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김명주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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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는 이름은 어디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우연히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푸른 문학이라고 하여 일본 근대문학가들의 작품을 인용하여 만든 작품이 있었다. 그때 말로만 들었던 나츠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달려라 멜로스>를 필두로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이란 작품을 먼저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추후에 그것에 관계되는 소설을 직접 찾아 보았다. 여기서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어보았고, 소설에서 보던 것과 애니메이션에서 보는 것에 대해 서로 비교하면서 문자서사와 영상서사가 가진 독특한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푸른 문학 시리즈에서 지옥변이란 단편짜리 작품으로 보았다. 그리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다자이 오사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과 이번에 읽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을 읽으면서 그가 나츠메 소세키에게 인정을 받은 문학가란 점에서도 놀라웠다. 가라타니 고진이란 인물이 근대사회에서 벗어나 현대사회로 들어가는 일본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대표적인 문화평론가라면 그 이전에는 나츠메 소세키인 것으로 알았다. 나츠메 소세키는 문학가로서 혹은 문학비평가로서 큰 역량을 보여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나츠메 소세키가 인정한 작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란 인물이 그것도 애니메이션 지옥변으로 알았던 작가를 책으로 본다는 것은 매우 신기했다. 이번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푸른 문학의 <지옥변>이란 작품을 보았다. 조금 내용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히데요시라는 화가가 등장하고, 마지막에 그의 딸이 불에 타서 죽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작품을 원작대로 만든 게 아니라 각본과정에서 조금 수정한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거의 작품과 비슷하게 만든 것은 <인간실격> 정도이고,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은 아주 극히 일부분만 작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어째든 <지옥변>을 보면서 느낀 것은 애니메이션에 화가가 매우 예술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대해 화려한 것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진실을 보고 있었다. 군주는 매우 아름다운 것만 좋아하여 그 아름다운 것에 방해하거나 자신의 미학에 어울리지 않으면 모두 제거하는 인간이었다. 흔히 말하여 폭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폭군이라고 보기에 너무 신화적인 존재였다. 우리는 그 군주에 대해 책임을 돌리나 그 군주 자체가 우리 인간의 대표적인 관념적 한계성을 형이하학적으로 이미지로 생성된 것이다. 자신이 즐기는 배에서 어부들의 배가 부딪히니 그들을 그대로 참수하는 것도 모자라, 마을에 병이 들자 모두 불태워 죽인다.

 

심지어 병사는 자신의 아이가 집에 갇혀 있어서 구해달란 한 중년의 여성을 칼로 베어댄다.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분명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은 필연지사다. 소설에선 그런 애니메이션 설정과 달리 군주는 매우 훌륭한 인물로 표현하고 있는데, 혹은 아니라면 그의 인품을 두고 역설적으로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히데요시에게 딸이 하나 있으니 그녀는 매우 수려한 용모에 인성도 훌륭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큰 인망을 얻고 있다. 단지 아쉬운 점은 아버지 히데요시와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성의 시녀로 살아가고 있으며, 아버지 히데요시나 딸 모두 성에서 나와 같이 살기를 바란 것이다.

 

그녀는 효심도 지극한 것도 중요했다. 히데요시는 성격이 괴팍한 만큼 외모도 좋지 않았다. 진짜 원숭이를 성에 들여 그 원숭이의 이름을 히데요시라고 붙여 그 화가인 히데요시를 놀리려고 한 것이 그 성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딸이 원숭이를 길들이고, 게다가 주변에 칭찬받을 만큼 잘 지내게 하자 이제 원숭이는 히데요시가 아니라 원숭이 히데가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많은 사람들이 좋은 마음이 있다면 불온한 마음도 있다. 서술자인 나라는 존재가 밤에 성안을 도는데, 원숭이 히데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게다가 히데요시의 딸이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본 것이다. 군주가 히데요시의 딸을 범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임금은 히데요시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그림 지옥변을 그리라고 하는 명을 내린다. 히데요시는 그 명을 받들어 제자들에게 온갖 해괴한 요구를 하고, 그 모습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 그것도 모자라 사용하지 않은 성에 귀족의 여성이 불타는 모습을 그리고 싶다고 한다. 그 그림에서 아름다운 피부가 불에 타서 뼈만 남고, 아름다운 그 검은 머리는 붉은 화염으로 휘날리는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왕은 이상한 생각하는지 당일 그 요구를 받아들여 지옥변의 정점을 찍게 한다. 히데요시는 알고 있었을까? 딸이 비참하게 불에 타 죽는데, 그걸 보고 그림을 그린다. 겉으론 예술에 미쳐버린 화가처럼 보이나 그림이 완성되고 나서 그는 자살을 한다.

 

지옥 중에서 가장 끔직한 업화의 염화가 타오른 장면을 그리고 싶은 요시히데, 그는 그 지옥 같은 모습만큼은 보지 못하여 그릴 수가 없으나, 그 장면을 그린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옥이란 정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으나, 작품을 보면 지옥은 이미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옥변이란 그림은 지옥을 그린 그림이니 지옥을 안 보고 그린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나 이미 지옥은 있었다. 자신의 딸이 산 채로 불태워 고통스레 죽을 때 그것을 보는 아버지란 지옥은 곧 현실이었다.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희생하면서도 그림을 그린 아버지, 그의 모습은 너무 모순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화술은 당대 최고이기에 군주가 몇 번이나 그에게 상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그는 항상 딸과 함께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그가 딸의 죽음을 두고 미치광이처럼 그림을 그려 지옥과 같은 그림을 그렸으니 참으로 허무하고도 비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지옥변을 시작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은 허무주의적인 요소가 많다. 뭔가 아쉽다는 것보다 뭔가 하나가 아니 둘 이상이 빠진 기분이라고 할까? <무도회>에서 소녀 아키코는 키는 작으나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아가씨였다.

 

그런 그녀가 세월이 지나 할머니가 되어 기차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아키코 어느 청년과 만나 어린 시절에 프랑스장교와 무도회에서 댄스를 즐기던 이야기를 했는데, 프랑스 장교의 이름은 쥘리앵 비오라고 하였으나, 그 청년은 그 장교가 국화부인을 저술한 로티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키코는 그저 줠리앵 비오라고 했다. 내용을 보면 시작과 달리 끝은 너무 허무하게 또는 어이없이 끝난다. 작품 마지막을 본다면 줠리앵 비오는 아키코와 지난 이야기를 소설을 내었는데, 본명이 아니라 비오라는 이름으로 냈기에 그 소설을 아직 아키코가 읽어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지옥변과 다르게 시작은 산뜻하고 뭔가 이야기가 새롭게 전개되려다가 위기나 절정도 없이 끝난 이야기는 소설의 전반적인 흐름을 깨는 기분이었다.

 

뭔가 특별하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려는 억지스러운 느낌보단 그저 그것을 해체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보였다. 그런 점에서 뒤편에 나온 <갓파>는 모순과 풍자의 그 자체였다. 그래도 나름 소설의 맛이 느껴질 정도로 분량이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길었다. 어느 한 남자가 갓파를 만나 우연히 갓파나라에 가서 그곳에 겪은 일들을 기록하여 다시 인간계로 왔는데, 그 남자는 정신병원에 갇힌 사람이었다. 문제는 갓파들에 대한 기억이나 그들의 모습은 너무 명확하고, 그가 구사한 언어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갓파들의 언어이니 그가 이상하게도 갓파와 인간의 말을 둘 다 구사한 점에서 갓파나라에 안 갔다고 말하지 못하면서도 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곧 다른 것들이었다.

 

남자는 병원에서 철학자 토크의 서적을 보면서 읽고 있다고 하나 그가 직접적으로 들고 있던 것은 전화번호부였다. 그러나 그 전화번호부를 보면서 “야자수 꽃봉오리나 대나무 속에 부처님은 일찍이 잠들어 계시네. 길가 메마른 무화과와 함께 그리스도도 이미 죽고 만 것 같네. 하지만 우리들은 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예를 들면 연극의 배경 그림 앞에서도.”, 나름 허무주의와 실존주의적인 면이 보이기도 하나 그는 현실에서 보고 있는 것과 자신의 뇌 안에서 보고 있는 것이 달랐다. 예술이란 것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인가?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본래 광인들이란 대현자이면서도 바보이면서도 예언가이면서도 예술가였다.

 

인간이 드러나지 못한 것들 드러내고, 인간이 알지 못한 것을 말하기도 했다. 정상적이지 않기에 정상적인 인간들이 가진 평범하고 일반적인 무지라는 지식적 한계를 벗어난 것이 광인이다. 그래서 남자는 시를 만들고, 계속 사유를 멈추지 않으려고 하지 않은가? 갓파의 세계에서 보낸 그는 갓파의 세계 역시 참혹한 냉정하여 다시 인간세계로 돌아오려 했으나, 인간세계에서는 미치광이 환자였다. 이성을 가지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공상의 세계가 좋은지 아니면 미치광이처럼 있어야 할 현실이 좋은 지에서 어디에도 낙원을 부여되지 않는구나 하는 회의적인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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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의 미궁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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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의 미궁에서 크림슨이란 것은 주인공 후지키가 납치되어 마치 게임 안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던 그 장소에 살던 새였다. 마치 피가 넘치듯이 흘러내리는 불길한 영토에 그 불길한 요소를 더해주는 크림슨이란 새는 온 몸이 핏빛처럼 감싸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알 수 없는 그곳, 정확한 위치는 남반구 오스트레일리아 인근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일본이 대략 북위가 30도 전후인데, 남반구까지 온 것이라면 상당히 멀리 이동했을 것이다. 그것도 수면제를 먹인 후에 배로 싣고 왔으니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걸려 섬에 온 것인가?

 

섬에 온 것은 마치 누군가 자신을 농락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실직자인 어느 증권회사의 유능한 직원이 한 순간에 회사에서 나가고, 집에서 아내에게 배신당하며, 결국 부랑자처럼 길거리에서 먹고 자고 해야 하던 운명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살이에 대해 논하면 마치 게임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게이머는 우리를 직접적으로 움직이게 하지는 않으나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도록 만든다. 게임의 법칙에서 아무런 위험도 문제도 없는 자들은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나 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그 게임에서 어떤 상황이 연출되고,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누군가 걸려 거기서 허우적대어 결국 최후에 어떤 비극으로 가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일부러 그런 환경에 집어넣고 일부로 손을 놓은 것만큼 비겁하고 치사한 것은 없다. 따라서 후지키는 그런 상황에 놓인 점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농락하던 자의 미소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리얼비디오라는 스너프 무비는 분명 달콤하고도 재밌는 게임일 것이다. 게임을 감상하는 자들은 멀리서 비디오를 직접 실시간으로 보고 있거나 혹은 편집되어 주요한 내용과 클라이맥스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 낯선 섬에 꾸며놓은 무대는 너무 완벽한 세트장이었다. 개미탑처럼 보이는 기둥은 알고 보니 송신기가 있던 것이고, 언덕 위에는 카메라가 항상 게임에 투입된 사람들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다고 모든 카메라와 송신기가 대상자를 24시간 포착할 수 있던 것은 아니다. 게임 속에는 가끔 리얼함을 부여하기 위해 게임진행자를 넣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토모 아이, 그녀는 키가 크고 허리가 가늘고, 손발이 긴 여자다. 게다가 그림까지 잘 그리고 오묘한 미모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한쪽 눈이 이상하고, 귀에 보청기를 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여 눈 하나와 한쪽 귀로도 충분히 상황을 보고 들을 수 있는데도, 그녀의 용모는 처음부터 수상했다. 그녀는 과거에 괴로운 일이 있었고, 그것은 바로 약물투여라고 했다. 내키지 않은 그녀의 과거이야기, 하지만 상황은 그런 것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게임기, 하지만 그 게임기 속에 부여된 정보는 마치 이 시련이 넘으면 상금이나 행운을 주어주는 것보다 차라리 이 위험의 위기에서 순간적인 그 자체에 대해 풀어가는 것만 제공한다.

 

게임에서 모인 사람은 총 9명, 이들은 중앙센터에 모여 각각의 게임기를 통해 갈 곳은 정한다. 점잖은 신사 2명은 동쪽으로, 왠지 거칠어 보이는 남자는 2명, 그리고 다른 남자 2명과 신경이 날카로운 여자 1명은 남쪽으로 가기로 했다. 여기서 후지키와 아이는 북쪽으로 가기로 했는데, 여기서부터 인생의 갈림길, 아니 삶과 죽음의 기로의 격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서쪽은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무기가 있는 곳이고, 서쪽은 서바이벌 키트로서 약품이나 생존에 필요한 도구 등이 있었고, 남쪽은 식량이고, 북쪽은 정보였다.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가장 필요한 것은 식량일 것이고, 가장 최후에 얻을 것이 정보인지 모르나, 아이는 후지키보고 북쪽으로 가자고 한다.

 

어차피 남쪽은 정원이 찼기에 방법이 없고, 후지키는 북쪽에 아이와 같이 간 후에 정보를 얻고 나서 충격을 받는다. 이 게임 안이 결코 무사하게 넘을 상황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과연 그렇듯이 처음에 모두 다시 모여 미묘한 분위기로 넘어가고 있었으나, 곧 상황은 변했다. 처음에 서쪽 팀은 갑자기 난폭해지고, 남쪽 팀은 여자 1명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위기가 되었다. 남쪽으로 내려간 남자 2명이 맥주와 비스킷을 먹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인간의 지방을 과격하게 태우는 약과 각종 환각을 일으키는 호르몬제가 함유된 것이다.

 

인간의 호르몬이 강렬하게 작용하게 오감이 발달하고, 공격성의 증폭에 따른 동물성 지방에 대한 욕망은 인간 스스로 인간이기를 버리게 만들었다. 결국 남쪽에 간 여자는 공포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 되어 목이 베어진 채로 땅 위에 놓여 있었고, 손과 발은 뼈가 보일 정도로 깔끔하게 발라져 있었다. 남쪽에 간 2명의 남자가 식인귀가 되어 사람을 먹은 것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지방의 분해에 따른 영양소 보충과 호르몬 각성제에 따른 본능적 행위였으나 차츰 그것은 지방산화제와 호르몬이 아니라 본인들 스스로 필요하게 되었다.

 

게임은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제로섬으로 보였으나 최후에는 제로섬이 아니라 먹고 먹히는 사냥게임으로 변한 것이다. 결국 게임을 만든 자들은 서로 죽이는 배틀로얄보다 더 리얼한 인간사냥게임을 원한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사람을 속이고 납치하여 섬에 가둔 것도 모자라 그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심지어 그 섬의 원주민이 있는데도 그 게임에 방해되는 이유로 총으로 저격하여 죽인다. 결국 남은 것은 괴물이 된 2명과 후지키와 아이, 이들은 괴물로 변한 두 명의 식인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식육을 하게 되거나 혹은 야생 환경에 적응하면 시야가 밝아지고, 아드레날린의 증가로 교감신경이 자극하여 동공확대로 멀리 있거나 밤에도 잘 보인다는 점이다. 신경이 민감하게 되어 냄새나 코, 그리고 귀도 발달하여 1㎞ 넘게 있는 사람을 향해 무기를 발사하는 것이다. 식육에 대한 욕망이 결국 미쳐버려 결국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죽여야 하는 것이 되었으나, 그것은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해서다. 그들은 그 섬에 살고 있는 여러 동물들에게 관심이 없던 것이다.

 

물론 최후에는 설치한 부비트랩과 V자 모양의 바위틈에 운 좋게 독사를 자극하여 괴물이 되어버린 남자를 뱀독으로 죽이고 만다. 하지만 후지키 역시 뱀독에 의해 쓰러진다. 게임의 특징은 주인공이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특히 1인칭 시점보단 3인칭 시점이나 모든 이야기 중심이 후지키로 시작되기에 만약 후지키가 죽게 되면 게임 플레이어가 없어지기 때문에 엔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품은 주인공이 절대 죽지 않는다는 전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보이자는 의미는 곧 식인이다. 식인이란 인간이 최후에 선택하는 식사의 방법이다. 고대 사회에서 식인의식은 더러 있었다. 식인의 의미는 단순히 인간을 먹고 싶은 인간의 심리만이 아니라, 그 심리를 하나의 의식적인 요소가 있었다. 가령 어느 부족은 자신의 가족이 죽으면 그 시체를 먹는데, 그 이유는 그 가족의 영혼이 자기에게 깃들게 한다는 믿음이었다. 혹은 다른 의미라면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포로나 희생양을 죽여 단백질을 보충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에는 생존이나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식인이라면 크림슨의 미궁에서 보이는 살인이란 그저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에 의해서다.

 

인간이 아무 것도 모른 채 고기를 먹는다면 인육이 매우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만큼 가장 다양하게 먹는 생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족을 먹는 것은 큰 죄에 해당되고, 그것이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외적 내적 모습 모두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그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내적 외적 요소는 식인을 했던 두 남자보다 그 상황을 즐기는 자들이다. 물론 세상에 이런 일을 꾸밀 인간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제로섬을 넘어 서로 먹고 먹히는 생사는 생물학적 사냥을 하는 이 공간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사냥을 하는 현실이 있기에 우리가 낯설고 무서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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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의 120일 동서문화사 월드북 201
사드 지음, 김문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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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더러움과 욕망에서 얼마나 그 잔인함과 냉혹함 그리고 그 처절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인가? 마르키 드 사드가 저술한 <소돔의 120>은 그야 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그가 살던 시절은 프랑스혁명 전후가 있던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이었다. 그의 저서가 얼마나 강력한 임팩트를 주었을까? 흔히 우리가 사디스트 내지 마조히스트라는 SM적인 변태성욕에 대한 어원이 바로 사드에서 나왔다.

 

사드에서 사디즘이란 그가 진짜 사디즘적인 가학적 성욕을 즐긴 것보다는 <소돔의 120>이란 소설에서 나온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가학적인 이야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드에 대한 나의 관심은 예전에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감독인 기 드보르의 영화를 찾다가 우연히 <사드를 위한 절규함>이란 작품을 알면서 그 영화에서 사드가 과연 누구이기에 절규한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으로 시작했다.

 

사드는 사디즘의 어원이란 점과 그가 프랑스 후작이란 것과 상당히 문학적 지식이 높은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소돔의 120>에서도 프랑스대혁명 이전의 당대 최고의 명사는 장 자크 루소 외에 볼테르와 디드로가 있었다. 사드의 가까운 친척 중에 볼테르와 가까운 사이가 있다는 점으로 사드에겐 늘 지식인들과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먼저 기 드보르의 <사드를 위한 절규함>이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겠으나, 그 영화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본다면 바로 욕과 탄식이 나올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화면인 검은색에 목소리가 총 5번이 나오고,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전위적인 예술에서 전위를 기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무참하게 파괴함에 따라 이것이야 말로 전위적인 예술을 넘어 예술을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드를 위한 절규가 기 드보르에게 무엇인가와 더불어 그 사드가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까지 영화를 만들어 관객에 충격을 주는가이다.

 

그것은 사드가 저술한 <소돔의 120>이 주는 충격에서 아방가르드가 기존의 담론을 무시하고 큰 충격을 주는 것이므로 사드를 위한 절규란 사드라는 인물이 당대 내지 후세 사람들에게 준 충격을 그대로 자신도 주겠다는 하나의 오마주일 수 있겠다. 하지만 상황주의자인 기 드보르에게 사드의 존재로서 스펙타클로 만드는 게 아니라 사드로서 스펙타클을 전도해 버리는 것이다. 사드라는 인물이 저술한 <소돔의 120>이란 작품은 감옥에서 저술하고 나온 지 230년이 지나도 충분하게 쇼크를 줄 수 있다.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고통과 그 고통으로 통한 욕망충족과 더 큰 폭력적인 행위는 그야말로 소설이라도 과연 이렇게까지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비록 이것이 소설일지언정 그 소설에서 담긴 의미에서 충분히 당대 사회의 개연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금욕주의적인 가톨릭교회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큰 영향을 주고 있을 때에 과연 그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했는가에 대한 도덕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을 읽다보면 많은 프랑스 파리 중심의 귀족들이 타락한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프랑스는 로코코, 탐미적인 요소를 추구했기에 귀족과 그 귀족의 아내는 애인을 두고 있었다는 점과 애인이 없으면 사교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회였다. 루소가 처음으로 성적행위를 한 것은 그에게 어머니와 같은 봐랑 부인이었고, 그가 봐랑 부인과 성적행위를 한 후에 근친상간을 한 것보다 더욱 더러운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런 후에 프랑스 어느 귀족부인과 여행을 가다가 그 귀족부인과 은밀한 정사를 루소는 나눈다. 문제는 루소의 당시 행적이 불량해보여도 루소의 경우 매우 미미한 수준이란 점이다.

 

사드가 즐긴 성적인 파란은 왜 문제가 되었을까? 스스럼없이 은밀히 즐기지 않고, 마구 드러낸 점이다. 자신의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는 것이 마치 당연한 사회라도, 자신의 인척 관계에 있는 처제와 바람난 것은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이고, 그 외에 집단적 성행위도 즐긴 것 역시 엄청난 파문이었다. 하지만 <소돔의 120>에선 사드의 행위는 그마나 애교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선 근친상간만이 아니라 살인까지 일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뒤클로라는 늙은 창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부터 다른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11월에서 2월까지 흐르면 상당히 잔인해진다.

 

처음에는 단순히 성폭행 내지 다소 변태적인 성행위가 보인 듯했다. 억지로 끌려오거나 혹은 생활고에 의해서나 또는 속아서 오는 경우다. 불쌍하게 끌려온 여성들은 대부분은 어린 소녀라 10대 중반이 제일 많았고, 심지어는 10살 채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도 있었다. 이들에게 가한 성폭행과 성추행은 결국 이들로 하여금 타락하게 되어 점점 추악하고 난폭한 인간으로 되게 만들었다. 뒤클로는 자신을 키워준 포주를 배신하고, 그녀의 숨겨진 아들에게 전해줄 유산을 챙기고, 그 가족을 파멸시킨다.

 

등장하는 대부분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주변에 모든 것을 파괴한다. 자연계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문제는 자연적 욕망은 그 욕망을 발휘하는 자만이 아니라 발휘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연적 존재다. 어느 하나가 원하면 다른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하는 부당한 처사가 내리진다. 처음에는 어린 소녀에게 자위하여 정액을 쏟는 성직자와 벼슬아치들을 보면 사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사회에 지도계층의 부정과 타락이 넘치고 넘친 것을 알 수 있다. 수도원장이나 혹은 유명한 백작이 와서 변태적 성행위를 즐기는 것을 지나, 분뇨를 먹거나 먹이거나, 심지어 분뇨를 몸에 바르고 쾌락을 느낀다.

 

쾌락의 조건에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고통의 부분이다. 옛날 일본에서 실화로 일어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한 <감각의 제국>에서 남자는 성욕을 느끼는 것과 여자가 느끼는 조건으로 여자가 남자 위에서 성행위를 할 때 남자의 목을 조르는 것이다. 남자는 결국 교사당해 죽었고,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성기를 칼로 벤 일이 있었다. 성욕이 단순히 성적인 행위가 아니라 폭력을 주고받고 함으로서 쾌락을 느끼는 점이다. 법원장은 죄 없는 사람에게 사형집행을 내린 후에 그 사형집행이 일어나는 순간에 사정한다는 것에서 그의 성적욕망은 성적인 도착증을 지나 하나의 파괴본능에 가깝다.

 

등장인물들은 인간의 생명을 영위하거나 보존하는 것보다 그것을 파괴하는 것을 쾌락을 삼는다. 심지어 자신의 성기를 여성의 성기보단 항문으로 하거나 또는 남성의 항문 내지, 다른 남성이 자신의 항문에 삽입하는 것에 욕망에 대한 쾌락을 느낀다. 이들에 대해서 보면 에로스적인 삶의 욕망보단 오직 타나토스적인 죽음의 욕망만 존재한다.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무차별적인 성욕을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만족함은 오로지 자연계는 생성보다는 파괴로서 이어지는 셈이다.

 

자신들의 노리개로 만든 여자가 임신하자 그 여자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살인한 점은 사드의 <소돔의 120>은 인간의 생명을 만드는 것에 대한 삶의 욕망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욕망이었다. 그런다고 하여 사드 그 자체는 그런 행위를 즐기거나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상상조차 불허하는 가학적인 소설은 감옥에 갇힌 37일 동안 만든 점이다. 그러나 그 막대한 분량과 도저히 일반인들이 만들 수 없는 이야기들은 인간의 내면에 살아있는 폭력성에 대해 거울로서 비추게 한다.

 

뒤클로의 이야기에서 성적으로나 또는 가학적인 이야기에서 나 역시 흥분에 빠진 점을 보고, 순간 나 역시 이들이 벌이는 잔혹한 도락행위에 어느 정도 욕망하고 있음을 느꼈다. 사드의 소설은 인간이 거부하는 것을 적고 있다. 하지만 그 거부하는 사람도 결국 마음 속 깊은 곳에 잔인하고 음란한 욕망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런다고 해도 가학적인 폭력성은 정말 끔찍했다. 마지막에 음부에 쥐를 넣거나 혹은 입안에 쥐를 넣어 바늘로 꿰맨 후에 이야기는 참으로 끔찍하다. 쥐가 나가지 못하자 사람의 장을 파먹어 결국 사람이 죽는 것이다.

 

또는 미치광이 살인자가 사람을 무척이나 잔인하게 죽이자 결국 사정함은 우리 인간이 숨겨진 본서이란 매우 잔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거부하나, 인간의 광기가 하나이 정의로 바뀌는 순간 벌여지는 폭력은 <소돔의 120>을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단순히 성적인 욕망은 성적쾌락만이 아니고, 오히려 폭력이란 인간의 본성을 성적인 부분으로 연결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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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공간 - 우리시대 지성 11인의 삶과 시공간 이야기
황인숙 외 지음, 고종석 엮음 / 개마고원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인간이란 혼자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고 싶고, 다른 사람들이랑 있으면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타인과의 조화와 더불어 자신과의 조우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있는 시간이나 혹은 자기만의 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사람이란 늘 마음이나 기분, 심리적 변화가 같을 수가 없다. 때에 따라서 혼자 있고 싶기도 혹은 같이 있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혼자만의 공간은 너무 중요한 것 같다. 자신만의 공간, 즉 <나만의 공간>이란 것은 현재 나를 구성해주는 정체성이다.

 

정체성의 영역에서 나만의 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것이 남들을 모를 나만의 추억과 기억이 있다는 점이다. 모두 같은 시간과 공간만 있고, 똑같은 환경적 조건을 주면 그 사람만의 개성과 특유한 인상이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내가 나로서 있어야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성립된다. <나만의 공간>은 그런 자신만의 세계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적은 도서다. 그냥 마음 편하게 읽으면 좋은 책인 듯하다. 사회적으로 제법 유명한 시인, 법조인, 의사, 작가, 철학자 등이 나와 자기만의 공간을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을 저술한 홍세화 선생, 모두 까기의 달인인 진중권 교수, 법무부장관을 역임한 강금실 변호사 등이 보였다. 나만의 공간에서 다른 이들도 제법 인상적이나 그래도 아는 이름이 있다는 점과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나 혹은 삶에 대한 애착이 인상 깊었다. 홍세화 선생은 15년 동안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했는데, 그 운전을 하면서 생계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위안을 삼은 공간이란 게 인상적이었다.

 

이름 없는 망자들에서 지난 우리 사회의 아픔을 토로하는 그의 심정은 뭔가 시대의 아픔 내지 그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남산이란 것이 어떤지 모르나, 적어도 남산의 어느 한 고문실에서 쓰러져간 많은 사람들의 비명은 아직 우리가 갚아야할 민주주의의, 빚이다. 그런 암울한 현대사에서 좁은 택시운전석이 홍세화 선생에게 편한 공간이었을까? 딱히 편하다는 것은 아닐 터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성찰에서 자신만 아픈 과거를 잊고 마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해 그 아픔까지 담고 가야하는 것이 진정한 자신만의 공간이라 여긴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을 봤을까? 강금실 변호사의 이야기도 독특했다. 서울 명동성당 입구에 세워진 가상감옥을 체험한 이야기는 특별한 것 같았다. 남편이 억울하게 국가보안법으로 신체적 구속을 빼앗긴 적이 있고, 아버지 역시 억울하게 누명의 그 인생마저 파탄을 맞이했다. 그래서 강금실 변호사는 민변에서 활동한 이유가 있었다. 법조인으로 법 위에 사람이 없어야 하나 사실 우리 법 위와 아래에 사람이 있다. 때로는 사람이 법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들을 법으로 다스리려고 한다.

 

예전에 <호모 사케르>의 노모스처럼 법의 정의에서 인간이 법 위에 올라가고 그 사람이 법을 초월하여 예외적 존재이기 때문에 법이란 것이 성립되는 점에서 그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에 의해 다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 살아있는 존재이면서도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인정받지 못한 우리 사회에 있는 낯선 존재들, 법조인으로 그런 사람들이 정식적인 사회적 합의가 아닌 권력의 이름아래 희생되는 것이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체험이 강금실 변호사로 하여금 눈물로서 그 아픔을 상기한다.

 

그래서인지 강금실 변호사는 마당이란 것을 중시했다. 마당에 나온 사람은 그냥 자유로이 이래저래 움직일 수 있다. 갇혀버린 감옥은 마당이 없다. 그저 좁은 공간에 갇혀있으니 사람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답답할 뿐이다. 공간 이란 것은 사람에게 역시 어떤 특별한 그 무언가를 주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성찰과 추억, 아픔과 자유 등등을 말이다. 특히 나만의 공간은 나만의 자유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사람의 자유에서 자유란 혼자만의 공간에서 무엇을 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단지 그 자유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영원히 즐길 수 있다.

 

그래서일까? 진중권 교수의 이야기는 나만의 공간이 추억과 변덕스런 지난날이다. 개인적으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어른의 몸을 가진 아이로선 진중권 교수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공책에 그림을 그린 후에 페이지를 계속 넘기면 마치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이런 기법을 애니메이션에서는 페이퍼 애니메이션이라고 한다. 비록 전투기 2기가 서로 싸우고 격추하는 것이나, 참으로 진중권 교수는 개구쟁이인 모양이다. 지금도 경비행기 모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인데,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 그림이나 혹은 비행기 모형을 만든 건 재미난 사실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혼자만의 공간에서 망상에서 비롯한다. 특히 강의에서 meta-physics에서 형이상학적 세계, 즉 눈에는 보이지 않은 이상과 현실의 분리된 것을 담론하는 것에서 pata-physics 형이상이상학이란 새로운 세계를 말한다. 현실이 아닌 가상이 오히려 현실화되는 것이다. 아마 진중권 교수의 시작은 어린 시절 그 다락방인 모양이다. 모두 까기 달인인 진중권 교수도 별나지만, 그의 2명의 누나 역시 별난 모양이다. 예술도 하고, 노동운동도 하던 누나로서 그들의 기질은 새삼스런 것이 아닌 것 같다.

 

부모와 누나의 눈치전쟁, 거기서 남은 남동생은 후퇴하여 자기만의 공간을 찾는 것이 정답이다. 거기서 사라지는 것은 오히려 나의 존재를 찾기 위한 자아탐험이다. 폴 비릴리오의 <소멸의 미학>이란 도서를 자주 인용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 찾기와 망상에서 시작되는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이다. 혼자만 있으니 정말 다락방은 망상이 현실화되는 기분인 듯하다. 사용하지 못할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오브제들이 그 어린 시절의 개구쟁이 손에서 하나의 콜라주가 된다.

 

심심하면 여기저기 가위로 오려 몽타주를 실현한다. 아니라면 성적인 호기심이 있다면 좋아하는 연예인의 얼굴사진과 야한 옷을 입은 여자 사진을 붙이는 효과도 볼 것이다. 그런 유치한 기억과 추억이라도 그것이 소중한 모양이다. 책의 시점에서 얼마 전 찾아가니 없어진 그 어린 시절의 공간이 없는 것은 슬픈 것이다. 어느 애니메이션을 보면 주인공 소녀의 대사가 기억난다. 자신이 우주로 갈 나이가 되면 자기가 살던 마을의 모습은 없으나, 그 마을에 대한 기억과 추억은 언제까지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사람마다 전부 다 느끼는 것은 아니나, 어린 시절 그 공간이 오랜 시간 뒤에 존재할 리가 없다. 나도 학부시절에 다니던 그 대학교의 모습이 여전하지 않음을 최근에 알게 되면 조금 슬프다. 내가 보던 공간과 시간, 그리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들의 풍경은 이젠 내 마음의 추억이 되었다. 게다가 나무들이 이루는 숲의 세계가 없어지는 것은 더욱 마음이 아프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숲들과 그 중에서 특이하게 큰 나무와 잎이 유독 노란 은행나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서글프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의 추억이나 기억을 가진 주변 사람들마저 흩어지고, 인간이란 영원성이 없기에 때로는 그 학교에서 또는 이 세상에서 존재성이 사라질 수 있다. 그래도 그때의 나나 그 모습들이 여전히 머리에 맴도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나만의 공간>이니 말이다. 일단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나도 나만의 공간이란 것이 있는가에서 떠오른 것은 내방과 오락실이다. 특히 오락실에서 게임만 미친 듯이 한 나에게 딱히 나만의 공간으로 삼기는 그렇다. 만화방도 그렇고 말이다.

 

지금의 나만의 공간은 내방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 방에 있는 컴퓨터로 다양한 글도 보고 적으며, 음악도 게임도 영화도 애니메이션도 즐긴다. 그리고 컴퓨터 옆에 있는 책장 안에 많은 책들이 있고, 그 책에서는 철학과 사회과학 등과 같은 어려운 책도 있지만 만화책이나 라이트노벨도 있다. 그저 내 방에서 조용히 내 시간을 즐기는 것도 나만의 공간이다. 단지 그 나만의 공간이 강력한 게 흠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나로 있기 위해서는 필요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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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그 여자의 파리 - 늘 낯선 곳으로의 떠남을 꿈꿨던 17년 파리지앵의 삶의 풍경
이화열 지음 / 에디터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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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나보고 한국을 떠나면 어디에 살고 싶은가? 라는 말을 한다면 나는 “프랑스!”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안에 있는 파리가 나의 최종 목적지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에겐 파리에 갈 불어실력도 비행기 표를 사서 당장 가서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왜 하필 나에게 프랑스 파리라고 묻는다면 나에겐 프랑스란 이미지는 게리 무어의 ‘Parisienne Walkways’이란 곡이다. 당시 나는 파리지앵이 뭔지 몰랐다. 그러나 알고 보니 파리의 여자였다. 파리의 역자가 걷는 것이라?

 

당시 대학교 때 처음으로 들을 때 파리라는 곳은 매우 슬프고도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곳이구나 하고 여겼다. 게다가 라이브 음악 중간을 넘어 가면 기타 현을 잡고 비브라토를 약 1분 이상 게리무어가 연주한다. 매우 강렬하고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 운전하다 들으면 그대로 앞차를 들어 박을지도 모를 정도로 강한 느낌이다. 잔잔한 블루스 음에 더해진 기타연주에 보컬링이란 파리의 느낌은 그렇게 잔잔한 호수위에 거친 폭풍인가 싶었다. 그런 다음에 rialto의 kieslowski란 곡을 들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한참 화제인 영화 ‘세 가지 색’의 감독이 키에로프스키였다.

 

약간 일렉트로니컬한 사운드에 목소리 대신 반주만이 흘러나온다. 파리의 영화, 그리고 감독, 파리라는 것은 이렇게 뭔가 몽환적인 부분과 무덤덤한 느낌인가 싶었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본 파리에선 세 명이 떠오른다. 장 자크 루소, 당통, 로베스피에르다. 다소 프랑스혁명에 관심이 많았던 내가 이것을 다시 보게 된 계기가 1968년 5월 혁명이다. 이른바 프랑스에서 아방가르드 문화가 대중들에게 불씨를 댕기게 된 그 열기를 말이다. 소르본노 대학에서 농성중인 대학생이 이렇게 벽에다 글을 적었다. “우리대학은 노동자를 24시간 환영한다.”고 말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란 자유가 넘치는 세상이다. 자유라는 영혼의 울림은 자신만의 이기심이 아니라 타인과 같이 공유하고 느끼고 즐겨야 하는 것에서 비로소 자유가 성사된다.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에 장 자크 루소가 <사회계약론>과 <에밀>이란 책을 만들었다. <사회계약론>은 1789년 7월 대혁명의 기반이 된 인류문명의 보배이며, <에밀>은 독일 관념철학과 형이상학에서 제일 중요한 칸트의 3대 비판서를 만들게 한 서적이다. 루소의 영향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유와 사상이 발전했는가! 그 루소가 파리에서 글을 적었으나 그에겐 오로지 파리의 시민들이 주는 야유만 있었다.

 

외롭고 비참하고 쓸쓸해도 자신 안의 정신에서는 영원한 자유인이었던 루소, 그의 사상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자유라는 것은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도 곧 우리의 자유를 위해선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개인적 성향이 롤즈의 만민법을 필두로 한 정치적 자유주의이기에 나에겐 자유란 원하기에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원한다. 만약 로베스피에르가 지금 태어났다면 그는 1794년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의해 기요틴과 뜨겁고도 차가운 키스를 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만큼 프랑스의 자유란 그 자유에서도 예술과 문학과 철학이 숨 쉬는 파리는 수많은 피와 희생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런다고 아직까지 완성된 자유는 아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읽다보면 잔혹한 민주주의 의식이 소름이 끼칠 정도다. 임산부가 통증으로 고생하는데, 비자가 없는 외국인이란 이유로 비행기로 강제 퇴출하는 글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래도 파리에는 그런 자유가 있다. 그것을 비판하고 제대로 문제의식을 펼칠 자유가 있었다. 인간에게 자유란 표현의 권리라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프랑스라는 곳이 늘 새로운 자아에 형성되었다. 아니면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일까? 프랑스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책들을 힘들게 읽으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 결과적 현상보단 그 결과에 대한 원인,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프랑스에 있는 게 아니라 한국에 있다. 말 이상하게 한다고 회사에서 다른 부서 상사와 말다툼을 해야 하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상한 인간으로 취급받는다. 늘 같은 것을 하기를 강조하고, 늘 같은 생각을 하기를 바라며, 늘 같은 것만 지나가는 듯한 이 익숙하고도 낯설 경치 속에 프랑스는 나에게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거기에 100% 만족할 환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현실의 장벽은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런 세계에 대해 조금 생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예전에 어느 작가의 세상여행기를 읽었는데, 너무 위대한 것과 너무 이상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점에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진정한 행복은 자신의 주변에서 소소한 것들을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그런 환경이 되려면 사회구조적인 부분이 만족되어야 하는데, 다소 되지 않은 흐름이라 아쉬울 뿐이다. <그 남자 그 여자의 파리>에서 저자인 이화열은 그런 한국에서 새로운 자유를 찾아 파리로 갔는가?

 

그녀의 눈에 보인 파리, 리옹, 그 밖의 많은 프랑스 크고 작은 도시, 내가 바라는 세상에 가까워 보인다. 열정만으로 충분히 일을 하고, 서로 격이 다르고 사는 세상이 달라도 사랑할 수 있고, 주변 가족들의 축복까지 받는 모습에서 우리와 너무 다름을 느낀다. 문화적 쇼크라고 할까나? 그 문화가 매력적인 것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기에 그럴 것이다. 그런다고 거기의 문화 100%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이런 다양한 삶의 요소가 좋다. 인생의 가치에서 무엇이 되는가에서 우리는 부자라고 한다.

 

그러면 부자의 기준은 무엇인가? 한국에선 좋은 집과 차 넓은 땅과 주식으로 볼 것이다. 높은 의자에 앉아 근엄한 표정으로 눈을 내려 깔며 주변 사람들을 보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고, 선망의 대상일 것이다. 한국의 신화적 요소는 바로 그런 특권적 욕망에 대한 끊임없는 탐욕이다. 끝도 없는 탐욕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가두고 억압하고 통제하고 자유라는 이름을 망가뜨린다. 내 생각을 말할 수 없고 감정을 숨기야 하는 그런 숨 막히는 세상, 프랑스의 부자는 자신의 달력에 얼마나 휴가가 존재하여 바캉스를 어디에 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과 자신만의 취향을 즐기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나 자신조차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잊고 살아야 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살기 위해 일을 하는가? 일하기 위해 살고 있는가? 다소 나도 1968년 5월 혁명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기에 매우 공감되는 내용이 후반에 나온다. 예전에 조지 카피아피카스의 <신좌파의 상상력>이란 도서에서 프랑스 5월 혁명과 미국의 1960년 말부터 1970년 초반의 반전운동에 대해 보았다. 그 책에 나온 것처럼 브라화형이 여전히 등장한다. 이 책에서도 나오는 점에서 신기했다. 그만큼 파리의 자유란 오랜 기간을 숙성한 자유다.

 

미혼모가 아이 혼자 키울 수 있는 나라, 정신과 의사에게 가서 돈을 털릴 일이 없는 나라, 남자 중에서 마초가 드문 나라, 그만큼 상대방의 감정에 충실한 나라, 그게 프랑스 파리다. 도둑도 멍청해서 자동차 유리를 깨서 가져가고, 심지어 남의 집 유리창을 깨고 들어간다. 예전에 알랑 가그놀, 장 루프 펠리시올리의 애니메이션 영화인 <파리의 고양이>를 보면서 다소 파리라는 곳은 저런 것인가? 싶었다. 도둑이 들어도 뭔가 모르게 금방 털리고, 도둑 잡기보단 오히려 연쇄살인범을 잡는 게 급한 파리의 경찰, 경찰보단 세금징수원이 무서운 프랑스를 보면 이런 것들이 제일 부러웠다.

 

책을 들어다보면 아무래도 작가 자체가 여성이라 그런지 상당히 감수성이 뛰어나나, 나는 그 감수성을 따라가기보단 왜 그런 감수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 생각한다. 자유로운 파리, 예술과 철학의 도시가 나오게 된 것은 그만큼의 희생이 뒷받침 한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던가?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인간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이다. 기요틴이 18세 후반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목을 베어버린 파리의 광기에서 이제는 모두의 아름다운 욕망이 나오는 도시가 되었다. 언제 나도 그런 세상에 살 수 있을까? 왠지 꿈처럼 보이는 이 절망에서 파리와 같은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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