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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ㅣ 후마니타스의 문학
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9월
평점 :
<한낮의 어둠>이란 문학소설은 예전에 모리스 메를로 퐁티라는 프랑스 현상학자가 저술한 <폭력과 휴머니즘>이란 도서에서 알았다. 메를로 퐁티의 <폭력과 휴머니즘>을 보고 있을 당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은 후였다. 메를로 퐁티가 그런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 이유는 바로 스탈린의 집권이다. 주인공 루바쇼프는 마치 1938년 정치적으로 암살당한 부하린을 연상하게 한다. 레닌과 더불어 10월 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많은 일들을 해온 사람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닌의 사후 러시아의 유명은 달리한다. 바로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갈등이다. 이 소설에서 보그로프라는 자가 매우 중요한 인상을 풍기는데, 그는 유명한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작품 1가지 제목과 동일한 “전함 포템킨”의 수병이었다. 그의 사형이 집행된 후 루바쇼프의 옆 동인 406호 옛날정부에 충실한 장교가 보그로프의 사망소식을 알려준다. ‘미하엘 보그로프, 전함 포템킨의 전직 선원, 동부 함대 함장, 첫 혁명 훈장 nt여자. 사형되다’
따지고 러시아혁명에서 보그로프나 루바쇼프나 모두 매우 중요한 인물이고, 넘버원이라고 불리는 사나이 옆에서 루바쇼프는 같이 사진도 찍었을 정도다. 아니 같이 식사와 대화도 하고 그의 업무를 받아 외교와 공작업무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의 총알이다. <한낮의 어둠>에서는 이런 스탈린에 의해 독재화되어버린 소비에트 연방의 현실을 아주 현학적인 질문으로서 비판한다. 작가인 아서 쾨슬러 역시 헝가리 출신 공산당원이였으나, 그가 활동하면서 그는 공산당을 아주 저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보그로프의 죽음과 관련 있다. 보그로프는 잠수한 건조에서 매우 크고 강력한 잠수한 1대를 선호했으나, 넘버원은 작은 잠수함 3대를 원했다. 결국 보그로프는 반역자로 몰리고, 갖은 고문과 허위날조로 고문당한 채 생을 마감한다. 그의 1대의 잠수함은 소비에트 연방의 일국사회주의가 아닌 연속적 혁명을 의미했고, 넘버원은 작은 잠수함 3대로 자국을 보호하기를 원했다. 결국 넘버원의 반대들은 모두 배신자 내지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채 목 뒤 언저리에 구멍을 내어버렸다.
그런 짓은 물론 루바쇼프도 조금 거들었다. 그도 좋은 동료와 전우들을 소비에트 연방 정치의도에 따라 숙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당을 위해서란 생각도 했으나, 한편으로 이미 돌아간 그 어른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넘버원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이름의 가치는 매우 중요했다. 러시아혁명을 이끈 혁명영웅을 몇 번의 조작으로 배신자라는 낙을 주었기 때문이다. 영웅들을 사라지게 하는 이유는 그 영웅들이 결국 넘버원에게 치명적인 방해꾼으로 되기 때문이다. 루바쇼프가 그 넘버원의 크고 넓은 엉덩이를 그냥 의자에 앉았다는 말처럼 혁명 후 21년이 지난 1938년은 혁명이란 그저 역사적 사실보단 신화적인 존재로서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계속 혹독하게 고문하던 클레트킨을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루바쇼프는 생각했다. 혁명은 분명 역사적 진보이나, 도리어 역으로 퇴행했다. 혁명 후에 나온 사람들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지혜의 인간이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이란 무지의 동물이었다. 바로 넘버원에겐 호모 사피엔스는 필요 없고 비판적 생각 없이 살아가는 네안데르탈인만 필요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자코뱅당의 영웅적 혁명가인 당통이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듯이 과거를 청산하던 자들은 모두 청산당한 것이다.
이런 굴레들을 왜 오는가? 이 책을 보면서 인간에게 언제나 인류를 위한 희생이 필요했다. 국가라는 체계와 사회라는 조직도 모든 것이 희생이 필요했다. 존재하기 위한 존재불가함을 지정한다는 아이러니에서 말이다. 이 책에서 이런 비슷무리한 문구가 나온다. 죽음을 없애기 위해 죽어야 하고, 양들이 죽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양을 죽이야 한다. 결국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목표에서 폭력으로 이용한 폭력제어라는 하나의 공식이 성립된다. 메를로 퐁티가 이 소설을 인용한 것도 다 폭력으로 폭력을 제어함은 결국 폭력이 되는 아이러니가 있다는 점을 밝혔다.
혁명은 성공했다. 하지만 혁명은 실패했다. 당시 대중들은 러시아 차르체제에 지치고, 그들을 몰아내도 케렌스키와 백위군이 존재했다. 이 모두가 레닌을 중심으로 한 적위군이 활약하였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레닌의 정부는 가난과 빈곤으로부터 러시아를 벗어나게 하지 않았다. 조직의 구성만 교체될 뿐, 그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미 성립된 것이 있기에 그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이미 모든 것을 존재하고 이루어짐에 대한 자기착각에서 말이다.
이 책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든 혁명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추구하나 모두 실패한다. 대중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한 것이다. 이 책의 후기에 번역한 문광훈 교수가 에릭 홈스봄의 <극단의 시대>에서 발췌한 글이 있다. 나는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 대신 <폭력의 시대>를 인용했다. 전자는 20세기를 다룬 도서라면, 후자는 21세기를 다룬 도서다. 그러나 폭력과 테러리즘에 대한 근원적인 영역은 일치하는 점은 많다.
“무제한적 폭력을 부르는 더 위험한 요인이 있다. 1914년 이후 국가 간 내부 세력 간의 분쟁 둘 다를 지배한 이념적 확신이다. 그것은 자신을 선(善), 상대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명분은 너무나 정당하고 상대의 명분은 너무도 형편없기 때문에, 패배를 면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어떤 것도 동원해야 하고, 동원되는 모든 수단은 정당하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그런 확신을 가지면 정부군이나 반군 모두 어떤 야만적 행동도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 글은 어느 나라에 대한 내전에 대한 이야기다. 정부군이나 반군이나 따지고 보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극단적 대치이다. 그렇다면 <한낮의 어둠>에서 말하는 폭력은 왜 다시 돌아오는가? 처음 루바쇼프는 소비에트 연방국가 사람이라면 모두 알 만한 사람이나, 마지막 장의 문법적 허구에서는 그의 공개재판을 두고 신문기사의 내용이 인상 깊다. 많은 대중들이 그에게 야유와 분노를 표출하는 점을 말이다. 결국 대중들은 누가 옳고 그른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 자신들이 옳기를 만다는 존재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존재들도 역시 스탈린의 광기어린 폭정에 죽어갔다. 어제 나는 타인을 쏘아 죽였으나, 이제 그 총이 나에게 돌아온다. 루바쇼프도 그렇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운 것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라는 생애의 허무와 부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젊은 세대의 기수로 보이는 루바쇼프의 네안데르탈인 글레트킨은 사실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글레트킨은 네안데르탈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을 알았고, 루바쇼프는 글레트킨과 지금의 대중에게 사라져야할 존재임을 확인한다.
“글레트킨과 새 네안데르탈인들은 머리에 번호 적힌 세대의 과업을 완결했을 뿐이라고 루바쇼프는 수백 번 홀로 되풀이했다. 동일한 원칙이 그들 입에서 말해질 때 그리고 비인간적으로 변하는 것은 순전히 시대 풍조 때문이었다. 이바노프가 똑같은 주장을 할 때 그의 목소리에는 사라져 버린 세계를 잊지 않음으로써 과거에 남겨진 희미한 빛깔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사람은 자기의 어린 시절을 부정할 수 있어도 그것을 지울 수는 없다. 이바노프는 최후까지 자신의 자기를 질질 끌고 다녔다. 그래서 그가 하는 무슨 말에나 장난기 어린 우주의 빛이 서려 있었다. 글레트킨이 그를 두고 냉소주의자라고 부른 이유는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글레트킨의 무리에게는 지워야 할 어떤 것도 없었다. 그들은 어떤 과거도 안 가졌기 때문에 과거를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탯줄도 없이, 경쾌함도 없이, 우울도 없이 태어났다.”
즉, 러시아의 새로운 대중들에겐 혁명이란 그저 이름만 들어본 존재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당시의 열정과 죽음을 넘나든 사선을 그들에겐 낯선 이름이다. 루바쇼프의 심문관이나 이내 총살형을 당한 이바노프는 혁명의 아픔으로 한 쪽 다리를 잃었다. 그에겐 다리란 하나의 고통이고 상징이다. 과거에 지닌 그 모든 것들이었다. 이 책에서 혁명에 직접 참여한 위원들은 보통 학자나 교수보다 더 학문의 영역이 높았다. 그러나 이제 혁명이 완료되자 이들은 그저 구세대로 될 뿐이다. 과거의 단절은 결국 일어나고, 그것은 러시아의 네안데르탈인이란 신인류를 탄생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넘버원이 있었다. 자신의 적도 적으로 죽이고, 자신의 친구도 친구로 죽이고, 그 친구를 죽인 친구마저 그는 죽였다. 그 죽음에서 루바쇼프는 자신의 죽음마저 그렇게 숙청되는 사실마저 하나의 당위성으로 받아들인다. 역사라는 인류라는 거대한 이름에 모든 것을 바친 그에게 고문이란 통하지 않았다. 클레트킨은 잠을 재우지 못하거나 눈부신 형광등을 이용해 정신적 고문을 가했지, 무력으로 그를 굴복하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무력에 의해 굴복하지 않은 채 죽으면 그는 하나의 순교자가 되기 때문이다. 루바쇼프에게 거짓 범죄를 씌운 언청이인 키퍼의 아들은 과도한 폭력으로 신념을 잃은 지가 오래다. 루바쇼프의 만남과 그의 발언을 증언할 때 그의 기억력은 오류를 나타냈다.
루바쇼프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어떤 당의 가치나 혁명에 대한 위업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것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을 주는 것이다. 그가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자신이 살아온 흔적이다. 구제해야할 대중들을 구제해도 돌아온 것은 되돌이표라는 것을 루바쇼프는 알고 있지만, 적어도 그것에 40년 동안의 인생마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지금의 넘버원의 계략이었다. 그 부정을 지우지 못하기에 루바쇼프는 넘버원의 암살계획에 거짓서명을 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2방의 권총사격이다. 그러나 그 죽음을 부러워한 이도 있다.
옆방 402호의 장교는 앞으로 5,000일이 넘는 기간을 이 감옥에서 보낸다고 했다. 20년 동안 감옥살이에서 앞이 보이지 않을 바에 차라리 죽음이란 해방이 필요할지 모른다. 인간이 제일 중요한 게 생명이나, 여기선 생명보단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성이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아왔냐는 것이다. 그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게 어긋나도 그것을 망가뜨리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버린다는 의미이니, 인류의 아이러니는 그렇게도 흘러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