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버마 - 금지된 자유의 땅 버마로 간 NGO 부부의 버마 견문록 카툰 클래식 12
기 들릴 지음, 소민영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프랑스 만화작가가 그린 <굿모닝 버마>를 읽으면서 조금 기분이 묘했다. 작가인 기 들릴인 자신의 아내와 미얀마로 떠난다. 아마 작품 내내 아내의 업무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으나, 그의 아내는 원래 의사인 모양이다. 국경 없는 의사회 프랑스지부에서 말라리아나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는 동남아시아에 의료봉사를 가기 때문이다. 책 표지를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금지된 자유의 땅 버마로 간 NGO 부부의 버마 견문록이라고 말이다.

 

딱히 버마의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보단 그저 만화가 기 들릴이 자신이 직접 버마에서 체류하면서 경험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다. 작품을 보면서 특이한 것은 과도한 그림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매우 안정된 구도로 나누고, 페이지마다 구분한 칸을 보면 일정한 사각박스로 그려 넣었다. 보통 한 페이지당 6칸으로 나누거나 조금 많으면 중간에 칸을 늘려 7칸이고, 최대한 늘리면 15칸에 이른다.

 

때문에 작품을 보면 조금 뭔가 모르게 잔잔한 수면을 흘러가는 것처럼 느낀다. 매우 안정된 구도로 작업하기 때문이다. 뭔가 극적인 상황을 부여하기보단 그 미얀마란 장소에서의 작가 일상을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건이 아직도 현대에 남은 미얀마를 이야기하고 있다. 제일 인상깊은 것은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한 부분이다. 그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독립을 위해 영국과 싸우고, 그러기 위해 일본에 협력한 척하다가 일본에게 대항한다.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결국 암살되었으나, 미얀마에선 영원히 추앙받는 영웅인 것 같았다. 하지만 독재군부가 오면서 그의 업적은 최대한 숨겨지고, 그의 딸인 아웅산 수치 여사의 감금행위는 노벨평화수상자를 죽이지 못하고 굴레의 속박에 가둔다. 자유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것 같다. 자유의 표현과 정당한 비판이 없다는 것은 행복한 세상이 아니다. 법과 규제가 엄한 반면 군부독재 부패인지 그곳은 매우 타락한 모습이 넘치는 것 같았다.

 

에이즈에 감염되는 사람들, 말라리아 모기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 물 문제도 포함되고 말이다. 과도한 노동착취에 대가로 받는 것은 마약주사라는 것이 참 특이했다. 광산에서 보석을 캐다가 죽어도 아무도 구출하지 않고 그저 다른 광으로 가서 계속 채취한다고 한다. 보석이라도 혹시 감출까 싶어 입안과 코 안까지 검사하고 여자들은 자궁까지 검사한다고 한다. 그래서 성병이 많다는 이야기에 <굿모닝 버마>는 굿이란 단어를 붙이는 것이 왠지 아이러니컬 하다.

 

예전에 우리나라에도 <굿모닝 베트남>이란 영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굿모닝일까? 내가 어린 시절에 존재한 영화, 그렇게 동남아 지역의 굿모닝은 왠지 굿모닝을 맞이하고 싶은 욕구가 들 것이다. 인간에게 욕망이 있으나 욕구는 다른 점이다. 삶의 욕망은 욕심을 말하나 삶의 욕구는 기본적인 것을 말한다. 만화작가인 기 들릴은 약간 머나먼 곳에 폭탄테러 소식도 듣고, 최근 1년 동안 사고가 나지 않은 항공사의 비행기를 탔다. 타면서 비가 새어 승객좌석에 떨어지고, 바퀴벌레가 날아다니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미얀마란 곳은 아직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듯이 기술의 발전이 두려운 것인가? 국가의 인터넷 회선을 2개 회사가 장악하나 그곳은 독재자와 독재자의 아들이 운영한다. 모든 국가적 사안에서 국가에 조금이라도 비판이나 거슬리는 태도는 가만두지 않는다. 독재자에 대한 비판은 물로이거나와 다른 나라 기사인 내용이 비판적 내용이 나오면 검열대상이다. 그래서일까? 미국 TIME 잡지가 막상 미얀마에선 가위로 오리고 오려서 볼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 들릴이 어느 지역을 여행하면서 조지 오웰이 19세에 인도경찰로 근무한 지역에 갔다고 하는데, 그 조지 오웰이 <1984><동물농장>을 적어 파시스트와 경찰국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그런데 최근에 아웅산 수치를 만난 어느 분도 만만치 않은 <1984>의 빅브라더와 같은 포스를 풍기는데, 글쎄다. 모르겠다. 시선과 관점은 다르니 아마 미얀마에서 아웅산 장군의 그림을 내놓지 못하나 많은 국민이 아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지 않을까 싶으나, 어째든 미얀마에서 자유로운 향기는 느끼지 못했다.

 

분쟁지역 주변에 말라리아 모기로 죽는 사람이 수천명인데, 미얀마 정부에선 매우 어려운 절차로 대응한다. 군부대가 모든 것을 장악해서 그럴까? 기 들릴의 그림에서 사실 그 군부 사람들도 왠지 친숙하게 그리는 것이 흥미롭다. 작품을 보면서 가장 중심적 이야기는 작가의 아들인 루이스다. 루이스와 같이 밖으로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고 아는 척을 하겠지만, 루이스를 대동하지 않으면 모두 외면한다.

 

대신 물을 서로 쏘아대는 축제에선 기 들릴에게 쏘는 물총 세례는 참 아름답다. 쉴 새 없이 뿜어대니 말이다. 날이 너무 더우니 물을 뿌려도 금방 마른 것처럼 보이나 우기가 금방 닥치기에 비가 자주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복사용지가 놓인 프린트기에 형광등을 놓아 습기를 날리는 모습은 참 인상적이다. 그래도 미얀마 주민들은 많이 순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게 극단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그렇게까지 거친 표현은 없다. 단지 군부의 횡포는 계속 좌절하는 NGO 활동은 인상이 새롭다.

 

사실 모든 활동에서 직접 그곳에 가서 일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이동이라고 했는가? 몇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또 갈아타고 하여 좁은 장소에 냄새나는 불쾌함까지 감수해야 하는 점은 작가가 미얀마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승객들이 자든 말든 TV는 항상 켜져 있고, 소리는 최고로 ON이다. 먼지가 많아 얼굴을 숙이고, 내리는 순간 추워서 고생했다는 작가의 경험에서 미얀마란 과연 더워 에어컨이 없으면 안되지만, 그 에어컨가지 사람잡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 너무 덥다보니 낮에 나가는 것은 무리이고, 전기가 계속 공급되지 않아 에어컨을 켜면 전기스위치가 내려가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래서 전염병이 많이 심각하다. 타미플루 백신 역시 인상 깊다. 마약치료제 말고라도 전염병 백신은 매우 중요한 것 같은데, 이미 다 팔려 공급받지 못하게 되자 전 세계 NGO에게 요청하자 미얀마로 날라온 백신의 모습에서는 왠지 모르게 감동이 왔다.

 

지구 전 인류에 대한 인류애는 나에게 그다지 깊은 편은 아니나 문화인류학 관련 도서를 보면서 서구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자연과 동화된 문명이 파괴되거나 원주민들이 학살당하거나 혹은 그들이 만나지 못한 전염병에 죽어가는 부족들의 이야기를 많이 접했다. 아마도 끌로드 레시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와 같이 어느 한 철학자 겸 인류학자의 관찰수기록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물론 <슬픈 열대>는 남아메리카와 같으나 미얀마와 같은 동남아시아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레비 스트로스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적 역사에 놓여있다면 기 들릴은 그것이 지난 후의 이야기다. 역사적 사건으로 현실의 조건이 구성된 상황 아래 기 들릴의 미얀마 기행기는 그들의 문화에서 보이는 친숙함과 경외감, 한편으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주민들에 대한 애정이 여기저기 살짝 녹아있다. 늘 더위와 비, 그리고 불편한 교통이었으나 그런 악랄한 추억이 있기에 이런 만화도 나온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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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6 -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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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후에 다시 돌아온 인간이란 어떤 느낌일까? 그것은 다시 나에게 하이스쿨 DXD 1권에서 잇세이가 타락천사 레이나레에게 죽어갈 때 그 마지막 순간의 독백이다. <그 사람의 머리카락 색이랑 똑같아. 선혈로 물든 손을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붉은 스트로베리 블론드보다 더욱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 그래, 그 사람의 아름답고 붉은 머리카락은, 내 손을 물들인 피와 똑같은 색이다.>

 

리아스를 생각하면서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생각하고, 자신의 죽음의 세계를 받아들이려 한다. 죽음에 대한 원망과 동시에 그는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욕망보단 끝까지 에로스라는 삶의 욕망을 추구했다. 애니메이션 1화를 보면 조금 성적인 노골성을 더하여 잇세이의 망상을 보여준다. 상반신이 나체인 리아스가 커다란 가슴을 드러내고, 거기에 새끼손가락 하나를 입에 문다. 성적 에로티즘을 더욱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엔 죽음이란 거대한 운명 앞에 촛불처럼 사라져갈 잇세이에게 리아스의 가슴은 자신이 죽어도 그냥 죽을 수 없는 마지막 에로스이다.

 

그런 잇세이에게 리아스는 폰이란 말 8개를 부여하여 전생시켜 그레모리가문의 악마로 만든다. 그런 잇세이의 과거이기에 하이스쿨 DXD 6권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가진 잇세이와 인간의 영역을 떠나 이제 그로테스크한 괴물로 변한 잇세이의 2가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인간의 모습을 버리게 된 동기는 비숍인 아시아가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생과 사의 중간계인 아스트랄의 공간에서 운 좋게 살아난다. 죽음 직전 공간에서 백룡제 일행에게 목숨을 구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아있다. 괴물로 변한 잇세이는 아시아의 무사함을 보고 인간으로서 육체로 돌아올망정 인간으로서의 이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잇세이가 육체를 잃어도 정신을 잃어도 오직 그것을 원상복구가 가능한 것은 King인 리아스의 모습이다. 강하고 아름답고 불과 같은 머리카락에 커다랗고 탄탄한 가슴은 잇세이에게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작품상에 기본 속성이 하렘모드가 있고, 게다가 남자주인공은 다수의 여자와 살아가는데, 부모와 같이 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이 살기에 작품은 특이하게 흘러간다.

 

하이스쿨 DXD 6권의 특징은 원래 사라져야할 인물이 다시 나타난 점이다. 타락천사 편에서 악마사냥에 미쳐버린 프리드 신부가 나온 점과 그가 상급마족과 사전에 모의한 점이다. 물론 사전 모의하기 전에 그는 분명 타락천사 우두머리인 아자젤에게 영원히 구속처리 되었으나 다시 음모를 위해 나온 것이다. 이번 6권의 음모를 만든 디오드라 아스타로트는 사실 하이스쿨 DXD 스토리에서 복선을 예고한 인물이다.

 

아시아가 1권에서 자신이 천주교회에서 추방된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악마를 치유해준 것이고, 그 악마가 바로 디오드라 아스타로트였다. 그는 수녀나 신앙심이 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유혹하여 타락하게 만드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삶는다. 아시아사가 교회에서 추방된 것과 타락천사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어 악마로 전생된 이유는 바로 디오드라의 음모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약간 이야기가 돌아와서 원위치로 온 것처럼 아시아의 죽음은 우연한 불행이 아니라 사전에 예고된 비극이었다.

 

대신 아시아는 잇세이의 도움을 잊지 않았다. 친구도 새로 만들고 좋아하는 사람도 생기고, 무엇보다 가족이 생긴 것이다. 고아로 태어나 천주교회 앞에 버려진 소녀에게 외로움이란 두려운 존재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두려움이고, 그 두려움에서 외로움일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둘 곳 없어 방황하거나 혹은 억지로 참아야 하는 심정이란 매우 괴롭다. 아시아에게 잇세이라는 친구가 생기고, 키류와 바보 변태 친구도 친구가 되었다. 게다가 제노비아는 같이 신을 모시던 사람으로서 같은 공감대가 있었고, 잇세이 부모는 마치 아시아의 친부모처럼 대해주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과 친구, 그리고 더 나아가 연인이란 것을 보여준다. 그런 것처럼 잇세이는 그런 것을 위해 싸우고 다치고 바보처럼 앞을 나간다. 물론 드레이크라는 전설적 용이 깃들어 있지만, 그 힘은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 먹는다. 저거노트 드라이브라는 금단의 기술은 아마 인간에게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가학이다. 그 가학적 그로테스크에 마음에 새겨진 빈 공간은 오로지 인간의 정이 답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미리 잇세이가 마계에서 녹화하던 노래와 춤은 매우 인상적이다. 다소 음란하고 도발적이 가사나, 그것이 자아를 돌아오게 하니 말이다. 본래 신이나 신과 필적한 존재들은 춤과 노래로서 달랠 수 있다 한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는 종교적으로 무속신앙이 있고 그 신앙의 매개자는 무당이다. 무당은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미친 듯이 춤을 춘다. 그리고 지치 쓰러지면 어느새 다른 인격이 나오는 경우를 본다. 한을 풀어가기 위해서 제의적 행위로서는 춤과 노래가 필수적이다. 그것은 춤과 노래가 인간들 무의식적 내면에 존재하는 심층적 공간을 표층으로 올릴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다.

 

저주받은 드레곤의 힘에서 잇세이는 이미 인간이 아닌 극단적 상황이므로 신과 필적한 힘을 가졌다. 그래서 신을 달래는 주술적 행위는 춤과 노래다. 이미 녹화된 영상에서는 밸런스 브레이커의 모습을 한 잇세이가 어린아이들과 같이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문제는 노래 제목과 가사가 특이했다. 제목은 “찌찌 드레곤의 노래”이고, 작사는 타락천사 총수인 아자젤, 작곡은 리아스의 오빠인 서젝스 루시퍼, 춤은 회장의 언니인 세라포르 레비아땅이 했다.

 

아자젤부터 장난기가 강한 능구렁이라는 점과 루시퍼는 겉으로 근엄하나 속은 장난꾸러기에 동생 리아스를 놀려먹기 좋아하는 오빠에, 세라포르는 이미 마법소녀 코스프레를 하면서 귀여운 말투를 늘어놓은 여마왕이다. 장난으로 뭉친 이들의 작품은 리아스의 가슴이라면 환장하는 잇세이의 그대로 모습을 보여준다. 리아스의 가슴을 생각나게 만드는 가사인지 이성을 잃은 잇세이가 무의식적으로 “찌찌”라고 한다. 5권째에서 위기의 순간에 잇세이는 리아스의 가슴을 보고 유두부분을 손가락으로 누르자, 리아스의 입에서 약간의 신음소리가 나오고, 그것으로 위기를 탈출했다.

 

아마 리아스의 가슴에 대해 무척이나 집착하는 잇세이에게 찌찌드레곤의 노래에서는 잇세이가 다시 올 수 있는 해법이 있었다. 과연 그렇듯이 부장이 이성잃은 잇세이에게 다가가서 교복단추를 풀고, 브래지어를 벗고 자신을 손을 잇세이의 손으로 가져가 자기 가슴에 잇세이의 손을 대게 한다. 그리고는 잇세이는 갑주의 저주에서 풀린다. 왜만한 마왕조차도 이기기 힘든 잇세이가 리아스의 가슴에 무너지니 주변에 있는 백황제 발리는 얼굴을 찌푸린다. 자신의 라이벌인 붉은 녀석이 하얀 녀석보다 다른 것에 집중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 내면의 폭력성보다 성적인 무의식적 욕망이 승화하여 삶의 이유를 부여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무엇 하랴? 하렘 작품 공통에서 남자주인공이 상당히 둔탱이 아니면 바보속성에서 잇세이의 방황은 언제까지일까?

 

참고적으로 레이팅 게임에서 폰인 잇세이는 적진에 가면 퀸으로 승격하는 체스게임을 이용하는데, 이런 방법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모습과 비슷하다. 가상과 현실에서 게임이란 공간이 주체와 대상이 분리가 아니라 동일한 점에서 다소 pata-physics의 요소가 다분한 작품이다. pata-physics라고 하여 별로 어려운 것이 없다. 현실과 가상의 차이가 없어져서 그저 여기가 가상이고 현실일 뿐이다. 재미를 보려면 거기에 푹 빠지는 것도 거기서 잘 나오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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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소년 3
임진주 지음, 임애주 원작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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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적어보는 <금지소년> 3권 째의 리뷰는 매우 특별하게 여긴다. 그것은 예전에 금지소년 2권을 리뷰이벤트에서 나의 리뷰가 임진주, 임애주 자매 작가의 마음에 들어 이벤트 당첨 발표에 상품수여명단 1번째로 내 별명이 있었다. 그리고 3번로 나온 단행본이 나온 후에 내가 구입하여 리뷰 할 예정이라고 하니 역시 거기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팬들이 자기의 서적을 사주고, 리뷰까지 적어 인터넷이란 매체로 통해 팬들의 반응을 보는 작가의 마음은 매우 설레일 것이다.

 

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작가에게 만화책을 보고 리뷰를 취미로 하는 입장에서 예의를 다하여 글을 적을 수밖에 없다. 내용에 대한 전반적인 스토리를 설명해주는 것보다 이 만화책에서 담론하는 것을 주로 적어보기로 했다. 기본적으로 이 만화책은 사회적인 성과 생물학적 성에 대한 이중적인 요소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본래 자신이 남성임에도 여장을 하는 나운이의 경우 분명 사회적인 성이 방해였기 때문에 스스로 포푸리 소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즉 포푸리 소녀는 자신의 살기 위한 생계수단으로서 여자행세를 했다.

 

그것은 사회적 성인 gender 요소가 강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성적인 부분이 등장한다. 2화 마지막에 엄청난 미남이 옆에 미녀를 끼고 앉으면서 마지막에 포푸리 소녀의 허벅지를 만진 모습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홍지수, 미남 중학생 홍지우의 친누나였다. 그녀는 사회적인 성인 gender에서 남자가 된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성인 sexuality로서 남성 행세를 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남동생 지우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함이다. 동생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옆에 없기에 외로움을 탔기에 지수는 지우의 엄마와 아빠가 되기로 한다.

 

양성적인 존재하기 바랐으나 실존적인 형상은 오히려 남자가 가까웠다. 포푸리 소녀의 경우 아직 어리고 야윈 소녀로 보이나, 은근히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선 친오빠의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포푸리 소녀가 아무리 여장하고 여자처럼 보이려고 해도 근본적인 요소는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동생인 나솔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고, 그는 오빠로서 솔이를 돌보기 위해 사회적 성을 바꾼 것이지 지수와 같이 본래의 성향을 바꾼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지수의 동생 지우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지우는 매우 여자다운 매력을 가진 여성을 좋아했다. 머리카락이 길고, 화장과 의상을 세련되게 가꾸며, 말도 아주 부드럽게 하는 여성으로 말이다. 곧 그것은 지수의 선택이 틀렸음을 의미한다. 어릴 때의 지수는 긴 검은머리에 치마를 입기 좋아했던 누나였다. 오히려 지수는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지우에게 큰 따뜻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신화에 두면 마치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엘렉트라는 그리스신화 중에 전쟁영웅인 아가멤논 왕의 딸이다. 여기서 아가멤논 왕이 그리스신화에서 매우 중요한 서사인 전 트로이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바다에 배를 타고 가는데, 때마침 폭풍우를 만나고 그것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딸을 죽여 제물로 받쳐야 한다는 신탁을 받는다. 결국 아가멤논 왕은 자신의 딸을 희생양으로 바치고,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집에 돌아오자 자신의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인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집에서 쫓겨나 비참한 생활을 하던 아가멤논 왕의 딸 엘렉트라는 동생인 오레스테스를 불러 자신의 어머니와 그녀의 정부를 살해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충동과 어머니를 자신으로 것으로 하고 싶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동기는 오레스테스는 어린 시절 누나인 엘렉트라의 손에서 컸다는 점이다. 지수와 지우의 부모님은 어린 시절 모두 집에 비운 상태이고, 지우는 그것에 대한 외로움에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누나가 아빠와 엄마가 되어주겠다는 것은 결국 2가지 모두 하겠다는 것과 동시에 2가지 다 될 수 없다는 의미와 같다.

 

결국 누나는 여성성을 모조리 버리고, 여성 안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만을 추구한다. 만약 지수가 머리를 자르지 않고, 옷도 류아처럼 치마와 긴 생머리를 지니고 있었다면 동생인 지우는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달려가 사귀자는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어린 시절 지수의 뒷모습은 류아의 모습과 흡사하다. 류아에게 절대적으로 따라다니는 지우의 성향은 바로 어머니가 없기에 대신 어머니 같은 누나를 원하고 따르는 오레스테스의 모습이다. 그러나 진정한 누나와 같은 느낌, 아니 어머니와 같은 느낌은 포푸리 소녀에게 비추어졌다.

 

포푸리 소녀가 나운이로 한창 솔이를 돌볼 때 가난과 배고픔에서 괴로워했다. 그리고 솔이가 먹고싶은 것을 먹지 못하고, 냉장고에 음식이 거의 바닥날 때, 계란에 밥과 소금물 넣어 아주 소박하나 정성이 가득한 음식을 주었다. 결국 남성에게 필요한 여성의 매력이란 것은 인간 아니 어머니, 혹은 여성의 섬세함인가? 요리대회에서 지수의 손에는 비싼 음식재료와 고급향신료만 가득했으나 나운이에겐 계란, 쌀, 소금물과 같이 매우 쉽게 구하고 익숙한 재료였다. 이 시합에서 지우는 둘째 치더라도 도대남과 그 후배들도 포푸리 소녀가 준 음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성성을 모조리 버린 것처럼 지수, 그러나 포푸리 소녀를 만나면서 그녀는 자신이 버렸다고 여기는 여성성을 보인다. 임진주, 임애주 작가의 그림체를 보면 항상 여학생들의 가슴이 크다는 점이다. 류아부터 시작하여 지수의 4인방 미소녀의 가슴 역시 크다. 가슴이란 여성성의 상징성에서 지수는 가슴이 남성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포푸리 소녀와의 2번째 대결에서 여성성을 내보인다. 그것은 허벅지의 굵기였다.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 작화에서 해부학적인 근골계에서 여성의 가슴과 허벅지는 <금지소년>에서 항상 강조되는 방법이다.

 

포푸리 소녀가 남자이기에 탄력 있는 굵은 허벅지를 가질 수 없다. 작은 키에 야윈 몸, 분명히 가녀린 소녀로서 나운이는 포푸리 소녀로 연기하면서 그나마 여성적인 점을 강조하는 것은 허벅지이다. 그런데 수영복을 입은 지수의 몸에서 그런 모습이 보였다는 점은 지수에게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남성성으로 무장한 자신의 모습에서 감추고 싶은 아킬레스건을 내보낸 점이다. 지수가 여자면서 여자의 몸을 탐닉한 건 그녀 스스로 레즈비언이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 1년 전 수영대회에서 누군가의 질투로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여자이면서도 여자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로 주변에 있는 여자에 대해 마치 하렘에 사는 왕처럼 군림하고, 자신의 남동생에게 여자를 믿지 못할 존재라고 한다. 그중에서 오직 포푸리 소녀는 제외하고, 그런 가시만이 돋친 지수를 제대로 여자로 봐주는 것은 동물처럼 감이 예리한 도대남이었다. 인간에게 보이지 않은 질투와 시기, 분노는 결국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성격파탄으로 이어진다. 지수가 포푸리 소녀와의 수영대결은 자신이 버릴 수밖에 없었던 여성성의 회복이다.

 

포푸리 소녀가 준 케이크를 먹고 싶어도 앞에서 부끄러워 먹지 못함은 지수 스스로가 억압하는 강박관념이었다. 단순히 지수가 지우의 이성교제를 허락하는 문제에서 벗어나 이제는 스스로가 여자로 돌아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놓인 것이다. 만약 다시 지수의 어린 시절 섬세하고 다정한 누나로 돌아간다면 지우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지우가 바라는 것은 여성의 포근한 손길과 정이지 강하고 거친 남성적 위압이 아니다. 지우가 지수보고 누나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지수보고 누나로 인정하는 것에 제대로 본 적이 없기에 <금지소년> 3권의 대결이 4권으로 넘어가면 다른 문제해결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 3권에서는 류아와 나운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대조했다. 나운이가 처음으로 류아의 집에 방문할 때, 류아의 집이 엄청난 집이란 사실에 놀라는데, 이때 나운이를 비추는 모습은 하이앵글, 즉 위에서 아래로 보는 구도였다. 반대로 나운이의 전화를 받는 류아의 모습은 다리를 강조한 로우앵글이었다. 상대적으로 류아의 권위가 강함과 동시에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끝으로 마지막 부록편을 보면, 항상 그림은 임진주 작가가 그리는 반면 부록에선 글을 맡은 임애주 작가가 맡는다. 이번에 트랜스 섹슈얼 즉 남성과 여성의 반대로 된 자는 안승호인데, 참으로 기가 막힌 포즈로 시작한다. 안승호가 여자로 변하고 긴머리의 포니테일에 매우 짧은 치마를 엉덩이를 가리고 있는데, 엉덩이와 그리고 엉덩이가 연결된 허벅지가 매우 탄력적이거 날씬한 허리, 그리고 상체를 보면 가슴 역시 크다는 점이다. 작가분이 여성이라는 전제로 본다면 여성의 가슴은 자신의 상징적 요소로 볼 수 있고, 하체는 여성의 기본골격을 나타낸다.

 

다소 성적인 매력을 강조하는 것과 그러면서 자기의 정체성이란 2가지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서 본래 남성 캐릭터마저 본래 여성캐릭터로 나오는 특성까지 같이 부여해 버린다. 물론 이전에 여성이던 류아를 남성처럼 보인 그림도 역시 만만치 않게 남성의 모습을 나타낸다. 게다가 지우로 통해 아무 여자에게 들이대는 남성, 여성성을 버린 채 여자에게 들이대는 지수, 처음부터 류아에게 들이대는 도대남, 그런 도대남과 같은 남자를 류아의 계략에 걸려 유혹해야 하는 포푸리 소녀 나운, 스토리 전개가 매우 코믹적 요소는 많은 작품에서 성적담론을 살펴보면 이번 3편 역시 매우 역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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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빛깔있는책들- 역사 275
한창완.박석환.전현지 지음 / 대원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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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강신준 교수님의 카를 마르크스 <자본> 강연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강신준 교수님은 노동과 관련하여 놀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언급했다. 인간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놀이를 하는 것이고, 그 놀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바로 노동을 줄이고 개인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 내가 서평하려고 하는 <만화>에서 나오는 인류의 예술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고대 인류문명은 농경사회가 아니라 채취와 사냥을 하던 수렵문화였다. 당연히 동물에 대한 사냥과 식물과 열매를 가지고 오면 나머지 시간은 휴식을 취한다.

 

인간과 동물이 가장 대비되는 점으로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놀이라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놀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주술, 의식, 행사, 각종 절차에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문화적인 요소와 분리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매일 일만 하고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누적된다면 자극적인 술과 담배, 혹은 성적 쾌락을 원할 것이다. 인간이 단순한 삶을 누리게 되면 일반적인 동물과 같은 말초적 신경을 원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면 말초적 자극이 아닌 다른 것도 찾게 되고, 이른바 취미생활을 즐기거나 혹은 취향을 가진다. 인간이 취미를 없다는 것은 곧 삶에서 특별한 재미를 찾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고대 인류가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벽화에 그림을 새기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상상력과 동시에 자신들의 기록을 보여준다. 동물사냥이나 혹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 등에 대해서 말이다. 곧 그것이 여가생활이고, 또한 그것이 예술로서 현대사회에서 큰 가치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만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아는 만화책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여가와 인간의 상상력은 눈앞의 이미지로 나타내는 하나의 미학적 가치로 보는 것이 옳다. 유럽사회에서는 이미 만화라는 것은 예술로서 인정을 받는데, 실사카메라로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을 표현주의로 충분히 나타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화는 글과 그림이란 텍스트가 동시에 들어가기에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영상문화의 급진적 발달에서 문자문화는 최후의 보루가 만화라는 말도 있다.

 

만화에 담겨진 말풍선에서 글자가 들어가고, 이미지는 상황적 묘사를 하여 정보 전달력이 매우 탁월하다. 영상과 음성이 동시에 들어간 멀티미디어는 수용자로 하여금 정보를 쉽게 받아들이게 하나 비판적 사고를 멈추게 하는 한계성을 지닌다. 또한 멀티미디어는 정해진 시간에 따라 재생하기에 자기가 다시 그 자리로 되돌리는 것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된다. 대신 만화는 종이책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동시에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여 비교할 수 있다. 만화의 정보전달력은 이미 충분하다. 어린아이 교육학술지나 혹은 과학도서에서 그림첨부에서 만화의 상상력과 전달력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그런 <만화>라는 것을 인류의 역사와 그리고 인류 속에 한국인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었나? 사실 이 책을 고르면서 우연히 블로그 이웃 분이신 박석환 선생님의 도서란 것을 알고 흥미를 가졌으나, 더 흥미를 가지게 된 원인은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계신 한창완 교수님이 같이 공저했기 때문이다. <저패니메이션과 디즈니메이션의 영상전략>에서 책 내용이 너무 어렵고 이론적인 영역이 너무 많았다. 일반적으로 대중들과는 전혀 소통을 나눌 수 있는 도서도 아니고, 만화애니메이션 전공자(본인은 환경공학 전공자)라도 봐도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았다.

 

신문방송학 거기서 미디어라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요소를 반영하여 그것이 인간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탐구하기에 <저패니메이션과 디즈니메이션의 영상전략>은 애니메이션에 대해 알아보는 것보다는 애니메이션을 분석하는 하나의 텍스트이론도서로 가깝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책에서 언급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이외에 프랑크푸르트학파 문화연구 등의 내용들까지 생각해보면 결코 쉬운 도서가 아니었다.

 

덕분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리뷰 하는 취미생활을 가진 입장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결국 만화애니메이션 기호학을 알기 위해서는 어차피 위 도서는 한 번은 지나가야할 도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도서에서는 글자 위주로 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힘든 반면 이번의 <만화>에서 삽화나 이미지의 배치가 적절하게 들어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전달력을 준 것이 좋았다. 한창완 교수님 혼자가 아니라 박석환 선생님과 전현지 선생님의 공저라는 점에서 다양한 관점이 책 속에 부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책에서 고대 선사시대부터 시작하여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사회의 유럽에서 그림과 조선은 중후기 그림이 나온다. 그림의 중요성은 당시 일반 사람들은 글자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말을 할 수 있되, 글을 적을 수 없어서 지식 전달력의 한계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림으로 통해 정보전달 능력을 갖추고 그것을 판화나 색채로 통해 대중과의 소통과 정보를 서로 주고받았다. 대신 글자의 등장은 슬로건이나 주제에 대한 간략한 서술이나 혹은 한국 시조를 그림에 집어넣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취미생활 내지 정신수양으로 즐겼던 방법이다. 그래도 여전히 종이라는 것은 대중에게 낯선 존재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한 것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고 볼 수 있다. <만화>에서 이도영 선생님에 대한 업적을 무척 대단히 여기는데, 그것은 시사만화 내지 항일문학에 근거가 되는 중요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압적인 폭력은 물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정신적 방법도 있다. 지금 지배당하는 이데올로기의 부당함을 감추기 위한 정신교육은 우리 민족혼을 잃게 하려고 했다. 이에 저항하는 방법은 대중들을 계몽하는 방법이나 문맹인이 많은 점과 어려운 한자로는 이들을 설득할 수 없는 점이 큰 난관이었다.

 

그래서 만화라는 매체는 대중들에게 어렵지 않게 재미를 주면서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예전에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발간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에서 대표적인 한국 문학평론가이신 김현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만화는 대중 예술이 아니라 대중들의 예술이다.” 그것은 만화가 우리 대중문화에서 소비되는 매체가 아니라 스스로 진화하여 나오고 즐기는 문화라는 점이다. 최근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만화작가들이 전문적인 만화가보다 웹툰으로 통한 아마추어 작가들이 시시각각 나오고 있다. 특히 강풀 작가의 <순정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과 같은 작품은 매우 성공한 점과 웹툰이란 하나의 매체를 만화책으로 발간하거나 영화, 연극으로 재편성하기도 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26년>의 흥행은 웹툰을 통한 스토리텔링의 개발을 엿볼 수 있었고, 그 외에 많은 웹툰 작가들이 등단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독특한 아이디와 소재라고 볼 수 있다. 만화라는 표현주의적 매체를 더욱 상상력을 집어넣음으로 재미와 감동 그리고 교훈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만화문화가 이렇게 잘 흘러온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신문사 폐간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처음에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등과 같이 독립운동가에 의해 만들어지다 추후 친일파가 신문사를 운영함에 따라 퇴색된 것이 아쉽다.

 

<만화>라는 도서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본천황 생일에 도가 지나친 찬양과 태평양전쟁 참전을 조선인에게 요구하는 내용이 배제된 점에서 민족지라는 설정을 다소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런 부분을 이해했는지 군사정권 때 만화가 탄압의 대상인 점과 그것으로 만화문화가 위축된 것 역시 다루었다. 예전에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콘텐츠학과의 박인하 교수님과 김낙호 선생님의 <한국현대만화사 1945~2009>에서 해방 이후 한국전쟁, 휴전, 군사정권과 대통령직선제와 일본문화 개방까지 다양한 역사적 흐름을 잡았는데, 한국에서 만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것과 그것에 대한 아쉬움은 역시 <만화>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국내 문화산업을 보면 다소 취미생활을 위한 사회적 여건이 부족하다. 인간에게 취미생활을 부여하는 것은 곧 인간의 인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감수성이란 중요하다. 인간은 이성과 같이 감정을 가진 존재다. 즐거움과 슬픔은 인간이 평생 지니고 있어야 할 소중한 것이다. 감정을 느끼기에 사랑도 하고, 타인에 대해 공감도 한다. 공감이란 단어에서 중요한 것은 감성적 현대인이다. 어떻게 보면 자극적인 미디어에 의해 즉 이미지가 매개가 되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우리 현대인들의 감성은 자기 스스로의 감성이 아니라 주어진 감성에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만화>를 다 읽은 후에 한 번 표지를 살펴보았다. 앞 쪽에는 많은 만화들이 서로 편집되어 배치되어 있었고, 후면에는 오로지 이현세 화백의 <공포의 외인구단>만 존재했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 이현세 화백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참 좋아했다. 기존 모더니즘적인 미적 가치에서 이 작품은 주인공의 모습을 크게 탈피했다. 멋있고 훌륭하고 강한 존재보단 오히려 나약하고 버림받고 심지어 인생의 큰 좌절을 한 자들이 모인 것이 외인구단이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소외된 자였고,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작품은 포스트모던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가치의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맛보게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의 만화가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고정된 틀과 고정관념에 갇혀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괴로움에 요동을 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비록 마지막에 까치와 엄지가 광인이 되었으나,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지켜가면서 미친 듯이 웃으며 서로 포옹해주는 2사람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들은 분명 정상인이 아니었으나 그 이상으로 나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이다. 한국에서 바로 만화는 일반적으로 알 수 없는 공포를 가진 외인구단으로 보인다. 기존의 틀에 메이지 않고 계속 꾸준히 새롭게 등장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찾아오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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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본 에반게리온 해독 - 한국 최초의 본격 애니메이션 해독서!
키타무라 마사히로 지음, 곽형준 옮김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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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게 된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 그리고 꿈을 좇다>를 잡은 순간 어디서 낯익은 이름이 나왔다. 라이트노벨을 전문으로 번역하는 곽형준씨가 이 책의 번역을 맡은 것이다. 노블엔진이 영상노트와 같은 회사라는 점에서 곽형준씨가 이번에 번역한 에반게리온 해독에서 과연 나는 이 책이 제대로 해독했는가에서 점수를 그래 높게 주지 않고 싶다. 작가인 키타무라 마사히로의 프로필을 보니 그는 수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1990년대 일본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방영되자 거기에 빠진 인물이다. 같은 작품을 극장에 가서 몇 번이나 다시 보고 또 보고를 분명히 애니메이션을 비평하는 것을 취미로 둔 나로서는 존경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자세에 대해선 존경을 보내도 그 접근에서는 상당한 오류가 많았다. 기본적으로 시나리오에 대한 정립이나 전개성은 매우 정확하고 치밀했다. 심지어 내가 미처 예상치 못한 부분도 언급했다. 에바0호기에 나오코 박사가 들어갈 가능성에서 말이다. 그리고 상관도표로서 그린 인류보완계획 5가지 루트 역시 좋은 내용이었다. 전반적으로 스토리나 인물에 대한 형식적인 조건은 매우 좋아도 그 내부의 텍스트 해독은 점수로 따지면 10점 만점에 3점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가장 중요한 분석방법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다. 보통 일반적으로 영상기호학에서 정신분석에 대한 접근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무의식적인 영역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도 보이지 않은 심층적인 영역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분석이 잘못된 것은 작가 본인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인간 내면의 심리로 통한 갈등과 문제를 다룬 점은 분명하나, 그 대상 접근 방법에서는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다.

 

<구강기 ☞ 항문기 ☞ 남근기 ☞ 잠복기 ☞ 생식기> 괄호 안의 5가지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입문에서 인간이 가진 2차 성징기 까지의 구도를 설명한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요소로 되는 이유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인간의 죽음과 삶, 그리고 가족과 자아라는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우선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캐릭터들은 모두 14세로 생식기를 갖춘 사람들이다. 레이는 복제인간이라는 점과 생리를 하지 않음에 생식기를 가져도 생식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아스카는 자신의 월경에서 자신이 어른으로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카지에 대하여 어른의 사랑을 요구한다.

 

이율배반적이고 질풍노도의 시기가 바로 14세다. 이전에 초등학교라는 어린 시절과 앞으로 고등학교와 사회진출이란 어른의 갈림길이다. 인간에게 다시 과거로 회귀가 불가능한 비가역적 존재에서 삶은 곧 죽음을 의미하고, 자신의 비가역적에 대한 회귀욕망으로 인간에겐 에로스 대신 타나토스라는 욕망이 깃든다. 따라서 작가는 바로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파일럿 선정에서 단순히 토우지를 언급한 건 큰 실수다. 그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이해하기 위해 신세기 에반게리온만 본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내지 정치적 동물이다. 자신의 존재적 확인과 개성과 인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접촉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본연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교류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무엇이 빠졌는가? 그것은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언급이다. 이카리 사령관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지가 네르프에 와서 에바초호기를 타야하는 이유는 다른 인간에게 무리라고 했다. 에바초호기는 마치 신지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그 속에 신지의 어머니 이카리 유이의 몸과 마음이 담겨있다.

 

그래서 에바초호기가 가장 불안정하면서 가장 강력한 이유는 에바초호기는 파일럿의 의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양수 속에 태아(아들)를 지키기 위한 어머니의 방어본능이다. 신의 절대적 영역보다 더 절대적인 영역이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이다. 끊을 수 없는 천륜이기에 추후 내부전원이 모두 소모되어도 싱크로률이 400%가 되어 사도를 격퇴한다. 대신 신지는 어머니의 강한 모성에 엔트리 플러그에서 LCL과 동화되어 버린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남자에게 가장 큰 욕망인 비가역적 시간을 다시 가역적으로 돌리는 욕망을 신지는 에바초호기에서 이루게 되는 점이다.

 

이런 부분 때문에 이카리 사령관은 평소 신지에 대해 냉대하거나 질투한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면 TVA와 극장판에서 나오지 않은 부분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카리 사령관이 신지에게 에바초호기를 타라고 할 때 신지의 멱살을 잡는 부분이다. 자기는 신지를 엄청나게 질투한다고 말이다. 신지가 에바초호기에 탑승이 가능한 이유는 본래 신지는 이카리 유이의 아들이다. 인간의 최초로 만나게 되는 인간은 어머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본래 같은 존재가 아니라 타인이었고, 어머니와 아들은 타인이 아닌 한 몸에서 분리된 존재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다.

 

단지 이 부분은 최근 발매된 만화책 12권에서 나온 내용으로 아직 작가가 이 부분을 읽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2007년 신극장판 서와 이후에 나온 파와 급에서 작가가 언급한 것은 모두 틀리게 된다. 지나친 개인적 경험에 의지한 추론은 뒤에 나올 새로운 이야기에 대해 대응이 불가하다. 가장 치명적인 영역은 바로 스기무라 토우지다. 엔트리 플러그에서 나온 그의 부상에서 코어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에서 신극장판 급의 예고에서 작가의 추론이 완전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급에서 토우지의 여동생이 등장하는데, 만약 그 여동생이 에바의 코어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면 급에 나오는 그녀는 레이처럼 복제인간인가? 그것은 전혀 아니다. 신극장판 파에서 에바3호기 탑승이 본래 TVA에서 토우지에서 아스카로 변경되었다. 만약 가족과의 인연이 없다면 싱크로를 발휘하지 못한 에바였다면 아스카가 에바3호기에 절대 탑승하지 못한다는 점과 본래 에바2호기가 아스카의 기체였는데도 파에서 마리가 탑승했다는 점이다.

 

특히 통상모드에서 마리는 아스카보다 더 뛰어난 전투를 보여준다. 에바에 숨은 모드인 비스트모드라는 것이다. 아스카가 계속 다룬 에바2호기에 아스카조차 모르고, 동경 네르프 요원도 모르던 것을 마리만이 실행했다. 거기서 작가의 오류는 이미 증명된 셈이다. 단지 나오코 박사의 0호기는 가능할지 모른다. 에바0호기가 테스트 중에 신지가 탑승하자 폭주를 일으킨다. 5화 역시 폭주를 일으키는 장면에서 에바0호기가 누구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카리 사령관에서 2번째는 레이를 노린다. 그러나 리츠코 박사는 정작 노리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혼자 이야기한다.

 

그것이 반증하는 것으로 신지가 에바0호기에 타자 아야나미 레이의 숨결을 느끼나, 계속 혼자 상상하다가 이것은 내가 아는 레이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에바0호기 심연에 위치한 것이고, 레이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라 일그러진 얼굴이 나오면서 에바0호기의 침식을 파일럿을 위협한다. 극장판에서 보면 알겠으나 리츠코는 이카리 사령관과 불륜관계를 저지른다. 그 이유는 어머니 나오코 박사가 이카리 사령관을 불륜대상을 삼은 모습을 보고, 자신이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주체자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과학자, 여자라는 3가지 나오코에서 여자를 택한 나오코, 여성에겐 최후의 보루는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는 여자였다.

 

단지 유이의 경우 그 남자가 남편에서 아들인 게 차이였다. 나오코는 본래 이카리 유이를 증오하고 질투했다. 이카리 사령관을 좋아했기에 유이 사망 후에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실험 당시 유이의 죽음을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실험 중에도 신지를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그런 나오코의 신체적 일부가 에바0호기에 이식이 가능하다. 네르프의 중추명령계통인 마기 원본과 동시에 사본들도 다른 네르프 기지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점이다. 그런데 왜 나오코는 에바0호기에서 폭주를 일으킨 것인가? 나오코는 유이의 복제인 레이에게 마녀라는 말을 듣고 1번째 레이를 교사시킨 후에 자살을 한다.

 

따라서 신지가 에바0호기에서 본 레이는 처음에 2번째였다가 1번째였기에 폭주한 것이다. 나오코가 에바0호기에서 자신이 저주하는 유이를 잊지 못하는 이카리 사령관과 그리고 유이의 복제인 레이를 무척이나 죽이고 싶은 것이다. 또한 신지가 탔을 때 나오코는 자신의 남자를 가로챈 리츠코에 대한 분노가 살인 충동을 느낀 것이다. 철저하게 이성적인 영역이 아닌 무의식적 기질에서 발동한다. 리츠코의 대사에서 “남녀 관계는 로직이 아니다”라는 것이 나온다. 결국 이성이 아닌 자신 안의 무의식적 기질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작가의 실수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 작품이 있다고 하나, 그 무의식에 대한 해석은 누락되었다는 점이다. 지나친 상징주의적인 추론 역시 문제였다. 레이가 처음 부상으로 한 쪽 눈에 붕대를 감았는데, end of eva에서도 붕대를 감은 것을 다르게 봐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싶다. end of eva에서 아스카는 에바2호기가 롱기누스 창에 머리를 맞고 한 쪽 눈을 다친다. 즉 이것은 공격에 의한 재발이지 상징적 요소로 결부하기엔 우연의 일치가 너무 지나친 점이다.

 

게다가 최초로 신지가 성적욕망을 품은 대상은 이성적으로 미사토다. 처음 에바초호기에 탑승할 때 그 안에 어머니가 있다는 생각도 못했고, 폭주로 인해 모든 기억이 없다. 단지 자신의 무사함을 확인한 에바초호기의 눈빛만이 인상적이다. 미사토의 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미사토가 신지의 얼굴을 가까이 다가갈 때 카메라 로우앵글에서 미사토의 큰 가슴과 신지의 부끄러운 표정을 대비시킨다. 신지가 미사토의 가슴을 보고 성적으로 호기심과 더불어 당황함을 보여준다.

 

다음은 레이인데, 레이의 나체를 6화에서 신지가 목격한다. 아스카는 신지의 방에 와서 옆에 눕거나 또는 미사토의 흉내 내기를 위해 신지와 키스하는 장면에서 신지의 무의식적 성적욕망은 미사토, 레이, 아스카로 연결된다. 문제는 신지는 레이가 유이의 복제이기에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욕망, 즉 윤리적 문제가 있기에 성적욕망을 품을 수 없었고, 미사토는 카지와 연인관계였기 때문에 성적욕망 대상이 될 수 없었다. end of eva에서 처음으로 자위하는 신지는 아스카의 가슴을 보고 나서이다.

 

자위행위에서 대상의 전이는 아스카로 결정된 것은 인간이 언어를 배우면서 사회적 관계로 통한 윤리의식의 획득이라 볼 수 있다. 책 전반적으로 보아도 프로이트, 융, 라캉과 같은 정신분석학자의 이론이 없었다. 지나친 경험적 추론이 이 도서의 큰 한계점이고, 다소 연역적 검토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다른 이론을 무시한 자신만의 이론을 내세워 독자적 해석은 좋은 시도라고 보이나 국내에서 발간된 각종 애니메이션 도서와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하나의 학술적 개념으로 두고 연구한 도서를 읽으면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은 너무 미진한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단지 이제 입문하거나 또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너무 내용이 난해한 점을 고려한다면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 유용한 서적이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알기 위해서는 신세기 에반게리온만 알면 안되는 것처럼 다른 관점과 분야로 통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인간이 태어난 곳으로 다시 가고자 하는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욕망이 작품 내 깊숙하게 깔려 있다. 단지 모두가 죽음에 대해 열망할 때 그곳에서 유이만이 에바로 인간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즉 이카리 유이는 모든 인류보완계획에서 주체가 되는 초호기 속의 생명의 환원과 동시에 새롭게 삶을 부여하게 하는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이중적 존재다. end of eva에서 이카리 사령관은 제레에게 습격당하기 전에 제레의 위원들에게 “사람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것을 위한 에바 시리즈입니다.”이라고 한다. 결국 제레처럼 신이란 형이상학적 존재로 인간이란 존재를 소멸하기 보다는 인간이 에바로 통해 새롭게 인류를 건설하자는 의미다. 그것이 바로 이카리 유이가 에바초호기에서 몸과 마음이 살아있는 이유다.

 

또한 후유츠키 부사령관이 “사람은 생존해 가려고 하는 것에 그 존재의 의의가 있다.”라는 발언에서 제레와 네르프 사령관과 큰 차이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후유츠키는 12화에서 남극에 가면서 원죄가 물들지 않은 정화된 곳보단 죄로 더러워져도 살아있는 세계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나온 내용 중에서 추후 폴란드 왕이 된 로렌공작이 의회에서 발언했던 연설 중에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와 일치한다.

 

인간에게 정화된 깨끗한 이상보다는 차라리 감정들이 오고가는 자유의 세계가 좋다는 뜻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에서 루소가 부여한 일반의지란 개인의 욕망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포스트 모던한 시대의 인터넷으로 통해 충분히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카리 사령관이 “죽음은 아무 것도 낳지 않습니다.”에서 인간의 원죄가 없는 곳은 생명도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곳은 매우 치열한 곳이기에 사람들은 서로 간에 대해 마음의 상처를 주고 받는다. AT-field 절대불가침의 영역이 생기는 점 역시 인간이 가진 고유의 특성이 있기에 그렇다. 그것이 서로 간의 죄가 되어 인간과 인간이 서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그것조차 없는 완전무결한 세상에 이미 생명은 존재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더 이상 답을 주지 않는다. 싸움이든 사랑이든 행위주체자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는다. 죽음에서 아무 것도 낳지 않는다는 이카리 사령관의 말대로 말이다. 가장 잘 알면서 신지에게 대하는 차가움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은 이카리 사령관의 행동에 분명 이율배반적인 논리가 숨어 있다. 어차피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인간의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을 표출한다. 인간이 가진 추악함과 다정함까지 신화적으로 나온다. 작가의 가장 큰 실수는 인류가 멈추지 않은 한 영원히 신화는 살아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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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kllee2 2013-01-16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글쓴이분의 글쓴 의도가 먼지 도무지 짐작이 안갑니다. 왠지 혼자서 횡설수설 하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 쓸데없이 애니라는것에 지식을 요구해 자신의 뜻에 맞게 만들어버리고 만드는, 그런 우물효과 비슷한 방식으로 에반게리온을 해석하시고 글을 쓰신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01-16 12:31   좋아요 0 | URL
넵 그렇죠. 영상서사를 텍스트로 해석하는 기호학적인 측면이 전혀 없어서 보면서 짜증이 밀려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