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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ㅣ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16
나쓰메 소세키 지음, 박순규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10년 3월
평점 :
나츠메 소세키의 작품 중에서 문학소설로 최초로 읽은 서적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었지만, 사실 그의 작품을 문학소설이 아닌 다른 경로로 알게 된 것은 ‘푸른 문학’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매드하우스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보통 그 업체에서 만드는 작품들이 대부분 격렬한 액션과 폭력, 그리고 충격적인 장면으로 가득하기에 다소 ‘푸른 문학’이란 애니메이션에서 나츠메 소세키를 만났다는 자체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나츠메 소세키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의 반항아인 다자이 오사무까지 그곳에서 만났으니, 참으로 이상한 인연이다.
분명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가라타리 고진이란 사상가 및 문학평론가의 글에서 나츠메 소세키 이후로서 일본문학에 위대한 작품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도대체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이 어떤 존재이기에 가타라니 고진이란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있을까? 참고로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내의 사상가로 유명한 인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사상가다. 그의 저서인 <트랜스 크리틱>의 경우 칸트와 마르크스를 넘어라는 주제로 현대사회의 자본, 국가, 국민의 습성이 뭉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함을 밝히고, 칸트와 마르크스로 통해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어째든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을 평소 문학소설에 대한 정보에서 잡아내는 것보다 전혀 다른 매체에서 나는 접한 것이다. 그것은 일본 애니메이션과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일본 사상가의 글귀에서다. 나츠메 소세키의 작품의 특징을 찾아내라고 하면 간단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의 글을 읽으면 무척이나 인간의 내면을 세심하게 찾고 그리면서 그 내면 안에 가려진 우리 인간의 현재를 그리고 있다. 게다가 그 대상자는 작가 자신이란 자아비판 역시 비켜나갈 수 없다. 그는 메이지유신 이후 1900전후의 일본 지식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지식인이면서 한편으로 그는 위장병이란 못 쓸 병을 지니고 살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주인공인 간게쓰 선생은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고, 고양이마저도 간게쓰 주인이 곧 죽는다고 혼자 생각한다. 물론 고양이는 마지막에 술에 취해 물항아리에 빠져 죽지만, 그것도 아주 고맙다고 생각한다. 고양이에게 이성적 판단력이 있다는 과학적 사실은 무근하나, 우화적인 요소로서 당시 일본 근대화의 물결을 그렇게도 비꼬아 보는 지식인의 눈은 <마음>이란 소설에서도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죽음의 그림자 역시 나츠메 소세키는 알고 있었다.
<마음>이란 소설에서 주요 인물은 나, 선생님, 선생님의 아내, 선생님의 친구 K, 선생님의 아내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나의 형님, 나의 매제 정도로 끝난다. 페이지가 중편소설임에도 등장인물 수는 많지 않은 것이 왠지 모르게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에서 보이는 특징인 것 같았다. 거대한 역사적 현실보다는 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인간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점에서 시대에 쓸려가기보단 시대에 대해 역행과 더불어 비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마음>의 선생님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간게쓰 선생처럼 위장병으로 죽을 운명이 아니라 단지 자살을 택한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마음>이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든 나츠메 소세키가 보는 죽음이란 모든 것의 종료와 동시에 암울한 비극보다는 자신에게 부여된 억압과 괴로움에서 해방이란 새로운 존재적 사실을 보인다. 아니라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그도 역시 초인(超人)을 꿈꾸는가? 마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위해 같이 보면 좋을 서적인 <선악의 피안>처럼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은 그런 인간의 윤리적인 요소에 큰 중점을 두었다.
단지 애니메이션의 <마음>과 문학소설의 <마음>의 차이는 애니메이션에서는 원작 소설의 3부에 해당되던 내용만 나오고, 1부와 2부에 대해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은 주인공인 젊은 시절의 선생님은 자기의 독백이란 시점이 아니라 우리가 일반 영상에서 관찰하기 좋은 3인칭 관점으로 풀어간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과거의 자신에 대해 나에게 설명하기 위해 긴 편지를 적었기에 현재 선생님은 3인칭이 되어 과거의 자신을 서술하고 있다. 즉, 그것은 과거의 선생님과 현재의 선생님은 동일인물이나, 선생님은 마치 과거에 대해 3인칭적인 요소로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에서는 과거의 회상은 완벽히 선생님의 입장으로 보고 있다면,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선생님만 아니라 K와 선생님의 아내까지 심리를 묘사한다. 그것은 선생님의 심리적 요소만 중시한 것이 아니라 3남녀의 심리까지 중시했다. 과거 메이지 전의 시대의 젊은 여성이라면 아직까지 전통적 여성에 가까우나, 오히려 애니메이션에서는 선생님의 아내이기 전의 아가씨의 태도는 상당히 도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미쟝센 요소 중에 도라지꽃과 해바라기 꽃의 대비는 무척이나 인상 깊다고 본다.
그렇지만 애니메이션의 연출력과 표현력의 극대화는 분명 즐거움을 준 것은 분명하나, 뭔가 석연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단순 22분의 2편으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는 말인가?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에게 배신당해 어느 미망인의 집에 은거하는 대학생이란 설정에서 그의 인간관에 대한 부분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실은 그가 K의 죽음을 만들게 한 동기성립 후 결혼했다고 하나, 그에게 남은 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이었다.
그렇다면 그 죄의식은 무엇인가? 소설 <마음>은 그것을 중시했다. 선생님을 처음 본 나라는 인물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이끌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과 아니 도쿄대학의 교수보다 나라는 인물에게 선생님은 더 큰 존재였다. 왜 그럴까? 선생님은 다른 사람과 달리 아주 사람들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태도가 거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인연을 맺기 싫었다. 그것은 아마 K의 죽음에서 비롯된 자신의 죄의식이었다. 제일 인상 깊은 부분은 선생님은 아내를 사랑하나, 사람들을 싫어한다. 아내도 사람이기에 아내도 싫어한다. 하지만 분명 선생님은 아내를 사랑하니 이런 모순적 결합은 무엇이라 하여야 하겠는가?
그런다고 선생님은 아내에 대해 극진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언제나 아내를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좋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K의 죽음으로 바꾼 아내의 사랑, 누군지 모를 사람의 무덤 방문에서 선생님은 평생을 풀어가지 않을 죄의식에 자신을 가둔 것이다. 시기적으로 이 소설은 1914년에 나온 점에서 메이지시대가 종료되고 소화시대가 도래함을 알리고 있다. 메이지왕이 죽자, 그의 장군 하나가 자살하고, 그 후에 장군의 아내 역시 자살한다. 선생님도 역시 그들의 죽음에서 자신도 그런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는가? 아니라면 나라는 대학졸업생이 있기에 고백을 하고, 자신과 같은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을 남기기 위해 편지는 적었는가?
솔직히 보자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러일전쟁 이후 간게쓰에게 러일전쟁 승리축전을 위한 행사에 와서 모금해달란 장면에서 간게쓰는 아무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한다. 나츠메 소세키의 관점은 모르나, 적어도 러일전쟁에 대해 우습게 보는 태도를 내비친 점에서 중인전쟁의 중역자인 그 장군마저 정말로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것인가? 이 소설의 나라는 인물의 아버지는 메이지왕, 그의 장군, 장군의 아내에 대한 죽음에서 자신도 죽어간다고 여기나, 선생님은 그들의 죽음 이전에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다. 게다가 신장병이라든지 혹은 신경병이라든지 단어로 통해 나츠메 소세키가 마치 그 선생님을 자신에게 투명하려는 느낌도 들었다.
지식인으로 가져야 할 세상의 안목 역시 중요했다. 선생님은 부모님을 여의고, 숙부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하나 막상 알고 보니 숙부는 부모님의 재산을 도용하고, 자신을 속인 것이다. 세상물정을 몰랐던 선생, 가족에게 배신당한 선생, 혼자서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봐야한 선생, 그리고 자신의 도덕성을 지키려한 선생님이 역으로 자신이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절대적 악인은 없고 어제 나에게 미소 짓는 자가 오히려 나에게 뒤에서 비수를 찌르지 모를 세상에 <마음>이란 소설은 윤리적 가치에 대해 무척이나 냉담한 느낌을 준다.
남에 대한 비판과 모멸감에서 자신도 그런 모멸과 증오에 대상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그것도 모른 채 흘러가는 순간 파탄을 맞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 대한 전반적 고찰이란 쉽지 않다. 그 심리적 순간과 판단에 대한 오류와 착각, 그리고 뒤틀리기 시작하는 운명의 장난과 파괴는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여생까지 좌우하게 된다. 나라는 인물은 왠지 모를 선생님에 대한 호기심과 존경심으로 다가갔으나, 뒤에 가면 도리어 선생님이 나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자신의 자리 잡은 어둠의 죄의식을 처음으로 고백할 수 있었고, 그것은 영원한 비밀의 동지로 남길 수 있었다.
자신의 죄를 알게 하고, 자신은 그 편지를 적을 10일은 자살을 유보하고, 아마 나의 손에 닿을 쯤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 용서되지 않으나, 그 죄에 대하여 진실을 알리는 순간 자신의 마음 안에 응어리는 풀리게 된다. 그 응어리를 풀지 못함에 선생은 죽지 못해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과 아내의 사랑에는 항상 K라는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쉽게 죽음을 선택하면 자신의 죄에서 도망치는 겁쟁이가 되는 모습에서 선생님의 고뇌는 간단하지 못한 문제다. 이런 인간의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을 세심하게 그려간 <마음>, 어렵지 않은 문체이나 상당히 인간상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던져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