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옮김 / 문파랑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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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변증법을 다룬 내용이 기억난다. 양이 일정량에 도달하면 질로 변화하는 것을 말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유물론적으로 사회적 현상을 하나의 과학적인 연구로서 접근했다. 바로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하는 분야는 매우 크며, 사회과학은 보통 사람들에게 다소 마음속으로 꺼리는 말일 수 있으나 사회과학은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심리학, 지리학, 법학 등이 있다. 따라서 사회과학이란 단어는 결코 낯선 단어는 아니나, 마르크스의 <자본>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연구에 의해 사회과학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만큼 사회라는 인간이 모인 공간에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인 논리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말하고 있다. 물론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의 법칙도 나온다. 그런 요소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 바로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이다. 예전에 내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던 중, 공장법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가령 영국에서 하루에 노동자에게 권고하는 노동시간은 10시간이나, 사실 실제 노동시간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이고, 때에 따라서는 9시를 넘고, 더 심하면 그 다음날 아침까지 일을 할 때도 있다. 그러니깐 아침 7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일하는 경우도 있다는 의미다.

 

사람이 하루 노동시간을 두고 말할 때 과연 어느 정도로 하는 것이 좋을까? 참고로 이 소설의 토대가 실제 일본에서 있었던 하쿠아이호를 소재로 했다고 한다. 게공선이란 이름처럼 게를 잡아 가공하는 이 선박은 해양관련법규나 또는 공장관련법규에 전혀 저촉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2가지 법에 해당되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중간으로 빠져 나갔다. 이런 문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은 법에 의한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과 이들이 근무하는 장소가 육지가 아닌 바다라는 점이다. 바다에서 근무하게 되면 교통수단의 문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누가 어쩌다 죽게 되어도 그저 사고사로 위장하면 그만인 것이다.

 

문제는 사고사 내지 의문의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멈추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게공선>처럼 어류를 잡는 선원이 아닌 화물을 나르는 선원이다. 하루 노동시간이 12시간을 넘을 경우도 있고, 선박이 워낙 노후 되어 가스배관에서 연기가 새어나와 일과를 마치고 나서 정리할 쯤에 세수하다보면 코에는 그을음이 생기고, 목은 가래로 가득하다. 게다가 악독한 노동환경으로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고, 온 몸에는 상처와 화상이 가득하다. 이것이 내가 본 우리나라 노동자 1명에 대한 시선이다.

 

그만큼 선박에 타고 있는 노동자, 선원들은 매우 가혹한 환경에서 일을 한다. 허먼 멜빌이 만든 소설 <모비딕>을 보면 알겠지만, 배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서 버림 받거나 또는 갈 곳이 없어서 몰려든 사람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처럼 비참함을 계속 이어가는 사람들인 셈이다. 그리고 심한 노동 뒤에 아무리 대가가 온다고 해도 과중한 노동에 의한 육체적 손상, 기계적인 일상과 비인간적 대우는 인간의 가치관을 긍정적이지 못하게 바꾼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하나 그것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부조리를 지지하지 않지만, 그런 세상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모습은 솔직히 말하자면 안타까울 분이다.

 

그런 점에서 <게공선>에서 보인 일본 게 낚시 선원들은 비참함을 넘어 죽음과 마주보고 있다. 선박의 환경은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고 바닥은 언제나 악취로 가득하며, 감독이란 자는 고용주에게 직접 고용되었다는 것만 믿고 횡포를 부린다. 제일 기억나는 장면은 파도가 일어나는데 그 모습이 마치 흰색의 토끼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다는 언제나 위험으로 가득하고, 특히 기상조건은 재해사고로 이어진다. 폭풍이 불어오면 배는 육지 근처에 정박하거나 혹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하나 감독인 아사카와는 무리하게 배를 움직인다. 그리고 게공선에 달린 통통배를 보내어 그 배들이 폭풍에 휘말려도 배 안의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 대신 배들이 없어지는 것이 더 큰 걱정이었다.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로 취급당하며, 그것도 고정적인 기계가 아니라 그 기계의 베어링 내지 벨트로 취급당하면 매우 심각해진다. 만약 당신이 자동차를 타고 운전하고 있다면 차 그 자체는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차 안의 타이어나 와이퍼는 쉽게 바꾸고 버릴 수 있다. 그런 자동차의 부품처럼 인간이 동원된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끔찍한가? 그런 상황에서 계속 인간은 참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받고, 증오를 품을 것이다. 그 고통과 증오가 일정 라인을 돌파할 경우 인간은 자신의 인내력을 잃어버린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말하던 질과 양의 교환법칙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몰리면 성향이 바뀌기 시작한다. 단지 그 바뀌는 순간까지 관성의 법칙이라는 습성으로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계속 비관하면서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고착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상황이 바뀌게 되며, 그 상황은 다른 상황과 전재로 이어진다. <게공선>에서 잔혹한 노동착취로 한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장례식조차 제대로 진행시켜주지 않은 아사카와에 대한 분노가 결국 선박 내부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아사카와가 해군전투함에 신고하여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두 번째는 파업이 성공하여 배가 다시 항구로 돌아오자, 파업을 하던 선원은 경찰서에 수감 후 풀려났으나, 아사카와와 그의 일당들은 돈 한 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쫓겨난다. 결국 권력의 앞자리가 된 자 역시 그 상황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버림 받는 것이다. 이런 소설을 보면서 권력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는 권력에 충성하여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 문제는 권력을 가진 자는 소수이고, 권력을 찾으러 오는 자들은 많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찾으러 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그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 가는 실처럼 이어진 권력의 끄나풀을 잡기 위해 달려들고, 결국에는 버림을 받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래도 계속 인간들은 달려든다. 아니 오히려 그 끄나풀이 잘리면 그것을 대신할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려고 경쟁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사회는 아사카와 같은 인간들이 넘치는 것이 아닌가 했다. 권력에 아부하여 자신보다 불리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을 말이다. 작가인 코바야시 다키지는 일본인으로서 일본 노동자의 현실만 고발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에 의해 고통 받는 대만과 한국도 같이 거론했다. 특히 조선인들이 겪는 고통이 매우 심하다고 기술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동포인 일본인 중에서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일본은 전쟁을 멈추고, 다른 민족을 자유로이 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자본과 권력이 결탁하여 노동자를 착취하는 이데올로그가 결국 국가라는 이름에 의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게공선> 내에서 처음 일본군함을 보던 선원들은 모두 환호성을 외치나, 처음 아사카와 감독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을 때 일본군함에서는 무장한 일본수병을 보트로 태워 보내 파업을 주도한 9인을 체포하였다.

 

결국 군함이란 국가라는 권력은 약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게공선의 사장인 국회의원에게 협조한 것이다. 게공선의 선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훗카이도 위의 소비에트연방 국경으로 향하고, 일본군함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국경으로 향한다. 게공선과 같이 동행한 이유는 선박보호 차원도 있지만, 해양측량 및 기상관찰이란 명목으로 첩보를 펼친다. 결국 군함이 보호하는 것은 게공선의 선원이 아니라 게공선의 게가 든 통조림인 셈이다. 초반에 하쓰코호가 근처에 있던 다른 게공선이 선박이 너무 노후 되어 침몰하자, 하쓰코호에게 구조요청을 보내지만 아사카와 감독은 반대한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악마 따위나 하는 말이 흘러나온다. “어이 도대체 이게 누구 배지. 회사가 돈 내고 빌린 배잖아. 뭐라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회사대표 스다님과 여기 있는 나뿐이야. 당신, 선장이라고 잘난 척을 하는데, 그 까짓 건 똥간 종이만도 못해. 알기나 해. 그런 일에 상관하지 마. 일주일을 허비할 수 있어. 하루라도 늦기만 해봐. 게다가 지치부호는 과분할 정도로 큰 보험에 들어 있어. 다 낡은 배야. 가라앉으면 오히려 이익이야.”

 

생각하면 아사카와 감독이 타던 배도 매우 오래되어 언제 침몰 되도 이상하지 않은 배인데도 그런 말을 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되는지 상관 없다와 오히려 그런 일로 보상금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왠지 요새 우리 사회를 보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란 착각에 빠진 게 우리 사회의 모순처럼 아사카와 같은 인간은 국가와 기업에 충성심에 빠져 그것을 망각한다. 물론 소실이지만 치지부호라는 게공선은 SOS가 닿지 않은 채 배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죽었다.

 

왠지 이 모습을 보면 2014년 대한민국 최고의 악몽인 세월호 사건이 생각난다. 아마 선장이나 선주 그리고 정부기관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에 무책임하게 도망치는 것을 말이다. 물론 선장과 선원들은 아사카와의 말로처럼 비참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게공선의 하쓰코호를 만든 자들은 아직도 근엄하게 큰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에 억눌린 자들은 매일 힘들게 일을 하나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늘 병마에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타락한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고통과 착취가 가해지면,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시킨다. 즉 피해자가 가해자로 되는 일들이 생긴다. 이런 모순적 구조를 바꾸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서 <게공선>에선 연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폭력적 방법으로 되어서도 안 되고, 그 자체도 불가능하다. 결국 작은 변화를 꾸준히 모아 해결갈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상징하는 인물로 의사가 있는데, 그는 아마 인도주의적인 자일 것이나, 결국에 현실의 모순을 바꿀 수 없었다. 당시 현실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법학자, 의사, 언론인 등과 같은 엘리트 들이었다. 하지만 상류계급에 속하는 이들의 인도주의는 번역가의 지적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동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인도주의자조차도 참 드물지 않나 싶다. 아직까지 인간이 대체될 수 있는 도구로 생각하는 자들은 많다. 하지만 그 도구가 없다면 사회조차 원활히 돌아가지 않는다. 재생산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이른바 88만원 세대에서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이길 수 있을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변증법이란 질과 양의 관계처럼 단순히 한 번에 모든 것을 뒤집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바꾸어 가는 길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알아야겠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거나 혹은 거부하는 것에 대해 그것은 개인의 자유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확신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몇 %일까? 매년 자살로 또는 산업재해로 또는 혼자 외로이 죽는 사람들이 꾸준히 나오는 현실에서 <게공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던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처럼 우리는 자신의 시라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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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 2014-07-23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배우의 출연작 중에 [게어선]이란 영화가 있어서 메모해 두고 있었는데 읽어보니 이 책이 그 원작이겠군요. 가능하면 책을 읽도록 해야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23 15:34   좋아요 0 | URL
게어선이면 딱 그렇군요

lmicah 2014-07-2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 인상파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작품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를 다룬 TV교양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이 책의 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호쿠사이의 작품에는 후지산이 등장하고 이 책의 표지에는 게공선이 등장하지요.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출간된 지 80년이 지난 책임에도 현실의 문제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책입니다. 리뷰도 기가 막히게 잘 쓰시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7-24 22:39   좋아요 0 | URL
호쿠사이의 그림이 저 책 표지로 사용하였지요. 리뷰는 다들 도움이 주시니깐 이렇게 적는 것이죠. 좋은 덧글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7-25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애비 님 직장을 어서 서울로 옮기시지요 !

만화애니비평 2014-07-25 08:19   좋아요 0 | URL
일자리가 없고, 집도 문제고!!..ㅠ.ㅠ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열린책들 세계문학 54
볼테르 지음, 이봉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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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머릿속은 21세기 사상이 아니라 18세기 사상이 박혀져 있다. 물론 시작은 20세기부터 시작이었으나, 그 종착지점은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가 등장하던 시대이다.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가? 리오 담로시의 <루소, 인간불평등발견자>라는 책이 있다. 루소 연구에서 아주 중요한 도서로 정평한 그 도서에서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삶과 더불어 그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조건 아래서 사상과 철학이 새롭게 등장한다. 물론 세상이 사상으로 연결되나, 다르게 보자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것처럼 세상이 사상을 만들기보단 사상이 세상을 만드는 것이 더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상이 도래한 것이 바로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도래와 더불어 18세기 말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이다. 따라서 내 머릿속의 사상이 18세기에 멈추어버린 이유도 다 18세기 사상이 아직도 유효하며, 심지어 21세기 철학의 선두주자라고 볼 수 있었던 자크 데리다 같은 사상가조차도 루소의 사상에서 많은 영감을 받고, 그의 사상을 새롭게 이어갔다. 20세기 최고의 인류학자 겸 사상가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역시 루소에 대해 큰 평가를 했다. 인간에 대한 연구에서 인류학의 최초 연구자가 루소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아무튼 20세기를 지나 21세기로 지나오면서도 루소의 사상은 끊임없이 이어간다.

 

그런 루소와 더불어 당대 계몽주의 사상가를 든다면 누구를 볼 수 있을까? 물론 루소는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도 반계몽주의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모순되는 행동에 대해 생각한다면 마치 광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천재는 본래 그 시대에 대해 엄청난 박해나 모욕에서 살아가야 할 경우가 많다. 그런 운명인가? 루소의 유해는 현재 프랑스 파리 판테옹 신전 안에 잠들고 있다. 루소의 무덤 건너편 주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볼테르가 잠들고 있다. 볼테르와 루소의 관계에서 사실 볼테르가 18세기 프랑스에서 차지한 비중이 더 컸다. 그의 계몽주의 사상이나 기발한 착상이 당대 최고의 문인이란 호칭이 내려졌다.

 

이에 반해 루소는 <사회계약론>과 <에밀>을 발표하고 나서 프랑스 정부를 비롯한 수많은 적들에게 도망치거나 놀림당해야 했다. 부유한 볼테르와 가난한 루소, 살아생전 볼테르는 계속 국가에 의해 압박을 받으나 그가 죽기 전에 환대받은 모습에서 루소와 사뭇 다른 모습으로 인생의 종지부를 마감했다. 그렇지만 볼테르가 루소와 같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루이16세가 자신의 목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가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와 내 왕국이 사라지는 것은 루소와 볼테르 때문이라고 말이다.

 

프랑스대혁명이 가지는 의미에서 루소와 볼테르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고, 게다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가 남긴 것은 비단 철학이나 사상뿐만 아니라 문학과 음악, 그리고 연극과 오페라 등 수많은 예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에 의해 우리 인류는 상당한 수준까지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발전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내 머릿속이 18세기 사상으로 가득하다고 하여 그것이 결코 시대착오적이지 않은 것은 알아주기를 바란다. 헌법이 정립된 것도 18세기이니 말이다.

 

그러지만 헌법의 정립과 더불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영광은 아쉽게도 볼테르가 아닌 루소가 이어졌다. 만약 당신이 1789년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을 조사하면 그 마지막 사진에 루소의 동상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의 소개에서 루소가 등장한 이유는 루소가 만든 <사회계약론>이 헌법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도서이고, 루소의 사상이 결국 18세기부터 시작하여 19세기 그리고 20세기까지 발발한 혁명의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20세기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던 러시아 10월 혁명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인 볼셰비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계몽주의자들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

 

국제노동자연합에서 만든 인터내셔널 노래가 페트로그라드에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라 마르세예즈까지 울려 퍼졌다. 참고로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의 국가이며, 1792년 마르세예에 외적에 대항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기념하며 만든 곡이다. 왜 볼셰비키혁명에 라 마르세예즈가 울려 퍼지는 것인가? 심지어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마라와 로베스피에르하고 같이 활동한 혁명가 당통의 연설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물론 혁명의 실패로 끝났지만, 계몽주의 사상은 아직도 우리나라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고, 그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든 계몽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영광은 루소에게 돌아가도 볼테르에게 크게 돌아가지 못했다. 리오 담로시의 <루소, 인간불평등발견자>에서 루소에 대해 로베스피에르,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아버지라고 칭한다. 심지어 니체가 말한 사상을 100년 이전에 주장한 사람 역시 루소다. 루소가 죽고 나서 그 명성이 올라갔으나, 살아생전에 볼테르가 훨씬 우세했다. 그런 점에서 볼테르는 모차르트라는 벽에 가려진 살리에르인가? 그런 점에서 볼테르가 프랑스 판테옹 신전에 잠들고 있었다고 해도 우리의 인식에서는 그렇게 친숙한 인물은 아니다.

 

그래도 그의 업적은 역시 프랑스대혁명의 위대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지식인이란 이름에 걸맞게 목숨을 걸고 다른 이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결과 죽은 자의 누명을 벗어내기도 하였다. 단지 그 역시 프라이드가 높은 지식인이었고, 그런 점에서 살아생전 루소와 보이지 않은 마찰을 일으켰다. 그런 볼테르의 불멸의 소설인 <캉디드>를 나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캉디드>란 소설을 예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내용은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캉디드>라는 제목처럼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볼테르가 지적하고 싶은 대로 캉디드라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멍청이로서 당대의 현실을 비판한다.

 

특히 라이프니츠라는 사상가에 대해 깊고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담고 있는데, 그런 이유는 바로 과학적인 사고와 주변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유령 같은 허울에 목매인 당대 사람들을 무비판성을 비판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잠시 사드 후자의 <소돔의 120일>을 생각했다. 사디스트의 말처럼 사드의 책을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 18세기 귀족과 살롱문화는 매우 음란하고 추잡했다는 점이다. 사드의 <소듬의 120일>에서 어린 소녀들은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관료들에게 성노리개가 되었고, 이제는 그 성노리개가 새로운 포주와 악당이 되기도 한다.

 

몸에 시체냄새가 날 듯 한 그들에게서 볼테르의 <캉디드>를 읽는 순간 딱하고 생각나는 것이 있다. 매독을 가진 퀴네공드의 하녀 파세트가 왜 매독이 걸렸는지 알아가는 순간 사드의 이야기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독의 원인이 수도승과 백작부인, 후작부인, 육군대위, 젊은 하인들이 서로 연결되어 구멍과 구멍을 채워주는 관계가 되자 그런 운명이 되었다. 그런 운명은 캉디드의 스승인 혼자만 똑똑한 철학자 팡글로스의 몸에 옮아져 갔다. 매독의 시발점은 수도승과 어린 소년의 관계였다. <소돔의 120>에서 어리고 예쁘게 생긴 미소년들은 동성연애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능욕 당한다. 그런 소년이 매독을 품고, 자신을 고용한 후작부인과 뒹굴고, 그 후작부인은 육군 대위와 음탕한 짓을 벌이고, 육군 대위는 늙은 백작부인에게로, 그리고 백작부인은 또 다른 고리를 가진 사람들과 관계하고, 최후에 젊은 미녀인 파세트에서 팡글로스에게 이어져갔다.

 

매독이 성병이란 말처럼 매독은 또한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선사한 선물이기도 하다. 또한 매독은 전쟁 중에 3만 군사 중에 2만이 걸렸으나,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서 보여주듯이 인류는 전쟁에서 총과 칼보단 균에 의해 더 많이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더러운 학살과 음모를 두고 영웅적인 행동으로 치부한다. 과연 캉디드의 세계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전해오는 이유는 그렇게 낯설지도 않을 듯하다. 캉디드의 운명은 바로 그런 바보 같은 사고방식에 매달린 현실로부터 시작했다.

 

캉디드는 퀴네공드의 아버지인 툰더텐트론크 남작의 여동생의 배에서 나온 사람이고, 남작의 여동생은 건너편 귀족 청년을 사랑했지만, 단지 자기 집안의 뿌리보다 1대가 낮아서 결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캉디드가 태어나고, 그는 어째보면 자신의 외사촌 누이를 사랑하게 된 셈이다. 이미 처음부터 근친상간이라니? 물론 사촌끼리 결혼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이 남작에게 마음에 들지 않아 캉디드는 운명의 방랑을 떠나게 된다. 그러면서 마주하는 다양한 사건과 인물, 그 속에서 죽거나 미쳐버린 사람들, 또한 기가 막힌 인연과 재회는 한 편의 거대한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었다.

 

볼테르가 칼로 찔려 죽일 수밖에 없던 자가 사랑하던 사람의 오빠고, 그가 추후에 노예선에서 만나 구해주었지만, 자신이 오랜 가문의 귀족이란 이유는 추녀로 변한 여동생과 결혼조차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이란 참으로 답답한 기분이다. 문제는 아직도 이런 답답한 모습은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퀴네공드의 운명은 그녀의 것이나, 옆에서 그것을 방해했고, 캉디드가 전혀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아닌데도 단지 남작집안의 명예 때문에 떼를 쓰는 퀴네공드의 오빠를 보며, 자신들이 정해진 운명에 끝까지 고집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는 주체임을 망각한다.

 

물론 운명의 선택적인 사항에 대해 사회적 조건이나 상황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캉디드가 남작 집에서 쫓겨나지 않았으면 불가리아군대에 강제로 징집될 일도 없었고, 리스본의 항구에서 지진을 만나는 것이나, 미치광이 종교재판에 끌려갈 이유도 없을 것이다. 자신과 아무 상관없이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면서 그 세상의 모든 것이 잘못되어도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캉디드처럼 현재까지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역시 캉디드처럼 무한한 낙관주의자일 터이다.

 

캉디드의 결말을 보면 캉디드는 진짜 아무 것도 없고, 단순하게 땅을 파고 열매를 수확하는 늙은 노인으로 통해 결론에 이른다. 열심히 자신이 노력하고 거기서 얻는 것이 최고라고 말이다. 땅에서 열심히 농사짓는 사람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여 오리려 전자가 행복하다고 말이다. 허황된 욕망에 의해 재력과 권력을 노린 자들은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가족과 친구까지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18세기 중반의 <캉디드>라면 가능할 것이다. 당시 사회는 전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고, 왕이 지배하는 전제군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에 부르주아인 볼테르가 왕정시대의 산업기반은 농업과 같은 1차 산업을 택한 이유는 당연한 처사다.

 

적어도 자신이 노력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볼테르가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어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 인근에 땅을 사서 볼테르만의 왕국에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캉디드가 농부로서 땀을 흘리며, 스스로 노력하며 선택하는 삶을 원했을 것이다. 캉디드는 계속 어리석게 남의 말만 듣고 사기당하고, 사기꾼의 속임수로 고생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이 되는 이유는 당시 봉건사회와 종교적인 이유가 크다. 봉건사회의 왕족과 귀족은 음탕한 짓을 좋아했고, 어느 유명한 귀족부인에게 여러 명의 애인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시대의 로코코 화가 그림을 보면 어느 귀족부인이 애인으로부터 볼에 키스를 받으나, 집안의 누군가 그 모습을 볼까나 두려워하는 모습이 나온다. 탐미주의적인 로코코가 음탕한 당시 프랑스사회라는 점에서 <캉디드> 역시 놓치지 않았다. 그런 점에 비해 성직자 역시 겉으로는 좋은 말만 하나 뒤에 가서는 여자를 능욕하고, 어린 남자들을 동성연애의 희생양으로 삼는 점에서 타락한 도덕관이 결국 사회를 병들게 했다. 하지만 도덕에 대한 수치심 대신 오히려 겉으로 친절하게 대하다가 뒤에 가서는 뒤통수를 날리는 모습에서 볼테르가 생각하던 당시 사회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이들이 오히려 타락하고, 그 타락함이 이미 모두가 알지만 겉으로 진리를 추구한다는 모습에서 정치와 종교의 무능한 부패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 이미 몰락의 수준에 온 것이다. 그래서 이미 결정된 것에 의해 아무런 의심을 해서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팡글로스의 이야기는 요새도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쉽게 증명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이란 가장 좋은 목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미 그 목적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미가 부여되었기에 그 자체로만 당연한 진리로 여기는 맹신적인 행위는 그 사회의 병폐로 이어지게 한다. 그 맹신에 대해 진리로 여기가 그 맹신에 대한 근본적 사유를 포기함으로서 죄를 지어도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 그 죄마저 하나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엉뚱함이란 결국 우리 인간 스스로 무지한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계몽주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스스로의 계몽을 찾아가야 하는 점이나, 그것이 쉽지 않으며, 오히려 계몽이라는 이름 아래 실천되는 교육은 도리어 새로운 이름의 억압으로 변질된다.

 

캉디드가 만나던 늘 새로운 사람들이 제기하는 진리와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도 정당한 부합성은 없지만, 없어도 있는 것처럼 된 점에서 캉디드의 낙관주의는 볼테르가 보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진짜 앞날을 위한 사유와 비판 없이 그저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이 그 자체가 목적의 시작이고 완료라는 점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캉디드는 그나마 억지로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으나. 우리 시대의 캉디드들은 남에게 폭력을 처음부터 휘두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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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앤드루스 지음, 서남희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솔직히 말하여 나는 이 책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란 없다. 코카콜라의 이사나, 대기업의 CEO나 또는 장군이나 방송국 프로듀서 등등 말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좋고, 교훈 있는 이야기는 좋다. 하지만 문학적 예술을 논하려면 결국 그로테스크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 좋은 놈이 좋은 놈으로 되려고 하려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악당이나 적이 있어야 한다. 윈스턴 처칠의 명언 중에 “뒤를 멀리 돌아보면 볼수록, 앞을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라는 것으로 이 책에서는 처칠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요소로 본다.

 

처칠을 대해 내가 아는 정도는 소위로 임관하여 전쟁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 큰 활약을 하여 나치 독일을 무찌른 철의 남자다. 하지만 그라고 하여 모든 게 완벽한 것은 아니다. 철저한 앵글로색슨족의 우월감에 빠진 남자였고, 그가 영국에서 벌인 정책 중에 인종차별 행위는 그야말로 경악할 수준이다. 강도가 외국인이란 이유로 그들이 있는 건물이 화재가 났는데도, 처칠은 오히려 그들을 불타 죽어도 마땅하다고 여겼다. 철저한 인종 차별주의자에 노동자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행동을 했다.

 

물론 어느 한 정치인에 대해 모든 것을 두고 판단할 수 없으나, 적어도 공과 사를 판단하려면 그에 대한 어느 정도 판단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작은 아람어를 새겨진 것이라고 하니 결국 아랍문화권이라고 보겠지만, 그것이 진짜 아랍에서 말하는 알라라는 신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본래 이스라엘의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모두 같은 땅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처음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그리고 사막이 배경이란 점에서 어느 민족인지 모르겠다.

 

단지 의상이 무어인들이 입는 것이 나오기에 아랍문화권이란 점만 가늠케 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단 1화에서 끝난다. 단지 죽은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아들만 남겨두고 말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 차라리 아들이 살아남아 어떤 과정을 지나쳐 20세기 미국에서 새로운 사건이 흘러가는지 보여주는 편이 더욱 개연성이 높게 보여주었다. 이 소설은 흔히 History라는 역사와 더불어 소설의 Fiction 개념을 반 정도 섞은 Faction을 추구하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은 20세기 미국에서 18세기 미국과 19세기 미국까지 이어진다.

 

내가 보이는 미국이란 국가가 어느 돌을 가진 인물에 의해 큰 영향을 끼쳤고, 그나마 다른 인물이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에서의 쉰들러가 유일하게 미국인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비중은 너무나도 약했다. 물론 인종이나 피부를 모든 것을 차별한 것만은 아니나, 흑인과학자의 이야기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고, 과학이란 학문이 관념적인 이론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을 넘어 물질적, 생물학적, 화학적 객관성이 토대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뉴턴이 왜 사과가 떨어지는가? 라는 질문에 그것은 지구의 중앙부에 위치한 핵과 맨틀이 가진 중력에 의해서라고 우리는 대답하겠지만, 그것이 모두 신의 뜻? 이란 대답은 농담도 아주 나쁜 농담이 될 뿐이다.

 

단지 과학자인 조지는 단순히 배부르게 해라, 존 애덤스는 자유롭게 하라, 또는 저명한 부자는 살아가게 하라, 식으로 이야기했을 뿐이다. 물론 내용은 인간의 자유, 평등, 박애라는 민주주의 이념에 부합되지만, 현실에서 분명 도움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지금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생각하자면 너무 심한 갭이 보인다. 세상을 위해 조국과 우리 민족을 위해 또는 타인을 위해서는 고귀하나, 너무 아름다운 행동에만 치중하기에 이 소설은 나비효과가 누구라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누구는 너무 알려진 인물이다. 이 소설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에서 정의한 것처럼 “시(詩)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명제와 어긋나 버렸다.

 

이미 미국의 대통령의 이름이 거론되고, 저명한 과학자, 실제 일어나던 사건까지 보여준 것만으로 모순에 대한 문제점을 알려주기보단 그 모순에 의해 생긴 문제로 새롭게 탄생한 영웅만을 다른 식으로 부각시킨 것뿐이다. 왜냐하면 아랍인이던 아버지가 존경을 받는다고 하나, 그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에 대해 전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의 행방에서 떠나온 운명처럼 어느 한 사람에게 다가가자, 그 돌을 가진 것만으로 어떤 고귀한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 돌은 어느 시대에 유명한 인물이 가지고 있었고, 그 돌을 가진 예전 주인은 매우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그 돌을 물려받은 후계자는 예전의 주인과 비교할 수 있는 업적을 남긴다.

 

어떻게 보면 돌의 가치를 알고 찾아낸 인물이 단지 운명과 같은 만남에서 영웅 같은 인물이 되었다는 설정은 겉으로는 모두가 대단한 인물이 될 수 있고, 어디선가 작은 행동이 큰 물결이 되어 나비의 날갯짓이 사이클론을 만들어낸다는 나비효과를 말하고 있다. 나비효과가 전혀 없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 확률은 너무 낮다는 점이다. 모르겠다. 전에 어느 섹시한 여자가수가 해고된 노동자를 위해 자신이 먼저 노란봉투에 월급을 대신 모금하자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차라리 나비효과라면 그것이 더 좋지 않을까?

 

잔 다르크가 신의 소녀라고 하여 많은 백성을 구했지만, 결론은 왕족과 귀족의 권력을 위한 도구로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잔 다르크를 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모든 승리의 열쇠가 되었을 때는 위대한 성녀지만, 전쟁 후에는 마녀로 취급당해 화형을 당했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잔 다르크의 역할을 나는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단지 그 전쟁에서 참전한 용사는 잔 다르크만이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잔 다르크의 용맹과 그 위상은 찬양할 만해도 그런다고 그녀만이 모든 것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부당하다.

 

앤디 앤드루스 <선택>은 바로 그런 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은 책이었다. 단지 알 수 없는 돌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는 것으로 그 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적 믿음으로 업적을 남기고, 대단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결과론적인 요소였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모든 인간에게 가져야할 정신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돌에 의해서라는 하나의 상징적 요소는 인간의 운명이 결국 보편적으로 다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으나, 그 돌을 마주하는 점에서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돌이 선택한 것으로 연계된다.

 

그렇다면 돌에 의해 연계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은? 굳이 그 돌이어야 하는가? 돌에 새겨진 가치는 보편적 인류애를 가진 도덕이다. 그 도덕에 은근히 미국의 독립정신을 말하고 있다. 미국독립정신은 나도 존중하나, 그 독립 이후로 보이던 노예문제, 작가는 노예문제에 대해서도 부당하고, 노예에 대한 문제를 변호한 인물도 등장인물로 나오게 한다. 심지어 조지라는 흑인이 어렸을 때 자신을 구해준 백인에 대해 일화를 보면 분명 그러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개인에 의해서 된다고 하지만, 개인이 밀집된 것은 사회이지, 사회가 개인 그 자체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역량과 노력이 사회를 바꾸나, 그 가능성이란 누구나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과 조건이 갖추어야 가능한 것이다.

 

왜 추천자들이 대부분 어느 기관의 높은 분들같이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인가? 차라리 저널리스트나 평론가 혹은 시민들이 그 의견을 내놓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단순히 영웅에 대한 업적이 돌과의 만남이란 자체가 너무 현실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만나야했던 운명일까? 개인에게 선택이란 주어진 것이고,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정치적 선택에 대해 생각한다면, 선택은 최선의 결과보다는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결정하는 최소한의 피해라고 본다. 좋은 선택 그 자체가 좋은 결과는 주는 것은 당연하나 그 모든 선택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선택에서 도덕적 관념이 중요하다. 그 관념은 그 사회에 순응하는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야 한다.

 

이래저래 포장되어 있지만, 자유의 국가를 만든 백인, 죽을 위기애 처한 흑인아이를 구해 그 아이가 후세 큰 업적을 만들도록 했던 백인, 20세기 위대한 경찰관인 마크로 이어진다. 이야기가 분리되어 있지만, 결론적으로 마크와 도리 부부가 돌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가면서 마크가 최연소 경찰서장이 되었다는 점이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결론은 마크가 어떻게 성장하여 어떤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상관없이 범인을 잡고 사라진 아이들을 찾은 것은 훌륭하나, 그것이 자신의 노력보단 돌의 계시라는 것은 마치 신의 계시가 이어져온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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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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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비 딕>을 읽는 순간, 나는 문득 내 뇌리에 새겨진 어느 밴드이름이 생각났다. 그룹이름은 Led Zeppelin, 즉 납으로 만든 비행선인 레드 제플린이다. 브리티쉬 하드락으로 불세출의 뮤지션으로 남은 살아있는 전설인 그 밴드를 말이다. 소설 <모비 딕>으로 말해보자면, 그 늙은이들의 흰머리는 마치 흰 머리를 가진 자 큰 고래가 마치 성난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그 성난 이빨의 엄니를 모든 색을 빨아들일 수 있는 괴물이지. 제 아무리 노아의 방주가 와도 그들을 데리고 타나토스의 궁전에 있는 하데스에게 찾아가, 하데스가 미소 짓는 저 표정마저 전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가브리엘의 전사지!

 

이런 말투를 사용했다면 어떠한가? 레드 제플린은 1970년대 브리티쉬 하드락으로 세계를 강타하고, 우리나라에는 1980년대를 강타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나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들이 내뿜는 사운드는 마치 향유고래가 숨구멍에서 뿜어 나오는 거친 분수와 같으리라! 그들의 머리를 새하얗게 물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는 새하얀 태양으로 변한다. 태양이 되어버린 그들의 광채, 마치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기에 귀로서 그들을 느낀다. 강렬한 기타 사운드와 투박하게 들리는 목소리, 터질 것 같은 드럼 소리, 뱃사람들을 파도로 데리고 갈 것 같은 사이렌의 소리를 담은 베이스, 이 모든 것이 레드 제플린일 것이다.

 

소설 <모비 딕>을 읽으면서 레드 제플린을 들어야 제 맛인 이유는 레드 제플린 2집에는 오로지 드러머 존 본햄을 위한 곡 <Moby dick>이 있다. 하지만 앨범이 아니라 이것은 인터넷으로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라이브 연주를 봐야 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죽어 세상에 육체조차 존재할 수 없을 드러머의 연주가 오직 영상 안에 살아있다. 인간은 육체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게 된다. 왜냐고? 저 미친 흰 고래인 모비 딕이 바다에서 난폭한 군주로 군림하기 때문이다. 모비 딕이 존재하는 한, 포경선을 탄 모험가는 죽음이 무섭다고 생각하지도 못한 채 죽어간다.

 

그래서 죽음으로 이끌어 내는 모비 딕을 찾기 위해 바다로 들어가는 피쿼드호처럼 이미 존재하지 않은 드러머의 소리를 듣기 위해 나도 모비 딕을 듣는다. 모비 딕을 듣는 순간 포경선이 노를 펼치면 거친 파도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바다에서 나의 적, 너의 적, 우리의 적 그 녀석을 만났어. 바로 그녀석인 모비 딕이야. 이 게으름뱅이들아! 어서 닻을 내리고 보트를 내리고, 그 망할 엉덩이를 나무 바닥에 붙여! 너희는 이제 인간이 아니라 보토 위에 있는 작살과 보트 노가 되어 그냥 저기로 가는 거야.

 

모비 딕이 큰 입을 벌리고, 우리 앞에 동굴처럼 만들고 있어. 녀석도 우리를 반기는 거야. 오늘 바다에 있는 붉은 색은 우리의 피지. 아니 성자, 성령, 성부께서도 내린다는 그 포도주가 지금 바다 위에 흘러가는 것이지. 아니면 어떠하니? 모비 딕의 입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아닌 신이 살고 있는 세계지. 제우스조차도 그 녀석에게 상대되지 않아! 왜냐고? 모비 딕이야말로 바다의 제왕이고, 포세이돈의 맞수이지! 그래 우리는 지금 바다의 왕을 죽이고, 바다의 신 제우스 형제의 맞수를 잡으러 가는 것이지.

 

하지만 레드 제플린의 모비 딕을 들어본다면 여전히 모비 딕의 싸움은 모비 딕의 일방적인 공격이다. 드러머의 거친 드럼 솔로는 마치 고래가 자신의 주변에 오는 배를 무참하게 박살내고, 숨구멍에서 분수가 튀어나와 마치 그 자리에 폭풍이 오는 것처럼 보여준다. 꼬리는 파초선처럼 강력한 바람과 바스티유를 노리는 대포처럼 모든 것을 가르고 가른다. 인간이든 나무든 아니라면 신이든 말이다. 육지와 바다를 비교하면 지구의 2/3이 바다로 이루어져있고, 세계의 물 대부분 거의라고 말할 수 있는 물이 바다에 있다. 심지어 우리 인간이 마실 수 있는 얼음덩어리가 극지방에 분포하여 바다 위의 빙산처럼 존재하지 않은가?

 

빙산은 하얀 향유고래 모비 딕의 성처럼 인간의 배를 박살낸다. 모비 딕은 바다를 누비며 배들을 박살낸다. 모비 딕은 과연 존 본햄의 드럼처럼 마지막에는 비명 크게 지르고 그냥 사라진다. <모비 딕>이 왜 3대 비극이 되어야 했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삼키는 고래 모비 딕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잡을 수 없는 고래, 작살을 아무리 던져도 마치 자신에게 영광의 훈장인양 달고 다니는 고래, 그러면서 최후에는 보트와 포경선까지 박살내어 버리는 고래!

 

<모비 딕>을 읽으면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가 싶다. 우리가 흔히 뱃사람이라고 불리는 거친 남자들은 왠지 다른 세계에 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인간 이하인 자들, 그 많은 인간이하인 자들이 모비 딕을 잡기 위해 피쿼드호에 탑승한다. 다양한 인간군상이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 주인공 이슈메일, 그는 평범한 뱃사람이나 고래의 아름다움에 반했는지 아니면 고래라는 죽음이 이끌려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식인종 왕자 퀴퀘그와 형제의 맹세를 나눈다.

 

피도 같지 않고, 피부와 머리 색, 심지어 옷차림까지 모두 다른 퀴퀘그, 용감한 전사의 아들로 태어난 퀴퀘그,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용사로서 제일 먼저 바다에서 위용을 떨친다. 마치 페르세우스가 바다에서 안드로메다를 구하기 위해 바다괴물을 죽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들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처럼 보이는 것은 괴물처럼 보이는 식인왕자 퀴퀘그일 것이다. 자신이 포획한 인간의 머리를 잘라내어 그것을 암시장에 파는 무법의 살인자를 말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위대한 용사다. 실사 그뿐이랴? 살인자에 의해 가족을 잃은 목수, 흑인 겁쟁이 소년 핍, 다리를 하나 잃어 16달러의 금화를 포상으로 준다는 에이해브 선장까지 말이다.

 

이들은 모두 세상에서 버린 받은 호모 사케르 같은 존재다. 오로지 자신들을 받아줄 곳은 저 넓은 바다에서 가장 강한 고래일 뿐이다. 그 강한 고래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 왜 고래로 그들로 적수를 왜 거대한 향유고래로 해야 하는가? 그들은 모두가 꺼리기에, 모두가 꺼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 추방되어 바다에서 고래를 잡는 사나이들, 그들은 모비 딕의 유령에 씌워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작가인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는 순간, 이 책은 마치 니체의 서적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 안에는 모든 진리를 깨기 위한 진리로 가득한가? 고래라는 동물은 상당히 위험하고 포악하며 무서운 동물이다. 지금의 포경산업에서 과학기술과 첨단무기로 무장한 배가 고래를 잡아 유유히 항구로 돌아오겠지만, 적어도 <모비 딕>의 포경선은 나무로 만든 배고, 그 배에는 고래와 키스를 나누는 것으로 공중제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바다로 간다.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그들이 있어야 할 공간은 무엇인가? 포경선은 한 번 나가면 1년이 아니라 3년이 기본이고, 그들이 먹는 음식은 육군 보병사단의 1달 식량만큼 많을 터이다. 그들의 배에는 풍족한 술과 고기로 가득하다. 그런 배에만 풍족함이 있기에 그들이 원래 있던 곳에는 풍족함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비참한 노래만이 흐른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처럼 비참함을 가진 도시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구로 모인다. 더 비참한 세계로 흘러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모비 딕>에서 모든 이야기는 허먼 멜빌이 만드나, 그 안의 선원들과 고래에 대한 노래는 마치 철학자의 노래와 같다.

 

인간의 비참한 세계, 자기만의 유령을 찾아 떠나는 미치광이 에이해브 선장, 어떻게 보면 비참한 인간들에겐 자신의 목표란 없다. 목표 없는 인간은 육체는 존재해도 정신은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망령이 될 자를 골라 바다로 이끌려간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경계에 있는 서로를 보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모비 딕>에서 보이는 인간의 존재란 거대한 자연 앞에서 끈질기게 투쟁하는 존재다. 처음부터 <모비 딕>은 인간을 자연 앞에서 나약하지만, 그 나약함을 버리고 싸우는 존재로 그린다. 그래도 최후의 승자는 자연이었다.

 

죽음의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진리로 갈 수 있다는 것처럼 고래이야기와 고래 뼈로 만든 모든 사물들은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문명의 탄생이고, 경건함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향유고래에서 나오는 기름과 향수들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며, 고래의 수염과 꼬리는 여자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이것이 모두 바다 최고의 폭군 고래에 의해서다. 그런 공간에서 죽음과 삶이 희비하기에 선원들이 내뱉는 말투는 욕도 아니고 때로는 농담도 아닌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때로는 절대적 관념을 추구하는 플라톤주의자들을 비웃듯 그들은 고래로서 그들을 비웃는다.

 

넓은 바다에 엄청난 덩치의 고래가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이다. 실제 신화에서 본 무서운 바다동물들은 고래인 것이고, 고래를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이 고래를 말하는 것만큼 웃기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모비 딕>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래에서 불처럼 뻗어 나오는 분수를 페티시즘에 걸린 환자처럼 집착한다. 에이해브 선장이 모비 딕에게 사로잡혔는지 아니면 모비 딕이 에이해브 선정에게 사로잡혔는지 서로 모른 채 계속 누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이 항해는 계속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원동력은 분명히 에로스라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에이해브 선장처럼 유령 같은 얼굴로 유령처럼 선실에 박혀 있다가, 악령에 붙잡힌 미치광이처럼 선실 밖으로 튀어나와 밤낮으로 비가와도 모비 딕을 찾아 나선다. 얼굴에는 분노로 일그러진 지옥의 사냥개처럼 죽음조차 가소롭게 여긴다. 죽음의 위기로부터 돌아온 그가 오히려 죽음의 세계에 있는 자연이란 거대한 세계에 몸을 던지는 이유는 인간은 에로스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히려 분노와 저주, 광란과 착란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한쪽 다리가 고래에게 먹혀, 이제는 외발이 선장처럼 돌아다니나, 그의 영혼에서는 한 쪽 발의 아픔은 여전히 자신의 영혼을 괴롭히며, 형이상학적 세계에서는 고래에 대한 악몽과 보복심리만이 춤을 춘다. 인간이란 삶의 원동력을 어디서 얻는 것일까? 희망조차 보이지 않은 이들에게 오히려 분노의 작살이야 말로 삶의 원동력인가? 작가 허먼 멜빌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처음 항구로 가서 심각한 불평등을 겪는다. 허무한 자신의 삶에서 에이브해 선장처럼 허먼 멜빌은 자신의 <모비 딕>을 어디에 정착하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따라서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는 것은 레드 제플린의 <모비 딕>을 듣고, 또 다시 모비 딕에 끌려가는 에이해브 선장을 만들고 같이 끌려가는 허먼 멜빌과 같은 것이다. 어디에 안주할 수 없는 운명의 방랑자, 그래서 어디에 안주할 수 없기에 절대적인 집착을 보여주고 있다. <모비 딕>을 읽은 고래에 대한 이야기, 에이브해 선장은 모비 딕에 대한 이야기만 나온다. 주인공인 이슈메일은 그런 자신의 눈으로 미쳐버린 선장이 오히려 인생종착지가 있는 피쿼드호에서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다. 인간이 아주 철저하게 냉정하고 판단적인 이유는 진심으로 그가 어디에 미쳐있거나 빠져있어야 가능하다. 그의 이성은 오로지 감성적 폭발로 인해 채워진 그릇일 테니 말이다.

 

모든 것을 잃어도 없어져도 결국은 다시 찾아가고 또 찾아간다. 이슈메일이 왜 추후에 모든 기록을 기록하는 지질학자가 되어야 할까? 레이첼호에서 잃어버린 고아 대신 이슈메일이 고아의 대체물이 되어버렸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 분노하여 몸을 날리는 피쿼드호의 선원들, 모비 딕이란 결국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존재다. 보이는 것은 분명하나 왠지 손에 닿을 수 없을 만큼 과격하고 위험한 존재다. 그러나 그것은 이슈메일과 그 동료들을 좀을 먹고 있는 존재이나, 이슈메일 일행들의 존재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존재 그 자체이다. 하지만 안타까울 이유는 없다. 이슈메일이 다른 동료와 헤어져도 새로운 이슈메일은 계속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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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4-08-06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만화애니비평님, 이렇게 귀 쟁쟁한 리뷰라니요. 먼 바다와 허먼 멜빌의 난동하는 문체를 리뷰로 다시 봅니다. 생각을 힘차게 끌어 긴 마침표를 찍는 것 또한 모비 딕의 이해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8-06 08:32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8-06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난 이거 아무래도 청소년용으로 읽은 거 같습니다. 스무살 무렵에 읽었는데 청소년용이라고 해도 엄청나게 두껍더라고요... 이 영화는 제 인생의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만화애니비평 2014-08-06 10:47   좋아요 0 | URL
어라 모비딕건으로 오늘 사람들이 덧글을 남기는데, 뭔가 떴나요? 곰발님 읽어보세요. 정신이 산란해집니다.
 
즐거운 살인 - 범죄소설의 사회사
에르네스트 만델 지음, 이동연 옮김 / 이후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즐거운 살인>이란 책을 소개받았을 때, 처음에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제목 자체가 소설과 같아 보여, 마치 살인이나 미스터리 혹은 탐정물에서 나올 것 같은 제목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순간 이 책은 단순히 소설로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문학적인 요소를 다루고 있지만, 단순히 문학에 대한 도서만은 아니었다. 차라리 사회학적인 요소로 통해 인류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경제와 더불어 범죄가 어떤 식으로 다루어졌고, 그 뒤에는 범죄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 추리 및 탐정소설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었는지도 보여주었다.

 

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만화의 기원을 대해 먼저 다루고 싶은데, 그 이유는 만화의 시초가 거의 당시 풍속에 대한 민중의 시선 내지 또는 풍자로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만화의 시초에서 당시 사회의 그림을 보면 특이한 것이 사형에 대한 장면이다. 사형 이전이나 사형 집행 순간 또는 사형이후의 모습이다. 사형에 대한 그림으로 내가 생각나는 것은 루이16세가 바스티유 광장에서 기요틴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는데, 그 루이16세의 목을 어떤 남성이 잡고 군중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수많은 귀족들이 목이 잘려 죽었으며, 인상 깊은 장면은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혁명 이후의 성난 민중들이 왕비의 지인이던 어느 귀족부인의 잘린 목을 창으로 꽂아 왕비에게 보여준 그림이다. 예술이란 것이 결국 당시 시대적인 흐름과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당시 그리는 사람들에겐 예술이란 관념이란 보단 하나의 재미 내지 기록에 가까웠을 것이다. 혹은 상징적인 의미로서 어느 대상을 그리는 것은 신성한 인물임을 부여하기 위해 예술작품이 태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대혁명 전에 로베스피에르가 삼부회 소집이후 입헌제를 여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라거나 또는 위에 언급한 루이16세의 처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비드라는 화가가 그린 테니스의 코트의 서약은 미술가가 미술로 그린 것이나 당시에는 기록에 가까운 그림이다. 그러나 지금에 보는 그 그림은 위대한 문화재일 것이다. 그렇듯이 당시 시대적 상황과 그 시대적 상황이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 문화나 제도, 그리고 우리 인간이 즐기는 문학이나 예술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학이나 예술운동에서 로코코에서 낭만주의,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기는 것 역시 시대에 따라 흘러가는 하나의 조류다. <즐거운 범죄>에서는 바로 그런 문학의 흐름에서도 범죄에 대한 문학에 대해 저자인 에르네스트 만델은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변증법적인 상황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문학이나 혹은 문화라는 것이 인간의 생활을 변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생활 그 자체가 문학이나 문화라는 것을 변모시키는지 다소 난해한 요소가 있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으로 본다면 문화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경제적, 환경적 조건에 따라 변한다.

 

이와 달리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현대 사회는 스펙타클, 즉 이미지가 매개된 사회에서 우리 인간의 생활은 이미지에 의해 즉 있지도 않은 가상적 존재에 의해 현실적으로 구성한다고 한다. 그러나 <즐거운 범죄>를 작가의 의도가 어떠한들 초반에는 문화유물론적으로 간다면 후반에는 스펙타클로 이어지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다. 그것은 이른바 자본주의 사회의 도입에 따라 자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대혁명 시대를 거론하는 이유는 당시는 자본주의 도래하던 시절로, 수많은 부르주아들이 제 아무리 능력과 자산이 있어도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봉건주의라는 모순 아래서 그들이 열어갈 수 있는 시대는 한계적이다.

 

또한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보면 맨 처음 루이15세를 암살하려던 하급관리관 다미엥의 일화처럼 다미엥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당시 봉건사회의 범죄자들은 범죄자로 취급당하기보단 오히려 민중의 대변자로 통하기도 했다. <즐거운 살인>에서 목록을 보면 영웅에서 악당으로 혹은 악당에서 영웅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말이 생각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인간은 개인에 결정에 의해 살아간다고 해도 결국에 인간은 그 사회의 거대한 조류에 부딪히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차이가 있지만, 그런 요소도 사회적인 조건에 부합되어야 움직이는 것이다.

 

범죄로 인해 교수형이 처해진 사람이 광장 앞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설파한다. 그는 왜 이런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며, 광장 앞의 많은 군중들은 그에 대해 어떤 때에는 조롱과 비난을 퍼붓기도 하나, 때로는 교수대를 탈취하여 범죄인을 구하기도 한다. 범죄인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단죄를 받아야 하겠지만, 그 범죄의 단죄보다 더 큰 범죄자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당시로서 분명 납득이 가는 상황일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계몽주의사상가의 지식에 의해 일어난다고 해도 그 힘의 원동력은 파리의 성난 군중이었다.

 

성난 군중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은 1789년, 1830년, 1848년, 1871년에도 이어진다. 혁명의 원동력이 일어난 것이 분명 계몽주의철학에 의해서인 것은 분명하나, 그 이전에 중요한 것은 민중의 생활에서 보인 비참함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보게 되면 절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식량을 구할 수 없기에 저지른 생계형 범죄이고, 그 대가는 아주 긴 교도소 수감과 수감 이후의 감시다. 감시의 대상은 일을 할 수 없고, 또 다시 범죄의 길로 빠진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을 보게 되면, 사드가 만든 이야기도 하나, 당시 권력층의 부패나 하층농민들의 생활을 다소 알 수 있듯이 누가 더 나쁜가에서 개인의 존재보단 오히려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범죄소설이 처음에는 개인적 원한이나 증오, 이익을 위한 하나의 개인적 영역이었다면, 시대가 흐르면서 범죄자라는 존재가 처음에는 단지 붙잡혀야 할 존재, 모든 소설의 시점은 탐정 내지 일부 영웅이다. 중요한 점은 작가가 잘 지적한 것처럼 탐정이나 주인공인 사람은 생계에 대한 부담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탐정업무나 추적하는 것은 평소 자신의 생활이 업무로 인해 자기 하루일과가 간섭받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범죄자는 처음에는 그런 대상을 피해 도주하겠지만, 결국 상황적으로 몰리게 된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경우 주인공의 시점은 자베르 경감을 비롯한 경찰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자인 장발장에게 부여된다. 장발장이 처해진 시점은 비참하고 억울하며, 도저히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세계이다. 장발장은 항상 세계에 대해 증오를 가지게 되나, 자신을 용서해준 신부에 의해 새로운 인생을 걷는다. 하지만 자베르 경감의 추적에서 결국 둘은 만나고, 장발장은 자베르를 헤치지 않고, 오히려 용서로서 그를 대해준다. 그래서 자베르는 자신이 믿은 법의 정의에 모순을 느껴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범죄라는 것이 왕정시대에는 개인의 이기심 내지 원한, 질투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면, 자본주의 시대로 오면서 범죄는 단순히 생계에 대해 이루이지고, 개인적 목적이 아니라 생계에 대한 문제이었기에 결국 범죄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인 조직성을 띠게 된다. 마피아의 구성에서 그들이 범죄자로 된 이유는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서였으나, 그 생계 부분이 해결되면서 거대한 범죄조직으로 형성된다. 당초 피난민 내지 외국군에 의해 억압당하던 원주민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생계를 꾸릴 수 없었기에 비정상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이런 대립구도는 계속 세력 확장으로 이어지고 결국 범죄조직은 자신의 생계가 아니라 조직의 이익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범죄라는 것이 개인적 영역에서 집단적으로 이어지면 그들은 처음에는 직접적인 수단으로 폭력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 간접적인 폭력으로 동원하게 된다. 미국이 밀주법을 시작할 무렵 범죄조직들은 밀주 내지 혹은 밀주가 어려울 경우 마약, 매춘 등에 손을 대었으나, 추후에는 합법적인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범죄조직이 공공사업, 건설사업, 식품산업 등 많은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방법은 제대로 된 방법이기보단 기존 시장체계에 들어오기 위해 로비를 벌이거나 로비가 통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가령 일본군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 중에 하나가 자국의 경제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헌병과 야쿠자가 결탁하여 조선인들의 상업을 고의로 방해한 점이다. 범죄조직이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등에 업을 때 심각한 폭력이 이제는 폭력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이런 방식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체계에 동원되고, 이제는 합법적인 기업도 범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나온다.

 

특히 정경유착이 하나의 이슈로 떠오르고, 특히 대규모 병참산업이나 건설사업, 또는 공공사업에서 투입된 요원이 처음에 이용당하다가 오히려 제거되는 소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예전에 윌 스미스의 주연의 <enemy of the state> 같은 경우에는 국가가 불법적으로 국민을 불법도청 내지 감시를 하는 것에 대한 음모를 특수요원이 저지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영화로 나온다고 해도 영화 자체가 소설이란 텍스트를 문자서사에서 영상서사로 전환했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국가 내지 대규모 자본기업의 범죄를 다룬 영화는 계속 나온다. 범죄의 방법이나 수단, 그리고 그 규모에 따라 소설이나 혹은 그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가 변화하는 이유는 사회적인 요건에 따라 움직인다.

 

범죄소설이 초반에는 인간 개인에 맞추어졌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개인적 영역을 떠나 대규모로 이어지고, 특히 국가의 개입은 피할 수 없는 소재다. 국가 그 자체보다는 그 국가조직을 움직이는 관료들의 이익이 범죄소설의 흔한 소재로 등장했다. 인간의 법이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겠지만, 그 법이 법으로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의 사고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고, 인간의 사고를 결정짓는 것이 이성의 판단보다는 자신의 이익이라면 결국 국가관료 조직이 범죄조직 그 자체가 되거나 혹은 범죄조직에 의해 움직이는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상황이 일어난다.

 

특히 미국이나 해체 이전의 소비에트연방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가 자신과 다른 세력이나 혹은 제3국가에 무기나 자금을 부여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혁명 이후 백위군에 지원한 외국군이나, 베트남전의 통킹만사건,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경우 군부 쿠데타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그 군부 쿠데타 세력이 다른 국가에게 군사훈련과 지원을 받은 것이다. 범죄적인 부분으로 보면 그것은 분명 국제법의 위반이고, 폭력적 방법으로 합법적 정부를 전복하는 것 역시 불법이다.

 

쿠데타와 혁명의 차이는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전복하는 것이나, 폭력적 수단을 가진 자들은 결코 피지배계급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력에 의한 수단에서 범죄, 스릴러 소설은 이제는 국가와 국가, 그리고 그 중간에 등장하는 요원과 스파이로 통해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지만 스파이물의 특징은 자국의 주인공이 다른 국가에 의해 자국의 위험을 지키기 위해 투입되므로, 상당히 내용이 보수적이란 점이다. 이런 범죄소설을 보면 결국 죄라는 것을 다루게 된다. 물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같이 당시 사회의 비판적인 견해를 다룬 작품이 있지만, 대부분 범죄소설에서 등장하는 범죄인들은 특수한 이익이나 목적을 가진 점이다.

 

개인적 영역에서 이렇다면 집단적 영역에서는 범죄가 하나의 사업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실제로 폭로나 수사에 의해 국가가 범죄를 일으키거나 용인하는 경우가 분명한 사실이다. <즐거운 살인>에서 미국 항공기제작 기업인 록히드 마틴이 일본 정치인에게 거액의 뇌물을 준 점에서 뇌물의 수여자는 단순히 그 정치인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된 사실이다. 국가 내지 대규모 범죄가 하나의 스펙타클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은폐되어야 할 조건이고, 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미디어의 장악 내지 미디어의 왜곡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영국비밀첩보기관을 소재로 한 007 시리즈는 국가차원의 지원과 대규모 자본, 그리고 첨단기술과 주인공의 마초적인 요소와 더불어 로맨틱한 모습은 남성으로 하여금 동화의식을 여성으로 하여금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유발한다. 특히 범죄소설의 경우 단순히 괴도에 의한 절도, 미치광이의 살인을 지나 대규모 집단이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집단학살까지 일어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해 범죄소설은 매우 인기가 많아진 장르이고, 많은 대중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대중들은 단순히 이야기의 소비로 통해 동물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그 이면에 가려진 현실적인 과정의 축적은 외면한다.

 

소설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야기인 만큼 자신도 그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를 죽고 죽이는 이야기에 빠져 자신 안의 가려진 살인충동을 소설로서 풀어내는 심리적 작용이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현실은 부조리함이 숨어있고, 처음에 등장한 범죄에서 범죄자는 단순한 물욕이나 질투에 의해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부조리에 대한 저항 내지 반항이다. 그런 비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여전히 하층계급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의해 고통을 받는 점이다. 범죄의 대상이 처음에 개인적 동기에서 이제는 국가적 비리와 부조리라면 이제는 그가 비화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예전에 이런 농담 같은 유머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누군가 아프면 그 치료 수단이 “식물의 뿌리를 드세요 → 기도하면 되요 → 약을 드세요 → 수술하면 되요 → 식물의 뿌리를 드세요”, 어떻게 보면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결국 부정의 부정에 따른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식물의 뿌리 대신 다시 기도로 이어지니 어느 것이 딱 옳다고 할 수 없으나, 최초의 이야기가 되돌아오는 것은 분명하다. 범죄구조가 자본주의사회 이향에서 앙시앵레짐(구체제)의 모순에서 자본화로 통해 개인의 물욕, 이제는 자본주의 그자체가 앙시앵레짐으로 대체되었다면 범죄이야기 역시 바뀔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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