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숭배하든 혐오하든 - 몸 페미니즘프레임 2
김명희 지음 / 낮은산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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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털, 눈, 피부, 목소리, 어깨, 유방, 심장, 비만, 자궁, 생리, 다리, 목숨 등에 대해서 그간 사회에서 여성의 것을 어떻게 다르게 취급했는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여성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얘기해준다. 그간 다른 페미니즘 서적들을 읽어온 사람들이라면 이 책이 말하는 바에 새로운 내용은 없다. 여기에서 더 깊게 들어가 더 풍부한 사례를 가져온 책이 아마도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될 것이고, 이 책에서 주장하는 여러가지 부분에 대해 의학적으로 가져온 것은 '마야 뒤센베리'의 《왜 의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가 될 것이고, 자신의 몸을 굳이 학대해가며 성적 대상화 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쉴라 제프리스'의 《코르셋》이 될 것이다. 


도대체 왜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페미니스트가 되는지, 그리고 이미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을 정체화한 사람이 왜 어쩔 수 없이 래디컬이 되는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그런데 막 두껍고 복잡한 책 읽기는 싫다!!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면 될 것 같다.



각 꼭지마다 생각할 지점들이 당연히 있지만 특히나 아프리카의 여성 생식기 절단, 한국의 소음순 성형 파트 읽을 때는 진짜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았고, 《여성 괴물》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생식력 없어서 열등감에 쌓인 개새끼들이(니가 낳은 애가 내 애인걸 확실히 하려면 너는 정절을 지켜야 해, 쾌락을 느껴선 안돼!) 세상을 똥판쳐놨다는 생각 밖에 들질 않는다. 


주목할 점은 남성의 경우, 포르노그래피 접촉이 많을수록 제모 비율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남성의 패션 트렌드와 섹슈얼리티 규범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 P39

특히 구강성교를 선호하는 이들에게서 음모 다듬기/제모 비율이 높았다. 여성의 경우에는 특정한 성교 행태보다는 ‘파트너의 선호‘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실제 파트너의 선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들은 현재 파트너뿐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잠재적‘ 파트너에게 매력적으로 비칠 것을 기대하며 제모를 하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뉴질랜드에서 남녀 상대 성별에 대한 체모의 승인 정도를 실제로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를 보면 정작 남성은 여성의 음모에 대해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여성의 음모 다듬기/제모는 남성 요구에 대한 직접적 부응이기 이전에, 스스로 가상의 남성 시선을 내면화한 행도이자, 스스로에 대한 ‘성적 대상화‘로 볼 수 있다. - P40

일반적으로 여성의 목소리는 톤이 높아야 매력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매력이란 어디까지나 성적 존재로서의 매력이지, 공적 영역에서 그러한 목소리는 핸디캡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영국 신자유주의의 선봉장 마거릿 대처는 선거를 앞두고 로열국립극장의 스피치 코치를 영입하여 목소리를 낮추는 레슨을 받았다. 그녀의 설득력 있는 목소리는 이후 커다란 정치적 장점으로 평가받았다. - P82

여성이 필요 이상 높은 톤으로, 멀쩡한 성인 여성이 아기 같은 목소리로 말하도록 요구하는 사회는 제정신이라 볼 수 없다. 또한 목소리의 높낮이에 대한 편견이나 선호야 어쩔 수 없다 해도, 그것이 실제 공적 영역에서의 차별적 결과로 이어지도록 방치하는 사회도 제대로 된 사회는 아닐 것이다. - P83

도대체 왜 이런 시술(생식기 절단술)을 하는 걸까? 여성생식기의 일부, 특히 성감의 중추인 음핵을 제거하지 않으면 여성이 성적 탐욕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혼전 순결과 이후 정절을 보장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금속으로 만든 정조대를 여성에게 씌웠다면, 이 방법은 여성의 성기 입구를 문자 그대로 ‘꿰매 버려‘ 일탈을 원천 봉쇄한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여성의 외부 생식기를 불결하고 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위생과 심미적 이유로 절제를 하기도 한다. 생식기 절제는 공동체에서 소녀가 여성이 되는 일종의 ‘의식‘으로 간주되는가 하면, 결혼을 위한 전제 조건인 경우도 있다. 과학적 타상성이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보건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아동 학대 행위이다. - P149

(소음순 성형)광고들은 공통적으로 부인과 질환에 탁월한 효과, 여성의 성감 회복을 위한 방법이라는 소개로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파트너 남성의 만족으로 귀결된다. 표준적 혹은 적절한 사이즈와 모양, 색깔을 지니지 못한 성기는 비정상이다. 그러면 남성 파트너의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헤픈 여자‘로 오해받을 수 있다. 그런데 성기 성형 시술이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결혼 준비 단계에서 웨딩플래너가 소개해 주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 P152

국가, 시장, 종교, 전통문화(?)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엄밀하게 통제하고, 남성 권력이 호령하는 이곳, 여성생식기. 빼앗긴 들에도 봄은 기어이 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 P161

정신질환자의 망상 또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법이다. 예컨대 조선시대 조현병 환자가 ‘독재 정권이 나를 미행하고 있다‘,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는 망상에 빠질 수는 없지 않은가. 당대의 사회적 관습 안에서 망상의 내용도 구성된다. 그것이 정신질환자의 망상일지라도 불특정 여성을 증오하여, 여성을 표적으로 삼아 범죄를 저지른 이 사건(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은 개인적 수준에서는 아닐지라도 사회 수준에서 여성혐오 범죄임이 분명하다. - P194

예전에 한국과 일본의 자살 비교 연구를 진행하면서, 세계가치조사의 젠더 역할 설문 결과를 살펴본 적이 있다. ‘일자리가 부족할 때,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많은 일자리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비율이 일본보다 한국에서 10% 포인트 이상 높았다. 그런데 ‘남편과 아내는 둘 다 가구 소득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견 또한 한국이 일본에 비해 거의 20% 포인트 가량 높았다. 대체 어쩌라는 건가? 남자한테 일자리는 양보하되, 돈은 벌어 와야 한다는 것이 한국 여성들이 직면한 ‘사회적 기대‘이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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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6-24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 제모와 망상의 사회적 구성이 특히 놀랍네요!! 조선시대에 없었을 ‘내 귀에 도청장치‘로 단박에 이해가되는.
여성에게는 늘 이중적 요구가 있는것 같아요. 어디선 하이톤이어야하고 또 어디선 남성과 비슷한 톤으로 낮출수록 신뢰도를 높이고요.

다락방 2022-06-24 11:04   좋아요 1 | URL
사람은 다른 사람 그리고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인스타에 맛집 포스팅이 주르륵 올라오면 맛집 가보고 싶다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처럼 포르노를 반복해 보면 포르노에서 추구하는 것에 자신의 가치관 역시 물들지 않겠습니까. 너무 싫어요. 그래서 덩달아 여성들도 포르노 세계를 살아가는 현실이요. 아아 포르노 너무 싫고 포르노 중독인 남자들도 너무 싫어요 ㅠㅠ

공쟝쟝 2022-06-24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을 똥판쳐 놓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고 시원해라 ㅋㅋㅋ

다락방 2022-06-24 11:48   좋아요 1 | URL
절반 이상이 사라져도 아깝지 않을 존재들이여, 저쪽 성별은..

공쟝쟝 2022-06-24 11: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일단 절반은 사라져도 된다는 데에는 동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지들이 망쳐놓고 지들이 구원하는 줄 아는 데 ㅋㅋㅋ 그것 제대로 못해서 여자들이 저리 비켜 ㅋㅋㅋ 했는데 안비킬라고 ㅋㅋㅋㅋ 징징대 ㅋㅋㅋ 아휴 ㅋㅋㅋ

다락방 2022-06-24 13:11   좋아요 0 | URL
세상은 여자 죽이는 데에만 진심이야. 아오 빡쳐라..
 
두 생애 - 정찬 소설집
정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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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마다 모두 천착하는 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예술로 표현할 것이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정치로 드러내려 할 것이다. 정치도 예술도 하지 않는다면 일상을 사는 중에 드러날 것이고, 혹여라도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내내 머릿속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표현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나와 함께 살아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찬 의 소설집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이승우가 떠올랐다. 책의 말미 '홍정선'의 해설을 읽노라면, 정찬은 국내 다른 소설가와는 다른 소설을 쓴다고 했는데, 나 역시 그 해설에 적극 동의한다. 내게는 그런 작가가 정찬으로 인해 둘이 생긴 셈이다. 국내의 여느 작가들과는 다른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나는 이승우만 생각해오고 있었는데 정찬 역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르다'는 것은 내게는 좀 더 긍정적 평가다. 나는 이승우를 많이 읽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읽을 것인데, 이 작가는 다르다, 는 생각을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하기 때문이다. 정찬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이 작가는 다르다, 마치 이승우 같다, 했다. 글을 쓰는 것, 글에 담는 생각, 그것을 표현하려는 것이 모두 독보적인 것에서도 그렇지만, 이 둘이 뭔가 한가지에 천착하는 것도 그렇고 깊이 생각하고 공부하다보니 그것은 단순히 자기들이 먹고 사는 일에 관련된 문학 뿐만이 아닌 신앙까지 닿는 것, 들이 그렇다. 이승우야 신앙인이 되려고 했던 사람이지만 정찬의 약력을 보니 딱히 그렇진 않았다. 공부라는 건, 그것이 어떤 분야가 됐든 결국에는 철학에 닿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종교(신앙)도 지나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승우가 '아버지와 나'에 대해 천착하며 그것을 놓지 못하고 있다면 처음 읽는 정찬은 그것이 '폭력'이었다. 정찬은 계속해서 폭력에 대해 말한다. 폭력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계속해서 말한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처음 읽었던 단편 <희생>은 한 여성이 국가로부터 당한 폭력을 얘기하고 있다. 1980년대가 배경이고 사랑하는 남자가 수배중인데 경찰들은 여자를 잡아가 그 남자의 행방과 평소 태도를 묻고 잘 모른다고 대답하는 여자를 잔혹하게 고문하며 강간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임신을 하는데, 그래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갑자기 자기 행방을 알리지 않은 채로 이별을 고한다. 그 아이를 낳기로 하고 의학을 공부하고 난민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이 당한 폭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많은 희생자와 피해자들의 곁에 서서 다른 사람들은 이런 아픔을 겪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작품 속 여자는, 인간이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행동하는 거다.



슬픔이 폭력에 대한 분노를 지운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분노와 원한은 달라요. 폭력에는 분노해야 해요. 폭력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폭력을 인정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예요. 그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 슬픔이에요. 분노가 또 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지요.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슬픔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를 보세요. 예수가 가시 면류관을 쓴 순간 그는 여성적 존재로 변화했어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적 존재로 변화 했어요. 그 여성적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슬픔의 눈물이 세상을 적셨어요. 그러니 세상이 아름다울 수밖에요. -<희생>, p.120



내가 정찬이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정희진' 선생님 때문이었다. 워낙 극찬을 하시고, 심지어 절판될까봐 같은 책을 몇 권씩 사둔다고 하셨던 바다. 도대체 그 작가가 왜? 하는 마음으로 정찬의 소설을 한 권 사두고 미루었다가, 이번에 이 《두 생애》를 사서 먼저 읽게 된 것. <희생>이란 작품을 읽으면서, 아, 이래서 정희진 쌤이 정찬을 좋아하는구나, 했다. <희생>은 세번째 단편이었는데 그 후에 바로 읽은 첫번째 단편 <두 생애>는 늙어가는 교황과 아무 이유없이 고통에 희생된 어린 소년의 삶을 대비시키며 고통에 대해 얘기한다. 와, 이 작가는 폭력과 고통을 놓지 않는구나. 그런 한편 어떤 '간절한 마음' 같은 것도 역시 놓지 않는다. 이해하려고 하고 받아들이려하고 깊이 보려고 하는 시선이 있구나, 했다. 그 뒤에 차례대로 읽은 다른 단편들은 좀 애매했고, 마지막에 읽은 <폭력의 형식> 에서 나는 너무나 끔찍함을 느끼고 만다 ㅠㅠ


<폭력의 형식>은 위의 인용문에서 지칭한 '분노가 다른 폭력으로 치닫게'된 경우를 썼다고 할 수 있다. 얼마전 뉴스에서 보았던 기사가 바로 오래전의 이 소설에 담겨 있었다. 보육원에 맡겨진 어린 손녀를 데려다 성폭행 한 사건이 뉴스에 나왔다면, 이 <폭력의 형식>에서는 보육원에 맡겨진 어린 남매들중에 여자 조카만 데려온 이모와 이모부가 있다. 그 뒤의 이야기는 기사에 대해 언급했으니 짐작 가능할 것이고, 보육원에 어린 여동생보다 좀 더 머물렀던 소년도 결국 이모부 집에 가게 되는데 그 사이에는 몇 년의 시간이 있었고, 낯선 이모부는 자신에게 검정고시로 교육을 좀 받으면 어떻겠느냐 제안한다.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어른들이 없던 소년에게 이건 너무나 감사한 제의였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모부를 존경한다. 그러다 이모부가 어린 자신의 여동생에게 계속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되는데, 이 때 그의 분노는 그 가해자인 이모부를 향하는 게 아니라 어린 희생자이자 피해자인 여동생을 향한다. 이 소년에게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해줬던, 자신에게 공부를 하라고 해줬던 저 어른을 미워할 의지와 마음이 좀처럼 생겨나질 않는 거다. 미워해야 하는 건 저 가해자인데 그걸 알지만 미워할 수 없고, 그러나 일어난 이 일은 너무나 부조리하고 분노해야 할 일이고, 그렇게 소년 안에 자라게 된 폭력적인 성향은 절대 그렇게 나와서는 안되는 방향으로 나오게 된다. 


나는 이 단편이 너무 읽기에 힘들었고, 와 이 책을 내 책장에 꽂아둬야 하나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앞의 <두 생애>를 두고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는데 이 <폭력의 형식>이 너무 힘든 거다. 자라나는 아이에게 폭력적인 환경이 주어지고 부당한 폭력이 그 아이에게 연속해 가해지고 그런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서 그리고 어른이 되고 나서도 폭력을 제 안에서 숨길 수 없게 되는 이야기는, <희생>에서 용서하고 세상을 바꿔보려는 여자와는 다른 결로 흘러가지만, 그러나 폭력이 허용되는 안된다는 이야기의 맥락은 같다. 그렇지만 이건 읽기에 진짜 너무 힘들었다. 만약 정찬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읽는 단편이 <폭력의 형식>이었다면, 나는 다른 작품들을 읽지 않았을 것 같다. 이 단편을 읽고서는 '정희진 쌤은 어느 지점을 좋아한걸까'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이 단편은, 읽을 때 주의를 요한다. 



왜 우리가 천착하는 주제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살아오면서 어떤 일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인건지 도대체 왜 어떤 것에 그렇게 집착하면서 파고 들어가고 계속 알아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엔 어떤 말을 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듯하다. 정찬에게 그것은 폭력이었던 것 같다.



읽기에 쉬운 소설은 아니다. 읽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소설이다.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권할 수도 없다.




어머니의 빈소는 쓸쓸했어요. 생전에 어머닌 외로운 분이었지요. 삶이 쓸쓸해으니 죽음의 자리도 쓸쓸할 수밖에요. 저는 산 자로서 죽어 누운 어머니를 내려다보았어요. 산 자가 아무리 몸을 낮추어도 죽은 자와 나란히 할 수 없어요.-<희생>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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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5-3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궁금한데 너무 힘들까 봐 망설여지고...저는 이승우 작가에 대한 다락방님 마음을 그의 인터뷰를 읽고 정말 십분 이해하게 됐어요. 정말 정말 다른 사람(좋은 의미에서)이구나...이런 사람도 있구나...이승우 같은 작가라니 정말 끌리네요.

다락방 2022-05-31 09:40   좋아요 0 | URL
네 그렇지만, 저는 거침없이 둘 중 누구냐 물어보면 이승우라고 답할 겁니다. 저에게는 이승우의 문장이 더 좋고 뭐랄까, 이승우의 문장이 더 고급져요. 그리고 저를 더 깊은 내면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이승우인것 같아요. 이승우 같지만, 그러나 이승우가 더 좋다, 라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일단 다른 단편들을 읽고난 뒤에 <폭력의 형식>은 읽을지를 결정하셔도 될 것 같아요. 다른 단편은 그렇게 막 힘들진 않거든요. 좀 가라앉아 있긴 하지만. 그런데 폭력의 형식은 정말 힘들었어요 ㅠㅠ

라파엘 2022-05-31 09: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글은 다 좋은데, 특히 소설을 읽고 써주시는 글이 진짜 좋아요. 항상 더 생각하게 되고 많이 배우게 됩니다 😊

다락방 2022-05-31 09:49   좋아요 3 | URL
아이고, 라파엘 님 감사합니다. 어휴 ㅠㅠ 칭찬은 다락방을 춤추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춤을 추지는 않습니다. ㅎㅎ

잠자냥 2022-05-31 11:17   좋아요 2 | URL
칭찬은 다락방을 먹게 할뿐..... :p

다락방 2022-05-31 11:24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은 생선까스를 좀 먹어야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5-31 13:13   좋아요 1 | URL
제가 아는 다락방님은 춤을 추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춤을 추고 있었다에 제가 100원 걸어요~

잠자냥 2022-05-31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찬이라는 작가는 정희진 쌤 때문에 알게 되었고, 정희진 쌤 때문에 읽어보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아직 읽지 못했어요.
<폭력의 형식>은 정말 이야기가 괴롭네요... 그런데 <희생>에서도 강간당해서 임신한 아이를 낳는다는 설정이.... 걸립니다. -_-;;; 이것은 결국 남 작가의 한계인가 뭐 이런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작품을 읽지 않았으므로 제 짧은 생각일 수도 있지만).

다락방 2022-05-31 11:28   좋아요 2 | URL
정찬 작가는 폭력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안된다는 메세지를 던지지만, 남자라는 종에 대해서도 그 한계를 인식하고 있는 걸로 보였어요. 발기된 성기가 폭력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 강간 설정이 다른 남자 작가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떤 ‘빻음‘으로 이해되지는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괴롭긴 괴로워요. 특히 <폭력의 형식>은 너무 괴로워요 ㅠㅠ 저는 정희진 선생님이 도대체 이 작가를 왜그렇게 좋아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이래서 그런가‘, 하다가 ‘도대체 왜그러지‘ 하고 있어요. 정찬의 다른 책을 더 갖고 있으니 더 읽어봐야 알 것 같아요. 확실한 건, 현재의 다른 국내 작가들과는 좀 다르다는 느낌을 줍니다. 확실히요.

근데.. 음.. 좀 오글거리는 게 있어요. 이렇게나 폭력적이고 우울한 글인데 이상하게 오글거리는 지점들이 툭툭 튀어나와요. 그 부분이 더 적응이 안돼요 ㅎㅎㅎㅎㅎ

잠자냥 2022-05-31 12:07   좋아요 1 | URL
아, 제가 도서관에서 정찬 작가 책 빌려 읽다가 우울하기도 한데, 오글거려서 다 읽지 못하고 반납했거든요.... 다락방 님이 말씀하신 그게 무엇인지 대충 알겠습니다.

암튼 도서관에 반납하면서 정희진 쌤하고 나랑 소설 취향은 안 맞나보다 ㅋㅋㅋㅋ 했습니다.

희진쌤 강연에서 정찬 작가는 고통에 끊임없이 사유하는 점이 좋았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다락방 2022-05-31 12:33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 <희생>도 오글거리는 지점들이 있어서 ㅋㅋㅋ 아니 이건 뭣이람? 했답니다. 제가 별 하나 뺀 게 오글거림 때문이었어요. 아놔 ㅋㅋㅋ 저만 느끼는 게 아니었군요!
저는 정희진 선생님 때문에 더 읽어볼 생각이 있는 작가입니다.

공쟝쟝 2022-05-31 13:41   좋아요 2 | URL
ㅇ ㅏ.... 그거 오글거리는 거.... 촌스러운 거.. 그거 저 좀 고통인.... 데..... 저 MZ라서 좀 그런거 용납못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이 리뷰 참 좋아요.. 책도 읽어보겠사옵나이다..
천착...... 맞아요. 천착하는 주제.... 다 포기해도 포기가 안되는 어떤 지점이 있고, 거기서 사유가 나오고 문학이 나오고 창작이 나오고 철학이 나오고 그런 것 같아요.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고 나를 고유하게 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합니다. 다정한 이웃들의 각자의 천착 지점에 대해 둥근 물음표가 지어지는 점심먹고 아메리카노 타서 앉은 화요일. 콜드블루 냠!ㅋㅋ

잠자냥 2022-05-31 14:22   좋아요 3 | URL
요즘 천착에 굉장히 천착하고 있는 공천착

다락방 2022-06-02 08:20   좋아요 3 | URL
맞아요, 우리는 각자가 다 자기만의 과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걸 풀기 위해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다니고 그러는게 아닐까 합니다. 좀 더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 인생이 아닐까..
저는 다시 작업실에 나와있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오늘도 월급 루팡!
 
우연한 생 - 우리가 살지 않은 삶에 관하여
앤드루 H. 밀러 지음, 방진이 옮김 / 지식의편집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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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지금의 내 마음가짐이나 생각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공부를 열심히 할 것 같다고, 정말 열심히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를 열다섯살로 돌려놓으면, 아마도 내 정신상태 역시 딱 그 때의 나일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그때 내가 행동했던 대로 공부하지 않는 삶을 살아오다가 결국 지금에 이르게 됐을 것이다.


만약 몇 년전 그때, 내가 그의 손을 놓기 싫어서 그에게 안녕을 말하는 대신 그의 손을 잡고 있기를 선택했다면, 그 당시에는 그를 내 옆에 두었다는 안도감을 가졌을지 몰라도 결국 이틀 뒤나 한달 뒤, 혹은 일년 뒤에 결국 안녕을 말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종류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 당시의 선택을 바꿀 수 있다 해도 결국 그 선택으로 돌아올것이었다. 다만, 이별의 순간을 좀 늦췄을 뿐, 결과는 같을 터였다.


나는 수많은 선택들에 있어서 뒤를 돌아보곤 한다. 만약 그 때 그랬다면,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러다가도 이내 '나는 나'이기 때문에 결과들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마찬가지로 하게 된다. 순간의 선택은 미래를 크게 바꾸기도 하지만, 그러나 결국 같은 방향을 보게 된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애초에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는 게 아니라, 그저 나인데 그 상황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다른 선택을 했다 해도 결과적으로 인생의 이 시점에는 이 정도의 모습으로 와있을 것 같다. 그러니 나는, 내 동생이 내게 늘 말하는 대로,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상, 최선의 모습일것이다.



인생은 수많은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가능성 이라는 것은 그 단어가 미래를 뜻한다. 만약 내가 로또에 당첨된다면, 하는 가능성. 그것은 희박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가능성이 또 미래에 있기도 하다. 그 날 그 시간에 너를 거기서 우연히 만나게 되다니. 그것은 그야말로 '앤드루 H.밀러' 가 말한 '우연의 필연성'(P.100) 이겠지.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우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이루거나 이루지 못한 채, 그리고 미처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일을 수없이 맞닥뜨린 채 지금의 내가, 우리가 되었다.


그러나 가능성은 과거에 대한 것을 돌이키게도 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 아닌, 훌쩍 저 과거로 넘어가 '그 때 내가 그랬다면' 하고 조건을 바꾸며 그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 상상하는 것. 앤드루 밀러는 이 책에서 그 과거의 조건에 대한 가능성을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만약 내가 이 남자랑 결혼했다면 지금쯤 웃으면서 살겠지? 하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상상. 그렇게 상상해볼 수 있는 건, 혹은 상상해보고자 하는 건, 지금의 내 삶이 아닌 다른 삶 그리고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를 생각해보기 때문이다. 앤드루 밀러는 이 책에서 중년의 관심사가 가보지 않은 길이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렇다. 앤드루 밀러가 말한 것처럼 '살지 않은 삶이 있으려면 먼저 삶을 어느 정도 살아야만'(P.47) 하기 때문에 중년의 이 시점에 우리는 과거의 선택들을 꺼내 보고 이리 바꾸고 저리 바꿔보기도 하고, 그렇다면 지금은? 하고 자꾸 묻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 번이상씩 해보았을 상상, 가능성에 대해 앤드루 밀러는 이 책에서 소설과 시를 통하여, 그리고 영화를 통하여 얘기해준다. 앤드루 밀러가 소개해주는 작품들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살지 않았던 삶, 선택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언급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수단 자체가 원래 그렇게 다른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던가. 소설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하는 일이라고는 그들의 삶을 상상하고, 그리고 '만약'을 덧붙이는 일이다. '만약 나라면' 을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안나 카레니나라면 나는 기찻길에 내 몸을 던졌을까?' 는 물음. 


안나 카레니나의 삶은 내 것이 아니다. 브론스키는 나의 연인이 아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초반으로 가면, 사실 나는 브론스키랑 사랑에 빠졌을지도 확신이 없다. 그 사랑은 내 것이 아니므로. 그러니 나는 안나가 될 수 없고 안나는 내가 될 수 없지만,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 언제나 그런 일들이 가능해진다. 


만약, 나라면?



앤드루 밀러가 들려주는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이 미국인의 삶This American Life> 이라는 라디오쇼 를 통한 것이다.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이 터졌을 때 사라예보를 탈출한 소년 '에미르'가 운이 좋아 미국에 정착하게 되지만 학교에서 차별을 당했고, 영어에 서투른 그가 에세이 숙제에 보스니아 책의 에세이를 영어로 번역해 냈더니 선생님이 너는 이 학교에 있기 아깝다며 사립학교로 전학 시킨다. 그 소년은 그렇게 하버드에 들어가고 박사 학위를 따고 결혼을 하고 대학 교수가 되었다. 라디오쇼 진행자는 표절 에세이가 그의 미래를 바꾼거라고 얘기하는데, 그렇게 에미르의 당시 선생님을 찾아 얘기를 들어보니 이야기는 아주 달랐다. 다른 선생님들도 에미르의 학업 성적이 뛰어남을 얘기했고 그 에세이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으며, 워낙 우수한 아이었으니 설사 사립학교로 전학가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성공했을 거라는 거다.


에미르에게는 인생을 바꾼 에세이, 그리고 선생님인데 선생님에게는 다른 기억으로 적혀 있었다. 그러니 돌이키는 것 역시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에미르는 '만약 내가 그 에세이를 내지 않았다면', '만약 그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으로 조건을 바꿔볼 수 있을 테지만, 선생님의 기억에서는 굳이 그 에세이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거다. 아예 기억에도 없으니까. 



앤드루 밀러는 책의 마지막 즈음, 다시 댈러웨이 부인을 소환한다.



그런 것이 우리 시각의 방식이다.

클라리사다, 그는 말했다.

왜냐하면 거기 그녀가 있었으니까.

그래, 여기 있었네. -댈러웨이 부인 中


글쓰기를 가르치는 여느 선생들처럼 나도 학생들에게 "있다be" 동사 사용을 피하라고, "있다", "있었다"를 사용하지 말라고 말한다. "진짜 동사를 쓰세요!"하고 나는 학생들에게 강조한다. "'있다'가 무슨 말을 하나요?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냥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게 전부예요!" 그런데 거의 25년 동안 그렇게 말해오다 올해 들어 갑자기 이런 말을 덧붙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하지만 그게 모든 것일 수도 있긴 하죠." -p.269

 


우리의 선택과, 그 선택으로 인한 삶과, 그리고 돌이켜보는 인생과, 다를 수 있었던 선택들이 가져올 삶과, 그런 상상을 하는 지금의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있다. 세상의 시인들과 소설가들이 가보지 않은 길과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면, 앤드루 밀러는 그 작품들을 통해서 덧붙인다. 우리가 지금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내려놓았음을. 우리의 선택이 우리를 만들었다면 또한 우리의 포기가 우리를 만들었다. 지금의 우리를. 우리는 지금의 삶을 바꿀 수 없고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떠올리며 결국 해야 할 일은 지금의 삶을 더 잘 들여다보고 현재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일테다.



소설을 읽으면 그 소설이 들려주는 이야기만으로도 좋은데, 앤드루 밀러는 이 책을 통해서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이야기까지 들려준다. 게다가 그걸 쪼개서 동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나는 '있다'는 동사가 그 자체로 완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게 바로 책을 읽는 재미가 아닌가 싶다. 아쉬운 건, 예시로 들었던 수많은 시에 대한 것. 시이니만큼 원문도 함께 실려있었다면 더 이해하기가 쉬었을텐데.


문득,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오거나 상상했던 것들 그리고 느끼거나 깨달은 것들이 중년에게 다가오는 당연한 수순의 것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존 치버는 중년이 되니 인생은 외로움이 전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데, 어느 순간 나도 나의 외로움을 인지하고 받아들였던 말이다. 아아, 중년이란 이렇게 오는 것이다. 나는 중년인 것이다. 지금의 내 모습, 이 중년의 내 모습은, 내가 만들어온 나다. 이 삶은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그리고 최상의 삶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는 매우 만족스럽다. 

나는 나 자신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하고, 그 친밀함 안에서 나는 혼자다. 내 기억은 나만의 것이다. 그해 초봄 어느 저녁에 리치먼드가家의 들판을 가로질러 막 꽃망울을 터뜨린 개나리들을 헤치고 달렸고, 친구가 바로 등 뒤까지 바짝 따라붙었고, 종아리가 터질 것 같았고, 휘어진 가지가 날아들어 온몸을 때렸고,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굴렀고… 나 이외에는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기억들이다. 그런 경험들이 곧 나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 - P18

그런데 그 경험들은 아주 다를 수 있었고, 그랬다면 나도 지금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중 하나만 달랐어도 나는 다른 방향으로 굴렀을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로, 이 도시로, 이 집으로, 이 방으로, 이 책상 앞으로, 이 문장으로 이어진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내 삶은 기막힌 우연이면서도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삶이다. - P18

프로이트와 릴케는 그날 산책을 하면서 인간의 필멸성과 그런 필멸성이 우리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엇다. - P20

성공한 예술 작품이란 아무리 손을 봐도 지금보다 더 좋게 만들 수 없는 작품을 의미한다. 어떻게 바꿔도 현재보다 못한 작품이 되는 상태에 이르면 그 작품은 완성된 것이다. - P39

완성된 예술 작품에는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주장은 매력적이다. 그런 작품에서는 전혀 부조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에는 성공적인 예술 작품 뒤에는, 마치 수도 없이 버려진 옷이나 연인들처럼, 버림받은 가능성들의 잔해가 수도 없이 쌓여 있을 거란 생각이 뒤따른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뭔가를 잃어버림으로써 아름다움이 완성된다고 생각하고, 상실을 뭔가 아름다운 것으로 만든다. - P39

이런 말을 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살지 않은 삶은 중년의 관심사다. 살지 않은 삶이 있으려면 먼저 삶을 어느 정도 살아야만 한다. - P47

중년에는 불가해함이, 당혹스러움이 있다. 이 시간 내가 가까스로 알아낸 것은 일종의 외로움이 전부다.
(존 치버, 존 치버의 일기 中 재인용) - P47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에서는 한 등장인물이 이렇게 논평한다. 젊은 시절에는 "모든 것이 부글부글 끓고 요동쳤다.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변화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묶였다…. 우리는 지금을 선택했다. 때로는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서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떤 집게 같은 게 목 아래쪽을 꽉 잡고 있는 게 느껴진다." - P49

화자도 신과 같은 역할을 한다. 화자의 관심에서 의미가 생겨난다. 어떤 참새가 떨어졌다면 화자는 반드시 그 참새를 기억한다. 왜냐하면 애초에 화자가 하늘에 띄운 참새였으니까. - P60

「당신을 사랑하는 신」의 결말에서 편지를 쓰라는 데니스의 호소와 함께 나는 다시금 살지 않은 삶은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나의 주제로 돌아온다. - P63

한 주 한 주 클라리사는 그녀의 삶을 살았고, 그는 바다 너머에서 그의 삶을 살았다. 이제 나란히 앉아 있는 그들은 밀접하게 분리되어 있다. 각자의 울타리 안에 있지만, 그러면서도 최대한 붙어 있다. 서로 닿아 있지만 분리되어 있다. 서로에게 닿으려면 분리되어 있어야만 한다. - P66

살지 않은 삶에 대한 생각은 우리 언어의 가장 작은 단위조차 문제를 만들고 대명사를 혼돈에 빠뜨린다. - P76

물론 아무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이 되겠냐고 묻지 않았고, 라이프니츠에게 중국의 왕이 되겠느냐고도 뭊디 않았다. 귿르은 아무도 주겠다고 하지 않은 역할을 거절하고 있다. 사실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모습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진짜 가능성이 아닌 진짜 현실, 즉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현실에 대해 그들이 내놓은 답변 이라고 생각한다. - P78

철학 저술가 윌리엄 해즐릿William Hazlit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리인으로 존재하기"가 돼버릴 테니까. 과연 그 누가 "선택할 수 있다면 당장 내일 대천사 가브리엘이 되겠는가? 가브리엘은 단지 멋진 광경에 불과하지 않은가?"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가진 어떤 특성을 가지고 싶어할 수 있다. 이 사람의 예술적 감각이나, 저 사람의 통찰력을 부러워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인 채로 이를 소유하고 그런 특성과 재능을 누리고 싶어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해즐릿은 행복과 불행 등 모든 감정들보다 우리에게 더 근원적인 감정은 우리 자신에 대한 원초적인 애착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허영심과는 달라서 더 근본적이며 더 뿌리가 깊다. - P79

그러나 충만한 마음이 때로는 갈구하는 마음이 되기도 한다. 기분이 살짝만 가라앉아도 내가 상상한 삶들이 지금 이 삶을 부족하다고 느끼게 한다. 살지 않은 삶이 내 세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대신 내 세계를 갉아먹는다. - P86

앤절라는 피부가 하얗고, 지니는 검다. 앤절라는 어머니를 닮았고, 지니는 아버지를 닮았다. 앤절라는 무신론자이고, 지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독자는 두 사람이 다르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챌 수 있지만, 자매들이 그런 차이점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 "너와 내가 별개의 두 사람이고, 각자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뿐이야." 지니가 말한다. "샴쌍둥이도 아니잖아.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길을 가야만 해." (제시 레드먼 포셋, 「플럼번Plum Bun」 - P89

『설득』은 다른 모든 소설과 마찬가지로 우연의 필연성에 관한 소설이다. - P100

포터의 휠체어가 영화감독의 의자를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한 세계의 모든 사항을 지휘하지만 그 세계 안에서 활동하지 못하는 사람의 의자라는 것이다. 체험을 포기하는 대신 권력을 얻은 셈이다. (영화, <멋진 인생>) - P108

<멋진 인생>은 「당신을 사랑하는 신」처럼 한 사람(어떻게 보면 조지도 중개업자라고 할 수 있다)에게 다른 삶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삶에 안주하도록 권한다. 칼 데니스처럼 카프라는 대안을 떠올리고 우리에게 그 대안을 맛보게 한 뒤 그 대안을 잊으라고 말한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과 화해하라고 권한다. 조지의 과제는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스크루지와는 다른 과제를 받았다. 조지는 이미 선한 사람이며, 그래서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 P118

순서가 주어지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앞서 일어난 일보다는 나중에 일어난 일을 바꾸려고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다른 논문들은 우리가 실행에 옮기지 않은 일보다는 실행에 옮긴 일을 후회하고, 우리가 머릿속으로 통제할 수 없었던 측면보다는 통제할 수 있었던 측면을, 그리고 일상적인 사건보다는 예외적인 사건을 되돌리려 하고, 적절하다고 여기는 행동보다는 부적절하다고 여기는 행동을 바꾸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 P127

우리는 과거 사건을 아무렇게나 바꿔서 상상하지 않는다. - P128

"나라면, 내가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절대로 남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유혹에 빠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에밀리는 인생을 다시 살 수 없다. (앤서니 트롤럽, 『그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 P155

리처드 카스톤이 죽기 전까지 다양한 직업을 넘나든 반면, 그가 사랑한 여자 에이다 클레어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결혼을 하느냐 안 하느냐, 두 가지뿐이었다. 물론 19세기에는 이런 선택 기회 조차 없는 여자들도 있었다. 아마도 에이다는 중산층 여성에게 열린 몇 안 되는 길인 가정교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P166

"남자는 직업을 선택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나이에 직업을 선택한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그는 다양한 직업에 대해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런 다음 그 직업에 온정신을 집중해 경험을 쌓으면서 가장 활동적인 시기를 낭비한다." 우리는 무지한 상태에서 선택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과 비교해보면 직업을 선택할 당시에 우리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니체는 이런 점에서 직업은 사랑과 같다고 말한다. "성공적인 결혼생활 같은 성공적인 사례는 예외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예외조차 이성적인 선택의 결과는 아니다." - P170

어째서 그를, 지금,
내가 알 수 없고, 내가 볼 수 없고,
내가 들을 수 없고, 내가 만질 수 없는데,
다른 사람은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걸까. (샤론 올즈, 「2001년 9월, 뉴욕September 2001, New Yokr City」 - P171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하면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거나 결혼하지 않거나, 어느 쪽이든 후회할 것이다." - P175

모든 좋은 길은 나머지 길을 배제한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매기 넬슨Maggie Nelson이 말한다. "나는 글을 쓰면서 동시에 아이를 안아줄 수 없다." 그녀가 쓴 모든 문장은, 내가 읽는 그녀의 모든 문장은 그녀가 아이를 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전달한다. 결과물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바로 내려놓기인 듯하다. (넬슨의 저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내 책을 한 줄로 요약했다고 느꼈다.) - P186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은 형제자매가 "자신이 유일하지 않으며 누군가 자신과 똑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 P209

비교는 울프에게 다른 세계를 욕망하게 만들었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원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더해진 다른 세계를 원한 것이다. 이것 대신 저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이다. 나는 다른 세계에 대한 그녀의 갈망이 이 세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 P263

글쓰기를 가르치는 여느 선생들처럼 나도 학생들에게 "있다be" 동사 사용을 피하라고, "있다", "있었다"를 사용하지 말라고 말한다. "진짜 동사를 쓰세요!"하고 나는 학생들에게 강조한다. "‘있다‘가 무슨 말을 하나요?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냥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게 전부예요!" 그런데 거의 25년 동안 그렇게 말해오다 올해 들어 갑자기 이런 말을 덧붙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하지만 그게 모든 것일 수도 있긴 하죠."
- P269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관념은 청소년기의 고통이자 위안의 출처다. 어른이 되어서 얻는 유일한 이득은, 그런 가능성의 세계를 포기함으로써 얻은 유일한 정의는 실재, 현실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일한 세계의 진실, 그 세계가 존재하며, 내가 그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 주는 고통과 위안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스탠리 카벨, 『눈에 비치는 세계』) - P282

나는 하나의 삶, 이 삶을 산다. 이 삶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삶 이외의 다른 삶도 없다. 나는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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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5-30 1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어떤 책들은 독자로
하여금 물들게 해서 책만큼
좋은 리뷰를 쓰게 하나봐요.
다락방님의 글은 항상 근사한
에세이들이지만 이 글은 유독 마음을 울리네요! 잎사귀랑 이책 땡투했어요~♡♡

다락방 2022-05-30 12:12   좋아요 2 | URL
저는 리뷰 써놓고 아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엉망인 글이다 ㅠㅠ 하고 있었는데 이런 다정한 댓글이라니, 위로와 힘이 됩니다, 미미 님.
미미 님도 이 책 좋아하실 것 같아요. 그리고 아마도 책들을 또 사게 되겠죠. 저는 그렇게 댈러웨이 부인을 샀거든요. 껄껄.

공쟝쟝 2022-05-30 1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선리플 후감상) 길어서 밥먹으면서 읽겠습니다. 오늘 점심은...... 순대국밥입니다.

다락방 2022-05-30 12:11   좋아요 3 | URL
긴 페이퍼도 하나 또 썼다. 내가 오늘 올린 글 두 개 다 읽으면 밥도 다 먹을듯요. ㅋㅋㅋㅋㅋ
저는 마라탕 먹을 거예요!

공쟝쟝 2022-05-30 12:30   좋아요 2 | URL
저는 제 외로움이 좋아요.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삶은 어느 정도 살아’서 획득한 살아보지 않은 삶들에 대한 희구를 이해할 수 있어서 제 나이들어감이 좋고요, 무엇보다 커서 내가 될 사람이 자기 삶이 최상이라고 말하는 내 안목이 좋습니다. ㅋㅋㅋㅋ 그러므로 내가 짱이다!!!! 💕

다락방 2022-05-30 15:26   좋아요 3 | URL
쟝님은 나이 들어서도 인생에 만족하게 될거예요. 지금 성실히 살고 있으니까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깨달은 건, 성실한 인생은 후회할 리 없다...는 것입니다. 성실히 살면 결국은 만족이 오는 것 같아요.
공쟝쟝 님의 인생 화이팅!!

mini74 2022-06-10 0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사해서 우와!! 했던 글이네요 ㅠㅠ 다락방님 축하드려요 *^^*

새파랑 2022-06-10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옆에 메달이 화려하네요~!! 축하드립니다~!!
 
레이디 크레딧 - 성매매, 금융의 얼굴을 하다
김주희 지음 / 현실문화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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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내가 만약에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았는데 그 애기가 백혈병이나 무슨 병에 걸려서 막 되게 아파요. 그런데 내가 만약 업소 생활이나 이런 생활을 모르면 그런 쪽으로 생각도 하지 않을 테지만 내가 이미 이런 거를 알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을 때는 분명히 그쪽에서 돈을 벌려고 생각할 거란 말이죠. 그럼 '나, 참 내가 몰라도 될 거는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도 하고 그러는데. <다혜> -p.282



김주희는 이 책의 끝을 맺으며 '성매매는 당사자 여성들에게 언제나 경제 문제였다'(p.390) 고 주장한다. 만약 그들이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상황이었다면 성매매 당사자 여성들은 부러 성매매를 선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까 라는 고민을 하다 성매매가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매매 당사자들중 많은 여성들이 돈 때문에 이 일을 선택했다. 아직 성인이 되기도 전 자립할 수도 없을 나이에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렵거나 가정 폭력에 시달린다면, 성매매는 대안이 되었다. 살 곳을 마련해주기도 했고 당장 필요한 돈을 먼저 현금으로 주기도 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아 갚을 수 있다는 어떤 것도 증거로 내밀지 못해도 성매매 세계 안에서는 얼마든지 필요한 돈을 한 번에 융통해주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두 계속 굶거나 아프거나 힘들게 살거나 할 때도 마찬가지. 성매매 속으로 들어가면 당장 살아갈 수 있는 돈을 단번에 내주었다. 당사자 여성은 그 돈을 들고 가 내 쉴 곳을 마련하거나, 식구들의 병을 치료하거나, 언제나 고생만하고 가난하게 살아온 가족들에게 밥을 차려줄 수 있었다. 그런 일이 한 번 시작되면 처음에 받았던 그 현금, 그것은 이제 고스란히 그녀에게 빚으로 남는다. 자신들을 '믿고' 자신들에게 '신뢰'를 갖고 빌려준 이 돈을 이들은 갚아야 했다. 도덕경제적 실천에 의한 의지가 있었던 그들은 그래서 그 돈을 갚기 위해 그 세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높은 금리로 빌리고 이자가 다시 원금에 덧붙여지고 여기에서 저기로 더 큰 금액으로 빚이 불어나 이동하게 되어도, 그녀들은 그것을 갚고자 했다. 갚으려면 열심히 일해야 했는데, 얼굴이 못생기거나 뚱뚱하면 '초이스' 되지도 못해서 다시 돈을 빌려 성형 수술을 하거나 다이어트를 해야 했다. 예쁜 옷도 사입어야 했다. 돈은 다시 불어난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예전처럼 부담스럽진 않다. 업주가 얼굴을 마주한 상태로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눈에 보지 않는 상대가, 은행이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기 때문에. 늘 가난했던 여성들은, 학비를 마련할 수 없었고 밥 먹는 것조차 힘들었던 여성들은, 이제 먹고 싶은 걸 먹고 대학도 갈 수 있는 돈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녀들에게 '자유'다. 자유로 느껴진다. 갚아야 할 돈이 몇 백, 몇 천, 혹은 억대로 넘어가도, 그들은 이제 자유롭다. 



자살하는 사람들 많아요. 저는 실제로 목매달고 죽은 애 보기도 했고. 그냥 항상 하는 얘기가 그거에요. '살려고 온 바닥인데 너가 인생이 너무 힘들고 죽기 직전에 썩은 동아줄이라도 한번 잡아보려고 온 곳이 여기인데 여기서 살려고 왔는데 왜 결국에 죽냐' 그렇게 하늘로 편지를 보낸 적도 있어요. 제 정신에 할 수 있겠어요? 낵 몸을 파는 건데? (…) 그러니까 여기는 다 정신병으로 얽히고, 얽히고. 굉장히 많아요. 돈 때문에 와서 결국 자기가 영혼까지 팔아버렸는데 죽어버리는 애들이 수도 없이 많아요. 여기가, 강남구가 세계에서 자살 비율이 전 세계 1등이에요. 시제 저 이사 갈 때도 조심조심 가요, 귀신 사는 집 안 가려고. 실제로 귀신하고 살아보기도 했으니까요. 여기는 되게 슬픈 동네에요. 진짜 죽어나가는 애들이 다 어마어마해요. 살인 사건도 많고. 그 살인 사건들이 대부분 다 화류계에서 나는 것들이니까. 뉴스에서 나오는 역삼동, 애인이 어쩌구, 다 화류계. 재작년에 크게 난 것도 저희 가게였거든요. 불과 몇 달 전에 여자친구 목 졸라 죽여서 자수한 사람도 저희 가게 영업진이었고. 되게 많아요. <박팀장> -p.353~354



그러나 내 몸이 상품화 되는 일이 비록 '나는 자유롭다'고 말하거나 생각할지언정 결코 유쾌한 일이 될 수는 없다. 여자친구나 아내에게는 요구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성매매 여성들에게는 요구된다. 내가 원하는 상대가 아니라, 나의 겉모습을 보고 나를 선택한 남성들로부터 나는 원하는 것을 해줘야만 하는 상품 취급을 당하게 된다. 하루에도 몇 명을 상대해야 하고 그러다 몸이 축나기도 한다. 같이 일하는 여성들과는 외모로 비교를 당하기도 한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요구에도 응해야 하고, 폭력과 강간에 노출되어 있어 늘 안전이 염려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우울증 약 없이, 정신과 치료 없이 될 리가 없다. 성매매 여성들의 업소에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울증 약을 빌리고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여성들을 그렇게 많이 죽음으로 걸어간다. 한 업소에서 연달아 몇 명이 자살한 일도 있었다. 스스로의 삶을 그만두기를 선택해 죽기도 하고 누군가로부터 살해를 당하기도 한다. 살아볼라고, 비참한 삶에서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걸어 들어간 길이었지만, 그 길은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목적지로 그녀를 데려갔고,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는 일들이 그 안에서 일어난다.



성을 팔 수 있다, 여자는 자신의 몸을 담보로 내걸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에게도 그것이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제 여유롭게 살게 된 여성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위급한 일이 생기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다시 성매매를 해볼까'를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되고, 설사 성매매를 해보지 않았던 여성이라도 가난에 허덕이게 되면, 혹은 학업을 이어나가고 싶으면, '성매매로 돈을 벌 수 있다는데' 라고 염두에 두게 되고 그들중 일부는 '그래도 그러지는 말자' 하고 돌아서겠지만 '좋아 이번 한 번..' 하고 그 길로 들어서게 된다. 


맨 위, '다혜'의 말처럼, 그것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놓여 있는 삶. 성매매 자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여성들에게 가능성이 되는 삶. 그것 자체가 위험하다. 이것이 '너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순전히 책임을 그 여성 개인의 문제로 여기도록 한다. 아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다. 성을 팔 수 있는 것이라고, 네 몸뚱아리가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세상이 말했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판다. 네 몸뚱아리가 담보가 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담보로 건다. 네게 돈을 지불해서 네 몸은 상품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여성들의 몸은 상품이 된다. 예쁜 외모는 더 가치있다 말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성형수술을 하고 다이어트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아니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그렇게 자신의 몸을 상품화 하고 담보화 하면서, 숱한 우울과 죽음 앞에 직면하면서도, 자신이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은 그것이다. 성매매를 가능한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 어렵고 힘들 때 성매매를 하나의 경제적 해결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성매매가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는 사회. 그것은 성매매 비범죄화 나 합법화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사회이다. 필연적으로 포르노랑 연결되어 있는 성매매를 여성들이 갈 수 있는 또 하나의 길로 여기지 않는 사회. 그걸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내 와이프는 임신하면 내 욕구 성매매로 해결하고 오래, 를 자연스레 말하는 사회에서, 성매매 후기를 공유하는 사회에서, 텐프로를 여자에 대한 칭찬으로 쓰는 사회에서, 지나다니는 여자들에게 몸값을 매기는 사회에서, 데이트 비용을 내가 냈으니 섹스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모두 룸살롱을 보여주는 사회에서, 회식후 2차를 룸살롱으로 가는 사회에서, 아가씨 대출이 가능한 사회에서, 성매매로 쉽게 돈을 번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성매매가 방법이 되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여성들로부터 성매매를 차단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김주희는 성매매 문제를 이 시대의 '여성 문제'로 적극적으로 구성해야 한다(p.397) 고 말한다. 여성은 전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성매매 당사자는 성매매 속에서 상품화 되는 여성만인 것은 아니다. 돈을 지불하고 그것을 사는 남자들, 중개를 하는 남자들, 그것이 살아갈 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모두 성매매 사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리고 너무나 급진적이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여자도 인간이다. 이것은 이 시대의 여성 문제로 적극적으로 구성하기보다는 이 시대의 인간 문제로, 이 사회의 커다란 문제로 구성해야 하는게 아닐까. '여성' 문제라고 하면 입에 피를 토하면서 왜 우리가 자기 좋아서 창녀짓을 하는 여자를 도와야 하냐고 하는 남자들이 수두룩할테니까.


성매매는 이 시대의 우리 문제이며, 이 사회의 문제이며, 이 시대의 문제다. 우리는 이걸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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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4-27 09:1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고 있는데 코 끝이 찡하네요.
성매매 문제를 인류의 절반인 여성의 문제로 끌어올려야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했어요. 내 수중에 돈이 있고 내 가족이 위협을 받지 않는다면 누가 성매매 산업에 들어갈까요. 저는 결코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문제인데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은행, 고리대금업자, 그리고 룸살롱 업체들이 있고 여기에 뛰어든 여성들은 철저히 자신의 몸을 내던져 담보가 되는 세상. 너무 슬프고 화가 납니다.

다락방 2022-04-27 10:50   좋아요 5 | URL
저도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성문제‘라고 하는 순간 이 나라 인구의 절반인 남성들은 어차피 ‘내 문제 아니야‘로 할 것 같아서요. 이것은 전 국민의 문제라고 분명히 인식시켜야 할 것 같아요. 그러나 그렇게 인식시키기는 힘들겠죠. 성매수자 남성들은 돈을 지불하고 변태적 행위를 취함으로써, 명령을 하거나 요구함으로써 그 돈이 주는 억압적이고 권력적인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고 싶을테니까요. 자신이 가진게 무엇인지 인지를 한 남성들은, 거기로부터 빠져나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주 멀고도 먼 길이 될 것 같습니다. 탈성매매 사회는요.

얄라알라 2022-04-27 13:28   좋아요 2 | URL
다락방님, 저는 오늘 [레이디크레딧] 들고 외출했어요. 산에 올라가서 읽으려다가 미세먼지 빨감이라 편한 곳에서 음악들으며 책 펴려는데, 다락방님의 페이퍼 읽으니 거리의화가님 말씀처럼, 감정이 확 올라옵니다.

어제 읽은 [엄마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에서도 ˝돈˝의 문제를 명확하게 대놓고 다뤄줬어요.

마지막 문장, 선언문 삼겠습니다!

다락방 2022-04-27 14:26   좋아요 3 | URL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뻔히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이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살아갈 해결방법으로 고려하기도 한다는게 너무 마음이 아픈거예요, 얄라알라님.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가능성으로 보지 않게끔 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고요.

이 책을 읽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겁니다, 알라 님. 힘내서 읽으셔요!!

단발머리 2022-04-27 10:3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읽으면서 자유와 선택의 문제에 대해 자주 생각했거든요.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뭘까. 그녀들이 말하고 싶은 건 뭘까. 그런 생각을 자주 했어요. 성매매 관련 도서는 전 <페이드 포> 밖에 안 읽어서 아직도 저의 생각이 도덕적인 기준, 통념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의심도 많이 했구요.
근데 다락방님이 인용해주신 글 다시 읽어보면서 어쩌면 그들의 진심은 다른데 있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삼백만원이 필요해서, 오백만원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그쪽 일을 시작한 여성들이 그 곳에서 빠져나오는게 거의 불가능한 이런 구조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요.
이 문제 역시 당사자성을 고려할 수 밖에 없을테고, 그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어떤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조심스럽지만...
이게 그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여성만의 문제도 아니고, 바로 이 사회의 문제라는 다락방님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만약 이 책 읽기 힘드신 분들이 계시다면 다락방님의 이 글만 읽어도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글 감사해요, 다락방님. 수고많으셨어요.

다락방 2022-04-27 10:55   좋아요 7 | URL
단발머리 님, 저도 성매매 당사자들의 자유에 대한 인터뷰를 읽으면서 정말 자유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억압적이고 가난한 환경에서 돈을 써보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돈을 빌리고 갚고 소비하는 것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됨으로써 그것을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 사람들에게 정말 자유인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그건 자유가 아니야!‘ 라고 할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그것을 자유라고 고개를 끄덕인다면 그 빚에 허덕이는 생활은 결코 끝나지 않을거고요. 몸을 갈아 노동하고 인격적으로도 모욕을 받으면서 우울증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삶이 계속 이어질텐데, 그러면 어쩌면 좋을까. 우리는 다른 식으로 그 자유가 아닌 ‘다른 자유‘에 대해 자연스레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건 또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알려주나. 저 역시도 복잡하고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저는 이것이 곧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해결이 쉽지는 않을 거라고 보여요. 위에 거리의화가 님께도 답글 달았지만, 저는 많은 성구매자 들이 성을 구매하는 그 권력을 포기할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쪽으로는 전혀 희망이 없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노르딕 모델은 지금 현재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일 것 같아요. 성구매자에 대한 처벌이요.

언제나 그렇듯 좋은 독서였어요, 단발머리 님. 인사도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5월 도서 때문에 한숨을 쉬게 되네요? ㅋㅋㅋㅋㅋ

미미 2022-04-27 12: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남성인 박팀장이 저런 말(제 정신에 할 수 있겠어요? 내 몸을 파는 건데?)을 하는 것 자체가 관련된 남성들 모두가 제 정신에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증거같아요. 밝은 곳에서는 불법이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합법인 문제들은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위선을 잘 드러내고요. 다락방님 4월도 훌륭한 선택이셨습니다. 항상 감사하고 완독 수고하셨어요!! 다음달도 기대됩니다.*^^*

다락방 2022-04-27 14:22   좋아요 3 | URL
그러니까요, 미미님. 곁에서 여자들이 힘들어하고 죽어가는 걸 봤으면서도 그 일을 계속 하면서 그런걸 계속 보고 있다는 것은 무얼 뜻하는걸까요, 미미님? 어쨌든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는 본인은 아니다 라는 거겠죠. 저는 다 알면서도 저 일을 계속하고 여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게 너무 화가 나요. 모두들 하나가 되어서 여자들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아요. ㅠㅠ

휴.
미미 님, 우리 5월에도 힘냅시다. 5월 책은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 일찍 시작해야겠어요!

바람돌이 2022-04-27 13: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성매매를 가능한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팍 꽂히네요. 4월이 다가는데 이제 시작해야 하는 저같은 사람에게 아주 훌륭한 길잡이 글입니다. ^^

얄라알라 2022-04-27 13:30   좋아요 3 | URL
1부 읽고 있는 저에게도 이 글 찐한 에스프레소같이 진액입니다. 바람돌이님 화이팅!!!!얍!!!! 완독!!! 4월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라고 저도 스스로 세뇌중!

다락방 2022-04-27 14:24   좋아요 4 | URL
네, 바람돌이 님.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여성이라면 살아갈 일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 성매매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놓아둘 수 있겠다고요. 이 책에 보면 일흔이 넘어서도 성매매를 하는 여성의 사례도 나오는데, 어린 여성들은 물론이거니와 나이가 많은 여성도 너무 삶이 힘들면 하나의 가능성으로 생각할테고, 가능성이 된다면 실행을 할 수도 있겠죠. 아예 이런 일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데 세상이 하나로 똘똘 뭉쳐 여자는 성을 팔아 쉽게 돈 벌수 있다고 얘기하잖아요. 아주 징그럽습니다.

자, 바람돌이 님, 얄라알라 님! 힘내세요!! 빠샤!!

mini74 2022-04-27 14: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읽으면서 난자 판매 관련글도 떠오르더라고요 결국 젊고 가난한 여성들이 착취대상이 되며 그 부작용은 숨긴체 자행되는 ㅠㅠ 성매매가 여차하면 가능한 경우의 수가 되지 않는 사회 !! 가 되길 바랍니다 ~

다락방 2022-04-27 14:57   좋아요 3 | URL
부작용이 드러나도 결국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묵인해버리는 것 같아요. 이 책에서 박팀장 이란 사람은 자살하는 여성들을 보아왔고 이 일이 힘들다는 걸 본인도 인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죠. 어휴..
성매매를 한 순간이라도 답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어요, 미니 님. ㅠㅠ

2022-04-27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28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28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2-04-27 20: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말씀이 일침을 가합니다.
여성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문제라는 제목이 와 닿습니다.
저 다혜씨의 인용문 참 아프게 읽혔었는데...
다락방님의 책을 고르시는 안목 덕분에 늘 한 달, 한 달 새롭게 눈을 뜨는 시간들인 것 같습니다. 몰랐던 성매매 문화와 금융권의 부채 자본으로 덩치를 부풀리는 상황들...이 책이 아니었음 계속 모른채로 살아가고 있겠죠?
알게 된 것이 결코 자랑이 아닐진대ㅜㅜ
이것이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가게 될지 관심을 가지는 계기는 분명할 것 같습니다.
암튼 모두들 분노하고 고민하는 글들을 읽으면서 나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구나! 싶어 되려 힐링되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암튼 우리나라에도 이런 작가들이 더 많이 나왔음 싶어요. 더 많이 알아갈 수 있게 말이죠^^

다락방 2022-04-28 08:44   좋아요 2 | URL
책나무 님, 저도 책 속의 현실이 여성들에게 너무 가혹해서 차라리 이걸 모르고 사는게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수시로 들었어요. 차라리 모를걸, 차라리 모를걸.. 하고요. 알고 나니 너무 괴로워요. 안다고 해서 제가 어떻게 바꿀 수도 없기 때문에요. 다만 앞으로 성매매에 있어서 성매수자만 처벌하자는 노르딕 모델을 지지하는 걸 제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게는 이런 책을 읽고 널리 알리는 것도 있을테고요.

책나무 님, 한달간 또 같이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5월달에도 (어렵겠지만) 열심히 가봅시다!!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
신박진영 지음 / 봄알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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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희'의 [레이디 크레딧]을 더 잘 읽기 위해 중간에 신박진영의 이 책을 꺼내왔다. 읽다보니 절반 정도 읽어둔 [레이디 크레딧]이 이 책을 읽는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레이디 크레딧은 성매매 안의 경제적인 착취 구조에 대해 더 비중을 싣고 써냈다면, 신박진영은 그 착취적 구조 속에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상품으로 소모되고 있는지, 얼마나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는지에 대해 더 비중을 싣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신박진영은 20년간 성매매 여성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 현장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여성들로부터 전화를 받고 그들에게 찾아가 여성들을 구출하는 일부터 시작해 성매매방지법 제정운동까지. 그녀는 누구보다 성매매여성들의 곁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한결같이 지금까지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오며 신박진영이 자신이 정한 경계는 '성매매는 노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그것을 노동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을 성착취에 그대로 놓아두게 된다는 것이었다. 


성매매 비범죄화, 성매매 합법화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대하고 있고 거기에 대한 근거로는 이미 합법화를 하고 있는 나라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근거로 가져온다. 우리가 무엇을 시장에서 팔 수 있다는 것은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것을 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게 경쟁업체가 생긴다면 더 잘 팔기 위해 가격을 후려치거나 좀 더 싼 값에 원료(재료, 상품)를 구하려고 할 것이다. 여성을 상품화 하는게 합법적이 된다면, 그 여성들이 더 낮은 평가를 받고 후려쳐지는 것, 심지어 공짜로 데려올 수 있는 인신매매까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는 특별한 서비스까지(아이패드로 음료와 여자를 주문하며 음료를 마시는동안 그 여자가 오럴을 해주는 것도 가능해지는 실제 사례가 이 책에 나온다) 가능해진다. 


진보입네 자처하며 성매매 여성들의 노동의 권리를 말하는 남자들(이 책에서는 김두식과 지승호)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일침을 가한다. 결국 너희들은 그 안의 착취구조를 무시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현 상태를 유지하자는 적극적 동의라고. 성매매와 사회적 폭력으로부터 한 발을 뺀 채 당사자를 이용하는 행위(p.222) 라는 것이다.  진보지식인의 책임 회피나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행위 그리고 게으른 자세까지를 지적하는 신박진영의 모든 생각에 동의한다.



리뷰는 이정도로 하고 끝마쳐도 되지만, 읽다 보니 실제 성매매 여성이었던 '레이철 모랜'의 책이 자꾸 생각나고 또 이 책의 내용과 겹쳐서 좀 가져오야겠다. 신박진영은 이 책에서도 고급 성매매와 그보다 낮은 성매매에 대해 언급한다. (텐프로, 쩜오) 그러나 그 일에 있어서 '유흥접객원의 역할은 동일'(p.103)하다고.


이 점에 대해서는 레이철 모랜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고급‘ 성매매 시장에서 겪었던 경험들만큼 ‘고급‘같지 않은 일은 없었다. 섹스를 위해 돈을 지불하는 데 품격이 있을 리 없고, 성매매가 일어나는 환경이 상관있을 리 만무하다. - 《페이드 포》, 레이첼 모랜, P152


고급 창녀 신화는 대체로 그 신화를 믿으려고 섹스에 큰 돈을 지불하는 구매자들의 욕망과 맞닿으므로(성매매의 다른 신화들과 같이) 계속 지속된다. 많은 성구매자들이 에스코트 에이전시에 전화하면 고급의 질이 집 문 앞에 도착할 거라 짐작하고 싶어 하며, 그 질에는 고급의 여자가 부착됐을 거라는 생각이 뒤따른다. 고급 창녀의 개념은 성매매 시장을 극대화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고, 그로부터 수익을 창출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 《페이드 포》, 레이첼 모랜, P157



성매매의 본질은 그 환경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거친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하얀 리넨에 엉덩이를 비빈다고 성매매가 다른 것으로 변하진 않는다. - 《페이드 포》, 레이첼 모랜, P164


또한 레이철 모랜이 자신의 책에서 말한 '타락의 상호작용' 역시 신박진영은 자신의 책에서 얘기하고 있다. 성구매자들은 '포르노에서 학습한 것들을 성매매 안에서 실현하려 한다'(p.142)는 것, '특이 취향 자체가 문제되기보다는 그에 일방적으로 맞추어주고 무엇이든 받아주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회의가 크다'(p.142)는 것. 


그 남성은 생리혈에 성적으로 도취되었다. 그의 성향은 평생 성매매 여성을 방문하도록 이끌었는데, 당연히 사생활에서 만나는 여성들과는 이런 욕망을 공유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성매매를 지탱하는 주춧돌이다. 자신과 인생을 공유하는 여성에게 드러낼 수 있을 거라고 이성적으로 기대를 할 수 없는 변태 성향을 다른 계층의 여성에게 떠넘기려는 남성의 고집이다. 여성들은 존중과 경멸, 품위와 천박, 종경과 비난이라는 두 부류로 구별되게 나뉜다.

내 친구는 생리혈이 가장 많이 나올 때 그 구매자와 만나기로 하고 적어도 만나기 하루 전에 탐폰을 착용해서 피에 흠뻑 젖도록 했다. 그 구매자는 항상 단호하게 탐폰이 완전히 젖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이 만나면 그녀는 탐폰을 빼고 그 구매자는 어린 시절 경험을 다시 살게 된다.

나의 친구와 그 캐나다인 성구매자 사이 특이한 타락의 상호작용은 이렇다. 그 친구는 그 구매자가 만났던 모든 여성들과 감정적으로 거리를 갖게 만드는 그의 더럽고 역겨운 습관이 지속되어 그 구매자가 자신의 가치를 낮추도록 도모했으며, 그 구매자는 다른 어떤 여성에게도 제시하지 못할 역할을 감히 그녀에게 제시함으로써 그녀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성매매 내 타락의 상호작용은 바로 이와 같다. 영향을 주고, 반영하며 합병하면서 쌍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다. 요구되면 제공되고, 찾으면 충족되고, 제시되면 받아들여진다. 타락은 스스로 갱신하고 재생하는 데 고수이고, 특정 박테리아가 습한 장소에서 가장 잘 번식하듯이 타락은 성매매를 가장 최적의 환경으로 여긴다. -페이드 포, 레이첼 모랜 , p.146


신박진영은 '구매자의 인격도 성매매 여성의 인격도 이곳에서는 돈이 지불되는 순간 사라진다'(p.150)고 했는데, 이것은 레이첼 모랜이 말한 '타락의 상호작용'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될 것 같다.



바깥에 날씨도 좋은데 나는 주말에 이런 책을 읽고 있었다.




예컨대 정치적 올바름이 여성 개인의 생존과 부딪힐 때 옳고 그름만으로는 사태를 판단할 수 없다. 매 순간 어떤 입장을 가질 수는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완벽한 답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간들을 통과해 지금의 나는 성매매는 사업도 직업도 아니며 결코 이를 ‘노동‘이라 부를 수 없다는 최소한의 선(경계)을 가지게 되었다. - P16

성매매를 노동이라고 말하는 순간 착취는 그저 개인이 감당해야 할 일이 된다. 성매매 안의 착취적 본질은 악당 같은 포주와 특별히 폭력적인 몇몇 구매자만 제거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성매매가 곧 성 착취다. - P18

이런 세계에서 입장 없음의 입장을 견지한다면 결국 현 상황의 방관자가 될 뿐이다. - P19

성매매에서 ‘남성의 본능 수호‘오 ‘성매매 여성의 자율 수호‘는 한 쌍처럼 붙어 다녔다. - P23

그러나 이런 여인의 육신을 일시의 상품으로나마 사야마 할 기회조차 없으면 안 되는 독신 노동자 빈민은 어떻게 할 것인가(오기여, <공창> 중)


위 글이 발표된 것은 1946년이다. 일제 강점기 해방 직후 온 민족이 한마음으로 독립의 기쁨을 나눌 때에도 성매매 여성들은 열외였다. 이들은 빈민 계층 독신 노동자의 성욕 해소를 위해 계속 ‘공창‘에 남아주어야 했다. - P23

‘성 판매 여성‘은 ‘판매‘하는 여성의 자율성을 부각하여 성매매를 사회적 구조 속에 놓이는 총체적 틀에서 볼 수 없도록 만든다. - P25

성차별적 사회 안에서 자원의 기울기는 언제든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킨다. 자원은 돈에만 있지 않다. 여성을 창녀라는 프레임 안에 둘 수 있는 것은 여성이 결국 남ㅅ멍의 소유물이라는 전제 때문이다. - P26

성매매는 ‘도시의 하수구‘라며 성매매 여성을 정화의 도구로 호출하고 「늙은 창녀의 노래」에서 삶의 영감과 위로를 받는다는 남성들은 대체 누구를 증오하고 무엇을 찬양하는 것인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을 끌어내리지 못해 안간힘을 쓰고 여성을 구매할 수 있는 위치를 지키기 위해 그토록 애쓰면서 동시에 여성들을 창녀라 낙인찍을 수 있는 그 자리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 P28

[성매매방지법]제정 이전 수많은 ‘퇴폐 이발소‘가 조직형 · 기업형으로 운영됐고, 명절에는 성매매 집결지에 방이 모자라 업주들이 인근 모텔까지 빌려 영업을 했으며, 여관발이 성매매와 목욕탕 성매매는 24시간 영업이 돌아갔다.낮시간에도 근무 중 잠시 ‘쉬러‘오는 사무직 남성들로 늘 북적였다는 게 당시를 경험한 성매매 여성들의 증언이다.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당시부터 한국의 성매매는 남성들이 받는 모든 서비스 업종에 부차적으로 제공되는 형태였다는 것이다. 남성들이 가는 곳 어디든 성매매가 가능하도록 세팅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35

성매매는 매우 계획적인 행동이며 더구나 돈이 있어야 실행 가능하다. 남성들은 사회적 여건을 따져 성매매를 선택하며 자신의 경제 사정에 따라 구매를 계획한다. 돈과 계급이 관여하는 성매매 시장 안에서 이들은 구매자 남성 간의 위계화, 좌절, 소외 등을 겪는다. 성매매는 본능의 영역이 아니라 문화와 경제, 즉 구조화된 체계 속에 있다.
한국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일반화시키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우리 사회가 만들고 재생산하는 이러한 통념이다. 남자는 짐승이고 성욕은 본능이니 성매매를 못 하게 하면 성범죄자가 된다는 말에 진정 분노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 P38

구매자들이 업주에게 하는 가장 첫 질문이 ‘가장 어린 애가 누구냐‘라고 한다. 그리고 귀신같이 제일 어린 여성을 선택한다. - P41

장애인권의 문제는 보편적 복지와 닿아 있는 영역이다. 이런 사안을 성매매할 권리로 치환하는 건 문제적이다. 장에인에게도 성 구매자가 될 권리를 주라는 주장이 ‘인권‘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섹스 볼런티어에 나서야 할 이들의 인권은 열외로 하고, 대형 성매매 업소를 마치 장애인 인권을 위한 장소인 것처럼 홍보 하는 것은 지극히 한국 남성 성 구매자의 관점이다. - P43

2018년 KBS 「추적60분」에서는 포털 사이트에 등록된 성매매 업소가 2393개로 전국 고등학교보다 많다는 비교를 통해 한국 성매매 시장의 거대함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 P48

한국의 거대한 시장은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이가 성매매를 용인하고 있는가를 증명한다. 성매매 시장 규모를 줄여나가기 위한 방법론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거대한데 어쩌겠는가‘와 같은 ‘통념‘은 방법론일 수 없다. 누가 이 같은 체념을 추동하고 성매매를 자연적인 것으로 만드는지, 그를 통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 P50

남자친구의 성매매 이력을 알려준다며 사업을 시작한 ‘유흥탐정‘이라는 사이트는 경찰이 잡고 보니 ‘골든벨‘이라는 성매매 알선업자들의 공유 애플리케이션에 등록된 무려 1800만 명의 성 구매자 명단을 이용한 것이었다. - P53

조용하고 얌전한 듯 굴면서 시킬 건 다 시키고, (일본도)한국처럼 콘돔을 안 쓰려는 구매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 P56

부녀자를 접객원으로 두고 술을 따르고 흥을 돋우도록 법에 명시되어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일본과 한국이 유일하다. - P57

지금 한국에서 성매매를 논할 때 ‘성매매는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거나 ‘우리 역사에 이미 오래도록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물론 그러므로 현재의 성매매가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피력하기 위한 말이다. 하지만 노예제 시절을 되새긴다고 지금도 노비와 신분제가 필요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래되었고 예전에도 있었다는 것이 현재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 P59

남성의 욕구를 위한 도구로서 국가적 관리 대상이 되는 여성들은 국가의 필요에 의해 동원되면서도 동시에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규정되었다. - P65

좀 더 자란 뒤 성매매를 문제적으로 인식하면서 나는 내가 생각보다 성매매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 과거의 장면들에 성매매와 연관된 이미지와 장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근대무학으로 배운 단편소설에서, 무수한 영화 속에서, 길거리에서, 어른들의 사사로운 이야기에서 성매매는 이미 당연한 일상의 구조와 문화로 어디에나 존재했다. - P70

성매매를 당연시하고 여성들의 몸을 전시하고 쇼핑하기를 권리로 여길 때, 다른 모든 여성 서비스 직종 또한 성매매화된다. 성매매 합법화나 비범죄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사례로 드는 대표적인 나라들의 상황도 동일하다. 성매매를 허용하는 스위스는 창의적인 업태들을 속속 만들어냈다. 2013년에는 지방정부가 길거리 성매매를 위한 드라이브인(drive-in) 성매매 장소를 만들더니 2016년에는 ‘페이스걸(facegirl)‘이라는 업체가 음료를 마시는 동안 구강성교를 제공하는 커피숍을 개장했다. 이 업소에서는 아이패드형 메뉴판으로 여성과 음료를 주문한다. 성매매가 ‘된다‘고 하는 순간, 그 가능성은 곧 ‘시장‘이 된다. - P88

더구나 국가 정책으로 만들어진 성매매 시장은 공권력과의 결탁을 배태하게 된다. 성매매 아선 업소들과 공권력의 뿌리 깊은 유착·부패는 성매매 시장의 본질적 성격에서 기인하지만 한국적 상황에서는 성매매 알선 조직의 거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엄청나게 커진 규모의 경제가 권력을 만들고, 이 권력이 공권력조차 하수인 또는 공모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경찰도 이 ‘잘나가는‘ 사업에 끼어들기 위해 업주와 친구가 되고 투자자가 되고 결국 스스로 업주가 된다. 검찰은 스폰서 노릇을 자처하는 거대 업소의 조력자가 된다. - P89

온갖 직군의 사람들이 성매매 알선에 나서는 것은 손쉽게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개인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포주와 공모하고 조직 폭력 단체로부터 현직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성매매로 기꺼이 이 이득을 취한다. 한편에서는 사채업자가 다른 한편에서는 무당이 성매매를 종용한다. 한국 사회의 온갖 자리에서 이들은 성매매 알선에 각자의 권력을 사용하고 이로써 부를 축적하고 있다. - P99

이 같은 남성들의 유흥은 대중문화를 통해 수업이 재현되면서 일상적인 것이 된다. 흥행에 성공한 「내부자들」(2015) 「베테랑」(2015) 을 비롯해 한국의 근·현대 사회상을 그리는 대표적 영화들에서 유흥업소는 사건이 이루어지는 매우 핵심적인 장소로 등장한다. 이곳에서 남성들이 서로의 권력고 연대를 재확인하며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동석한 접대 여성들의 모습 또한 반복적으로 배경이 된다. - P100

거절과 저항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사진고 영상을 찍고 부지런히 업로드하는 남성들은 누구의 인정이 필요한 걸까. - P116

비단 연예인뿐 아니라 정치인, 언론인 등 자신의 커리어 관리를 위해 여론의 시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성 구매에 나선다는 것은 그들을 상대하는 성매매 여성의 목소리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크게 문제시될 일이라 여기지 않는 사회 환경에 기인한다. - P117

성매매하고, 성매매 사실을 경쟁하고 인증하는 이 소비자들은 알선 시장의 노예다. 돈을 바치고 열광적으로 후기를 게시하며 인정받으려 애를 쓴다. 성 구매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도록 만들어진 사회에서 남성들은 성구매자로 창조된다. - P118

대부분의 여성에게 가장 큰 진상은 할 거 다 하고 돈을 안 내거나 사정 못 했다고 또는 서비스가 맘에 안 든다고 돈을 돌려달라고 하는 이들, 정해진 서비스 외에 더 많은 걸 요구하면서도 돈은 더 내지 않는 이들이다.
구매자들은 성매매 여성을 멸시하며 ‘돈 받고 몸이나 파는 주제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스스로에게도 함정이다. 그 역시 그‘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 P119

성 구매자는 섹스에서 소외된 시장의 노예일 뿐이다. - P123

남성들은 다른 한 성별을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으로 만들고 다 함께 그 구매권자가 됨으로써 그들 사이의 위계에 내재하는 착취와 폭력을 지워버린다. 절대적으로 낮은 계급(비남성)이 존재할 때 남성 간의 위계는 상대적 특권이자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그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해 남성 동성 집단은 부조리에 침묵하거나 착취에 공모한다. 또한 동성 사회에서 힘 있는 남성의 착취를 고발하는 대신 그들 외부의, 보다 낮은 계급인 여성에게 박탈감을 전가하고 분노를 퍼붓는다. - P126

질문할 것은 그들이 왜 성매매를 하는가가 아니다. 취약한 계층의 여성이 절박한 상황에서 성매매로 유입되고 이 시장은 너무나 손쉽게 그들의 취약함을 이용한다. 이때 그 ‘일‘이 과연 상식의 영역인가가 문제다. 그 ‘일‘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걸 ‘노동‘이라 인정하는 일이 과연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 P136

성매매는 그 존재만으로 성폭력의 경계 자체를 사라지게 한다. - P147

연구에 따르면 성매매 여성에 대한 성 구매자 남성의 공감 능력은 성을 구매하지 않는 남성보다 낮으며, 강간 및 기타 강제적 성행위를 시도한 비율이 성 구매 남성에게서 높게 나타난다. - P148

여성이 노동자가 아닌 상품으로 취급되고 일정 가치를 기대하는 구매자들이 존재하며 그 기대를 배반할 때 가차 없이 훼손당하고 버려지는 이 과정에서 여성은 인간으로서 존중되지 않는다. - P149

이 시장에서 남성이 구매하는 것은 ‘성욕 배출‘의 기회가 아니라 내 성욕을 위해 대상을 지배하는 욕망의 실현이다. 성매매의 순간 "여성은 거기에 없는 것과 같다"는 구매자의 말대로, 성매매 현장에 ‘여성‘은 없다. 상품만이 존재하며, 그리하여 상품이 된 인간이 겪는 모든 폭력은 성폭력이 아닌 그 무엇이 된다. - P150

수많은 성매매 경험 여성들은 절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성매매를 하는 대다수의 여성이 할 수만 있다면 이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단지 이 사회가, 구조가 이를 외면하거나 보지 않는 것이다. - P151

현장에서 만나는 성매매 여성들은 성매매를 강간이라 단언한다. 그리고 성 구매자는 평소 그가 어떤 사람이든 그 순간은 그저 짐승이 된다고 표현한다. 성 구매자를 상대하기란 매번 온몸의 긴장을 요하는 일이고 그렇기에 늘 온몸이 아프다. 내가 만난 자갈마당의 성매매 여성들은 상품으로서 몸을 준비하느라 아팠고, 그 몸을 상품으로 사용하면서 또 아팠다. - P160

네덜란드와 독일의 대형 성매매 업소 포주들은 성공적 사업가로서 자서전을 출간하고, 이들이 성매매 알선업소 운영을 컨설팅해주는 리얼리티 쇼가 제작되었다. 영세 사업자를 돕는 취지로 제작된 한국의 컨설팅 프로그램 「백종원의 골목식당」과 유사하지만 이들의 컨설팅은 성매매 알선업으로 성공하는 방법이고, 더욱 다른 것은 자본의 규모다. 그들은 직접 프로그램을 제작할 만큼의 재력과 전방위 로비스트가 될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 ‘포주들‘은 정계로 나아간다. - P176

반성매매 활동가 레이철 모랜은 그의 책을 통해 이 기사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국제 앰네스티의 입장은 ‘성 노동 프로젝트 세계 네트워크(Global Network of Sex Work Projects)‘에서 나온 것이며, 그 네트워크의 공동 의장은 성 착취 목적으로 인신매매를 하여 멕시코에서 15년형을 살고 있다. - P192

성매매 완전 비범죄화 사회가 수호하는 것은 결코 성매매 여성의 권익이 아니다. - P200

성매매 시장이 성립하면 그다음은 원하는 무엇이든 ‘구매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강간도, 모든 착취적 판타지도, 소녀와의 연애 같은 정서적 착취부터 어느 구멍이든 삽입하는 신체적 착취까지, 어디까지가 성매매인지 경계를 정할 수 없다. - P206

합법적 성매매 시장에서 성매매는 더욱 잘 닦인 사업으로 관리되고 이곳에서 여성들은 구매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팔게끔 설치된다. 모든 여성의 서비스가 공식적으로 성매매가 되는 것이다. - P207

일본 AV는 합법화된 ‘n번방‘이다. - P211

유명한 방석집 집결지가 있다. 그곳에서 막 빠져나온 여성과 함께 경찰 조사에 동행했다. 지방경찰청의 여성 청소년계 담당 경찰은 3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업주를 불러서 대질 조사를 받는 자리, 선불금이 포함 빚이 1억에 가까운 여성의 상황에 대해 질문하고 있었다. 업소가 정해놓은 납득하기 힘든 비용 계산 규칙들을 확인하던 중 경찰이 업주에게 물었다. "왜 홀복값을 여성이 부담해야 하죠? 경찰복은 내 돈으로 사지 않는데." ‘민중의 지팡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체화한 것 같은 경찰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이 정말 고맙다. - P212

전문 인터뷰어로 많은 저서를 발간한 지승호는 2015년 《성 노동자, 권리를 외치다》라는 당사자 인터뷰집을 냈다. 나는 그들(김두식, 지승호)의 글에서 그들 자신의 도덕적 우월을 과시하는 것 외에 어떤 성찰이나 다른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중략) 진보를 자처하는 남성 지식인들의 이런 자세는 게으르거나 또는 자신들의 입장은 유보한 채 당사자를 내세워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짓이다. 그들은 ‘성 노동‘을 주장하는 당사자의 당사자성에 열광하며 성 노동론에 힘을 싣지만 정작 그 당사자들의 인터뷰에도 등장하는 성매매의 폭력적 본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성 구매자의 문제, 알선업자와 내통하는 권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며 그저 성매매가 자신에게 필요하다 말하는 여성의 말을 취해 ‘당사자들이 원하니까‘로 이야기를 가져간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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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4-24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날씨도 좋은데,˝라고 하시지만, 날씨가 이렇든 저렇든 다락방님 우선순위는변동 없었을 듯합니다. 저도 낮에 다락방님 페이퍼 읽고, 도서관 다녀왔어요. 다락방님 요 페이퍼에 등장한 책 세권이 서가에 조르르 같이 진열되어 있어서 데려왔습니다!

다락방 2022-04-25 07:55   좋아요 2 | URL
오오, 도서관 서가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니. 좋은데요? 후훗.
맞아요, 알라 님 말씀대로 날씨가 어떻든 저는 이 책을 읽었겠지요. 그래도 일요일 낮에는 일자산 다녀왔어요. 계속 책만 읽고 있을 순 없어서요. 초록초록한 나무를 보고 왔답니다. 후훗.
재미있는 책 읽기가 되진 않겠지만, 의미있는 책읽기는 될테니, 알라 님, 대여해오신 책으로 의미있는 시간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2-04-25 13:3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실은 제가 플친님들 서재 마실다니다 보면
대여해서 보는 거 저만큼 선호하는 날나리 책꾼이 없는 것 같아요

다들 밑줄 많이 그으시고, 메모하시며 읽는데
저는 책 그만 들이고 싶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

바꿔야겠어요...

책읽는나무 2022-04-24 22: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시험기간인 아이 덕분에 도서관에 따라가서 <레이디 크레딧> 3부를 읽고, 밖으로 나왔는데...심적으로 정신이 조금 혼란스럽더군요.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에 충격도 오고..저녁을 먹는데도 정말 입맛도 뚝!!!! 책에서 헤어나오기가 힘들었어요.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겨우~~ㅋㅋㅋ

바깥 날씨도 좋은데 주말에 이런 책을 읽고 있었다는 마지막 문구!!!
정말 가슴 찡한 문구입니다.
이 책도 쉽지 않겠군요.

다락방 2022-04-25 07:57   좋아요 3 | URL
저는 오늘 출근길에 레이디 크레딧 읽는데 등급제의 아가씨들..에 대한 설명을 읽자니 그냥 막 답답하고 그렇더라고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한민국은 성매매에 깊이 관여하고 있고 여자 알기를 정말 상품 알기로 하는.. 막연하게 성매매 남성들이 많다는 건 알긴 했지만 성매매 업소가 고등학교 수보다 많대요!! 전 정말 너무 어이가 없어서.. 교육보다 더 중요한 성매매인 것입니다. 휴..

책나무 님, 화이팅이요!!

그레이스 2022-04-25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긴 발췌 행렬!

다락방 2022-04-26 07:34   좋아요 1 | URL
더이상 칸이 추가 되지 않아 더 못했습니다..

독서괭 2022-04-25 13: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크.. 좋은 날씨에도 마음이 힘들어지는 책을 읽고 공유해주시는 다락방님. <페이드포> 사놨는데 빨리 읽어야하는데요..ㅎㅎ 5월엔 꼭 <레이디 크레딧> 읽고 페이드포도 시작해보겠습니다. (이미 4월은 포기)

얄라알라 2022-04-25 13:38   좋아요 2 | URL
독서괭님, 저는 오늘부터 시작이예요....같이 그냥 4월 도전해보실래요?^^ 늦게 입수한 주제에 완주하겠다는 허풍을 떠는 저..

독서괭 2022-04-25 13:44   좋아요 1 | URL
얄라님 저는.. 일단 <여성괴물>을 끝내야해서요.. 먼저 가세요..🥺

얄라알라 2022-04-25 13:49   좋아요 1 | URL
^^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 같은 여행 노선 가고 있는 동반 여행자 느낌 납니다.
그렇게 독서괭님께서 밀어주시니, 그럼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 일단 <레이디 크레딧> ˝책을 펴내며˝는 다 읽었습니다. 차근차근 4월 26,27, 28, 29, 30^^;;

<여성괴물> 응원드리겠습니다. 저는 2/3쯤에서 중도하차했기에 드릴 말씀이 없이 부끄

독서괭 2022-04-25 13:53   좋아요 2 | URL
저도 책을 펴내며는 읽었습니다 ㅋㅋㅋㅋ
얄라님 화이팅입니다~!! 근데 5월 책이 어려워보여 벌써 걱정입니다😂

다락방 2022-04-26 07:35   좋아요 1 | URL
벌써 4/26 이고 4월은 30일 까지밖에 없네요. 저도 부지런히 읽어야겠습니다. 이제 절반을 넘긴지라 심히 걱정됩니다 ㅠㅠ

Jeanne_Hebuterne 2022-04-26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자가 뭔가를 거절할 때 남자가 말하는 ‘비싸게 구네‘의 속뜻을 알고 박완서님의 말이 떠올랐어요.
토종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