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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7. 쉬운 말은 쉽게 써야 아름다워요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가지를 해서 두 가지로 좋다고 할 적에 씁니다. 두 가지로 좋은 일을 가리키면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고도 해요. 하나만 좋지 않고 하나를 더 얻기에 ‘덤’이라는 말도 써요. 두 가지로 좋을 적에는 ‘더’ 좋은 셈이니 “더 좋다”고 쉽게 말할 만합니다.

  ‘만고불변(萬古不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안 바뀐다고 할 적에 씁닏다. 오랫동안 안 바뀌니 “오랫동안 안 바뀐다”고 할 만하며, ‘한결같다’고 할 만하지요. “늘 그대로”라든지 “언제나 그대로”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시청청(四時靑靑)’이라는 글을 쓰는 분이 있어요. 말뜻은 “네 철 푸르다”예요. 이 말뜻처럼 누구한테나 쉽게 “네 철 푸름”처럼 쓸 수 있고, ‘늘푸른나무’라는 이름에서 보기를 얻어 ‘늘푸르다’처럼 새롭게 한국말을 지을 만해요.

  어느 말을 골라서 쓰느냐는 어느 생각을 마음에 품느냐라 할 만합니다. 어떤 말을 가려서 쓰느냐는 우리를 둘러싼 이웃하고 어떤 생각을 어떤 마음으로 나누려 하느냐라 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비닐로 엮어서 남새를 키우면 ‘비닐집’입니다. 이를 놓고 굳이 영어를 끼워넣어 ‘비닐하우스’라고도 합니다. ‘비닐’을 빼고 ‘하우스’라고 하면 시골에서는 비닐로 남새를 키우는 곳을 가리킨다고 여기기도 해요. 그런데 ‘하우스(house)’는 영어로 그냥 ‘집’일 뿐이에요. 영어라고 해서 ‘농사를 밝히는 전문말’이 될 까닭이 없을 텐데, 그저 ‘집’을 뜻하는 영어를 퍽 아무렇지 않게 쓰는 얼거리입니다. 글잣수로 보아도 ‘비닐집’ 석 자요 ‘하우스’ 석 자예요.

 필요하다(必要-) : 반드시 요구되는 바가 있다
 요구되다(要求-) : 받아야 될 것이 필요에 의하여 달라고 청해지다

  초등학교 교과서나 동화책에도 곧잘 나오는 한자말 ‘필요’가 있어요. 이 낱말을 꼭 써야 할는지, 제법 쓸 만한지, 굳이 안 써도 될 만한지 생각해 보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한국말사전을 뒤적여 말뜻을 살피는 분은 있을까요?

  우리 한국말사전은 ‘필요’를 ‘요구’라는 한자말을 써서 풀이하고, ‘요구’는 ‘필요’라는 한자말을 써서 풀이해요. 자, 이런 돌림풀이를 보면서 두 한자말을 얼마나 잘 헤아리거나 가늠할 만할는지요.

  “그 책이 필요해” 하고 말해야 할는지, 아니면 “그 책이 있어야 해” 하고 말하면 될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하나 더 살피면, ‘필요 = 반드시 있어야 함’을 가리키기에 “꼭 필요해”나 “반드시 필요해”라 하면 겹말이에요.

 일별(一瞥) : 한 번 흘낏 봄
 흘깃 : 가볍게 한 번 흘겨보는 모양
 흘낏 : 가볍게 한 번 흘겨보는 모양. ‘흘깃’보다 센 느낌을 준다
 흘겨보다 : 흘기는 눈으로 보다

  어느 분이 ‘일별’이라는 한자말을 쓰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국말사전부터 뒤적였습니다. ‘일별’은 “흘낏 봄”을 뜻한다 하고 ‘흘낏’은 ‘흘겨보다’를 나타낸다고 해요. 그러니까 ‘일별하다 = 흘겨보다’인 셈이에요. ‘일별’이라는 말을 쓰는 분은 한국말을 어느 만큼 헤아렸을까요? 우리는 서로 어떤 말을 주고받을 적에 생각을 환하게 나누면서 마음을 즐거이 밝힐 만할는지요.

 가다 : 1.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이동하다
 이동하다(移動-) : 1. 움직여 옮기다. 또는 움직여 자리를 바꾸다
 옮기다 : 어떤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여 자리를 바꾸게 하다

  ‘가다’는 아주 쉬운 말이에요. 아마 ‘가다’를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해요. 그렇지만 아주 쉬운 낱말이면서 뜻이나 쓰임새가 매우 넓고 깊은 낱말인 ‘가다’예요. 이런 한국말 ‘가다’를 살피면 ‘이동하다’로 풀이해요. ‘이동하다’는 “움직여 옮기다”로 풀이하는데, ‘옮기다’는 “움직여 자리를 바꾸게 하다”로 풀이하기에 겹말풀이입니다.

  아주 쉽고 흔한 낱말일 텐데, 아주 쉽게 겹말풀이랑 돌림풀이로 다루고 말아요. 아마 한국사람은 이런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안 찾아볼 테지만, 한국말을 처음 익히는 어린이라든지 외국사람은 이처럼 쉬운 낱말부터 찾아볼 테니 어리벙벙하리라 느낍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 있어요.

  한번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자, 이리로 오셔요”하고 “자, 이리로 이동하셔요” 가운데 어느 말을 쓸 적에 쉬우면서 잘 알아들을 만할까요? 어린이하고 외국사람한테는 어느 말을 써야 알맞을까요?

  더 생각해 본다면, 어린이하고 외국사람한테 알맞게 쓸 쉬운 말을 어른 사이에서도 써야 아름답지 않을까요? 어른만 보더라도 전문가나 기술자 사이에서도 서로 쉽고 또렷하면서 즐겁게 말을 골라서 쓸 적에 아름답지 않을까요?

 사실(事實) : 1.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
 실제(實際) : 사실의 경우나 형편
 참 : 1. 사실이나 이치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것
 어긋나다 : 기대에 맞지 아니하거나 일정한 기준에서 벗어나다

  “사실 그렇지 뭐”나 “사실이 뭐야?”처럼 ‘사실’을 꽤 흔히 씁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사실’을 살피면 ‘실제’라는 한자말로 가야 합니다. 다시 ‘실제’를 살피면 ‘사실’이라는 한자말로 갑니다. 이 또한 돌림풀이예요. 자, 그러면 생각해 볼 노릇이에요. ‘사실’은 뭐고 ‘실제’는 뭘까요?

  두 한자말 사이에서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으니 한국말을 생각해 봅니다. ‘참’이라는 낱말을 떠올리려 합니다. ‘참’을 찾아보니 “사실에 어긋남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고 풀이해요.

  뜻으로 살피니 ‘사실·실제’라는 한국말은 ‘참’하고 맞물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참 그렇지 뭐 ← 사실 그렇지 뭐”나 “참이 뭐야(참말 뭐야·뭐가 맞아·뭐가 참이야)? ← 사실이 뭐야?”처럼 쓰면 되는구나 하고 짚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 참’이요 ‘실제 = 참’인 인 줄 알아챌 수 있어요.

 선수(先手) : 1. 남이 하기 전에 앞질러 하는 행동 2. 먼저 손찌검을 함
 먼저 : 시간적으로나 순서상으로 앞선 때

  남이 하기 앞서, 그러니까 ‘먼저’ 할 적에 “선수를 치다” 같은 말을 씁니다. “먼저 선수를 치다”라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선수를 치다 = 먼저 손을 쓰다”예요. “먼저 선수 쳤을 때”라고 하면 겹말입니다. 입에 익고 손에 익고 귀에 익다 보니 겹말이더라도 그냥 쓰는 분이 있어요. 오랫동안 어느 말투에 익숙한 나머지 새롭게 생각을 가다듬어 새로운 말을 짓지 못하는 분이 있고요.

  “먼저 선수를 치다”가 겹말이로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데에서 그치지 말고 더 생각해 봐요. ‘선수’는 ‘앞손’이나 ‘먼젓손‘처럼 새말을 지어서 손질할 수 있어요. 앞손이 있으면 ‘뒷손’을 나란히 써 볼 수 있을 테고요. 그러면 ‘옆손’도 있을 테지요. ‘이웃돈·동무손’을 떠올릴 수 있어요. ‘도움손·사랑손·나눔손’ 같은 말도 구슬처럼 꿰어 볼 만해요. 여기에 또 어떤 손을 그리면 즐거울까요?

  어려운 말을 쓰려고 하면 외워야 합니다. 외워서 쓰는 어려운 말은 딱딱합니다. 딱딱한 말은 새로운 생각을 못 품습니다. 새로운 생각을 못 품으면서 마치 전문 지식인 듯 자리를 지키려 해요. 쉬운 말은 외우지 않습니다. 쉽게 쓰며 삶에 녹아들어요. 삶에 녹아드니 저절로 가지를 쳐서 새말을 짓는 생각으로 뻗어요. 새말을 즐겁게 짓다 보면 말·넋·삶이 모두 곱게 피어납니다. 쉬운 말을 쉽게 쓸 적에 아름다운 까닭이지요. 쉬운 말은 모든 새로운 생각을 지피는 바탕이에요. 2017.2.15.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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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6. 우리는 한국말을 어떻게 배울까



  ‘두껍다’하고 ‘두텁다’는 비슷한 듯하지만 다른 낱말입니다. 두께나 켜를 가리킬 적에는 ‘두껍다’를 쓰고, 마음이나 사랑이나 믿음을 가리킬 적에는 ‘두텁다’를 써요. 종이는 두껍고, 믿음은 두텁습니다. 책이 두껍고, 둘 사이가 두텁습니다. ‘두껍다’하고 비슷하게 ‘두툼하다·도톰하다’를 써요. ‘두텁다’가 큰말이라면 ‘도탑다’는 여린말이 될 테고요. ‘두껍다·두툼하다·도톰하다’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두께나 켜를 가리킬 적에 쓰고, ‘두텁다·도탑다’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이나 숨결이나 사랑이나 느낌을 나타낼 적에 써요.


  어린이한테 이 낱말을 가르치기는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어쩌면 어려울 수 있어요. 어른 가운데 ‘두껍다·두텁다’를 헷갈리며 잘못 쓰는 분이 꽤 많거든요.


  그러나 ‘두껍다·두텁다’를 잘 가누거나 살피는 어른도 많아요. 어릴 적부터 둘레 어른한테서 제대로 배워 슬기롭게 쓸 줄 안다면 잘못 쓰는 일이 없어요.


  ‘구제불능’이라는 한자말을 쓰는 어른이 있고, 이런 한자말은 낯설고 어려운 어린이가 있어요. ‘삼삼오오’쯤 되는 한자말은 어른한테 쉬울는지 모르나, 어른 가운데에서도 이 한자말이 어려울 수 있고 어린이한테는 매우 어려울 수 있어요.


  어떤 말을 쓰든 그 말에 우리 느낌이나 생각을 담아요. 그래서 ‘틀리게’ 쓰는 말은 없어요. 눈높이를 안 헤아리면서 쓰는 말이 있을 뿐이에요. 글이나 책은 으레 어른이 쓰고, 어린이책도 으레 어른이 써요. 어른으로서는 ‘구제불능·삼삼오오’ 같은 말이 쉽거나 흔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어린이로서는 이런 말이 너무 어렵거나 낯설 수 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아야지요. “넌 구제불능이야”라 말하면 한결 나을까요, “넌 못 말려”라 말하면 한결 나을까요? “넌 도와줄 수 없네”나 “넌 어쩔 수 없구나”라 말해 보면 어떨까요? “삼삼오오 모였습니다”라 말하면 더 나을까요, “둘씩 셋씩 모였습니다”나 “여럿이 모였습니다”라 말하면 더 나을까요?


  시를 쓰는 어른 가운데 ‘작시(作詩)’라는 한자말을 쓰는 분이 있어요. 이분은 “작시를 한다”고 말합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작시’를 찾아보면 “= 시작”으로 풀이해요. ‘시작(詩作)’은 “시를 지음”으로 풀이합니다. 곧 ‘작시 = 시작 = 시를 지음’이에요.


  ‘작시한다’나 ‘시작한다’라 말하면 무엇을 하는 줄 알 만할까요? 이러한 말을 듣거나 이러한 글을 읽으면 무엇을 알 만할까요? 한국말로 “시를 짓는다”나 “시를 쓴다”라 하면 무엇을 알 만할까요? 우리가 서로 즐겁게 주고받을 말은 어떠한 모습이나 얼거리일 적에 한결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웁거나 즐거울까요?


  한자말 ‘작업(作業)’은 “일을 함”을 뜻합니다. ‘일하기 = 작업’인 셈입니다. 한국말사전에 ‘일하기’는 안 실립니다. ‘작업’만 나오지요. 한국말사전에 ‘일·일하다’는 실려요. ‘일하기’는 한국말사전에 새 낱말로 실을 만할까요, 안 실어도 될 만할까요? 일을 할 적에 “일을 합니다”나 “일합니다”라 말하면 될까요, “작업을 합니다”라 말하면 될까요?


  곁에 어린이가 있다고 생각해 보셔요. 어린이한테 어른으로서 “이 아저씨는 작업을 하지.” 하고 말할 적하고 “이 아줌마는 일을 하지.” 하고 말할 적을 헤아려 보셔요. 어느 말을 아이들이 잘 알아들을 만할까요? 어른으로서 아이한테 어떤 말을 들려줄 만할까요? 아이가 늘 듣고 배우면서 새롭게 가꿀 말은 어떻게 가다듬거나 이끌 적에 좋을까요?


불안하다(不安-) : 1.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고 조마조마하다 2. 분위기 따위가 술렁거리어 뒤숭숭하다

초조하다(焦燥-) : 애가 타서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조마조마하다 : 닥쳐올 일에 대하여 염려가 되어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다


  한국말사전은 ‘불안하다 = 조마조마하다’로 풀이합니다. ‘초조하다 = 조마조마하다’로 풀이하지요. ‘조마조마하다 = 초조하고 불안하다’로 풀이합니다. 이제 찬찬히 짚어 볼까요. ‘불안하다·초조하다·조마조마하다’는 어떤 뜻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낱말일까요? 우리는 어떤 낱말을 알맞게 쓰면서 우리 뜻이나 느낌을 나타낼 만할까요? 한국말사전을 엮은 학자는 어떤 생각으로 말풀이를 이처럼 붙였을까요?


제각기(-各其) : 1. 저마다 각기 2. 저마다 따로따로

각기(各其) : 저마다의 사람이나 사물 2. 각각 저마다

저마다 : 1. 각각의 사람이나 사물마다 2. 각각의 사람이나 사물

각각(各各) : 1. 사람이나 물건의 하나하나 2. 사람이나 물건의 하나하나마다. ‘따로따로’로 순화

따로따로 : 한데 섞이거나 함께 있지 않고 여럿이 다 각각 떨어져서


  ‘제각기·각기·저마다·각각·따로따로’라는 다섯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봅니다. 말풀이가 빙글빙글 돌아요. 이 낱말은 저 낱말로 풀이하고, 저 낱말은 이 낱말로 풀이합니다. 이러한 다섯 낱말하고 얽힌 실타래를 간추리자면, ‘제각기 = 저마다 각기 = 각각 저마다’입니다. ‘각기 = 저마다/각각 저마다 = 각각/각각 각각’입니다. ‘저마다 = 각각’이요, ‘각각 = 하나하나마다/따로따로’인데, ‘각각’은 ‘따로따로’로 고쳐써야 한다지요. 그런데요, ‘따로따로’로 고쳐써야 한다는 ‘각각’인데, 한국말사전은 ‘따로따로 = 각각’으로 풀이합니다.


  우리 어른은 어떤 낱말을 알맞게 가리거나 살펴서 쓰면 좋을까요? 우리 어른은 어린이한테 어떤 말을 가르치거나 물려주어야 즐거울까요? 우리 아이들은 한국에서 어떤 한국말을 듣거나 배울 만할까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우리 어른은 한국말을 어려서부터 어떻게 배우고 살았을는지 아리송합니다. 한국말사전 말풀이가 이렇게 뒤죽박죽으로 얽히고 설키면서 돌림풀이에 겹말풀이인데, 한국말을 배울 적에 한국말사전을 곁에 둘 수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더 생각해 본다면, 외국사람이 한국말을 배우려 할 적에 한국말사전을 곁에 두고서 배울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외국사람이 한국말사전을 들추면서 한국말을 배우려 하다가 그만 사전을 내동댕이치지는 않을까 모르겠어요. 이 나라 아이들이 한국말사전을 펼치며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려 하다가도 그만 골이 아프고 어지러워서 “난 한국말 안 배울래! 그냥 영어를 쓸래!” 하고 외치지는 않을까요. 아름다운 외국 문학을 한국말로 옮기려던 번역가도 한국말사전을 살피며 번역말을 고르다가 “난 번역 안 할래! 그냥 외국말만 할래!” 하고 외치지는 않을는지요.


직접(直接) : [부사] 중간에 아무것도 개재시키지 아니하고 바로

손수 : 남의 힘을 빌리지 아니하고 제 손으로 직접

몸소 : 1. 직접 제 몸으로

바로 : 1. 비뚤어지거나 굽은 데가 없이 곧게 5. 시간적인 간격을 두지 아니하고 곧

곧 : 1. 때를 넘기지 아니하고 지체 없이 4. 다름 아닌 바로


  ‘손수’하고 ‘직접’ 같은 한국말을 풀이할 적조차 ‘직접’이라는 한자말을 끼워넣는 한국말사전입니다. ‘직접’을 풀이할 적에는 ‘바로’를 쓰기는 하는데, ‘바로’를 풀이하면서 ‘곧’을 쓰고, ‘곧’을 풀이할 적에 ‘바로’를 쓰면서 돌림풀이예요.


  참으로 수수께끼입니다만, 이 수수께끼를 풀면서 처음부터 새롭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배우는 길을 닦아야지 싶습니다. 나라에서는 억지스레 국정 역사 교과서를 쓴다며 큰돈을 퍼붓지 말고, 한국말부터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는 틀과 터를 닦는 길에 제대로 마음을 쏟을 수 있기를 빌어요. 우리도 생각과 마음을 말 한 마디에 슬기롭게 담도록 스스로 새롭게 배워야 할 테고요. 2017.1.18.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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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5. 새로운 넋으로 말결 살리기



  예전에는 쓸 일이 없던 말이 오늘날 흔히 쓰이곤 합니다. 지난날하고 오늘날이 다르니 오늘날 흐름에 맞추어 나타나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오늘날 흐름에 맞춘다고 해서 꼭 새로운 말이지는 않아요. 숨결이나 넋이 새로울 적에 새로운 말이고, 딱딱하거나 낡은 틀에 사로잡히면 딱딱하거나 낡은 말이에요.


  ‘시도(試圖)’는 “어떤 것을 이루어 보려고 계획하거나 행동함”을 뜻하고, ‘행동(行動)’은 “몸을 움직여 동작을 하거나 어떤 일을 함”을 뜻해요. 두 한자말은 말뜻이 돌림풀이가 되는데요, “시도하지도 않고 그만두지 마”라든지 “네 말대로 행동할게”처럼 쓰지요. 그런데 이런 말마디는 “하지도 않고 그만두지 마”라든지 “네 말대로 할게”처럼 고쳐쓸 수 있습니다. 아니, 예전에는 ‘시도’나 ‘행동’을 앞에 안 붙이고 단출하게 ‘하다’라고만 썼어요.


  ‘하다’라는 낱말은 쓰임새가 무척 많고 넓어요. 한국말에서 가장 자주 쓰는 낱말이라면 바로 ‘하다’를 꼽을 만해요. 그렇지만 막상 ‘하다’가 어떤 뜻인가 하고 한국말사전을 뒤적여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해요. 아주 흔하고 대단히 자주 쓰는 낱말이지만 외려 어떤 말마디인가를 거의 안 배우고 안 살피고 안 들여다보는 셈이에요.


  한국사람으로서는 한국말 ‘하다’가 너무 쉽고 흔하기에 굳이 이 ‘하다’를 알맞거나 올바르거나 참답거나 제대로 쓰는 길을 안 살피거나 못 느낄 수 있어요. 외국사람이 한국말을 처음 배운다고 할 적에는 아마 ‘하다’ 때문에 무척 골머리를 앓겠지요. 한국사람이 영어를 배울 적에는 ‘do’ 때문에 몹시 힘들 테고요.


  그나저나 ‘시도하다·행동하다’라고 해야 새로운 말투일까요? ‘하다’로 넉넉하되 “해 보다·몸소 하다·몸소 나서다”처럼 새롭게 쓸 수는 없을까요?


  어른들은 “하루 종일(終日)”이라고 하면 어떤 말인지 어렵잖이 알아듣습니다. 아이한테는 ‘종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루 내내”라는 말도 한국말을 처음 익히는 아이한테는 안 쉬울 수 있어요. 한국말사전에서 ‘종일’을 찾아보니 ‘縱逸’이라는 한자말도 나오는데 ‘縱逸’이 무엇인지 아는 어른은 거의 없을 테며 이런 한자말을 쓸 사람도 거의 없어요. ‘縱逸’은 꼭 한국말사전에 실어야 할 낱말일까요?


  한국말사전을 더 살피니 ‘온종일’하고 ‘진(盡)종일’이라는 낱말을 ‘종일’하고 비슷한말로 실어 놓습니다. ‘온’이라는 낱말을 보니 ‘온하루’처럼 새 낱말을 지어서 쓰면 좋겠구나 싶어요. 그리고 ‘내내’라는 한국말을 살피다가 ‘-내’라고 하는 말마디를 떠올립니다. ‘겨우내·가으내’처럼 쓰고, ‘끝내·마침내’처럼 쓰지요. 그러면 ‘하루내·아침내·낮내·저녁내·밤내’처럼 쓸 만합니다.


  우리한테는 예부터 우리 나름대로 때와 곳에 맞게 새로운 말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는 밑틀이 있어요. 다만 이 밑틀을 살리는 길을 어느 날부터 잊거나 잃었지 싶어요. “하루 내내 = 하루내”라면 “한 달 내내 = 달내”요, “한 해 내내 = 해내”이며, “사는 동안/온 삶을 사는 내내 = 삶내”라는 얼거리예요. 우리는 새말을 짓는 슬기로운 시인이 되어 아이한테 말을 새롭게 가르치면서 배울 수 있어요.


  ‘소싯적(少時-)’이라는 말을 쓰는 어르신이 있어서 가만히 말씀을 듣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한국말사전을 펼쳐 보았습니다. ‘소싯적’은 “젊었을 때”를 뜻한답니다. 다시 ‘소시(少時)’를 찾으니 “젊었을 때”를 뜻한답니다. ‘소싯적·소시’는 말뜻이 같답니다. 그러나 ‘소싯적 = 소시 + ㅅ + 적’이에요. 겹말입니다. 그냥 “젊을 적”이나 “젊은 날”이나 ‘한창때’라고 쓸 만하지 싶어요.


날씨 : 그날그날의 비, 구름, 바람, 기온 따위가 나타나는 기상 상태

기후(氣候) : 1. 기온, 비, 눈, 바람 따위의 대기(大氣) 상태

기상(氣象) : [지리]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현상을 통틀어 이르는 말. 바람, 구름, 비, 눈, 더위, 추위 따위를 이른다. ‘날씨’로 순화


  아이들은 ‘날씨’를 묻습니다. 열 살 언저리 아이라든지 예닐곱 살 아이 가운데 “오늘 기상은 어떻게 돼요?”나 “오늘 기후는 어떤가요?” 하고 묻는 아이가 있을까요? 설마 없을 테지요. 어린이가 쓰는 일기장에도 ‘날씨’를 적는 칸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날씨를 알리지 않아요. ‘기상 예보’를 합니다. 공공기관 이름은 ‘기상청’이에요. 한자말 ‘기상’은 ‘날씨’로 고쳐쓰라고 한국말사전에 나오는데, 이 틈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는지요. 우리는 아이들한테 어떤 말을 물려주거나 가르칠 만할는지요.


  우리 어른들이 이룬 사회에서는 왜 ‘날씨청’이라는 공공기관을 세울 수 없을까요? 우리 어른들이 짓는 터전에서는 왜 ‘날씨 알림’을 하지 못할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디에서나 ‘환경 파괴’가 크게 골칫거리입니다. 그러나 ‘파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또렷이 헤아리거나 살피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아이들한테 ‘환경 파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 적에는 ‘파괴’라는 낱말이 어떤 뜻인지부터 쉽게 풀어내어 알려주어야 해요.


  한국말사전에서 ‘파괴(破壞)’라는 한자말을 살펴봅니다. “1. 때려 부수거나 깨뜨려 헐어 버림 2. 조직, 질서, 관계 따위를 와해하거나 무너뜨림”을 가리킨다고 해요. 이 말뜻을 살피니 ‘부수다·깨뜨리다·헐다·무너뜨리다’ 같은 한국말이 보입니다. 어쩌면 한자말 ‘파괴’는 네 가지 한국말을 모두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만, 어쩌면 한자말 ‘파괴’는 다 다른 네 군데에 다 달리 써야 하는 낱말을 시나브로 밀어내고 함부로 쓰인다고 할 수 있어요.


  곰곰이 돌아볼 노릇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부수다·깨뜨리다·헐다·무너뜨리다’가 저마다 어떻게 다른 뜻과 결과 느낌으로 다르게 쓰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여기에 ‘망가뜨리다·깨다·깨부수다·허물다’는 또 어떻게 달리 쓰는 낱말인가를 밝힐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제대로 모르는 채 아무 말이나 그냥그냥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서 쓰는 나날은 아닐까요?


  보금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나들이를 다닐 적에 으레 ‘여행’을 한다고 합니다. 때로는 ‘관광’이라고 합니다. 다른 곳으로 나들이를 다닐 적에 ‘나들이’나 ‘마실’을 다닌다고 말하는 이웃을 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늘 스스로 좁게 가두는 셈일 수 있어요. 서울마실이나 제주마실을 다니고, 시골마실이나 도시마실을 하며, 저자마실이나 책마실(책방마실)을 다닌다고 할 만해요.


  마실이나 나들이를 다니다가 바깥에서 잘 수 있어요. ‘집밥’과 맞물려 ‘바깥밥’을 먹듯이, ‘집잠’하고 맞물려 ‘바깥잠’을 누려요. 이때에 ‘여인숙·여관’이라는 이름인 곳에서 묵을 수 있고, ‘모텔·호텔’이라는 이름인 데에서 머물 수 있어요. ‘유스호스텔·게스트하우스’라는 이름인 자리에서 지낼 수 있어요.


  이 가운데 ‘게스트하우스(guesthouse)’라는 이름을 살피면 ‘게스트 + 하우스’인 얼거리요, ‘손님 + 집’인 셈입니다. 손님이 깃드는 집이 ‘게스트하우스’이고, 한자말로 ‘여행자숙소’라고 해요. 이를 한국말로 새롭게 가리킨면 ‘손님집’이 될 텐데,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머문다고 해서 ‘길손집’이라 해 볼 만하고, 나그네가 머물기에 ‘나그네집’이라 해 볼 만해요. ‘길손쉼터’나 ‘나그네쉼터’ 같은 이름을 써 볼 수 있어요. 이밖에 얼마든지 생각을 펼쳐서 재미나거나 사랑스럽거나 고운 새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지역 협동조합’이라는 이름까지 안 쓰더라도 ‘마을두레’라 할 수 있고, ‘마을살림’을 가꾼다고 할 수 있어요. 마을에는 ‘마을가게’가 있으며, ‘마을지기·마을님·마을이웃·마을일꾼’이 있을 테지요. 요새는 ‘마을책방’이 부쩍 늘어요. 이 흐름을 돌아본다면 ‘마을쉼터’나 ‘마을집’ 같은 이름으로 “길손이 하룻밤 묵는 집”을 가리킬 수 있어요.


  딱딱한 ‘어른 사회’ 말투를 넘어서기란 어려울 수 있으나 쉬울 수 있습니다. 새로운 넋으로 말결을 살리기란 어려울 수 있으나 쉬울 수 있어요. 촛불 한 자루로 평화롭게 대통령 잘잘못을 나무라면서 끌어내릴 수 있듯이, 우리가 저마다 선 자리에서 사랑스레 짓는 말 한 마디로 새로운 말넋을 지필 수 있어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즐겁게 돌아봐요. 우리가 늘 마주하는 모든 것부터 새로운 눈으로 살피며 새로운 이름을 쉽고 상냥하며 곱게 붙여 보아요. 2016.12.18.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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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4. ‘따뜻함’을 잃으면서 망가뜨리는 말



  도시는 높직한 건물이 많고 찻길이 넓지만 곳곳에 나무를 심습니다. 도시를 처음 닦을 적에는 나무가 없어도, 어느 도시이든 스무 해쯤 지나고 보면 나무가 제법 우거집니다. 시골에도 나무는 많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해를 가려 그늘을 드리운다고 하기에 커다란 나무를 자꾸 베기 일쑤입니다. 들판 사이에 난 길에는 나무가 한 그루조차 없기도 합니다. 이 ‘나무’를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나무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를 써서 집을 지으면 ‘나무집’이라 안 하고 ‘목조 주택’이라 일컫기 일쑤입니다. 나무를 만지는 사람을 두고 ‘나무꾼·나무지기·나무장이(나무쟁이)·나무님’ 같은 이름은 거의 안 쓰고 으레 ‘목수’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나무로 집을 짓거나 예술을 할 적에도 ‘나무’라 안 하고 ‘목재’라는 한자말을 써요. 나무를 다루는 일도 ‘나무질·나무일·나무짓기’가 아닌 ‘목공·목공예’라고만 하고요.


  ‘고목나무’는 겹말입니다. ‘고목’이라는 한자말이 나무를 가리키니 ‘-나무’를 덧달 수 없어요. ‘동해·남해’가 바다를 가리키니 이대로만 써야 하는데 ‘동해 바다·남해 바다’처럼 얄궂게 쓰는 겹말하고 같은 얼거리입니다.


  ‘고목’은 무엇일까요? 한글로만 적으면 알 수 없습니다. ‘古木’은 “큰 나무”를 가리킨다 하고, ‘枯木’은 “죽은 나무”를 가리킨다 해요. 한자를 안 밝히면 ‘고목’이 어떤 나무인지 모르는데, 누구나 알기 쉽도록 ‘큰나무’나 ‘죽은나무’처럼 새 낱말을 지어서 쓸 만해요. ‘큰나무·죽은나무’처럼 쓰면 ‘古木·枯木’ 사이에서 헷갈릴 일이 없고, ‘고목나무’ 같은 겹말은 사라져요.


  어떤 일을 겪는다고 할 적에 한자말로 ‘체득·체험·경험’을 쓰기도 합니다. ‘체득’은 “몸소 체험하여 알게 됨”을 가리키고, ‘체험’은 “자기가 몸소 겪음. 또는 그런 경험”을 가리키며, ‘경험’은 “자신이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봄”을 가리킨다고 해요. 이러한 뜻을 살핀다면 세 낱말은 서로 돌림풀이인데, “몸소 체득하다”나 “몸소 체험하다”나 “몸소 경험하다”처럼 쓰면 모두 겹말인 줄 알 수 있어요. ‘몸소’라는 말을 쓰고 싶으면 “몸소 하다”나 “몸소 부딪히다”로 쓸 노릇이요, 한국말로는 ‘겪다’만 쓰면 됩니다.


  ‘망연자실’이라는 한자말이 있어요. 이런 한자말을 한국말사전에서 말뜻을 찾아보는 사람은 퍽 드물지 싶어요. 둘레에서 이런 한자말을 쓰니 그냥 따라서 쓰는 사람이 많아요. ‘망연자실’ 옆에 ‘茫然自失’ 같은 한자를 달아 놓는다고 해서 말뜻을 알 만하지 않아요. “멍하니 정신을 잃음”이란 말뜻을 밝혀 주어야 비로소 느낌을 헤아리겠지요. 이런 말뜻을 헤아려 본다면 “망연자실하여 넋을 잃었다”처럼 쓰면 겹말이로구나 하고 깨닫겠지요. 여기에서 더 생각할 수 있다면 “넋을 잃었다”만 써도 넉넉한 줄 알아차릴 테고, 비슷한말로 ‘멍하다·얼떨떨하다·얼떨하다’가 있어서, 이 여러 가지 낱말을 알맞게 쓸 수 있어요.


따뜻하다 : 1. 덥지 않을 정도로 온도가 알맞게 높다 2. 감정, 태도, 분위기 따위가 정답고 포근하다

포근하다 : 2. 감정이나 분위기 따위가 보드랍고 따뜻하여 편안한 느낌이 있다

정(情) : 1.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2.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

정답다(情-) : 따뜻한 정이 있다


  “따뜻한 정”이라는 말마디를 생각해 봐요. 사회에서 무척 널리 쓰는 말마디 가운데 하나인 “따뜻한 정”이에요. 도시에 있는 이웃님은 시골에 와서 “따뜻한 정”을 느낀다는 얘기를 흔히 하고, 도시에서는 서로 “따뜻한 정”을 찾자는 목소리가 높아요.


  그런데 말뜻을 찬찬히 짚으면 ‘따뜻하다 = 정답고 포근하다’라고 해요. ‘정답다 = 따뜻한 정이 있다’라고 해요. ‘포근하다 = 보드랍고 따뜻하여 편안하다’라고 해요. 말뜻이 빙빙 돌아요. 돌림풀이예요. 그러니까 “따뜻한 정 = 따뜻한 따뜻한 정”인 얼거리요, 다시 “따뜻한 따뜻한 따뜻한 정”처럼 끝없이 ‘따뜻한’이 되풀이되고 말아요.


  눈이 밝은 분이라면 이 대목에서 아하 하고 알아차리리라 생각해요. ‘정 = 마음’을 가리키니, “따뜻한 마음”이라고 하면 넉넉하네 하고 알아챌 만해요. 단출하게 ‘따뜻함’이라고만 해도 “따뜻한 마음”을 나타낼 수 있어요. 비슷하게 ‘따스함·다스함·따사로움·다사로움’을 쓸 수 있고, ‘포근함’도 좋아요. 이밖에 “따뜻한 기운”이나 “따뜻한 손길”이나 “따뜻한 눈길”이나 “따뜻한 품”이나 “따뜻한 숨결”이라고 해 볼 만합니다.


숙련(熟鍊/熟練) : 연습을 많이 하여 능숙하게 익힘

능숙하다(能熟-) : 능하고 익숙하다

능하다(能-) : 어떤 일 따위에 뛰어나다

익숙하다 : 1. 어떤 일을 여러 번 하여 서투르지 않은 상태에 있다

익다 : 1. 자주 경험하여 조금도 서투르지 않다 2. 여러 번 겪어 설지 않다

솜씨 : 1. 손을 놀려 무엇을 만들거나 어떤 일을 하는 재주 2. 일을 처리하는 수단이나 수완

재주 : 1. 무엇을 잘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과 슬기


  어떤 일을 훌륭히 할 적에 “숙련된 솜씨”라고 일컫곤 해요. 이 말마디도 한번 헤아려 봐요. ‘숙련’은 “능숙하게 익힘”을 가리킨다는데, ‘능숙’은 “능하고 익숙함”을 가리키고, ‘능하다’는 ‘뛰어나다’를 가리킨대요. 이모저모 따지면 ‘숙련(숙련되다)’은 ‘솜씨’ 있는 모습을 가리키기에 “숙련된 솜씨”는 겹말이에요. ‘숙련’이라는 한자말을 쓰고 싶다면 “숙련된 손길”이나 “숙련된 몸짓”이라 해야 올발라요. ‘솜씨’라는 한국말을 쓰고 싶다면 “빼어난 솜씨”나 “훌륭한 솜씨”라 해야겠지요.


  한자말을 쓰든 한국말을 쓰든 말뜻을 제대로 짚지 않거나 말결을 올바로 살피지 않으니 겹말 얼거리가 돼요.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슬기롭게 못 쓰지요. 말을 뛰어나게 하거나 훌륭하게 해야 하지는 않을 테지만 제대로 알맞게 살뜰히 가다듬을 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솜씨’나 ‘말재주’가 모자라더라도 틀린 말이나 엉뚱한 말이나 얄궂은 말은 안 쓸 수 있어야지요.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보통’이 있어요. 그러면 ‘보통’이란 무엇일까요? 한자말 ‘보통(普通)’은 “1. 특별하지 아니하고 흔히 볼 수 있어 평범함. 또는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아니한 중간 정도 2. 일반적으로. 또는 흔히”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평범(平凡)’은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를 가리킨다고 해요. 한국말사전 뜻풀이는 돌림풀이로군요. 그런데 ‘흔히’를 “보통보다 더 자주 있거나 일어나서 쉽게 접할 수 있게”로 풀이하고, ‘특별(特別)’을 “보통과 구별되게 다름”으로 풀이하기에 겹말풀이가 되기까지 합니다. ‘보통 = 특별하지 아니하고 흔히 볼 수 있어 평범함 = 보통과 구별되게 다르지 아니하고 + 보통보다 자주 볼 수 있어 + 보통임’인 꼴이기 때문이에요. ‘보통’을 풀이하면서 나타나는 세 가지 낱말이 모두 ‘보통’이거든요.


  자, 그렇다면 참말로 ‘보통’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흔히’ 쓰는 ‘보통’은 어떤 낱말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래도 ‘흔히’라 할 수 있고, 때로는 ‘여느’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수수한’으로 손볼 만한 자리가 있고, ‘으레’로 손보면 어울리는 때가 있습니다.


  ‘매일(每日)’은 “1. 각각의 개별적인 나날 2. 하루하루마다”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한국말사전에는 “≒ 일일(日日)·과일(課日)·식일(式日)”처럼 비슷한말을 싣는데 ‘일일·과일·식일’은 모두 “= 매일”로 풀이해요. 그러나 이 같은 한자말은 모두 털어내어도 될 만하다고 느낍니다. ‘날마다’나 ‘나날이’를 쓰면 되고, ‘하루하루’나 ‘늘’이나 ‘언제나’로 손질하면 돼요. 그나저나 이런 말뜻과 말결을 안 살피기에 ‘매일마다’ 같은 겹말을 쓰는 분이 퍽 많아요. 날마다 쓰는 한국말이지만 깊고 넓게 살피지 않는 탓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그러니까 시나브로 한국말을 날마다 망가뜨리는 짓을 하고 맙니다. 2016.11.16.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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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3. 억지로 ‘만들’ 수 없는 말



  오늘날 ‘어른’이라는 낱말이 제자리를 잃습니다. 어쩌면 ‘어른’이라는 낱말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어른다운 어른’은 없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어른’이란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이 줄었고, 아이들한테 ‘어른 구실’을 가르치려는 어버이가 자꾸 줄어듭니다. 어른 자리에 서야 할 분들 스스로 ‘어른다이 살기’하고는 멀어지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어른’이라는 낱말을 놓고 ‘얼운·얼우다’라는 옛말을 살펴서 말하기도 합니다. “혼인한 사람”이 어른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밑풀이는 틀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더 헤아릴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부터 어떤 사람을 놓고 ‘어른’이라고 할 적에는 혼인한 사람만 두고 가리키지 않습니다. 나이만 많이 든 사람이라고 해서 어른이라고 하지 않아요. 임금님 자리에 선대서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나이쯤 되기에 어른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혼인을 안 했대서 어른이 아니라고도 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어른일까요? 바로 “어른다운 사람”일 때에 어른인데요, ‘답다’라는 말이 붙는 사람으로 살자면, “어른 구실”을 해야 하고, 이 “어른 구실”이라고 한다면, 너그럽고 슬기롭고 따스하고 깊고 손수 살림을 짓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몸짓이나 모습입니다. 아무나 어른이라고 하지 않아요.


  예부터 어른 자리에 서려면 “철이 들어야” 한다고 했어요. ‘철모르쇠(철모름쟁이·철부지)’는 어른이 아닙니다. 스무 살이나 서른 살 나이입니다만 손수 밥을 지어서 먹지 못한다면, 마흔 살이나 쉰 살 나이입니다만 손수 집을 짓거나 옷을 지을 줄 모른다면, 예부터 이런 사람은 어른이 아니라고 했어요.


  밥과 옷과 집이라고 하는 살림살이를 스스로 짓기에 어른이라 했습니다. 철을 알기에 어른이라 했지요. 씨앗을 심고 가꾸고 돌보고 거두고 갈무리하는 철을 알기에 어른이라 해요. 그러면 아이(어린이)는 누구일까요? 아직 철이 들지 못하기에 아이예요. 나이는 많아도 철이 들지 못하면 그냥 ‘아이’라고 해요.


  어른이 맡은 몫은 무엇보다도 아이한테 삶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밥과 옷과 집이라고 하는 살림살이를 정갈하고 즐거우면서 아름답게 짓도록 가르치는 몫이 바로 어른이 할 일이에요. 이러면서 어른이 하는 일이 더 있어요. 바로 “아이한테 말다운 말을 물려주고 가르치는 몫”이지요.


  오늘날 수많은 “나이 많이 든 사람” 가운데 아이한테 말다운 말을 물려주거나 가르치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아무 말이나 그냥 쓰지는 않는가요? 어설픈 번역 말투나 외국 말투를 버젓이 쓰지는 않는가요? 한국말을 새롭게 가꾸거나 짓거나 보살피는 숨결을 아이한테 물려주는 “어른다운 어른”은 얼마나 있을까요?


  이제 간추려 보자면, ‘어른’은 철이 제대로 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철’이 제대로 든 사람은 ‘얼’이 곧게 서거나 든든히 들어선 사람입니다. “얼이 있는 사람”이 바로 ‘어른’이에요. 철이나 얼이 없으면 ‘철모르쇠(철부지)’이거나 ‘얼간이(얼 빠진 이)’입니다. ‘얼찬이’이 되어야 비로소 ‘어른’입니다.


첫날 : 1. 어떤 일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날 2. 시집가거나 장가드는 날

시작(始作) :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


  한국말사전을 살펴봅니다. ‘첫날’을 “처음으로 시작되는 날”로 풀이합니다. 한자말 ‘시작’은 “처음을 이루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첫날’ 말풀이는 돌림풀이가 됩니다. 일본을 거쳐서 들어와 널리 퍼진 한자말 가운데 ‘시작’이 있는데, “준비 시작”이라든지 “시작해 봐”처럼 흔히 써요. “준비 시작”은 “요이 땅”이라는 일본말이 꼴만 바꾼 얼거리예요. 이런 말은 아직 한국말이 아닙니다. “자, 달려”나 “자, 가자”나 “하나, 둘, 셋”처럼 한겨레 살림새를 살피면서 새롭게 써야 비로소 한국말이 되어요. “시작해 봐”는 “이제 해 봐”나 “이제 하자”나 “자, 해 봐”로 새롭게 고쳐서 쓸 수 있어요.


제과(製菓) : 과자나 빵 따위를 만듦

제빵(製-) : 빵을 만듦

제작(製作) : 재료를 가지고 기능과 내용을 가진 새로운 물건이나 예술 작품을 만듦


  한겨레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밥을 지어서 먹습니다. 한겨레 밥살림은 “밥을 지어서 먹기”, 곧 ‘밥짓기’입니다. 그런데 이 수수하고 흔한 ‘밥짓기’나 ‘밥짓다’는 한국말사전에 안 실립니다. ‘밥하다’라는 낱말은 겨우 실리지요.


  왜 한국말사전에는 ‘밥짓기·밥짓다’가 안 실릴까요? 이 나라 학자들이 여느 살림살이를 도무지 모르기 때문이요, 제대로 안 살피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날마다 밥을 먹지만 정작 밥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니 아주 쉽고 수수한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빠뜨리고 말아요. ‘옷짓기·집짓기’도 한국말사전에 없어요.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 옷이나 집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집짓기’는 한국말사전에 실리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장난감 놀이를 하는 이름으로만 실려요.


  밥을 먹는 한겨레 삶에 과자하고 빵이 들어온 지 얼추 백 해쯤 됩니다. 과자하고 빵은 아주 빠르게 퍼져서 누구나 손쉽게 과자하고 빵을 사거나 집에서 구워서 먹어요. 그러나 이런 살림이 예부터 없었기에 이를 가리키는 한국말은 없었지요. 한국말을 새로 지어야 텐데, 이 나라에서는 ‘제과·제빵’ 같은 낱말을 일본을 거쳐서 받아들였습니다. 말풀이를 “과자 만들기”나 “빵 만들기”로 달고요.


  ‘만들다’하고 ‘짓다’는 다릅니다. 밥은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다. 밥은 ‘짓는다’고 하지요. 옷도 집도 ‘만들’지 않아요. 옷도 집도 ‘지을’ 뿐입니다. 글을 쓰는 일도 ‘글짓기’나 ‘시짓기’나 ‘소설짓기’라고 했지, ‘글 만들기’나 ‘시 만들기’나 ‘소설 만들기’라 하지 않아요.


  왜 ‘짓다’라는 낱말을 쓸까요? ‘지음(짓다)’은 우리 삶을 이루는 바탕이 되도록 새롭게 일으키는 몸짓이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들다’라는 낱말은 언제 쓸까요? 공장에서 물건을 내놓을 적에 ‘만들다’라 합니다. 뚝딱뚝딱 이것저것 맞추어서 ‘만든다’고 해요.


  요새는 “친구를 만든다”나 “영화를 만든다”나 “책을 만든다”나 “시간 좀 만들어 봐”나 “좋은 분위기를 만들자”나 “괜한 일을 만드네”나 “쉴 시간을 만들자”처럼 쓰기도 합니다만, 이렇게 쓰려면 쓸 수도 있습니다만, 그리 올바르지 않아요. 왜냐하면, “친구를 사귄다”, “영화를 찍다”, “책을 내다·책을 엮다·책을 짓다”, “시간 좀 내 봐”, “좋은 분위기로 바꾸자”, “괜한 일을 하네·괜한 일을 키우네”, “쉴 틈을 내자”처럼 쓰던 말이요, 이러한 말투가 올바르지요.


  한국말사전에 나오기에 그대로 써야 하지 않아요. 옳지 않은 낱말이나 말투조차 한국말사전에 실릴 수 있기도 해요. 아직 한국은 한국말을 사전이라는 그릇에 담는 손길이나 솜씨가 매우 모자라요. 앞으로 한국은 한국말사전을 새롭게 고치고 손질하고 가다듬고 갈고닦아야지 싶어요. 그나저나 ‘제과·제빵’은 어떻게 옮겨야 알맞거나 올바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과자를 굽다·과자를 짓다

빵을 굽다·빵을 짓다


  과자나 빵을 놓고는 ‘짓다’라는 낱말을 잘 안 쓰지만 ‘밥짓기’처럼 ‘과자짓기·빵짓기’로 써야 올발라요. 다만, 이 말마디는 그리 익숙하지 않으니 ‘과자굽기·빵굽기’로 쓸 만합니다. 과자나 빵은 으레 ‘굽’거든요. “빵 굽는 마을”이나 “빵굼터” 같은 빵집 이름이 괜히 쓰이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을 살피면 빵을 굽는 사람을 ‘빵굼이’로 나타내 볼 만해요. 또는 ‘빵굼지기’나 ‘빵굼님’이라 해 볼 수 있어요. 생각을 활짝 펴며 새로운 말을 즐거이 짓습니다. 2016.10.18.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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