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병 데이즈 1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라이트노벨 <중2병 데이즈>를 일요일 느긋한 일요일 휴일을 이용하여 읽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던 그 <중2병 데이즈>를 말이다. 물론 주말이라고 하여 라이트노벨만 읽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면서 일본 화폐 천엔의 주인공인 나쓰메 소세키가 저술한 <문(門)>이란 장편소설과 더불어 또한 오랜만에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인 정치경제학 비판도 읽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균형이 전혀 맞지 않은 주말 독서기록이었다. 그래도 알고보면 다 연관성은 있었다. 왜냐하면 나쓰메 소세키의 문이란 작품제목을 붙이기 위해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감을 받았듯이 제 아무리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 우리 인류의 위대한 인문도서와 별개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김월희 작가의 이전 작품인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스토리 전개나 모티는 전혀 다르다고 해도 <중2병 데이즈>는 기본적으로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하고 조금 연관성이 있다. 주인공 연오를 마치 자신의 구원자인양 바라보는 흑련이란 것이 블랙헤이젤과 연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의 남자 주인공의 또 다른 여동생인 선우백련과 비교하면 백련과 흑련이란 이름이 각각 다른 시리즈의 작품에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김월희 작가의 블로그 보면서 생각하나, 그 작가의 포스팅을 보면 그렇게 나쁜 성격이라 들지 않는다. 정중한 존댓말과 친절한 설명을 붙이려는 그의 노력이 보인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보이는 그의 글은 여전히 유토피아를 추구하기보다는 유토피아에 대한 회의감이 가득하다는 느낌만 든다.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1권부터 그의 인용문은 이미 카를 마크르스와 게오르크 헤겔의 사상이 등장하고, 노암 촘스키 및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언어학자의 저술도서도 소재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중2병 데이즈>에서도 여전히 그런 내용을 인용한다. 아마 그것으로 인해 여태까지 일어난 라이트노벨 세계에서 일어난 화젯거리가 생겼을 것이다. 대부분 어느 현상이나 어떤 사물이나 정황을 볼 때는 그 자체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context라는 전후맥락을 두고 봐야 하는 것이 정론이다. 보통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도 일반 소설과 같이 하나의 서사구조를 가지는 스토리텔링이다. 별개의 장르로 구분하는 mass-culture와 sub-culture의 벽에서 단지 소재와 대상, 재미의 차이만 존재하지 근본적으로 큰 차이점을 없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중2병 데이즈>에선 작가가 주인공 연오의 입장이 되어 서술하는 것처럼 1인칭적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작가는 비록 연오를 만들어 내고 연오로 통해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나, 연오라는 인물이 가진 인식과 상황판단이 곧 작가가 보는 세계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이렇게 작가와 연오에 대한 1인칭적인 시점에 대해 왜 이리도 강조하는 것일까? 나는 분명히 일요일 휴일 집에서 난이도가 높은 책을 읽다가 머리를 식힐 겸 <중2병 데이즈>를 처음으로 열었다.

그리고 그 앞날인 토요일에는 내 방에서 혼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보았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는 다소 실화를 미화시켜 만든 작품으로 독일 나치가 폴란드를 강제 침공하여 거기에 주거하는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가둔 후 노동착취 및 살인 등 인간성을 상실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크라코프에서 일어난 집단학살의 비극에서 이 유대인들은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크라코프 수용소장인 아몬 괴트 소령은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사살하고, 때로는 자신의 저택에서 저격총으로 부지런히 일하지 않은 유대인을 그 저격하여 사살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쉰들러가 크라코프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구출할 때 기차가 잘못 들어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어가는 모습이 나온다. 물론 거액의 뇌물을 이용하여 구출하기도 하나, 아우슈비츠는 어떤 곳인가? 저명한 여성 인문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2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겪은 유대인이다. 그녀는 예루살렘에 가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직접 봤고, 그것을 토대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유명한 서적을 남긴다. 원래 그녀 자체가 군중(mass), 시민(people), 선동가(mob)로 나누어 대중사회에서의 파시즘에 대한 연구를 했었다.

그녀의 연구는 결국 세계적인 좌파와 우파 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잘 생각하고 명시해야 할 점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라는 점이다. 그는 극히 평범한 남성이었고, 집에서 다정한 아버지와 자상한 남편이었다. 집에 오면 가족과 저녁을 먹으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낭만과 예술도 알았다. 그런 점잖은 사람이 나치 수용소에서 가장 유명하고 잔인하고 악랄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인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의 유대인 학살의 특이성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을 죽일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였다.

아우슈비츠의 독가스 대규모 살해는 일제강점기 시절 무참하게 살육을 당해야 했던 우리의 아픈 기억과 더불어 인류의 상처이다. 그런 점에서 <중2병 데이즈>란 라이트노벨에서 나온 김월희 작가의 글은 어떻게 비판해야 하는가? 나치의 악랄한 수용소 아우슈비츠, 그리고 그곳의 소장을 임명한 히틀러와 히틀러가 선동부장으로 임명한 괴벨스, 그런 괴벨스에 대해 이 라이트노벨의 주인공 중에 2명인 흑련과 린은 이렇게 말한다. “미디어 장악은 문화 장악의 기본이니까”, “괴벨스가 했던 말이죠. 참고로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이다.

막대한 유대인을 학살하고, 그것도 모자라 수많은 도처에 전쟁의 아픔을 남긴 독일 나치의 선동부장의 말을 따라하고 존경한다는 발언은 분명히 소재로서 판단하면 김월희 작가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김월희 작가 스스로가 과연 그것이 옳다고 여겼을까? 라는 의문이 예전부터 있었다. 가령 라이트노벨에서 주인공 연오로서 보는 1인칭 시점에서 흑련과 린을 바라보며 혼자 생각하는 글이 나온다. ‘두 사람의 뜬금없는 하모니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사실 아무 의미도 없었다.’라는 것이다.

만약 작가 스스로 괴벨스에 대한 미디어 정책이 옳다고 했다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긍정을 했을 것이나 그 어떤 긍정도 없으며, 차라리 아무 의미 없는 한심한 짓이라고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괴벨스 발언과 관련하여 다소 작가가 민감한 부분을 꺼낸 것은 분명히 잘못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 발언 자체로 통해 작가가 나치에 대하여 긍정적인 사고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작가가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에서 언급한 헤겔의 말이 생각나게 만들기는 충분하다.

“그렇지 않답니다. 오라버니! 헤겔이 주장한 시대정신이란 결국 진보 없이 반복되는 원형의 띠. 우민들은 결국 계몽의 대상이 아닌 사육의 대상에 불과하지요.”라는 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정치적 입지에서 과거에는 분명 왕족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주의 내지 봉건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고, 프랑스대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부르주아 경제적 체계로 통해 완전하지 못한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1차 내지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 형식적 민주주의가 도래했다.

세계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미국을 지목하는데, 그 미국조차 여성에게 투표권이 준 것이 불과 100년 전후이며, 흑인에게 사회적 기회를 준 것도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것보다 더 뒤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 인간들이 가진 집단적 우월주의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여기거나 혹은 그러고 싶은 인간들에게 계몽 대신 사육이란 이름이 주어진 게 되었다. 생각하면 칸트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그것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계몽이란 칸트가 지적한 것처럼 계몽이란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느끼는 디스토피아적인 정신적 관념은 그래서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이나 <중2병 데이즈>에서도 계속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디어에 대한 논쟁에서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다루기를 영국의 공리주의를 제창한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처럼 이른바 감시라는 사회구조적인 부분을 다루기 때문이다. 최근에 발행된 아르망 마틀라르의 <감시의 시대>처럼 미셀 푸코나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이란 일망감시탑을 지난 다각적인 감시체계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미디어라는 것이다.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는 권력을 만들고, 언어는 또 다른 언어를 생산하여 또 다른 권력을 낳는다. 언어는 이른바 사회적 언어인 langue로 통해 사회적인 통제력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언어의 통제력에서 언어란 비단 말과 글이 아니라 tv, 컴퓨터에서 나오는 영상까지 포함하다. 영상언어로서 군중심리를 지배하는 논리는 이미 20세기에 이루어진 과정이다. 발터 벵야민의 <문예이론>에서도 영화라는 장치가 영상으로 통해 군중을 파시즘으로 유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미디어 장악은 문화 장악의 기본이니까”라는 위험한 발언은 충분히 학술적으로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그런 문화라는 곳은 인간이 사상을 만드는 것이 인간이 사상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보면 세계가 사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세계를 만든다고 적혀있다. 문화라는 곳은 인간의 각종 삶과 풍습, 경제, 정치, 사회 등이 얽혀있는 곳이다. 그곳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중의주의라는 단어가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니다. 재미와 흥미를 느끼고자 하는 라이트노벨에 대해 언급한다면 너무 깊이 들어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라이트노벨이라 하여 비평적인 접근에서 제외한다는 것 자체가 더 잘못된 점이다. 괴벨스 발언보다 더 관심을 두어야할 부분은 아마 괴벨스 발언 뒤에 나온 두 소녀의 대화록이다.

“그래요! 선전과 선도 이야말로 추악한 정치의 기본이죠!”, “우민들을 다스리기 위해 매스미디어의 활용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으니까.”, “후후. 바로 그거예요! 기원 이래로 인류는 단 한 순간도 발전한 적이 없으니까요!”, “우리들은 과거 이상으로 몇 배나 효율적이고 발전한 통제수단을 갖고 있지.”

위의 단어를 보면 정말 재미로 넘어갈 수 있는 말일까? 솔직히 생각하면 중세 유럽 이탈리아에 유명한 사상가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집필한다. 그때 그 <군주론>의 이상적 모델인 포악한 왕인 체자레 보르지아를 두었다. 그 왕이 로마냐라고 불리는 지역을 정복할 때 많은 주민들이 반항을 했다. 그때 자신의 부하 중에 매우 잔인한 사람을 보내 폭력정치를 했고, 주민들은 그 부하에 대해 지독한 반감을 사자, 어느 날 그 부하는 시체로 발견되고 그 마을주민들의 원성도 조용해졌다. 군중들이 가지는 반감에 대해 통치하는 방법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하듯이 그 이전에도 그 당시에도 그 후에도 존재했다.

지금에 와서 더욱 강력한 것은 미디어라는 것이다. 정보의 전달에서 예전에는 인간이 직접 말을 하거나 친필을 전달하는 수단만 존재했다. 그러나 전기통신기술 발달로 전화가 생기고, 인터넷이 생기며, 핸드폰과 각종 통신수단이 발달했다. 미디어의 통제로 언제 어디서든 마음에 드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보낼 수 있다. spectacle이란 단어는 바로 인간이 이미지로 통해 매개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괴벨스의 논란은 바로 spectacle로서 인간이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논리다. <중2병 데이즈>는 말 그대로 중2병이거나 혹은 중2병처럼 보이는 사람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이미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비정상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비정상적일까? 오히려 비정상적인 사람이 정상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비정상적일까? 작품의 전후맥락과 동시에 그 전후맥락의 모티브나 여러 가지 상황은 좀 더 생각해보면 다양한 유추가 나오지 않나 싶다. 물론 꿈보다 해몽이 앞설 수 있겠으나, 작가는 이미 라이트노벨을 저술하면서 우리의 일상과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 비일상에 대한 동경심과 욕망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비일상적인 세계란 우리가 상상하듯이 그렇게 대단하거나 좋은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 일상 이상으로 더 곤혹스러운 상태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안 그렇다면 처음부터 김월희 작가가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처럼 인류역사 중에 최고 금기 중의 하나인 근친상간에 대해 풀어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 블랙헤이젤 당주는 끝까지 친오빠와의 근친상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다. 그 모든 것을 버리는 순간 그녀는 세계와의 단절을 선언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욕망에는 금기가 많다. 신화 중에 하나인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인 테베의 왕 라이오스를 아버지인지도 모른 채 죽이고 만다. 그리고 테베를 괴롭히는 괴물 스핑크스의 문제를 해결하고, 테베의 왕이 된다.

이때 테베의 왕녀인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였고,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이면서 아내인 이오카스테와 더불어 2남 2녀를 낳는다. 그렇게 비일상적이고 금기를 깨고 불길한 이야기인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는 신화로서 남았고, 그것은 단절된 이야기가 아니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으로 통해 아직도 연결되는 공시적인 언어가 되었다. 일상과 비일상의 구분을 할 수 있는 분별력도 좋으나, 우리가 항상 일상만이 아닌 비일상에 동경심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늘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구보다는 욕망을 더 바란다. 욕구는 한 번 만족하면 그 순간으로 끝이 나나, 욕망은 한 번 만족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것에 대해 탐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보니 이야기의 세계에서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나간다. 비일상에 대한 동경 역시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다. 환상이란 것은 직접 육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면 정신적 관념으로 느낄 수 있다. 그것이 환상과 비일상이라 하여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 일상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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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1 - 진급 시험과 우로보로스,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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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1권은 거대한 적이라고 생각했던 자가 나오면서 이상한 길로 틀어진다. 이때까지 테러와 각종 음모가 우로보로스라는 강력한 허무의 용에서 시작했는데, 오히려 그 당사자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나이와 모습은 아무 상관도 없이 그저 자신이 원하는데로 모양새를 바꿀 수 있는 우로보로스 오피스는 이제 중학교에 올라갈 정도의 어린 소녀로 등장해 잇세이의 집으로 찾아온다. 오피스란 존재는 그인지 혹은 그녀인지 아니면 어린 사람인지 혹은 나이가 많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허무의 공간에서는 시간과 공간적 관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 논하자면 시간이란 것이 필요하다. 만약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존재하고 있더라고 그 존재에 대한 존재성을 인지할 수 없으면 그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전에 읽어본 철학서적 중에서 이런 문구가 있었다.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오피스란 존재는 저런 의문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그 존재는 분명 외형은 인간이나 인간이 아니고, 지능과 판단능력은 어린아이 수준이나 그런다고 우리가 잴 수 없는 시간적인 경과를 지녔다. 비록 재미로 보는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도 결국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보고 즐긴다. 인간의 문화 활동에서 라이트노벨에서 보이는 관념적인 부분은 인간에 의해 관념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오피스의 존재는 인간의 상상력 내지 신화적 존재성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왔다.

물론 악마나 천사 그 외에 등장하는 많은 존재 역시 관념적인 존재에서 시작했다. 그들은 현실의 물질성에서 존재하지 않아도 관념적인 상상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에서 우리의 관념적인 영역에서 물어 볼 수밖에 없다. 그런 관념적 상상과 판단들은 작품 내의 등장인물들이 생각을 좌우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여태까지 백룡제 발리를 비롯하여 수많은 적들이 침공했을 때 우로보로스란 존재에 대해 적대심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이상하게 동맹을 맺은 악마, 천사, 타천사의 세계에서도 오피스의 존재란 매우 위협적이다. 드래곤 중에서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피스가 방문하여 마치 속이 비어버린 눈빛으로 멍하니 가만히 있고, 관찰만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전개다. 단지 오피스는 잇세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찾아온 호기심만 가득한 존재였다. 공격의사나 타인에게 피해를 줄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잇세이나 주변 사람들을 관찰했다.

강력한 적이 오히려 일상적으로 같이 있으니 친구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뒤편에 보면 나오나 잇세이에게 구출된 오피스는 오직 그레이트 레드를 쓰러뜨리고 자신이 그 허무의 공간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그 누구에게 자신의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단순히 도와주겠다는 약속만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를 주변에 이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이 이용해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문제는 그 이용하려는 존재들은 오피스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 오피스의 힘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샤르바를 무찌른 잇세이지만, 마지막 편에서 잇세이는 사마엘의 저주로 이블 피스 8개만 남긴 채 사라진다. 문제는 사마엘은 강력한 저주로 드레곤과 관련된 그 모든 존재에게 큰 위험이 된다는 점이다. 적룡제인 잇세이와 백룡황인 발리의 경우 드레곤의 숙주가 되어 있기에 사마엘의 간단한 공격에도 큰 타격을 입는다. 그런 것은 오피스도 마찬가지다.

사마엘의 요소를 보며 생각한 점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연계성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 살면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처럼 살다가 어느 뱀이 이브에게 사과를 먹게 함으로서 그 죄악이 내려 결국 인간계에 추방되고, 평생 남자는 노동하고 여자는 아이를 낳게 되는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서구사회와 유대인 사회에서 본다면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한 지배해도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이나, 그 뱀은 신에게 미움을 받고 용과 뱀은 유사한 존재성을 가지기에 큰 저주를 받을 수 있다.

나름 작가인 이시부미 이치에이가 신화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점은 다시 확인한 결과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신인 아테네의 어머니는 메티스로 되어 있다. 메티스는 뱀의 몸을 하고 있으며, 여신의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페르세우스란 영웅이 안드로메다를 구출하는 장면에서 안드로메다는 나체의 상태로 포박되어 있고,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를 납치하여 감시하는 바다의 용을 창으로 찌르는 그림이 나온다. 이때 안드로메다는 좋은 표정보단 왠지 불만이 넘치는 표정으로 페르세우스를 바라본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입문으로 보자면 페르세우스가 바다용에게 창은 꽂은 것은 안드로메다의 처녀를 잃은 것이란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째든 사미엘의 저주는 남근중심의 성경에서 따온 소재다. 그런 저주의 기원이 이브의 사과이고, 그 사과의 저주로서 용과 뱀에게 끊임없이 내려가는 것이다. <하이스쿨 dxd>라는 작품 자체는 학원물과 판타지와 더불어 하렘계열에 이르는 장르이나, 작품의 모티브나 소재를 생각해보면 나름 신화적인 요소를 곳곳에 잘 배열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드레곤은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동양인 중국에서도 대모라는 존재 역시 뱀이고, 악마라는 존재는 남성적 존재보단 차라리 여성적 존재가 가깝다. 이분법적인 대립구도로 본다면 천사↔악마, 남자↔여자, 빛↔어둠, 이성↔감성 등과 같은 요소로 통해 본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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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2 - 보충수업의 히어로즈,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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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2권은 주인공인 효도 잇세이가 없는 상태에서 다른 오컬트부원들이 헤쳐 나가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가장 나약하고 한심해 보이던 환생악마인 잇세이가 어느 순간 가장 듬직하고 강하고, 믿을만한 친구이며 동료가 된 순간 같이 동고동락을 하던 부원들에게 잇세이란 존재성이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육체가 소멸하고 리아스의 손에 8개의 이블피스가 남는 순간 모두들 당황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옆에서 그렇게 웃고 즐기며 힘든 과정을 보낸 친구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은 그 아무리 강철심장이라도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다.

그런 괴로움을 안고 오컬트부원들은 적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때까지 적들에서 가장 나약한 육체일지 모르나 가장 강하고 무서운 조조와 싸우면서 이렇게 위기에 몰린 적은 없었을 것이다. 하이스쿨 dxd 시리즈를 계속 읽으면 보통 효도 잇세이를 중심으로 싸움이 전개되나, 이번 12권에서는 예전에 키바가 투혼이 빛이 난다. 지그프리트와 싸우면서 팔 하나가 잘려나가는 심한 부상에서 아시아의 치료와 피닉스의 눈물을 뿌려 다시 싸우는 투혼은 예전에 키바를 죽게 만든 바르퍼 갈릴레이와 타천사의 결투가 생각난다.

누구 하나가 쓰러지면 그 누구를 대신하여 그 몫까지 싸우자는 친구의 약속, 하렘 계통의 라이트노벨이라도 나름 소수의 남자가 다수의 여자를 점유하는 구도에서 남자와 남자끼리의 우정이나 의리도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캐스퍼의 역할이 돋보인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받아주지 않은 캐스퍼는 인간과 뱀파이어의 중간이 하프 뱀파이어로 나온다. 본래 영웅서사 내지 모험물에서 가장 불안한 존재가 가장 성장하기 좋고 가장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이미 정해진 힘과 규모라는 틀에 갇힌 게 아니라 그 틀이 불안정하기에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하프 뱀파이어에서 이블 피스도 변종을 흡수했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 불안하다. 초반에 리아스가 학교 어느 교실에 봉인하여 나둘 정도이고, 캐스퍼는 자신의 힘을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런 캐스퍼를 잇세이가 계속 돌보고 위로해주고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친구도 없이 외로운 시간을 보낸 캐스퍼에게 잇세이는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줘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잇세이의 죽음을 듣는 순간 정신이 나간 하프 뱀파이어는 마치 모든 것을 삼킬 듯한 강력한 마법으로 적을 공격한다.

(완전하지 않으나) 인간이 가진 것 중에서 감정의 폭발이란 무서운 것이다. 자신의 모든 힘을 극한으로 나오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성적인 요소로서 판단력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이 리아스의 공격방법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성의 판단보다는 감정에 휘말려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힘 역시 강력하다. 잇세이의 죽음은 좌절과 절망에서 분노와 절규까지 더해준 것이다.

그런다고 잇세이가 정말 죽어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하이스쿨 dxd 시리즈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는 서사구조다. 서사구조 상 중앙에 큰 위기에 봉착하여 다시 해소하는 플롯구조가 존재하기에 잇세이는 적룡제의 갑옷 안에 영혼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사미엘의 독은 무섭게도 육체의 소실만으로 타격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소실까지 이르는 무서운 저주였다. 적룡제는 잇세이의 영혼은 자신의 갑옷에 깃들게 하고, 사라지는 잇세이의 영혼 대신 여태까지 적룡제의 힘에 미쳐 날뛴 선배들의 영혼이 대신 잇세이를 지켜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영혼보다는 그 영혼이 적룡제 안에서 탄식하고 고통 받은 기억이고, 사념이었다. 그러나 그 사념들은 잇세이의 찌찌 드레곤을 같이 느끼면서 끊을 수 없는 저주의 시간을 깨고 마음 편하게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잇세이는 영혼을 유지하고 그레이트 레드와 오피스의 도움으로 새로운 육체를 만들고, 기존의 인간인 육체에서 허무의 공간에서 만든 신룡의 선물은 더욱 강력한 육체가 되었다. 신룡인 그레이트 레드도 잇세이의 가슴열정에 빠졌는지 잇세이의 육체를 만들고 현세에 복귀를 도와주고 다시 차원의 벽으로 들어갈 때 “말랑말랑 아이잉!”을 외치고 사라진다. 물론 그런 말은 사라져간 적룡제 사용자들도 마찬가지다.

찌찌 드레곤의 부활에서 찌찌 드레곤 노래에서 들리는 “말랑말랑 아이잉!”이 도저히 빠질 수가 없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반해 백룡황 발리의 선배는 여자의 엉덩이도 같이 사랑해주길 바란다고 한다. 인간의 신체구조에서 가슴을 상징하는 유방과 엉덩이가 있는 골반은 여성의 중요한 매력 포인트다. 결국 여자의 매력은 가슴의 크기이냐? 아니면 엉덩이 라인이냐는 것에서 근골계 구조로 본다면 나름 엉덩이가 탄탄한 여자가 가슴이 크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진행과 상관없이 인간의 몸을 유지하는 척추를 지탱하는 것이 골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 하이스쿨 dxd를 라이트노벨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볼 때도 나름 리아스나 아케노의 몸매를 관찰하면 허리라인과 엉덩이라인의 굴곡이 잘 어울린 것 같았다. 보통 만화학과에서 일러스트를 배우더라도 인간해부학을 배워야 그림체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어째든 인간의 육체가 아닌 드레곤의 육체로 부활한 잇세이는 다시 동료의 품으로 돌아가고, 폰 8개를 다시 받아 악마로 환생한다. 남은 것은 조조와의 사투, 전에 잇세이에 의해 눈 한 쪽을 잃은 조조는 이번에 메두사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대체했다.

11권의 사미엘의 저주가 용과 뱀에게 강한 점을 생각하여 잇세이는 사미엘의 피를 조조에게 뿌리고, 그 피로 인해 조조는 강력한 독과 저주를 받는다. 그 모습은 리아스가 억지로 피닉스가문에 결혼가기 전에 라이저와 결투 때 성수를 라이저에게 뿌린 것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조조는 제 아무리 지식과 판단력, 그리고 신마저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가져도 운명의 앞에서는 결국 잇세이에게 패배한다.

조조의 패배는 단순히 그의 야망이 아닌 것으로 나온다. 에필로그 부분에서 제석천인 손오공이 직접 조조에게 가서 제석천 자신이 조조에게 신물을 준 것과 더불어 조조에게 테러의 기회를 준 것을 암시한다. 제석천의 음모는 무엇인가? 솔직히 제석천인 손오공은 불교신앙을 중심으로 만든 서유기에 등장하는 원숭이신이다. 부처님에게 직접 미움을 받아 봉인되어 삼장법사에 의해 교화된 그가 오히려 조조를 돕는 것이라는 설정은 단순히 이야기는 조조만의 것이 아니라 조조를 그렇게 만들도록 사주한 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세력의 확장은 서양만 아니라 동양으로 넘어가고, 동·서양 내부에 등장하지 않았던 세력이 추후에 나올 것이란 암시를 던진다.

그리고 대부분 모험이나 전투가 있는 이야기를 가진 작품을 보면 초반에는 큰 구도 속의 적과 대치되는 상황이나, 결국 적은 자신의 동류가 아닌 다른 부류로 시작되나, 결국은 자신의 동류 사회에서도 존재하는 법이다. 잇세이 친구인 사지와 사지의 주인인 학생회장 역시 악마사회의 계급신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하려고 하나, 기존 악마사회에서는 비웃고 있다는 점이고, 잇세이의 등장과 활약에 나름 불편함을 느끼는 악마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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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만화를 비평하다
상명대 만화애니메이션 학과 학생들 / 팬덤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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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대학교에 만화애니메이션학과가 같이 있는지 생각했으나, 막상 책을 열어보는 순간 만화학과로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만화를 비평하다>라는 제목처럼, 만화만 비평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을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이 책이 네이버에서 지원하는 E-Book 시스템이므로 어느 정도 목차와 차례에 대해 미리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본 결과 단순히 만화만 보기에는 조금 부족하고, 차라리 만화애니메이션으로 묶어 봤다면 더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만화에 대해 비평함에서 상명대학교에서 출간된 <만화비평> 창간호를 읽어본 적이 있었고, 이후에 발간된 <만화비평 2>도 조만간 구입하여 읽어볼 예정이다. 같은 대학교에서 담당교수 내지 대학원 과정 혹은 실제 현직에 계시는 분들의 저술한 <만화비평>과 학부생이 모여 만든 <만화를 비평하다>는 분명히 그 전문성에서 차이가 날 것이다. 대학생들이 도전하여 만든 점이고, 그것을 착안하여 과도한 비판의 날카로움은 자제하는 것이 바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만화를 비평하기보단 말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게 더 좋았지 않나 싶었다.

 

왜냐하면 비평이라는 것은 비판적으로 평론한다는 의미이기에 비평적 가치로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동안 이 서평을 적는 본인도 국내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일어일문학과, 영상미디어학과 등 각종 만화애니메이션 내지 코스튬 플레이 문화를 다루는 논문 등을 읽어봤으며, 심지어 교재로 사용되는 도서도 직접 구매하여 보았다. 전공자도 아닌 비전공자의 입장으로서 꾸준히 만화와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까지 리뷰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전반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에 들어간 내용을 그대로 발췌하여 그것을 정리하고 나열한 정도까지가 아쉬웠다. 특히 모에에 대한 연구에서는 일본 인문학자 겸 서브컬쳐 전문가인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 대해 읽어봤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그 이유는 모에라는 속성이 이 서적 다른 챕터에 등장하는 <오디션>이란 작품을 두고 연장선상으로 판단하자면, 분명 연관성이 존재한다.

 

대중문화에서 주로 나이가 젊은 청소년들이 가진 팬텀현상에서 아이돌에 대한 환상적인 끌림과 애니메이션 내지 만화에서 나오는 아이돌스타에 대한 작품은 유사한 부분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일본에서 완결된 <아이돌마스터>라는 작품은 단순히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구성될 뿐이지 실제를 생각해보면 리얼TV로 방영되는 실사판 아이돌 특집방송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아이돌이란 대상이라 파생실재이냐? 혹은 현실부재라는 시뮬라크르(simulacre) 요소에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보면 만화로 보는 대중문화 및 매체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석사학위 논문 참고에서 통계표나 그림을 인용하는 것은 좋으나 결국 대부분 자료로서 만들고 비평적인 견해는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고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다른 챕터에서는 이와 달린 좋은 고찰이 있었다. 최근에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통해 웹툰이 갤툰이라고 하여 스마트폰으로 통해 만화를 보는 것이다. 이미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는 그런 웹툰에 대한 부분과 스마트폰으로 통해 게임을 하는 요소까지 연구한 사례와 발표도 있었기에 스마트폰으로 이용한 만화영역에 대한 확장은 좋은 연구라고 생각했다.

 

그런 웹툰과 갤툰으로 통해 기존 만화책과 달리 새로운 시도 내지 패러디까지 연구함에서 만화라는 장르를 좀 더 다양하게 표현하거나 한국만화에 대해 낯선 인상을 가진 대중에게 좋은 기회로 가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방향이다. 단지 인터넷이란 매체는 무료라는 결재시스템을 대중들이 선호하기에 웹툰작가에 대한 경제적 조건이 불리한 점과 또한 웹툰을 그저 웹툰으로 끝내기 보다는 강풀작가의 웹툰처럼 영화 및 연극과 같은 콘텐츠로 전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에 배우 송강호 씨가 출현한 <설국열차>도 유럽 만화의 원래 스토리고, 예전에 흥행에 성공한 <올드 보이> 역시 일본 만화책이 원작이다.

 

스토리텔링적인 요소에서 웹툰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며, 영화도 컴퓨터그래픽으로 통해 충분히 표현이 가능하기에 웹툰에서 주제만 좋으면 대중적으로 효과를 누릴 수 있으며, 또한 새로운 부가가치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일본 문화콘텐츠 사업은 이런 부가적 효과를 노린다. 이번 도서에도 일본 유명만화인 <원피스>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 왜 불가능한지 다루고 있었는데, 예전에 필자가 술집가게에 가보니 <원피스> 관련 작은 프라모델 내지 피규어가 있었다.

 

만화로 처음 나온 <원피스>가 애니메이션화로 나오고, 게임으로 나왔으며, 기타 음반이나 코스튬 상품 등으로 제작되어 수많은 콘텐츠상품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 시장에도 다가왔다. 그런 상품적인 요소에서 국내 만화콘텐츠의 차용에 대한 부분이 없는 점이 조금 아쉬웠으나, <원피스>라는 작품이 가진 장단점에서 단점을 어느 정도 인지한 부분에서 조금 좋아 보였다. <원피스>라는 작품은 <블리치>와 더불어 주인공 중심인 소수와 더불어 그 소수에 대적되는 다수의 적으로 구성되어, 주인공 편이 정의라는 가치관과 우정, 명예, 의리를 내세운다.

 

문제는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계속 만화에 몰입하게 되면 다른 관점이나 부분에 대해 맹신적인 부정을 하게 되는 점이다. 만화라는 서사에서 이분법적인 선악 내지 자타적인 관계는 그런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원피스>는 비판적으로 대하는 것이 문제인가? 라는 질문조차 나오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 국내 만화에 대한 비판적인 수용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 개인적 비평에서 색채로 통해보는 <염소의 맛>이 괜찮아 보였으며, 최근 화제가 된 <진격의 거인>도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진격의 거인>에 대해 필자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인류학적인 요소로 통해 문화유물론적인 관점으로 고찰해본 적이 있었다. 이때 청강문화산업대학의 박인하 교수님과 약간 유사한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일본이란 나라의 군국주의적인 요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거인과 인간의 대립이 결국 인간과 인간의 대립이란 내적 갈등에서 시작했을 것이란 점이다.

 

생각해보면 <진격의 거인>에서 계급화 된 사회구조와 그 구조로 통해 쉽게 거인에게 잡혀 먹히는 최하계급의 주거지 사람들을 생각해도 그런 맥락으로 연결 지을 수 있으며, 식량에 대한 위기의식은 더욱 그런 부분을 강조한다. 자본주의구조에서 자본이라면 <진격의 거인>에서는 자본보단 식량에 중요 포인트가 맞추어져 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식량으로 통해 인구통제를 할 수밖에 없는 점에서 <진격의 거인>은 자원이 한정된 사회에서 인구통제가 되지 않으면 그 사회는 붕괴될 수 있을 것이란 불안심리가 보이며, 한편으로 성벽으로 확장하려는 피지배계층의 의지를 지배계층이 원하지 않거나 부정하는 점에서 <진격의 거인>을 보면 정작 주인공이 속한 조사병단의 적이 성벽 밖의 거인인지 혹은 성벽 안의 인간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어째든 평소 취미생활로 만화애니메이션을 리뷰하거나 비평하고, 만화애니메이션 및 코스튬플레이 문화를 적어보면서 실제로 이런 내용이 비록 E-Book으로 발매되어도 대학교에서 발간되었다는 점이 매우 놀랐다. 대부분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가르치는 과정이 주로 만화창작과 그리기 내지 애니메이션 동화작업 위주인 것으로 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만들기보단 만들어진 것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는 그렇게 흔하지 않은 전경이다. 우연히 만화애니메이션 비평이란 검색으로 들어간 블로그나 카페를 보면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상이 가득한 것을 보면 참 유감이 아닐 수가 없다. 만화에 대한 비평은 단순히 만화를 넘어 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담론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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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X소나기 - Seed Novel
류은가람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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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소나기>를 처음 받아보는 순간 나는 황순원 선생님의 단편소설 <소나기>보다는 부활3집의 소나기가 생각났다. 왜 그럴까? 분명히 제목을 보면 <소나기×소나기>이고, 읽다보면 그런 느낌이 물씬 난다. 주인공 김군 역시 시를 읽다가 황순원 작가에 대한 애증의 눈빛과 그의 저서인 <소나기>를 잡고 몇 번이나 보고 또 본다. 그 책이 자신의 손에 떠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소나기는 대부분 국어 교과과정에서 소개되기도 하고, 교과서를 읽는 것에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소설을 읽게 된다.

 

소설을 읽게 되면 알겠지만, 그렇게 좋은 이야기로 마무리가 아니다. 아련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으로 소년과 같이 놀던 옷을 자신의 수의 대신 입혀달라는 소녀의 소원은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에 작은 구멍을 내는 것 같다. 그런 것일까? 부활3집에 나온 소나기 역시 그런 감정을 충실히 살렸다. 하지만 더 부활3집의 소나기가 더 가슴을 쓰리게 하는 이유는 그룹사운드 부활의 리더 겸 기타리스트인 김태원 씨가 메모한 글이다. “아! 재기가 바람으로 떠났다.” 부활3집 김재기 씨는 단 3곡의 노래만 녹음하고 사라졌다.

 

그래서 부활3집 1번곡이 소나기라는 점에서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보다는 나에겐 김재기의 목소리에서 소나기를 느낀다. 학창시절부터 꾸준히 듣던 부활3집을 오늘도 변함없이 출근길과 퇴근길에서 들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단편 소설 속에 넌 떠오르지, 표정 없이 미소 짓던 모습들이.

그것은 눈부신 색으로 쓰여 지다, 어느 샌가 아쉬움으로 스쳐 지났지.

한참 피어나던 장면에서 넌 떠나가려하네, 벌써부터 정해져있던 얘기인 듯.

온통 푸른빛으로 그려지다, 급히도 회색빛으로 지워지었지.

어느새 너는 그렇게 멈추었나, 작은 시간에 세상을 많이도 적셨네.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소설 속에 너무도 많은걸 적었네.

한참 피어나던 장면에서 넌 떠나가려하네, 벌써부터 정해져있던 얘기인 듯.

온통 푸른빛으로 그려지다, 급히도 회색빛으로 지워지었지.

어느새 너는 그렇게 멈추었나, 작은 시간에 세상을 많이도 적셨네.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소설 속에 너무도 많은걸 적었네.

그렇게 멈추었나! 작은 시간에 세상을 많이도 적셨네.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소설 속에 너무도 많은걸 적었네.

 

 

시작하는 듯 끝이 나버린 그 가사 가절에 담긴 아쉬움과 적막함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하고 싶은 감정들, 부활3집에 담긴 소나기는 그렇게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듣고 있는 노래다. 물론 다른 노래도 있지만, 이 노래만큼 뭔가 아련한 기분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 다시 올 수 없는 그런 허무함이 아닐까 싶다. 라이트노벨 <소나기×소나기>는 분명 작품 속성에 따라 나름 재미를 위해 억지로 상황을 연출하는 모습이 나온다. 학교에 3대 그룹인 학생회, 일진세력, 기숙사를 말이다. 평소 일본에서 나오는 라이트노벨보단 국내에서 나오는 라이트노벨을 읽다보면 뭔가 한국의 라이트노벨에서는 학교생활이 환상적인 공간으로 부여하기보단 항상 억압의 공간으로 보이는 것 같다.

 

이양과 김군이 다니는 학교를 보면 0교시부터 시작하여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야간자율학습, 기숙사 생활의 엄격함과 점심시간에 운동장에 뛰어나가려는 젊은 혈기, 그 젊은 혈기를 보충하기 위해 식당에서 붐비는 장면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여기까지 과장되지 않으나, 쉬는 시간만 보더라도 그 짧은 10분 동안 매점까지 뛰어가던 예전의 모습을 생각난다. 1학년 때는 그나마 학교 건물 1층에 있었으나 3학년이 되면서 제 위에 있는 3층으로 올라간 기억이 난다. 계단 1층의 차이라고 하나 그것은 분명 엄청난 페널티가 부여된다. 내려가는 계단은 수월할 줄 몰라도 올라가는 그 시간은 체력을 소비시키기 충분하다.

 

교사건물에서 식당매점까지 뛰어서 왕복 2분, 매점 내의 대기타고 있는 긴 줄, 생각해보면 전쟁은 현실에서 소소한 일들에서도 보인다. <소나기×소나기>에서 그런 치열한 학생들의 삶이라고 할까? 벌써 시기는 입학과 개학이 시작되는 3월인데도 그 치열함은 솔직히 옛날 생각을 나게 만든다. 단지 내가 다닌 학교는 급식자체가 제한적인 게 특징이다. 맛이 좋다고 하나 언제나 병영의 조식, 중식, 석식이 같은 메뉴라면 학교식당의 맛이 좋아도 한계가 온다. 그런 것까지 묘사한 것이 <소나기×소나기>이였다.

 

철저히 학교 안의 생활, 학교 안에서 그 젊은 혈기들이 같이 잠잘 때를 제외하고 같이 있는 것만큼 지루하고도 지겹고 때로는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어찌하랴? 바로 그 운명과 같은 만남이 바로 김군과 이양에게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가 네이밍 센스가 없기보단 마치 막 붙인 이름들은 누구나 김군과 이양이 될 수 있다는 개연적인 요소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물론 김군과 이양의 학교에서 보이는 좌충우돌은 왜만한 싸움꾼도 보여주지 못할 혈투였다. 작품에서 김군이 싸우고 와서 교복을 보니 형이상학적 모습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전위적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눈에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기보단 눈에 보이나 낯설고 충격적인 모습이 더욱 단어사용으로 어울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그 전위적인 교복이 될 수 있는 김군은 이양과의 격투를 즐기고 있었다고 할까? 수업시간에 시도 때도 없이 그것도 모자라 벌로 화단을 정리하는 도중에서 말이다.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전에 좌의정과 우의정인 이양과 김군의 조상 할아버지가 결국 우의정인 김군의 조상님이 영의정이 되고부터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내려오다 이양의 집안 독립운동가로 가문이 몰락하고, 김군의 집안은 거기서 무사히 눈치 보며 살았다.

 

그런 이를 빠득빠득 갈던 두 집안이 시공을 초월해 조선시대에서 대한민국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서로 원수처럼 여긴 2사람이 나온 작품명이 <소나기×소나기>란 점에서 차라리 <로미오×줄리엣, 줄리엣×로미오>처럼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처음에 생각했다. 하지만 복선은 역시 소나기다. 그리고 소나기가 내리는 날인 비가 내리는 날은 뭔가 인간에게 감성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그 감성이 때로는 인간의 지난 과거를 다시 찾아오게 한다. 인간은 세상에서 그 무엇을 피해갈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의 과거를 피해갈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양의 과거는 이때까지 자신이 속이고 싶은 것이고, 자신은 그 환상에서 살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지는 시간적 흐름은 항상 소나기가 내리는 우울한 하늘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 곧 사건의 연결되는 접점이라고 할까? 김군과 이양의 만남에서 이양의 모습은 자신이 잊고 싶은 과거에서 환상 속에 가려진 현실, 그리고 미래를 기다리는 희망이었다. 인간은 우연에 의해 그것이 우연일지라도 필연에 의해 굴러가는 존재인 것 같다. 이양의 아버지가 노동조합위원장이고, 김군의 아버지가 공장사장이란 점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충돌을 보여준다.

 

<소나기×소나기>를 읽기 전에 김연수 작가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라는 소설을 읽었다. 주인공 카밀라 정희재는 잃어버린 자신의 어머니, 정지은을 찾아 한국에 온다. 희재의 할아버지인 지은의 아버지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일어난 것처럼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회사 측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 측에 부른 용역깡패가 지은의 아버지의 동료들을 무참히 폭력을 가해 사람이 죽게 되고, 지은의 아버지는 그런 절망에 이기지 못해 자살을 선택했다. 지은의 아버지는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정희재가 다시 2012년에 한국에 올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이희재의 아버지는 부르주아에서 <소나기×소나기>에서도 그런 비슷한 구도가 보인다.

 

이양의 아버지는 노동조합위원장에서 프롤레타리아였고, 김군의 아버지는 부르주아란 사장이었다. 당시 IMF라는 금융위기로 모두 어려워할 때 두 사람의 아버지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와 같이 대립하기보단 오히려 화해를 선택했다. 그러나 플롯이란 장치란 그렇게 잘 되게 만들지 않는다. 비오는 날 교통사고로 모두 잃어버린 이양, 그런 이양이 이때까지 자신을 속이고 거짓된 환상에서 살았다. 그런 그녀 앞에 김군이란 그 환상을 부수고, 혼자만 보이던 할아버지의 존재마저 부정당했다.

 

라이트노벨치고는 상당히 재미도 부각했었고, 나름 현실적 학교생활을 보여주었으며, 게다가 역사적 사실을 하나의 설정으로 집어넣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매우 의외의 느낌을 받았다. 한국적 라이트노벨의 특성일까? 그것은 역사적 사실적 조건들을 많이 부여한 느낌에서 말이다. 환상적인 부분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양의 환상에 살던 할아버지는 이양의 세계만 진실로 존재했던 환상인 것이다. 그 환상을 깨는 것이 속죄인 소년 김군, 그는 원래부터 웃지 못했다. 아니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루게릭병이었다.

 

얼굴의 근육이 마비되어 표정조차 짓지 못하고, 최후에 전신이 마비되어 호흡곤란으로 사망하는 무서운 병이다. <소나기×소나기>이라는 제목과 같이 그 소나기는 2가지로 양분되었다. 두 사람 관계에서 다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소년이 했다는 점이고, 최후에 관에 담긴 채 이승과 이별하는 사람은 소녀였으나, <소나기×소나기>에서는 소년이야 했다. 자신의 목숨에 대한 미련 없이 그저 3주 동안 추억을 만들려고 했다. 수술에 대한 비관적 태도에 김군은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미련을 버리고 가고 싶었다. 죄책감이란 미련을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양과 싸우면서 김군은 가슴 한편에 살고 싶다! 라는 의지가 들은 것이다.

 

이양에 대한 사죄에 대해 모든 것을 포기한 김군이나 그런 김군에게 유일한 희망은 이양의 정면 돌파였다.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김군, 그는 중학교까지 야구선수생활하면서 죽어라 야구만 했다. 하지만 병이 심각해지면 왼손에 마비가 오고, 그 마비가 자신 스스로에 대한 삶의 의지를 죽게 만들었다. 공항 가는 길, 비가 무척이나 내린 고속도로에서 이양의 던진 야구공에 대해 배트로 휘두른 김군은 희망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황순원의 <소나기>는 미완의 만남이라면, 라이트노벨 <소나기×소나기>는 미완의 이야기로 끝난 것이다.

 

아니라면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것이 아니라 끝이 나듯이 시작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소녀는 5월 무더운 햇살을 바라보며 화단 앞에서 미소 짓는다. 비가 오는 만남의 3월의 비와 조금 이를 것만 같은 5월의 장마를 말이다. 비는 대지의 생명에게 생명을 주듯이 흐린 날에 내리는 비는 우울함만이 아니라 희망도 올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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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4-05-02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라노벨 치고는?

하. 문하~악 하시는 분이신가베. 길게 늘어놨지 도통 핵심은 못잡는 글일세!

만화애니비평 2014-05-03 00:08   좋아요 0 | URL
아마 그런가봅니다.
책 내용 자체가 핵심이 없었습니다.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를 모티프로 한 것은 아는데, 결국은
사이 나쁜 아이들이 사이 좋게 된 것..끝...핵심따위 뻔한 걸 잡을 이유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