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17. 다람쥐를 다람쥐라 못하다


  2017년 가을께 전남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시외버스역 뒷간에 ‘아짐찬하요’라는 글월이 붙었습니다. 뭔 뜬금없는 글월인가 하고 쳐다보니, 사내들이 오줌을 눌 적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면 ‘아짐찬하다’는 소리입니다. 다만, 고흥 바깥 전라말로는 ‘아심찬하다’로 씁니다.

  흔히 전라사람은 뭔 말을 할라치면 ‘거시기하다’라 한다고들 합니다. 고흥에서는 ‘거시기하다’라고는 거의 안 쓰고 ‘거석하다’라고 합니다. 사전을 살피면 ‘거석’을 경남말로만 다루는데, 경남말로만 여겨도 될까 아리송합니다.

  그리고 ‘거시기하다’는 전라말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온나라에서 두루 쓰는 말입니다. 고흥에서 흔히 쓰는 ‘거석하다’를 놓고 사전은 ‘거식하다’라는 표준말을 싣기도 합니다.

  더 헤아려 보면 ‘머시기’라는 말이 있고, 뭔가 뭉뚱그려서 말하는 자리라든지 또렷하게 안 떠오르지만 나타내고 싶은 말이 있을 적에 ‘무엇’이나 ‘거기’나 ‘그것’이나 ‘것’이나 ‘거’를 쓰곤 합니다. 고장마다 말씨가 살짝 다를 수 있어도 마음은 같을 터이니, 엇비슷한 말이 감칠맛나게 태어나고, 이런 감칠맛나는 말이 삶이나 넋을 한결 북돋아 주지 싶습니다.

mouse : 1. 쥐, 생쥐 2. [컴퓨터] 마우스
마우스(mouse) : [컴퓨터] 컴퓨터 입력 장치의 하나

  요즈음 셈틀을 안 쓰는 사람은 없다시피 합니다. 시골 할매나 할배를 뺀다면 참말로 거의 모든 사람이 셈틀을 씁니다. 셈틀을 쓸 적에는 두 손으로 글판을 두들길 테고, 한 손으로 작고 둥그스름한 뭔가를, 머시기를 쥐기 마련입니다. 이 머시기를, 또는 거시기를 뭐라고 할까요? 아니, 뭐라고 이름을 붙이면 어울릴까요?

  영어 이름 그대로 ‘컴퓨터’를 받아들인 이들은 ‘마우스’라는 영어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글을 치는 판을 놓고도 처음에는 ‘키보드’라는 영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더니, 요새는 ‘자판(字板)’이라는 한자말로 조금 손질해서 쓰곤 합니다.

  먼저 ‘판’을 놓고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윷판’ 같은 자리에서 쓰는 한국말 ‘판’을 받아들여, 글쓰기에서 새로운 자리를 여는 뜻으로 ‘글판’이라 해 볼 만합니다. 꼭 한자 ‘판(板)’만 써야 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셈틀’을 헤아려 봅니다. ‘셈 + 틀’입니다. 베틀이나 재봉틀처럼 사람이 손으로만 일하기에는 살짝 벅차서, 좀 수월하게 일할 수 있도록 마련한 연장을 ‘틀’이라 해요. ‘셈’은 ‘생각’하고 뿌리가 같은 낱말이고, ‘세다(셈)’는 ‘헤다(헤아리다)’하고 뿌리가 같습니다. 컴퓨터라는 기계는 2진법으로 움직여요. 다시 말해서 2진법 숫자(세다) 얼거리요, 생각을 넓히는(헤다) 틀거리입니다. 이런 짜임새와 구실을 돌아볼 수 있다면 ‘셈틀’이란 낱말은 참으로 멋지고 알맞습니다.

  이다음으로 ‘마우스’를 살필게요. 영어사전을 살피지 않더라도 영어 쓰는 나라에서는 생쥐도 ‘마우스’요, 셈틀을 다룰 적에 손에 쥐는 거시기도 ‘마우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각해 보아야지요. 생쥐이든 쥐이든 다람쥐이든 숲이나 들이나 구멍에서 사는 짐승도 온갖 ‘쥐’요, 셈틀을 다루면서 곁에 두는 머시기도 ‘쥐’라 할 만합니다. 그냥 ‘다람쥐’를 움직여 셈틀을 다룬다고 해도 됩니다. 또는 ‘다람이’라는 이름을 써도 되고, ‘잡이쥐(잡고 쓰는 연장이되 쥐처럼 생겼다는 뜻)’라 한다든지 ‘셈쥐(셈틀을 다룰 적에 쓰는 연장이되 쥐처럼 생겼다는 뜻)’라 한다든지 ‘손쥐(손으로 쥐고 움직여 셈틀을 쓰도록 하는 연장이되 쥐처럼 생겼다는 뜻)’ 같은 새말을 빚을 만해요.

  모두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영어로 ‘마우스’가 두 가지를 가리키듯, 한국말로 ‘다람쥐’가 두 가지를 가리켜도 즐겁습니다. 또는 한국사람 나름대로 슬기를 뽐내어 새로운 낱말을 지어도 즐거워요.

  전주마실을 하던 얼마 앞서 문득 “‘이무로운’ 사이”라는 말이 귓등을 스칩니다. 곁에 앉은 분들이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이 말을 쓰는데, 이제 전라살이 여덟 해쯤 되는 저한테는 낯설면서 낯익은 말입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은 인천 바닷가라서 ‘이무롭다’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어쩐지 ‘이물·고물’이 퍼뜩 떠오르지만, ‘무르다’라든지 ‘물’이라는 낱말도 함께 떠오릅니다. ‘허물없다’라든지 ‘사이좋다’라고만 하기에는 살며시 결이 다른 ‘이무롭다’를 혀에 얹으면서 새삼스럽네 싶습니다.

  마치 ‘살갑다’하고 ‘슬겁다’가 뜻으로는 같다고 하더라도 결로는 달라서 혀에 감기는 이야기가 가만히 벌어지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겨레도 매한가지일 텐데, 영어라면 o 다르고 i 다르다 할 테고, 한국말에서는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쓰는 말은 품사나 맞춤법이나 문법이라는 이름으로는 가르거나 따질 수 없는 남다른 맛이 있어요. 서양 말법에 맞추어 과거형이나 현재진행형이나 동사나 형용사를 잘게 따져서는 말맛을 살리지 못한다고 할까요. 한국말은 예부터 임자말하고 꾸밈말하고 풀이말, 이렇게 크게 세 갈래로 나누던 말이기에, 이러한 결에 따라 이야기꽃을 살릴 적에 아이도 어른도 말을 한결 푸근하면서 무던히 익히거나 주고받을 만하지 싶습니다.

  이를테면 ‘자장면’이라 한들 ‘짜장면’이라 한들 대수롭지 않습니다. 저는 아이한테도 이웃한테도 ‘짜장국수’라고 말합니다. ‘냉면’이란 말도 잘 안 써요. 저는 ‘찬국수’라고 합니다. 예부터 한국사람이 즐겨먹은 국수라면 ‘잔치국수’라는 이름이 있지요. ‘막국수’란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는데, 하나는 투박하게 삶은 국수라면, 다른 하나는 이제 갓 삶은 국수입니다. 그래서 막걸리도 이처럼 ‘투박하게 거른 술’ 하나하고 ‘이제 바로 거른 술’ 두 가지로 읽을 만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술이란 빨리 삭이지 못하는 마실거리이거든요. 마실 술이 되려면 꽤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 막걸리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마실 수 있어요.

  어쩌면 ‘막-’이라는 낱말은 투박한 맛하고 이제 바로 담근 맛을 아우르는 낱말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막’하고 ‘갓’은 서로 쓰임새가 아주 부드러우면서 새삼스레 갈릴 테고요.

  이 대목까지 생각줄을 이었으면 바야흐로 새롭게 말 몇 가지를 짓는 길을 열 수 있습니다. ‘막국수’에다가 ‘갓국수’를 쓸 수 있습니다. ‘갓’이라는 낱말은 투박한 결까지 담지는 않으니 ‘갓국수’라고 하면 그야말로 이제 바로 건진 뜨끈한 국수만을 나타낼 이름이 됩니다. 술을 놓고는 ‘갓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갓 지은 밥이라면 ‘갓밥’입니다.

  생각을 하기에 새로운 살림을 가꿉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남이 시키는 일만 하기 마련입니다. 생각을 스스로 하려 하지 않으면, 남이 시키는 일만 할 뿐 아니라 모든 살림을 돈으로 사다가 쓰는 얼거리가 됩니다.

  남이 시키는 일만 해도 나쁘지는 않고, 모든 살림을 돈을 치러 사다가 써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때에는 나다움이란 없기 마련이에요. 남이 시키는 일만 할 적에 나다움이란 없지요. 공장에서 똑같이 찍은 것을 돈으로 사다가 쓰는데 나다움이 싹틀 자리란 없어요.

  ‘나다움’은 ‘아름다움’하고 이어집니다. 우리가 뭔가 보고서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이 아름다움이란 ‘바로 그곳(거기·거시기)에만 있는 멋’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거시기 잘 모르겠지만 아름답네” 하고 느낄 적에는 스스로 새롭게 길을 열면서 환하게 웃음짓는 모습이라는 뜻이에요.

  아이들한테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가르치기 앞서, 아이들이 저마다 ‘아이다움’을 살릴 수 있도록 마음을 북돋우고 가꾸는 길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우리 어른들도 스스로 새롭게 생각하고 하루를 짓는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 좋겠습니다. 고장말이란, 사투리란, 텃말이란, 스스로 제 보금자리를 새롭게 짓는 사람이 저마다 손수 지은 즐거운 말입니다. 2017.12.18.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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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5. 술잔을 부딪히는 한 마디



  사람들마다 쓰는 말이 다릅니다. 사람들마다 사는 고장이 다르고, 사람들마다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가는 터전이 다르거든요. 그런데 고장이나 삶터나 일터가 다르더라도 비슷하게 쓰는 말이 있어요. 이를테면 술잔을 부딪히면서 하는 말은 비슷하곤 해요. 요새는 “위하여!” 같은 말을 흔히 씁니다.


  그런데 저는 ‘위하다’라는 말을 아예 안 씁니다. 아이들 앞에서도 안 쓰고, 이웃 앞에서도 안 써요. 글을 쓰든 말을 하든 저로서는 ‘위하다’를 쓸 일이 없습니다.


  ‘위하다’는 ‘爲’라는 한자를 붙인 말씨예요. 공문서라든지 책을 살피면 “이를 위하여”나 “하기 위하여”나 “지원을 위하여”나 “여행을 위하여”나 “나라를 위하여”나 “꿈을 위하여”나 “사랑을 위하여”나 “시행하기 위하여”나 “보호하기 위하여”나 “발전을 위하여”나 “너를 위하여”나 “우리를 위하여”나 “평화를 위하여”나 “육성을 위하여”나 “출근을 위하여”나 “육아를 위하여”처럼 참말로 ‘위하다’는 이곳저곳에 안 쓸 수 없는 말인 듯 여길 만해요.


  이렇게 온갖 곳에 흔히 쓰는 말마디이니, 제가 이런 말마디를 안 쓴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이 많습니다. 어떻게 그 말을 안 쓰면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아리송해 하시지요.


  이때에 저는 넌지시 되묻습니다. 어릴 적에 참말로 ‘위하다’라는 말을 꼭 쓰셨느냐 하고요. 옛날에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위하다’라는 말을 쓰셨는지 되묻기도 해요. 그리고 1970년대라든지 1960년대라든지 1950년대라든지, 또는 1980년대에 어린 나날을 보내면서 ‘위하다’라는 말을 쓴 적이 있는지 가만히 여쭙기도 해요.


  이렇게 여쭙거나 되묻는 까닭은, 저로서는 어릴 적에 ‘위하다’라는 말을 쓴 적이 참말 한 차례도 없기 때문이에요. 어른들 흉내를 내면서 물잔을 부딪힐 적에 “위하여!”라 말한 적은 있으나, 이 말이 도무지 무엇을 뜻하는지 알 길이 없었어요.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사전을 뒤적여 보아도 우리가 왜 “위하여!”를 써야 하는지 알쏭했어요. 다만, ‘위하다’가 일본 말씨인 줄은 어른이 되고서 알았고, 이 일본 말씨는 공문서를 비롯해서 학문이나 책이나 방송에 어마어마하게 쓰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이를 위하여 → 이 때문에

 하기 위하여 → 하려고

 지원을 위하여 → 도우려고

 여행을 위하여 → 여행 때문에 / 여행으로

 나라를 위하여 → 나라를 생각해서 / 나라 때문에

 꿈을 위하여 → 꿈을 이루려고 / 꿈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 사랑을 이루려고 / 사랑 때문에

 시행하기 위하여 → 하려고

 보호하기 위하여 → 지키려고

 발전을 위하여 → 발돋움하려고 / 크려고

 너를 위하여 → 너를 도우려고 / 너 때문에 / 너를 생각해서

 우리 때문에 → 우리를 생각해서 / 우리 때문에

 평화를 위하여 → 평화를 이루려고 / 평화를 지키려고

 육성을 위하여 → 키우려고 

 출근을 위하려 → 출근하려고 / 일하러 가려고

 육아를 위하여 → 아이 때문에 / 아이를 생각해서


  하나하나 짚어 보니까 먼먼 옛날부터 이 땅에서 살아온 분들은 ‘위하다’라는 외마디 한자말을 쓸 일이 없었구나 싶어요. 일제강점기 뒤로 부쩍 퍼진 이 말씨는 그야말로 우리 말씨가 아니네 싶어요. 책이든 논문이든 방송이든 공문서이든 ‘위하다’가 끝없이 나오더라도 시골 할머니하고 할아버지 입에서 ‘위하다’가 나오는 일은 없어요.


  다만 농협 일꾼한테서 물들어 “마을을 위한 일”이라고 할 적에는 나타나지요. 그리고 이때에는 예전에 “마을을 생각하는 일”이나 “마을을 살피는 일”이나 “마을을 걱정하는 일”이나 “마을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했구나 하고 알아차렸어요.


  다시 말해서 지난날에는 때하고 곳하고 사람을 살펴서 알맞게 온갖 말을 마음껏 썼다고 할 만합니다. 오늘날에는 이도저도 아닌 채 어영부영 뭉뚱그리면서 ‘위하다’를 아무 자리에나 쓰는구나 싶어요.


  그러면 술자리 같은 데에서는 어떤 말을 써야 좋거나 즐거울까요? “위하여!” 같은 느낌을 살릴 만한 말씨는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리 스스로 새로운 말씨를 살리면서 뜻을 북돋우려고 하면 얼마든지 새롭거나 재미있거나 즐겁거나 뜻있는 말마디를 지을 만하리라 봅니다. 그러나 예전부터 썼다는 생각으로 그냥그냥 따라서 쓴다면 새로운 말마디를 못 짓겠지요. 더구나 예전에는 우리 나름대로 재미있거나 알맞게 쓰던 말씨가 있지만, 일제강점기나 미군정이나 군사독재를 거치는 동안 우리 말씨를 잊고 말아서, 외려 이제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로 제대로 결이나 넋을 살리는 말을 생각하지 못할 수 있어요.


  누가 저한테 묻는다면, 이를테면 술자리라든지 잔치마당에서 “이보게, 자네가 한 마디 할랑가?” 하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려고 생각해요.


 사랑으로! 

 꿈으로!

 웃음으로!


  잔을 부딪히는 잔치마당이라면 “사랑을 위하여!”가 아닌 “사랑으로!” 한 마디로 넉넉하지 싶어요. “마을을 위하여!” 같은 말을 외치고 싶다면 “마을사랑!”이라고 외칠 수 있어요. “우리 마을 좋구나!”라든지 “우리 마을 으뜸!”이라든지 “우리 마을 좋아!” 하고 외칠 수 있고요.


  가만히 보면 술자리에서 외마디로 외치는 말로 “지화자!”라든지 “좋구나!”라든지 “얼씨구!”를 읊는 분이 있어요. 이런 외침은 참 수더분하구나 싶어요. 이와 비슷하게 “좋아!”라든지 “좋지!”라든지 “좋네!”라든지 “좋다꾸나!”라든지 “좋지롱!”이라든지 “좋아뿌러!”처럼 말끝을 바꾸어서 외쳐 볼 수 있어요.


  “너를 위한다”고 할 적에는 너를 생각하거나 헤아리거나 아끼거나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한국말은 숨기지 않아요. 그래서 “너를 사랑해”라든지 “너를 아껴”라든지 “너를 좋아해” 하고 또렷하게 밝힙니다. 또는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가 아니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나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나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처럼 외칠 만해요.


  생각하기에 새로운 말이 태어납니다. 좋아하기에 알맞게 쓸 말을 떠올립니다. 사랑하기에 즐거이 나눌 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자, 한번 마음을 모아 봐요. 우리가 먼먼 날을 고이고이 가꾸면서, 앞으로 새로우면서 즐겁게 이어서 쓸 만한, 이쁘고 애틋하며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우면서 재미날 뿐 아니라, 싱그럽고 알뜰하며 즐거울 말 한 마디를 혀에 얹어 봐요. 우리가 주고받는 말은 언제나 가을하늘 같은 바람이 되고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2017.10.23.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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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6. 어정쩡한 겹말을 털고 말꽃으로



  2017년 10월에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이라는 글쓰기 사전을 한 권 써냈습니다. 이 글쓰기 사전에는 모두 1004가지 보기를 다룹니다. 어느 이웃님은 사람들이 어정쩡하거나 엉뚱하게 쓰는 겹말이 이렇게 많으냐며 놀랍니다. 그런데 저도 놀랐습니다. 느낌을 살리거나 힘주어 밝히려는 뜻이 아닌 자리에, 어정쩡하거나 엉뚱하게 말을 겹쳐서 쓰는 버릇이 대단히 널리 퍼졌을 뿐 아니라 숱하게 많은 모습을 보면서 저부터 제 글을 새롭게 가다듬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쓰기 사전인 《겹말 사전》을 써낸 뒤에도 겹말 보기는 꾸준히 모읍니다. 그야말로 끝도 없이 나오는데요, ‘시시때때로’나 ‘삼시세끼’나 ‘한도 끝도 없이’나 ‘누군가가’나 ‘무언가가’나 ‘가끔씩’이나 ‘이따금씩’은 매우 귀엽다고 할 만합니다. 이런 겹말은 살짝 손질해도 쉬 고칠 만하고, 가볍게 알려주어도 고개를 끄덕이겠지요. 그러면 다음에 드는 보기를 함께 살펴봐요. 우리는 참말로 우리 스스로도 못 깨닫는 채 온갖 겹말을 쓰고 맙니다.



마침 타이밍 잘 맞췄네 → 마침 잘 맞췄네

사찰을 다 다녔으나 그 절은 못 찾다 → 절을 다 다녔으나 그 절은 못 찾다

그곳에서 시작한 것이 처음이다 → 그곳에서 처음 했다

두어 번씩 정기적으로 → 두어 번씩 / 두어 번씩 꾸준히


없는 척 가장하더라도 → 없는 척하더라도 / 없는 척 꾸미더라도

해안도로를 달리는 길 → 바닷가를 달리는 길 / 바다를 끼며 달리는 길

종류를 나누다 → 나누다 / 갈래를 짓다 / 갈래짓다

혼자라는 고독을 체감하다 → 혼자라고 느끼다 / 외롭다고 느끼다


침입해 들어오다 → 쳐들어오다 / 마구 들어오다

몸으로 실천하다 → 몸으로 하다 / 몸소 하다

힘든 노동일에 종사하다 → 힘든 일을 하다 / 힘든 일을 맡다

희게 탁해지다 → 허얘지다 / 뿌얘지다


겹겹이 포개다 → 포개다 / 겹겹이 두다

내 적성에 맞다 → 내게 맞다 / 나한테 어울리다

키 작은 관목 → 키 작은 나무 / 떨기나무

꾸미고 치장한다 → 꾸민다

소수의 몇 그루가 생존하다 → 몇 그루가 살아남다 / 몇몇 그루가 살아남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할 일 → 무엇보다도 할 일 / 먼저 할 일

본을 보이다 → 보기를 들다 / 보여주다 / 거울이 되다

날이 잘 서 예리하다 → 날이 잘 서다 / 날카롭다

딸기를 마음껏 만끽하다 → 딸기를 마음껏 먹다 / 딸기를 누리다


스케일이 크다 → 크다 / 통이 크다

이러한 일련의 글을 보면 → 이러한 여러 글을 보면 / 이러한 글을 보면

책의 저자입니다 → 책을 쓴 사람입니다 / 지은이입니다 / 글쓴이입니다

크게 심호흡을 하다 → 크게 숨을 쉬다 / 크게 들이마시다


조용히 침묵하다 → 조용하다 / 입을 다물다

남녀노소 누구나 → 누구나

서울로 상경하다 → 서울로 가다

시골로 낙향하다 → 시골로 가다


농사일로 바쁘다 → 농사로 바쁘다 / 흙짓기로 바쁘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다 → 묵은 것이 내려가다 / 얹힌 것이 내려가다

작은 형태의 책 → 작은 책

도중에 중퇴했다 → 중퇴했다 / 다니다 그만뒀다

직감적으로 느끼다 → 곧바로 느끼다 / 바로 느끼다



  우리는 왜 겹말을 쓸까요? 첫째로는 말이나 글을 쉽게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하면 될 말이나 글에 자꾸 뭔가 덧붙이려 하면서 겹말이 되고 맙니다. 뭔가 붙이거나 꾸며야 그럴듯해 보인다거나 뜻이 또렷하다고 잘못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큰 책이면 “큰 책”이라 하면 됩니다. 빠르게 달리면 “빠르게 달린다”라 하면 됩니다. “큰 형태의 책”이나 “빠른 속도로 달린다”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음으로 한국 사회는 ‘겹말 굴레’에 갇혔습니다. 겹말 굴레란, 쉽거나 수수하거나 또렷한 말로 생각을 나타내지 못하도록 얽매이거나 꼬인 굴레라 할 만합니다. 우리한테는 한국말이라는 텃말이 있습니다만, 예부터 권력자하고 지식인은 중국 한문을 높이 여겼습니다. 이러다 보니 ‘어머니·아버지’는 낮춤말로 삼고 ‘모친·부친’은 높임말로 삼고 말지요. 여기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말만 써야 한 서른 몇 해를 보냈고, 일본 한자말이 신문이나 책이나 방송을 거쳐 어마어마하게 밀려들었습니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다가 대학 학문까지 죄다 일본 한자말로 범벅이 되었지요.


  그리고 한국 사회는 조선 봉건 부스러기하고 일제강점기 찌꺼기를 털 겨를이 없었어요. 해방 뒤로는 독재와 새마을운동과 경제성장이라는 채찍질에 시달리면서 말을 말답게 건사하거나 글을 글답게 갈무리하는 살림을 못 지었어요. 이러면서 눈부신 인터넷 나라로 달라지는 동안 한국말은 ‘의사소통 도구’로조차 구실을 못할 만큼 나뒹굽니다.


 책의 작가·책의 작자·책의 저자·책의 필자 → 지은이·글쓴이·책쓴이


  불거지거나 늘어나는 겹말을 걷잡지 못하는 까닭을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새로운 낱말을 지어서 살찌우겠다는 생각을 못하기 일쑤입니다. 맞춤법하고 띄어쓰기하고 표준말이라는 데에 너무 얽매이지요. 서로 생각을 즐거이 나누도록 돕는 말법이 아닌, 틀에 맞추지 못하면 ‘틀렸어!’나 ‘잘못이야!’ 같은 손가락질을 하는 말굴레가 억누르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면 고장말(사투리·텃말·마을말·시골말)은 문학에서도 버림을 받고, 책이나 교과서나 방송에서는 더더욱 못 나옵니다. 고장마다 말이 달라 ‘어머니’라는 표준말이 아닌 ‘어무이·오마니·어매·오마이·어마이·엄매·엄메·움마’ 같은 고장말을 쓰지만 정작 이러한 여러 고장말은 차츰 설자리를 잃습니다. 한국말에는 ‘진지’나 ‘여쭈다’나 ‘계시다’처럼 꼴이 아예 다른 높임말이 더러 있으나, 자리나 말씨에 따라서 여느 말도 모두 높이는 느낌을 나타내요. ‘어머니·어무이……’만으로도 얼마든지 높이는 말을 나눌 수 있어요. 토씨에 따라서도 높이고요. 이러한 말결을 제대로 못 가르치면 “저희 어머니 아무개 모친은” 같은 겹말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새로 나온 최신곡”이 아닌 ‘새노래’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바꾸고 교환하”지 말고 그냥 ‘바꾸’면 좋겠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 아닌 ‘옛이야기’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놀랍고 충격적”이라 여기지 말고 ‘놀랍게’ 여기면 좋겠어요. “반질반질 광이 나”게 안 닦아도 좋으니 ‘반질반질’ 닦으면 좋겠어요. “딱 잘라 거절하”지 말고 그냥 ‘딱 자르’면 돼요.


  학교나 사회는 ‘석차순’으로 사람을 가르곤 하는데 ‘석차’나 ‘성적순’으로는 이제 그만 가르면 좋겠어요. “작은 사이즈”인 옷을 입겠다며 “다이어트로 살을 빼”는 일을 굳이 안 해도 되지요. ‘작은’ 옷도 좋고, ‘살빼기’를 안 해도 좋아요. “늦게 핀 대기만성”이 아닌 ‘늦게 핀’ 꽃이거나 ‘늦꽃’일 뿐이에요.


  곱게 말꽃을 피우면서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며 쉽게 말하려고 하면 겹말은 말끔히 사라져요. 투박한 시골말을 쓰거나 수수한 고장말을 사랑할 적에도 겹말은 눈녹듯이 사라져요. ‘오밤중’도 ‘야밤’도 아닌 ‘한밤’에 별잔치를 보며 생각합니다. 겹말이나 군말에서 거품을 빼면서 홀가분하게 피어날 이야기꽃을 그립니다. 2017.11.2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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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4. 어깨동무하는 말로 거듭나기




  냇물이 흐릅니다. ‘내’는 ‘시내’보다 큰 물줄기입니다. ‘시내’는 ‘실 + 내’라고 하니 작은 물줄기예요. ‘시냇물’은 작고 ‘냇물’은 크지요. 그런데 다리가 놓인 냇가에 가 보면 나라에서 세운 알림판에는 ‘하천’이라고만 적혀요. ‘하천(河川)’은 어떤 낱말일까요?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하천 : 강과 시내를 아울러 이르는 말. ‘내’로 순화”로 풀이합니다.


  사람들이 쓰기에 알맞지 않아서 고쳐써야 할 한자말 가운데 하나가 ‘하천’인 셈입니다. 그렇지만 공공기관을 비롯해서 학계에서도 ‘내·냇물’이라는 낱말을 안 쓰고 ‘하천’만 쓰기 일쑤입니다.


  물이 흐릅니다. 반반한 곳이라면 물이 안 흐르지만, 어느 한쪽으로 조금만 기울어도 물이 흐릅니다. ‘반반하다’나 ‘판판하다’를 두고 한자말 ‘평평하다(平平-)’를 쓰기도 하고 ‘편평하다(扁平-)’를 쓰는 분이 있는데요, ‘반반하다·판판하다’ 두 마디로 넉넉하지 않을까요?




판판하다 : 물건의 표면이 높낮이가 없이 평평하고 너르다


평평하다(平平-) : 1. 바닥이 고르고 판판하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판판하다’는 ‘평평하다’로 풀이하고, ‘평평하다’는 ‘판판하다’로 풀이합니다. 얄궂은 돌림풀이예요. 쉽고 수수한 한국말 한 마디이면 넉넉한데, 쉽고 수수한 한국말을 굳이 한자말로 옮기던 옛날 한문 말씨 버릇 때문에 여러모로 어지럽다고 할 만해요.


  한국말은 결을 살리는 대목이 남다릅니다. ‘빨갛다·발갛다·뻘겋다·벌겋다’처럼 결에 맞추어 가지를 치지요. 한 낱말만 제대로 알면, 결을 살려서 느낌을 살짝살짝 달리하는 낱말을 끝없이 지을 수 있어요.


  이 얼개를 헤아리면서 한국말을 새롭게 배우려는 마음이 된다면, ‘반반하다·판판하다’를 바탕으로 ‘번번하다·펀펀하다’를 쓸 수 있습니다. ‘뻔뻔하다·빤빤하다’로 가지를 칠 수 있고, 말놀이 삼아서 ‘뱐뱐하다·변변하다’나 ‘퍈퍈하다·편편하다’처럼 느낌을 재미나게 북돋울 만하지요.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가리킬 적에 으레 ‘주부·가정주부’라는 한자말을 써요. 한자말을 쓰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이제 한자말은 평등하거나 평화로운 새로운 터전에서 쓰기에는 꽤 낡은 결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주부·가정주부’에서 ‘주부(主婦)’는 가시내만 가리킵니다. 이는 무엇을 나타낼까요?


  집에서 집안일을 맡는 사람은 오직 가시내라고 하는 생각을 한자말 ‘주부·가정주부’로 나타낸다고 할 만해요. 다시 말하자면 가부장 권력 얼거리에서 쓰던 한자말 한 마디는 집에서 일하는 가시내한테뿐 아니라 집에서 일하고 싶은 사내한테도 평등하지 않고 평화롭지 않습니다. 집안일을 도맡거나 즐기는 사내한테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요?


  한국말에는 ‘그녀’가 없어요. ‘그녀’라는 어설픈 말씨는 ‘she’를 옮기려고 애쓰던 일본사람이 지은 일본말이에요. 일본말 ‘피녀(彼女)’를 한글로 바꾸어 ‘그녀’처럼 쓰곤 하지만, 널리 퍼진 말씨라고 해도 한국말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왜 ‘그녀’는 한국말이라고 하기 어려울까요? 한국말에서는 사내하고 가시내를 가르는 말씨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 한 마디로 사내도 나타내고 가시내도 나타내요. ‘그이·저이·이이’라는 낱말로 사내랑 가시내를 나란히 나타내지요.


  그러면 집에서 여러 일을 맡는 사람을 한국말로는 어떻게 가리킬까요? 바로 ‘살림꾼’입니다. 한국말 ‘살림꾼’은 살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나 살림을 훌륭히 하는 사람을 가리켜요. ‘살림꾼’은 가시내한테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사내도 살림꾼이고 가시내도 살림꾼이에요.




  우리 사회가 민주·평등·평화로 한 발짝씩 나아가는 길에 힘을 모으려 한다면, 우리가 여느 자리에서 쓰는 수수한 말씨를 더 깊고 넓게 헤아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집에서 밥을 짓고 옷살림을 건사하며 이모저모 치우고 쓸고 갈무리하는 알뜰한 사람을 두고 ‘주부·가정주부’ 아닌 ‘살림꾼’이라는 낱말을 쓸 수 있을 적에 참말로 민주나 평등이나 평화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어요.


  집안일은 사내하고 가시내가 어깨동무하면서 할 일이에요. 집살림도 사내랑 가시내가 손을 맞잡으면서 할 일이지요. 사내도 밥을 짓고 빨래를 잘 해야 합니다. 가시내도 밥짓기랑 빨래하기를 솜씨있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살림꾼’이라는 오래된 한국말에 새롭게 옷을 입혀 보고 싶어요.




 살림지기 / 살림님 / 살림이




  책방을 지키는 이는 ‘책방지기’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이는 ‘나라지기’입니다. 마을을 지키면 ‘마을지기’, 학교를 지키면 ‘학교지기’, 운동경기에서 안방을 지키면 ‘문지기’, 숲을 지키면 ‘숲지기’입니다. 가만히 보면, 광주시장은 ‘광주지기’요, 서울시장은 ‘서울지기’입니다. 시장이라는 공무원이 아닌 여느 사람들도 사랑으로 우리 고장을 지키려 한다면 모두 ‘지기’예요.


  지키는 씩씩한 마음을 헤아려 ‘살림지기’라는 낱말을 쓸 만합니다. 다음으로 ‘님’이에요. ‘살림님’이지요. 지키는 씩씩한 마음에다가 집안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으로 어루만질 수 있는 넋이기에 하느님 같은분이라는 뜻으로 ‘살림님’이라 할 수 있어요.


  둘레에서 “그대는 아름다운 살림지기입니다.”라든지 “아버지는 멋진 살림님이에요.” 하고 부추기거나 기릴 수 있어요. 이때에 살림지기나 살림님이라는 이름이 아무래도 멋쩍다 싶으면, “아니에요. 저는 그저 수수한 ‘살림이’입니다.” 하고 한 마디를 할 만해요. 살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수수하게 밝혀서 ‘살림이’예요.




  한국말은 ‘-꾼’이나 ‘-이’를 붙여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나타내곤 해요. 여기에 ‘-지기’나 ‘-님’을 가만히 붙이면 한결 재미있고 뜻있기까지 합니다. 아이들은 아직 일꾼이 아니고 심부름꾼이에요. 심부름을 잘 하는 아이들한테 ‘심부름님’이라 해 볼 수 있습니다. 심부름을 도맡는 멋지고 씩씩한 아이들한테는 ‘심부름지기’라 해 볼 수 있어요.


  글을 잘 쓰거나 가다듬는 분이라면 ‘글지기’가 되는데, 이 글지기는 ‘편집자’라는 이름하고 잘 어울려요. 그렇다면 작가는? ‘작가’는 ‘글님’이 되겠지요. 글지기하고 글님이 만나서 글꾸러미(책)를 엮습니다. 글꾸러미를 읽어 주는 이웃님은 ‘글벗’입니다. 함께 글을 쓰는 이웃이라면 ‘글동무’예요. 여기에서도 ‘


글벗지기·글벗님’이나 ‘글동무지기·글동무님’처럼 더 살을 붙일 만합니다.


  즐겁게 생각을 북돋우면서 즐겁게 말을 북돋아요. 상냥하게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상냥하게 말을 북돋웁니다. 어깨동무하려는 평등한 생각에서 어깨동무하는 평등한 말이 태어나고, 손을 맞잡는 평화로운 마음에서 손을 맞잡는 평화로운 말이 싹틉니다. 2017.9.15.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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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3. 가위손을 쥐고 꽃길을 걷고


  책을 부치려고 봉투질을 하다 보면 테이프를 자주 써야 합니다. 이제까지 가위 한쪽 날로 테이프를 끊어서 쓰다가 아무래도 번거롭구나 싶어서 읍내 문방구에 가서 연장을 따로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문방구 일꾼한테 “테이프를 끊어 주는 연장 있잖아요.” 하고 말씀을 여쭙는데, 이 연장을 두고 어떤 이름으로 말해야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읍내 문방구 일꾼은 “아, 가위손이요.” 하고 알아들으신 뒤 물건을 내어줍니다.

  넓은 테이프를 끼워서 척척 끊을 수 있도록 나온 연장은 이삿짐을 나르는 분들이든 상자를 꾸려 소포를 부치는 분들이든 무척 흔하게 써요. 제가 읍내 문방구에서 장만한 연장에는 ‘가위손’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이 이름 말고도 ‘커터기·카타기·컷터기’처럼 영어를 섞거나 ‘절단기’ 같은 한자말을 쓰기도 해요.

  가만히 생각하면 영화 〈가위손〉에서 좋은 보기를 얻으며 테이프를 끊는 연장에 ‘가위손’ 같은 이름을 붙였구나 싶어요. 한국말사전에서 ‘가위손’을 찾아보면 “1. 삿자리 따위의 둘레에 천 같은 것을 빙 돌려 댄 부분. 또는 그 천 2. 그릇이나 냄비 따위의 손잡이”를 가리키는 뜻풀이가 나옵니다. 한국말사전에 나오는 ‘가위손’은 가장자리를 대는 천이나 가장자리에 있는 손잡이를 가리키니, 테이프를 끊는 연장하고는 사뭇 달라요. 재미나게 잘 살려서 쓰는 낱말이 하나 있고, 이 땅에서 오래도록 흘러온 살림말 하나를 새삼스레 익혀 볼 수 있어요.

  요즈막에 사회에서 ‘흙수저·금수저’ 같은 말이 나돌면서 ‘꽃길’이라는 말이 함께 나돕니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꽃길’이 올림말로 있습니다만 “꽃이 피어 있거나 꽃으로 장식된 길”이라고만 풀이해요. 꽃이 있으니 꽃길일 테고, 꽃으로 꾸몄기에 꽃길일 텐데, 요즈막 사회에서 널리 쓰는 꽃길은 이와는 다른 결입니다. 앞으로 밝게 이어지거나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기는 길을 나타내려는 새로운 꽃길이라고 할 만해요.

  또 한 가지 생각해 본다면 영화 〈화양연화〉가 널리 사랑받은 뒤로 ‘화양연화’라는 이름도 제법 퍼지곤 합니다. 사전에 안 나오는 중국말인 ‘화양연화’는 “꽃다운 나날”을 뜻해요.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낱말을 짓는 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꽃다운 나날”이나 “꽃 같은 날”을 간추려서 ‘꽃날’이라는 낱말을 써 볼 만합니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꽃날’이 올림말로 있습니다만, 어느 변말로 다루기만 해요. 꽃다운 나날이나 꽃 같은 날을 가리키는 뜻하고는 좀 동떨어져요.

  눈부신 꽃과 같은 삶을 가리키는 자리에 ‘꽃날·꽃삶’ 같은 새말을 즐거이 써 볼 만합니다. ‘꽃빛·꽃길’ 같은 새말을 함께 써 볼 수 있어요. 낱말에 더 힘을 실어 본다면 ‘꽃잔치날·꽃잔치삶’처럼 써 볼 만하고, ‘꽃잔치빛·꽃잔치길’이라 해 보아도 무척 좋아요.

  수저를 두고 살림살이를 빗대어 보려 한다면 ‘꽃수저’ 같은 이름을 써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하건 가멸차건 어버이가 아이를 꽃다이 돌보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받는 사람을 두고서 꽃수저라 해 볼 만합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라면 ‘시골수저’가 될 테고, 서울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라면 ‘서울수저’가 될 테지요. 여기에서 더 생각한다면 ‘숲수저’나 ‘들수저’ 같은 이름을 써 볼 만해요. 어릴 적부터 숲이라고 하는 너른 터전을 마음껏 누리는 아이라면 숲수저입니다. 들을 시원스레 달리듯이 신나게 뛰노는 어린 나날을 누리는 아이라면 들수저가 되어요.

  바닷가에서 태어난 아이는 ‘바다수저’라 할 수 있습니다. 골목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는 ‘골목수저’라 할 수 있어요. ‘바람수저’라는 이름을 지어서 바람처럼 홀가분하면서 넉넉하고 고운 숨결을 물려받았다는 뜻을 나타내 보아도 돼요. 해님 같은 따사로운 사랑을 받는다는 뜻에서 ‘해수저’라 해 볼 수 있고요.

  우리한테는 생각하는 힘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힘을 놓고 한자말로는 ‘상상력·창의력’이라고도 하는데, 쉽고 수수하게 ‘생각힘’이라 할 수 있고 ‘꿈힘(꿈꾸는 힘)’이나 ‘슬기힘(슬기롭게 내는 힘)’이라는 이름을 써 보아도 재미있어요. ‘지음힘(새롭게 지어낼 줄 아는 힘)’ 같은 이름을 써 볼 수 있을 테고요.

  생각힘을 살짝 북돋아 본다면 커다란 가게에서 흔히 하는 ‘원 플러스 원’을 ‘더하기잔치’나 ‘더하기’나 ‘더하기날’처럼 가다듬어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앞서 읍내마실을 갔다가 읍내가게에서 “이 물건은 더하기 행사를 해요. 하나 더 가져가셔요.” 하고 들려주는 말을 들었어요. 제가 사는 고장은 워낙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계신 시골인 터라, 읍내가게 일꾼이 영어로 ‘원 플러스 원’이라 말할 적마다 다들 못 알아들으셨으리라 느껴요. 이러다 보니 읍내가게 일꾼 스스로 말을 바꾸어 “더하기 행사”라는 이름을 그분들 스스로 지어서 썼구나 싶더군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눈높이를 맞추면서 재미난 말이 하나 태어난 셈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들어오는 문화나 문명이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낮고 작고 여린 사람들 눈높이를 헤아려 보는 마음이 있다면, 무척 쉬우면서 재미있고 뜻있는 낱말을 누구나 새롭게 지을 수 있어요.

  더 헤아려 보면 지난날에는 ‘덤’이라는 말을 썼어요. “하나는 덤입니다”처럼 썼지요. 더 주기에 ‘덤’인데, 덤에 말꼬리가 붙어 ‘덤터기’가 되면 남한테 씌우거나 남한테서 억지로 넘겨받는 짐이나 걱정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말끝 하나로 뜻하고 쓰임새가 사뭇 달라지는 얼거리예요. 말놀이라고 할 만합니다. 삶을 수수하게 나타내면서 살림을 즐겁게 그리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이웃님이 열 살 아이한테 “아주머니는 바다 근처에 살아요.” 하고 말씀하는데 열 살 아이는 ‘근처’라는 낱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근처’라는 한자말 소릿결이 낯설고 뜻은 도무지 모르는 눈빛입니다. 옆에서 이 말을 함께 들은 제가 다리를 놓아서 열 살 아이한테 한 마디를 거들어 주었어요. “‘바다 근처’는 바다에서 가까운 곳이라는 뜻이야. 아주머니는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 사신대.” 하고 알려줍니다. 그제서야 열 살 아이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근처(近處)’라는 한자말은 어른한테는 퍽 흔하거나 쉬운 낱말일 수 있어요. 이 한자말을 쓰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굳이 안 써도 될 만하다는 대목을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옆’이나 ‘곁’이나 ‘둘레’나 ‘가까이’ 같은 낱말을 써 보면 누구나 곧장 알아들어요.

  어느 어른은 ‘근린(近隣)’이라는 한자를 붙여 ‘근린공원’ 같은 이름도 쓰는데요, ‘근린공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는 어린이나 푸름이는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근린’이라는 한자말은 이 자리 빼고는 거의 아무 데도 안 써요.

  마을에 가까이 있는 공원이면 ‘마을공원’이나 ‘마을쉼터’라 하면 됩니다. ‘근린’을 뒤집은 한자말 ‘인근’도 ‘옆·곁·둘레·가까이’ 같은 쉬운 한국말로 부드러이 걸러내어 쓰면 한결 좋아요. 때로는 ‘이웃’이라는 낱말로 걸러낼 수 있습니다. ‘마을쉼터’나 ‘이웃쉼터’라 할 수 있고, ‘손바닥쉼터’나 ‘한뼘쉼터’나 ‘자투리쉼터’나 ‘골목쉼터 같은 이름을 얼마든지 새롭고 아기자기하게 붙일 수 있어요.

  가위손을 쥐고 꽃길을 걸어 볼 수 있을까요. 언제나 꽃날 같은 삶을 누리면서 서로서로 즐겁게 꽃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덤터기 아닌 덤을 나누면서 사이좋은 이웃으로 어깨동무하는 나날을 이룰 수 있을까요. 마을마다 마을쉼터가 있는 나라가 되고, 마을쉼터에는 우람한 나무가 자라서 여름에는 그늘을 베풀고 겨울에는 찬바람을 그어 주는 고마움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 곁에 사랑스러운 말이 있습니다. 우리 둘레에서 쉬운 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까이에서 고이 마음을 기울이면 다 함께 눈부시게 피어나는 꽃잔치말을 상냥하게 주거니 받거니 할 만합니다. 꽃내음이 흐르고 꽃노래 같은 기운이 감도는 꽃살림말을 싱그러이 혀에 얹어 봅니다. 2017.7.17.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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