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곶의 찻집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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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항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거나 자신만이 머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현실이란 공간과 시간에서 현대인들은 언제나 고독, 슬픔, 절망, 이별 등의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그런 감정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새로운 마음으로 나갈 수 있는 해방구가 필요하다. 물론 거기서 해방되는 기분을 맛보아도 현실 앞에 놓인 문제를 비켜나갈 수 없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하나의 정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자기에게 언제나 멈출 수 있는 존재적 자아에 대한 휴식이 필요하다.

 

더구나 요새처럼 인간의 꿈들이 산산이 파도처럼 깨지는 세상에서 말이다. 무지개 꽂의 찻집은 그런 인간들을 위한 정지된 공간처럼 보였다. 물론 그 공간의 지배자인 에쓰코 씨는 반겨주는 이들에게 영원한 안식처였으나, 한편으로 그녀 자신은 늙어가고 있는 노인이었다. 초반에 아내인 사에코를 떠나보낸 한 남자에겐 초로의 여인이었으나, 마지막에 고지의 어여쁜 두 딸에게는 할머니였다. 나이는 먹어가고 그녀는 기력이 쇠하고 있어도, 자신만의 공간을 포기하려고 하나 마지막에 아침놀을 보면서 새로운 내일을 기대한다.

 

남들의 꿈과 희망을 채워주고 있는 만큼 자신의 꿈과 희망은 그저 그대로 접어 가지 않았나 하는 심정이다. 그녀의 그런 심정은 어느 기업의 중견간부가 오사카로 전직되면서 그의 마지막 도시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해 에쓰코 씨와 나누던 대화에서 곶의 찻집에 모든 이에게 기쁨의 희망을 안겨주던 에쓰코 씨가 오히려 기쁨의 희망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개 이름이 고타로라고 지을 정도로 남편이던 고타로의 죽음을 아직까지 안고 가는 그녀의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해 볼 정도였다.

 

남편이 30살에 암에 걸리고, 32살에 세상을 떠나는 순간 그녀는 영원히 혼자와의 싸움을 진행했다. 남편이 그린 아름다운 무지개가 보이는 그림을 느끼기 위해 살아온 그녀, 처음 이 가게를 만들 적에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진정한 외로움과 절망을 알기에 절망과 외로움을 안고 있는 이들을 누구보다 더 다정하게 다가간 것이라고 본다. 누구에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그 대상보다 더 깊은 상처를 안고 있어야 가능할지 모른다.

 

다정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승화 하면서이다. 덕분에 조카인 고지에게 에쓰코 씨는 자신의 마음을 버팀목으로 여길 수 있었다. 자기 가게 옆에 고지는 아내와 두 딸과 같이 있었다. 손녀들은 이모할머니 에쓰코 씨에게 바나나 아이스크림과 쥬스를 얻어마시고, 고타로와 같이 산책을 다니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행복을 보는 노인에게 어떤 행복인가? 남편의 사후로 인해 그녀에게 자손이 없다.

 

자손이 없이 산다는 것이 마음 편할지도 모르나, 다니 씨가 오사카로 전근 간 후 2년 후에 부음을 알린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쓸쓸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아무도 없이 혼자 외롭게 눈을 감는다는 사실은 너무 외롭고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쓰코 씨는 자신에게 친구처럼 다정한 다비 씨를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며, 절규한다. 다소 내용은 동화처럼 다가오나, 인간의 지친 마음에 누군가의 죽음은 큰 충격은 분명하다. 사에코를 떠나보내고 딸을 데리고 온 한 남자의 이야기에서 아내의 미소가 담긴 영정사진과 딸의 얼굴을 보며 혼자 몰래 눈물 훔치던 남편의 심정에서 희망적이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희망에 대해 본다면 단순히 아내의 죽음만이 아니다. 이마겐이라고 불리는 청년은 4학년 대학생으로 취업도 안 되고, 꿈과 목표도 없이 그저 방황하던 청춘이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것들이 없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원하는지 젊은 청춘들의 방황과 좌절은 누구나 다가오기 마련이다. 아니 고지처럼 40대 건장한 남성도 일을 하고 있어도 방황은 다가온다. 누구나 그것을 피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하지만 이마겐은 미대를 다니던 미도리를 만나게 되고, 몸은 작은 편이고 티에 청바지, 운동화, 뿔테 안경, 긴 머리를 그저 뒤로 묶은 그녀를 보면서 새로운 불꽃이 타올랐다.

 

고지의 말대로 인생은 “rock and roll"이라며, 가슴이 원하는 곳으로 가라고 한다. 그는 청춘 최대의 위기에서 미래와 사랑을 찾으려 뛰어다닌 것이다. 그 후에 에쓰코 씨의 가게를 소개하는 잡지기사를 적고 말이다. 희망이란 과연 자신의 열정대로 갈 수 있는 것일까? 다소 동화처럼 다가오는 이 서적에서 현실을 바라본다. 우리는 너무 삭막하고 차가운 세상에서 공기를 마시며, 숨이 막힐 것처럼 답답한 일상을 보낸다. 조금이라도 숨을 쉬고 마음이 지친 나를 달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아주 작고 작은 일이라도 커피 한잔에 음악 한곡도 좋다. 인간이란 사소한 계기로 인생을 앞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렇게 찾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나도 앞이 보이지도 않고 보고 싶지 않은 나의 일상에 무지개가 보이는 저 곶의 찻집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다른 내일과 사랑, 그리고 우정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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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바리 - 제2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정윤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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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욕망인 에로스와 그리고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 이 갈림길에서 우리의 인생은 욕망에 의해 살아간다. 그런데 만약 죽음과 삶에 대한 욕망을 상실한 채 살아가야 하는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끔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살고 싶어도 제대로 살맛이 안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거나 혹은 죽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을 말이다. 때에 따라서는 만약 어느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비통하게 여길 때 죽음을 선택하는 욕망조차도 두려움으로 가득하여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는 어떻게 보는 것일까?

 

우리의 주변은 언제나 밝은 부분만 보고 어두운 부분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진실은 언제나 아름다운 존재보다는 차라리 추하고 괴롭고 지루한 것에 가깝다. 진리라는 진실은 언제나 화려하고 웅장한 거짓이 하나의 사실로 감추어 버린다. 아마 신화라는 것도 그렇다. 제목만큼이나 <프린세스 바리>라고 하여 우리 한국 전통 무속신화 중의 하나인 ‘바리데기’를 떠오를 것이나, 그렇게 바리데기처럼 결말은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바리데기에서 바리공주가 마지막에 부모님을 구하는 약을 구한 후에 신으로 봉해질망정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서사라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바리공주의 희생을 강요했다.

 

아니 그 강요로 인해 받아들이는 바리공주의 행동조차도 하나의 정당성으로 간주해야 했다. 주체적인 존재로서 희생자의 고통은 미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효녀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으나, 그 서사 너머의 희생제의란 쉽게 말할 수 없는 대가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 모든 대가에 대해 최대수혜자는 그저 강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강요로 부탁했고, 모든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못 본 척 외면한 것이다. 신화라는 것은 결국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누가 해주면 좋겠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누가 알아주면 좋겠다는 이중성의 세계이다.

 

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비현실적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오히려 비현실적인 신화가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그런 연유다. 그런 신화성이 <프린세스 바리>에서는 전반적으로 탈신화를 한다. 그것은 신화의 제의에서 어느 대상 특히 여자아이에 대한 희생에 대한 정당성과 그 희생으로 통해 얻어지는 하나의 보상이다. 남근주의 세상이던 한국사회에서 신화를 보면 여자의 희생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프린세스 바리>는 그 희생에 대한 정당성은 유효해도 그 희생에 대한 보상은 일체 없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희생 후의 보상이 삶과 죽음을 다스리는 신관이란 점에서 분명 바리공주의 신직은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삶과 죽음의 욕망 중에서 그 욕망을 제외한 부분을 관장했다는 점이다. <프린세스 바리>의 최바리는 그녀에게 보상이 없는 것은 지독한 가난과 문맹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에겐 바리공주처럼 무장승이란 아주 신출 난 남편을 얻지 못했으며, 겨우 혼인신고식을 올린 남편 청하는 굴뚝청소부로 굴뚝 안에서 일을 하다가 굴뚝이 붕괴되어 석화되었다.

 

게다가 아이도 청하의 아이가 아니었다. 바리는 청하와 사랑을 나누면서 그에게 자신을 좀 더 만져달라고 요구했으나, 청하는 그러고 싶으나 출근해야 하는 이유로 아기씨앗만 먼저 바리에게 주고 출근했다. 그와의 사랑을 나눈 후에 옆방 친구인 나나진과 대화하면서 나나진은 바리가 처음 자본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바리가 자신을 기른 산파 할매가 죽고 난 뒤에 토끼 할머니의 권유로 친부모를 찾아가면서부터 일어난 사건이다. 그녀는 아직 초등교육과정을 밟지 못하였고, 집 근처 외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던 바리는 화물차가 모이는 곳에 가서 태백에 태워달라는 부탁과 함께 어느 아저씨의 트럭에 타게 된다. 어두운 길을 달리면서 어느 휴게소에서 밥을 먹은 후에 잠이 곤히 들었고, 트럭기사는 잠든 바리에게 수면제를 먹였으며, 잠든 바리의 몸을 덮친 것이다. 임산부가 된 바리가 청하도 없이 병원에 찾아가서 검사받지만, 병원에서 아이가 아버지를 닮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청하의 마지막 핏줄까지 놓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청하의 아이를 갖고 싶던 바리에게 그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만약 그랬다면 청하의 죽음을 보고도 삶의 욕망을 뱃속의 아이에게 찾았으니 말이다. 만약 아이가 청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바리는 자기가 이때까지 바리공주가 했던 일의 일부를 자신 스스로 겨누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바리는 배운 것도 없고, 산파 할매가 무리하게 바리의 어머니에게서 속여가면서 빼앗은 아이이기에 바리에게 문맹 상태로 키웠으며, 게다가 호적조차 올리지 않았다. 바리의 호적이 올라간 것은 산파 할매의 죽음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그리고 사랑의 보상인가 아니면 바리의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없었는지, 산파 할매는 바리의 손아래 죽었다. 물론 바리가 일부러 살인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산파 할매가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으나, 그 죽음의 용기를 바리에게서 찾은 것이다. 온 몸이 암으로 가득찬 산파 할매는 약초를 잘 다루었으나, 약초내성으로 한방이 듣지 않고 양방으로 처방이 가능하나 돈이 없어서 더 이상 암을 치료할 수 없었다. 죽을 것만 같은 고통, 바리의 결혼을 볼 수 없는 삶에 대한 아쉬움, 그렇다면 그 고통과 에로스의 욕망을 에로스의 대상에게서 타나토스라는 욕망으로 전이시킨 것이다.

 

독초로 이루어진 욕탕 물에서 고통스런 죽음을 선택한 산파 할매였으나, 마음만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바리의 바리공주가 아닌 바리공주 일이 시작된다. 사는 것에 낙이 없는 사람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저승으로 인도한다. 바리가 아주 좋아했던 연슬 언니, 그녀의 죽음은 매우 비참했다. 그 동네는 유리방이라고 있었고, 그 유리방에 유리가 살았다. 유리들은 바리의 친구 나나진이 만들어진 망사스타킹이나 야한 드레스를 입고 가랑이를 벌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연슬은 그곳의 유리였고, 그녀는 자신의 힘든 몸을 뒤로 한 채 동생들의 살림을 돌보았다. 하지만 그녀도 지쳤고, 자살기도를 위해 기름으로 유리방이 있는 집을 태우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신 얼굴에 화상자국만 남겼다. 그녀는 엄청난 학대와 얼굴이 망가진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을 받았다. 살아도 살아 있지 못한 호모 사케르 같은 존재였다. 그런 연슬에게 바리는 대신 내가 죽여줄까? 라고 묻는다.

 

친구도 없이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외톨이인 연슬에게 더 이상 삶의 희망을 찾아볼 수 없고, 죽는 것마저도 외로워서 죽지 못했다. 자기가 죽으면 누가 나를 생각해주고 슬퍼해주고 알아줄 수 있냐고 말이다. 그런 연슬에게 바리는 입에 독약을 넣어 그녀를 저승으로 인도한다. 죽은 후에라도 그녀의 얼굴을 다시 화장해주고, 흐트러진 옷을 다시 정돈해주던 바리의 손길에서 삶과 죽음에서 인간에게 의미 없는 삶과 그런 삶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비참함을 어떻게 보는 것일까?

 

바리는 이 2사람 말고도 2사람을 더 저승으로 인도하고, 마지막에는 정신강박증으로 괴로워하던 토끼 할매까지도 저승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기대한다. 어떻게 보면 남의 사주를 받던 혹은 당사자의 사주를 하던 사람을 안락사 내지 유도살인을 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다. 그러나 그 범죄는 도덕적, 문화적이라는 법률적인 부분에서는 인정되나, 윤리적으로 과연 범죄일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최근에는 논란이 되던 안락사도 서로간의 논쟁으로 갈팡질팡하나, 막상 그 죽음을 원하거나 죽음이 최후의 수단이고, 최고의 평화인 절망으로 가득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오히려 그들에게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저승사자의 역할을 하는 바리에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문학소설이란 장르는 분명하고 기존의 신화적 영역에서 탈신화하여 다시 새롭게 신화로서 만들어진 서사라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삶의 억압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해방조차 욕망할 수 없다면 누가 그것을 대신 이루어줄 수 있는가? <프린세스 바리>는 당연한 윤리의식을 내포하나 도덕적, 문화적 의식에선 거론할 수 없는 욕망을 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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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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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말 그대로 앵무새를 죽인다는 것이 앵무새 같은 존재를 죽이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죽일 수 있는 것이다. 1960년대 나온 소설인 앵무새 죽이기는 21세기가 되어도 유효한 소설이다. 어린 아이 루이스의 눈으로 통해 보는 미국의 이야기다. 비록 그곳이 미국 앨라배마 주에 위치한 메이콤이란 작은 마을이라도 아마 모두가 공감하고도 남을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내전으로 큰 고통을 수반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한국전쟁이란 동족상잔을 겪은 만큼 그들은 민족이라기보다는 자유주의를 추구하던 자들이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했다. 미국은 본래 종교박해 문제로 이민한 자들이 세운 국가였다. 종교는 이민 당시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문화적인 권력을 수반했기에 그들의 종교자유는 곧 정치적 자유를 논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의지를 발산한 것이다.

 

문제는 종교에서 토크빌이 언급하다시피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는 평등하다라는 명제가 모두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인공 루이스는 어린 시절에 스카웃이라는 별명으로 그 작은 마을에 살았는데, 그 당시 일어난 일들을 회고하면서 어린 소녀 눈에 비추어진 어른들의 세계란 어떤 것인지 우리가 알아야 필요가 있었다.

 

미국 내전을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링컨 대통령이 집권하던 미국 남북전쟁이다. 남북전쟁의 원인은 백인들이 우월주의로 뭉쳐있던 남부지역과 흑인도 인권을 가져야 한다는 북부지역의 사람들끼리의 의견충돌로 인해 일어난 비극이다. 모든 역사에서 현재의 진보가 있기에는 수많은 피와 눈물로 희생삼아야 했다. 예전에 다른 강연에서 미국 영화 Gang of New York에선 남북전쟁이 일어날 때 국가에 300달러를 지불하면 징병되지 않았지만,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전쟁에 징병되었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만 전장에 참가하여 주검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런 희생을 가지고 북부군이 승리해도 여전히 남부지역의 흑인차별은 여전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 1930년대 미국은 민주당 소속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공화당과 달리 흑인에 대해 조금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 것처럼 스카웃이 살던 메이콤에서 루즈벨트 대통령과 그의 아내를 조롱하는 동네주민 말투가 들린다.

 

아직 스카웃이 살던 마을은 흑인에 대한 인권의식이 상당히 부실했다. 그 부실함은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던 시기에 히틀러가 파시즘으로 세계평화를 위협할 때, 스카웃의 학교선생은 분명 히틀러는 옳지 못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선생이 강간범으로 고소된 톰 로빈슨의 재판에서 피고인에 대해서 상당히 냉혹한 반응을 보였다. 스카웃의 아버지인 애티커스는 톰의 변호를 맡으면서 현명한 판사 테일러와 함께 충분히 톰의 무죄를 알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배심원은 톰의 유죄를 선고했다.

 

그의 이때까지 살아온 행동이나 그의 진실함을 외면하고서 말이다. 그 이유는 단지 톰 로빈슨이 흑인이란 사실이다. 흑인은 비겁하고, 남을 속이기 좋아하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하는 백인우월주의에서 톰의 유죄는 아무리 어느 개인이 옳고 정직한 사람이어도 출신이나 피부만으로 모든 것을 결부지어 버리는 사회적 편견이었다. 물론 이런 문제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문제가 있다. 단지 어느 지역이라고, 단지 어느 학교라고 무시 받고 천대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서 그런 대접은 어느 정도 감수하는 것은 최소한의 불평등으로서 인정할 수 있으나, 태어난 그 자체로 차별받는 점은 매우 부당한 일이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바로 그 앵무새 1마리가 톰 로빈슨이었다. 그런 톰을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욕과 행패를 억지로 참아야 하던 애티커스의 행동은 존중을 넘어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애티커스의 행동은 순수한 자신의 양심보단 자신이 세상에 남긴 소중한 존재 루이스와 루이스의 오빠 젬 덕분이었다. 자녀 2명에게 애티커스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흔히 우리는 부모님이나 선생들과 같은 어른들이 자녀나 학생 같은 아랫사람들에게 착하게 살자 내지 올바르게 살자고 말하나, 막상 어른들의 행동을 보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라는 의심을 해본다. 애티커스는 자신이 흑인 역시 인간이고, 그들도 인권을 가져야 한다는 법조인의 정신과 그리고 두 자녀의 아버지로서 양심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올바르게 살았으나, 마을사람들에게 공격당해야만 했다.

 

작품 초반에 젬과 루이스가 놀 수 있는 공간이 넓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입장으로 자녀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아버지이기에 두 자녀도 매우 좋은 양심을 가졌다. 나는 톰의 재판에서 루이스와 젬의 친구인 딜의 눈물을 잊을 수 없다. 딜은 재판과정에서 피고인이 흑인이란 이유로 천대받는 것을 보고 분하고 슬퍼서 눈물이 나온 것을 보면서 과연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더 이성적인가? 차라리 어린아이의 순수한 감정이 더 좋은 것이 아닐까 싶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피부색을 떠나 그 인간 존재로서 대하는 딜의 자세는 우리가 모두 배워야 하는 자세가 아닌가? 톰은 죄가 없으나 흑인이란 이유로 배심원에게 유죄선고를 받을 때 그것이 억울하다고 소리칠 수 있는 루이스와 젬에게서 뭔가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앵무새 죽이기는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게 적었다. 말 그대로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어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작품 내에 이야기하는 세상은 너무나도 깊고 곤혹스럽다.

 

평소에 술주정뱅이에 아이들도 돌보지 않은 이웰의 행동에서 마을사람들은 이웰이 충분히 자녀들을 학대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래도 이웰이 백인이란 이유로 그를 승리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웰이란 인물은 비열한만큼 치사했다. 테일러 판사에게 앙심을 품고 집주변을 돌아다니고, 애티커스에게 침을 뱉으며, 심지어 애티커스의 자녀를 폭행하려고 했다. 아니 살해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젬의 왼팔은 오른팔에 비해 제 기능을 펼칠 수 없었다.

 

관용이 없는 인간에게 관용을 펼쳐 결국 무고한 희생자는 내게 되는 점에서 오늘날의 현실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젬의 팔을 꺾을 때, 마치 도와준 부 래들리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부 래들리란 사람이 결코 나쁜 인물이 아니라 보았다. 젬과 루이스가 집으로 갈 때 래들리 집을 지나가는데, 그 집 앞의 나무 홈에 껌, 고장 난 시계, 동전 등과 같은 선물이 있었다.

 

처음에 부 래들리가 아주 무서운 인물로 알고, 그의 집앞을 지나가고, 집 앞에 가는 것도 담력시험으로 생각했으나, 알고 보면 부 래들리, 아셔는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예전에 친구를 잘못 사귄 덕분에 마을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 그가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으나 마을주민의 눈치로 못했고, 그러던 와중에 그의 존재는 마을 아이들에게 만나서 안될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젬과 루이스, 딜의 장난기와 호기심이 발동하여 아셔의 집을 기웃거리면서 아셔 역시 젬과 루이스에게 관심을 주게 되었다.

 

결국 앵무새 죽이기는 톰과 같은 흑인만 아니라 인생에서 한 번 흠집내어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던 아셔까지 궁지로 몰았다. 마지막에 비춘 그의 모습은 매우 마르고 부끄러워하며, 게다가 겁도 많은 아저씨였다. 하지만 팔을 다친 채 잠이 들어있던 젬을 보자 루이스는 자신의 손을 아셔에게 가져가 젬의 머리를 만지게 해주었다. 순수한 선의와 우정은 결국 모든 오해와 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것을 넘지 못한 것이 톰의 죽음이고, 그것을 넘을 것은 결국 아셔와의 우정이었다.

 

그러나 앵무새 죽이기에선 그런 과정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셔가 그 동안 받아온 주민들로부터의 지탄과 소문, 그것으로 인해 마을아이들이 생각하던 아셔의 인상은 아셔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애티커스는 아셔가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는 나오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앵무새라는 것은 인간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않지만, 인간과 같이 말을 할 수 있는 동물이다.

 

말을 한다는 점에서 대화가 가능하나, 그 대화를 할 수 있어도 앵무새라 만드는 그 자체, 즉 인간이면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차별의식이 들어있고, 앵무새를 죽인다는 것은 출생이 그래서나 혹은 한 번의 실수로 인해 대다수로부터 배타적인 대우를 받게 됨으로 그의 인간적 존중이 상실되는 것과 같다. 단지 흑인이란 이유로 억울하게 구속되어 사형 당할지도 모르는 톰이 자신을 강간범으로 몰아넣은 이웰과 그 이웰의 딸과 법정에서 만나면서 이웰의 딸을 보고 불쌍하다고 했다. 인간이 앵무새를 돌보는 것이어야 하나, 오히려 앵무새 쪽에서 인간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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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원전 완역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9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박용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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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는 예전에 소인국에 대한 스토리 부분만 알고 있었다. 그 후에 나오는 대인국과 하늘을 나는 나라, 그리고 말의 나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적은 없었다. 단지 대인국에 가서 모험을 한다는 점까지는 알았다. 그 모험으로 가득한 걸리버 여행기, 그는 과연 세계를 돌았다고 하면서 정말 돌았을까?

 

이 글을 적기 전에 다른 문화평론가의 서평과 더불어 글쓴이 후기를 보고 어림짐작한 부분이 맞음에 나는 조금 놀랐었다. 왜냐하면 걸리버의 최후 모험이자 그에게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크게 후회하게 만든 말의 나라에서 보인 이야기들이다. 말의 나라에서 걸리버가 인간이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고, 사나운 고릴라처럼 행동하던 야후를 보고, 그와 달리 아주 현명하고 침착하며 모든 것을 이성적인 판단아래 삶을 살아가는 후이늠에게 깊은 존경과 애정을 보여준다.

 

문제는 말의 나라 주민인 후이늠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방식들이 마치 플라톤이 국가정체로 통해 보여준 것과 같은 점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그리스 철학의 시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소크라테스는 살아생전에 한 번도 책을 엮은 점이 없었으나,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전해 온다. 대부분의 플라톤의 서적은 개인이 문장을 나열하여 가는 논문식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으로 진행하는 대화라는 점이다.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에서 서사의 1번째는 신화라는 비이성적 영역이라면, 대화는 이성적 사고를 추구하는 합리의 추구이다. 문제는 합리적 이성이라고 해도 그 당시의 관습과 문화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도덕이란 것은 통시태적인 보편성이지, 윤리처럼 공시적인 보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최종적인 걸리버의 이상향은 플라톤이 추구하는 군주정이었다.

 

철학의 정치지도자가 이성의 판단 아래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하며, 그 지배는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롭게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겉으로 이 책을 봐서는 매우 진보적인 인물로 평가될 수 있을 줄 모르나, 막상 그의 결말에 다다르면 오히려 보수적인 존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해설서의 주해처럼 소인국은 영국을 의미하면서, 땅도 좁은 영국이 해상무역권 제패를 위해 바다로 나가는 점에서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 여겼다.

 

해상무역과 봉건사회로 침투하는 전 자본주의적인 경향은 돈과 제물이란 것들이 결국 인간을 욕망덩어리를 만들어버리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정체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참된 군주란 철학적인 만큼 강한 육체가 필요하고, 재산에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재산을 멀리하고 운동을 장려하며 이성적 철학을 목적함으로서 이상적 국가를 바란 것이나, 현실의 인간들에게 모두 부질없는 일임일 아이러니적으로 반영한다.

 

소인국에서 보자면 겉으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나, 실상 인간에 대한 정도 없으며, 자식도 자식이 아닌 하나의 도구로 취급한 점으로 본다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 도덕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겉을 보면 항상 신사처럼 보이나, 그 뒤를 알아보면 온갖 모략과 음모로 가득한 것을 알 수 있다. 걸리버가 소인국 황제의 부탁에 따라 다른 소인국을 정복했고, 왕궁에 불이 나서 모두 위기에 빠져 오줌으로 불을 껐는데, 그것이 역죄로 몰린 것이다. 다행히 걸리버가 호의를 베풀어준 대신의 도움으로 몰래 도망칠 수 있으나, 인간에게 가진 이중적 자세는 당시 작가가 보던 영국인 줄 모른다.

 

그리고 대인국에 가면서 사람들이 거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진짜 중요한 것들은 대비하지 않고, 마치 태평천하를 보는듯한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안이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걸리버가 대인국에 도착해 처음 만난 처음 주인 농부는 걸리버에 대해 상당한 노동착취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좋아하는지 사실 국가정체에서는 각 계급별로 신분을 나누더라도 그 하위에 있는 사람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했다.

 

물론 실제 고대그리스 시대의 노예들은 매우 심한 노동과 착취에 시달렸기에 그들의 민주주의는 진실한 민주주의가 아닌 귀족주의에 불과했다. 한국의 역사로 보자면 조선시대 사대부와 같은 것이다. 아마 자신들의 문명수준이 뛰어나지 않으나 단지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자신들의 위치에 만족하면서 농민이나 괴롭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초반에 걸리버는 영국이란 나라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긴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상대나라의 단점과 더불어 자신의 나라 역시 단점으로 가득한 것을 느낀다. 그 부분은 기술이 발달하나 아무 소용없는 하늘의 나라에서 알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골몰히 무엇을 연구한다. 하지만 정작 필요하고 알맞은 물건들은 생산되지 않는다.

 

아마 영국의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인 것처럼 해상무역과 상대국가의 교전이 늘어가는 점이 필요적으로 기술의 발달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그런 기술발전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차라리 후이늠들이 거주하는 나라에서 농업과 축산업을 하기를 바란다. 말의 나라에서 보인 이성국가에 너무 눈에 팔렸을까? 걸리버는 말의 나라에서 추방된 후에 사람을 멀리하고, 마치 자신이 말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미친 자로 보나, 걸리버의 눈에는 오히려 세상이 미친 것 같았다. 후이늠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거짓말이란 단어의 존재성과 그 의미조차 몰랐다. 걸리버의 말이 거짓처럼 들리면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농담의 한 부분이었다. 실성한 사람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걸리버는 영국의 집으로 갔으나, 그 영국이란 곳을 무척이나 싫어한 것 같다.

 

가족들과 만나는 것을 꺼려하고 대화조차 피하며, 심지어 인간냄새를 맡기 싫어 자기 혼자 따로 지내려 한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후이늠 나라의 동족이나 지능이 떨어진 말들과 그 말을 돌보는 마부 정도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추구하는 것은 나쁘다고 하지 않겠지만, 그가 하는 행동들은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라 볼 수 있다. 이성이란 것 역시 이성적인 행동이 인정되는 부분에서 인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후이늠이 완벽한 지성을 가진 생물이라고 해도 과학의 발달은 결국 이성의 발달과 맞물린다. 시대착오적인 사고를 하는 것을 걸리버인가? 아니면 당대 사람인가?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걸리버가 보는 인간의 이중적 잣대는 지금의 유효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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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후마니타스의 문학
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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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이란 문학소설은 예전에 모리스 메를로 퐁티라는 프랑스 현상학자가 저술한 <폭력과 휴머니즘>이란 도서에서 알았다. 메를로 퐁티의 <폭력과 휴머니즘>을 보고 있을 당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은 후였다. 메를로 퐁티가 그런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 이유는 바로 스탈린의 집권이다. 주인공 루바쇼프는 마치 1938년 정치적으로 암살당한 부하린을 연상하게 한다. 레닌과 더불어 10월 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많은 일들을 해온 사람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닌의 사후 러시아의 유명은 달리한다. 바로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갈등이다. 이 소설에서 보그로프라는 자가 매우 중요한 인상을 풍기는데, 그는 유명한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작품 1가지 제목과 동일한 “전함 포템킨”의 수병이었다. 그의 사형이 집행된 후 루바쇼프의 옆 동인 406호 옛날정부에 충실한 장교가 보그로프의 사망소식을 알려준다. ‘미하엘 보그로프, 전함 포템킨의 전직 선원, 동부 함대 함장, 첫 혁명 훈장 nt여자. 사형되다’

 

따지고 러시아혁명에서 보그로프나 루바쇼프나 모두 매우 중요한 인물이고, 넘버원이라고 불리는 사나이 옆에서 루바쇼프는 같이 사진도 찍었을 정도다. 아니 같이 식사와 대화도 하고 그의 업무를 받아 외교와 공작업무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의 총알이다. <한낮의 어둠>에서는 이런 스탈린에 의해 독재화되어버린 소비에트 연방의 현실을 아주 현학적인 질문으로서 비판한다. 작가인 아서 쾨슬러 역시 헝가리 출신 공산당원이였으나, 그가 활동하면서 그는 공산당을 아주 저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보그로프의 죽음과 관련 있다. 보그로프는 잠수한 건조에서 매우 크고 강력한 잠수한 1대를 선호했으나, 넘버원은 작은 잠수함 3대를 원했다. 결국 보그로프는 반역자로 몰리고, 갖은 고문과 허위날조로 고문당한 채 생을 마감한다. 그의 1대의 잠수함은 소비에트 연방의 일국사회주의가 아닌 연속적 혁명을 의미했고, 넘버원은 작은 잠수함 3대로 자국을 보호하기를 원했다. 결국 넘버원의 반대들은 모두 배신자 내지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채 목 뒤 언저리에 구멍을 내어버렸다.

 

그런 짓은 물론 루바쇼프도 조금 거들었다. 그도 좋은 동료와 전우들을 소비에트 연방 정치의도에 따라 숙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당을 위해서란 생각도 했으나, 한편으로 이미 돌아간 그 어른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넘버원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이름의 가치는 매우 중요했다. 러시아혁명을 이끈 혁명영웅을 몇 번의 조작으로 배신자라는 낙을 주었기 때문이다. 영웅들을 사라지게 하는 이유는 그 영웅들이 결국 넘버원에게 치명적인 방해꾼으로 되기 때문이다. 루바쇼프가 그 넘버원의 크고 넓은 엉덩이를 그냥 의자에 앉았다는 말처럼 혁명 후 21년이 지난 1938년은 혁명이란 그저 역사적 사실보단 신화적인 존재로서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계속 혹독하게 고문하던 클레트킨을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루바쇼프는 생각했다. 혁명은 분명 역사적 진보이나, 도리어 역으로 퇴행했다. 혁명 후에 나온 사람들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지혜의 인간이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이란 무지의 동물이었다. 바로 넘버원에겐 호모 사피엔스는 필요 없고 비판적 생각 없이 살아가는 네안데르탈인만 필요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자코뱅당의 영웅적 혁명가인 당통이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듯이 과거를 청산하던 자들은 모두 청산당한 것이다.

 

이런 굴레들을 왜 오는가? 이 책을 보면서 인간에게 언제나 인류를 위한 희생이 필요했다. 국가라는 체계와 사회라는 조직도 모든 것이 희생이 필요했다. 존재하기 위한 존재불가함을 지정한다는 아이러니에서 말이다. 이 책에서 이런 비슷무리한 문구가 나온다. 죽음을 없애기 위해 죽어야 하고, 양들이 죽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양을 죽이야 한다. 결국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목표에서 폭력으로 이용한 폭력제어라는 하나의 공식이 성립된다. 메를로 퐁티가 이 소설을 인용한 것도 다 폭력으로 폭력을 제어함은 결국 폭력이 되는 아이러니가 있다는 점을 밝혔다.

 

혁명은 성공했다. 하지만 혁명은 실패했다. 당시 대중들은 러시아 차르체제에 지치고, 그들을 몰아내도 케렌스키와 백위군이 존재했다. 이 모두가 레닌을 중심으로 한 적위군이 활약하였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레닌의 정부는 가난과 빈곤으로부터 러시아를 벗어나게 하지 않았다. 조직의 구성만 교체될 뿐, 그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미 성립된 것이 있기에 그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이미 모든 것을 존재하고 이루어짐에 대한 자기착각에서 말이다.

 

이 책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든 혁명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추구하나 모두 실패한다. 대중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한 것이다. 이 책의 후기에 번역한 문광훈 교수가 에릭 홈스봄의 <극단의 시대>에서 발췌한 글이 있다. 나는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 대신 <폭력의 시대>를 인용했다. 전자는 20세기를 다룬 도서라면, 후자는 21세기를 다룬 도서다. 그러나 폭력과 테러리즘에 대한 근원적인 영역은 일치하는 점은 많다.

 

“무제한적 폭력을 부르는 더 위험한 요인이 있다. 1914년 이후 국가 간 내부 세력 간의 분쟁 둘 다를 지배한 이념적 확신이다. 그것은 자신을 선(善), 상대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명분은 너무나 정당하고 상대의 명분은 너무도 형편없기 때문에, 패배를 면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어떤 것도 동원해야 하고, 동원되는 모든 수단은 정당하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그런 확신을 가지면 정부군이나 반군 모두 어떤 야만적 행동도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 글은 어느 나라에 대한 내전에 대한 이야기다. 정부군이나 반군이나 따지고 보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극단적 대치이다. 그렇다면 <한낮의 어둠>에서 말하는 폭력은 왜 다시 돌아오는가? 처음 루바쇼프는 소비에트 연방국가 사람이라면 모두 알 만한 사람이나, 마지막 장의 문법적 허구에서는 그의 공개재판을 두고 신문기사의 내용이 인상 깊다. 많은 대중들이 그에게 야유와 분노를 표출하는 점을 말이다. 결국 대중들은 누가 옳고 그른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 자신들이 옳기를 만다는 존재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존재들도 역시 스탈린의 광기어린 폭정에 죽어갔다. 어제 나는 타인을 쏘아 죽였으나, 이제 그 총이 나에게 돌아온다. 루바쇼프도 그렇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운 것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라는 생애의 허무와 부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젊은 세대의 기수로 보이는 루바쇼프의 네안데르탈인 글레트킨은 사실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글레트킨은 네안데르탈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을 알았고, 루바쇼프는 글레트킨과 지금의 대중에게 사라져야할 존재임을 확인한다.

 

“글레트킨과 새 네안데르탈인들은 머리에 번호 적힌 세대의 과업을 완결했을 뿐이라고 루바쇼프는 수백 번 홀로 되풀이했다. 동일한 원칙이 그들 입에서 말해질 때 그리고 비인간적으로 변하는 것은 순전히 시대 풍조 때문이었다. 이바노프가 똑같은 주장을 할 때 그의 목소리에는 사라져 버린 세계를 잊지 않음으로써 과거에 남겨진 희미한 빛깔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사람은 자기의 어린 시절을 부정할 수 있어도 그것을 지울 수는 없다. 이바노프는 최후까지 자신의 자기를 질질 끌고 다녔다. 그래서 그가 하는 무슨 말에나 장난기 어린 우주의 빛이 서려 있었다. 글레트킨이 그를 두고 냉소주의자라고 부른 이유는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글레트킨의 무리에게는 지워야 할 어떤 것도 없었다. 그들은 어떤 과거도 안 가졌기 때문에 과거를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탯줄도 없이, 경쾌함도 없이, 우울도 없이 태어났다.”

 

즉, 러시아의 새로운 대중들에겐 혁명이란 그저 이름만 들어본 존재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당시의 열정과 죽음을 넘나든 사선을 그들에겐 낯선 이름이다. 루바쇼프의 심문관이나 이내 총살형을 당한 이바노프는 혁명의 아픔으로 한 쪽 다리를 잃었다. 그에겐 다리란 하나의 고통이고 상징이다. 과거에 지닌 그 모든 것들이었다. 이 책에서 혁명에 직접 참여한 위원들은 보통 학자나 교수보다 더 학문의 영역이 높았다. 그러나 이제 혁명이 완료되자 이들은 그저 구세대로 될 뿐이다. 과거의 단절은 결국 일어나고, 그것은 러시아의 네안데르탈인이란 신인류를 탄생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넘버원이 있었다. 자신의 적도 적으로 죽이고, 자신의 친구도 친구로 죽이고, 그 친구를 죽인 친구마저 그는 죽였다. 그 죽음에서 루바쇼프는 자신의 죽음마저 그렇게 숙청되는 사실마저 하나의 당위성으로 받아들인다. 역사라는 인류라는 거대한 이름에 모든 것을 바친 그에게 고문이란 통하지 않았다. 클레트킨은 잠을 재우지 못하거나 눈부신 형광등을 이용해 정신적 고문을 가했지, 무력으로 그를 굴복하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무력에 의해 굴복하지 않은 채 죽으면 그는 하나의 순교자가 되기 때문이다. 루바쇼프에게 거짓 범죄를 씌운 언청이인 키퍼의 아들은 과도한 폭력으로 신념을 잃은 지가 오래다. 루바쇼프의 만남과 그의 발언을 증언할 때 그의 기억력은 오류를 나타냈다.

 

루바쇼프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어떤 당의 가치나 혁명에 대한 위업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것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을 주는 것이다. 그가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자신이 살아온 흔적이다. 구제해야할 대중들을 구제해도 돌아온 것은 되돌이표라는 것을 루바쇼프는 알고 있지만, 적어도 그것에 40년 동안의 인생마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지금의 넘버원의 계략이었다. 그 부정을 지우지 못하기에 루바쇼프는 넘버원의 암살계획에 거짓서명을 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2방의 권총사격이다. 그러나 그 죽음을 부러워한 이도 있다.

 

옆방 402호의 장교는 앞으로 5,000일이 넘는 기간을 이 감옥에서 보낸다고 했다. 20년 동안 감옥살이에서 앞이 보이지 않을 바에 차라리 죽음이란 해방이 필요할지 모른다. 인간이 제일 중요한 게 생명이나, 여기선 생명보단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성이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아왔냐는 것이다. 그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게 어긋나도 그것을 망가뜨리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버린다는 의미이니, 인류의 아이러니는 그렇게도 흘러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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