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12. 시골사람이 지은 말 ‘다북지다’


  이웃님이 보내 온 글을 읽는데 ‘설렁하다’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설마 ‘썰렁하다’를 잘못 쓰셨나 하고 바라보았어요. 이러다가 다시 생각합니다. 한국말이거든요. 한국말은 아 다르고 어 달라요. 더욱이 한국말은 아랑 어만 다를 뿐 아니라, 아랑 야가 다르고, 어랑 여가 다르지요. 사랑 샤가 다른 한국말이면서, 싸랑 사에다가 쌰까지 다 다른 한국말입니다.

  사전에서 ‘설렁하다’를 찾아봅니다. 올림말로 나옵니다. 말결로 살피면 ‘설렁하다 < 썰렁하다’인 얼거리예요.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설보다 썰을 붙인 ‘썰렁하다’를 쓰시지 싶습니다. ‘설렁하다’처럼 살짝 가붓하게 쓰시는 분은 매우 드물어요.

  말결을 더 살피면 ‘설렁하다·썰렁하다’뿐 아니라 ‘살랑하다·쌀랑하다’가 있어요. 우리는 그때그때 느낌이나 기운을 살펴서 온갖 낱말을 쓸 만해요. 어느 때에는 ‘설렁설렁하다’나 ‘쌀랑쌀랑하다’를 쓸 수 있지요. 마음으로 스미는 결을 고스란히 살려서 이야기할 만합니다.

  익산에 사는 이웃님이 전화를 걸어 말씀을 여쭈셨어요. 그분은 퍽 예전부터 ‘다북지다’라는 낱말을 쓰셨다고 합니다. 때로는 ‘다북차다’라는 낱말도 쓰셨대요. ‘다북지다·다북차다’라는 말을 처음 들을 무렵이든, 이 말을 그분 이웃님이나 동무님한테 쓰든, 누구나 이 말이 무엇을 나타내거나 가리키는가를 잘 느끼거나 알았다고 해요. 딱히 한국말사전을 뒤적여 보지 않아도 도란도란 즐거이 나누던 낱말이라고 합니다.

  이러다가 한국말사전을 살펴보는데 ‘다북지다’도 ‘다북차다’도 사전에 없어서 놀라셨대요. 사전에 없는 말을 함부로 써도 되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대요. 사전에 없는 말을 아무나 지어서 쓴 셈이 아닌가 하고 느끼셨대요.

  한국은 한국말사전뿐 아니라 다른 여러 사전을 지은 발자취가 매우 짧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글을 담을 사전을 짓겠다는 생각도 거의 못했다고 할 만합니다. 외국사람이 한국말사전을 먼저 지었고, 한국사람은 한참 늦게 한국말사전을 지었어요.

  한국 발자취를 살피면, 사전을 어떻게 짓느냐 하는 틀이 제대로 서지 않은 채 독립운동 물결을 타고서 한국말사전이 태어나요. 해방 뒤에는 제대로 독립한 나라로 서려는 뜻으로 한국말사전이 태어나지요. 이러다 보니 한국말사전은 꼴이나 결을 제대로 가닥을 잡지 않고서 서둘러 나왔습니다. 이 틈바구니에서 일본 사전을 슬쩍 베껴서 낸 사전이 불티나게 팔리며 엉뚱한 일본 한자말이 마구잡이로 퍼지기도 했어요. 이 엉킨 실타래는 요즈막까지도 무시무시하게 퍼져요.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도시에 살지만, 일제강점기라든지 해방 뒤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시골에 살았어요. 그래서 한국말사전 틀을 처음 짜는 일을 하던 분들은 ‘시골말 찾기’나 ‘시골말 캐기’를 했습니다. 지난날 학문을 하던 분들은 들이나 숲이나 바다가 아닌 서울에 있는 학교에 모여 책으로만 배운 터라, 막상 국어학자로 일한다고 하더라도 한국말(시골말)을 잘 몰랐어요. 사전에 어떤 낱말을 실어야 알차며 아름다운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요.

  일제강점기나 해방 뒤에 문학을 한 적잖은 분들은 이녁이 나고 자란 고장에서 쓰던 고장말을 글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예전에는 그랬지요. 예전에는 문학을 한다고 할 적에 서울말이 아닌 시골말로 문학을 했어요. 김유정이든 백석이든 이효석이든 현덕이든 이녁이 나고 자란 고장에서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말로 문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사전 발자취가 매우 짧아도 ‘시골말을 고스란히 담아낸 문학’을 발판으로 삼아서 낱말을 모을 수 있었어요.

  오늘날 한국 문학을 살피면 거의 모두 서울말입니다. 전라말이나 경상말로 소설이나 시를 쓰는 분은 찾아볼 길이 없어요. 제주사람이 제주말로 소설이나 시를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수도권이 아닌 인천이나 수원이나 안산이나 고양이나 부천 같은 고장에서 인천말·수원말·안산말·고양말·부천말로 문학을 하는 이도 찾아볼 길이 없어요. 다 다른 고장에서 나고 자라면서 다 다른 말결을 물려받은 숨결을 꾸밈없이 살려낸 문학은 오늘날 한국에서 씨가 말랐다고 할 만합니다.

  이런 흐름이나 얼개를 헤아려 본다면, ‘다북지다·다북차다’가 사전에 아직 안 오른 까닭을 짚을 만해요. 사전에 없기 때문에 쓰기에 멋쩍거나 꺼릴 만한 낱말이 아니라, 아직 사전에 제대로 담지 못한 시골스럽고 수수한 한국말 몇 가지인 ‘다북지다·다북차다’를 우리 이웃님이 입에서 입으로 지키면서 가꾸어 왔다고 생각해요.

  ‘다북지다·다북차다’는 아직 사전에 없으니 말뜻을 새롭게 붙여야 합니다. 먼저 두 낱말하고 비슷한 다른 낱말을 헤아려 봅니다. ‘소복하다·수북하다’가 사전에 올라요.

  ‘소복하다’는 “1. 쌓이거나 담긴 물건이 볼록하게 많다 2. 식물이나 털 따위가 촘촘하고 길게 나 있다 3. 살이 찌거나 부어 볼록하게 도드라져 있다”로 풀이합니다. 다음으로 ‘다복하다·더북하다’가 사전에 올라요.

  ‘다복하다’는 “풀이나 나무 따위가 아주 탐스럽게 소복하다”로 풀이합니다. ‘더북하다’는 “1. 풀이나 나무 따위가 아주 거칠게 수북하다 2. 먼지 따위가 일어 자욱하다”로 풀이해요. 자, 제 나름대로 새 뜻풀이를 붙여 보겠습니다.

다북하다 : 1. 풀이나 나무가 보기 좋도록 넉넉하게 있다 2. 마음·생각·살림·모습 들이 보기 좋도록 넉넉하다
다북지다 : 1. 풀이나 나무가 참으로 보기 좋도록 아주 넉넉하게 있다 2. 마음·생각·살림·모습 들이 참으로 보기 좋도록 아주 넉넉하다
다북차다 :  1. 풀이나 나무가 더없이 보기 좋도록 대단히 넉넉하게 있다 2. 마음·생각·살림·모습 들이 더없이 보기 좋도록 대단히 넉넉하다

  ‘옹골지다·옹골차다’라는 낱말이 있어요. ‘옹골지다’는 “실속이 있게 속이 꽉 차 있다”를 뜻하고, ‘옹골차다’는 “매우 옹골지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지다·-차다’를 놓고 결이 이처럼 달라요. 이런 결을 살피면서 ‘다북하다·다북지다·다북차다’를 사전에 새롭게 담을 만한 반가운 시골말 한 타래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나눌 말은 사전에 나와야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고받을 말은 표준 말법이나 서울말 얼거리에 들어맞아야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나타낼 말을 즐겁게 나누면서 살림을 기쁘게 지으면 돼요. 우리는 사랑을 말 한 마디에 고이 실어서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하루를 지으면 돼요.

  예부터 말은 학자나 임금님이 아닌 수수한 시골사람이 지었습니다.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은 바로 수수한 시골사람이 지었어요. 게다가 고장마다 말이 다 다른데요, 이는 고장마다 바로 그 고장에서 삶을 지은 수수한 시골사람이 손수 말을 지었다는 뜻이에요. 전라도라는 고장을 놓고 본다면, 곡성이나 고흥이나 구례나 진도나 신안이나 나주에서 쓰는 말이 다 다르지요. 고을마다 삶자리가 다르니, 다 다른 삶자리에 맞추어 다 다른 시골사람이 다 다른 말을 짓습니다. 고을에서도 더 작은 마을로 접어들면 또 마을대로 말이 다르고요.

  남이 지어 주는 말을 쓰던 시골사람이 아니에요. 이른바 학자나 지식인이나 권력자가 지어 주는 말을 쓰지 않은 시골사람이에요. 모든 말을 스스로 지은 시골사람입니다. 모든 말을 즐겁게 지은 시골사람입니다. 모든 말을 삶에서 캐내어 살림을 가꾸면서 홀가분하게 지은 시골사람입니다.

  삶을 짓기에 말을 지을 수 있어요. 살림을 짓기에 이름을 지을 수 있어요. 사랑을 짓기에 이야기를 지을 수 있어요. 시골에 살든 서울에 살든 우리 스스로 삶이나 살림이나 사랑을 스스로 짓는 기쁜 길을 걷는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삶과 살림과 사랑을 슬기롭게 담아내어 생각을 나누는 아름다운 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수수하게 말을 짓고, 스스럼없이 말을 나누어요. 사전을 짓는 사람은 수수한 시골사람을 이웃으로 두면서 말넋을 살찌우는 길을 갑니다. 2017.6.26.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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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17.7.6.) 광주 '동네책방 숨'에 찾아오는 분들하고

함께 나눌 이야기에서 몇 가지 줄거리를 뽑아서 적어 봅니다.

사전과 사진과 시골과 삶과 글이 서로 어떻게 맞물리는가 하는

작은 실마리를 보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 + +


숲에서 짓는 글살림

. 글을 어떻게 쓰는가 - 베껴쓰기 말고 투박한 우리 삶을 글로 써요



  저는 꽤 오랫동안 선풍기를 안 썼어요. 마흔 해 남짓 선풍기 없이 살다가 비로소 선풍기를 집안에 들였습니다. 다만 이 선풍기조차 며칠 안 씁니다.


  저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기도 한데, 선풍기도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무더운 한여름에 에어컨 없이 못 살겠노라 하는 이웃님이 무척 많은데, 저희 집에서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이 이제껏 부채로 여름나기를 한 셈입니다.


  선풍기는 곁님 어머님이 여러 해 앞서 선물해 주셨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선풍기가 아예 없는 살림은 아니었으나, 늘 광에 두고 안 꺼냈으니, 아예 없는 셈이었다고 할까요. 선풍기를 선물받았으나 선풍기를 쓸 일이 없다고 느꼈어요. 선풍기가 있어도 있는 줄 잊고 살았어요.


  큰아이가 아홉 살을 누리던 무렵에 선풍기를 처음 꺼냈으나 저는 선풍기 바람을 안 쐽니다. 아이들이 쐬도록 내주고 제 손에는 부채를 쥡니다. 이러면서 저는 ‘하늘바람을 사랑하자’는 마음이 되어 ‘바람 이야기’를 글로 써 봅니다. 아마 제가 에어컨이나 선풍기 바람으로 살았거나 도시에서 살았으면, 이처럼 ‘하늘바람’ 이야기는 못 썼겠다고 느껴요.


내가 바라보지 않아도

나를 바라보는

나무가


한 그루 두 그루

어깨동무하면서

짙게 그늘길 내어준다.


눈을 감고 걷는다

뒤로 돌아 걷는다

내 곁을 감싸며

늘 흐르는

새파란 바람을

실컷 마신다.


  글을 어떻게 쓸까요? 다른 분들이 글을 어떻게 쓰는지는 저한테 대수롭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글을 어떻게 쓰는가를 밝혀 보겠습니다. 맨 먼저 삶으로 쓴다고 느낍니다. ‘삶으로 쓰는 글’이라는 말은 ‘우리가 저마다 살아가는 대로 글이 흘러나온다’는 뜻이에요. 도시사람은 도시사람대로 살며 글을 쓰고, 시골사람은 시골사람대로 살며 글을 써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책으로 배우고 얻은 대로 글을 쓰고, 흙을 만지며 살림을 가꾸는 사람은 흙과 집살림이 바탕이 되는 글을 써요. 저는 시골집에서 늘 나무랑 어깨동무하면서 하늘바람을 쐬는 하루를 누리기에 이러한 삶을 고스란히 글로 써요.


  엊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앞서 부엌을 치우려고 불을 켰더니 갑자기 웅웅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군요. 부엌 창문에 친 모기그물에 달라붙는 시커멓고 커다란 녀석이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매우 큰 풍뎅이예요. 어쩌면 장수풍뎅이일는지 모르지요. 여섯 살 아이 주먹만큼 커다란 풍뎅이예요. 난데없는 웬 풍뎅이인가 싶었는데 부엌 불을 끄니 이 풍뎅이는 어디론지 사라져요.


  고흥에서는 한 달 남짓 비가 안 와요. 이렇게 비가 안 오니 밭에서 여느 풀이 거의 안 돋아요. 땡볕이 한 달 넘게 내리쬐기만 하니까 그토록 질기거나 대단한 목숨을 뽐내던 풀조차 한두 번 손으로 뽑으니 더 기운을 못 내고 말라비틀어지기만 하네요.


  그런데 있지요, 풀을 뽑지 않은 땅은 사뭇 다릅니다. 뿌리가 땅속에 있도록 한 채 풀포기만 낫으로 베어 눕혀 놓으면, 이때에는 아무리 땡볕이 오래 가더라도 흙이 마르지 않습니다. 풀포기를 베어서 덮은 흙은 오랜 가뭄에도 가물지 않는다고 할까요. 사람 손을 타지 않는 숲은 사람이 몇 달이든 몇 해이든 물을 안 주어도 풀이나 나무가 안 말라요. 풀과 나무가 서로 어우러지는 자리, 이른바 숲에는 가뭄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삶터가 다릅니다. 삶터가 다른 만큼 겪는 삶이 다릅니다. 겪는 삶도 마음씨마다 다르기 마련이기에, 누구는 풀을 잡초로 보면서 모두 뽑아내고, 누구는 농약을 써서 풀을 모조리 죽이며, 누구는 불을 질러서 활활 태우지요. 이때에 겪는 삶은 다 다르기 마련이요, 다 다른 삶에 맞추어 다 다른 이야기가 피어나서, 다 다른 글이 샘솟아요.


  자, 저는 이렇게 제가 지켜보는 대로 제 삶을 찬찬히 글로 옮겨요. 우리가 글을 쓴다고 할 적에는 누구나 이렇게 늘 지켜보거나 바라보거나 겪거나 느끼는 대로 쓸 수 있어요. 가장 쉬운 글이고 가장 수수한 글이에요. 우리가 서로 만날 적에 인사하며 주고받는 말처럼 쓸 수 있는 글이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대로 글을 쓸 수 있어요.


  여기에 살을 하나 붙인다면, ‘살아가는 대로 쓰되, 살면서 즐거움이나 기쁨을 느낀 대목을 골라서 쓸’ 수 있어요.


아주 천천히

발자국 소리조차 안 내고

살금살금 다가서며

더 천천히

손을 뻗어

드디어 바로 앞에

나비를 잡는구나 싶더니

내 손끝을 톡

치고

펄렁펄렁 날아가는

멧범나비


  사는 대로 쓰는 글이지만, 사는 대로만 글을 쓰면 때로는 밋밋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살며 활짝 웃던 일’이나 ‘살다가 눈물이 흐른 일’이나 ‘사는 동안 노래가 샘솟은 일’을 골라서 쓸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늘 비슷하게 겪거나 거의 똑같이 하는 일’을 날마다 엇비슷하게 글로 쓴다면 재미없거나 질릴 수 있어요. 비슷하거나 같은 말을 동무나 이웃한테 들려준다면 동무나 이웃도 우리 이야기가 이제는 따분할 수 있고요.


  이 다음으로 또 한 가지 글을 생각할 수 있어요. 첫째는 ‘사는 대로’ 쓰고, 둘째는 ‘살며 기쁜 일’을 쓴다면, 셋째는 ‘살고 싶은 꿈’을 써요.


꽃이 피어나는

곳이 됩니다


이곳저곳 골골샅샅

그곳에도 골고루


곱게 꿈꾸는

곳이 되어요


곧게 서고

고이 웃고

고슬고슬 고소한

고마운 살림꽃씨를

곳곳에 심지요.


  꿈을 그리면서 쓸 적에는 그야말로 우리 꿈을 스스로 사랑스레 생각하면서 쓰면 돼요. 다른 사람 꿈을 들여다보거나 옆사람 눈치를 볼 까닭이 없어요. 앞으로 스스로 이루고 싶은 꿈을 기쁜 웃음으로 그리면 돼요.


  아무리 훌륭하거나 멋져 보이는 글이 있어도 구태여 다른 사람 글을 따라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한 마디를 보태어 본다면, 베껴쓰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베껴쓰기를 한자말로 필사라고도 합니다만, 베껴쓰기나 필사 모두 글쓰기하고 동떨어져요. 베껴쓰기나 필사를 하면 할수록 내 삶에서 멀어져요.


  그러면 글이나 책은 안 읽으면 좋을까요? 네, 맞습니다. 글이나 책은 안 읽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스스로 지을 노릇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스스로 짓는 새로운 살림으로 나아갈 노릇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스스로 짓는 새로운 살림을 사랑으로 보듬으며 슬기롭게 가꿀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글이나 책은 왜 있을까요? 이는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제살림을 지을 적에 이웃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에요.


  우리한테 우리 이야기가 없다면 우리는 이웃을 못 만나요. 우리 이야기가 없는 삶이라면 이웃을 만나는 자리에서 정치나 연예인이나 사회나 스포츠 이야기만 줄줄이 늘어놓고 말아요. 이때에는 아무 새로움이 없어요. 이때에는 아무 새로짓기가 없지요. 남들 이야기에 눈길을 두면 둘수록 우리 이야기하고 멀어져요.


  한국사람은 새로운 만화영화를 거의 못 지어내요. 그러나 한국사람은 일본이나 미국이 새로 지어내는 만화영화 밑그림을 아주 뛰어나게 그리지요. 손재주는 있는 한국사람이지만, 머리가 없는 한국사람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으로서 참 부끄러운 말이 될 텐데, 우리는 남이 일구어 놓은 보기 좋거나 그럴듯하구나 싶은 글이나 책에 휘둘리면서 그만 우리 이야기를 얕보거나 낮보는 삶을 보냈어요.


  우리한테 우리 이야기가 없는 채 다른 사람들 글이나 책을 읽으면 꽁무니 좇기에서 그쳐요. 우리한테 우리 이야기가 있는 채 다른 사람들 글이나 책을 읽어야 서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배움이란 어깨동무입니다. 글쓰기나 책읽기는 모두 어깨동무예요. 뛰어난 스승한테서 뭔가 배울 수는 없습니다. 훌륭한 작가한테서 뭔가 얻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 스스로 가르치고 배웁니다. 내가 나를 가르치고, 내가 나한테서 배우지요.


  스스로 곧게 설 적에 스스로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요. 스스로 고요히 설 적에 이웃을 고요히 바라볼 수 있어요.


  말이란 무엇일까요? 말이란, 사람이 사랑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숨결을 생각이라는 씨앗으로 살뜰히 속삭이면서 살림을 싱그러이 세우는 숨결이라고 할 만하지 싶어요.


 글은 우리 마음으로 씁니다. 살면서 쓰고, 즐겁게 쓰며, 꿈꾸며 씁니다. ‘삶·웃음·사랑’으로 글을 쓴다고 할 만해요. 살면서 쓰기에 ‘삶’이지요. 즐겁게 쓰기에 ‘웃음’이에요. 꿈꾸며 쓰기에 ‘사랑’입니다. 글을 쓰는 걸음을 살피면서 삶이랑 웃음이랑 사랑을 노래합니다.


종이에 얹은 글씨는

우리가 지은 꿈을

아로새긴 이야기


종이에 실은 그림은

우리가 나눈 사랑을

포근히 쓰다듬은 이야기


종이에 놓은 사진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살며시 적바림한 이야기


종이를 묶은 실은

너랑 나랑 잇는

즐거운 이야기 꾸러미


여기에 책 한 권


  저마다 바람이 되어 바람 같은 이야기를 노래하듯이 글을 쓰고 말을 한다면 매우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저마다 해님이 되어 햇살처럼 눈부시고 햇볕처럼 따뜻하며 햇빛처럼 맑게 이야기를 꿈꾸듯이 글을 쓰고 말을 한다면 더없이 사랑스러우리라 생각합니다. 스스로 하려고 들면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보면 모두 됩니다. 내가 나를 보지 않기 때문에 어느 것도 안 되기 마련이에요. 2017.7.6.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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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1. ‘각하·영부인’, ‘여사·씨’, ‘님’


  우리가 쓰는 말은 우리 삶을 나타냅니다. 아름답게 잘 쓰는 말이 넘실거린다면 우리 삶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거칠거나 딱딱한 말이 넘실거린다면 우리 삶이 거칠거나 딱딱하다는 뜻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이나 일본 말씨가 흘러넘쳤고, 신분이나 계급으로 삶을 가르던 조선 사회에서는 ‘여느 사람들 말’하고 ‘권력자와 지식인 말’이 뚜렷하게 갈렸어요.

  한국 사회를 살피면 해방 뒤로 민주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독재가 판쳤어요. 열 해 즈음 독재가 판치던 자리에는 군사독재가 치고 들어왔습니다. 군사독재는 스무 해가 지나고 서른 해가 가깝도록 우리 사회를 옭아매거나 짓밟았습니다. 드디어 군사독재에서 풀려났구나 싶었어도 민주 사회에 이르지 못했고, 살짝 민주 사회를 맛본다 싶더니 다시 예전처럼 권위로 윽박지르는 사회를 보내야 했어요.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마음 놓고 말할 자유’라든지 ‘독재자·권력자 눈치를 안 보고 글쓸 권리’를 누린 햇수는 아직 열 해조차 안 된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눈여겨보아야지 싶어요. 더군다나 한국 사회는 신분제 얼거리를 일제강점기 힘에 짓눌린 채 마감하고는 제국주의 서슬에 파묻혀 서른 해 남짓 보내야 했지요. 이런 서슬이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군사독재가 이어졌어요.

  이러한 사회 흐름을 엿본다면, 조선 사회에서는 ‘한문을 앞세운 글’이 ‘여느 사람들이 수수하게 쓰던 말’을 짓밟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하고 일본 한자말’이 ‘여느 사람들이 수수하게 쓰던 말’을 짓밟았는데, 해방 뒤에도 오랫동안 ‘조선 사회에서 중국을 섬기던 한자말’에다가 ‘일제강점기 일본 한자말’이 득시글거렸어요.

  한겨레신문은 1988년에 한글만 쓰기를 하고, 중앙일보는 1995년부터 한글만 쓰기를 합니다. 신문에서 ‘한글 쓰기’를 한 발자국도 대단히 짧아요. 이제 인터넷이나 신문이나 책이나 교과서에서 한자를 찾아보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어쩌다가 한 번쯤 드러날 뿐, 한자를 쓸 일이 없어요. 외려 영어를 아무 데에나 마구 쓰지요.

  한국 사회는 한국사람 스스로 새롭게 세우거나 일으킨 물결이 아직 매우 얕습니다. 한국사람이 스스로 말을 세운다거나 일으킨 적은 거의 없다시피 해요. 이러다 보니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이 뒤죽박죽이기 일쑤입니다. 첫째 중국 한자말이 있고, 둘째 일본 한자말이 있으며, 셋째 중국·일본 한자말 사이에서 불거진 한국 한자말이 있는데다가, 일본 말씨하고 번역 말씨가 있고, 여기에 영어가 있지요. 한국말은 여기에 치이고 저기에 밀리며 제자리를 아직 못 찾습니다.

  사람을 가리키는 자리에서 쓰는 ‘부름말(호칭)’도 아직 제자리를 못 찾아요. 여러 가지 부름말은 한국 사회에서 너무 빠르게 생겼다가 너무 빠르게 사라집니다. ‘각하’라는 한자 부름말은 기껏 쉰 해 즈음 무시무시하게 쓰이다가 이제는 아주 저물어 버립니다. ‘영부인·여사’ 같은 한자 부름말을 한국사람이 쓴 지도 얼마 안 됩니다. 처음에 이런 한자 부름말을 쓴 사람이 드물기도 했고, 친척이나 친구 사이에 쓸 부름말을 거의 모두 조선 사회 한자에서 따오려고 하다 보니, 부름말이 너무 어렵다고 느끼는 분이 많고, 앞으로 서른 해나 쉰 해쯤 뒤에는 웬만한 부름말은 모두 바뀔 수 있으리라 봅니다.


(표준국어대사전,2017)
영부인(令夫人) :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
여사(女史) : 1. 결혼한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 2.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 3. [역사] 고대 중국에서, 후궁을 섬기어 기록과 문서를 맡아보던 여관(女官)
씨(氏) : 1. 같은 성(姓)의 계통을 표시하는 말 2.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 공식적·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가 아닌 한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로,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 3.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삼인칭 대명사. 주로 글에서 쓰는데, 앞에서 성명을 이미 밝힌 경우에 쓸 수 있다
 :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씨’보다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서로 어떤 부름말을 썼을까요? 옛 조선이나 부여에서는 서로 어떤 부름말을 썼을까요? 5000해를 더 지나서 1만 해 앞서는 어떤 부름말을 썼을까요?

  오랜 부름말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는 굳이 오랜 부름말을 찾아내거나 알아내어 쓰기보다는, 우리 입이나 눈이나 귀나 손에 익숙하면서 으레 잊은 아름다운 부름말을 새삼스레 돌아볼 수 있으면 한결 나을 만하지 싶어요.

  한국 사회가 아직 민주도 평등도 평화도 아닐 적에, 정치 권력자나 지도자는 ‘그들 권력자나 지도자’를 ‘여느 사람들’하고 갈라 놓으면서 ‘아주 높은 곳’에 있다는 뜻으로 ‘한자말’로 따로 부름말을 붙이려 했습니다. 이런 부름말이 바로 ‘각하·영부인’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제 조금이나마 더 민주하고 가깝게 가기를 바란다면, 여기에 평등과 평화를 퍼뜨리려는 길을 걸으려 한다면, 낡은 권위주의 부름말은 하나하나 살펴서 떨굴 만하지 싶어요.

  서양에서는 이런 부름말을 놓고 진작에 ‘갈무리가 끝났’어요. 한국에서는 이런 부름말을 놓고 아직 한 번도 제대로 ‘갈무리를 해 보자고 하는 이야기’조차 없었지요. 한때는 ‘조선 신분 사회 것’을 그대로 쓰려 했고, 한때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것’을 그대로 쓰려 했다가, 한때는 군사독재자가 멋대로 퍼뜨리려 하던 말을 써야 했습니다.


(문세영 조선어사전,1940)
영부인(令夫人) : 남의 안해의 존칭
여사(女史) : 1. 시문·서화에 재주가 있는 여자 2. 기혼녀의 성명 아래에 존재하여 쓰는 말
씨(氏) : 사람의 성 또는 이름 아래에 붙이어 존재를 표하는 말
님 : 남의 성명 또는 어떠한 명사에 붙이어 존경의 뜻을 표하는 말


  사회가 평등하면서 민주와 평화로 나아가려는 길이라면 ‘한자 부름말’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씨’를 알맞게 쓸 만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대통령 문재인 씨”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왜 “청소부 김씨”나 “노동자 박씨”나 “농사꾼 최씨”라고는 쓰면서 “대통령 문씨”라고는 못 쓸까요?

  대통령은 ‘사람을 밟고 올라선 사람’일까요? 가장 높은 권력자이니, 여느 사람들보다 우러러야 하는 말씨를 써야 할까요? 가장 높은 권력자를 나타내는 부름말은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있지 않나요?

 대통령 문재인 . 문재인 대통령
 농사꾼 김이박 . 김이박 농사꾼

  굳이 ‘씨’를 안 붙이고 “대통령 문재인”이나 “문재인 대통령”이라 하면 됩니다. 나중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라면 “문재인 씨”라고 수수하게 쓸 만할 테고요. 서울시장을 맡는 분은 “서울시장 박원순”이나 “박원순 서울시장”인데, 이분이 서울시장 일을 그만둔다면, 그때에는 “박원순 씨”가 되어야 할 테지요. 한국 사회가 민주와 평등과 평화로 나아간다면 말이지요.


(한글학회 큰사전,1947/1957)
영부인(令夫人) : 남의 부인을 높이어 일컫는 말
여사(女史) : 1. 여자 학자, 또는 여자 예술가 2. 시집간 여자를 높이는 말
씨(氏) : 사람의 성이나 또는 이름 밑에 붙이어 존대하는 뜻을 나타내는 말
 : 사람의 일컬음 밑에 붙이어 높임을 나타내는 말


  194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남북녘 여러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영부인·여사’는 남녘에서만 쓰는 부름말인 줄 알 수 있습니다. 북녘에서는 이런 부름말을 안 씁니다. 아무래도 북녘 사회는 좀 다르기 때문일 텐데, 우리가 흔히 쓰면서 우리가 흔히 잊는 아름다운 ‘높임 부름말’이 있다는 대목을 헤아려 보기를 바라요.

  바로 ‘님’이 있어요.

  ‘임금님’이라 하던 때에 쓰던 ‘님’입니다. 이웃 사이에서 ‘이웃님’이라고도 해요. 동무 사이에서 ‘동무님’이라고 하지요. ‘꽃님’이나 ‘풀님’이나 ‘별님’이나 ‘해님’처럼, 사람 아닌 것한테도 높이려는 뜻을 나타내 주지요.

  대통령 문재인 님
  총리 아베 님
  소설가 하루키 님
  시인 윤동주 님

  ‘대통령·총리·소설가·시인’ 같은 부름말이 있으면 이 부름말만 쓰면 되어요. 애써 뭔가 더 붙여 보고 싶다면 이때에는 ‘님’을 붙일 만합니다. 대통령하고 함께 살림을 짓는 곁님을 두고는 어떤 부름말을 쓰면 좋을까요?

  이때에는 “문재인 님”이라 하듯 “김정숙 님”이라 하면 됩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심상정 후보가 나오기도 했는데요, 심상정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심상정 후보 곁님을 두고는 “이승배 님”이라 하면 되어요.

  한국 사회는 부름말에서 남녀를 따로 가리지 않는다는 대목을 눈여겨보면 좋겠어요. ‘이이·저이·그이’나 ‘이분·저분·그분’은 남녀를 따로 안 가립니다. 남녀를 아우르는 부름말이에요.
  민주와 평등과 평화를 헤아리면서 새롭게 나아가려는 한국 사회라면, 이제 부름말 하나를 놓고 더 깊으면서 넓고 살가운 한국 살림을 이루는 길을 찾아보아야지 싶습니다. 위아래를 가르지 않는, 그러니까 신분 사회를 벗어던지는 길을 걸어야지요. 높낮이를 따지지 않는, 그러니까 계급 틀을 내버리는 길을 걸어야지요.


(북녘 조선말대사전,2007)
영부인(令夫人) : x
여사(女史) : x
씨(氏) : 1. 사람의 성이나 이름밑에 붙이여 존칭의 뜻을 나타내는 말 2. (대명사로 쓰이여) ‘그 사람’의 뜻으로 좀 점잖게 이르는 말
 : 1. ‘사랑하여 그리워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2. (뒤붙이로 쓰이여 사람을 이르는 명사말뿌리에 붙어) ‘존경을 받는 분’이나 말하는 사람이 말받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존대하는분’이라는 뜻


  인터넷에 있는 수많은 모임이나 동아리에서는 저마다 ‘-님’을 붙여서 부릅니다. 모임지기도 ‘님’이고, 여느 회원도 누구나 ‘님’입니다. 누리모임에서 쓰는 이름에 ‘님’을 붙여서 불러요. 우체국이나 공공기관에서도 한때 ‘씨’라는 부름말을 흔히 쓰다가 요새는 ‘님’이라는 부름말을 흔히 써요. 때때로 ‘고객님’처럼 틀린 부름말을 쓰기도 합니다만, ‘아무개 님’이라고 하는 부름말은 서로가 서로를 높이면서 헤아리는 말씨로 자리를 잡아요.

  대통령이든 대통령 곁님이든 모두 ‘님’이면 넉넉하리라 생각합니다. 서슬 퍼렇던 독재나 권력이나 신분이나 계급 같은 멍에와 허울을 모두 벗어던지고 사이좋게 ‘님’이 될 수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곁님’이라는 부름말을 지어서 써 보곤 합니다. 남녀나 여남이라는 틀을 넘어설 수 있고, 서로 얼마나 가까이에서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보살피려고 하느냐 하는 마음을 이 부름말로 나타낼 수 있으리라 여기면서 ‘곁님’을 씁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대통령 곁님 아무개” 같은 말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즐거우며 아름답고 넉넉한 평등·민주 ·평화로 나아간다면, 대통령 언저리에서도 이렇게 수수한 부름말을 곱다시 맞아들여 쓰고,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이런 ‘착한’ 부름말을 사이좋게 쓸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2017.5.30.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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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9. ‘서울 표준말’에 밀리는 시골말



  이 봄에 곳곳에서 풀이 돋습니다. 이 풀을 놓고서 싫어하는 분이 있고, 반기는 분이 있어요. 지난날에는 봄이 되어 들이며 숲이며 풀이 돋으면 짐승을 먹이기에 좋다고 여겨서 반겼을 테지만, 요사이는 소먹이도 나물도 아닌 잡풀로 여겨서 꺼리기 일쑤입니다.


  새봄에 마당에서 돋는 솔을 즐겁게 훑습니다. 이 솔로 ‘솔겉절이’를 마련하고 ‘솔부침개’를 합니다. 솔을 날로 씹으면 알싸하게 감도는 맛이 싱그럽습니다. 부침개를 하면 여러 푸성귀하고 얼크러지는 냄새가 향긋합니다.


  새봄에 솔도 훑지만 찔구도 훑습니다. 이 찔구로는 ‘찔구무침’을 합니다. 새봄이 아니면 도무지 맛볼 수 없는 찔구무침은 사오월에 남달리 누리는 기쁜 봄밥이라 할 만합니다. 봄이 베푸는 선물이라고 할까요.


  전라도에서는 ‘솔·찔구’라 하고, 서울에서는 ‘부추·찔레’라 합니다. 새봄에 누리는 나물을 놓고, 또 풀이나 꽃을 놓고, 퍽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을 놓고 나라 어디에서나 모두 알아듣기 좋도록 ‘서울 표준말’을 세우지요.


  서울 표준말은 어느 모로 본다면 서로서로 도움이 되는 말일 수 있고, 시골사람한테는 아예 새롭게 배워야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며 살림하는 사람으로서는 굳이 서울 표준말을 알아야 할 일이 없거든요. 집에서 쓰는 말이나 마을에서 쓰는 말을 구태여 서울 표준말로 해야 하지 않을 테고요.


  ‘시기상조(時機尙早)’는 “어떤 일을 하기에 아직 때가 이름”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아직 시기상조이다”라 하면 겹말이에요. ‘시기상조’ 같은 한자말을 쓰는 일은 잘못이 아니나, 이런 말을 쓰려면 말뜻을 제대로 살펴서 올바로 써야겠지요? 더 생각할 수 있다면 굳이 ‘시기상조’를 안 쓰고 “아직 이르다”나 “아직 때가 아니다”라 해 볼 만합니다.


  ‘일조일석(一朝一夕)’은 “하루의 아침과 하루의 저녁이란 뜻으로, 짧은 시일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요. 이 같은 한자말도 얼마든지 쓰고 싶으면 쓸 노릇이지만 ‘하루아침’이라든지 “하루 만에”나 ‘곧·곧장·곧바로’ 같은 낱말을 알맞게 쓸 수 있습니다. “일조일석으로는 할 수 없어요” 같은 글월이라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할 수 없어요”나 “서둘러서는 할 수 없어요”나 “다그쳐서는 할 수 없어요”처럼 새롭게 가다듬어 볼 만합니다.


윤(潤) : = 윤기(潤氣)

윤기(潤氣) : 반질반질하고 매끄러운 기운

반질반질 : 1. 거죽이 윤기가 흐르고 매우 매끄러운 모양


  ‘윤(潤)’이라고 하는 한자를 쓰는 분이 있습니다. 이 한자를 “빛날 윤”으로 읽기도 합니다. 한자 새김처럼 ‘윤·윤기’는 빛이 나는 모습을 가리키고, 한국말로는 ‘반질반질’이에요.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반질반질’을 ‘윤기’로 풀이하고, ‘윤기’를 ‘반질반질’로 풀이합니다. 바보스러운 돌림풀이입니다. 이 같은 바보스러운 돌림풀이는 우리가 늘 쓰는 말을 제대로 못 살핀 탓에 불거집니다. 한국말하고 한자말은 ‘다른 말’인 줄 깨닫지 못한 탓에 사전을 엉망으로 엮지요. 말풀이를 다음처럼 고쳐야 알맞으리라 봅니다.


윤(潤) : → 반질반질

윤기(潤氣) : → 반질반질

반질반질 : 1. 거죽에 빛이 나고 매우 매끄러운 모습


  ‘반질반질’하고 비슷한 ‘번지르르·반들반들’이 있습니다. 이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살피면 ‘윤’이라는 한자로 풀이를 해요. 이 같은 대목도 고쳐야 할 테지요.


광(光) : 1. = 빛 2. 물체의 표면에 빛이 반사되어 매끈거리고 어른어른 비치는 촉촉한 기운

빛 : 4. 찬란하게 반짝이는 광채


  ‘윤’하고 비슷한 ‘광(光)’이라는 한자가 있어요. “구두를 광이 나게 닦는다”고들 말합니다. 이 ‘광’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빛’입니다. “구두를 빛이 나게 닦는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또는 “구두를 반질반질 닦는다”나 “구두를 번쩍거리게 닦는다”라 말할 수 있어요.


자르다 : 3. 남의 요구를 야무지게 거절하다

거절하다(拒絶-) : 상대편의 요구, 제안, 선물, 부탁 따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치다

물리치다 : 3. 거절하여 받아들이지 아니하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자르다’를 ‘거절하다’로 풀이하고, ‘거절하다’를 ‘물리치다’로 풀이하는데, ‘물리치다’는 다시 ‘거절하다’로 풀이합니다. 돌고 도는 뜻풀이랍니다. 사람들은 “딱 잘라 거절하지 말고” 같은 말을 흔히 쓰기도 하는데, 이 말씨는 겹말이에요. ‘거절하다’라는 한자말은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만, 이 한자말이 어떤 뜻인지 찬찬히 안 살핀 탓에 겹말을 쓰고 말아요.


  더 헤아릴 수 있다면 “딱 자르지 말고”나 “딱 물리치지 말고”처럼 수수하게 쓸 만합니다. “손사래를 치지 말고”나 “고개를 젓지 말고”라 해 볼 수 있어요. 뜻하고 느낌을 고이 살펴서 수수하게 쓰면 겹말이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른도 아이도 곧장 알아들을 수 있어요.


  ‘추가(追加)’라는 한자말을 살펴봅니다. “나중에 더 보탬”을 뜻하고, 한국말사전에는 “≒ 추증(追增)”처럼 비슷한말을 싣습니다. ‘추증’은 “= 추가(追加)”로 풀이합니다. ‘추증’은 굳이 쓸 일이 없겠지요. “더 보탬”을 뜻한다는 ‘추가’이니 “추가로 더 주다”처럼 말하면 겹말이에요. 쉽고 수수하게 “더 주다”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한국말사전은 ‘추증’ 같은 한자말을 괜히 실어서 한자말 숫자를 불립니다. 이밖에도 한국말사전에 ‘추가(秋稼)’라는 한자말을 “[농업] = 추수(秋收)”로 풀이하며 실어요. ‘가을걷이’라는 낱말이 있는데 구태여 ‘추가·추수’ 같은 한자말을 써야 할는지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안 써도 되거나 쓸 만한 자리가 없는 애먼 한자말을 사전에 왜 실었는지를 곰곰이 따져야지 싶어요.


  우리는 한국말사전에 토박이말이 적고 한자말이 많은 듯 쉽게 생각하지만, 이는 썩 올바르지 않습니다. 막상 한국말사전을 찬찬히 살피면 ‘追增’이나 ‘秋稼’처럼 쓰임새조차 없는 한자말이 대단히 많습니다. ‘구조’라고 하면 어떤 한자말이 떠오를까요? 한국말사전에는 ‘얼개’를 뜻하는 ‘構造’나 ‘살리기’를 뜻하는 ‘救助’뿐 아니라 ‘九條·久阻·口調·狗蚤·救助·舅祖·鉤爪’ 같은 한자말을 실어요. 이런 ‘구조’를 듣거나 보거나 쓸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狗蚤’는 ‘개벼룩’이라는데, ‘개벼룩’이라 안 하고 ‘구조’라 할 까닭이 없어요. ‘鉤爪’는 ‘갈고랑이’라는데, ‘갈고랑이’라 안 하고 ‘구조’라 할 까닭도 없습니다.


  한국말을 담는 그릇인 사전이 제구실을 안 하고 엉뚱한 한자말을 마구 싣느라, 정작 시골말을 찬찬히 살펴서 알려주는 일은 얼마 못 합니다. 마치 한국말이라는 보금자리에 한자로 된 낱말이 대단히 많은 듯 부풀리는 꼴이 되기까지 합니다. 사전이나 교과서는 표준 서울말로 적어야 좋다고 할 터이나, 고장마다 다 다르면서 즐겁게 쓰는 수많은 말을 고루 살펴서 갈무리하지 않는다면 한국말은 제대로 숨을 쉬기 어렵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고장마다 서로 아끼는 마음을 북돋우자면, 서울에서는 시골말을 가르쳐 주고, 전라도에서는 경상말을 가르쳐 주며, 경상도에서는 전라말을 가르칠 수 있어야지 싶어요. 먼저 말부터 즐겁게 살피고 알 적에 서로 마음을 넉넉히 나누는 길을 틀 테니까요. 이제는 ‘서울 표준말’을 내려놓고 ‘서로 아끼며 싱그러이 숨쉬는 오래되고 새로운 말’을 바라볼 수 있기를 빕니다. 2017.4.18.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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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8. 봄내음 피어나는 말을 해 보기



  저는 ‘날조(捏造)’라는 낱말을 안 씁니다. 한자말이기 때문에 안 쓰지 않습니다. 이 낱말을 들으면 못 알아듣는 이웃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낱말 ‘날조’를 쓰면 아이들이 못 알아들어요. 저는 제 둘레에서 못 알아들을 만한 낱말을 구태여 쓰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쓰는 낱말은 ‘꾸미다’나 ‘거짓’입니다. “날조한 이야기”보다는 “꾸민 이야기”나 “거짓 이야기”라고 해야 둘레에서 쉽게 알아들을 만하다고 느껴요. 때로는 “속인 이야기”나 ‘속임·속임수’라고 해 볼 만할 테고요.


  저는 ‘선명(鮮明)’이라는 낱말도 안 써요. 이 낱말도 한자말이라 안 쓰지 않아요. 이 낱말을 못 알아듣는 어린이 이웃이 많아요. 제가 쓰는 낱말은 ‘또렷하다’나 ‘뚜렷하다’예요. 때로는 ‘환하다’를 쓰고, 어느 때에는 “잘 보이다”라고 말해요. 어느 때에는 ‘산뜻하다’나 ‘맑다’ 같은 말을 씁니다.


  찬찬히 헤아리면 이모저모 재미나게 쓸 만한 낱말이 아주 많습니다. 많다고 할 적에는 ‘아주’라는 낱말뿐 아니라 ‘매우’라든지 ‘무척’이라든지 ‘몹시’가 있어요. ‘퍽’이나 ‘꽤’가 있어요. ‘참’이나 ‘참말’이나 ‘참으로’나 ‘참말로’도 있지요. ‘엄청나다’나 ‘어마어마하다’라든지 ‘대단히’도 있고요.


  때로는 “끝없이 많다”나 “수없이 많다”고 할 만해요. “그지없이 많다”라든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라고 해도 재미있어요. “셀 수 없이 많다”나 “까마득히 많다”고 해 볼 수도 있고요. ‘되게’ 같은 말을 쓸 만하고, 전라말로 ‘허벌나게’를 쓸 수 있지요.


  우리가 쓸 말이란 우리 생각을 우리가 스스로 북돋울 만한 말이라고 느낍니다. 이냥저냥 뜻만 알아듣도록 하는 말이 아니에요. 마음을 싣고 생각을 실으면서 말 한 마디마다 이야기를 얹어서 하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이런 이야기 가운데 ‘전설’이 있어요. 흔히 “옛날부터 내려온 전설”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전설’이란 무엇일까요? 어른들 사이에서는 이 낱말이 그리 안 어려울 만하지만, 아이들한테는 ‘전설’조차 뜻밖에 퍽 어렵거나 낯선 낱말이곤 합니다.


전설(傳說) : 1. 옛날부터 민간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옛날부터 이어서 내려오는 이야기를 가리키는 ‘전설’이라고 하는군요. 그러니까 ‘옛날이야기 = 전설’이라고도 할 만해요.


옛날이야기 :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자, 한번 생각해 봐요. 한국말사전에서 살핀 뜻풀이는 ‘전설·옛날이야기’ 모두 거의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낱말을 잘 고르거나 살피면서 쓰면 좋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옛날 옛적부터 ‘옛날이야기’나 ‘옛이야기’라는 낱말을 고이 물려받으면서 썼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를 한자로 씌워서 ‘전설’을 함께 쓴 셈이지 않을까요? 시골에서 흙을 가꾸며 살던 수수한 사람들은 누구나 ‘옛날이야기·옛이야기’라는 낱말을 썼으나, 한문책을 읽거나 쓰던 이들은 이 수수한 한국말을 구태여 ‘傳說’이라는 한자 옷을 입힌 셈이지 싶어요. ‘傳說 = 내려온(傳) + 이야기(說)’인 얼거리예요.


  ‘천성적(天性的)’은 “타고난 성품의 성격을 지닌”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천성적’하고 ‘타고난’ 사이에서 어떤 말을 즐겁게 쓰면서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할까요? 이 땅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어떤 말을 물려받을 적에 즐거울까요?


  ‘혈혈단신(孑孑單身)’은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로운 홀몸”을 뜻한대요. 그러면 우리는 ‘혈혈단신’하고 ‘홀몸’ 가운데 어느 낱말을 골라서 쓰면 즐거울까요? 그냥 둘 다 쓰면 될까요? 아니면 ‘홀몸’을 쓰면서 ‘혼잣몸’이나 ‘외톨이’나 ‘외돌토리’나 ‘외톨박이’ 같은 여러 가지 한국말을 두루 살필 수 있을까요?


외롭다 : 홀로 되거나 의지할 곳이 없어 쓸쓸하다

쓸쓸하다 : 외롭고 적막하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외롭다’하고 ‘쓸쓸하다’를 엉터리로 풀이해 놓아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엉터리 말풀이는 수십 해가 흘러도 안 바뀌어요. 한국말을 살피는 학자를 비롯해서, 한국말사전을 엮는 사람에다가, 대학 교수나 전문가조차 ‘외롭다·쓸쓸하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는지 생각조차 안 하지 싶어요.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이렇게 흔하거나 수수하거나 쉬운 한국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안 찾아보곤 합니다. 그냥 말을 하고 그냥 글을 써요. 우리 스스로 말뜻을 제대로 안 짚는 셈이에요. 이러다 보니 우리 스스로 한국말사전이 엉터리인 줄 알아채지 못하고, 나무라지 못해요. 한국말과 한국말사전을 슬기롭게 갈고닦거나 바로세우도록 이끌거나 북돋우지 못하고 맙니다.


세분화(細分化) : 사물이 여러 갈래로 자세히 갈라짐. 또는 그렇게 갈라지게 함

세분하다(細分-) : 사물을 여러 갈래로 자세히 나누거나 잘게 가르다

나누다 : 1. 하나를 둘 이상으로 가르다 2. 여러 가지가 섞인 것을 구분하여 분류하다

가르다 : 1. 쪼개거나 나누어 따로따로 되게 하다


  봄날에 봄내음이 퍼지는 말을 써 볼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말을 쓰고, 어른하고 아이가 서로 손을 맞잡으면서 빙그레 웃음꽃을 지필 만한 말을 쓰기를 비는 마음이에요.


  어른들은 ‘세분화·세분하다’ 같은 말을 곧잘 쓰는데요, 이런 말을 아이들한테 들려주거나 가르쳐야 할는지, 또는 어린이책이나 교과서에 이런 말을 넣어야 할는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나누다’라는 낱말이 있고, ‘가르다’라는 낱말이 있어요. 생각을 살찌우는 바탕말을 쓸 노릇이요, 이러면서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다스려야지 싶어요.


  그런데 ‘나누다·가르다’도 한국말사전 말풀이는 엉터리예요. 돌림풀이가 되거든요. 아이들이 ‘나누다·가르다’가 어떤 뜻인지 제대로 알아보려고 한국말사전을 들추다가 이런 돌림풀이를 보면 어떤 마음이 될까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남기거나 보여주는 말살림일까요?


  가장 쉬운 말이 외려 가장 어렵게 풀이되고 마는 한국말사전이에요. 가장 수수한 말을 되레 가장 엉터리로 다루고 마는 한국말사전이고요. 이런 얼거리라면 어른이나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말을 슬기롭게 가르치거나 물려주기란 참 팍팍하거나 메마르거나 고단하거나 어지러운 노릇입니다.


  가장 쉬운 말부터 참말 가장 쉽게 다루면서 슬기롭게 쓰도록 이끌 노릇입니다. 가장 수수한 말부터 참으로 가장 수수하면서 사랑스레 갈고닦아서 빛내도록 북돋울 노릇이에요.


  봄은 봄입니다. 예부터 시골 흙지기는 ‘봄맞이꽃’을 살폈고 ‘봄나물’을 했습니다. 한자를 쓰던 이들은 ‘立春大吉’ 같은 글씨를 붓으로 척척 써서 붙였습니다. 자, 이 ‘봄맞이글’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해요. 봄이 되어 기쁜 기운이 찾아들기를 바란다면 “기쁜 봄” 같은 글씨를 쓸 수 있어요. “고운 봄”이나 “사랑 봄” 같은 글씨를 써도 돼요. “새봄 기쁨”이나 “기쁜 새봄” 같은 글씨도 재미있고 뜻있어요. “새로운 봄”이나 “해맑은 봄”이나 “따스한 봄” 같은 글씨도 재미나고 뜻깊고요.


  다 다른 고장에서 다 다른 사랑을 지펴서 다 다르면서 아름답게 ‘봄맞이글’을 써 볼 수 있기를 빕니다. 또는 ‘봄글’을 써 보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봄노래’를 지어서 불러 볼 만합니다. “고운 봄빛”이랑 “너른 봄내”랑 “향긋한 봄”이랑 ‘봄이야기’랑 ‘봄바람’이랑 ‘봄꽃잔치’랑 ‘봄나물밥’을 두루 헤아리는 하루입니다. 2017.3.18.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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