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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다정한 사람
은희경 외 지음 / 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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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걸음은 느리다. 시야는 넓고 너그럽다. 그들이 선 풍경과 그들의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어 보는 이를 흐뭇하게 만든다. 낯설지만 설렘이 가득한 그곳에서 먹고 마시는 식사와 와인에 대한 부러움은 덤이다. 나는 내 자리를 떠나는 일을 지독하게 두려워한다. 가진 것도 잃을 것도 변변치 않으면서 어찌 그리되었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얻은 익숙함을 내려놓고 떠날 용기가 없었다. 지난 시간들 속에, 대학을 다닐 때, 한 번쯤 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낯섦에 대한 스트레스와 불안을 마주했다면. 어느 먼 곳에 그날의 나를 두고 와 다시 찾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놓았다면. 삶은 (기억의 측면에서) 조금 더 풍요롭지 않았을까. 휴학 없이 대학 졸업, 취업, 처음 한 연애, 결혼, 어느 새 품에 두 아이. 20대를 기록하니 그렇다. 여느 사람들 보다 조금은 빨리 살아온 것 같은 기분.

떠나려야 떠날 수가 없는 현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핑계로 나를 위안하며 방치해 온 것은 아닌가. 문득 묻는다.

 

여기,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여행이야기가 있다. 모두 한 번쯤은 매체를 통해 책을 통해 만났고 멋지다고 생각했던 분들이다. 그런 열 분이 중앙일보 기자의 제안으로 릴레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병률 작가가 동행해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각자의 과거나 미래가 놓여 있는 곳으로 여행지를 정해 떠났고 그곳에서 문화와 질서, 이방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을 즐겼다. 떠난 자리에서 그들은 자유로워 보였다. 지난 시간을 더듬으며 웃었다. 열 분의 여행자의 기록을 보면 모두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분야의 색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자가 살아온 삶과 몸담은 분야에 맞춰진 시선으로 자연스레 여행지를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이 당연하면서도 신기했다. 모두 한 곳의 여행지를 두고 여행을 떠나와 글을 썼다해도 글에 담았을 이야기는 서로 닮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땅에서 소와 염소와 양떼를 돌보는 사람에게는 그 광대함이 곧 외로움일 수도 있다. 차를 타고 두세 시간씩 달리면 나타나던 깊은 골짜기의 찻집들. 그 주인은 차를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만나기 위해 찻집을 열어놓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서 손님이 떠나지 못하도록 계속 차를 권하기도 하고, 내가 갑자기 나타난 노란 수선화 언덕에 탄성을 지르며 차를 세우고 그 속으로 달려들어갔을 때, 그 옆 어딘가의 작은 농장에서 어쩌면 어떤 외로운 사람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p.46, 은희경 <애인 만나러 호주에 갔지요, 그의 이름은 와인이고요. 흠뻑 취했답니다, 저 풍경 때문에> 중에서

 

누군가에겐 일터이며 자신을 가둔 외로운 장소가 또 누군가에겐 떠날 곳이 되며 마음을 내려놓는 여행지가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연의 힘에 의해 만나 말을 나누게 된 사람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치유를 얻는다. 여행자는 여행지에서 낯선 이가 선뜻 내준 따뜻한 밥과 차에 한없이 겸손해진다. 자신이 좀 더 덜 갖고, 가진 것을 나누고픈 마음을 갖게 된다. 그곳에서 나는 누군가가 바라보던 내가 아니다. 나는 좀 더 달라질 수 있고, 다르게 행동해볼 수 있다. 너 왜 그래? 할 사람 없이 누구나 호감을 갖고 바라봐주는 곳. 그곳이 여행자가 택한 여행지의 모습이다.

 

은희경 작가의 '와이너리'. 그녀는 와인을 매개로 하여 자신에게 박힌 딱딱한 선입견을 부드럽게 하고, 삶을 유연하게 만드는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찾았고 그리워했다. 이명세 감독의 태국은 영화를 찍을 장소를 물색하며 얻은 곳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끼는 여행. 여행지를 따라 꿈을 따라 영화를 그려가는 모습에서 많은 시행착오로 얻은 연륜이 묻어났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으로 떠난 이병률 작가. 그곳의 문화와 사는 모습을 담으면서도 역시 그의 글에는 따뜻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사람들이 산타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 흰 눈이 가득한 그곳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건 그 동심 때문 일 것이다.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며 시작된 백영옥 작가의 홍콩 여행은 청량했다. 무엇인가를 시도하려는 모습들이 그랬다. 다리 밑에서 만난 할머니들. 그 중 미워하는 사람을 대신 때려주는 의식 속 할머니가 인상깊었다. 푸른 바다와 섬이 가득한 김훈 작가의 여행.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섬을 여행하면서 그는 문장화 할 수 없는 자연의 힘과 그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의 날카로운 문장은 보는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박칼린의 뉴칼레도니아 여행은 일상을 떠난 그녀의 여유가 묻어났다. 바다에서 만나는 '천국의 그윽한 바람'. 떠남으로써 얻는 상상의 공간과 생각의 전환. 그녀는 상상하는 일과 그것을 이루는 일을 즐기는 듯 보였다. 정갈한 일본에서 만난 요리사 박찬일의 여행. 역시 음식. 너무 먹고 싶어서 혼이 났다. 한 곳에 담긴 여러 개의 정성들. 아기자기한 도시락 속에서 그는 옛 생각들을 꺼내고 사람을 꺼낸다. 지역마다 다른 도시락 취미와 역사 속 도시락 이야기도 살짝 들을 수 있었다. 가수 장기하는 영국에서 마시고, 보고, 듣는 여행을 즐겼다. 그의 음악 세계가 구현되기까지 영감을 준 아티스트의 이야기와 어느 거리, 지는 노을 앞에 서서 음악을 들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남자의 감성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세렌디피디(serendipity, 뜻밖의 발견이나 운 좋게 발견한 것). 그것은 혼자 하는 여행이 주는 가장 짜릿한 선물이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여행 중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기 마련인데, 그것이 좋은 일일 경우에는 그 순간이 여행의 절정으로 기억되곤 하는 것이다. 나는 길치라서 어디가 어딘지를 잘 알지 못하지만, 또 길치라서 세렌디피티를 자주 마주치기도 한다. -p.286, 장기하 <나 돌아가면 얼마나 이곳을 그리워할까> 중에서

 

'그리운 것들과의 재회'를 위해 뉴욕을 찾는 신경숙 작가. 그녀의 발길이 닿는 거리마다 자유로운 공연이 있고 그 문화를 즐길 줄 아는 뉴욕 사람들의 모습이 좋았다. 산책을 통해 자신을 위로하며 그 도시에 자신의 자리를 만든 작가가 그곳에서 어떤 작품을 쓰셨을지 궁금했다. 캐나다를 찾은 가수 이적은 불친절했던 입국심사부터 마음이 무거웠던 여행이었지만 거리를 채우는 음악과 특별하고 멋진 공연, 그리고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두려웠던 캐나다 여행기를 채웠다. 두려움을 뚫고 나가 만나는 낯선 도시의 친절만큼 여행자를 감동하게 하는 것도 없는 듯하다.

 

거리 곳곳의, 아주 사소한 풍경들마저도 아름다운 기억이 되는 여행. 현지인들은 여행자의 사진기 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그들의 기억에 그리움을 더한다. 그들이 있는 풍경 속에 나를 슬쩍 기워넣어 보았다. 나는 어떤 여행기를 쓸 수 있을까. 꿈꾸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내게 미래가, 생겨났다.

 

늘 매체에서 보는 모습이 아닌 낯선 곳에 선 그들의 또다른 모습을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가볍게 읽기 좋겠다. 나는 조금 아쉽기도 했는데, 열 분의 여행기를 한 권으로 묶어야 했기 때문이었을까. 여행자마다의 정해진 분량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든 분들의 글이 여행지에서 이동한 장소와 먹은 것, 그곳에서 한 일을 따라가느라 바빴다. 그곳에 머물러 보다 따뜻한, 인간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길 기대했는데 깊게 그러지 못했다. 여행에 동행한 이병률 작가가 그들을 바라본 시선에서 모든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우리는 여행 지침서가 아닌 여행 에세이를 선택한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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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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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아이를 재우고 나니 이 시간입니다. 그토록 매섭던 추위가 잠시 가라 앉아 오늘은 조금 힘이 납니다. 웃풍이 센 집에서 아이의 여린 볼을 찬바람에 내어주며 있을 땐 미안함과 죄책감에 가슴을 쓸곤 합니다. 그래도 얼었던 창문이 녹아 열리듯 날이 풀리면 절망도 옅어집니다. 오늘은 창문이며 현관으로 얼었던 눈들이 녹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집 앞 골목에선 녹은 눈이 다시 얼어붙을세라 거친 비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얼고 녹는, 하루하루의 반복 속에 정신없이 살면서도 당신의 소설은 꼭 읽었습니다. 당신의 신작이 나오면 어김없이 샀고 천천히, 조금씩, 시간이 되는 데로 읽었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당신이 지나온 12년의 시간을 더듬듯 한 문장 한 문장을 아꼈습니다. 문득 당신이 많이 아팠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단정한 문장 속에서 고요해지는 일이 좋습니다. 오롯이 나와 소설만 존재하는 시간. 어쩌다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곤 유리창에 푸른 멍 자리가 생기도록 잠들지 못하는 날도 있었지만, 그래서 낮엔 아이를 돌보며 꾸벅 졸기도 했지만, 이 시간이 내겐 위로이고 행복입니다. 
여러 날, 책을 펼칠 때마다 점점이 일어가는 슬픔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 발이 시려 양말을 찾아 신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소설은, 새벽 3시의 시간을 닮았습니다. 짙은 어둠 속으로 흐리게 스며드는 새 아침의 기운 같은. 속으로만 고통을 감내하는 이들에게 곧 들이닥칠 새벽은, 다 식은 난로처럼 처연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찬기운을 뚫고 삶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산 사람들의 몸이 기억하는 습관이며 본능이겠지요. 


상처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죽음 앞에 선뜻 두려움을 내려놓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고 적었지요. 이번 당신의 소설집 속 사람들은 모두 상처를 갖고 있고, 죽음 곁에 놓여 있었습니다.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도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렇게 그 시간을 앓아 넘긴 사람도 있고, 그 시간에 갇혀야 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회복하는 인간>의 '그녀'는 발에 난 화상 자국을, 병원에 가지 않았다면 목숨을 위협하도록 썩어들어 갈 그 상처를 들여다보며 언니의 자리를 들여다봅니다. 사라진 존재를 향한 고통과 그리움. 실체를 알 수 없어 더 끝이 보이지 않는 감정들을 대신해 상처는 그녀와 눈을 마주쳐주고 있습니다. 차라리 다행이었어요. 먹먹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것보다 나으니까요. 아픈 이유가 거기에 있고 그래서 아플 수밖에 없다고 믿으며 상처가 아물길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언니와 좋았던 일보다 안타까웠던 일들이 불쑥 찾아와 괴롭히기를 여러 번 지나고 나면 고통은 약해지고 견딜만해 질 것입니다. 곧 새 살이 돋을 것이라는 기다림도 사라진 존재의 허전함을 채워가고, 시간은 다시 일상 속에 빠르게 섞여가겠지요. <밝아지기 전에>의 ‘나’도 은희언니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가기 전, 달라진 것 없는 일상 속에서 그녀와 있었던 일을 떠올립니다. 갑자기 죽은 동생을 보내고 장기여행자가 된 은희언니. 그녀가 떠난 곳에서 ‘나’는 죽음을 미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지요. ‘나’에겐 지켜야 할 아이도 있었으니 더 힘들고 치열했을 것입니다.  죽음이 나를 밀치고 그녀에게 간 것은 아닐까, 죽은 동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려 여행을 택했고 그곳에서 생의 마침표를 맞은 안쓰러운 사람 …… ‘나’는 은희언니와의 시간을 더듬으면서도 담담하게 아이의 밥을 챙깁니다. 아이를 돌봐 줄 동생이 올 때까지 카드놀이도 해주고요. 자신의 병이 재발하지 않게 식사도 조절해야 했습니다. 슬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곁에 있는 아이를 챙기고, 편집자에게 보낼 원고를 신경 써야 하는 산, 사람이니까요. 함께 나눈 꿈 얘기가, 여행 이야기가 '나'에겐 은희언니가 존재했었다는 증거의 전부이지만 금방 거칠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 기억일 뿐입니다. 그래서 소설을 쓰기로 하지 않았을까요. 기억을 종이에 내려놓아 붙잡기 위해서. 그것만이 다만 지금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은희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듯 보였습니다.
 
사는 일은 참으로 신기하고 또 이상합니다. 현재를 살면서는 너무나 힘들고 벅차서 버리고 싶을 때가 여러 번인데 그 시간이 과거라는 이름을 달고 현재의 나를 찾아올 땐, (내가 찾아갔을 땐) 나를 회복하게 하는 힘이 된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오늘 저는 다섯 살 큰아이가 블록으로 만든 모형을 10개월 된 작은아이가 부수는 바람에 곤욕을 치웠어요. 큰아이는 소리 내어 울고 작은아이를 때렸습니다. 장난감을 부순 작은아이를 혼내야 할지, 동생을 때린 큰아이를 혼내야 할지 제가 더 울고 싶었습니다. 매일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그 때마다 큰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꾹꾹 참으며 자리를 떠나곤 합니다. 이 하루들도 먼 미래의 제게 힘이 되어줄까요? 지금은 너무나 벅차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은 지금이 제게 ‘훈자’와 같은 곳이 되어 줄까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낮고 따뜻한 음성으로 오늘을 열심히 잘 살았다고, 칭찬을 듣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훈자, 라고 저도 네이버의 창에 써 보았습니다. ‘세계의 걷고 싶은 길’로 ‘눈 쌓인 설산과 꽃 핀 살구나무들과 수로, 바람 계곡에 피어난 살구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길’이라 하여 아름다운 전경에 대한 극찬이 끊이지 않는 곳이더군요. 글로 만난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그토록 마음에 담았던 곳.

 ‘영원히 일을 하고 가계를 꾸려가야 할 단 한 사람.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조건 없는 사랑을 퍼부어줘야 할 단 한 사람.’ 인 여자에게, 죽어 있던 고양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여자에게, 훈자는 그녀를 살게 하는 유일한 이유인 듯 보였습니다. 꼭 한 번쯤, 가정을 내려놓고 그곳에 다녀올 수 있기를 바랐어요. 여자에겐 도망칠 곳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체념이었는지, 그토록 마음으로 곱씹던 훈자는 여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과거 여자를 배려해 준 한 사람의 따뜻함과 작은 병아리, 직장 초년 생 시절 잠시 허리를 펴고 본 창가의 저녁들 …… 삶 밖으로 뛰쳐나가고픈 여자를 다시 제자리에 붙잡아 준 것은 작은 기억들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체온이었고 사랑이었어요. <노랑무늬영원>의 ‘나’는 작업실로 운전해 가는 길에 뛰어 든 개를 피하다 사고로 두 손을 못 쓰게 되었지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묵묵히 수발하던 남편도 지쳐 차가워졌고, 평생의 일이었던 그림을 잃은 ‘나’도 점점 삶의 냉소만 남아갔지요. 그러다 우연히 친구와 연락이 닿았고 젊은 날 그녀의 마음을 데워주었던 한 번의 스침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남겨놓은 사진들을 보며 그 날의 따뜻했던 등, 입을 맞추고 싶었던 목덜미를 더듬었어요. 그가 죽은 건, 저도 너무 슬펐어요. 그녀도 그의 죽음을 슬퍼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대신해 살아주고픈 마음을 갖는 듯 했습니다. 이제껏 다시 움직일 이유를 찾지 못했던 그녀가 무언가를 하고픈, 살고픈 마음을 꾸리고 있었어요.  친구의 아이가 보여준 노랑무늬영원의 잘려진 앞 발에 돋아난 '조그맣고 연약한, 투명한 흰 빛의 발'처럼, 작은 희망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조금 안도했지요. 죽는 날까지 하고픈 일을,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한 채 살아야 한다면 그건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겐 그녀가 그렇게 보였었거든요. 살아있지만 죽은 것처럼요.
  
그때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만일 내가 오래 살 수 있다면, 죽기 직전까지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망설이지 않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림 말고 다른 것을 가져본 적 없으며, 가져보려 한 적도 없는 사람의 맹목과 자부심으로.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자만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자만. 내 생에서 중요한 것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만. -p.258, <노랑무늬영원> 중에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좋아한 <노랑무늬영원>이 2003년도 작품이어서요. 10년의 시간이 지나 내게 온 소설. 그 때의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어쩌면 소설을 읽었는데도 기억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시를 쓰고 싶은 게 아니라 시인이 되고 싶었던. 스스로 택한 죽음들이 아름다워보였던 시절. 아마 그 때라면 당신의 소설 어디에도 온 마음을 내려놓진 못했을 겁니다. 용기도 없고 겸손도 모르던 때. 가진 모든 것이 당연했고 끝까지 지켜질 것이라 믿었던 때.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아깝기만한 시간들입니다. 그 때도 당신의 소설을 무척 좋아했지만, 지금 당신의 소설을 읽고 느끼는 감정들이 더 좋습니다. 내 삶이 조금은 바르게 익어가고 있다는 증거일까요. 두 아이가 내 삶을, 시선을 이렇게 바꿔놓았습니다. 당신의 소설 속 그녀들에게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것도 지금 이 시간들 때문이고, 책 읽는 시간이 행복해진 것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일이 감사한 것도 지금 이 시간들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면 좋았던 시간보다 아픈 시간들이 나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상처와 회복을 반복하며 나를 강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그런 시간 속에 놓여있어 위태로운 것이라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조금 웃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에우로파>의 두 사람. 상처를 갖고 있는 그녀와 그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지만 그런 품을 갖지 못한 남자. 그녀의 모습을 따라하는 것으로 사랑을 대신하는 남자. 그들의 불길하고 어두운 기운이 거둬지길 기다렸지만, 끝내 그 모습은 볼 수 없었어요. 서로의 곁에서 서성이기만 하고 다가서지 못하는 그들이 안타까웠습니다. 사람을 믿지 않으며 '언젠가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 깊게 상처 입히리란 것을 알고 있다.'고, 함께 있으면서도 상처를 미리 걱정해야 하는 모습이 씁쓸했습니다. 그들이 그 마음을 뚫고 나와 서로에게 무너지길, 바랐어요. 서로의 체온으로 파고들어가 조금이나마 빛을 나눠 가졌으면 싶었습니다 '왼손'에게 삶을 송두리째 휘둘려버린 가장이며 사내였던 이의 극단적 결말도 가족이 다시 그의 곁으로 오는, 빛으로 향하는 터널이 되길 바랐습니다. 누구나의 삶이 빛 속에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요. 고통도 삶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하지 않겠습니까. 그 고통이 먼 미래의 자신을 치유해줄 수 있다는 것을. 더 늦지 않게 알게 된 것은 다행인 일인 걸까요.

상처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읽으며 위로하고 싶고, 그들의 삶에서 희망을 끌어내려 안간힘을 쓰면서 왜 나의 삶에선 위로에 인색하고 희망보단 절망의 그림자를 쫓았는지. 모두 고만고만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혼자 유난을 떨며 아파한 것은 없는지 돌이켜 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 친구를 만나고 돌아와 심한 무기력증을 알았습니다. 아이를 낳고 반년만에 만난 친구였습니다. 유치원에서 하원하는 큰아이의 시간에 맞춰 일찍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그녀에게 쏟아놓은 이야기가 전부 아이 , 육아, 결혼생활에 지친 나였다는 사실이 너무나 창피하고 서글펐습니다. 이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이것 뿐이구나 싶은 게, 나의 시간이 전부 아이와 집안일에 쓰여지고 있다는 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무척 가슴 아팠습니다. 작은아이가 두 돌이 될 때까지는 친구도 만나지 말자, 속으로 다짐하기도 했지요. 울고 보채며 번갈아 나를 찾는 두 아이들에게 사랑이 아닌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나아졌어요. 치워도 다시 어질러지는 방 안도 바라볼만 해졌고, 저녁 찬거리를 고민하다 저녁상을 보는 일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얼었던 일상이 또 녹는 차례가 된 모양이예요. 누구나 다, 여자의 삶 가운데를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당신의 글에서 공감했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진 것이 가장 최고라는 것도. 말하고 보니 더 부끄러워집니다. 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내 삶이 곤할 땐 적용할 줄을 모르는지요.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p.127, <밝아지기 전에> 중에서
 
이제는 영영 20대를 떠나왔습니다. 서른 한 살은 어떤 나이일까요. 조금은 아픔에 무뎌질 나이일까요. 그러나 이제는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아야 할 때가 왔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머뭇거리지 않고 행동해야 함을.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꼭 하며 살고 싶어요. 그녀는 은희언니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당신도 이들의 고통을 당신의 몫으로 앓아보았기에 글로 쓸 수 있었겠지요. 알아주는 이가 없어 슬펐던 시간은 없었는지요? 그래서 꼭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잘 읽었다고. 한바탕 울고 난 뒤처럼 많은 위안이 되었다고. 인사를 전하고 싶었어요. 또, <파란 돌>을 읽으며 『바람이 분다, 가라』의 정희를 떠올릴 수 있어 반가웠다고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어쩌면 당신은 또 다른 소설 속의 삶을 살아내느라 아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힘들게 쓴 당신의 글을 너무 쉽게 읽어버린 것은 아닌지, 너무 쉽게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미안해집니다. 그래서 이 편지도 보낼 순 없을 것 같아요. 다만 당신의 책 사이에 그 자리를 마련해두려 합니다.
 
그래도 어느 날, 우리가 각자의 삶 속에서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나이를 먹고 더 무르게 더 달게 익어갈 때, 당신의 소설이 또 나를 찾아왔을 때, 우리 삶의 반경이 잠시라도 겹쳐졌을 때, 그 때, 잠시 옷깃이 스치는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을런지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지만 그렇기에 마음데로 그려볼 수 있는 무수한 내일들 속에서 당신의 손을 반갑게 잡을 날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기다리는 일은 산다는 일의 더 따뜻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 때까지 하루 한 알의 고통을 묵묵히 삼키며 이 시간을 살아내고 있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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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 : 몬스터 섬의 비밀 3D - Friends : Naki on the Monster islan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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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개월, 어느 새 지호가 많이 자랐다.

오늘 극장을 다녀온 뒤에 더욱 그런 맘이 들었다.

 

지호와 함께하는 첫 극장 나들이. 선택한 영화는 프렌즈-몬스터 섬의 비밀!

집 가까이에 있는 상봉 메가박스로 전날 인터넷 예매한 조조영화였다.

어둠에 무서워하면 어쩌나, 지루해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지호는 아주 의젓하게 첫 관람을 마쳤다.

좌석에 앉았을 때 나오는 광고를 보면서는 왜 영화가 시작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고,

간간히 가져간 음료를 마시며 좌석 옆에(여러 번 왔다간 아이처럼) 잘 꽂아두기도 했다.

에니메이션을 보는 내내 진지했고 옆자리에 실례가 될만한 행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

 

에니메이션 '프렌즈 -몬스터 섬의 비밀'

인간 섬의 두살아이 코타케가 사고로 몬스터 섬에 남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인간 섬에서는 몬스터들을 자신들을 위협하는 영물로

물리쳐야 할 괴물로 본다. 그러나 두살아이 코타케의 눈엔 재미있고 자신을 예뻐해주는 존재일 뿐이다.

몬스터 섬의 버섯 점유권을 넘겨받는 대가로 코타케를 맞게 된 몬스터 나키와 군조.

그들은 코타케와의 생활을 통해 곁에 없는 엄마에 대한 애정과 가족의 사랑을 채워나간다.

헤어짐과 시기 질투가 반복되는 사이로 서로를 생각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차오르면서 감동어린 이야기를 완성한다.

 

 

 

#. 몬스터 섬의 친구들. 알록달록 저마다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웃음을 자아낸다.

 

 

 


#. 주인공. 귀염둥이 두살배기 코타케. 옹알옹알대면서도 할 말 다하던,  
요 작은 아이가 몬스터 나키와 군조를 들었다놓았다 한다.

 

 

#. 티격태격 하면서도 서로를 끔찍하게 아끼고 생각하는 나키와 군조.

이들의 우정이 아름답게 담겨 있다.

 

 

 

천진난만한 몬스터들의 표정과 행동을 보면서

겉모습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나쁘고 악한 쪽으로 폄하하는 어른들의 행동이

아이들이 누려야 할 풍요로운 삶을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편견없이 조건없이 자신의 것을 양보하고 사랑하는 코타케와

 코타케를 그리워하는 몬스터 나키의 모습이 애틋하게 다가 온 애니메이션이었다.

 

뱃속에 있는, 8개월 된 축복이도 멈추지 않는 태동을 느끼게 해주었다. 녀석도 이 애니메이션을 즐겼을 것 같은 느낌!^^

 

전체관람가의 영화였던 만큼 부모를 동반한 아이들 관객이 주를 이뤄 사뭇 소란스럽고 지속적인 웅성거림과 아이 울음소리가 계속 되었지만 어쩐지 오늘 만은 마음이 너그러웠다. 내 생애 가장 소란스러웠던 극장 관람이었지만, 그만큼 애틋했고 유쾌했던 시간이었다. 더빙도 리얼하게 잘 되어 있어서 거부감없이 어린 지호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지호는 잠들기 전, 오늘 가장 즐거웠던 일로 극장 관람을 꼽아주었다. 다음에 또 가야지, 하면서.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아이의 마음에 이토록 기분 좋은 일로 남았다니, 무척 뿌듯한 마음이 든다.

이젠 자주 영화관을 찾게 될 것 같은 예감.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둘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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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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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도 누군가가 부러워 할 빛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 책. 사람에게 시간만큼 공평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매일 똑같은 시간을 살아낸다고 생각하지만 그 끝에 놓인 마침표는 저마다 다르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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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문제들
안보윤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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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책. 가슴이 너무 뻐근하다. 첫 페이지의 글부터, 견딜 수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불안하다. 나는 무기력해진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작은 아이를. 우연히, 시간의 급류에 휩쓸려, 어른들의 세계로 빠져버린 그 아이를. 어떻게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책을 읽어 나갈수록 5학년 권아영은 지워지고, 현실에 대한 분노와 공포에 휩싸여 으르렁거리는 인간의 모습만이 또렷히 드러날 때마다 섬뜩함을 느꼈다. 두려움을 지나 삶을 관조하고 무력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아영에게 더이상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얼굴을 숨긴 권력이 그 작은 아이를 두고 분노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관한 실험을 하는 듯,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먼지가 피어오르는 헌책방에서 죽음을 꿈꾸는' 그녀는 고통의 퍼레이드를 겪으며 늙고 노쇠해져가고 있었다. 짧다고도, 길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애들이 알려줬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슈렉. 슈레기. 냄새나. 저리 꺼져. 아영은 하나같이 뾰족하고 냉랭하던 목소리들을 떠올렸다. 그애들도 어느 순간 저절로 깨닫게 된 걸까. 교실 구석에 앉아 있는 권아영이 사실은 친구가 아니라 초록색 괴물이라는 것을.
"나 게이는 처음 봐요."
"나도 너처럼 뻔뻔스러운 애는 처음 본다."
"근데 좀 다르네요. 만화에 나오는 거랑."
아저씨는 만화에 나오는 어떤 주인공과도 닮지 않았다.(중략) 그들은 쾌활하고 가볍고 자유로웠다. 아저씨처럼 무겁고 느릿느릿하지 않았다. 상대방과 마주 보는 눈이 따스하고 행복해 그들이 동성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같은 게이라면서. 대꾸 없는 아저씨의 어깨가 더욱 좁아졌다. 헐렁한 흰색 셔츠가 아저씨 등을 더 휑하고 쓸쓸하게 만들고 있었다.  
  

-p.133~134, 「한뼘의 체온」 부분

 

헐값에 넘긴 책들이 넘쳐나는 곳. 그 책들이 위태롭게 이룬 기둥 사이에 세상으로부터 밀쳐진 두 사람이 있다. 둔한 체구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 슈렉으로 불리며 놀림감이 된 아이 '아영'. 평범하게 살고 싶었지만 동성에게만 사랑을 느끼는 남자 '두식'. 그들의 주변인물들은 두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 갈취할 수 있는 모든 이득을 앗아가려 달려들었다. 폭력으로, 윽박지름으로, 때론 회유와 동정으로 그들을 이용했다. 처음부터 그랬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아영'과 '두식'. 자신들은 불완전하며 불길한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했고, 그래서 그림자처럼 살기를 원했고, 그늘 밑에 자신을 늘 숨겼다. 그러던 어느 날, 헌책방으로 숨어들어온 아영과 헌책방으로 도망쳐온 두식이 하나의 공간을 나눠 쓰게 되면서 그들은 변화를 겪는다. 사람과 소통을 하는 일이, 서로를 걱정하며 일상의 체온을 나눠주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두식은 아영의 다리에 짓눌린 자신의 몸이 의외로 안정되기 시작하는 것에 놀란다. 꿰맨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나오는 것과 상관없이 두식은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닿는 이 체온이 기쁜다.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살을 맞대는 것이 한없이 기쁘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갈구해왔던 이만큼의 체온. 고작 이만큼, 이만큼의 체온을 원했을 뿐인데. 

-p.159, 「안개」 부분 

 

그들은 썩어가는 두 개의 물 웅덩이였다. 어떤 파문도 일 줄 모른 체 그들에게 던지는 행인의 쓰레기를, 욕지거리를 품은 채 가만히 고여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서로에게 작은 파문이 되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그들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흐리지만 분명한, 희망의 문을 향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잘 자리를 비켜주고, 아이의 옷가지와 간식을 사다주고, 목욕을 다녀올 돈을 넉넉히 쥐여준다. 아저씨의 일을 돕고, 어두운 안색을 살펴주며, 경련을 일으키는 그의 몸을 붙잡아 준다. 서로의 식사를 걱정하고 마주보며 밥을 먹는다. 두식은 아영이 학교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개 속으로  아이를 찾으러 나선다.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 준 성현을 뒤로한 채로. 또 아영은 두식이 자신으로 인해 곤란을 겪을까봐 자리를 비켜준다. 뻔뻔하게 아이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황순구가 있는 거리로. 
사소한 배려가 섞인 행동들은 그들 안에 잠식해있던 '위안'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안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한 것. 삶을 망가뜨리는 것은 타인이다. 그 망가진 삶을 다시 어루만져줄 수 있는 것도 타인이다. 그렇게 그들은 삶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온기를  서로에게 지피며 지금 이 자리를 떠날 용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들이 어둠과 안개, 그림자의 삶 밖으로 나가기 위해 피워올린 불길이 헌책방이 있는 건물을 뒤덮었을 때, 아영이 황순구 때문에 겪어야했던 공포는 누군가에게로 전이되어 여전히 살아 꿈틀데고 있었다. 약자에 대한 집단 폭행, 성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지 못한 아이들이 성을 놀이개로 삼고,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현실은 어제 오늘 만의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무섭게 자라나고, 사회는 점점 그 아이들을 제어하지 못한 채 휘둘리며 이글어져 가고 있는 현실. 기사화 된 일들에만 관심을 쏟고 정작 크고 작게 벌어지는 일들에 관해선 눈을 감아버리는 현실. 네티즌이 일어서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들고, 몇몇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건은 소동으로 치부해버리는 참혹. 아영이,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 아이들이 입을 열어 부모에게,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선 사회가 그 문제들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개입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주변에 서있는 사람으로써의 나는, 우리는, 스쳐지나는 그들의 사정을 조금은 따뜻하게 바라봐주어야 할텐데,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라는 이름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나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더 이상 슬프게 바라보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배웅하듯, 따뜻하게. 더 이상 이곳을 서성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속으로 속으로만 그들에게 화이팅을 보낸다. 우리가 그들이 겪은 고통을 안타깝게 여길 순 있지만 동정할 수는 없다. 누구도 그들의 고통 앞에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 밖으로 밀려나 현실과 부딪히며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는 까닭이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작가는 왜 이 글을 써 나갔을까. 무수히 많은 두식과 아영 들이 가마 속에서 터져나가는, 슬픈 모습을 감내하면서. 아마도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로 꾸려진 고요해 보이는 현실에 가려져 스스로 사그라지는 영혼들을 환한 조명 밖으로 꺼내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림자가 아니라, 그림자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저기 바쁘게 지나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의 걸음 앞에 용기라는 말을 붙여도 될지. 이제 막 어둠 밖으로 나서 그들의 삶이 다시 어둠이 찾아 오기 전에 조금이나마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글을 나서며 문득, 곁에서 나를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겨울 앞에서, 옷깃을 여미듯 나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둘 가슴에 품어본다. 아영과 두식이 따뜻한 시선 속에서 그렇게 살고 있었으면 싶은 바람. 오늘 속에서 내일을 기다리며,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하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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