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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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서적은 예전부터 익히 들어본 책이다. 그런 책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온 것은 2013년에 개봉영화 <변호인>에서 나오면서 부터다. 저자 E.H. 카, 정식이름은 에드워드 헬리트 카라는 사람이었다. 본래 영국에서 정식으로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역사연구가로 명성을 날린 사람이다. 그의 학교출신인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정식으로 대학의 어디에 졸업했는지 모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영국의 대표적인 학술기관으로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자 에릭 홉스봄이 재직한 곳이다. 아무래도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세계의 대학교라고 하면 보통 미국의 하버드를 비롯한 동부권 대학교를 생각하겠지만, 진실한 학문을 추구한 곳이라면 바로 영국이다.

 

영국의 대학교에서 이미 E.H 카와 같이 역사학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얼마 전에 타계한 에릭 홉스봄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영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면서도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마라크스주의로서 역사를 본다는 것은 기존 전 근대적인 영역에서 새로운 근대사상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것과 같다. 카의 경우 그는 마르크스주의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고찰과 그리고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탄생시킨 헤겔의 변증법으로 통하여 역사란 과연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란 단순히 발굴 장소에서 발견된 화석덩어리가 아니라 그의 유명한 명언처럼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라고 밝힌다.

 

사실 역사라는 것은 우리가 정확하게 판단내리기가 어려울 경우가 많다. 가령 루이15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프랑스궁전에서 일하던 다미엥이란 하급관리는 그의 군주인 루이15세를 암살을 기도하다가 실패로 끝났다. 그의 처분은 가혹한 고문과 고문으로 이어진 사형이었고, 엄청난 고통의 통증과 죽음조차 용납하지 않았던 다미엥은 결국 모든 육체가 재로 변하는 것으로 그의 몸은 사라졌다. 대신 정식적인 기억에 의해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 맨 앞장에 선두하게 되었고, 카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구조주의 사상가의 대표도서에 거론되었다.

 

그렇다면 다미엥이란 사람이 시도한 암살은 분명 그 당시에는 엄청난 파급을 일으킨 반란행위고, 일반적으로 당시 인간이라면 다미엥은 무조건 용납하기 어려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루이15세가 지배하던 시기는 중앙집권화가 계속 이루어진 상태서 재정상태가 계속 악화되었으며, 그것은 결국 백성들에게 책임이 전가된다.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라는 책을 보면, 다미엥의 암살미수에서 처벌받기까지 심문 도중 다미엥의 공범자로서 장 자크 루소가 1762년 에밀을 내기 전에 이미 프랑스 파리에서 유명인물이 되었고, 그가 다소 은둔적인 인간을 추구하는 것과 인류의 역작이란 불릴 <인간불평등기원론>은 1755년에 나왔다. 1757년에 다미엥이 죽은 시점에서 이미 파리에서 루소가 상당한 화제로 된 인물로 본다면 다미엥의 죽음은 기존 구체제에 대한 반항이다.

 

루이16세가 단두대에서 죽기 전에 자신의 왕국을 멸망하게 만든 것은 루소와 볼테르 때문이라 했다. 그런 만큼 역사의 관점으로 보자면 루소와 볼테르는 봉건적인 왕국에 대해서는 크나큰 적이고, 이제 민주주의 국가로 향하는 국가에서 본다면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가치에서 현대 사회, 혹은 카가 살아가던 20세기는 이제 왕국이 해체되어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하던 시기다. 지난 19세기는 아직까지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있었고, 물론 왕이 직접적으로 통치하지 않으나 입헌군주제가 존재했다. 현재 영국에서 국왕과 여왕이 존재하고, 왕립기관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다고 하여 영국은 왕이 주인으로 등극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체계라는 점이다.

 

오늘날 그런 국가적 형태와 정치적 체계에 따라 역사를 보는 것은 당연한 관점이다. 한국의 역사를 두고 보자. 그렇게까지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대한민국 헌법을 보면 역사학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없겠지만, 역사적인 가치를 두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로서 과거 봉건왕국이던 사대부 중심이 아니라 1919년 3․1운동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통을 이어가는 것이다. 게다가 4․19혁명을 정신을 계승하는 것 역시 민주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렇듯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어느 일정한 공간과 시간에서 특정인물이 일으킨 사건에 치중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지금 현재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생각해본다면 지금 사회에서 과거에서 비롯된 연결고리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올바른지 생각해야 할 점이다. 저자인 카는 그런 시기적인 부분과 관련하여 봉건사회와 프랑스대혁명 시기 이후 유럽에 널리 퍼진 혁명의 시대, 또한 나폴레옹의 제정프랑스, 비스마르크 수상, 파리 꼬뮌, 러시아혁명을 두루 성찰하며 역사에 대해 판단한다. 역사의 원동력에서 과거는 대부분 정치인들, 즉 영국이나 유럽의 경우 귀족과 왕족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들의 정치적 이권과 충돌이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종료다. 귀족들끼리의 권력다툼은 단순히 귀족만의 전쟁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싸움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가치관이 어느 특정 권력자에 의해 결부 짓는 것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특정 권력자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민주주의 체계 아래 사회구성원으로 움직이어야 한다. 따라서 유럽에선 과거에 비추어진 역사적 사실에서 명예혁명을 찾아가는 이유는 지금의 현실을 존재하게 만든 가치와 조건을 찾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인간, 국가, 사회 등의 그 존재성에 대한 근본이 되는 것이다. 역사란 바로 그런 정체성을 부여하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프랑스에서 많은 기념일이 존재하겠지만, 7월 14일만큼 가장 거대하고 웅장한 날이 없을 것이다. 그날이 바로 프랑스대혁명이 시작되어 바스티유 감옥을 공략하려한 날이다. 최초로 지배계층이 아닌 피지배계층이 부당한 권력에 향하여 칼을 든 날이다. 그 누구의 명령이 아닌 바로 그 자신들의 명령에서 말이다. 결국 근대사상은 국가란 절대불가침한 존재가 아니라 국가라는 바로 개인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조직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 따르는 역사적 진보는 바로 인간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진보적인 역사가 되려면 인간의 눈을 가리고 있는 무지의 장막을 제치고, 그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이성의 판단력이 요구된다.

 

따라서 카는 헤겔의 말을 빌려온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 개인적으로 이 말이 나는 헤겔로부터 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든 나는 그런 관념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할 때, 헤겔이 그런 말을 한 것을 알았다. 결국 이성적인 것에 의한 현실적 사고방식, 그런 현실적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인간의 지성,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그것은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대다수 인간은 무지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무지는 정말 무지하기 때문에 무지한 것보단 그 무지에 대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려 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무지의 장막 너머에 존재하는 현실적 모순에 대하여 이성적인 사고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은 결국 현실적이지 못한 인간이 되는 것이고, 현실에 대한 무비판성은 결국 자신의 무지를 하나의 당위성으로 연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단지 생각하면 그런 무지의 대다수의 군중들이 하나의 운동에너지가 되어 모든 것을 움직일 힘이 된다는 것이다. 사건과 사고는 단순히 총성을 울리기 위한 격발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격발은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파괴와 혼돈의 시작점이 된다. 우리가 왜 역사를 제대로 보고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의 세상은 우리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타자의 공간의 불일치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의 공간마저 타인에 의해 모든 것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결국 실존적인 요소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하나의 도구로 전환되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철학에서 루소의 일반의지는 인간이 가진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자신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이익을 위해 판단하고 결정하는 의지다. 하지만 그 의지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의지, 게다가 그 의지는 개별적 이익을 바라보는 전체의지로 되었다면 그 사회의 현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그에 따른 전체의지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합리성은 부여받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역사적인 흐름을 잡아나갈 것이다. 결국 역사란 자신과 혹은 그 자신에 반대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변증법이란 찬, 반, 정이란 관계는 헤겔의 가르침에서 자신들이 품은 모순, 혹은 지금 모순을 품은 자들이 느낀 현실적 모순에 대한 반발의식이 서로 부딪히면 부정의 부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은 후 주변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카는 여전히 근대사상, 즉 모더니즘을 신봉하는 사람이란 점이다. 최근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어 이제는 전 모더니즘으로 회귀하는 한국을 보면서 지식인들이 활보하던 시기가 사라지고 이제 대다수의 군중들이 역사의 무대로 나왔다고 해도, 이제 그 대다수의 군중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끝없이 표류하는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한국사회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돌이켜본다면 근대사상과 철학적인 요소가 없이 그저 근대산업만 지나간 현재, 국민들에게 이성적 판단력을 제대로 정착된 되기에 너무 짧았다. 따라서 강신준 교수(카를 마르크스 <자본> 번역자)는 근대사상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도래로 통한 모더니즘이 정착되지 못한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는 그저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조차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는 오히려 혼란을 유지시켜줄 뿐이다. 그런데 이제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전 근대적인 현상, 이미지의 도래에서 결국 현실의 지배는 이성이 아닌 미디어라는 정치경제적인 권력에서 시작된다.

 

미디어라는 것은 역사라는 사실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선 어느 시기에 어느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상황에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전반적인 전후관계가 상실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실이 되는 단지 OOOO년 O월 O일 OO시 OO분 XX시 XX동에 누가 무엇을 했다는 이제는 의미가 혼선을 빚게 된다. 있지도 않은 사실, 혹은 가정조차 되지 않을 조건이 하나의 fact로 되는 것이다. fact라는 것은 만들어진 사실이다. 원래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뒤에 조작된 사실이란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그때 벌어진 일은 분명 조작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것이 가진 의미, 사실성과 우연성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역사가가 가진 책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은 역사가가 가진 관점에서 비롯되고, 그것은 결국 역사가라는 인물에게 부여된 양심과 지성 그리고 선택에 의한 노선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역사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적 가치에 대한 만남에서 자기에게만 좋을 선택지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카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책을 만들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역사의 진보라는 것은 역사의 흐름에 의해 조성되는 게 아니라 이성적인 가치의 지속적 추구로서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성이 마비된 세계란 진보는커녕 퇴보와 시대착오적인 흐름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을 본다면 충분히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역사란 과거와 현실의 단절이 아니다.

 

오히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과거는 상상하고, 미래는 기억한다.”라는 말을 기억한다. 대다수의 어리석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자들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미래영구적인 기념을 위해 항상 상상하고, 그에 따른 부당한 권력을 남용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멸할 때 미래의 판단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기억한다. 현실은 결국 과거에 의해 존재되고, 그 존재된 현실은 미래를 앞으로 향하여 달려간다. 오늘 내가 하는 행동에 훗날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는 모르나, 그 행동 하나가 지금은 역사적 패배자가 되어도 훗날에 역사적인 승리자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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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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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원 인생>, 2010년 나온 도서이고, 불과 5년 전에 아주 어려운 환경에 취업한 신문사 기자들의 기록을 담은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나는 개인만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 이유는 결국 자기합리화 내지 자기자랑만 내세우고, 내가 되는 것에 대해 남도 될 수 있다고 하나, 그 조건이란 한 마디로 억지와 모순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4천원인생>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찾아갔다.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것, 실사 옆에 있어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거나 않으려 했던 것을 찾아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의 현실에서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영웅적인 존재가 나와 강한 힘으로 계속 적을 싸워 나가는 파워 증가식 이야기를 싫어한다. 누군가 그렇게 강해져서 진화하여 이기는 방식은 약한 자들의 몰락은 그저 있어야 할 당연한 사실이다. 정의란 가치는 결국 주관적인 힘들이 모여 객관적인 지표를 나타낼 뿐이지, 그 정의라고 말하는 하나 그 자체가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입으로 정의를 타령하는 자들이어야 말로 제일 정의롭지 못하다. 정의의 가치는 오히려 명확한 것보다 불명확한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르다.

 

결국 정의의 사자는 어려운 도탄의 시대에 혜성처럼 나타나는 인물이겠지만, 정작 그런 인물이 우리에겐 존재하는가? 그 영웅은 자신만의 영웅이지 우리의 영웅이 아니다. 그가 우리의 영웅처럼 보이는 것은 TV나 신문, 각종 미디어로 장식되어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남의 영역을 과다포장 내지 은폐, 조작, 허위로 보여주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선 그것들이 흔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문제는 그런 흔한 이야기는 우리 일상에서 전혀 흔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옆을 보기보단 항상 위를 보려고 한다.

 

위를 보고 노력하는 것은 좋으나, 위를 보고 가기 위해서는 아래에 있는 길과 계단을 보고 가야 한다. 위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결국 계단 위를 하나씩 걸쳐 가는 것이고, 그 단계를 거치어 좀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 <4천원인생>은 우리 개인의 삶 자체를 위로 가기 위해 만든 책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장하기 위해 만든 책이다. 개인은 사회구조를 바꿀 수는 없으나, 사회구조는 개인을 멋대로 농락한다. 사회구조의 문제를 생각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마지막엔 그 무관심한 대중들에게 그 책임이 전가된다.

 

전가된 책임의 문제는 결국 타인으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서 온 책임과 고통의 분담은 처음 시작은 본인의 의식부족에서 시작된 것이다. 한 마디로 누굴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번 더 생각하면 간단하다. 생각하면 되는 것 자체는 간단하다. “무슨 고민이 있어? 그러면 생각해보고 해결하면 되라는 충고는 매우 간단하게 타인에게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고민에 대한 문제와 원인,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는 결과는 쉽지 않다. 여기서 결과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결과라는 마지막 종착점이 아니라 발단의 시작점이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시작점을 찾아가지 않고, 도중에 있는 이력만 보려고 한다. 시작은 눈으로 들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중간에 등장하는 문제들은 현실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천원 인생> 아니 그 이전의 <88만원 세대> 이야기처럼 우리는 현실의 이야기를 피해 계속 화려한 이야기와 환상만 꿈을 꾼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사천원 인생><88만원 세대>들과 밀접하게 조우하고 있다. 길가다가 우리는 편의점에서 간단한 용품을 구입하고, 배가 고프면 회사나 학교 근처 식당에 들린다. 하다못해 빌딩 안의 화장실을 가면 무수히 많은 얼굴을 만난다. 아파트나 대형건물 입구에는 경비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조차 말이다.

 

그들은 우리와 옆에 있지만 결코 옆에 있는 인간들이 아니게 되었다. 인간은 인간으로 대하는 그 자체적인 목적인 아니라 하나의 도구 내지 물품처럼 물화되었다. 따라서 물화된 인간은 자신 스스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언제나 자신의 존재적 존엄성을 가지지 못한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에 묶여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사슬에 의해 매여 살 수밖에 없다. 태어날 때는 포유류에서 인간이란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뒤에는 어느 지역의 집안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 등에 의해 차이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롤즈의 <정의론>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불평등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불평등으로 인해 최소수혜자라는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적으로 아무런 성공이나 혜택을 받지 않으면 결국 그것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완수할 수 없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조건은 기회의 균등이고, 그 기회를 만드는 것은 결국 교육이다. 정의라는 것은 최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게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피해 최소한의 손실로서 끝내는 것이라 보면 된다. 어느 이익이나 가치가 누군가에게 돌아가면 다른 누군가에게 그에 대한 역효과가 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는 그런 효과를 받아야 하는 자와 받지 않아도 되는 자의 정당한 균등관계가 무너진 지 옛날이다. 따라서 <4천원인생>이 발생하는 것이다. 대부분 가난한 자들에 의해 메우게 되는 경제적 굴레는 우리 사회의 큰 우환거리가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착취할 수 있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이다. 문제는 인간의 시간은 늘 24시간씩 매일 채워주겠지만, 24시간이 무한대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생산의 조건은 바로 생산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점이고, 그 생산조차 재생산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다.

 

<4천원인생>은 후천적 불평등에 의해 시작되는 책이다. 대부분 가난한 자들은 시간당 4천원에 10시간에서 많게는 15시간에 이르는 고압적 노동에 시달린다. 공장 노동자들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는 기계부품처럼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안전장치도 미비하고, 휴식공간이나 여유시간도 부족하다. 화장실에 가는 몇 분과 담배를 피우는 그 몇 분도 아깝다. 물을 마시고 잠시 앉아있는 시간도 아까운 것은 바로 그 11초가 생산품을 만드는 노동과정이란 점이다. <4천원인생>에서 공장노동자들은 기가 빠질 때까지 일하고, 마치 시간이 1초가 지나가는지 또는 1시간이 지나가는지 모른 채 일에 죽어라 빠진다.

 

그러다보니 정신적 파괴로 이어지고, 자신들의 입에서 거친 말과 상스러운 말만 나온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 명제는 그가 생각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 안에서 가능하다. 식당아주머니 같은 경우 잠시라도 앉을 여유가 없고, 앉아있는 것은 반찬 만들거나 양파, 마늘 등을 손질하는 경우다. 감자탕 집에 뼈다귀가 넘치나, 자신들은 뼈다귀조차 만질 수 없다. 무엇이든 인색한 주인의 방침이 그렇다. 주인은 자신의 자본력이 아닌 은행 빚에 대출받거나 건물주에 세를 들어 하기에 억척스럽게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누가 더 경제적으로 위협에 놓여있는지 생각하면 답을 내리기 어렵다.

 

단지 아전투구처럼 만인 대 만인이 아니라 덜 심각한 빈자 대 더 심각한 빈자들의 대립구도가 바르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식당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밑천 파먹을 수 없는 가게주인도 그러나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도 그렇다. 물론 자재와 식료품들은 물리적으로 줄어들어가겠지만, 인간 그 자체는 물리적으로 줄어들지 않고, 시간적으로 되돌아간다. 업무의 과중은 건강에 치명적이고, 결국에 가서는 오히려 병원비가 늘어나는 형태가 된다. 지나치게 가혹한 노동조건은 노동자가 가진 것은 몸이기에 그들의 고용권한을 잡고 있는 가게점주들은 마치 종업원들은 자기 노예처럼 부린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 법적인 요식행위이지 그 자체가 많은 사람들을 지탱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그 자체를 지탱하는 것이다. 정치철학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일반적인 민주주의보다 더 발달된 민주주의체계이다. 하지만 이름에서 보이는 철학적 개념과 현실적 상황은 언제나 같을 수가 없다. 민주주의 정치체계를 만든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을 정부의 희생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부를 기꺼이 인민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인민이란 개념은 국가의 설립 이전에 살던 사람이다. 프랑스대혁명 전에 대부분 국가들은 봉건적인 왕국이었다면, 그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국가가 붕괴되고 새로운 국가가 탄생해도 그 지역의 주민들은 여전히 살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민이란 개념이 탄생했다. 그래서 헌법에서 국민은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으로 등장한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4천원인생>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4천원인생>이 아주 극소수의 개인에 불과하면 문제가 아니지만, 식당아주머니로 일하며 시급 4천원정도 받는 분들은 전국에 200만 명이란 점에서 충격이 아닐 수가 없다. 이들이 일하는 이유는 본인의 행복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력으로 얻은 미래를 위해서다. 그들이 고된 노동을 하는 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자녀 역시 가난을 이어받아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고통 받는다면 우리 사회는 양극화로 인해 인구가 계속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력의 부족은 인구의 감소에서 비롯된다. 그것을 대체할 만한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단지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대체할 대안이라면 그것은 대안이 아니라 변명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는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들을 유입한다. 하지만 집단적 배타주의가 강한 한국에서 외국인들은 불평등한 처사에 고통 받는다. 임금도 부족하고, 심지어 온갖 욕설에 성추행 그리고 폭력에 의해 몸과 마음이 병이 든다. 철학자 레비나스에 의하면 그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알려면 고아, 외국인, 장애인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 그런 사람들의 미소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미소를 항상 짓을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이들이 숨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약자의 얼굴에 그늘이 찰수록 누군가는 이익을 볼 것이다. 뉴스와 신문을 보고 사회문제에 대해 말만 많은 사람들은 넘치고 넘쳐 나지만, 그것에 대한 근본적 원인과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이들은 정말 부족하다. 결국은 정치적인 법률과 제도로 해결해야 하나 막상 당하는 자들도 자신의 처해진 현실을 괴롭다고 말하지, 그 근원을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는 없다. 역시 지식이 기본으로 갖추어야 바꿀 수 있는 것일까?

 

사회생활에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 오늘 하루 내가 출근하여 가는데 버스타려면 버스기사가 있어야 하고, 버스기사가 버스를 운전하려면 정비사가 필요하며, 처음부터 버스를 몰려면 버스를 만드는 공장이 필요하다. 공장이 운영되려면 철, 플라스틱, 유리, 나무 등의 재료가 필요하고, 그 재료를 만드는 공장, 그 재료의 원자재를 캐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작은 일상 하나가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오고가는지 우리는 항상 인식해야 한다. 이런 와중에 언제나 하나의 일상이 되어 그것을 망각하여 누군가의 고통과 착취는 잊어지기 마련이다.

 

요새처럼 물가는 올라가고, 임금이 정체되어 취업률은 저조하고, 실업은 해결이 어려운 지경에 계속 저임금 고노동의 3D 산업에 계속 사람들은 몰려가야만 했다. 거기조차 어느 정도 안정된 환경과 근무조건이 붙는다면 문제가 없으려만, 그것이 되지 않아 문제다. 마트에서 일하던 사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 일상 속에 있는 그들을 어째 대하고 있는가? 솔직히 나 역시 가진 여유가 부족하고, 마트에서 사는 것만 사기에 마트 상품 진열대에 있는 판매원의 이야기를 계속 들을 이유가 없다. 그런다고 하여 무시하거나 천대하거나 불필요하게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이른바 진상손님, 마트뿐만 아니라 최근 아파트 수위의 자살사건에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얼마나 파탄이 났는지 다시금 알게 된다. 그런다고 하여 내가 아주 성인군자나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내 자신도 과오를 저지르고,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실수로 저지르는 경우도 많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멋모르고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켜지자 다른 사람들의 불만이 서린 눈빛을 보고 부끄럽게 여긴 적이 많다. 적어도 그런 실수를 최소화하고, 줄이는 것만이 혹은 그럴 의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그 생각자체에서 자기권리만 주장하는 이들은 남에 대한 이목을 고려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런 부류가 더 체면에 신경 쓴다. 자신의 얼굴을 뻣뻣하게 세우는 것을 남을 깔보는 것에서 찾는 아주 불쌍하고 어리석은 종족일 뿐이다.

 

언젠가는 그런 부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 살아갈 뿐이다. 인간의 가치는 결국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돈으로 보여주기도 하겠지만, 돈 그 자체로 해결이 불가능한 것들이 존재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없는 게 아직까지 존재하기는 하나, 단지 너무 작고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4천원인생>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몸과 마음을 소모시켜 가고 있고, 우리는 그 소모와 착취로서 살아간다. 언제나 식당이나 청소부 아주머니를 보면 수고합니다. 라는 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짜증을 부리지 말자. 그들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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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복 입고 홍대 간다 - 한복을 청바지처럼, 28살 전주 아가씨의 패션 창업기
황이슬 지음 / 라온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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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문화와 사회학에 대한 관심이 많기에 이래저래 많은 분야를 접하게 되고, 다양한 관점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특히 사회와 관련하여 영화와 문학,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천대하는 sub-culture 영역까지 두루 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베이스라인이 sub-culture이고, mass-culture에 대한 관심은 이미 사라진지 옛날이고, 단지 서브컬처 내에서 mass-culture로 진입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점은 mass-culturemass-culture로서 계속 유지되는 게 아니라 계속 내부적으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Cliche의 연속이란 점이다. 따라서 상당히 진부하고 뻔히 보이는 이야기이므로 처음에는 많은 대중들은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만, 자신들의 내면에는 자기들이 바라는 전형적인 패턴주의를 완성시키는 형태로 전락한다.

 

따라서 유행에서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에 대한 간극의 차이가 새로운 형태가 나오고, 그 형태에 따라 이야기가 파생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파생의 원천은 sub-culture 영역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대중오락물 내지 예술로서 바라본다면 기존의 mass-culture로 통해 전혀 새로 보일 수가 없다. 따라서 그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콘텐츠는 뿌리 깊은 잠재의식 속에서 돌출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가 언제나 같은 이야기로 무색해지는 이유는 바로 mass-culture의 한계성이고, mass-culture의 간극을 채우기 sub-culture를 도입하는 것이다.

 

최근 드라마 중에 <식객>이나 <내일도 칸타빌레>는 한국의 웹툰과 일본의 만화책에서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내일도 칸타빌레>는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내지 영화,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OSMU라는 one source multi use는 바로 저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클래식이란 장르는 극히 대중적이지 못한 점과 그것을 만화로 제작한 것은 매우 maniac적인 요소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작품 내 전개는 상당히 이해하기가 쉽고 재미를 유도하며, 클래식이 그렇게 낯설지 않을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일본의 만화, 게임, 라이트노벨, 애니메이션의 sub-culture 잠재력의 무서운 점은 mass-culture에서 나오지 않은 잠재적인 요소를 드러냄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하나의 상품이란 콘텐츠를 유발한다.

 

따라서 21세기 산업구조는 더 이상 20세기의 공장에서 바쁘게 돌리는 산업구조가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가 요구되는 탈() 산업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post-modern이란 점에서 기계적인 요소보단 차라리 기계적 요소보단 이미지의 대두와 이야기의 감성이 우리의 시장을 형성된다. 막노동을 하는 아저씨나 하다못해 식당에서 죽어라 고생하시는 아주머니들도 드라마를 본다. 우리는 휴식시간에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결국 여가 내지 취미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취미라는 것은 문화산업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본주의 시장구조와 매우 밀접할 수 있다.

 

단지 자본이란 점은 경제적 조건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문화적 조건, 사회적 조건, 정치적 조건, 지역적 조건 등이라는 다양한 인자들이 따라 붙게 되는 마련이다. 문화자본에 대한 관심에서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돋보이거나 혹은 차별화하기 위해서는 문화자본에 투여할 수밖에 없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가 자신의 지갑만 두둑하게 하는 것 외에 아무 관심이 없다면 그는 단지 그 사람일 뿐이다.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기 위해 다양한 상품과 기호들로 가득하다. 프랑스 사회철학자 보드리야라는 인간의 상품에 대한 가치에서 현대 사회는 기호로서 이루어져 있고, 기호 그 자체가 상품인 셈이다.

 

기호는 단순히 메이커 이름, 기업이름만 아니라 사람들의 이름조차 반영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21세기가 탈() 산업화에 따른 새로운 산업구조에서 결국 새로운 가치를 나올 수 있는 것은 이미지 메이킹이란 점이다. 상품의 가치는 대부분 비슷한 기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이 냉난방공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우리나라 에어컨 기계가 어느 회사가 더 좋고 나쁨을 확실히 말 하기가 어렵다. 정보력과 기술력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우리는 결국 어느 회사로, 어느 상품으로 또는 누구를 통해 신용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복입고 홍대 간다>를 저술한 황이슬 씨의 책은 21세기 탈() 산업화된 사회구조에서 대표적인 성공한 CEO. 한국이란 사회에서 본인의 가정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한 경제상황, 가정에서 여러 자매와 같은 방을 사용한 점,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정해진 패턴에 따라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믿었던 소녀라는 점에서 많은 불리한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하여 그녀는 누구에게 자랑스럽게 성공했고, 자신의 노력과 정성으로 이 자리에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누군가의 성공이야기와 자기계발서는 정말 싫어하지만, 나름 재미는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주 재미있는 베이스라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뒤에 있는 배경이나 조건이 은밀히 따라 붙었다. 혹은 시대적인 조건이 있었다. 갑자기 재료의 공급이 급증하거나 또는 상품의 가치가 급작스레 올라가거나 독점에 의해 시장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되거나 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황이슬 씨는 한국의 전통의상인 한복이란 점을 이용했고, 이것을 자신의 생활에서 접목하여 일으킨 점은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노력과 능력을 치하해도 정작 그녀의 베이스라인에 대해 생각했을까 의문해본다.

 

조금 짧게 지나가는 말이나 그녀는 지금으로 말하면 조금 게임 오타쿠인 점과 대학동아리에서 코스튬 플레이를 할 정도로 sub-culture에 어느 정도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mass-culture는 이미 한계에 차여 있어서 같은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고 다른 모습으로 나와도 구조는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게임을 했다는 점, 그 게임으로 통한 아아템 수집과 게임적 리얼리즘적인 요소를 현실에서 유감없이 발휘한 점이다. 이야기를 붙이고 떼는 실력은 결국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어린 시절에 나온 유감 없는 손놀림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런 그녀의 잠재력과 노력은 칭찬하나, 한편으로 조금 아쉬운 점은 모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마란 점이다. 세상에 힘든 일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우연히 계기를 통해 발견하여 큰 성공을 가진 자는 극소수다. 그녀가 언급한 것처럼 어느 대단한 강사나 상업인이 성공하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쳐 왔다. 하지만 그 실패는 기회의 공정한 부여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책을 보면서 황이슬 씨의 노력은 개인적 공부만 아니라 독서까지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독서에서 니체로부터 칸트, 루소, 키케로 같은 기라성 같은 이름이 나온다.

 

하지만 루소의 이야기에서 실수한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었다면 자신의 성공담에 대한 비교에서 타인의 기회를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기질이 있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녀의 실천력과 노력은 인정하나, 그렇게 하려도 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프로로서 아름다운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자신이 팔아주는 옷을 사지 못하는 식당아주머니들은 그녀의 상품은 필요 없을 수 있겠지만, 식당아주머니나 혹은 청소부 같은 잡무를 하는 분들이 없다면 저자분이나 혹은 나, 많은 분들이 불편을 겪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일이 소중한 만큼 남의 입장도 조금 고려해보면 좋겠다는 점이다. 저자 분이 대학시절에 한복을 입을 때 처음 남에게 상당히 낯설어 보였을 것이고, 자기 자신 나름대로 좌절이나 사회적 배타성을 경험을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어째든 그녀의 성공적인 한복 라이프에서 내가 처음 본 것은 역시 코스튬 플레이 문화였다. 가끔 인터넷 sub-culture계통에서 코스튬 플레이는 다른 콘텐츠를 지닌 sub-culture와 다르게 사람이 직접 활동하는 점과 의상수주와 대여로서 생계를 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복을 만드는 것보다 그녀가 <>이란 만화와 드라마 주인공을 코스튬 플레이 했다는 점에서 이미 놀이가 하나의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보여준 셈이다. 황이슬의 업적에서 가장 높은 것은 놀이 그 자체를 자신의 노동력을 부여하여 상품적 가치를 창출한 점이다.

 

앞으로 21세기 이미 산업화로 살아갈 수 없고, 계속 블루오션으로 통해 산업구조를 찾아가야 한다. 물론 블루오션 자체도 기존 사회적 생산구조를 토대로 하므로 블루오션이 무형의 존재로서 나오는 게 아니라 무형의 관념이 유형의 도구로 등장하는 것이다. 창의력을 원래부터 가진 사람이 계속되는 중고등학교의 주입식 교육은 오히려 자질 있는 사람을 억지로 망가뜨리는 결과만 나오게 된다. 자신의 열정을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과 상담하는 사람에게 친절히 정성스레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은 한국의 교육현실을 다르게 볼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스펙을 쌓아도 결국 1등부터 꼴찌까지 정해져있고, 대기업과 공무원도 결국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단 %만 들어간다. 나머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하면 간단하다. 중소기업에 가거나 또는 새로운 산업체계를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적 구조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결코 간단하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 역시 아니어도 그 모든 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계발서 내지 성공담에서 가장 중요한 실수사항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순간 이미 그 사회는 붕괴 되는 것이다.

 

길거리에 보이는 피자집, 통닭집, 맥주가게들은 단 몇 m 간격으로 계속 줄지어 가고 있다. 소비 그 자체를 위한 가게, 누군가 생산한 후 임금을 받아 그 가게의 상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상업구조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듯이 주식이나 재테크 같은 허무맹랑한 성공신화는 결국 거기서 끝이고, 그 이면에는 수많은 실패와 고통이 은폐된 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분명 직접적 내지 간접적인 실패를 우리는 너무 무신경하게 피해가는 것이고, 단지 잘 된 것만 보려고 한다. 결과론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결과만 바라보지, 그 과정에서 담긴 문제나 구조를 보지 않는 것이 큰 골치다.

 

다행히 이 책에서는 과정의 고통이 잘 드러나 있었다. 평전이 아니라 순수한 자신에 대한 열정을 토대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복은 아름다운 옷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외래문화에 치여 한국문화는 이미 소외되어 가고 있다. 교회라는 기독교종교를 가진 황이슬 씨가 한복문화에 대한 열정과 관심에 어찌 보면 나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전통이란 것은 항상 가만히 웅덩이 속에 고인 물처럼 있으면 안 된다. 고인 물은 썩어 들어가고, 결국 그 처리비용과 인력에 더 큰 적자를 남기게 된다. 새로운 흐름과 과거의 산물을 적절하게 발전해 가는 것이야 말로 문화산업에서 새로운 아이템이다.

 

한국의 전통문화인 한복의상 sub-culture은 아니지만, 한국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하위적인 문화로 되었다. 조선시대에 한복은 당연한 것이나 지금의 시대는 한복은 당연한 게 아니다. 상품의 기호성은 결국 그 자체로 당연한 게 아니라 당연하지 않았던 게 당연한 것으로 되는 것에서 가치를 눈에 뜬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에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나, 자동차 중에서 벤츠 자동차가 매우 고급이다. 벤츠라는 상품이 본래 가진 내구력과 안정성 등과 같은 기계적인 조건이 갖춘 것은 분명하지만, 벤츠라는 상표 그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되는 것이다.

 

TV에서 이런 말이 많이 나온다. 나는 운동화를 신는 것이 아니라 Nike를 신는다고 말이다. 그런다고 나는 이런 것들이 당연시 되는 사회라도 꼭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상품과 아이디어가 새로운 상품을 유출하여 이익이 되겠지만, 그것 역시 누군가의 노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IBM의 횡포에 맞선 apple사의 기계도 결국 많은 노동자들의 착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겉만 보지 말고, 그것을 이루는 구조로서 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결국 성공이란 왜 그런지 보고 판단하고 자신에게 맞는 틀을 찾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그 열쇠는 열정이 필요하나 모든 게 열정만으로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점이다.

 

황이슬 씨의 책에서 그녀의 성공은 많은 베이스라인이 동원된 것이고, 그것을 위한 경제적 조건은 열악해도 시간적 조건은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이며, 자신의 시간이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지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시작하는 점에서 그 노동을 하는 시점이 중요한 것 같다. 황이슬 씨에게 상담해오는 학생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고 여겼다. 능력개발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역시 생계부담이 없는 시절이 제일 좋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한국은 놀이, 예슬 그리고 상상력이 원활히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다. 상상력이란 미래의 윤리라는 말이 있듯이, 상상력으로 통해 새로운 세상은 구현하고 만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앞을 만들기 위해 체계를 개선해야 하나 계속 앙시앵레짐 같은 구체제에 물들어가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놀이가 하나의 예술과 상품이 되는 순간, 기계로부터 계속 잠식당하는 우리의 일자리를 다른 쪽으로 대체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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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자본』을 읽다 동아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총서 1
강신준 지음 / 길(도서출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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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어리다고 여긴 시절, 그러니깐 대학교 다닐 때까지 세상에 대한 의문을 전혀 모르고 살적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가난하게 된다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결국 그것은 사회 전체적인 문제로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만화로 된 사회교양도서에 많이 버는 사람과 적게 버는 사람 모두 세금을 100만원 씩 납부하는데, 많이 버는 쪽은 “적당하군.”라고 하고, 적게 버는 쪽은 “왜 이리 많이 나왔지?”라고 한다. 결국 돈을 얼마나 버는가에서 같은 돈을 납부하는 것은 서로 간의 입장 차이와 상황적 요건이 뒤 따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의문을 들면서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초고>를 읽은 후, 19세기부터 시작하여 20세기까지 뒤흔들고, 21세기 지금도 다시 유령처럼 등장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말하는 것은 상당한 금기 내지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철학과 사회학, 인류학에서 마르크스를 거치지 않는다는 것은 거푸집을 설치하지 않은 채 레미콘을 부어버리는 것과 같다. 한 마디로 기본이 되는 사상에 마르크스의 위치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과 단어, 법적인 요소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하루 노동시간이 18시간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랄 것이다. 18시간의 노동시간과 그 시간이 지나친 시간이 아니라 18시간까지 제한해달라는 조건까지 따라 붙으면 충격일 것이다. 우리는 주5일에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이 기준이다. 물론 업체와 직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평일출근에 9시 출근과 6시 퇴근이 정상적인 직장인 라이프스타일이다. 그런 생활양식에 맞추어 18시간 노동은 거의 죽음을 이어지는 착취다. 1주일 시간은 164시간이다. 그 시간 중에 80시간 이상 일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보는 것일까?

 

마르크스보고 악마 내지 나쁜 놈이라고 하는 인간조차 하루에 12시간 이상 계속 일을 한다면 마지막에 악마가 과연 누구로 보이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우리 세계에 미친 영향은 아주 막대하다. 세계를 뒤흔든 도서로 성경과 마르크스의 <자본>이라고 한다. 하나 더 하자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도 있다. <사회계약론>은 18세기 왕정시대를 무너뜨리게 한 근본이 된 책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시스템과 정치적 제도 그리고 사람들의 경제적 구조는 큰 변화와 혁명을 불어오게 한다. 기존 헤게모니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시대적 흐름에 맞추지 못할 경우 결국 도태된다. 단두대 아래 목이 잘려진 루이16세 같이 말이다.

 

사회가 바뀌고, 정치제도 바뀌어도 문제는 바뀌지 않은 것들이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소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코제트다. 판틴의 외동딸로서 어머니 판틴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고, 공장노동의 수익으로 딸을 부양하기 어려워 자신의 몸까지 판다. 그래서 <레미제라블>, 불쌍하고 가여운 인간이다. 그 가엽고 삶조차 괴로운 연속인 자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 미래는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 자신의 분신과 같은 후예들의 미래다. 자신들의 자녀들이 비참하지 않기 위해서 그 비참함을 자신으로 마무리하려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래 쉬운 것만은 아니다. 결국 비참한 생활은 다시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도처에 사슬에 묶인 채 살아가야 한다. 그 사슬이란 후천적 불평등, 자연적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이 겪는 경제적 불평등이다. 이런 불평등은 사회적으로 큰 고민이 되고, 인간 개인에게 파멸을 불러온다. 고전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국부론>을 저술하나, 그 근본은 어느 국가에 존재하는 국민들이 굶주림과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경제생활은 결국 국가의 이익이 되겠지만, 그 원천은 국민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는 것은 국민이고, 그 노동의 가치로서 임금을 받아 우리는 생활수단으로 삶을 영위한다. 만약 그 시스템 구조가 붕괴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미 그 문명의 붕괴로 이어질 것 같은 암울한 내일이 다가오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사회경제적 불안감은 국민 생활에 큰 지장을 안겨준다. 과거에 우리의 슬로건은 흔히 말하여 과소비를 추방하는 것이라면 이제는 과소소비를 추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전처럼 뭐든지 아끼고 절약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시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경제적 토대는 결국 과학기술과 장비의 발전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화장지가 과거 기계 1대당 100롤을 생산할 수 있다면 지금은 1,000롤을 생산할 수 있으며, 그 기계를 운영하는 사람이 과거에 5명이라면 이제는 2명으로 족하다. 그만큼 장비가 발달하면 할수록 인원은 축소되고, 생산물량은 증대된다. 그렇다면 이래 생산 된 상품이 누적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가? 자본의 융통에서 자본을 투자하면 거기에 대한 자본이 회수되어야 한다. 문제는 생산과 소비가 일치되어야 하는데, 생산은 계속 지속되나 소비가 지출되지 않으면 상품은 재고물량으로 남게 되어 결국 업체는 자본의 압박으로 도산하게 된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 노출된 업체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같은 작은 업체이며, 이런 업체들은 대기업처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재력이나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이다. 사실상 한국에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인원이 많을까? 대기업이라도 그 회사의 정규직으로 하청이나 비정규직을 제외한다는 조건을 내세운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계적인 문제로 고민을 안고 있을까? 국내 경제적 민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거의 근대화 내지 산업화가 가진 경제적 체계인 시대는 주요 경제적인 전략이 해외수출이었다.

 

해외수출로 외화를 모우고, 외화유치로 통한 자재구입, 산업시설 유치가 주된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시장규모가 해외가 아니라 국내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이미 무역을 하는 세계시장에서 어느 나라에서 어느 상품이 나오고, 그것이 어디로 수출되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게다가 전에는 국내에서 생산했다면, 이제는 해외에서 공장을 설립하여 직접 당사자에게 판매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재화와 상품은 해외만 사업대상지로 볼 것인가? 아니다. 결국 해외에 간 기업도 국내에 모태가 되는 계열사로서 활동하는 것이고, 국내기업이 상주하지 않으면 한국기업이란 의미가 없다. 국내에 시장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야지 재고를 조정할 수 있으며, 상품적인 요소를 더 새롭게 변모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국내시장이 계속 위축되어 결국 과소소비로 이어지고, 과소소비가 시장에 큰 타격을 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 이런 문제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큰 적은 스탈린에 의해 조작된 공산주의 내지 봉건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로 귀결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상품이 만들어져서 판매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상품이 팔리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다고 모든 것이 팔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생필품들은 어떻게든 삶에서 제외할 수 없는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지만 많은 기업들은 생필품들만 파는 것은 아니다.

 

그 외의 상품이 나와 팔리지 않는다면 산업이 발전할 수 없으며, 산업이 결국 문화적인 요건도 담당하므로 문화적 콘텐츠 역시 축소된다. 물질적인 토대로 생활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곧 국민생활이 어렵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국가경쟁력까지 저하된다. 국가경쟁력 저하로 소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국가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간접세가 줄어들고, 그 보충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는 악수를 두고, 그것은 국가부채의 증가와 더불어 그 빚을 갚는 것은 국민이 되는 것이다. 악순환의 연속적 고리는 끊이지 않게 되고, 결국 국민생활 수준 하락, 인구감소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오늘날 한국은 이런 문제에 직면했고, 아이들의 수가 줄어들고, 거기에 따른 산업들이 위축된다.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결국 시장규모가 축소하고,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상품을 더 이상 판매할 수 조건이 되지 못하는 셈이다. 이런 문제를 누가 만들었는가?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 붕괴에서 마르크스의 실험은 실패했다고 하나, 처음부터 마르크스의 실험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사상적 체계와 학문적 연결성을 우린 너무 늦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문제를 기존 경제학의 입장에서 도저히 문제가 되는 실마리조차 풀 수 없다. “그래도 자본주의는 옳다”라고 말하는 현실도피이상자의 헛소리만 나올 뿐이다.

 

문제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은 그 문제로 인해 누군가 이익을 보았고, 그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또한 그런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만든 도서다. 19세기 유럽에 불어 닥친 대공황은 유럽은 큰 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희생되었다. 그 문제를 만든 것은 희생된 자들과 전혀 무관했다.

 

그 문제를 바로 찾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나, 그 문제의 근본을 알면 추후에 다른 방도가 떠오른다는 점이고, 그 원인을 찾아 더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상황이 발생되면 심하면 심했지, 그 이상 호전될 기미는 없다.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읽는 것은 마르크스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성한 <자본>이 어떤 도서인지 그것을 어떻게 읽으면 좋은지에 대해 아주 친절한 방법을 안내하는 책자이다. 처음 자본 Ⅰ~Ⅲ까지 읽는 것은 3,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어려운 책을 무작정 도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본>을 읽으면 단순히 경제학만 거론되는 게 아니다. 문학과 철학, 각종 인문학적 지식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자본>을 읽는 것은 경제학을 단순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인류의 오랜 정수가 담긴 인문학을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무단히 접근하는 순간 큰 산과 깊은 바다를 만나 쩔쩔 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추천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연유다. 과거 강신준 교수의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보다 더 자세하고 이해하기 좋게 만든 도서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나라의 자칭 진보라고 말하는 분들이 한 번 다시 고민할 것들이 있다.

 

과거 경희대학교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읽다보면 자칭 좌파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문제점을 거론한다. 그것은 술집과 카페에서 잡담을 나누기만 하는 좌파에 대해서다. 기본적으로 좌파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루소가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저술할 때도 그렇고, 마르크스가 <자본>을 집필할 때도 그렇다. 근본적 원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 결국 결과에 대한 가십거리만 늘어놓는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지식인에 대한 조롱으로서 표현하자는 좌우도 아닌 좌우라는 존재들의 한계는 결국 자신들의 행위에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말할 수 있다면, 그 뒤에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고,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계속 종알거리기만 할 것이다. 강신준 교수가 가장 중요한 말은 변증법이다. 변증법에서 현실적 토대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 현실적 토대로서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것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으로 실패한 이유는 바로 그 토대에 의한 것이다. 삼부회 조직 이후 왕정을 무너뜨려도 가난은 해결되지 않았고, 시민혁명이라고 해도 그들은 시민이 아니라 그저 군중에 불과했다.

 

이런 현상을 보듯이 무작정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해도 그것을 통째로 뒤집는다고 해도 결국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인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그 이후 1799년 브뤼메르18일 같은 일들은 생길 수밖에 없다. 현실적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변증법적으로 거쳐 서서히 고쳐가는 것이 옳은 것이다. 혁명은 모든 것을 뒤집어도 결국 다시 돌아오는 이유가 바로 그 토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부의 혁명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판단의 혁명이 사실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다고 국가와 사회를 부정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부정적인 요소를 토대로 조금씩 개선해 가는 것이다. 변증법적인 시대에서 희생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희생이 싫다면 더 큰 희생이 다가오고, 그보다 더 큰 희생을 우리의 미래들이 짊어가는 일들이 생긴다.

 

역사란 늘 과거의 흔적을 기록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제 아무리 개별적인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에서는 항상 뭔가 일정한 규칙과 형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새로운 인물이 나올 뿐이지, 인간이란 근본적인 본질이 크게 비켜나가지 않는 점을 각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서부터 인지하여 <자본>을 읽는다면 당장은 아니나 조금씩 변해갈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긴다. 무조건 단결과 투쟁을 외쳐도 결론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고, 문제의 골만 깊어가고,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와 고통 그리고 희생이 뒤따른다. 그것은 비록 남의 일이고, TV에서 보이는 하나의 Show라고 여겨도 언젠가 당신이나 혹은 당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마치 점쟁이가 “당신은 아주 위험한 일이 닥칠 겁니다.”라는 엉뚱한 미래주의 같은 게 아니라 현실 사회구조로서 통해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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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투 2016-02-24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본을 읽지 않고 생태를 말하고, 자본을 빠뜨리고 진보를 말하는 것은 우물도 없는 사막 상태에서, 가마솥도 만들지 않는 살림살이에서 숭늉을 복제하려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에 산다면 마땅히 자본론을 읽어야 한다!
 
유행의 시대 -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윤태준 옮김 / 오월의봄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유행의 시대>를 읽어보면서 거론하던 서적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였다. 원래 부르디외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석학이다. 부르디외는 본래 도시가 아닌 시골출신이었으나, 우수한 능력으로 프랑스 명문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입학하던 대학교에서 그를 대하는 학생들은 냉소적이었다. 부르디외는 시골출신이고, 그들은 도시사람이란 점이다. 결국 인간의 사회적 생활에서 가지고 있는 삶의 흔적 내지 축척된 인생의 보이지 않은 재산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구별짓기>는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로서 더 확장해본다면 좋은 도서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살아온 공간이란 문화적인 공간에서 터득한 삶의 축척이고, 그 축적된 것은 그 사람의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게 해주고, 앞으로 그가 살아갈 인생을 결정되게 만들어준다. 쉽고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그런 인간이 가진 삶의 흔적이 문화적 취향과 취미로서 나타나고, 그것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자본이란 매체가 화폐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를 넘어 하나의 생활양식이라는 문화적 요건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문화자본이라고 불리는 이 생활양식의 축척들은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그의 지위와 위치를 보여주며, 단순히 경제적인 요소를 지나 직업과 사회적 입지까지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반적으로 미디어로 통해 문화생활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문화생활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 내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제기한 문화산업처럼 육체적 노동이 끝난 후에 집에서 다시 정신적 심리적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라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인 입장이 반영된 매체이므로, 미디어가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은 단순히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으로 통해 누군가 이익을 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중문화라는 것은 결국 군중을 위한 문화 아니 군중들이 즐기도록 만든 문화다.

 

같은 사고방식과 같은 가치관을 조성하고, 여기에 대한 미디어적인 요소에 권력을 가진 자들이 방송이나 정보로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입장을 넣을 수 있다. 이런 요소는 현재 우리나라의 미디어 방송 상황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고, 현재도 그 폐단은 심각하다. 그렇다면 대중문화가 존재한다면 대중문화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가 있다. 그것은 곧 고급문화 내지 하위문화, 반문화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하위문화와 같은 것은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혐오하거나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며, 반문화는 사회적으로 문란한 것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많다. 대중문화의 현실적 비판에서 대중문화는 인간에게 다양한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파괴하고, 획일화를 바라며, 대중들이 미디어에 길들여져서 자신들의 의지로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흔하게 이런 말을 한다. “TV는 바보상자이고, TV를 보기만 하면 공부가 안 된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바보상자와 정신적 박약한 것은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이다. 왜 아이들은 안 되고, 자신들은 된다고 생각하는가? 공부하는 것은 결국 학교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교육과정의 일환만 생각하지 인생 그 자체에 대한 공부와 학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 역시 미디어의 영향이다. 바보상자를 영향 받는 자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바보가 되지 말자는 이야기만큼 아이러니가 없다.

 

이에 반해 고급문화 같은 경우 무엇인가? 전에 미혼여성이 선호하는 남성의 취미가 바로 승마 내지 요트 같은 게 나왔다. 승마나 요트 같은 취미를 하려면 상당한 경제력이 받쳐주어야 하며, 그런 재력을 가진 남성을 여성이 원하고 있다. 남성은 돈, 그 돈을 가진 남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여성은 섹스, 결국 섹스와 돈이라는 공식이 형성된다. 문화자본 중에 하나인 취미나 취향이 결국 상대방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까지 연계되는 점이다. 적은 경제력으로 큰 효율을 볼 수 있는 독서 같은 취미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결국 지적인 사색이나 연구보다는 오로지 물질적인 욕망만이 문화적인 인간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인간의 문화생활에서 문화라는 것은 이제 우리가 생산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가령 1차 산업이 중심이던 농업과 손으로 만드는 가내수공업을 하지 않은 이상 우리 대부분은 소비의 사회에서 삶을 영위한다. 우리의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술가들처럼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지 않은 이상, 소비에 의해 문화를 즐길 수밖에 없다. 결국 문화의 소비는 자본의 소비이고, 그 소비의 문화로서 사회적 가치를 매기는 것은 소비의 대상이 무엇이냐? 것이다. 왜 취미생활이 승마나 요트를 원하는 여성들이나 또는 그들이 원하는 가방은 왜 집착하는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누구와 동일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은 욕망도 있으면서도 다른 누군가보다 특별해지기를 바라는 갈등이 존재한다. 그런 갈등과 욕망은 유행이란 단어를 생성시키고, 다른 누군가보다 조금 특별하면서도 누군가와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려고 한다. 문제는 자신이 그 동질감을 느끼려는 사람보단 자신의 모습을 남들이 따라오게 유도하다가 어느 순간 그 모습에서 탈피한다. TV에서 가장 문제되는 요소 중에 하나가 바로 저런 유행이란 것으로 통한 상품 또는 사회적 현상이다. 마치 이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존재로 낙인찍히게 만들거나 또는 사회적 현상이란 조류를 타지 않으면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기 힘들게 만드는 점이다.

 

가령 나 같이 TV를 일체 감상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런 갈등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조류와 상품구매에 눈이 멀게 될 경우 처음에는 그것에 따라잡기 위해 어떻게든 사람들은 몸부림치겠지만, 자신들의 능력에 한계가 오는 순간 그것을 따라잡지 못한 채 도태되고 만다. 유행이란 것에 대해 내가 논하면 정말 고급문화는 다른 문화이지만, 고급문화가 아닌 상품이 고급문화로 둔갑한 문화적 현상이라 생각한다. 가방, 시계, 신발, 의상 등과 같이 고정적인 성향이 적은 물품들이 그러하다. 자동차의 경우 1년에 1번 이상 바꾸는 일이 흔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한 집은 고정적인 존재이기에 더 그렇다.

 

유동적인 물품일수록 유행의 흐름을 타고, 사람들의 정신을 거기에 몰두하게 한다. 문화적 유행은 상품을 팔기 위한 하나의 미디어적인 현상이며, 그 문화적 현상에 몰두하는 사람일수록 가장 스펙타클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그렇듯이 문화라는 것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억지로 조장되기도 하나, 이와는 다르게 다른 집단과는 다르게 우월의식 내지 정의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부르디외의 학창시절 일화처럼 시골출신 학생은 도시학생에 비해 소외되고, 모두들로부터 무시당한다.

 

그 무시를 당하면 당할수록 시골학생의 소외감과 불합리적인 처우는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나, 그 모습을 보고 안도하거나 우월감에 취한 사람들은 서로 단합을 느낀다. 문화적인 구별로서 문화의 벽과 차이로서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보거나 또는 자신의 이익에 전혀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익이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 무의식적인 거부의식은 문화적인 요건으로서 차별한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에서 문화는 경제적, 환경적, 생태적으로 형성된다고 한다. 즉 인간의 문화형성에서 단순히 사회적 현상보다는 그 이면에 경제적, 환경적, 생태적 조건이란 것이 상부구조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상부구조인 문화가 하위구조에 영향을 받는 점에서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불평등을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부르디외의 경우 후천적인 불평등이고, 최근에는 후천적인 불편등인 문화적 차별인 선천적인 요소가 근본이 되어 나타난다. 부르디외는 후천적인 조건이나 환경적인 조건이 뒤따라오므로, 인간의 불평등은 결국 겉으로 보이는 문화자본 뿐만 아니라 경제력과 인종, 민족 등과 같은 선천적 요소가 아주 복잡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이런 불편한 사회적 현상을 왜 일어나는가? 아니라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드는가? 이른바 진짜 고급문화를 즐기는 부류에 의해 일어난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자신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적 생활을 위한 경제적 조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조건들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로 하여금 계속 대립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 이런 문구가 있다.

 

「리처드 로티는 현대에 이 유서 깊은 전략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클리포드 이어츠의 표현으로) ‘중층기술’을 제시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목표이다. 미국인의 하위 75%와 전 세계 인구의 하위 95%가 민족, 종교적 적개심, 성적인 관습에 관한 논쟁으로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것이다. 가끔 일어나는 짧은 유열 전쟁을 포함하여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의사사건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주의를 자신들의 절망에서 다른 곳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은 별로 두려울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과연 정의로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자신의 생각이 옳고 정당한 것만을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신의 윤리적 가치로서 철학적 사고로 비판을 하기보단 그저 자신들과 같은 연대적 단체들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의 이용은 효율적이다. 왜냐하면 일방적인 정보에 유출되어 거기에 매달리는 대중들은 그 이상의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정말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그 판단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이런 문화적 집단의식은 공동체 조직들에서 자주 보이며, 이런 조직들은 때때로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대상은 자신들이 배제하고픈 대상으로 하여금 배타적 행위를 보여준다. 그 배타적 행위에 대해 그들은 잘못된 행동이기보단 자신들의 정의와 가치로서 행동한다고 여긴다. 그런 행동을 부추이게 하는 상황은 그들의 의지보단 조장된 정보와 상황이다. 많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한 심리를 자극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강박관념에 벗어나게 하면서 폭력적인 인간으로 만들어낸다. <유행의 시대>에서 이런 말이 등장한다.

 

「가장 강한 의미의 공동체는 사실 자신들의 집단적인 존재의 기본 전제를 찾아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로부터 저항력과 권한을 가졌다는 강한 느낌을 제공하는 동질감 있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될 가능성이 크다. 겉으로는 보기에 그들 자신을 찾는 사회적 관계를 통계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세상을 자신들의 공동체 크기로 줄여 버리고 그것을 기초로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그것은 대부분 강박적인 애국심을 만일의 사태에 대항하거나 포용하는 수단으로 삼는 결과를 낳는다.」

 

문화의 차이에서 결국 누군가는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박탈감을 느낀다면, 결국 그 박탈감을 대체할 존재들이 소외된 자 내지 이방인들이다. 그들의 외적인 요소가 결국 문화적인 이질감을 형성하고, 다문화주의라는 겉치레적인 문화현상에 맛이 들여 상대방의 문화가 그대로 그 문화로 남아주어 자신들의 문화영역에 침범되지 않도록 경계한다. 만약 자신들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과격한 폭력과 응징이 시도된다. 가령 과거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여성을 그냥 봤다는 이유로 심하게 린치당하는 일들이 벌여진 것처럼 인간의 문화는 사회적인 요소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여줄 뿐이란 점이다.

 

이런 일들은 계속하여 인간 스스로를 구별하고 차별하고 투쟁하도록 하여 정작 사회적 모순과 문제점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고급문화를 즐기면서 대중들의 투쟁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지킬 수 있는 방도는 서로 적을 만들어 싸우게 하여 각자의 정의라는 것이 있다고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적인 요소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세계가 사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세계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낭비가 심하고 겉치레가 심한 예술은 많은 농민과 도시사람들 굶주리게 하는데, 그 고통이 가중되는 원인은 누군가 그 재원을 착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술의 가치를 두고 미학적 가치보단 단지 자기 과시용 내지 지위의 상징으로 만들어진다면 그 사회는 이미 병폐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고급문화는 진정한 고급적인 미적 기준보다는 고급적인 상품적 가치로부터 나온다. 이미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한참 지나가는 시대에 예술이란 어느 일정한 선에 지향하기보단 그 선에서 비켜가는 것을 예술적으로 가치를 매긴다. 그것은 우리가 이때가지 느끼지 못했거나 생각하지 못한 것을 환기시켜주는 것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단순히 가격으로서 상품적인 가치만 올려놓은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 그저 권력을 소유하는 이들의 자만심에 가까울 것이다.

 

<유행의 시대>를 읽으면서 유행과 대중문화보단, 유행의 문화는 그저 목차 중에 하나일 뿐이고, 실제는 다문화주의와 문화우월주의에 따른 폭력적 현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동적이지 못한 것이 오히려 그 사회가 불안하다는 점이다. 사회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자유로운 사회가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적인 가치관이 정립된 사회는 조용한 일상이 아니라 늘 시끄러운 일들이 발발한다. 그것은 그 사회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나기에 그것을 확인함에 따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와 문화현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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