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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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턴가 인터넷 카페에 들르는 일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가족과도 나누지 못한 고민을 그곳에 글로 내려놓으면 지나치던 이들이 자취를 남겼다. 경험을 담은 조언과 위로는 알 수 없는 신뢰와 힘을 만들어냈다. 댓글에 댓글이 달리며 공감이, 대화가 이어졌다. 작고 소소한 일상에도 칭찬과 격려의 호응이 남았다. 누군가가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일상은 아름다웠다. 인터넷 카페에서 이들은 앞뒤 사정 따윈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후를 염려할 것도 챙겨야 할 무엇도 없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지금 다정했고 따뜻했다. 
 『댓글부대』를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는 이곳에 얼굴 없이 모여들게 된 것일까. 이웃과 친구가 아니라 얼굴 없이 존재하는 인터넷 속 이들에게 걱정을 나누고 일상을 나누게 된 것일까. 다정한 말로 격려하고 정보를 공유하면서, 그러다 유예 없이 화를 내고 폭언을 던지면서, 형성되고 파괴되는 관계란 무엇일까. 옹기종기 모여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너무나 당연해서 무감했던 그 공간을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나는 점점 짙어지는 서러움과 쓸쓸함을 느꼈다.   

 장강명 소설 『댓글부대』는  2012년 대선과 관련한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 이후, 사이버 공간에 나타난 '제2세대 댓글부대'를 주인공으로 한다. 얼굴 없이 행해지는 폭력과 조작, 그로 인해 일어나는 왜곡과 오해, 타깃이 붕괴되고 분해되는 과정들이 입이 떡, 벌어지도록 차려진다. 
 팀-알렙으로 함께 활동하는 찻탓캇과 삼궁, 01査10. 이들은 의뢰받은 사람을 향한 댓글 공격 - 정치인들의 비방, 개인이나 기업을 향한 근거 없는 모략과 모함-으로 여론을 만들고 압박하는 일을 실행하며 돈을 벌었다. 팀-알렙은 자신들의 철저한 연구와 계획으로 끈끈하게 뭉쳤던 사람들을 선동하여 서로 헐뜯고 분노하다 등돌리게 했다는 점에서 강한 자부심을 느꼈다. 세상을 주무르고 있다는 착각. 돈을 아껴 여자를 만지기 위해 김밥천국을 들러 단란 주점을 가던 찌질이들이 의뢰인의 상류층 밤 문화를 나란히 앉아 누릴 때, 그들은 불길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한 바가지의 물이면 곧 꺼져버릴 거품처럼.  
 무심히 보아 넘겼던, 때론 동조했던 댓글이 누군가의 계산된 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몸서리치게 했다. 그곳에선 모두가 서로에게 대접받기를 구걸하고 있었다. 기분이 상하면 상대의 옆구리를 발로 차기도 하면서.

사람이란 게 참 신기해요. 진짜 그 짧은 글로 상처를 입어요. 여러 명이 댓글로 '너 틀려먹었다, 저질이다, 반성해라' 이러고 돌아가면서 공격하면 어지간한 사람은 버텨내질 못해요. 웃기죠? 아는 사람이 하는 말도 아니고, 앞으로 만날 일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당사자에 대해 쥐뿔 아는 것도 하나 없는데. 사실은 남자 셋이서 돌려쓰는 가짜 아이디인데. -p.81

 현실에서 아무것도 되지 못한 존재의 손에 다정한 신호로 일어난 관계는 무방비한 이들을 휘어잡았다. 칭찬과 공감이 절박한 세상에 작은 버튼 하나로 여는 창은 보고 싶은 세상과 듣고 싶은 이야기들만이 가득했다. 그곳은 같은 생각을 가진 무리에 숨어들어 다른 생각을 향해 비방할 수 있었다. 불편한 메아리가 돌아오면 상대를 물어버릴 듯 으르렁거리다 언제든 내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보이지 않게 주입된 생각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주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댓글로 여과 없이 내뱉고 키득거렸던 언어를 정제하여 내뱉어야 하는 현실은 불편했다. 그런 현실을 물고 들어가 기다리고 있는 회원들과 씹고 뱉으며 느끼는 동질감은 컸다.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많다는 안도. 찌질한 인사가 나만은 아니라는 생각. 안쓰럽고 처절한 모양새로 가장 잘난 듯 취하는 포즈는 벌거벗은 몸을 보는 것보다 더 치욕스럽고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 그 치욕을 견뎠다. 책임감이 소멸된 공간으로써, 그곳은 나를 나이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호랑이인형이 머리에 쓰고 있던 커다란 탈을 벗었다. 탈 아래에는 머리카락이 땀에 푹 젖은 찻탓캇 또래 젊은이가 있었다. 여드름이 덕지덕지 난 청년이었다. 청년은 탈을 화장실 바닥에 내려놓고 세면대에 머리를 숙이더니 세수를 했다. 그는 못이 말랐던지 손바닥에 수돗물을 받아 몇 차례나 마셨다. 땀 냄새가 시큼하게 났다.
찻탓캇은 자신이 호랑이인형을 쓰고 춤을 추며 돈을 벌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p.179

 호랑이인형을 쓴 현실과 댓글로 만들어진 허상의 현실. 이 둘이 대비되어 만들어낸 비애는 사실이었다. 사실을 외면하면서 진실에 끌리는 사람들의 모순. 가장 연약한 그 틈을 파고드는 만들어진 진실에 사람들은 마음을 쏟았다.
 호랑이인형을 외면했던 찻탓캇은 많은 돈을 벌었고 술집 여자의 기둥서방이 되는 꿈을 꾸었지만 마지막은 배신이었다. 인정받았다고 자신한 일에서 모든 쓸모를 다한 뒤 살해됐다. 고위 간부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자만이 들어찬 젊은이들의 축배엔 죽음의 마침표가 찰랑거렸다. 가상의 공간을 그럴듯한 진실로 꾸며 뒤엎던 자신만만한 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삶을 조작하는 돈과 권력의 힘은 제어하지 못 했다. 

"읽는 모두가 조금씩 불편해지길 바라며 썼다."

 나쁜 일을 저지른 이들이 벌을 받듯 불길한 축배의 잔이 당연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던 건 결국 이용당한 약자가 벌을 받고 일을 벌인 이들은 가만히 남게 된다는 점이었다. 서로를 이용하고 이용당하며 무언갈 얻길 바라는 사람들의 폭력성은 끊임없이 우리들의 허전한 마음속에 가장 따뜻한 손으로 다녀갈 것이다. 
 장강명 작가의  『댓글 부대』가  '2016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을 때, 이미 많은 이들이 인터넷 속에서 일어나는 허울들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곳을 다시 찾아가 허울을 만지고 동조하길 멈추지 않는 까닭은, 현실에선 찾고 노력해야 하는 관계들이 찾아와 놓이기 때문이다. 내가 자르고 붙일 수 있는 관계들이, 그 폭력성이, 그리고 거기서 오가는 온기나마 나의 존재감을 어루만지고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외로움에 다가 서고, 그 후엔 상대를 조종하려 애쓰는 모순 속에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조종하고 조종 당하고 서로 낚고 낚이면서.
 빠르게 읽히지만 빠르게 잊혀지지 않는 소설이었다. 
 
 어느 날 내가 속해 있는 지역 카페에서 한 중고차 딜러의 글을 읽었다. 얼마 벌지 못해도 자신의 일에 소신을 갖고 일하는 그는 아는 이에게 중개금 약간만을 받고 중고차를 연결해주었다. 그런데 그 차에서 중개 전 알아차리지 못한 결함이 발견되었고 자신이 수리비를 물어야하는지, 수리비를 부분이라도 물어야겠지만 이래저래 빠져나가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일이 헛헛하다는 울음 섞인 하소연이었다. 댓글은 그를 응원하고 격려하며 열심히 사는 그에게 중고차를 연결받고 싶다는 지지로 이어졌지만... 나는 어쩐지, 잘 짜여진 광고로 읽혔던 것이다. 그가 벌인 진실 장사에 낚여가는 사람들의 모양을 보면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이 되어 내가 믿는 것이 진짜일까, 아니 가짜일 수도 있잖아? 하는 마음을 오락가락하며 확신을 찾아 그 글을 들락날락했던 기억.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확실히 인터넷 카페를 찾는 횟수가 줄었다. 감정이 매마른 것일까. 볼 것을 보고만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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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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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아버지가 늦은 저녁 사주시던 양념통닭은 그야말로 행복이었다. 저녁식사 때 아버지께서 “고추 한 입 먹으면 통닭 사줄게” 하신 농으로 고추 한 입 물고 벌겋게 달아올라 주방으로 달려갔던 일도 있다. 바스락거리는 봉지가 계단을 올라오다 빌라 2층 우리집 현관 앞에 멈춘다. 두근두근두근…… 띵동! 매콤하고 달달한 향을 풍기며 통닭이 현관을 넘는다. 봉지 속 통닭은 고무밴드로 상자속에 얌전히 고정되어 있지만 벌어진 옆구리로 고소한 기름냄새며 반지르르한 윤기가 새어나와 나를 애태운다. 땅콩가루가 뿌려진 닭조각들이 인정넘치게 담긴 상자가 열리기도 훨씬 전에 나는 이미 통닭을 먹는 시뮬레이션을 끝냈다. 손이며 입 주변 가득 양념을 묻히며 먹고, 아쉬운 맘에 먹은 닭뼈를 다시 뜯었다. 화장실에 동생과 마주 앉아 손과 입을 비누로 닦을 땐 얼굴에 맺힌 웃음이 만져졌다. 뱃속을 가득 채운 행복감이 출렁거렸다. 
 먹고 싶어도 쉽게 먹을 수 없던 귀했던 음식들. 쏘세지 반찬, 치킨, 피자 짜장면 탕수육 들. 불쑥, 혹은 약속으로 부모님이 그 음식을 사주시는 날이면 기다림이 생겼고 매번 특별한 날이 되곤 했다. 이젠 서른 중반이 되어 두 아이의 엄마로 그 날의 음식들을 마주한다. 집에서 해먹는 것보다 배달음식이 시간과 돈에서 경제적이다 할만큼 배달문화는 크게 발달했다. 아이들이 먹고 싶다 할 때, 내가 먹고 싶을 때 전화로 주문하고 내 할 일을 하다보면 4~50분 안팎으로 음식이 배달되었다. 짜장면, 피자, 치킨에서 그쳤던 배달음식은 백반, 떡볶이, 곱창, 도시락, 햄버거 샐러드 등등으로 다양해졌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고민없이 핸드폰을 열어 전화번호를 검색하고, 어플을 통해 맛집을 추천받아 주문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제 방에서 놀다 음식이 배달되어도 내가 불러야 나온다. 상 위에 포장된 음식을 펼쳐 아이들과 먹는데 좀처럼 입맛이 돌지 않는다. 어린 날 통닭 한 마리가 놓인 상은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해보였는데, 피자와 치킨 세트가 오른 상이 어쩐지 허전하기만 하다. 음식이 있으니까 꾸역꾸역 뱃속으로 음식을 집어넣고 있다는 느낌. 아이들도 연신 콜라만 마시다 상을 떠난다. 먹고 싶다 조르다 몇 번의 거절 끝에 먹으면 그 날이 특별해졌던 음식들. 지금 아이들에겐 먹고 싶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쉬운 음식일 뿐이다. 일회용 봉지를 꺼내 남은 음식을 소포장한다. 흔해지고 쉬워지고 애틋함이 사라진 것들. 냉동실 안에, 전화 너머에 음식들은 널려 있다. 
   
  <황석영의 밥도둑>을 읽는데 내 어릴 적 부모님을 통해 먹었던 음식들이 생각났다. 대학 다닐 때, 직장을 다니며, 자유롭게 사먹었던 음식들 말고 놀이터에 놀다 들어가면 차려져 있던 저녁 밥상이나 시장에서 엄마가 쥐어준 떡꼬치나 핫도그, 고3이 되어 책상 앞에 앉은 내게 퇴근길에 사다주시던 밤식빵 같은 것들, 거기엔 식지 않고 나를 힘나게 하는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작가는 음식을 통해 함께 있었던 이들을 생생하게 추억한다. 버겁고 고통스러웠던 시간 속에서 음식으로 위로 받고, 음식으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나가며 지금에 이르게 된 삶의 걸음은 이제 그 시간을 돌아보며 깊은 그리움을 부른다. 북에서 아버지를 따라 내려와 또 다른 고향을 갖게 하고, 수감 중인 감옥에서, 유배지에서, 어느 날 떠난 여행지에서, 정을 붙이며 그곳에 자신의 흔적을 만들어 나가게 한 매개는 역시, 음식이었다. 삶의 설움을 녹여 간직하게 하는 것, 오늘의 매서운 바람을 견디고 내일로 나아가게 하는 것, 그것은 나를 위해 누군가가 건내 준 한 그릇의 음식, 한 덩이의 희망이었다.
 

 내가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지금은 먹을 수 없다거나 만들 수가 없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 때의 맛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람이 변했든지 세월이 변했든지 했을 터이기에. 
 -p.83, <배고픈 날, 장떡 지지던 냄새> 부분

 
  이젠 나 어릴 적 내 부모 나이가 되어 하고 싶은 일도, 먹고 싶은 것도 없이 시간을 보낸다. 해야 할 들과 고민은 끊일 줄을 모르고 마음은 늘 복잡하다. 그럼에도 살은 찐다. 좀처럼 채워질줄 모르는 허기가 부끄럽고 괴롭게 되었다. 이 허기의 근원이 무엇으로부터 오는지 나는 어쩐지 알 것 같다. 무엇을 채우지 못해 오는 허전함인지. 무엇을 알지 못해 오는 먹먹함인지. 먹는 일을 본능적인 행위라 여기고 배를 채우는 일 밖의 것을 생각해본 일이 없었는데 그 또한 사람으로써 가질 수 있는 소중한 행위이며, 아름다운 삶의 장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음식은 죽은 자마저도 곁에 생생히 머물게 하며,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지역마다 개발을 앞세워 아파트가 들어서고 지역의 특성을 지우며 트렌드에 따라 체인점들이 들어서버리는 현재가 씁쓸하다는 작가의 지적처럼, 어느 곳에서건 같은 음식, 같은 시간, 같은 추억을 살다 떠나게 될 일이 두렵고 안타깝다. 편리성을 추구하며 살수록 우리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채 획일화된 입맛과 비슷비슷한 문장들로 채워진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되어갈 것이다. 음식에 대한 추억은 사라지고, 편안해진 세상만큼 왕성해진 식욕과 쉬워진 음식 앞에 우리는 한 알의 약으로 식욕을 조절하면서 일부러 음식을 외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를 불행 앞에, 우리들에게 <황석영의 밥도둑>은 자신만의 도둑을 가지라 경고하는지 모른다. 열심히 바쁘게 살아가는 삶 끝에 결국 나를 웃게 하는 것은 어느 날 넘어져 울고 있던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내 손에 쥐어 준 요쿠르트 한 병, 같은 것이라는 걸, 그 기억들이 삶을 삽질하는 생의 숟가락을 놓을 수 없도록 만든다는 걸, 사람들은 잃어버렸다. 그것을 되찾고 나면, 삶은 분명 달라진다.
 
 책은 뒤로 넘어가는데, 내 기억의 페이지들은 앞으로 앞으로 빠르게 넘어가 나를 행복하게 했던 음식들을, 내가 사랑받았고 위로 받았던 순간들을 떠오르게 했다. 잊어버리다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그 날들을 이 책으로 되찾았다. 어린 날, 얼굴에서 만져지던 그 충만함이 음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이상 쉽게 만들 수 없을 소중한 몸의 기억이라는 것도, 이젠 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채우기 위해 먹을 음식들이 필요하다. 허기진 곳으로 가라고 맛도 모르고 꾸역꾸역 집어넣던 음식들을 치우고, 나를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기 위한 그런 한 상을 정갈히 차려보고 싶다. 그 마음부터 어쩐지 나를 설레고 배부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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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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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불행에 익숙하다. 이야기는 늘 불행을 따라 전해진다. 고단한 시간을 어떻게 지나가는 가에 우리는 관심이 있다. 공감은 쉽게 일어난다. 누구나 조금 다른 불행 위에 놓여있을 뿐이므로. 소설은 악몽을 견디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것이 진짜이든 아니든 나는 그곳에서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하다 이곳으로 돌아온다. 현실은 조금 덜 잔인하여 견딜 만 했다. 누군가의 고통을 읽고 불행을 음미하다 현실에 돌아와 개운한 얼굴이 되는 내가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날이 많았다.

 

​ 장강명 작가의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읽었다. 그의 전작 『호모도미난스』를 읽고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잃어버리게 하는 치밀한 상상력과 날 선 문장들 속에 상남자의 소설을 읽었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는데,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사건 후에 인물들이 시간을 겪으며 변화하는 심리들을 세심하고 정적인 문장으로 그려내어 사뭇 다른 감정선을 건드렸다.

 

동급생을 칼로 죽인 남자, 그의 손에 아들을 잃은 아주머니, 그리고 위로 받지 못한 유년을 보낸 여자. 이들의 기억이 엇갈리며 소설은 나아간다. 어느 날은 치밀하게 남자를 쫓는 아주머니가 잔인하다 싶었고, 어느 날은 칼로 몇 번이나 찌른 건 용서받을 수 없겠다 싶었고, 또 어느 날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도망치기를 바랐다.

기억은 본인에게 유리하게 흐른다. 그것이 본능이다. 감정이 개입되어 장면이 입력된다. 흩어진 퍼즐이 제자리를  찾아 그림을 완성되듯 그들의 기억 조각이 맞물리며 이야기가 선명해질 때 나는 울컥, 하는 눈물을 견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이 괴로웠다. 나는 누구의 편이었나. 나는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아주머니의 기억에는 남자다웠던 자신의 아들을 남자가 이유 없이 칼로 찔러 죽인 살인이었고, 남자의 기억에는 동급생의 괴롭힘을 참다 참다 저지른 충동이었다. 여자에겐 아버지와 닮았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미움을 받았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의 부정을 목격하고 견뎌야했던 불우한 유년이 있었다. 

 남자는 아주머니에게 영훈이는 남자답게 자신에게 친해지길 청했는데 받아주지 못했다고 했다. 여자의 친구는 그녀가 가족으로부터 그렇게 냉대받지 않았노라고, '따뜻한 말도 여러 번 했을 거야. 네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서 그렇지.' 라고 이야기했다. 고등학교 시절 여자의 열등감의 대상이었던 큰 보람이 중간 보람인 자신에게 은따를 당해 힘들어했었다는 친구의 말은 피해자였던 그녀의 이미지를 한 번에 뒤집는다. 알 것 같았던 그들이 도대체 어떤 이들인지 알 수 없게 돼버린 순간, 이야기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인물들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며 비난과 동정을 보내던 마음이 닿을 곳을 잃어버리고 텅 빈 그릇으로 엎어져 버렸다. 공정했다고 생각했는데 한 순간 판단을 잃어버렸다. 오판의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조차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정적의 시간이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함부로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누구의 잘잘못을 이야기할 것인가.

 아무도 그럴 자격이 없었다. 

살아갈수록 말이 줄어드는 까닭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기억은 '그믐'처럼, 보이지 않으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일 뿐이다. 남자가 지역 도서관의 의뢰로 마포 지역의 유래를 쫓고 지명에 대한 전승을 검증하러 다니며 반복하는 것은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 '가짜 유래'를 만들어냈고, 결국엔 '가짜 이야기가 나중에는 진짜 기억이 되었다' 는 것이었다. 결국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닿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은 진실성을 갖추기 어렵다.

 자, 이제 당신은 이 소설을 읽고 어떤 말을 시작하고 싶은가?  살인? 우주 알? 패턴? 미술관? 집요한 아주머니? 아주머니의 괴롭힘을 뿌리치지 못하는 남자?

 처음의 내가 그러한 물음을 품고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도서관에 대해, 캐비닛에 관해, 남자의 냄새에 관해, 달맞이언덕에 관해 말하고 싶다. 하나의 공간에 담겨 온화한 빛을 내던 남자와 여자의 시간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미 알고 있는 결말로 흐르는 그들의 시간은 다시 보아도 거짓말 같지 않았다. 먹먹하고 따뜻했다. 여자의 평범한 삶 속에 뛰어든 남자. 이별할 줄 알고 있었고, 죽을 줄 알고 있었던 그들이 그럼에도 함께 할 것을 선택했고 그것은 소설이 되었다. 한 개인에게 평범하게 존재하던 패턴을 뒤흔든 '위로'는 희망을 그림자 삼아 남자와 여자 사이를 탄력 있게 오고가고 있었다. 사랑이었다. 그것은, 거짓말이 어려웠다. 


고마워. 너랑 지내는 동안 정말 행복했어.

우주 알을 받아들인 보람이 있었어. -p.143


 끝이 정해진 소설을 읽는 것이라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믐이 되자 지구와 달 사이의 시공간연속체가 뒤틀렸'고 그 달빛을 타고 우주 알이 남자에게 들어왔을 때, 나는 거짓말이 시작되고 있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며 내가 믿었던 것들이 아닌 것이 되고 틀린 것이 되고 도무지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 생각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늘 그랬듯 독서를 시작하며 의미를 찾고 그것을 품으려던 마음을 멈추고 그저 있는 그대로 문장을 읽어나가려했다. 머릿속에 어지럽게 점멸하는 장면들을 곱씹으며 불편함을 견뎠다. 패턴만 있던 그들의 이야기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 시간 속에 내가 들어섰다. 함께 슬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그 날, 나는 63빌딩의 전망대에서 '거대한 미술관'을 상상하며 걷고 있었다. 정해진 방향과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데 순간, 이 미술관에서 꼭 보아야 하는 그림처럼 그가 서 있었다. 그냥 지나쳐도 되었지만 멈추어섰다. 그러지 않았다면 남자와 여자를, 그믐의 비밀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참을 서있고 나서도 선뜻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믐>을 들고 서있는 검은 뿔테 안경의 그가 자꾸 눈에 밟혀서, 떠날 수가 없었다. 나쁜 남자 같은 차갑고 서늘한 얼굴로 내 앞에 서서는 자신 안에 상처를 가장 따뜻한 문장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정말이지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야기가 끝이 날까봐 불안한 마음을 숨기며 그저 있었다. 언젠가는 내가 '남자'의 곁을 지키는 '여자'가 된 것처럼, 처연한 얼굴이 되어 끝내 묻게 되겠지. 도대체 누구였냐고, 당신은 누구였냐고,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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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의 기적 - MBC <휴먼다큐 사랑> 감동실화
이영미 지음 / 아우름(Aurum)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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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 시에 물을 끓인다. 늦은 밤의 고요 속을 유영하는 따뜻한 기운에 하루종일 웅크렸던 마음이 풀린다. 12월이 되니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는 마음이 된다. 12월은 무언가를 시작하기 보단 시작한 것들의 자리를 돌아보며 쓸쓸하고 아파하는 달. 그렇게 아프고 나서 새해를 맞는 달. 뜨거운 물에 인스턴트 커피를 푼다. 내일을 위해, 이것은 내게 용기가 필요한 일. 오랜만에 책상을 정리하고 앉는다. 생각이 나면 끄적이던 노트들에, 거기에 붙은 포스트잇에, 책 사이에 남겼던 시간의 흔적을 찾았다. 고개를 들면 창문 위에 불안하게 맺혀 있는 물방울들이 보였다. 벽지 위에 흐릿하게 지워졌던 곰팡이 자국들이 하나 둘 선명해지기 시작하면, 내게 겨울이 시작된 거였다. 그렇다면 올해도 어김없이 내게 겨울이 찾아왔다. 곰팡이와 함께 오는 겨울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2013년의 새해를 맞을 즈음, 내가 적어놓은 목표가 있었다. 

 

* 지호와 연호에게 따뜻한 엄마 되기

* 2013 서재의 달인 되어보기

* 영어회화 시작하기

* 아빠 챙기기

* 이사갈 집 구하기

 

무엇보다도 나는, 연약한 가족을 위해 살 수 있기를 원했다. 아이들에게. 부모님께. 나를 위한 삶에 욕심내며 아파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나를 위해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들 속에 스스로를 다독이기는 쉽지 않았다. 집과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짧은 동선 속에서 나는 무수히 헤매고 넘어졌다. 곁에 있는 아이들이 상처 받을 것이 두려웠지만,  좀처럼 마음은 억울함을 내려놓지 못했다. 마음이 아픈 것을 참으려하자 자도 자도 졸음이 쏟아졌다. 잠만이 무거운 현실을 잠시 가려준다는 걸 몸은 알고 있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의식은 계속 몸 속에서 잠을 만들어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면 곁엔 아주 작은 나의 아이가 놀고 있었다. 좁은 방, 그 공간 안에서도 아이는 삶에 대한 거대한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렇게 한 해의 반이 지나갔다. 오늘과 같을, 지루한 내일을 보낼 일을 매일 두려워하면서.

그런 나의 마음을 깨운 건, 한 장의 사진과 다급한 메세지가 담긴 기사였다. 머리를 민 한 쪽에 선명한 수술자국, 작은 몸에 너무 많은 줄을 달고 병실의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 해나였다. 2차 수술 후 위급한 상황에 처한 해나를 위해 모두의 기도를 필요로하는 기사였고 좀처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많은 기사를 부러 찾아 읽었다. 유해진PD의 블로그에서 지나온 아이의 시간을 읽었고 새글이 올라오기를 매일 기다렸다. '해나의 기적'을 다운 받아 보았을 때, 나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몸 속을 씻어내는 듯한 눈물이었다. 그 뒤로 해나는 늘 마음에 있었다. 가족 외의 누군가를 위해 이토록 간절한 기도를 해본 적은 없었다. 내 생의 시간을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도 처음이었다.

 

해나의 책 『해나의 기적』 을 품에 안은 저녁.  남편이 안방으로 잠을 자러 들어가고 작은방에서 혼자가 되면 눈물이 쏟아졌다. 매일 마음속으로 해나를 부르고 이야기했던 나날들. 내 작은 아이가 노는 모습을 보면서, "해나야, 어서 나아서 우리 아가가 하는 모든 것을 너도 해봐야지. 넌 꼭 그럴 수 있을거야." "해나야, 비가 내린다. 잘 자고 있니? 어떤 꿈을 꾸고 있니." "해나야, 너를 생각하며 아줌마도 아줌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께. 너도 힘내." 

 해나의 엄마가 쓴 이 책에는 어느 날 아픈 아이를 낳은 죄인이 되어버린 엄마로써 할 수 밖에 없었던 선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 쪽으로 열심히 달려온 작은 생명이 세상에 남긴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많은 이야기가 사랑다큐를 통해 볼 수 있었던 내용이지만 곳곳에 해나의 엄마로써 아이를 낳았을 때 겪었던 갈등과 불확실한 내일로부터 느껴야 했던 절망, 그러나  그녀가 삶의 고비마다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해나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희망은 누구나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언젠가 실현된다는 것을, 해나의 가족은 몸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평범했던 한 가정에 다가왔던 불행. 기도가 없이 태어난 아이는 아무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었지만 반대로 아무도 내일을 살 수 없다 이야기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내일 앞에 모두가 포기했던 아이. 그러나 스스로 삶을 붙잡고 힘든 시간을 견디며 살아 준 아이. 너무나 작은 몸으로, 다가오는 고통을 씩씩하게 견디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밝은 웃음으로 환하게 살아내던 아이, 해나. 해나의 이야기는 내가 쉽게 포기하고 저버렸던 삶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게 했다. 할 수 없는 것에 떼쓰지 않고 가질 수 있는 것에 행복할 줄 아는 아이의 모습 앞에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해나가 어서 예전의 웃음을 되찾기를 기도하면서 나는 점점 허상 같은 것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내가 가지고 있던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숨쉬는 것, 먹는 것, 걷는 것, 아이와 뛰어 노는 것, …… 아무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가 감사했다. 아이에게 훌륭한 엄마가 되려던 욕심을 내려놓자 아이의 마음이 들리기 시작했고 아이의 울음을 달랠 수 있었다. 평범한 삶 속에서 가족과 나눌 수 있는 체온이 바로 기적임을, 해나는 나에게 알려주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아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갖는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그 기본적인 사실조차 잊고 지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삶이 어렵고 사는 것이 힘겨워서,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저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저 역시 많았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해나는 삶이란 살아낼 때야 의미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전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아픈 삶이라도 살아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아픈 삶이라도 살아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 이영미, 『해나의 기적』, p.51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기적처럼, 삶을 새롭게 만나게 한 해나. 하루하루 커가며 옹알이가 또렷한 말이 되고 표현이 되어가는 내 곁의 아이를 보면서 해나를 생각한다. 여전히, 해나가 누리지 못하고 떠난 삶의 많은 것들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눈물이 맺히지만 이젠 더 좋은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해나를 축복한다. 그리고 그 아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지만 갖지 못했던 삶을, 나는 누리고 있다는 마음으로, 매일 매순간 모든 것에 할 수 있는 최고의 힘과 용기로 마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삶은 분명 살아내야 할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것.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외면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을 때 어느 순간 느낄 수 있을, 황홀 같은 것일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조셉 캠벨, 『신화의 힘』, p. 29

 

많은 책들이 내게 삶은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낼 때, 의미는 자연스럽게 나를 찾아올 것이라 이야기한다. 기적도 행운도 행복도. 모두 이유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해나가 떠난 뒤, 나는 이 책을 다시 펼쳐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많은 이들의 기도와 응원을 뒤로하고 떠난 해나, 그 삶이 안타까워 아주 오랫동안 툭하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나도 이런데 아이의 엄마는,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싶어 마음을  쓸어내리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던 시간들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에서 이 책을 다시 든 건, 이 책을 처음 들었던 순간 바로 리뷰를 남겨 많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던 글을 이제야 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고, 또 다시 삶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한 지금의 내게 그 마음을 되찾아 주기 위함도 있다. 

 

20대의 중반, 나는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있었을 때. 누구나 내게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살고 있겠다고, 말하던 때었다. 그럼에도 도망칠 수 없던 일상은 계속되었다.  늦은 퇴근 후 누구와든 이야기를 나누고 싶던 나는 화장대에 앉아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살아야하는 지 물었다. 이토록 꾸역꾸역, 무엇을 위해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야하는 지 물었다. 오래 말이 없었다. 그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찾기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 라고 말을 보탰다. 그 때는 위로가 되지 못했던 그 말이 이제는 진실임을 안다.

 

뜻밖에도 지금은 책을 읽던 순간 순간 웃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몸이 아픈 아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사라지게 하는, 오롯이 밝고 명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해나의 예쁜 사진들. 서울대학교 어린이 병원 중환자실에서만 지내온 아이라고는 느낄 수 없게 제 나이 때의 귀여움을 만면에 띄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슬픔과 동정은 사라지고  제 삶의 몫을 열심히 살아내는 해나가 기특했다. 나 또한 그렇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낼 것을 다짐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사진 속의 해나는, 그렇게 응원을 건내고 있다. 짧은 생이었지만 분명 누구나 느끼지 못할 삶의 '황홀' 을 느꼈을 해나. 그것으로 행복해하며 떠났으리란 생각. 지금은 슬픔보다 아이가 있어 빛나던 그 자리가 더욱 느껴진다. 시간이 지나고 슬픔이 무뎌진 자리가 또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해나의 밝은 미소 앞에 또 한 번 두 손을 힘주어 쥐어본다. 그리고 가만히 되새겨 본다. 지금 나는 기적 속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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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의 서재
장석주 지음 / 한빛비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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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아직 어두운 창으로 추적추적 기척이 들려온다. 오랜만에 듣는 빗소리다. 매섭던 추위가풀리자 마음도 녹는다. 자연스레 가만히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된다. 어제 저녁엔 아이를 재우며 함께 잠들어 이른 새벽에 깨었다. 작은 쪽방에 아이 공부상을 펴고 쪼그려 앉아 이 책을 생각하고 있다. 장석주 『마흔의 서재』.  

'삶을 쉬어가게 하는 책읽기'란 무엇일까. 나는 아직 서른 하나고, 이 책이 내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그런 물음으로 책읽기를 시작했다. 그의 다독과 다작을 모르는 바 아니니 많은 자극이 되리라고도 생각했다. 스무 살에 시인이 되어 스물여섯에 자신의 출판사를 가지며 서른두 살에 베스트셀러를 펴낸, 젊은 시절을 열심히 살아낸 작가. 그는 서른여덟 살에 이 모든 생활을 접고 서울을 떠나 산자락 아래 집을 지으며 노모와 살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을 독서와 산책, 원고를 쓰며 어느 새 열세 번의 해를 보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누구나 꿈꾸는 삶을 그는 살고 있다. 이제 쉰의 나이를 지나고 있는 그. 도시를 떠나 고요 속에 몸을 밀어 넣은 그는, 그의 마흔 살의 해는, 어떠했을까.

마흔. 무언가 묵직한 것이 느껴지는 나이다. 젊음에서 중년으로 한 순간에 넘어가는 나이인 것 같기도 하고, 실수를 아끼고 아껴야 하는 나이인 것 같기도 하다.

 

마흔은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딱 중간쯤에 해당한다. 마흔은 지나간 삶을 돌아봐야 할 때, 마흔은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짜야 할 때, 마흔은 결단을 해야 할 때, 마흔은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할 때, 마흔은 인간관계에 대해 신중하게 점검을 해야 할 때, 마흔은 열정을 다시 지펴야 할 때, 마흔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할 때, 마흔은 이제 새로운 인생의 2막을 열어야 할 때이다.  -p.21, '늦지 않았다, 초조해하지 마라' 중에서

 

작가는 마흔을 인생 2막의 시작이라 일컬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책을 통해 삶의 여정을 꾸리길 권한다. 삶의 한편에 서재를 두는 일. 아름답다. 그 서재에 꽂힌 책들이 삶의 발자국이 된다면. 그곳에 지나온 내 삶이 그렇게 꽂힌다면. 돌아보며 자책하는 일보다 그 땐 저 책이 내 그림자였는데, 그렇게 힘을 냈었지, 하고 조금은 담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책의 특성은 '서재' 속에 길이 있다는 발견과, 독서와 관련해 삶을 풀어간다는 점일 것이다. 저자는 독서를 통해 딱딱한 삶을 부드럽게 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무수한 방식으로 풍요롭게 한다. 안락의자에 편히 앉은 채 세상을 거닐고,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과거로 날아갈 수도 있다. 독서란 자아 발견과 세계 탐험을 위한 나침반과도 같다."(《책과집》) 그는 많은 고전들을 응용해 우리가 삶에서 주시해야 할 덕목들을 설명하고 있다. 주로 공자의 이야기를 많이 응용하고, 노자와 맹자의 책도 등장한다. 그 책들과 함께 다양한 현대 책들의 지문이 어울어 지는데 시간과 공간을 떠난 다양한 책들이 모두 공통된 방향을 가리킨다는 것, 바로 우리의 삶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많은 책들이 사람을, 삶을 담는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도 나는 무언가 비밀을 알아버린 것처럼 그랬다. 그러니까 그의 책 『마흔의 서재』는 서재에서 그릴 수 있는 책과 인생의 지도, 그 일부분이었다.

그러나 어느 인생 지침서가 그렇듯, 작가의 말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마음을 비울 것. 욕심을 내려놓을 것. 가진 것을 나눌 것. 사람들과 어울려 그곳에서 나를 찾을 것. 적당히 게을러지고 여유를 가질 것. 책을 읽을 것. 오늘을 열심히 살아낼 것. 꿈을 가질 것…… 많은 책들이 가리키는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항목들이 이 책에도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것은 스무 살의 항목에서 조금은 과감해질 것, 이 빠졌을 뿐 서른에도 마흔에도 쉰에도 그 이후의 어떤 나이에도 적용 될 만한 당연한 항목들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살고자 꿈을 꾼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꿈은 2순위다. 생계를 꾸려 먹고 살아야 하는 게 1순위다. 그러다보니 마음을 들여다 볼 시간도 없고, 책을 볼 시간은 더더욱 없다. 자신의 태도를 바꿔 볼 계기를 갖지 못하고 똑같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꾸역꾸역 산다. 슬프지만, 나도 벌써 이만큼을 알아버렸다. 서른한 살,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내겐 작가가 제시한 그 많은 지침들을 행동으로 옮길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했고, 나 자신과도 많이 싸웠지만 어느 날은 따뜻했다가 어느 날은 괴롭도록 쓸쓸했다. 그러면서 내 몸에 옹이가 하나 둘 생겨났다. 그러면서 고통에 무뎌지고, 담담히 슬픔을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 나에게 독서는 그런 자리가 생겨날 때마다 찾아오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묵묵히 싸우게 하는 힘이었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는 계기였고 토닥임이었다.

     

함부로 겨울이 되지 마라

매일 변해야 얼어붙지 않는다 

매일 변하되 쉽게 결정짓지 마라

겨울의 그늘 속에서 

쉽게 생을 단정 짓지 마라 -p.220, '함부로 겨울이 되지 마라' 중에서

 

책의 제목은 마흔의 서재이지만 누구나의 서재가 될 수 있는 책이다. 퍽퍽한 삶에 책이라는 매개를 사용해보고 싶다면, 어떤 책을 마음에 담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면 이 책을 펼쳐봐도 좋겠다. 그러나 시적 문장을 기대하고, 감성적인 내용을 기대한다면 좀 딱딱한 책이 될 수도 있다. 책은 결코 가벼운 내용이 아니다. 읽으면서 계속되는 명령조에 힘들었다. 그러나 드문드문 피할 수 없는 시인의 아름다운 표현들과 알지 못했던 책의 제목들을 독서목록에 넣으며 마음을 녹일 수 있었다.

 

어느 새 그렇게 되어버렸다. 친구들도 거의 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었다. 나를 귀여워 해주시던 친척 어른들은 모두 예순을 넘기셨고 힘이 넘치던 위엄 없이 고요해지셨다. 누군가의 병환과 한 번도 마음에 깊이 담지 않았던 죽음이란 단어가 쉽게 나를 찾아왔다 떠나갔다. 그 모든 일들이 찾아왔다 떠나가는 사이사이, 그 시간들 모두가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나고 나면 놓아야 하는, 홀가분하면서도 아쉬운 그 시간들.

열아홉에서 스물이 될 땐 뭔가 세상이 뒤바뀔 것처럼 큰 기대감이 있었다.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될 땐 작가가 되고 싶던 꿈이 욕심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홉에서 영이 된다고 하면 무언가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것 같지만 삶은 그 앞에 것의 연장이며 결코 리셋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는 일은 모든 것을 지고 또 앞으로 나아가며 끊임없는 싸움과 화해, 다침과 회복 속에서 두툼한 내 삶의 책등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나이는 결코 그냥, 쉽게 먹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삶은 깊어지고 더 익어가야 한다. 나이 먹는 일을 두려워했던 적이 있었던가, 부끄러워했던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내 나이가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무수한 책들이 끊임없이 다른 표현을 만들어내지만 결국 그것이 가리키는 모든 것은 '삶'이다. 그 한 글자가 내게, 살아내야 할 과제인지 내 안에 기록되고 있는 시간의 이름인지 가만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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