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통의 죽음
게오르그 뷔히너 지음, 최병준 옮김 / 예니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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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당통>이란 영화 일부분을 잠시 본 적이 있었다. 영화를 상영해서가 아니라, 잠시 명장면만을 보여준 모습이다. 그 장면은 프랑스혁명 이후 국민들을 위해 설치했다고 하나 막상 그러지 못한 혁명재판소였다. 그곳에서 당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모두 당통의 죽음을 가지고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이때 등장한 인물 로베스피에르, 그의 차갑고 냉혹한 눈빛과 말투가 모두를 사로잡고, 광기에 빠졌는지 아니면 이성의 착각에 빠졌는지, 모두가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부르고 있었다.

 

이미 재판장은 공정한 재판이 존재하기 위해 설치된 게 아니라 단지 피를 그리고 목을 원하는 마녀사냥 합의소로 변질되었다. 그런 당통이란 이름을 내가 어디서 들었을까? 예전에 영국으로 망명한 아서 쾨슬러라는 작가의 <한낮의 어둠>에서이다. <한낮의 어둠>은 처음 알게 된 동기는 프랑스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폭력과 휴머니즘>이란 작품에서 처음 알았고, 그 후에 내가 그 책을 찾아보았다. 온갖 냉소와 회의와 갈등이 버무러진 이 소설에서 아주 강렬한 냉소주의자인 루바쇼프라는 남성이 나온다.

 

그는 191710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영웅이었다. 소설 설정에서 그가 말한 어른인 레닌과 같이 러시아 차르정권과 케렌스키정권까지 전복한 러시아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탈린의 대숙청이란 무서운 피의 재물에 자신의 목 뒤에서 울리는 권총 소리에 쓰러진다. 사형집행 당일에 사형장에서 처형되는 게 아니라 감옥에서 어디론가 이동할 때 뒤에서 그의 목을 노리고 사격하는 것이다. 그렇게 죽던 루바쇼프의 심문에서 당통이란 이름이 나온다.

 

러시아혁명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시작하여 결국 대숙청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죽음으로 마감한다. 그런 마르크스주의자 입에서 당통이란 이름이 튀어나온다. 당통이 누구인가? 당통이 어떤 인물이기에 그 냉소주의자 입에서 그의 이름과 그가 연설한 문장들을 외우고 있다는 말인가? 아쉽게도 당통이 직접 연설한 문장이 하나도 안 나오고, 그 연설이 언제 어디서 했는지도 모른다. 단지 유추할 가능성은 1792년 프랑스혁명 이후 외국의 침입에서 당통이 직접 국민들 앞에 나서서 연설로 통해 그 전쟁에서 승리를 잡은 것이다.

 

그것은 191710월 러시아혁명 이후 서구열강과 차르정권 시대의 귀족과 장교들이 다시 내전으로 러시아를 어둠의 시기로 만들 때 트로츠키가 한 연설과 비슷할 것이다. 역사의 반복은 정말 계속 이어지는가? 당통은 연설을 하여 프랑스를 지켰지만, 기요틴 아래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찾았으며, 트로츠키도 러시아를 지켰으나,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저 멀리 남미 땅에서 영원히 타도해야 할 스탈린에게 살해당했으나 소비에트연방 붕괴 이후 그의 승리가 되었다.

 

역사 앞에서 항상 정의가 패배하더라도 역사 후에는 정의가 승리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 승리라는 이름 아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고, 많은 공포와 파괴의 시간이 우리 인류를 엄습했다. 그래서 프랑스, 독일, 영국과 같은 유럽 국가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거친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로 그 당통의 죽음이란 그 비극과 같은 시작을 알리는 도화선이었다. 러시아혁명에서 많은 혁명가들이 프랑스혁명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프랑스 국민들이 계속 폭력과 억압에 저항한 것을 항상 마음에 새겼다.

 

그러나 혁명은 어느 새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처럼 혁명 자체가 오히려 역사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혁명이 인간을 만든 것인가? 인간이 혁명을 만든 것인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결국 덕치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결국 17944월 당통의 목이 단두대의 이슬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3개월 후 7월 말에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일당들은 테르미도르파의 결정 아래 결국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당통이 죽음을 오히려 허무한 무에 대한 욕망으로 받아들이는 타나토스의 미학에서 오히려 당통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혁명은 자신의 목처럼 그저 사라질 안개와 같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죽기 전에는 분명 열성적인 자코뱅당원이었다. 그는 처음에 지롱드당의 일원이었으나, 마음을 바꾸어 자코뱅당으로서 열성적이고 혁명재판소도 만들었다. 그러나 혁명재판소의 결정은 2가지다. 사형 혹은 무죄, 결국 사형만이 기다리는 재판에서 수많은 목들이 바람처럼 이슬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당통에겐 마음이 차는 것보다 마음이 떨어져 가는 것이 느낀다. 당통은 알고 있다. 저 단두대 아래 사라져간 희생양들이 늘어가고 있어도, 프랑스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고, 길 거리의 창녀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당통 역시 그 창녀들과 어울린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삶에 대한 열망으로 일으킨 혁명이 오히려 폭력과 광기로 변하자 그의 삶의 열정은 육체에 대한 간절함이다. 창녀가 처음부터 창녀가 아니라 오히려 창녀로 될 수밖에 없던 그 비운 한 현실에서 당통은 그들과 있다.

 

당통은 특권의식이나 절대적 추구사항이 없다. 로베스피에르의 충직하면서 어리석은 부하 죽음의 사제인 생 쥐스트는 그런 당통을 저주했다. 그는 혁명위원, 국민위원은 모든 국민들에게 추앙받아야 할 존재라고 생각했다. 왕권의 자리에 그 앙시앵레짐의 자리에 단지 혁명정권만 있었고, 독단적 독재는 영원했다. 그들은 국민들의 배고픔과 절망에서 혁명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았지만, 그 배고픔과 절망을 구원하지 못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그 절망의 분노를 대체할 죽음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왕족, 귀족, 지롱드당원, 이제는 내부의 적까지 이어진다. 인간이란 여기서부터 추악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은 정말 인간에겐 좋고 착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을 좋고 착하게 보일 사람들이 필요하다. 즉 나쁘고 못된 사람이 필요하다.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에서 승리하는 것이 곧 정의란 사실이 당통의 죽음을 부른다. 당통은 이분법의 논리에 갇힌 프랑스를 걱정했다. 자신만의 자유만을 외치는 자유를 두려워했다.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가 있기에 자신의 자유가 가능하다.

 

결국 프랑스는 나폴레옹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 열기와 광기에 빠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해결책은 오로지 전쟁이다. 적이 필요한 것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프랑스 사람들이다. !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에서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루소의 답답한 심정이 그렇게도 돋보였는가? 그렇게 루소가 외쳤는데도 <당통의 죽음>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사회계약론>을 들고 루소를 괴물의 아버지로 만드는가?

 

<당통의 죽음>에서 시민과 군중들의 대화를 보면 그들의 순간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논리가 상실한 그 상식박탈이 오히려 모든 것을 이루었다. 결국 그것을 간과한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는 목이 달아났다. 또한 그들의 목을 달아나게 한 이들은 전쟁에서 열기를 뿜는다. 또한 나폴레옹 역시 내친다. 인간이 왜 신화적인 존재인가? 신화에 영웅이 필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대신 보이게 하거나 또는 그 추악함을 감추기 위한 대리자인가?

 

역사는 바로 신화로 만들어진 이야기고, 그것은 후세에게 역사적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신화를 창조한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당통의 죽음>은 게오르크 뷔히너가 저술한 연극대본이나, 그것은 현재까지도 재현된다. 영화 <당통>은 아마 이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지 않았는가? 영화 <당통>의 로베스피에르의 표정은 절대적인 폭력과 폭력적인 원칙만 가진 감정 없는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했으며, 그 혁명과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래도 그의 이름은 계속 나온다.

 

로베스피에르가 나오면 같은 자코뱅당의 당통도 나온다. 두 사람은 동지였으나 적이었다. 인간 최고의 적은 그 자신들의 모습인가? 이 연극대본인 <당통의 죽음>은 매우 역사적인 인물이 나오나 매우 철학적인 부분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가 아닌 주변 인물들보다 더 주변인 다수의 대중에서 말이다. 대중은 시민인가? 군중인가? 그들의 모습은 숨어있으나, 우리 일상과 제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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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조병준 지음 / 예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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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인도에 있는 타지마할을 보면서 감격하면서 그 격동의 감정이 그의 온몸은 감싸 안을 정도일 때 그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을 베여 나온다고 한다. 건축물에 대한 인간이 가진 하나의 신성성과 숭고함에서 일까? 만약 내가 타지마할에서 가서 가슴을 찌르는 알 수 없는 감정과 그리고 그 감정에서 눈물이 나와야 한다면 그 건축물이 가지는 위대한 아름다움 그 미()에 대한 찬양보다는 그 미에 희생에 대한 추()에 대한 미학(美學)일 것이다.

 

타지마할 그것을 세우기 위해 인도 당시 왕은 수많은 백성들을 굶주림과 고통, 그리고 눈물의 나락으로 보내야 했다. 아름다움을 위한 희생이 결코 정당화된다는 자체가 나는 원하지 않는 미적인 가치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거대한 고분이나 왕궁,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중국의 진시황 무덤과 만리장성, 그리고 수많은 인류 문명 유적지들, 그들의 행위는 지금의 인간에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뒤에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다.

 

지금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희생이란 과거의 존재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희생이 다른 눈물과 고통이 우리 현실에서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신화적인 존재다. 개인이 죽어도 개인이 속한 사회는 죽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은 그 사회라는 공간에서 영원해지기 위해 신화적 욕망을 품는다. 인류가 소멸하지 않을 그 마지막 그날까지 우리의 신화는 멈추지 않는다. 신화의 전복은 또 다른 전복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조병준 작가가 만든 에세이집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는 그런 신화조차도 아름다운 여명으로 아니라면 황혼으로 보는 것인가? 다소 나와 다른 가치관을 지녔기에 그의 가치관에 대해 딱히 비난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인생과 나의 인생은 완벽히 분리되어 있고, 그는 실존적인 인간으로 존재하니 말이다. 그가 보여준 책은 마치 일상적인 사람들에게 하나의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 환상은 그에겐 현실이었다. 환상이 사실인가? 현실이 사실인가? 진실은 언제나 하나이나, 사실은 언제나 다 갈래다.

 

진실과 사실이란 다를 수밖에 없고, 사실이 다양하기에 사실을 전복하는 가상도 더 다양하다. 아니 오히려 가상이란 자체가 오히려 사실로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사실은 그 자체로 사실이기에 그 사실이란 속성을 강조할 이유는 없으나, 가상은 사실이 아니므로 그 진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거짓이란 단어가 하나의 미적인 가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둠의 슬픔 속에 가려진 아름다움이란 사실과 거짓의 차이가 종이 한 장이란 경계 속으로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엇으로 있었냐하는 질문보단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가? 라는 것에 관심이 많다. 대부분 사람들이 어디 멀리 여행을 가게 되면 아주 유명한 유적지 및 관광지부터 찾아 다니고, 막상 소문으로 듣는 것과 달리 직접 눈앞에 당면할 경우 시시하거나 맥이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인간이 가진 문명유산인가? 물론 다는 아닐 것이다. 때에 따라 감격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리라.

 

그러나 여행에서 마주치는 것들에 대한 단상에서 그것이 자기에게 어떠한 가치관이 부합이 되는지 혹은 그 가치관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사람 저마다의 이야기와 표정이 다르다. 본래 인간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안다고 했던가? 조병준의 눈에는 분명 아는 것과 보는 것이 넓게 보인다. 분명 말하나 그의 책에서 나에게 보인 것은 환상의 세계다. 환상이 존재하려면 비환상이 있어야 한다. 일상생활의 영역이다. 그런다고 그가 라울 바네겜의 서적명인 <일상생활의 혁명>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단지 외로운 늑대처럼 이리저리 어슬렁어슬렁 거린다. 그의 목적은 외로운 늑대처럼 예고 없이 기약 없이 세상을 누빈다. 그가 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이기보다는 세계인처럼 말이다. 그에게 집이란 한국에 있지 않다. 세계에 있을 뿐이다. 어디든지 가고 어디든지 묵어가는 그의 이야기는 비현실적이지 못한 환상이다. 그만큼 그의 이야기가 환상으로 되기까지는 그의 현실에 대한 초월성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가 가진 것들은 없다. 그래서 더욱 많은 것을 가졌다.

 

길가에 만난 사람들, 그리고 알게 된 사람들, 그 사람들과 만나고 마시고 즐기고 춤추고 같이 부둥켜 주는 인간냄새에서 말이다. 조병준은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라고 책을 적었다. 그가 말한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은 세상 그 자체의 사랑이다. 조금 세상에 대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나와 달리 그의 사랑은 어긋나 있어도 좋은 것이다. 어긋나는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일까?

 

분명 그는 사람을 사랑했다. 위대한 성녀인 마더 테레사 수녀의 뜻을 기리면서 그 분의 의지를 찾아온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었다. 분명 나보다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사진을 보면 인간의 표정과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어 그 자체에 대한 미를 중시했다. 책을 읽다보면 그의 사상은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가르침이 그에게 맞아 들어가는 것일까?

 

인도의 캘커타에서 죽은 자에 대한 단념에선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든다. 아니 가톨릭 선교를 하신 신부님이 동양에 와서 불교와 무교의 영향을 받아, 그리고 옆에 다른 동료는 아예 불교도가 되어 서로 불상을 놓은 푸른 눈의 불교신도에서 조병준은 매우 감격스런 감회를 쏟아 붓는다. 모든 것에서 해방되기에 그런 삶의 모습이 나올지 모른다. 삶이란 다양성과 그 영역에 대한 깊은 고찰에서 새로운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조병준의 글과 사진에서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하고, 그렇게 같이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조병준은 조병준이고 그 우리 중에서 너는 너, 나는 나이다. 인간 그 자체는 실존적인 존재로서 각인할 필요가 있다. 조병준은 자신의 실존적 모습으로서 이 책에 보여주려 한 것이다. 늘 그런 인생을 추구하기에 그렇다. 단지 책에서 우리가 느낄 점은 늘 떠나는 삶이 아니라 한 번은 적어도 청춘이란 시기에 한 번 크게 세상을 보자는 것이다. 젊음이란 이유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없다고 하나, 언젠가 뒤돌아보면 젊음의 시기에 무엇을 했는가에 따라 자신의 중년과 노년의 초상이 달라진다. 그대는 정녕 당신의 인생을 뜨겁게 살았는가?

 

내 자신에 대해 이렇게 놓고 생각하면, 조금 냉소적인 인상이 강한 편이나, 때로는 불보다 더 뜨거운 감정을 느낀 것 같다. 단지 그 불같은 뜨거운 열정에서 내 가슴을 냉소적인 회의감으로 변화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나 말이다. 다소 긍정적이거나 희망적이거나 미래에 대한 기대감보단 그 반대에 대한 negative 한 요소가 많을 것이다. 삶에 대하여 너무 부정한다고 보여줄 수 있지만, 삶을 부정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단지 그 부정하고 싶은 부정이 언제나 인간의 삶에 들려 붙어 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혼자의 만족이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의 만족과 마주본다. 단지 작가 조병준과는 다를 뿐이다. 삶을 긍정하기에 긍정적으로 갈 수 있고,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부정하기에 긍정적인 삶으로 만들고 싶은 점이다. 그것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나오는 두 남자의 이야기처럼 삶은 달라도 추후 가고자 한 길은 노년에 이르러 결국 같았다는 점이 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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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아랑전
조선희 지음, 아이완 그림 / 노블마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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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神話)라는 것은 결코 멈추지도 멈출 수도 없는 이야기다. 그것은 유한에서 유한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 유한성에서 자신들의 무한성을 찾기 위해 신화라는 매체를 이용한다. 인간은 통시적인 존재이나, 그 통시적인 존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시적 영역인 신화에 매력을 느낀다. 생각하면 왜 고대 그리스 배경에서 나오는 일리아스나 오디세우스와 같은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는가? 많은 영화나 문학 텍스트에서 오이디푸스의 신화는 멈추지 않고 흘러나올까?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거기에 대한 욕망에 물결에 몸을 던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분명히 시간적 존재다. 시간이란 유한성이 존재하기에 그리고 유한성이란 자신의 생명에 직결되므로 그 죽음을 초월한 시간과 공간에 의지하려는 무의식이 우리 의식을 지배한다. 가끔 왜 사람들은 분명 그것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해도 받아들이고 맹목적인 신념으로 움직이는 이유를 생각하면 그저 신화라고 볼 수밖에 없다.

 

비합리성이 합리성이 되고, 합리적인 존재가 비합리적인 존재로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 민담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많이 내려온다. 가끔 민담과 전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하다. 우리 어머니께서 나보고 집안 가구를 옮기는데, 왜 어느 특정일만 골라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에 대해 묻자 “손 없는 날”이란 말을 한다. 손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날을 측정할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한 과학적 근거와 이유를 물어보면 옛날 어른들이 하니깐 그대로 한다는 비논리적이면서 비합리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민담과 설화에서 전해온 이야기를 지금 현재적 시점에서 찾아가보면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아도 그것을 하나의 사실 아니지만 사실이라고 여겨야 한다. 그저 이유도 없이 단지 그러하니까! 라는 주장에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을 떠나 과연 그러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여전히 진행형이다. 모던 아리랑은 그런 비현실적인 세계의 민담과 전설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티브가 대부분 전래동화로 내려온 구전설화라는 점이다.

 

앞전에 조선희 작가가 집필한 <모던팥쥐전>을 저술했다고 들었는데, 우리 전설 중에 콩쥐팥쥐가 유명하다. 마치 서양의 신데렐라의 이야기처럼 어느 구박받는 착한 여자아이가 권력자의 아들에게 마음에 들어 운명을 달리한다는 것은 여전히 캔디 이데올로기나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신화가 살아 움직인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대사회는 이른바 spectacle로 가득한 세상이다. 문화가 인간이 주체가 아닌 인간이 다른 인간들의 욕망을 투영하여 그 욕망에 따르고 있는 문화에 대한 인간종속이다.

 

spectacle은 애석하게도 전복되어도 새로이 탄생하는 신화다. 그것이 인간의 욕망을 대체하고 그것 역시 합리와 논리보단 그 자체로 구속당하는 인간을 꾸준히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대사회라도 고전부터 전해온 동화를 spectacle에 갇힌 인간의 딜레마를 보여주면 어떨까? 반드시 문화적 헤게모니라는 지배가 아닌 인간 그 자체의 피할 수 없는 번뇌라도 좋다. 여기서 분명 밝히나 우리의 전래동화는 미풍양속을 강조하나, 그 이면에는 잔혹하고 끔찍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예를 들어 콩쥐팥쥐전에서 콩쥐가 관아의 권력을 힘을 얻어 팥쥐를 갈기갈기 찢어 젓갈로 담구는 행위라든지 신데렐라가 계모에 대한 복수로 참수형을 내리거나 혹은 근친상간으로 어머니에게 쫓겨난 백설공주가 7명의 난쟁이와 성관계를 맺는다든지, 심지어 그 왕자의 키스에서 왕자는 시체애호가라는 변태적 정신이상자든지, 다시 생각해보면 시체애호가는 그렇다. 까닭 없이 죽은 시체에게 남성이 키스를 하는 이유는 과학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 단지 공주라는 신화적 욕망에만 집착한 이상 인간은 이성이란 고리에서 멀어져 그저 맹신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결국 아름답지 못한 하나의 이야기라면 어떻게 볼 것인가? 어느 애니메이션을 보니 동화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수수께끼이며, 권력자들이 대중들에 대한 속임수로서 제공한 소문이란 점이다. 원전의 이야기가 반전되어 새롭게 수립된 것처럼 말이다. 거기에 따라 절대적 악이나 절대적 위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주인공이 돋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름답게 결말이 남기지 못한 채 비극으로서 계속 맴돌아가 가면 어떤가?

한 남자의 영혼을 두고 죽은 소녀와 살아있는 여성의 집착은 4명의 남자를 차례로 죽음의 늪으로 빠지게 한다. 10년마다 영화가 나오나, 그 남자주인공은 의문사를 맞이한다. 그 죽음이 아파도 받아들이고 다시 10년을 기다려서 자신의 남자의 영혼이 오기를 바라는 중년의 여인, 그리고 그 여인에게서 연인을 빼앗는 소녀, 육체는 소멸해도 그 육체의 영혼은 반복하여 돌아오는 공간에서 인간의 영혼은 영화라는 공간에서 영원성을 가진다. 실제로 우리는 영화로 통해 죽은 인간과 산 인간의 모습을 본다. 그가 비록 실제로 그 가상의 존재와 같지 않으나 우리는 그 가상을 계속 있다고 여길 수 있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 속에 현실, 현실 뒤에 현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현실이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판단력이 있어도 그 순간자체에 대한 인간은 자신들을 판단할 수 없으나, 영화로 통해 판단하다. 그 영화에서 타인이나 그 타인은 결국 많은 그 개인 개인 인간의 모습이다. 그 모습에서 서로간이 판단이 되고 그 판단을 하면서 저자가 나로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느끼면서도 거부한다. 그것이어야 말로 신화적이다. 신화란 욕망, 억압, 해방이 있기에 끊임없이 순환한다.

 

또한 신화란 희생이 계속 되풀이 되어야 한다. 분명히 밝히나 신화는 무한대의 영역이기에 그 무한의 영역을 채워줄 유한의 영속적 귀속이 필요하다. 유한이 유한을 재생산하기에 무한처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대상에 대한 희생의 정당성이다. 그리고 그 희생에 대해 때로는 그 희생당한 자가 다시 복수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과거이다. 과거는 유령처럼 자신과 조우한다. 그리고 유령이 아닌 현실로서 받아온 자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 유령이 과거라면 현재로서 유령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가 아름답게 마무리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신화적 영역에서 자신의 추악함을 보이기를 거부하며, 그 추악함을 소수의 인물로 몰아넣는다. 또한 자신의 욕망을 위해 남을 희생하면서도 그 욕망조차도 신성시 내지 미화하는 행동을 한다. 모던아랑전은 그런 이야기로 가득 채워진 인간이야기다. 귀신, 유령, 수수께끼, 미스터리, SF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현실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이다. 현실의 인간에게 가려진 마음을 추악한 결말로서 이끌어낸다. 모든 이야기가 좋게 끝나지 않은 채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그 소수자가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듯이 그 소수자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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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16
나쓰메 소세키 지음, 박순규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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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메 소세키의 작품 중에서 문학소설로 최초로 읽은 서적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었지만, 사실 그의 작품을 문학소설이 아닌 다른 경로로 알게 된 것은 ‘푸른 문학’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매드하우스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보통 그 업체에서 만드는 작품들이 대부분 격렬한 액션과 폭력, 그리고 충격적인 장면으로 가득하기에 다소 ‘푸른 문학’이란 애니메이션에서 나츠메 소세키를 만났다는 자체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나츠메 소세키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의 반항아인 다자이 오사무까지 그곳에서 만났으니, 참으로 이상한 인연이다.

 

분명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가라타리 고진이란 사상가 및 문학평론가의 글에서 나츠메 소세키 이후로서 일본문학에 위대한 작품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도대체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이 어떤 존재이기에 가타라니 고진이란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있을까? 참고로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내의 사상가로 유명한 인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사상가다. 그의 저서인 <트랜스 크리틱>의 경우 칸트와 마르크스를 넘어라는 주제로 현대사회의 자본, 국가, 국민의 습성이 뭉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함을 밝히고, 칸트와 마르크스로 통해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어째든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을 평소 문학소설에 대한 정보에서 잡아내는 것보다 전혀 다른 매체에서 나는 접한 것이다. 그것은 일본 애니메이션과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일본 사상가의 글귀에서다. 나츠메 소세키의 작품의 특징을 찾아내라고 하면 간단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의 글을 읽으면 무척이나 인간의 내면을 세심하게 찾고 그리면서 그 내면 안에 가려진 우리 인간의 현재를 그리고 있다. 게다가 그 대상자는 작가 자신이란 자아비판 역시 비켜나갈 수 없다. 그는 메이지유신 이후 1900전후의 일본 지식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지식인이면서 한편으로 그는 위장병이란 못 쓸 병을 지니고 살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주인공인 간게쓰 선생은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고, 고양이마저도 간게쓰 주인이 곧 죽는다고 혼자 생각한다. 물론 고양이는 마지막에 술에 취해 물항아리에 빠져 죽지만, 그것도 아주 고맙다고 생각한다. 고양이에게 이성적 판단력이 있다는 과학적 사실은 무근하나, 우화적인 요소로서 당시 일본 근대화의 물결을 그렇게도 비꼬아 보는 지식인의 눈은 <마음>이란 소설에서도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죽음의 그림자 역시 나츠메 소세키는 알고 있었다.

 

<마음>이란 소설에서 주요 인물은 나, 선생님, 선생님의 아내, 선생님의 친구 K, 선생님의 아내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나의 형님, 나의 매제 정도로 끝난다. 페이지가 중편소설임에도 등장인물 수는 많지 않은 것이 왠지 모르게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에서 보이는 특징인 것 같았다. 거대한 역사적 현실보다는 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인간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점에서 시대에 쓸려가기보단 시대에 대해 역행과 더불어 비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마음>의 선생님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간게쓰 선생처럼 위장병으로 죽을 운명이 아니라 단지 자살을 택한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마음>이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든 나츠메 소세키가 보는 죽음이란 모든 것의 종료와 동시에 암울한 비극보다는 자신에게 부여된 억압과 괴로움에서 해방이란 새로운 존재적 사실을 보인다. 아니라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그도 역시 초인(超人)을 꿈꾸는가? 마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위해 같이 보면 좋을 서적인 <선악의 피안>처럼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은 그런 인간의 윤리적인 요소에 큰 중점을 두었다.

 

단지 애니메이션의 <마음>과 문학소설의 <마음>의 차이는 애니메이션에서는 원작 소설의 3부에 해당되던 내용만 나오고, 1부와 2부에 대해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은 주인공인 젊은 시절의 선생님은 자기의 독백이란 시점이 아니라 우리가 일반 영상에서 관찰하기 좋은 3인칭 관점으로 풀어간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과거의 자신에 대해 나에게 설명하기 위해 긴 편지를 적었기에 현재 선생님은 3인칭이 되어 과거의 자신을 서술하고 있다. 즉, 그것은 과거의 선생님과 현재의 선생님은 동일인물이나, 선생님은 마치 과거에 대해 3인칭적인 요소로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에서는 과거의 회상은 완벽히 선생님의 입장으로 보고 있다면,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선생님만 아니라 K와 선생님의 아내까지 심리를 묘사한다. 그것은 선생님의 심리적 요소만 중시한 것이 아니라 3남녀의 심리까지 중시했다. 과거 메이지 전의 시대의 젊은 여성이라면 아직까지 전통적 여성에 가까우나, 오히려 애니메이션에서는 선생님의 아내이기 전의 아가씨의 태도는 상당히 도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미쟝센 요소 중에 도라지꽃과 해바라기 꽃의 대비는 무척이나 인상 깊다고 본다.

 

그렇지만 애니메이션의 연출력과 표현력의 극대화는 분명 즐거움을 준 것은 분명하나, 뭔가 석연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단순 22분의 2편으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는 말인가?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에게 배신당해 어느 미망인의 집에 은거하는 대학생이란 설정에서 그의 인간관에 대한 부분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실은 그가 K의 죽음을 만들게 한 동기성립 후 결혼했다고 하나, 그에게 남은 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이었다.

 

그렇다면 그 죄의식은 무엇인가? 소설 <마음>은 그것을 중시했다. 선생님을 처음 본 나라는 인물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이끌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과 아니 도쿄대학의 교수보다 나라는 인물에게 선생님은 더 큰 존재였다. 왜 그럴까? 선생님은 다른 사람과 달리 아주 사람들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태도가 거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인연을 맺기 싫었다. 그것은 아마 K의 죽음에서 비롯된 자신의 죄의식이었다. 제일 인상 깊은 부분은 선생님은 아내를 사랑하나, 사람들을 싫어한다. 아내도 사람이기에 아내도 싫어한다. 하지만 분명 선생님은 아내를 사랑하니 이런 모순적 결합은 무엇이라 하여야 하겠는가?

 

그런다고 선생님은 아내에 대해 극진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언제나 아내를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좋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K의 죽음으로 바꾼 아내의 사랑, 누군지 모를 사람의 무덤 방문에서 선생님은 평생을 풀어가지 않을 죄의식에 자신을 가둔 것이다. 시기적으로 이 소설은 1914년에 나온 점에서 메이지시대가 종료되고 소화시대가 도래함을 알리고 있다. 메이지왕이 죽자, 그의 장군 하나가 자살하고, 그 후에 장군의 아내 역시 자살한다. 선생님도 역시 그들의 죽음에서 자신도 그런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는가? 아니라면 나라는 대학졸업생이 있기에 고백을 하고, 자신과 같은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을 남기기 위해 편지는 적었는가?

 

솔직히 보자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러일전쟁 이후 간게쓰에게 러일전쟁 승리축전을 위한 행사에 와서 모금해달란 장면에서 간게쓰는 아무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한다. 나츠메 소세키의 관점은 모르나, 적어도 러일전쟁에 대해 우습게 보는 태도를 내비친 점에서 중인전쟁의 중역자인 그 장군마저 정말로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것인가? 이 소설의 나라는 인물의 아버지는 메이지왕, 그의 장군, 장군의 아내에 대한 죽음에서 자신도 죽어간다고 여기나, 선생님은 그들의 죽음 이전에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다. 게다가 신장병이라든지 혹은 신경병이라든지 단어로 통해 나츠메 소세키가 마치 그 선생님을 자신에게 투명하려는 느낌도 들었다.

 

지식인으로 가져야 할 세상의 안목 역시 중요했다. 선생님은 부모님을 여의고, 숙부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하나 막상 알고 보니 숙부는 부모님의 재산을 도용하고, 자신을 속인 것이다. 세상물정을 몰랐던 선생, 가족에게 배신당한 선생, 혼자서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봐야한 선생, 그리고 자신의 도덕성을 지키려한 선생님이 역으로 자신이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절대적 악인은 없고 어제 나에게 미소 짓는 자가 오히려 나에게 뒤에서 비수를 찌르지 모를 세상에 <마음>이란 소설은 윤리적 가치에 대해 무척이나 냉담한 느낌을 준다.

 

남에 대한 비판과 모멸감에서 자신도 그런 모멸과 증오에 대상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그것도 모른 채 흘러가는 순간 파탄을 맞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 대한 전반적 고찰이란 쉽지 않다. 그 심리적 순간과 판단에 대한 오류와 착각, 그리고 뒤틀리기 시작하는 운명의 장난과 파괴는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여생까지 좌우하게 된다. 나라는 인물은 왠지 모를 선생님에 대한 호기심과 존경심으로 다가갔으나, 뒤에 가면 도리어 선생님이 나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자신의 자리 잡은 어둠의 죄의식을 처음으로 고백할 수 있었고, 그것은 영원한 비밀의 동지로 남길 수 있었다.

 

자신의 죄를 알게 하고, 자신은 그 편지를 적을 10일은 자살을 유보하고, 아마 나의 손에 닿을 쯤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 용서되지 않으나, 그 죄에 대하여 진실을 알리는 순간 자신의 마음 안에 응어리는 풀리게 된다. 그 응어리를 풀지 못함에 선생은 죽지 못해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과 아내의 사랑에는 항상 K라는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쉽게 죽음을 선택하면 자신의 죄에서 도망치는 겁쟁이가 되는 모습에서 선생님의 고뇌는 간단하지 못한 문제다. 이런 인간의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을 세심하게 그려간 <마음>, 어렵지 않은 문체이나 상당히 인간상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던져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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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친화력 - 신화, 구원, 희망 새로운 질서 1
발터 벤야민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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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친화력> 이 서적을 읽는 순간,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발터 벤야민이란 문학평론가 혹은 철학사상가의 괴테에 대한 친화력으로 오판했다는 사실이다. 부제처럼 “신화, 구원, 희망”이란 3가지 단어로서 벤야민이 괴테라는 독일의 위대한 문학가에 대해 어떤 식으로 풀어가고, 그의 작품들이 지금 살아가는 자신에게 어떤 방식으로 돌아오는가를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괴테의 친화력은 괴테가 문학도로서 우리에게 친화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괴테의 작품 중에서 <친화력>이란 작품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과 같은 괴테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독자로선 이 책의 서평을 적어가는 것은 말 그대로 모험이 아닌가 싶다. 아니라 차라리 번역자가 발터 벤야민의 문필을 번역하는 것에 치중하기보단 번역자가 발터 벤야민의 사상으로 통해 보는 한국사회에 대한 고찰이 훨씬 나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었다. 벤야민이란 사람은 기본적으로 문예이론에 대한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프랑크푸르트대학교의 사회문제연구소의 학자들과 빼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오죽했으면 최근에 내가 읽어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에서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하버트 마르쿠제 등과 같은 철학자 이름 위에 발터 벤야민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사상가와 철학자로서 벤야민을 추구하던 프랑크푸르트학파보단 여기서는 오히려 문학비평가 발터 벤야민을 읽는 점에서 번역자의 초반서문에 내가 더 집중했다는 사실만으로 주객전도(主客顚倒)도 일어난 점이다.

 

그런다고 하여 이 책을 보는 것에서 비록 <친화력>이란 소설을 읽지 않음에도 낯선 느낌을 받지 않음은 그 이전에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이란 도서를 봤기 때문이다. 문예이론에 대한 연구도서에서 근대문학가인 프란츠 카프카, 마르셀 프루스트 등의 작품을 소개하고 거기에 대한 비평을 했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비평은 상당히 깊숙하게 사물을 바라보고, 소설이란 문자텍스트를 마치 살아있는 그림처럼 생생하게 글로서 나타낸다. 그의 비평가로서 역할을 단순히 작품을 신격화 내지 깔아뭉개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자체를 살아있는 화산으로 발휘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벤야민의 글을 적는 습성이 당연히 <괴테의 친화력>에서 빠져 나올 리가 없다.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문예이론의 경우 작품에 대한 비평은 전체적인 장에서 1가지의 장일뿐이나 괴테의 친화력은 오히려 그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벤야민의 문학비평에 대한 부분을 여기서 잘 드러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단지 아쉬운 점은 <독일비애극의 원천>까지 읽어봤다면 그의 문학적 세계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벤야민에 관하여 저술한 기존의 도서들은 그를 문학비평가보다 오히려 철학자와 사상가로 보았다. 물론 문학비평에서 철학이나 사상이 배제될 수 없겠지만, 중심점은 분명히 문학보다 사상이란 점이다. 그런 점에서 괴테의 친화력은 벤야민의 관점에서 괴테의 작품뿐만 아니라 괴테의 인생과 주변 인물간의 관계까지 고려하여 그의 작품이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 고찰한 점이다. 잊을 수 없는 점은 벤야민의 친구 여동생과 나눈 편지에서 그 편지내용으로 통해 괴테의 문학적 방향까지 잡아나가는 부분은 왠지 모르게 놀라운 부분이었다.

 

대개 어느 인물이 다른 사람들과의 편지로 통해 그의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지만, 그 편지로 통해 그의 변화까지 보려고 한 점에서 세세한 관찰력이 돋보인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작품 속에서 인물의 동작과 행위, 어떤 사물과 그 배경, 건물까지 완벽한 하나의 서사를 이룬다고 보았다. 작은 행동이 후에 미칠 영향을 보고, 그것이 하나의 상징성으로 떠오른 점이란 점에서 벤야민의 주제설정은 독특했다. 단지 아쉬운 점은 이 소설과 괴테의 다른 작품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상세한 의미를 발견하기가 곤란했다.

 

단지 알 수 있는 점은 벤야민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 정도를 아주 조금 알아갔다는 정도만 만족해야할 점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주객전도가 되어버린 이 서적에 담긴 벤야민의 문학적 감각보다 벤야민이 바라보는 정치, 문화, 사회에 대한 감각이 더 이끌린다는 점이다. 옮긴이의 서문을 찾아보면,

 

“결단 없는 선택은 인간을 희생의 제물로 만들지만 ‘죽음에의 도약’에 의해 매개된 사랑의 구원은 우주를 바꾸어 놓는다..(중략), ‘결단 없는 선택은 인간의 희생으로 이어진다.’는 명제는 실제로는 현대의 대의 민주주의 맹점을 가장 잘 지적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에 벤야민의 이 명제가 가진 의미는 단순히 사랑에 대한 해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결단 없는 선택’은 결국 결단을 위험 하는 ‘독재정치’와 지근거리에 있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나치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대중 민주주의의 핵심적 비밀을 가리킨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현대 민주주의는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에의 도약’이라는 결단을 포기하고 대신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환상을 먹고사는 희생제의의 체제인 셈이다.”

 

번역자의 벤야민으로 통해 보는 현대사회의 전체주의적인 민주주의 맹점은 다시 나온다. 인터넷으로 우리는 id를 입력하라고 한다. id란 즉 아이디라고 하여 우리의 이름이기도 하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으로 보면 이드라는 것이다. 욕망으로 가득한 인터넷 세대에서 우리는 정작 민주주의라는 대의에서 민주주의가 아니라 언어폭력과 구분짓기 그리고 이원화의 갈등으로 통해 보는 테러리즘이 오히려 민주주의가 되지 않은가 싶다. 독재자가 죽을 때 결단 을 내리기만 한 민주화 시대인물들은 오히려 그 민주주화란 유령에 얽매이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퇴보했는지 모른다.

 

이 책에서 서거한 故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추모보다 그의 죽음으로 통해 보는 우리 사회의 폭력 속에 가려우진 민주주의, 혹은 주인이 없는 노예라는 정치적 투쟁가를 비판한다. 물론 그것이 벤야민이 파시즘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그런 관점이 다소 문학비평 속에 녹아있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괴테의 친화력을 돌아보는 점은 뭔가 모르게 멀지 않은가 싶다. 물론 역자 역시 너무 멀리 나가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을 보내나, 적어도 벤야민의 서적으로 벤야민에 대해 알려면 그의 사상을 조금 염두할 필요가 있다. 벤야민 역시 파시즘을 비판한 지식인이면서 독일의 나치즘을 피해기 위해 국경을 넘어가던 도중 그 꿈이 좌절되어 스스로 자살한 인물이다.

 

그런다고 <괴테의 친화력>을 읽으면서 너무 괴테만은 생각하지 말자. 첫 장부터 시작하자 조금 후에 매우 익숙한 인물과 그의 서적이 나온다.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부터 하여 다른 도서가 소개된다. 칸트의 입장에서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기에 남녀 간의 성적 행위를 두고 동물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는 모양이었다. 기본적으로 괴테의 친화력은 괴테 서적만 보고 해결될 도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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