불평등>이란 책을 잡았을 때 일반적인 환경공학 전공자 중에서 학사 내지 석사 급들은 도저히 이해가지 않을 서적이고그나마 박사과정 이상 되면 가능할지 모른다고 봤다환경공학 전공자들은 기본적으로 화학생물학토목공학 등 다양한 이학과 공학을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운영된다환경공학이란 것은 단순히 환경 그 자체적으로 학문이 완성된 게 아니라 다양한 학문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되었다.


문제는 그 방향적인 요소에서 공학은 철학과 사상을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다환경공학과를 입문하면 환경공학 개론 정도로 살펴보면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그리고 인류 개체수의 대폭발로 인한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로만 볼 것이다예전에 환경관련 교육을 받을 때 강사로 나온 분이 리카도와 애덤 스미스의 내용을 인용한 적이 있었다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애덤 스미스의 이후 고전경제학자인 리카도와 제임스 밀 그리고 영국의 천재적인 자유주의 철학가 존 스튜어트 밀까지 이어본다면 우리가 그런 인물의 이름조차 들은 적이 있는지 아니라면 그들이 무슨 학문과 서적을 남겼는지 파악조차 할 수 없다.


게다가 카를 마르크스가 그렇게 비판했던 <인구론저자 멜서스를 생각해보면 마르크스의 예언도 맞았지만멜서스의 예언도 맞았다인구의 급격한 폭발적 증가는 환경공학에서 제일 먼저 고민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환경을 바라보는데 왜 사상과 학문인가그것은 공학적으로 처리하고과학적으로 원인을 규명하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은 공학으로 설명할 수 없고경제학과 인류학이 필요하며더 나아가 법률과 윤리학까지 이어진다환경은 단순히 폐기된 오염물질을 처리하는 것만은 아니다이제 환경은 후속처리가 아니라 먼저 선행되어야 할 가치로 등급한 것이다.


<환경갈등과 불평등>이란 도서가 나올 때 1990년 후반부였다지금은 2015년이고저자인 최병두 교수가 논문을 집약하여 정리했으니 시기적으로 약 30년 정도 차이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맥락을 살펴보면 내용이 전혀 낡은 것이나 시기가 지난 것이라 볼 수 없었다그 이유는 아직도 그런 문제가 되풀이 되고 있다나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단어가 환경정의환경에서 보는 관점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는 인간이 모여 사는 장소에 따라 그 위해도 달라지고들어서는 환경혐오시설도 달라지는 점이다.


최근 밀양에 765KV 송전탑 때문에 말이 많다언론과 미디어는 정보를 통제하고그 지역의 주민들을 무시했다그런데 왜 이런 송전탑을 세우는가이유는 간단하고 복잡하다이런 송전탑들은 한국지역의 남측에서 생산된 에너지를 위쪽인 서울경기지역으로 보내기 때문이다서울경기지역에는 발전소 중에 핵발전소 같은 시설이 없다부산 기장과 울산 그리고 전남 영광 등 한국에서 남측에 위치한 곳에 핵발전소가 위치해있다지정학적으로 북한과의 무력충돌 시 적의 미사일이 발전소를 강타할 때 문제점을 보면 바를 수도 있겠지만문제는 후속대책이 너무 위험한 일이다.


핵의 에너지를 점차 줄여가는 게 세계추세이나 한국에서는 핵에너지 의존도가 증가한다계속되는 푸른 도시와 맑은 공기를 위해 핵발전소의 만능주의를 외치지만사실 핵폐기물 처리와 핵 사고는 치명적인 것을 넘어 국가존재조차 흔들게 만든다일본 후쿠시마발전소의 피해는 이미 그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그 주변에서 나온 음식을 먹은 사람은 암으로 걸려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방사능의 폐해는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방사능 오염도 문제거니와 해체적인 요소 그리고 원자력을 대신할 에너지도 필요하다그런 점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어떤 정치적 집단과 경제적인 조직의 이익이 합치되면 국가사업이 움직이는 일이 많다.


핵 발전에 들어가는 원자재나 또는 발전시설을 세우기 위해 일부 독점자본기업가들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노릴 수 있다이런 결과는 바로 밀양아리랑이 서글프게 울려 퍼지는 할머니들의 비명처럼소수약자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진다공리주의적인 방식은 분명 사회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이나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다환경갈등에서 관점에서 신자유주의공리주의복지주의가 구분되어 있다한국은 이미 신자유주의국가이고그러면서도 복지국가 선언을 하나복지보단 정지에 가까운 수준이다공리주의에서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관점을 다르지만기본적으로 사회적 기능을 위해서는 전기 공급은 중요하다하지만 대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점을 문제다.


에너지를 오염시키지 않고최대한 효율적으로 끌어올리는데 최근 대체 에너지가 급부상한다그러나 정보력 부족홍보부족기존 기득권의 이익이 작용되면서 난해한 부분이 되어간다과거 참여정부에서 자동차 연료를 석유에너지보단 하이브리드 기술을 발전을 추구할 때 기존 정유회사와 자동차업체 반대에 무산된 점이 있었다환경정책은 21세기뿐만 아니라 앞으로 한국과 인류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가치다자본의 권력에 무참히 밟히게 된 현실이 있었다환경정의를 필요성은 환경의 대상은 어디에 존재하느냐이다환경이란 공간은 먼저 생태환경과 자연환경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생활환경이 있다.


여기에 추가하자면 사회적 환경도 포함된다사회적인 환경법과 제도 경제적 권력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가난한 사람일수록 집은 환경적으로 열악하다근대화산업이 빛을 보던 때 한국은 경제성장에 환호했지만대다수의 서민과 노동자들은 좁은 집에 환풍기능이 열악한 곳에서 살았으며수도설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상하수도 이용에서 불편을 겪었다집값에서 좋은 숲과 하천이 있는 곳보단 공장지대와 황무지 쪽에 위치하면서 나쁜 공기와 물을 접하게 되어 환경위생학적으로 불량한 상태가 되었다.


환경정의를 말하려면 우선 최병두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존 롤즈의 철학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에 따른 최소수혜자의 입장을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다가난한 자들은 경제적 빈곤으로 교육과 문화적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교육이 되지 않으면 국가경쟁력이 저하되고문화적 혜택이 되지 않으면 인성의 한계성이 온다이런 자들이 정치적 사회적 참여에서 제대로 된 활동을 보일 수 없으며정치적 합의에 따른 국가운영에서 시민들의 자질이 부족하게 된다물론 이 관점은 롤즈가 칸트주의자에서 시작한 것이고칸트를 넘어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의거한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미 환경적인 불평등을 보고 있었다가난한 자들은 비위생적인 주거공간과 음식으로 병이 들고가혹한 육체노동으로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따라서 이 책에서는 환경과 더불어 인류 불평등적 기점에서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마르크스주의에서 도시기능이 인간을 소외하고 가난한 자들을 계속 외지로 내몰며주거환경정비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연결되는 점까지 말이다환경공학에서 이런 경제적인 정치적인 요소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하지만 사상철학으로 들어가면 환경은 결국 인간의 정의와 칸트가 요구하는 선(, goods)의 가치를 말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영역에서 좋은 환경을 원한다자신의 집 주변에 공장이나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반대를 한다하지만 자신의 그런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지역의 환경을 파괴되는 것은 무관심하다심지어 공장 관계자는 조금이라도 비용을 절감하기 폐수와 오수를 무단방류하고대기오염물질과 악취를 여과 없이 내보낸다그 결과 주변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호흡기질환 및 안과질환에 시달리고폐수로 인해 하류에 사는 주민들은 상류에서 공급되는 상수에 대한 불신감이 커진다특히 과거 낙동강페놀사건과 같은 환경오염은 페놀의 화학적 반응으로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낙태될 정도였다.


결국 환경적 처리비용을 두고 기업적 이윤추구는 환경적 공공재원을 소모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환경보건적인 문제까지 확대시켰다환경정의가 왜 정립되어야 하는가그것은 단순히 법과 제도적인 영역을 지나 인간생명과 환경적 기능의 마비로 인한 생활의 위협까지 넘어간 것이다이런 시기에 환경이란 단어는 미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경제발전 앞에 모든 것이 없다고 하는 세태에서 경제민주주의는 이미 21세기가 아니라 <환경갈등과 불평등>에서 언급된 내용이다경제민주화는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내는 것에서 모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투입과 회수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자기 지역에 대규모 공단이 생기면 그 자본의 출처와 투자의 범위 그리고 고용발생과 사후관리방안을 골몰히 생각하기보단 단지 눈앞에 있는 이익에 집착한다대도시에 대규모상점이 입주하면 그 지역의 상권과 문화적 발전이 일어나나기존 골목상권과 더불어 교통체증인구증가에 따른 폐기물증가차량증가에 따른 대기오염 및 소음진동 피해가 일어난다환경이란 것은 처음 경제적 이익에 치중하면 후폭풍으로 다가오는 함정과 같은 존재다눈앞에 신기루처럼 이익의 효과범위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그것을 감당해야할 지역주민이다.


지역주민이 기업과 정부 혹은 환경단체에 지지하는 정도에 따라 그 지역의 환경 분쟁은 새로운 결과를 도출한다하지만 문제는 정부의 입장에서도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와의 갈등이 있다는 점이다그동안 한국사회는 중앙정부의 권한을 중시하다가 점차 지방자치단체에게 업무를 위임했으나업무적인 영역에서 위임했지 권한에 대한 결정권은 중앙정부가 가지고 있다중앙정부의 행정력은 결국 지방자치단체의 기반이 되는 지역주민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공권력을 동원하여 지역주민들의 반대의사를 억지로 무마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노동의 투입이다노동력조차 이제는 인간보단 기계로 대체되고인간은 보조적으로 투입될 뿐이다하지만 노동력의 주요 동력이 인간이든 기계든 그 파괴되는 대상은 언제나 자연이다자연에 대한 환경파괴는 여전히 공공재원으로서 가치를 저하시킨다공동의 재원을 일개 개인이나 업체가 점유하여 개발하는 것은 용이해도 그 이후에 일어난 환경문제에 방관하는 태도도 일부 보이기도 한다환경 분쟁에 대한 해결에서 지역의 빈부격차문화수준학력차이 등이 결국 많은 불평등적 요소를 야기한다그래서 롤즈의 철학에서 보듯이 최소수혜자의 대한 입장배려는 환경정의가 필요한 이유이고환경에 대한 추가적 비용을 부담할 수 없는 자들은 어떻게 하든 환경오염에 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거리에 자동차의 매연이 보도블록 위의 행인에게 덮칠 때아파트 단지에서 떨어진 공단지역에서 악취가 나면 상당히 불쾌해한다심지어 수도관에서 녹슨 물이 나와도 생활에 많은 질적 저하가 일어난다환경피해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평소 환경에 대한 가치나 중요성을 망각한다자신의 편리함만 완성되면 남의 입장을 보지 않기에 환경정의는 매우 윤리적인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하지만 만약 윤리적 조건이 사회적으로 정착되었다면 아직까지 산업재해나 환경오염 피해자가 나올 리가 없다공장 안의 악취매연도 환경오염 중에 하나다환경이란 조건은 우리 인생 그 자체에 존재하고지구 안에 어디라도 존재한다신자유주의에 대한 환경적 정책에서 내가 놀란 점은 환경제국주의다.


기존에 자신들이 이미 다 사용하여 쓸모없는 환경발생 공정을 후진국에 넘겨 그 제조과정에서 나온 상품을 다시 받는 점이나환경오염을 정화하는 기술을 토대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환경산업에 대한 지적이다이들은 교묘히 환경오염을 다른 나라에 떠넘겨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최근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오면서 제3국의 발전을 위협적으로 생각하는 나라가 많아지고 있다.그들은 19~20세기 산업화 때 오염물질을 이미 지구에 뿌려놓고 이제는 후진국의 발전을 환경오염원인자라 매도하고 있다환경에 대한 국제적인 분쟁은 여전하고우리도 중국에서 발생하는 황사나연안에 불법으로 투기되는 폐기물도 문제다.


환경은 단순히 수질대기토양만이 아니라 자원과 에너지 그리고 식량도 포함된다청정지역의 확보는 식량조달의 기본이다동해 권에서 일본서해 권에서 중국 어민과 마찰을 맺으면서 식량안보에서 환경문제가 기반 되는 것이다오염된 곳에서는 생물체가 살 수 없고인간이 섭취할 수 있는 식량이 나올 수가 없다이런 실태에서 우리는 명분이란 것을 찾아야 하고명분을 위해서는 논리와 사유가 필요하다환경하는데 철학과 사상이 필요한 이유는 더 이상 환경은 인간에게 제외될 수 없는 영역으로 온 점이다환경정의가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공상적인 망상이 아니다지금 우리 삶을 지탱해야할 가치와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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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8 14: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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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5-07-28 14:29   좋아요 0 | URL
허허허

2015-07-28 14: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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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김정일의 246분 -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진실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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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에 많이 듣고 부르던 노래 중 가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이다통일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대부분 군에를 복무한다군대복무가 문제인 이유는 사실 많은 젊은이를 2년 내외의 시간을 무상으로 보내게 하는 것과 더불어 그들을 위험한 곳에 보내야 하는 점이다나는 개인적으로 군대는 있어야 하고남성이 군에 가는 것은 인정한다단순히 남북한 휴전만이 아니라 군사력은 단순히 안보와 평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외교경제 등 다양한 영역으로 판단해야 한다단지 그것을 위해 많은 젊은 청춘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현실이 단지 안타깝다매년 군 안에서 훈련에 의한 사고로 사망 내지 부상당하는 군인이 발생되고구시대의 문물을 청산되지 못해 구타 및 가혹행위로 의문사 내지 자살그리고 극단적인 살인행위도 등장한다인간의 이율배반적인 게 군대는 필요한데 내 자식은 안 되라는 심정을 가진 부모는 많을 것이다그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어찌 해야 할 지 모른다.

 

남북의 긴장감이 군대 내에서 폭발하면 어찌 되는가예전에 북한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수많은 도발과 위기를 주었다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대응하는 것이 바른 것이며그 위기를 넘어서서 다시 안정을 찾는 것이 옳다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부터다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면 결과가 있고결과가 있다면 성과도 있어야 한다계속 되는 긴장관계에서 같은 일이 반복된다영화 <연평해전개봉처럼분명 해군장병의 죽음은 숭고하고 안타까우나정작 중요한 일들은 다시는 그런 아픈 일들이 없어야 할 것이고그 원인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전투가 일어나면 국민 입장에서는 군인이 사망하나군인의 가족에겐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을 잃어버리게 된다그 일로 다들 해군과 해병대를 지원한다고 해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서 너울거리면 집에 계시는 부모님과 학교친구들이 그리워진다.

 

군대서 내가 죽으면 그 본인은 거기서 끝이나 가족들은 영원한 고통과 분노를 안고 살아야만 한다군인도 사람이고군인 이전에 가족이 있는 한국인이다전쟁에 대한 억제는 단순히 연평해전과 서해교전만의 문제만이 아니다우리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고이런 불상사가 터지면 외국자본도 빠져나가 경제적으로 좋지 않다진짜 전반적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냉전시대를 지나 이제 국제적으로 고립된 국가는 몇 개가 되지 않는다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려고 했던 미국조차도 쿠바와 직항 항공노선을 개설했다게다가 쿠바와 사회주의 영향이 남은 국가조차도 한국과 수교를 맺어 많은 한국인이 그곳에 가서 관광과 경제활동을 한다. 21세기는 이념으로 대립되는 세상이 아니라 경제와 문화의 교역으로 살아가는 세상이다그런 조건은 바로 평화와 소통이다.

 

북한은 외국처럼 우리가 영어일어중국어를 안 배워도 말이 통하는 국가다국가라고 헌법적으로 인정할 수 없겠지만이미 국제법이나 외교적으로 국가로서 활동하는 조직이다항상 북한의 도발과 이데올로기적인 정의노선은 우리 사회의 모태가 되었다반공노선이라 하여 북한 사회주의체제를 부정했지만막상 사회주의 관련 도서를 비교해도 북한은 사회주의도 아니고공산당이 북한을 지배해도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과 전혀 상관없는 곳이다한국에 자유민주주의라고 하여 한국인 대부분이 자국의 헌법을 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드물다게다가 자유주의철학까지 연구했다는 사람 역시 드물다한국 플라톤 철학 대가인 박종현 교수가 번역 저술한 <에우티프론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을 읽다보면 중우주의가 등장한다박종현 교수의 해설에서 중우주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물론 1970년대 교수로 있으면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아는 그분이 그런 말을 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모순으로 가득하나그가 지적한 문제는 확실하다정보의 전달력에서 한국인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눈앞의 문제를 제대로 보고 판단하기 보다는 자기가 알고 싶어 하고그렇게 여기기 바라는 것만 본다내가 언론과 미디어를 경멸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몽타주의 대가들이기 때문이다영화와 범인수사에서 몽타주와 다르게 그들은 영상보다는 글자와 말소리로 왜곡한다일부 문장만 들고 와서 모든 것처럼 확대해석하여 그 내막을 전후관계로 보는 게 아니라 그런 것처럼 꾸민다예를 들어 그렇다고 보더라이렇게 말하더라.” 등등을 말이다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이데올로기 반공주의다.

 

그래서 올바른 정보에 사람들은 찾아보기보단 그저 눈앞의 영상만 바라보고 신문도 몽타주로 꾸며 진실은 은폐한다후에 문제의 몽타주가 거짓말로 들통 나면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나가지만이미 몽타주를 접하던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자신의 어리석음 멍청함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 믿음을 밀고 간다인간의 정의는 이성의 논리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인 정체성이 기반 된다이성의 사고로 접하지 않기에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신념에 복종한다아마 전에 대선과 총선에서 이게 가장 잘 먹힌 일이 있었다. NLL, 북한한계선에서 참여정부에서 넘겨주었는지 안 했는지가 관건이 된 적이 있었다.

 

일단 나는 당시 이런 생각을 했다정말 참여정부에서 한국의 영토 내지 영해를 주려고 했을까다음 생각으로 만일 사실이라면 왜 저것을 일반 국회의원이 말하는 것일까기본적으로 군대에 복무한 사람에게 군사보안은 제한되어 있다장교들도 2급 보안에만 겨우 통제적으로 접근하고, 1급 이상은 극히 극소수 사람에게만 열람이 가능하다군사보안 1급은 국가에 아주 치명적인 위기를 줄 수 있는 정보다치명적인 안보문제를 아무렇게나 떠벌리는 국회의원그리고 그것을 들은 후에 대선 직접 거리에서 연설하는 현재의 국회의원보안법 위반이다군사보안을 누설하는 자는 국가에 대한 반역죄다.

 

그런데 그 반역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사실 그 발언이 한국이 북한에게 NLL을 주려한 게 아니라 그 수역을 공동어로로 삼아 군사적인 관계에서 갈등을 이완하고어민의 이익을 증대하고 국가경제를 발전하자는 논의였다그 후에 그 발언을 한 현재의 국회의원은 찌라시를 봤다고 한다찌라시종이 쪼가리어디 길거리에 뒹굴고 있는 종이라니 무슨 장난인가논객이 나와 토론을 하는데보수논객이 이겼다그런데 그가 제시한 근거가 사실 거짓말이고그 거짓말로 드러나자 자신의 논파를 부정하면 명예훼손이라 한 일화가 있었다그런데 그런 거짓말이 드러나도 아직도 그것을 믿는 사람이 있다인간의 뇌가 이성적이란 사실보다 단지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란 점이 강한 점을 알 수 있다.

 

북한의 외교 갈등에서 왜 이런 요소가 중요한가북한에 대한 관점에서 통일은 다들 필요하다고 한다그러나 방법론적인 요소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북한의 내부붕괴로 인해 쿠데타 내지 혁명이 일어나면 그 일에 대한 감당을 누가 하는가한국정부와 한국 국민들이다세금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화적인 대립이 일어난다일단 이데올로기에 반대되는 세력을 악으로 규정하여 응징만 하면 정의실현이란 아주 단순히 만화책 내용을 주장하고 있으니 대안의 영역이 없는 게 유감이다통일이 되려면 방법은 북한을 잡아먹든지 아니면 결합을 하는 것이다전자의 문제는 전쟁과 쿠데타로 일어나야 하므로만약 전쟁이나 소요사태로 군사충돌이 일어나면 무슨 재앙이 생기냐는 것이다.

 

북한은 핵실험을 하고핵무기를 보유하려 한다핵이 터지면 적어도 반경 50~100는 초토화다핵이 내린 자리에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없다심지어 동식물 생태계와 수질 및 대기권과 같은 자연공간도 파괴된다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방사능공화국이 되고한국인은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민이나 망명을 가야 한다핵이 떨어지면 핵만이 아니다지하에 매설된 기름보관소나 병원의 방사능기계 수많은 위험인자들이 파괴되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주유소 하나가 폭발하면 그 주변을 초토화하는데핵폭발은 광역적으로 반응이 일어난다북한의 외교가 단순히 통일문제만이 아니라 핵무기를 해제하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길가에서 북한의 핵문제를 두고 시위하고 분노해도 북한 독재자의 귓구멍에 들어가지도 않고쓸데없는 일이다.

 

그럴 것이라면 외교적으로 국가가 해결하여 비핵화를 도모하여 동북아시아 평화를 보장해야 하나막상 현실은 이상하게 돌아간다북한의 경제압박이 북한정권을 위기에 내몰 것이라 보나오히려 테러를 일으키거나 국제적으로 문제가 많은 국가에 무기를 팔아먹고 있으니 더 역효과를 내고 있다외교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우리가 손해 보는 점은 분명 많다그런데 북한에서 계속 핵무기와 장거리미사일 실험을 하고전쟁준비만 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연평도 폭격사건에서 사람이 죽고마을주민이 불안에 치를 떨었다방아쇠만 걸면 수 초 안에 무기가 발사되어 우리 땅을 타격하는데그 곳에 사는 주민들은 매일 불안해 떨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화와 소통만이 해결인데지금의 모습은 오히려 적으로 간주하여 국민들에게 불안을 유도하고그들을 적대하는 게 정의라고 말한다면 그 갈등은 계속 지속된다전쟁의 고통과 분노 그로 인해 겪은 피해는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그것을 직접 겪거나 간접적으로 겪은 자들 역시 피해자다하지만 그것에 얽매일 경우 우리는 그 시대의 고통을 뛰어넘지 못한다남북관계는 단순히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문제다외교의 관점은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다자국의 이익과 관련하여 일본의 우경화와 독도 문제게다가 중국과 대만의 영토문제는 우리나라에 불화의 씨를 주고 있다.

 

한국은 자국에서 자원이 생산되지 않고, 2차적 가공으로 원료를 상품으로 만들어야 교역이 가능하다문화적으로 우수성이 있지만그 문화개발과 보존이 취약하더라도 국제관광교류가 활발하다한국이 북한과의 외교문제로 갈등을 빚으면 우리에겐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고경제적인 문제가 발생된다식량과 원자재를 수익에 의존하는 점과 특히 식량안보가 약한 한국에서 평화문제는 한국인들의 생존전략으로 이어진다전쟁이 일어나면 안 되고일어난다고 해도 장기전으로 가면 안 된다과거의 무기는 총칼로 이루어진 백병전이지만지금은 미사일과 핵으로 이루어진 첨단전이다무기의 위력이 강력해지면 군사시설이 아닌 민간인들의 학살이 대규모로 일어난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북외교는 필수적이다그러나 현실에서 그 문제를 두고 정말 100% 있는 것만 보여준 게 아니라 왜곡 및 오류로서 전달된다면 심각한 상황이다. 2013년에 발간된 <노무현 김정일의 246>은 바로 그런 문제를 지적하여 나온 도서다주지 않았는데도 NLL를 준 것을 허위로 폭로하고 군사기밀을 들춘 인간들을 보고그것을 아직도 믿는 사람들을 볼 때 한국의 미래는 과연 청신호인가분명 말하지만최근에 일어난 폭격이나 해전에서는 비교적 근대적인 방법으로 전투가 발생되었다만약 최신현대무기로 전투가 일어나면 그 피해 범위를 예상조차 할 수 없다전쟁에서 이겨도 과연 승리한 게 될 것인가북한의 도발은 아무리 군사적으로 경계해도 계속 일어난다.

 

대안의 대화와 소통이나그 소통에서 어느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는 게 바르나현실은 손보단 서로 칼날 뒷면을 보여주고 있다앞면으로 바뀌는 순간피를 피로 씻는 아비규환만 볼 것이다. NLL와 관련된 진실공방에서 거짓으로 만든 게 사실이 되는 순간사실인 진실은 밝히기 어렵다거짓은 처음부터 거짓이므로 자신의 의견이 사살로 만들기 위해 그럴듯하게 꾸며댄다오해를 푸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인간은 항상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그 이외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게다가 논리성에서 계산적인 요소를 빼고 감정적으로 대한다면 현실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을 채 악화될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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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7-27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좋군요. 이제는 ( 우리에게는 이적 단체이긴하지만) 한계를 인식하고 국가 대 국가`라는 차원에서 접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뭐가 진척이 되든 하지.....

만화애니비평 2015-07-27 14:30   좋아요 0 | URL
같은 방법을 거의 60년 동안 써먹는데 답이 없다면, 방법을 바꾸어야죠. 북한에 있는 사람들을 동포들이라 하여 빈곤과 억압에 당한다고 하지만, 역으로 본다면

한국에서 예비군과 현역이 거의 전체인구의 1/4 정도 된다고 친다면
북한은 현역을 남녀구분 없이 예비군 나이도 우리보다 기니
전반적으로 군사국가죠. 주체와 대상이 분리로 보는 것이니 뭐
결론적으로 외교적으로 정치적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AgalmA 2015-07-27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권 유지하려고 도발을 부탁까지 하는 실상이니 더 한숨이 나죠... 국정원은 국내 정치간섭에 혈안이 돼있지 않나....
NLL 문서를 왜 흔드는지 보지 않고 그 내용만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태도들도 많이 고쳐야 할 테고요.

만화애니비평 2015-07-27 20:00   좋아요 0 | URL
총풍을 보면 참 답이 없죠..

qualia 2015-07-28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한민족은 망할 가능성이 큽니다. 단순한 한탄조의 말이 아닙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21세기 세계 역사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현재의 한국/한민족/한반도는 식민지 전락의 전철을 그대로 되밟아가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한국/한민족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나라/민족이 있을까요? 하나의 민족이 두 나라로 갈라져 서로 상대방을 제1의 주적으로 명시하고 극한대결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남한 쪽은 전라부족과 경상부족으로 분열돼, 정권쟁탈전 때마다 부족전쟁에 준하는 지역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분오열된 나라/민족이 망하지 않으면 지구의 역사가 진행을 멈출 것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7-29 08:51   좋아요 0 | URL
어느 당은 일본자본 유입에 결국 우리가 그쪽에 먹힐 때 다시 과거의 영광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건지.
분노와 증오를 유도하여 다른 문제점을 가리는 실태에서 그저 망해가는 것이 아니라 멸망할 것 같은 한국인의 모습에 한숨이 나옵니다.
중국과 일본은 억지로 역사를 부풀리고 신화를 역사화하는데, 단군역사마저 허구라고 하는 주류사학이라니...답이 없네요
 
5분 - 세상을 마주하는 시간
김진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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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고, 누구나 잠시나마 내어줄 수 있는 시간이다. 5분이면 우리 인간은 무얼 할 수 있는가? 직장이나 가정에서 통화를 하며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전달하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시간이고, 5분이면 성격 급한 나 같은 사람들은 밥 1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다. 차로 운전하면 고속도로에선 15㎞ 이상 나가고, 시내버스로는 정류장 3코스 정도 갈 수 있다. 5분이란 시간을 이렇게 내어보면 아주 일반적인 패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서울부산을 왕래하는 기차에선 5분은 아주 짧은 시간이고, 수험생에게 수험 중의 5분은 황금같은 시간이다.


5분이란 시간은 이렇게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다. 만약 어느 누군가 길에서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치거나 심장마비에 걸려 의식을 잃었다면, 5분은 생과 사가 오고가는 시간이다. 척추에 손상을 입었거나 또는 심장이 정지할 때 그 5분 안에 구급차량의 도착과 의료진의 응급조치가 인간의 생명을 좌우한다. 5분이란 시간은 이렇게도 서로 다른 조건에 놓여 있다. 그런 5분은 상황적 순간이 아니라 그저 우리 안의 인식에서 시작하면 어떻게 전환될 수 있는가? 이번에 뉴스타파 기획에서 제작한 『5분, 세상을 마주하는 시간』은 바로 그런 인식적 배경을 바꿀 수 있는 책이다.


말이 5분이지 앞으로 살아갈 5년 이상의 가치를 바꿀 수 있는 책이다. 물론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바를 이미 오래 전부터 고민을 했다. 하지만 마지막 편에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제시된 이 문구에 많은 감정이 밀려온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이 자유로운 것은 선거기간뿐이고, 그 뒤로는 오로지 노예일 뿐이다." 1762년 프랑스에서 나온 이 서적은 대한민국헌법 자유민주주의 정신의 토대가 된 책이다.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나라에서 루소의 사상은 큰 바탕이 된다.

그러나 루소의 사상에선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내실적인 요소를 추구한다. 우리에게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란 무엇인가? 5분이란 시간은 잠시 귀를 기울여도 아깝지 않을 시간이다. 그러나 그 5분에 들어간 내용적 가치에서 우리가 모르거나 생각하지 않은 것들은 앞으로 우리 미래를 바꿀 거름이 된다. 인간에게 역사적 순간과 기록이 왜 중요한가? 앞으로 우리는 계속 고민하고 방황하며 결국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과연 어떤 게 최선일까?


사람들의 착각들은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고 최고의 선택지라 믿는다. 그 믿음만큼 위험성은 없다. 독일의 나치나 일본의 군군주의를 실천할 때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아무런 의구심을 넣지 않았다. 그 당위성 하나가 큰 대의가 되는 순간 세상은 그들의 이상적 사회가 아니라 파괴와 공포 그리고 죽음의 물결로 이루어진다. 5분이란 시간에 그런 과거에 있던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앞으로 우리에게 놓인 선택을 좀 더 심사숙고한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나는 정의에 대해 어느 책을 보면서 생각한 점이 있었다. 미국 20세기 후반 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정의에 대한 그의 사유에서, 부정의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불의는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부정의는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부정의를 선택하는 일이란 자신이 선택한 부정의보다 더 큰 부정의를 피하기 위해서란 점이다. 어째 보면 악이란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로 보겠지만, 자신의 선의 입장이 타인에게 악이 되고, 타인의 악이 자신에게 악이 된다. 선악의 이분법에서 윤리적 가치가 사라진 이상 그 정의란 선악의 구분이 아니라 단지 세력 간의 다툼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세력다툼에 모든 것을 내던진다. 왜 세상의 이토록 부조리한데 그것을 개선하지 못하는 것인가? 5분이란 시간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와 근본이 그래 잘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화두로서 안내로서 5분의 시간을 주어진다면 어떤 것인가? 작은 5분이 결코 작은 시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선 우리 사회 문제점 18가지를 2가지 테마로 구분하여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사회, 문화, 경제, 정치, 역사, 군사 등등 우리 일상부터 주변까지 다양한 주제로 포괄하고 있다.


개인적 나는 인간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란 논리와 이성으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 안의 정체성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정체성의 강박관념이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게 되어 자신의 입장에 맞지 않은 가치에 대해 응징의 철퇴를 내리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분명 헌법의 나라, 법치의 나라인데, 이 나라는 과연 법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 자유로우나 사회라는 틀에 의해 쇠사슬로 묶여 있다.


그 사슬에 의해 인간은 그 사슬을 얼마나 잘 활용해야할지 어떻게 그 부조리는 올바른 곳으로 유도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 방법론이 정치다. 정치에서 루소가 말한 것처럼 선거기간에 자유로운 선택권이 있지만, 그들의 인식은 자유가 없다. 그런 인식적 구조가 어디서부터인가? 이 책에서 과거 일제 강점기시대부터 시작하여 독재정부의 통치방법을 거론했다. 다른 가치를 무시하고, 한 가지 목적에 어울리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는 그 무서움을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타협이 중요한 이유는 타협을 해야 한다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왜 타협해야 하는가?


사회 내외부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타협점이란 공통대안을 찾는 것이다. 국론의 분열과 혼란에서 국가가 언제나 평화로운 것이라면 모든 국민이 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평화롭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누적되고 있다는 점이다. 수평적인 폭력관계가 발생되는 이유는 인간은 선천적인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으나 후천적인 요소가 더 크다는 점이다. 국론이 분열되는 이유는 누군가 불이익을 당하는데, 다른 누군가는 어느 누군가의 불이익으로 혜택을 본다는 점이다.


이게 바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성립이다. 겉으로 동일한 법과 제도로서 지키고자 하나 그 이면에는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개선할 여건도 없다. 단지 이런 상황에서 이권을 지닌 자들에게 더 이상의 피해가 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이익을 더 증대하려 한다. 최근 세금과 관련하여 자동차세, 담배세, 주류세 등과 같은 세금은 간접세로서 소비자들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종목들은 많은 사람들이 소비하거나 이용한다. 단지 그 이용자들이 소득 빈부격차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소비하는 점이다.


회사 사무실에서 다른 부서장의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 재미있다고 하나 그것은 하나의 블랙코미디처럼 쓰고 달달한 초콜릿 같았다. 게다가 씹히는 맛이 너무 강하고 오래 가서 지금도 그 초콜릿을 씹는 기분이다. "야! 우리나라에서 애국자가 누군지 아나? 군인, 경찰, 아니라면 정치인? 아니야. 바로 내다. 왠지 아나? 내 술 마시고 담배 피우지, 게다가 차도 중형차지, 세금 제일 많이 낸다." 생각하면 그렇다. 아무리 비싼 차라도 세금은 처음 취득세만 그렇지 후에 자동차세에서 차량 배기량으로 가격을 매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배기량의 차등으로 매긴 세금의 액수도 조금 바뀐 것으로 들었다.


담배와 술, 담배는 피지 않으나 술은 마실 때가 있다. 소주, 맥주, 막걸리 등에 주요 소비계층은 일반 국민이다. 그런 간접세로 충당될 때, 물가가 오르면 간접세 역시 더 수금된다. 그런 직접세를 어떻게 되는 것인가? 기업의 법인세 및 다른 세금, 혹은 증여세, 부동산 등은 가난하거나 평범한 사람에게 머나먼 관계다. 그런 세금을 할인해준다는 황금의 말이 현혹하나 막상 적용의 범위와 효용은 절대적인 차이를 보인다. 허나 사람들은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그 대상에 집중한다. 이런 사회를 조장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선택이다.


그 계기는 언론과 여론이다. 모든 정보의 출처가 미디어로서 전달된다. 미디어는 누군가의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이권이 반영되어 있다. 공공성의 미디어가 결국 사적인 이익에 직결되는 순간, 공정이란 단어는 이미 사라진 의미다. 공정은 누군가 유리하게 만든 룰에 얼마나 잘 따라주는 것이고, 거기서 멀어지면 도태의 대상이고, 거기서 벗어나면 반사회적 인물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만든 리그가 아니라 그들만의 각본이 만들어낸 리그에서 아무 의미 없이 쳇바퀴를 돌고 있다.


하루를 매일처럼 생계를 위해 뛰고 있으니 세상에 대해 보는 눈이 없어지고, 자신의 판단 역시 정해진 루트만 의존한다. 그들조차 자신의 존재에 대해 본다면 충분히 똑똑하거나 지혜롭다고 여긴다. 그런 착각 속에 그들이 선택하는 것이란 정의라고 보겠지만, 이미 윤리성이나 지성에서 벗어난 것이다. 자신들의 선택이 정말 옳은 것인지 생각한 게 아니라 자신들도 옳다고 여긴 것이다. 사회에서 왜 빈곤층에서 부조리한 사회에 가장 피해보면서 개선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5분이 중요하다. 그 5분을 통해 자신의 삶에 어떻게 가야 할지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은 자신의 삶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의 주변에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있어서 인간이 인간으로 될 수 있다. 인간의 한자가 人間 사람 사이다. 우리에게 삶이 중요한 것은 현재도 있지만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살아가야 할 내 자신도 있지만, 내 주변 사람들도 있다. 만약 자신에게 가정이 있고, 그 가정에 자녀들이 있으며, 그 자녀조차도 아들딸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옳을까?


한국은 인구가 한국전쟁 때 축소하다 다시 산업화로 인해 증가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증가된 인구는 노년층이 되었고, 새롭게 등장해야할 신규 계층은 노년층의 수만큼 오른 게 아니라 그 반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가고 있다. 2인 부부 출산인구가 1인이 겨우 넘는 시점에서 한국의 미래는 암울한 장마와 같다. 나라에선 계속 인구증가를 위한 결혼과 출산 장려홍보를 내세우나, 홍보와 달리 실제 부부 사이는 생활에 직결된 문제다. 결혼마저 의무보단 선택이 되어 가고 있다. 소외된 인간들에게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린 것인가?


사회적 문제는 사회구조겠지만, 그 사회구조를 보고 문제를 모르거나 혹은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또는 자신과 무관계하다 여기면 그 사회는 계속 무너질 것이다. 그런 위기의 순간의 5분, 위에서 응급환자에게 5분이란 생사를 결정한다. 우리 사회는 그런 생사가 갈림길로 접어들었다. 그 순간 5분은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내려줄까? 판단은 언제나 개인이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판단조차 하지 않는다면 결국 최후는 몰락의 연속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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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산을 옮기다
윤태영 지음, 노무현재단 기획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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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역사란 무엇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인간의 기록에서 역사는 항상 좋은 것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고통과 파괴로 얼룩진 반란과 전쟁 그리고 학살 등이 우리 기억 속에 머물러 있었다. 인간의 역사란 결국 투쟁과 갈등의 기록인 셈이다. 정치적인 사건이 역사적으로 큰 기록으로 남는다. 어느 개인에 대한 사소한 일들을 역사로 남는 것은 무리한 설정이다. 그러나 그 역사의 공간에서 그 어느 누구라도 역사적 사건에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지, 그 공간에 머문 존재고 분면 역사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분명하다.


역사란 그런 과거의 일들을 다시 찾아내고 해석하여 지금의 현실과 마주보게 만든다.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제기한 것처럼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과연 그러하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 역사로서 지나간 시간의 일들로부터 교훈을 얻는다. 우리가 왜 역사를 배우냐는 말에 사람들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왜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가?


인간에게 그런 공감과 이성적 판단능력이 결핍이 되지 않을까 여긴다. 인간은 자신의 현실에 안주하는 것에 만족한다. 아니라면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고정된 정체성에 머문다. 물은 고이면 썩게 되고, 그 물에서는 생명은 제대로 살 수 없다. 물론 인체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해충이나 병원성 미생물은 서식할 수 있다. 그것은 삶을 위한 환경이 아니라 죽음을 위한 환경이다. 다른 누군가를 공격하여 서식할 수 있는 해충과 병원성 미생물은 자신의 이익만 찾아간다. 주변에 숙주나 희생양은 그래도 사멸하고 만다.


그리고 그런 생태학적인 조건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 적용된다. 인간은 문명의 공간에서 온갖 기술과학과 문화제도에 의존하고 있다. 야생의 자연에 벗어나 자신들만의 제국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이란 존재는 만만치 않은 존재다. 인간의 환경파괴로 환경은 그대로 당하고 있지는 않는다. 각종 자연재해나 병충해, 전염병조차도 그런 충격작용에 대한 반작용이다. 지구의 공기가 더워지고 오염이 되면 태풍이 불어 그것을 정화하고 온도를 낮춘다. 그렇다면 인간이 계속 지구를 병들게 한다면 지구 역시 인간을 병들게 만든다.


역사적 교훈에서 유럽의 페스트 내지 각종 전염병 사례로 본다면 인간의 위생관리와 정부의 통제능력, 그리고 국민의 인식에서 알 수 있다. 자연은 스스로 일어나는 재앙이나, 그것을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인위적인 재난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실패와 실수를 보고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같은 사고는 반복되면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근(2015년 6월), 한국에서 MERS라고 불리는 바이러스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다행히 내가 사는 지역은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이 크지 않은 지역이다. 하지만 저 MERS라고 불리는 전염병은 감기 바이러스의 일종으로 잠복기가 1~2일 정도이며, 고열과 기침 같은 감기 증세를 보여준다. 예전에 사스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할 때 세계 언론은 전염병의 무서운 전파력과 치명적인 증상에 두려워했다. 점막의 침투나 구강의 투입이 아닌 호흡으로 전달되는 병원성 미생물은 참으로 귀찮다.


결국 일이 터지면 이것을 어떻게 통제하는가에서 그 사회의 관리체계나 구조를 알 수 있다. 지금의 현실을 보면 이미 사망자가 발생하고, 다수의 감염자가 격리 중이다.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잠재적인 환자가 얼마나 더 있는가이다. 위에서 언급하듯이 MERS는 잠복기가 1~2일이다. 감염된 직후 바로 증상이 오는 게 아니라 잠복기를 거친 후 갑작스레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어떻게든 역학조사와 질병통제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극심해진다. 가령 수도권에 사는 사람이 기차나 버스를 타고 부산, 광주, 대구, 원주 등과 같이 전국으로 간다면,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병에 노출되고, 그 사람들이 평소대로 활동하면 전국적인 참극이 발생된다.


결국 국가운영 체계에서 얼마나 질병이나 재난통제의 수준이 그 상황을 타파하는 척도가 된다. 2003년 당시 사스가 전 세계를 타격하고, 게다가 그때 태풍 매미까지 한국을 타격했다. 한국에서 태풍은 7~8월인 장마철 주로 오나 가끔 가을태풍이 오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가을태풍은 한국을 위태롭게 만든다. 태풍의 이동경로에서 9월 태풍은 한국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매미태풍은 폭우와 회오리바람으로 많은 재산피해를 일으킨 자연재앙이었다. 그 태풍이 지나가고 그 해 2013년 12월에 나는 군대에 입대하고, 다음해 자대에 배치 받았다.


내가 속한 부대는 공사와 용역설계를 집행하고 관리하는 건설사무소였다. 공사행정을 업무를 보던 나는 하자보수 건으로 외부업체들과 계속 업무를 진행했다. 그런데 공사대장을 찾아보니 대부분 2003년에 공사를 계약하여 그 해 내지 2004년 초에 다 정리된 공사가 많았다. 대규모 보수공사를 정리하면서 계약일과 공사과업을 살펴보니 그것은 태풍 매미로 인해 파손된 시설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공사인 것이다. 빠른 공사 집행과 관리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예산과 관련된 말에서 나는 조금 더 놀랐다.


군대라는 곳은 지방세로 운영하는 게 아니라 국비로 운영한다. 국방부가 예산운영기관과 협의하여 예산을 받아온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예산소요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삼군 참모총장에게 공문을 시달하고, 삼군 참모총장은 다시 예하부대로 그 사항을 지시하여 소요를 보고하게 한다. 그러면 여기서 끝이 아니라 그 예하부대의 소속 부대들은 소요를 제기하여 그것을 집계하여 정리하면 기간이 제법 걸린다. 그러다 보면 예산을 관리하는 담당관조차 그것을 구분해야하는 상황에 놓인다.


왜냐하면 예산을 받기 위해 예산운영기관의 관리만 아니라 행정부와 국회 등과 같은 다른 기관에서 협의해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자세히 몰랐으나, 업무를 하고 사회에 나와 계속 건설용역 관련 업무를 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예산은 국가운영의 예산이 아니라 개인의 판공비였다. 어느 공무기관의 부서장이 자신의 업무에 개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예산이 태풍 매미의 복구예산으로 나온 것이다.


2014년 8월 폭우로 인해 침수피해에 대한 복구 관련 용역 및 공사가 2015년에 한창 진행되는데, 이미 그때는 이미 1달도 안 되어 그 일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국가재난상황에 빠른 대응과 대처, 그리고 후속 조치가 국가기관 업무능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국가라는 조직은 바로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체계를 마련하고 관리해주는 기관이어야 한다. 관리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평시에는 별 상관없으나 전시, 준전시, 재난 시에 그 피해가 극에 달한다.


2014년 4월 팽목항에서 일어난 세월호 선박사고는 수많은 인명을 허무하게 보내야 했다. 국가기관의 재난통제능력은 바로 이런 계기에서 바로 볼 수 있다. 바다에서 일어난 재난사고는 누가 과연 컨트롤 타워가 되어 운영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우왕좌왕한 사이 배를 가라앉았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나, 그 주인은 차디찬 하데스의 신전으로 가야했다. 포세이돈이 등장해서 기적이라도 일으켜 주면 좋겠지만, 기적은 없고, 기만으로 가득한 언론과 여론만 생겼다.


그러면서 과거 어떤 남자가 생각났다. 무능한 것이 아니라 무력한 남자, 그래도 『캉디드』도 아닌데도 낙관주의로서 세상을 보려했던 남자, 노무현이 생각났다. 내가 군복무 할 때 그가 대통령이었다. 재난에 대한 관리체계가 12년 전과 지금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그냥은 아니었다. 『바보 산을 옮기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6주년에 나온 서적이다. 어느 한 인물이 죽어 세상에 없어도 그에 대한 서적이나 이야기는 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매년 5월만 되면 계속 끊이지 않은 인간은 아마 노무현밖에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국가적 재난, 피해자가 속출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국민, 국가의 대응체계에 그저 무력하게 바라보는 현실에서 언제나 그렇지만 노무현이란 이름이 가슴 시리게 다가왔다. 이 책은 과거 그의 비서관으로 활동한 윤태영 씨가 작성한 것이고, 그는 이 서적을 만들기 전에 『기록』이란 서적을 출간했다. 처음 <바보 산을 옮기다>를 읽으면 유시민 전 장관이 만든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와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읽으면 어느 위기나 역사적 순간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시선이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에만 의존한다.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후맥락을 읽지 않으면 편향된 판단력으로 이어진다. 바로 그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가려진 이야기보단 가려질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여기서 잘 알 수 있는 윤태영 전 비서관이 바라본 노무현의 정치관이다. 노무현은 노동자를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변호사에서 변호인으로 되었다. 그가 가진 꿈을 갖고 정치에 입문해도 쉽게 바꿀 수가 없었다.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처럼 이미 세계는 자본의 국경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20세기 그리고 그것이 가속화된 21세기에 자본이 결국 모든 것을 지배했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자본이 모든 것을 가진 것을 인정하듯이 자본이 우선인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자본 그 자체를 무리하게 억제하는 것은 시대적 역행이고, 그것만 우선하면 대다수의 약자인 국민들은 피해본다. 결론은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피해가 오고, 그에게 기대한 사람들은 실망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선임된 순간, 대한민국이 바로 바뀌지 않는다. 단지 바꿀 수 있는 정점만 생길 뿐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다고 해서 바로 프랑스 민중생활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인간들의 실수는 모든지 체계나 정치제의 개편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올 것이 여기나, 그것은 명백한 바보 같은 소리다. 단지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만약 그 기회를 버리면 더 심각한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은 프랑스를 위대한 독재자 나폴레옹의 손으로 가게 만들었다.


민주주의 역사가 시작된 프랑스가 오히려 제국주의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부르봉왕가의 부활, 후에 일어난 혁명을 보면서 역사를 배우는 바로 그런 것이며,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와 계속 대화하는 이야기란 사실이 이런 연유다. 노무현이란 인간은 그런 역사를 알았다. 대통령 노무현은 그런 세상을 이해하고 바꾸려 했다. 하지만 인간은 논리와 이성으로 이루어진 동물이 아니다. 감정이라 해도 연민의 감정만이 아니라 질투와 시기, 우월의식에 고취된 무의식적인 공격성도 있다.


국민이 국가를 위한 일반의지가 아니라 어느 집단의 이기심이 하나의 정치적인 가치관이 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전체의지로 표출된 것이 현재 상황이다. 지역의 차이로 인간을 차별하고 그것이 정치적 갈등이 되어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물론 우리가 아킬레우스 같은 뛰어난 전사가 아닌 상태에서 발목을 잡힌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그걸 바라볼 수 없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고, 그것을 선례로 남겨야 한다. 반면교사의 교훈을 보면 처음 이상을 가지고 뛰어든 전사는 비참한 인생과 최후를 맞이한다.


그가 가진 이상과 반대된 자들은 득세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 반대세력조차 자연의 섭리에 의해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의 이상을 위해 투쟁한 자는 역사의 새로운 안내자가 된다.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혁명가들의 복음서 『사회계약론』을 저술한 루소조차 그렇다. 좌파의 시작인 그가 좌․우파 모두에게 찬사와 비난을 받았으나, 지금 21세기 그는 세계의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2012년 유네스코에 정한 인물). 루소는 아마 산을 옮길 수 있는 설계도면이나 지침서를 주었다면 그 후에 등장한 인물들은 산을 옮기려 했거나 실제 옮겼을 것이다.


『바보 산을 옮기다』를 읽으면서 『사회계약론』이 많이 떠올랐다.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정치인이 아니라 법에 복종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시민들은 오직 법에만 복종해야 하는 점이다. 법 위에 군림하는 자가 나오면 독재가 되고, 많은 시민들은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는 게 『사회계약론』의 가르침이다. 민주주의는 단지 외적으로 정치체계로서 존재하지 모르나, 진정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성적 성찰과 비판, 그리고 토론과 협의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평가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관료체계는 바로 그런 조직적 힘을 뒷받침하기 것이나, 그게 어느 개인과 집단적 이익관계가 개입되면 법은 모든 인간의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인간만 위에 군림하게 만들게 된다. 노무현이 말한 산이란 바로 그런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을 모두 법 아래로 내려놓기 위함이다. 그 법 위에 서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각종 차별의식을 불어넣고 언론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속인다. 물론 노무현의 사상 자체가 모두 옳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바에서 진정 우리가 비판적 자세로 이성적 성찰을 한다면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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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6-0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스때와 메르스의 지금을 비교하면 누가 덜 나쁜지는 자명하죠.노무현이라고 다 최선일 수는 없지만 지금은 최악입니다.
지도자가 무능하면 국민이 어떤 고통을 받는지 고통의 범위가 달라질겁니다. 지금은 정부가 없는 셈이죠.무능은 속수무책을 만들죠.

만화애니비평 2015-06-06 12:31   좋아요 0 | URL
반정부도 무정부도 아닌 비정부가 맞을지도
아나키스트도 아닌 자들이 정부를 해체하고 있으니..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