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 - 사랑과 죽음의 교향시
이덕희 지음 / 나비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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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세상에는 니체주의는 없다. 오직 니체주의자로 될 수 있는 자는 니체일 뿐이다. 그 말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실존을 찾기 위해서 니체로 들어가나 결국 니체로 되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인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도 데미안처럼 되려고 하나, 계속 그것은 머나먼 여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쟁에 발발하여 싱클레어는 총을 들고 나가고, 거기서 부상을 당해 침대에 누워있는데, 자기의 모습이 어느 순간 데미안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데미안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실존적인 모습으로 데미안에게 간 것인가?

 

전혜린 교수가 남긴 유작 2편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까지 읽은 후에 전혜린 교수의 친구인 이덕희 작가의 <전혜린>을 읽어보았다. 처음에 이덕희 작가의 서적을 통해 사전에 어느 정도 안 상태에서 전혜린 교수의 작품을 볼까 생각했으나, 그냥 먼저 전혜린 교수의 서적을 보기로 했다. 철학이나 사상과 같이 하나의 사유의 세계로 정립하기보단 전혜린 교수의 자신의 실존적인 글을 이해하는 것보단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니체의 글에 빠진 전혜린 교수가 떠오른다. 과연 그런 것인가? <전혜린>이란 도서를 보니 역시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문구가 니체의 것이라니, 전혜린 교수는 동생인 채린에게 편지를 적어 니체전집을 모두 주고 싶을 정도로 니체를 좋아했다. 그리고 니체의 영향을 받아 세계적인 문학소설을 내놓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지와 사랑>을 좋아했다. 헤르만 헤세에게 팬레터를 보내어 독문으로 이루어진 <데미안>과 답장을 받았을 때 전혜린 교수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도 독일에 빠지게 되었는가? 물론 책에서 슈바빙의 거리에서 보인 보헤미안의 숨결을 무척이나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중에서 한 가지의 의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미륵이라는 한국인이다. 전혜린 교수는 이미륵의 무덤에 가서 참배를 했다. 이미륵은 3·1 운동 후에 독일로 갔고, 당시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었으나 어느 순간 독일은 나치에 의해 파시스트들이 나라를 휘어잡기 시작했다. 어느 독일인이 이미륵에게 히틀러를 아시오라는 말에 모른다고 하고, 그 독일인이 이미륵에게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 라고 묻자 독일이라 대답한다.

 

이미륵의 의지에는 독일이란 아름다운 자연과 자유가 있는 곳이어야 하는 점이다. 그는 그렇게 독일에서 자유를 원하고 분출한 채 눈을 감았다. 독일인들의 가슴에 이미륵은 아주 큰 감동이었나 보다. 안 그러면 전혜린 교수가 독일에 가서 한국인 여성으로 어떻게 단순히 살아갔을까? 그렇지만 이미륵의 참배에서 왠지 모르게 전혜린 교수의 고뇌가 보인다. 왜 그녀가 니힐리즘에 빠졌는가? 어린 시절 매우 총명한 아이로서 집에서 착한 딸이었다. 그리고 법률가 인텔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전혜린 교수를 보면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가까웠다.

 

그것은 전에 보던 에세이에도 그렇게 보였고, 이번에 읽어본 책도 그렇다. 그 분은 마치 아버지가 전부이고 어머니는 존재하더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독일에 가면서 그것은 변했다.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 그녀에게 큰 전환점이다. 그녀의 글을 보면 다소 시대정신의 창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다고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당시 검열이 심각하고, 군화발이 거리의 자유를 밟아대던 시절이다. 그녀의 글과 이번에 보던 책에서 간접적으로만 느낀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서 조선총독부 관할 관리로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에게 고향은 처음부터 있었나? 이북에서 태어나 이북 북단에 있다가 전쟁 후 피난 왔다고 하더라도 광복전후의 이야기가 그녀의 에세이에는 없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대한 빚이 전혜린 교수에게 있을까? 독일은 사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이탈리아와 함께 전쟁을 일으킨 범죄국가다. 게다가 파시스트로 무장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왠지 모르게 전혜린 교수가 안네 프랑크라는 유태인 소녀에 대한 마음이 이해가는 것 같다.

 

안네 프랑크는 독일 게슈타포에게 강제로 체포되어 나치의 수용소에서 죽는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배고픔과 병마로 죽은 안네, 그 소녀가 적던 일기에 대해 전혜린 교수는 아주 강하고 깊은 애정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도 마치 독일나치가 폴란드와 프랑스의 유태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듯, 일본인들이 우리 한국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적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가 그런 학살을 일삼던 자들과 같이 결탁한 것이고, 그 아버지가 자신에게 인간으로서 가치관보다 교육으로 통한 사회적 지위와 성공만 바래서일까?

 

처음에 아버지에 대한 강한 애정에서 전혜린 교수의 외면은 강해지는 것인가? 독일 유학시절 전혜린 교수는 가난했으나, 아버지가 제대로 돈을 전해주지 못한 모양이다. 자살하여 운명을 달리한 전혜린의 장례식에 독일에 유학 갈 때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부친의 눈물은 그래서인가? 그런 부분은 나는 안네의 일기와 이미륵의 생애로 보일 수밖에 없다. 자유가 없는 한국, 독일에서 왜 자유를 찾는가? 전혜린 교수가 살던 한국은 답답한 동물원이었다. 자유가 없는 곳, 권태와 지루함으로 삶의 활력이 없는 곳, 그래도 어떻게든 삶의 냄새를 맡으려 했다.

 

그것은 정화와 같이 아주 소중한 혈육, 그리고 1960년 4월에 만난 어느 남자 신입대학생, 전혜린에게 그는 진실로 삶의 희망일까? 그러기에는 왠지 김이 빠진다. 하지만 적어도 알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매우 전위적인 사람이란 점이다. 요새 길에 가다보면 담배를 피우는 여성들을 많이 본다. 개인적으로 담배냄새에 대해 강한 거부감이 있기에 나로서는 누구든지 담배를 피우면 괴로운 편이다. 그런다고 해서 담배를 상대방이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 않은 이상 내가 참견할 권리가 없다.

 

그렇지만 지금은 2012년,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0년대 한국은 남성의 가부장제 권위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을 때다. 이런 시기에 전혜린 교수는 매우 전위적이고 도발적이었다. 이덕희 회상에서 “너 법대에 들어가면 전혜린이란 괴짜가 있단다. 머리가 굉장히 좋고, 남자들과 막걸리도 잘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큰 소리로 떠들고... 아무튼 굉장한 여성이니 너 한번 사귀어봐.”라는 문구가 나온다. 단지 요새 여성과 달리 그녀는 자기의 이성과 감정이 있다는 점과 짙은 화장이나 화려한 의상 대신 아무렇게나 입고 다닌다는 점이다.

 

이덕희 작가가 처음 전혜린 교수를 볼 때, 그 모습은 독특했다. 여름인데도 스웨터에 목도리, 아직까지 독일의 향수를 잊을 수 없었나보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자신을 만나려 3시간이나 기다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편지도 주고받고 말이다. 상당히 강렬한 영혼의 소유자의 이성과 동시에 매우 강한 영감은 이덕희 작가에게 큰 소용돌이가 되었다. 니체에 빠져 허무와 죽음에 대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전혜린 교수에서 그 분은 항상 자기의 허무와 존재에 대해 끝없이 추구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전혜린 교수는 독일에서 연극 <당통의 죽음>을 봤다고 한다. 연극에서 24명의 남성, 6명의 여성 정도가 필요해서 30명의 많은 배우가 필요한 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연이 아니었다. 주인공 당통과 그의 목을 노리는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언젠가 테르미도르반동으로 목이 나가는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하지만 당통의 죽음에서 나 역시 생각하거만, 당통에게 닥친 죽음이다. 당통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이 자신에게 오는 유일한 안식처라는 점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도 삶의 의지도 보이지 않고 그저 타인들 속에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국 살인죄로 단두대로 가야할 뫼르소 역시 그렇다. 자신의 존재가 살아있음에 오히려 자기의 존재적인 각인은 처형선고와 더불어 그것을 기다리는 뫼르소의 모습이다. 자신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함성이 자신에게 쏟아질 것을 기대하는 뫼르소의 허무 속에 생겨난 실존적인 발견은 우리 인간이 오히려 더 허무한 점은 명시한다. <이방인>이던 뫼르소가 이방인으로 설정했으나 실제로 이방인 우리 모두인 것처럼 말이다.

 

당통은 그런 점에서 이미 모든 것을 넘어선 인간이다. 당통은 아내와 살결을 나누어도 서로 모른다고 하고, 때로는 창녀와 뒹굴기도 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에는 진정한 평화가 왔는가? 아니다. 오히려 폭력이 뒤집힌 채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다른 누군가의 목을 원한다. 그래도 빵은 오지 않는다. 로베스피에르의 고뇌는 아마 자유와 평등을 위한 갈망이나, 그 갈망에도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실책이다. 당통에게 그저 광기에 뿌린 프랑스 파리는 그저 권태로운 일상이다.

 

그런 당통의 죽음을 전혜린 교수는 아주 실존적인 당통을 찾아 나선다. 이미 읽어본 연극대본이라 다시 지금 다른 사람의 글로 보니 뭔가 기분이 새롭다. 인간 그 자체에서 권태로움은 현대 사회에 spectacle이란 현상으로 나타난다. 1968년 프랑스 파리 5월 혁명의 시작점이던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와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에서 그들은 모든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자신들도 스펙타클화 한다는 사실에 두 사람 모두 잠적한다. 특히 라울 바네겜은 68혁명 이끈 선동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거의 숨어살고, 기 드보르는 술과 씨름하며 심장병에 의한 통증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심장에 권총을 당긴다.

 

조금 전혜린 교수의 죽음과 다른 부분은 전혜린 교수는 니체로서 전위적인 모습을 추구했다면, 기 드보르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상황주의자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권태는 언제나 우리 인간에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거기에서 끝없이 저항하거나 아니면 자신 안이 관념으로 들어가서 결국 허무를 선택하거나 결국 권태란 잔인한 고문인 것 같다. 아니라면 그 권태조차도 느낄 수 없이 권태 속에 빠진 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왠지 궁금하다. 권태 속에 갇혀 권태감조차 감지할 수 없는 것이 불행인지 아니면 그 권태로움에 빠져 고뇌하는 것이 좋은지는 개인의 선택이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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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전혜린 에세이 2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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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도서관에 가면서 내가 계획하여 빌리려던 서적들을 찾으러 갔으나, 아쉽게도 다른 사람이 이미 대출한 상태였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 책이 꽂혀있던 자리를 서성이면 그 책이 본래 꽂힌 자리의 옆과 위아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내가 은연중에 집어들은 책이 있었다. 그것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그리고 장 자크 루소의 <식물사랑>,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 작가의 책을 읽고 또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서적이 있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었다. 왜 나는 이 책을 빌려 읽으려 했는가?

 

어제 퇴근 후 방에 홀로 이불속을 누비며, 전혜린 교수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은 후에 갑자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단순히 이 책을 빌릴 것이란 의도는 없었다. 단지 내가 찾으려고 한 책이 없었고 그 옆에 카뮈의 책이 있었던 것이다. 카뮈를 책을 보니 당연히 니체의 서적을 다시 보기로 했다. 예전에도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을 읽어보았지만 니체의 필력을 수용하기에는 나의 세계가 좁았다. 물론 지금도 좁고 좁아 일상적으로 신경질도 잘 내기도 혹은 아무 말도 없이 있기도 한다. 보통사람들도 이런 나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의 심정의 표출기복이 다를 것이다.

 

도서관에서 바로 카뮈와 니체의 서적을 빌리게 한 전혜린 교수의 또 다른 책인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를 읽었다. 같은 저자의 책을 이틀 연속으로 읽으면서 책의 내용은 어제 읽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쪽이 좋은 것 같았다. 중복된 내용도 있던 점과 전에 나온 도서가 전혜린 교수의 깊은 정신력을 훨씬 더 잘 묘사했기 때문이다. 후자의 편도 그러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자만큼 깊기보단 순간적 기록들이 많았다. 어떻게 보면 전혜린 교수의 진짜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전자에 비해 후자에는 전자에 가려진 남편의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그의 이름은 철수였다가 어느새 T가 되었고, 뒤에는 정화 부(父)가 되었다. 남편의 존재가 정화로 통해 철수라는 이름을 가진 실존적인 존재에서 정화의 소유물적인 이름으로 변해갔다. 아니라면 T, 이것은 마치 주변에 지나가는 이름 하나에 불과한 것인가? 서로 사랑한 대상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함이 크게 보인다. 전혜린에게 유학시절 동생인 채린, 남편이었던 철수, 그리고 친구 주혜, 이 세상에 3명의 친구만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던 전혜린의 심정이 이렇게 변해가는구나 느꼈다.

 

임신과 더불어 그 임신에서 죽음의 두려움은 상당히 깊은 고뇌로 풀어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놀란 부분은 그녀의 죽음과 생의 공포였다. 죽음의 공포보단 삶에 대한 공포가 더 무섭다. 이 모든 허무와 어지러이 보이는 세상 속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그녀의 욕망은 자살이 결국 모든 것이 해방인가? 너무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가에서 오늘 <이방인>으로 통해 읽어본 후에 그녀에게 실존주의자로서 죽음이 직면해야 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죽음이야 말로 삶의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다.

 

모르겠다. 예전에 오타쿠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가이낙스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에 나오는 매우 섹시하고 글래머 여자박사인 포트만이 회의에 가득한 대사가 생각난다. “나도 어렸을 적에는 정말 겁쟁이이었어. 어른이 되기 전에 세계가 멸망하는 게 아닌지 매일 걱정이었어. 그래서 어른이 되어 다른 의미로 겁이 났어. 이 세계는 추하게 썩어가며 그런 주제에 영원히 이어진다고 깨달았기에...” 대사를 보면 왠지 모르게 전혜린 교수의 심정을 다시 보는 기분이다.

 

삶에 대한 공포 그것은 아무런 정신과 영혼도 없이 그저 그런 흘러가는 세속에 젖어 권태에 사로잡혀 살아야 한다는 공포, 그래서 그 공포에 의해 억압감을 받는 자는 허무함에 자신을 빠져들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일까?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라는 애니메이션은 현재의 추한 문명 속에 억압된 에로스를 보존하느냐? 아니면 타나토스라는 모든 죽음으로 통해 새로운 에로스로 꽃을 피우는가? 선택은 자신의 고뇌를 안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모두 자아를 잃고 가느냐이다.

 

그런 비극적인 상황은 연속은 아마 교육이란 집단적 사회의식인 모양이다. 교육은 필요하나 그 교육의 의미에서 무엇이 맞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어른들이 새롭게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세상의 빛이 되어라.”로 꼽는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착하게 바르게 빛이 된다는 말인가? 자신들의 고정된 사회권위에 대한 종속인가? 물론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이디푸스의 미래다. 하지만 그 오이디푸스에게 자연으로 돌아갈 길을 막는다.

 

전혜린 교수의 아이에 대한 가치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학교 점수는 아이의 장래에 대해 말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부모들의 우스꽝스러운 허영이다. 그것을 나는 증오한다. 나도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부모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왔다. 공부가 나에겐 맘에 들었고 좋은 점수를 받는 건 우선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에서 지금 얻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차라리 성경이나 요가를 공부했어야만 옳았다. 혹은, 재능이 있다면 그림을 공부했어야 했다. 난 내 아이에게 좋은 점수를 받으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한 짓이다. 대부분 가장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부모들이 특히 그런 짓을 한다.”

 

공부라, 나는 우선 공부에 대해 애증의 관계가 있다. 지금 막무가내로 책을 읽어가면서 나의 인생에 크게 도움도 되는지 안 되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내 밥벌이엔 당장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라면 먼 미래 좀 더 높은 곳에 오르면 더 먼 곳을 바라보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다고 당장은 내 일상생활에 도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기매체와 유행이란 spectacle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물론 인간은 그 사회의 흐름에 당장 거슬릴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에 떠내려가기 싫기에 나는 나만의 세계에 갇히는가? 아니면 남들과 똑같은 것만 보고 비슷한 생각에 이분법의 논리로서 그 속에서 자유를 봐야 하는지 아이러니하다.

 

나는 책을 막무가내로 읽지만, 사실 나는 아주 형편없는 학교생활을 보냈다. 덩치는 멀쩡하나 운동도 젬병이고, 싸움은 겁을 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아 보인다. 다른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공부를 너무 못했다. 공부 못한 이유로 무시를 받고 경멸을 받던 나였다. 그런 나도 가끔 이름 없는 대학에 다니는 자에 대해 무시하는 나를 발견할 때도 있다. 물론 남들 노력할 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불량한 짓을 한 것에 대한 대가이고, 그 대가로서 그는 다니나, 거기서 다시 기사회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공부 못해 집에서는 꾸중과 다른 학생에 대한 비교, 교실 내에서는 왠지 모르는 따돌림과 무시, 교사들에겐 비인간적 모욕과 대우들이 내 자신을 기형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괴물을 잡겠다고 내가 괴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괴물을 잡으려고 내가 괴물이 되어도 세상은 잡을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자기만의 영역을 과시한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당신들의 미래와 꿈은 무엇이니 물어보면 대부분 대기업과 공무원이라고 한다. 심지어 생명을 다루는 의사와 간호사에 대해 직장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 삶이 이렇게도 각박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면 마치 신성한 자리에 앉아 미사어구만 늘어뜨리는 가식을 보여준다.

 

단지 자리에 고수하는 것으로 모든 이데아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것인가?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진실로 남을 위해 사는 분이 있으니 그런 분들의 노고를 부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진실함에서 나는 진실하다보단 차라리 나는 진실한가? 아니면 나는 진실한 것에 대해 의문에서 그 의문조차도 진실하다고 여기는 것조차도 진실한가? 라는 부정과 부정에 또 다른 부정이 탄생할 수 있다. 다시 글을 적어도 지식에 대한 억압과 권위에 지식으로서 대항하여 대항하는 나와 그 모든 글들이 웃긴다. 아니라면 속물적인 글로서만 적어가야 하는 것인가? 실존적 존재에서 나와 타인의 경계는 생각하면 결국 spectacle의 열렬한 관객인지 아닌지의 차이인가 싶다.

 

그런다고 하여 전혜린 교수처럼 죽음이란 타나토스에 들어가기도 그렇다. 삶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대한 공포, 둘 다 공포다. 삶과 죽음이 같이 붙어있기에 삶이 곧 죽음이란 말은 너무 관념화처럼 들리는 말이다. 아니면 루소처럼 “청춘기는 예지를 배우는 시기다. 노년기는 그 예지를 실행에 옮기는 시기다. 경험은 언제나 교훈을 준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각자 자신 앞에 남은 생의 기간에 대해서만 유익할 뿐이다. 죽어야 할 바로 그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할 때는 아니잖은가?”처럼 말이다.

 

전혜린 교수의 글을 보면 자신의 일상적인 부분에서 끝없이 고뇌하고 방황한다. 그냥 보기에 자신의 주변만 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서 자리 잡은 억압이 왜인지 아는 것 같다. 1961년 5월 16일에 대한 글은 너무 식상한 것처럼 보이나, 사회의 일방적인 요구사항과 그것이 결국 국가적인 흐름과 지역과 사회의 연계성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독일 뮌헨의 슈바빙의 거리는 자신의 고향인 한국보다 더 고향처럼 느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숨을 쉬는 자유, 뭔가 얽매이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그 신선함, 이방인도 이방인이 아닌 집처럼 여길 수 있는 곳 슈바빙을 전혜린 교수는 그리워한 것이다. 표현이 살아있고, 꽃들이 만발한 곳, 자연이 숨 쉬는 곳을 말이다. 자신의 동생 채린에게 보내며 그런 자연의 미와 책에서 찾는 즐거움을 편지를 보낸 전혜린 교수는 작은 것에 매우 기뻐하던 소녀와 같은 마음을 가진 것 같았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 대해서나 혹은 2장 헤세로부터의 편지에서 그림을 보면 더욱 그렇다. 긴 생머리에 줄무늬 스웨터, 무릎 아래까지 오는 치마를 입은 소녀에서 말이다. 그것은 전혜린 교수이기보단 그녀의 동생 채린이를 생각한 그림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책 제목처럼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와 같이 이 모든 즐거움도 또 다시 조우할 수 없게 되었다. 끝없는 죽음에 대한 향기를 추구하는 전혜린의 모습은 자연에 돌아가고 싶다는 그 진정한 열의만 전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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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9
알베르 카뮈 지음, 최헵시바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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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의 의지로 살아가는가? 나는 나의 의지로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라면 나의 존재에 대해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가? 혹은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있음을 내 스스로 인정하고 있을까? 이런 무한의 의문이 개인적으로 경제적인 발전도 주지 못하나, 우리는 이런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과 동시에 죽음이 같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과 삶의 순간이 교차하는 것에서 우리는 슬픔과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으나 그 순간마저 반드시 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번에 읽어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특히 그러하다. 카뮈는 본래 프랑스인이 맞는 것 같기도 하나, 그의 어린 시절은 알제리의 배경이었다. 알제리와 프랑스, 참으로 뭔가 이치가 맞지 않은 나라다. 왜냐하면 프랑스혁명의 의미는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하나, 그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남의 자유를 주자던 루소, 당동, 로베스피에르와의 의지를 꺾은 것이 아닌가? 한 때 프랑스 지식인들은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했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위해 국가주의 안의 자유를 비판한 것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그런 카뮈가 살던 시절의 모습을 많이 반영한 것 같다. 타들어갈 것 같은 더위에 알제리의 아랍인들을 죽이면 뫼르소에서 다소 프랑스와 알제리의 모순을 여기서 느꼈다. 왜냐하면 같은 나라이라고 하면서 서로 다른 것을 토대로 차별을 가한 점이 여지없다. 혹은 롤랑 바르트가 기호학에서 시니피앙 내의 시니피에를 해석함에서 그 시니피에가 다시 시니피앙으로 되어 또 다른 시니피에를 설명할 때 어느 흑인 어린아이가 프랑스깃발을 보고 경례를 한다. 알제리 소년이 프랑스국기에 경례하는 것은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에 대한 정책과 거기에 대한 지식인들의 저항심이다.

 

자신이 살아감에 있어서 뫼르소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선택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것에 대한 의문과 원인에 대해 생각지도 않아 결국 벽에 갇히는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뫼르소는 그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떨지 않고 그저 자신이 없어짐에서 구토가 날 것 같은 지겨움이 없어질 것이란 점이다. 오히려 자신이 기요틴 아래 목이 나갈 때 그것을 보러오는 사람들이 가진 증오의 시선들을 갈망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이들에게 삶의 영위가 다시 오리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방인>에서 과연 이방인이 누군가?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과 마리와의 성행위를 연속적으로 이루어낸다. 어머니에 대한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던 것처럼 마리와의 성행위는 사랑보단 그저 무의식의 욕구였다. 그 이상도 있지도 않았다. 마리가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는 그저 그래?”내지 특별한 대답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서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다. 피상적으로 거의 있는데도 왜 있는지 알 수 없다. 늙은 개를 잃은 노인, 창고지기 건달, 심지어 건달의 친구까지도 말이다.

 

그의 유일한 삶의 의지는 해변에서 뜨거운 태양이 작렬 하던 순간이다. 아랍인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 뭔가 어지러워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으나 그의 손에 나이프가 있다는 점은 분명히 본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 총을 겨눈 것은 그가 위험인자보단 태양의 뜨거운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랍인에게 총 1발을 발사하고, 쓰러진 그의 몸에 다시 4발의 총을 발사한다. 1발만 충족하나 왜 4발이나 발사하는가? 타인의 죽음과 그 죽음의 확인으로서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하려 했는가?

 

도대체 알 수 없는 심정으로 그는 결국 살인죄로 체포된다. 그 감옥이란 지겹고 따분한 시간이 그에겐 견딜 수 없는 공간이 아니라 그 공간마저 적응해버린다. 담배에 집착하던 그가 이제 담배도 필요 없고, 잠이 오지 않은 그가 잠을 하루에 18시간이나 잔 후에 나머지 시간은 밥을 먹고 배설을 한다. 마치 사육장 내에 한 마리 짐승처럼 말이다. 그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이제 그가 아무런 생각 없이 남의 처지에 멋대로 어울린 게 그의 목을 노린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그의 목이 없어지는데도 막연한 자세다.

 

신을 믿지 않고, 어머니의 죽음에 울지 않고, 다음날 매혹적인 글래머인 마리와 성행위, 포주와의 편지와 조언, 노인과 개, 해변의 태양...이것들이 다시 재판장에 올 때 뫼르소에게 모두 불리했다. 우연이란 설정에 그의 우연은 마치 고의적인 행동으로 보였다. 검사의 취조, 무기력한 뫼르소의 모습, 뫼르소는 재판장안의 모든 것이 낯설고 괴이했다. 심지어 자신이 재판장에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자신이 사건의 발원지인데도 그 발원지인 자신은 그것에 대해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주변에서 스쳐 지나가는 바람같이 보았다. 그는 자신의 일인데도 자기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이방인 뫼르소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임을 그는 밝히려 한다. 우리의 인생이 마치 우리의 선택이 타인들의 선택에 의해 조작되고, 그 순간조차도 타인들 역시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조작되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뫼르소는 죽음의 순간이 오자 자신을 구원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제가 와서 나의 아들이여 하는 말과 그를 구원하기를 바라는 사제의 기도에 욕과 짜증만 내세웠다. 신을 믿지 않으며, 오히려 사제의 말이 더 자신의 심정을 괴롭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어딘가에 몰리거나 막다른 골목에 접하면 순간 비과학적이고 미신의 세계에 의탁한다. 뫼르소는 그런 것도 없었다. 아니 삶의 활력에 대한 의미를 찾지 않으니 죽음에 대한 공포심은 있으되, 그 공포심에 자신을 위로하지 않으려 했다.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기에 자신의 존재적인 것에서 의미가 없어 항상 피로한 모습이다. 차라리 죽음이 온다는 생각에 자신의 어머니가 죽기 전 양로원에서 왜 약혼자를 두는지 이해하겠다는 뫼르소의 독백은 죽음의 순간이 와야 진정한 자신의 삶을 발견할지 모른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그 기분을 독백한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모든 고통을 씻어 주고 희망을 없애 버리거나 한 듯 온갖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가 가진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이 열린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 마치 형제 같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내게 남은 소원은 오직 하나, 그 모든 것이 완성되고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질 수 있도록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그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 증오에 가득 찬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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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 고문기술자 이근안!! 그는 누구인가?
김근태 지음 / 중원문화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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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영화 <남영동 1985>만 보고 주인공 김종태, 그의 본래 존재인 김근태의 고통을 알았다면 오산일 것이다. 여기 그가 적은 옥중 수기인 <남영동>은 더욱 모질고 잔혹했다. 단순히 영화로 보여주던 고문의 한 자락에서 모든 것을 판단해서는 안 될 정도였다. 나는 이 책을 보고 마지막에 혼자 공포에 떨어야 했다. 사람을 죽이고 파괴하고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그 지옥과 같은 상황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울분과 분노의 19805월 광주, 예전에 TV에서는 북한의 공작이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 북한군이 내려와서 광주시민을 학살했다고 한다. 이런 non-sense 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흘러나오는 것이 지금의 우리 사회다. 내가 왜 충격을 받았는가? 이 문구가 너무 잔인하게 들렸다. “광주항쟁은 또 소수의 매판군부독점세력이 민중의 요구를 적대적으로 짓밟고 자신들의 이익실현구조를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잔인성을 보여주었다. 위험을 느낀 전두환 친위 세력은 평화적인 시위를 추적, 학살했으며 또 예방진압을 목적으로 집집마다 뒤지며 청년을 붙잡아 구타연행학살했고 심지어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내고, 임산부의 배까지 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말 그들이 폭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어느 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응징의 폭력을 가해야 하는 대상이 단순히 건장한 남성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여학생들 그 아직 어리고 몸도 가늘고 꿈 많은 소녀들의 가슴에 총검을 들이대는 것도 모자라 그 아이들의 유방을 도려냈다니 말이다. 게다가 임산부의 배를 가르다니 말이다. 이것은 과거 일본 731부대에서 인체실험 대상인 마루타에게 하는 행동과 거의 다름없는 학살극이다. 전쟁이었더라도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분명 불법이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폭력은 악마의 짓거리다.

 

우리의 폭력의 시기에 <남영동>의 수기는 단순히 김근태만의 이야기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최근 검찰의 비리와 정치, 기업, 권력에 결타하여 언론에 문제되든 일들이 보인다. 이들은 불과 20년 전만 해도 폭력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패고 때리고 짓밟고 마지막에 사형 내지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광기에 빠져 살도록 하였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은 인간이 인간됨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제도적인 방어선이다. 하지만 그 방어선은 어떤 인간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권력이 있는가? 없는가?

 

고문으로 자백 받은 증거는 분명히 불법이고, 법적 효력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검찰과 판사는 그 거짓 증거를 받아 자신들의 정의를 실현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이 단어에서 정의란 단지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하나의 도덕적인 교조주의로 통용되는 것이 정의일 뿐이다. 그래서 정의란 윤리가 없는 하나의 위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정의 아래 김근태를 고문을 받는다.

 

물고문, 전기고문, 굶주림, 추위, 수면의 박탈, 외로움 등으로 그의 고문의 이야기는 마치 소설과 같다. 정말 이것이 소설이라면 좋겠다. 이런 일들이 어느 고문서에서 등장할 만한 중세유럽의 마녀사냥 이야기로 끝냈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개인의 이야기고 사실이고 그 당시 존재했던 사람 모두 실존인물이다. 살이 타들어가고 입술이 바짝 말라가며, 추운 가을밤에 추위에 벌벌 떠는데 거기에 물을 뿌려 고문하여 땀이 베여 나올 정도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문제는 그런 고문을 하는 존재조차 하나의 인간이었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아이히만이란 소장에 대해 당시 연합군은 악마의 탈을 쓴 인간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평범했고, 가족에게 다정하고 이웃과 잘 지내던 남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끔찍하고 잔인한 일을 할까? 물론 아우슈비치 수용소처럼 독가스를 날리지 않으나, 차라리 독가스가 낳을지도 몰랐다. 인간의 죽음으로 그 고통을 모두 끝낼 수 있다며, 그 충격으로 죽을 때까지 두려움에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억지로 끌려온 사람이 죄가 없음을 알고, 알리바이가 있음을 알아도 소설로 만들어 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설의 창작력은 지독한 고문이고, 그 고문의 성과품은 새로운 소설이다. 이것은 재판의 증거이고, 그 재판과 소설은 사회에서 방송과 신문으로 다시 재생산되어 간다. 진실은 아득한 저 안개 너머로 사라지고, 어둠의 거짓이 우리의 마음을 불안과 증오 그리고 불신으로 이어지게 한다.

 

김근태의 고뇌는 여기서 보인다. 우리 인간은 겉으로는 언제나 바른 말 옳은 말하면서 다른 상대를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한다. 정작 그 상황이 되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김근태의 고문에 대한 공포와 절망에서 더 큰 공포와 절망은 바로 우리 인간 자신의 이중성이었다. 자신을 고문하는 사람들이 세상만사에 대해 고민한다. 월급이 적거나, 자식이 공부가 잘되는지, 자기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말이다. 김근태가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고문하던 사람들처럼 일상적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리어 그것이 자신을 폭행하고 억압하던 수단이 되었다. 김근태를 고문하는 자도 어쩔 수 없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관료주의의 인형이었다. 그들의 이중적인 가치관에 김근태도 나도 흔들린다. 자신에게 고문을 가하는 경관에게 이제는 고문 받는 것이 습관화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고문은 받는 자와 가한 자 모두 정신을 파괴했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나온 말이 이 책에서 나온다.

 

고문을 전담하던 한 경관이 김근태의 손을 잡고 말한다.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 나가라. 허위라도 다 인정해라, 여기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라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다. 인간의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이 여기서 드러난다. 만약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고문기술자가 김근태에게 한 말이 인상적이다.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 철을 만났다.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서 서 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

 

상당히 비웃음이 섞인 얼굴로 김근태의 면전에 날렸을 연설이었다. 복수의 날도 네가 이길 날도 오지 않는다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관, 우리에게 유토피아란 없다. 단지 그것을 위해서 끊임 이 나갈 뿐이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고문을 듣고, 그의 고문 후에 감옥살이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못 본채 갇혀 있음에 인간의 권리는 어디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 온 몸이 망신창이가 되어도 밥 한술 제대로 못 먹고, 추워도 움직일 수 없어 그대로 주저해야 하며, 억울한 자신의 처지에 호소하느냐 까지 말이다.

 

더 분노하게 만든 것은 그에 대한 검찰과 재판의 행동이다. 그들은 법조인의 양심을 버린 채 그저 시대의 흐름 즉 권력의 흐름에 충실했다. 그리고 계속 그 자리를 유지하며, 변호사로 개업하여 지금도 성공한 사람처럼 우리 주변에 숨 쉬고 있을 것이다. 바른 말을 하고 옳은 행동을 하는 게 진실한 삶을 살아온 것일까? 이런 책들을 보면 내 인생 가치관에서 혼란이 온다. 내가 바라는 것은 맑은 공기 아래 산책을 하며,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간의 이야기로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폭력이 아니라 미덕으로서 세상에 고통 받는 사람 없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그런 세상을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것이 비웃음을 받고 폭력과 억압으로 다스릴 대상이라면 무엇이 인간에게 진실한 가치라 호도될 수 있는가? 인간이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서로 간의 차이가 없이 균형을 맞추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적에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에게 말 잘 못하면 끌려간다. 병신이 된다. 인생 망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그런 이야기를 은연 중에 들었다. 철없는 어린 녀석이 무엇을 이해할까? 싶겠지만 생각하면 이가 떨릴 정도로 무섭다.

 

이런 무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남영동>은 다시 나오면 안 될 서적이나, 항상 우리가 봐야할 서적일 것이다. 다시는 이런 일들이 오지 않게 폭력과 고문이 마치 정당한 관례로 되지 않기 위해서다. 이 수기를 적은 자는 고문 후유증으로 결국 201112월에 눈을 감았다. 최근에 그가 고문을 당하지 않았고 이근안이 옳았다는 미친 소리에 망자를 2번 죽이는 일들이 생긴다. 고문을 하지 않았다면 이근안이 왜 옳았는가? 라는 논리적인 이야기를 해도 소통과 대화를 거부한 이들에겐 그저 부정하고 싶은 일들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순간 그들 역시 삶을 부정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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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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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란 인물은 다른 쪽에서 알게 된 이름이다. 전에 우연히 본 애니메이션 <공중그네>에서 약간 정신이 사나운 정신과 의사가 주인공으로 하여 각종 환자들이 정신치료를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신병적인 증세는 진짜 특이한 정신병을 인간이 가지고 있기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간에게 정신적 질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워낙 완벽한 형이상학적 미를 추구하던 플라톤이나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철학사에서 모든 시작이 되는 철학자이나, 중요한 부분은 그들은 동성애자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 남자의 동성애는 이 남자로 국한되는 게 아니라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그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인가? 어디를 보면 옆 나라에서는 아버지가 딸이랑 동침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윤리적으로 틀린 일은 분명하나 그 나라와 민족에선 하나의 문화이고, 도덕적 가치에 부합되는 점이다. 어느 부족은 친구가 놀러오면 자신의 아내를 친구와 동침하게 한다. 나중에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가? 하는 의문에서 후사처리는 알 수 없으나, 정신병적인 증세에서 인간의 믿을 수 없는 짓이 하나의 당위성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이상한 것 자체를 인정하기에 오히려 인간의 정신병적인 증세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넘길 수 있다.

 

지금에 와서 성인남성이 어린남자아이를 데리고 이상한 동침을 하면 바로 쇠고랑을 찬다. 어떻게든 변태적인 정신 상태에서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은 경악할 일이나, 다르게 생각하면 탈출구를 열어놓은 것이다. 인간에게 super-ego와 id의 경계에서의 ego가 어느 쪽으로 가기가 쉬운가? 인간은 합리적인 혹은 이성적인 super-ego로 간다고 하나 실제는 id가 super-ego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에서 메시아니즘이나 마녀사냥은 늘 존재한다. 아직 타진요의 상처는 한 개인과 우리사회의 비극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는가?

 

인간에게 늘 이성을 요구하는 그 이성의 사회적 억압은 곧 언어라는 매체로 통해 인간의 내부 심리를 압박한다. 그러니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에선 그 누구라도 정신병적인 증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오히려 없는 게 이상하다. 주인공 의사는 인형 탈을 쓰고, 어린 아이처럼 때로는 젊은 사람처럼 모습을 보여준다. 옆에 있는 간호사는 짧은 치마에 담배를 피며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환자들을 쳐다본다. 짧은 치마에 빨간 립스틱 그리고 페티시즘을 느끼게 해주는 스타킹과 가슴이 살짝 드러나 보이는 상의에서 대부분 남성 환자들은 libido란 성적무의식욕망이 올라오고, 솔직히 그것을 보는 나도 느낀다.

 

영상이미지가 다른 사람은 애니메이션영상인데, 그 간호사의 이미지는 실사를 원본으로 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반 리얼리즘과 표현주의 미학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이 리얼리즘의 이미지를 넣은 점은 독특하다. 어째든 오쿠다 히데오란 인물은 그렇게 알았다. 그런 와중에 아는 동생에게 오쿠다 히데오의 <스무 살 도쿄>라는 책을 소개받았다. 단지 <공중그네>에서는 인간의 콤플렉스와 강박관념을 보여주었기에 <스무 살 도쿄>와 다른 작가처럼 느꼈다. 그러나 <스무 살 도쿄>를 다 읽으면서 같은 작가라고 느꼈다.

 

오쿠다 히데오란 작가는 쓸데없이 얽매이는 것에 지루함을 느끼는 점과 화끈해보자는 점과 특히 인간에게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그 자체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내뱉는 점이다. 그래서 <스무 살 도쿄>는 결국 오쿠다 히데오의 자신의 이야기란 것을 알았다. 소설은 다무라 히사오란 나고야 출신 도쿄 남자를 다룬 것이나, 그가 카피라이터를 하면서 자기 기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점에서 역시 그렇구나 하고 여겼다. <스무 살 도쿄>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소설이다. 그저 슬쩍 보아도 금방 읽을 수 있고, 또한 내용 자체도 일상적이다. 문제는 너무 일상적이라 약간의 지루함도 있었지만, 상황의 꼬임에서 다무라의 고뇌는 청춘들이 가지고 있는 흔한 고민이었다.

 

대학시절 자기를 좋아하는 여학생 동기와 자기가 좋아하는 미녀선배, 그리고 그 동기와 첫 키스의 우여곡절부터 도쿄로 온 배경과 낯선 곳에 방황하는 어린 자신, 이 소설제목처럼 스물이 되고 나서 그에게 온 것은 아버지의 부도와 자퇴신청서 제출이었다. 20살부터의 다무라는 도쿄란 꿈이 있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꿈과 환상은 다른 것임을 알아간다. 자퇴 후의 카피라이터 회사에서 야근과 잔업을 밥 먹듯이 하며, 심지어 밥조차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다. 집에도 못가고 회사에서 잠을 자며, 하루를 바쁘게 살아간다. 1981년 서울올림픽과 나고야올림픽이 결정되는 순간에도 별 감흥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 일들은 자기 일이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난 일처럼 보인다. 청춘의 열기를 즐거움보단 생계에 던졌기에 그의 청춘은 어찌 말하면 불행이라 볼 수 있다. 스키를 타고 놀러간다는 대학을 다니는 옛 동창과 자신은 일에 치이는 장면은 매우 변증법적인 청춘의 모습이다. 여기서 다무라는 그저 일에만 쫓기는 기계만 되었다. 그런 시간만 보내다 25살의 다무라는 제법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사회인이 되었다. 젊은 시절부터 혈기가 왕성했는지 아니면 그저 속박이 싫은지 어머니가 억지로 만든 맞선에서 다무라는 상대방에게 지루하고 시간이 아깝듯이 말한다.

 

그런데 오히려 상대여성도 그것에 동의한다. 다무라의 키는 174, 여성은 170 정도, 상대방은 굽이 너무 높은 구두를 신어 다무라보다 크게 보인다. 오쿠다 히데오의 이런 설정은 매우 인상 깊다. 왜냐하면 예전에 오쿠다 히데오는 일본 애니메이션 <케이온>이란 작품을 심하게 비판했다. 아마 그런 이유가 여성에 대한 시선이다. 1980년대 일본의 버블경기가 후퇴하고 남성의 권위가 사라지면서 - 물론 특권계열은 유지하나 - 일반적 남성은 여성에 비해 소외되어가는 상태였다. 그런 점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서적들을 참고하면 하위문화가 기존의 남성의 전유물이었으나, 이제는 점차 여성에게 열려가고 있었고, 21세기에는 제법 많은 여성들도 하위문화에 취향을 가진다는 점이다.

 

인간의 무의식이나 보이지 않은 욕망을 표출하기 좋은 곳은 하위문화다. 하위문화로서 풀어가는 사회과학적 영역에서 여성의 구두는 상당히 상징적이다. 구두의 굽은 여성의 자존심이라고 이 소설에서 나온다.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여성이 남성을 바라볼 때 정면 내지 위를 쳐다 보는 것보다 아래를 보는 것은 여성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의 행동이다. 따라서 <케이온>에서 나오는 여고생들이 사회적인 통념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한 청춘은 다소 마초이즘에 젖은 남자들에겐 혐오의 대상이다.

아기자기한 그림체와 대화 그리고 행동들에서 거칠고 몰아치는 폭풍처럼 자신을 토하는 오쿠다 히데오 스타일로서는 감당되지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쿠다 히데오는 문화평론가보단 그저 카피라이터 또는 소설가에 어울린다. 아즈마 히로키와 같은 문화평론가로서 보기엔 아직까지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검은색으로 도배하여 단발머리 여자에게 처음에 감정이 좋지 못하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자신의 톡톡 쏘는 말투에 다무라는 매력을 느끼고, 다시 그 행동에 짜증이 난다. 마지막엔 부두가에 가서 도쿄의 밤을 구경하나 대학교 때 자기를 좋아해주던 고야마 에리와 같은 풋풋함 따위는 없다. 스무 살 때의 여대생과 스무 다섯 살 때의 직장여성은 너무 달랐다.

 

그런 그가 서른이란 나이에 닥친다. 그는 프리랜서고, 돈도 제법 들어온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를 찾아간 듯 아닌 듯 오묘하다. 자기 친구가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 파티를 하는데, 항상 다무라는 엉망진창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원하는 행동이 아니라 억지로 끌려가는 느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모습은 여전히 친구 결혼식 전에 나타난 고다 사장의 주책에서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볼 것은 다무라의 행동과 고다 사장의 태도다. 고다 사장은 안하무인으로 주변인들 다루는 부자다. 그런 그에게 모두들 공손하게 굴지만, 순식간의 기분으로 다무라가 대든다.

 

그리고 고다는 그런 다무라에게 술을 마시고, 그의 심정을 이야기한다. 나이가 제법 들은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나온다. 돈, 중요하다. 일본이나 다무라의 고향 나고야를 슬픔으로 울게 만든 서울올림픽이 열린 한국 역시 그렇다.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돈이야 말로 종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그것이 역설적이 되었다. 고다 사장은 젊은 시절 용돈이 4만 엔이었으나, 알고 보니 5만 엔이 들어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만 엔을 더 얹어주었다. 가난해도 그 어머니의 마음에 오히려 삶의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돈을 벌고, 부자가 되어도 친구는 떠나가고 주변 사람들은 없다. 옛날에 제왕은 외롭다는 말이 있다. 고다의 모습에서 행복은 무엇인가? 고다의 미래가 마치 다무라의 미래로 연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쿠다 히데오가 무엇하러 자신과 같이 마초이즘과 같은 성향을 지닌 다무라로서 이 소설을 만들까? 그것은 청춘은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해준다. 돈도 없어 자퇴하고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라도, 자신이 스무 한 살 때 일할 때 옆에서 일하던 공주의 모습이 생각난다.

 

될지도 모르나 자신은 만화를 그려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이다. 만화가는 일본이나 혹은 한국에서나 괴로운 선택이다. 솔직히 말해 한국의 경우 거의 절망적이다. 이것은 만화애니메이션 계열에서 발군을 보이는 분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니 보장한다. 꿈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도쿄라는 곳은 일본에서 수도이고, 모든 문화, 행정, 사회의 중심지다. 그곳에서 꿈을 동경하여 찾아온 다무라에게 낯설고 두려운 공간이었다. 그리고 적응하여 마치 하루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 채 흘러간다. 어떻게 보면 젊음의 실패는 매우 두려우나, 우리는 그 실패마저 두려워 계속 실패 아닌 실패를 하는지 모른다. 다소 거칠어도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하는 것은 소중하다. <스무 살 도쿄>에서 스무 살은 매우 간략하다. 이제 시작하는 입장에서 스무 살이다. 나의 스무 살은 지나갔으나, 지나간 것을 알기에 오히려 스무 살의 감정을 느끼고 싶다. 단지 그것은 내 안의 이율배반적인 현실과의 괴리감만 느낀 채 하루를 떠나보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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