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리뷰 - 이별을 재음미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 책 읽기
한귀은 지음 / 이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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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을 끌어올리다 

이별리뷰. 무엇 때문에 그 아픈 시간을 다시 되새김하여야 하는가. 

저자의 문장은 차갑고 냉철하다. 그래서 퍼뜩 정신이 들게 한다. 이별을 앓으며 자신을 갉아먹을 것이 아니라, 이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의 거름이 되도록 하라고 한다. 거센 고통의 뒤엔 정적의 시간이 오고 그 시간을 통과하고 나면  다시 사랑을 꿈꾼다.  부정하고 외면하며 믿지 않았던 것들이 그렇게 곁으로 온다.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인연을 떠올리고 문득 내일을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삶이 달라졌음을, 내가 성숙해졌음을 느낀다.

‘책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보살피는 과정과 방법을 이야기’ 하는 한귀은 저자는 사람들 사이에 환부 없이 일어나는 고통을 문학이 치유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매순간 일어나지만 예방책은 없고, 한순간 모든 것을 잃은 듯 사람들을  허망하게 만드는 '이별'의 환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 곁에 서른 두 개의 문학작품과 서른 두 쌍의 남녀를 대동하여, 그들 안에 일어난 사랑과 이별을 보여주고 그곳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한다. 떠나간 사랑을 '애도'하듯 지나간 나를 '애도'하라고 부추긴다.

이별은 어떻게 오고,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별 후에 일어나는 부정과 슬픔의 감정은 어떤 것인지, 사랑할 때 우리가 보인 자세는 혹 비겁하지 않았는지, 사랑을 보내며 우린 어떤 애도의 과정을 겪을 것인지,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하고 난 후 다시 희망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을 다시 쓸 것인지 그녀는 친절하고 차근차근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과 이별을 만나는 사이 내안에 있는 상흔들을 퍼즐 맞추듯 그들과 하나하나 맞추어보았다. 관조하며 무심했던 시선은 글자들 사이를 바쁘게 지나가고 나는 어느새 책 안에 놓였다. 책 속에서, 또 다른 책을 통해 만난 이별 모습은 저마다 달랐지만 그들은 저자가 그려낸 이별 지도 속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이별을 발판삼아, 다시 사랑을 향하여, 그렇게 일어서려하고 있었다.    

 

 

 



 

 

                  이별 앞에


 

이 세상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뉜다.
실연당한 적이 있는 사람과 실연당한 적이 많은 사람.

- 프롤로그 중 


다행인 건, 이것은 절대 나만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누구나 이별을 하고 상처를 입고 분노하고 체념하며 치유의 과정을 겪는다는 사실, 이것만으로도 잠시 마음에 어지럽게 일던 바람이 멈춘다. 이 책은 이별한 자들을 호모세퍼러투스, 라고 정의하여 분류하고 있다.

Homo-separatus :

이별하는 사람. 즉 너무 많이 생각하는 사람, 너무 많이 집착하는 사람, 너무 많이 배려하는 사람, 너무 많이 이해하는 사람, 그래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배려받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더 사랑받으려고 애쓰고 집착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는 사람. 그만큼 상처받는 사람.

어쨌든 나보다 앞서 이별한 자들의 말을 들으며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 그들은 어쩌면 나보다 잔혹하고 매몰차게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아주 잠깐, 고요했던 나의 이별에 안도감을 느낄지도. 잔인하게도, 사람이 위로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타인의 상처를 바라보는 일이다. 바라보고, 공감하고, 안쓰러워하다가 자신의 상처를 견딜만한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내 상처 또한 상대에게 오픈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까지 오래 내면의 갈등을 앓아야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책은 좀더 자유롭고 편한 상대다.
책은 늘 곁에 있다. 내면의 갈등 중에도 기대 없이 펼쳐볼 수 있다. 차오르는 감정에 힘이 든다면 잠시 덮어 이야기를 멈출 수 있다. 깨끗이 빗은 머리와 화장한 얼굴로 이별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소리내 엉엉 울면서 눈물을 떨구어도 괜찮다. 책은, 당신의 얼룩진 얼굴을 가만히 기억해줄 테니까. 지금 도착한 이별 역에서 당신이 걸음을 떼며 지나가는 그 길목을 가만히 지켜봐 줄 테니까.

사랑하는 동안에도 늘 두려웠던 것들. 곁에 있는 그를 바라보면서도 언젠가 이별할 날의 감정을 곱씹고 있었던, 나는, 늘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를 만났고 사랑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사랑을 덜 받고 덜 주는 쪽을 택한 채로. 내 안에 불안정한 짐처럼 쌓여있던 이별을 끌어올리면서, 이 책을 읽을 준비를 했었다. 방한구석 깊숙이 밀어놓았던 여행 가방을 우연히 발견하고 천천히 지퍼를 열듯, 그렇게 먼지 이는 기억을 휘적거리다 나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는, 이별이 이뤄지던 순간 그를 원망하고 욕하며 저주했던 마음은 없고 그 시간 앞에서 여전히 나약하고 미련하게 스스로를 숨겨버리려 종종거리는 나 자신만이 가득했다. 솔직하지 못하고 애써 괜찮은 척, 당신을 두고 돌아서던 나. 나를 말하지 않고, 나를 이해해주길 바랐던 어리석은 내가 덩그러니 그곳에 있었다. 불현듯 당신도 나로 인해 받은 상처로, 조금은 오래 헤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그 이별의 주체는, 과연 누구였던 것일까. 

 

나를 아프게 했던, 나를 가난하게 했던, 나를 미치게 했던, 나를 체념하게 했던,
그리고 나를 여전히 설레게 하는 이별, 이별…… 

 

나는 가끔 한 사람을 떠올리며 가슴 떨리곤 한다. 나 혼자 이별해야 했던 사람. 너무나 겁이 나서 그가 불쑥 사라져 버릴까봐서  못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놓아버려야 했던 사람. 그 때 그에게 내가 먼저 말을 꺼내놓았다면 달라졌을까 싶은 생각을 하면서 이따금 그 뒷이야기를 상상해보곤 한다. 어쩌면 그에 대한 기억마저도 영영 잃어버려야 했을지 모를, 이별이 또 기다리고 있었을런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들…… 나는 이렇게나마 지금 그를 기억할 수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추억하며 가슴 떨릴 수 있는 한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 든든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좋은 이별은,

좋은 사랑을 위한 희망이 된다. 사랑했다면, 그것이 이별로 끝난다 하더라도, 그 사랑에 대한 존중은 계속되어야 한다. 억지로, 헤어진 연인을 떠나보내려고 할 필요는 없다. 찰나의, 그/녀와 찬란했던 순간이 섬광처럼 터졌다 지더라도, 그런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기억은 그렇게 몸속 어디에서 폭죽처럼 켜졌다가 사위어가기도 하는 것이므로, 등 어딘가에서 폭죽이 터지고, 그것이 이내 뜨거운 눈물이 되더라도, 조금만 덜 안타까워하고, 덜 슬퍼하면 된다.

 차츰 자가 지방이식을 하듯이, 이별의 실조가 사랑을 위한 영양으로 옮겨갈 터이니.                            

                                                                                                                                                            -p. 202 



서른 두 개의 작품과 그 곁에 함께 놓인 다른 작품들, 내가 보았던 영화와  드라마 속 이야기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미 본 것이 분명한데도, 문장화된 이야기 밖에서 이별에 놓인 인물들은 더욱 인간적이고 낯설게 다가왔다. 한 편의 시가 주는 애틋한 기다림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타자의 욕망을 욕망해버린 실수 (김승옥 「무진기행」), 자본주의 속에서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여자의 착오 (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사랑과 이별에 관한 각색 (황순원  「소나기」), 첫사랑에 대한 기억의 변형 (박완서  『그 남자네 집』) , 다른 사랑에 대한 존중 (김형경 『외출』), 이별이 사랑을 완성시킬 때  (김형경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 이별을 위해 쓴 편지 (신경숙  「풍금이 있던 자리」), 사랑을 시작하기 위한 첫 번째 노력 (우애령  「정혜」 ) 등등. 한 작품 한 작품 속에서 이별을 바라보면서 또한 그 이전에 그와 나누었을 사랑을 되짚어본다. 이별하게 되었을 때 겪는 분노 다음 단계는 바로 반성이 아닐지. 사랑하는 동안 미처 챙기지 못했던 당신에 대한 마음들을 돌이켜보며 미안해하는 것. 그 때 다 쏟아붓지 못한 마음과 사랑에 집중하지 못했던 마음이 내내 마음에 걸리는 것.  

사실 이 책은 끊임없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랑했지만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만나게 되는 건 이별 앞의 '사랑'에 대한 모습들이다. 저자는 아마도 이별의 장면들을 골라 담으면서 독자가 사랑을 길어올리기를 기대했으리라. 우리가 사랑하면서 겪는 착각과 착오들을 만나며 그로 인해 뜻하지 않게 겪는 이별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사랑할 때는 오감을 열어두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읽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어하고, 그의 일상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흘러 그를 다 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그는 나를 모른다는 사실에 갑갑해하고 서운해한다. 내가 주려고 했던 것을 이제는 받고 싶어 한다. 서로에게 익숙해질 무렵이면 자연스럽게 마음에 거리도 생긴다. 그가 나를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내가 더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자존심에 조금 더 기다리고 조금 더 그를 기다리게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아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중략)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하 유죄다.              - 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중에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별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 어떤 이유로 혹은 아무 이유도 없이 서로 헤어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이별하고 난 뒤엔 또다시 사랑을 찾게 된다. 그 순환속에는  연인 관계 뿐만 아니라 가족과 다른 인연, 그 밖의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이 돌아가는 사이클과 다르지 않다. 무언가를 잃고 얻고 바라고 꿈꾸고 이루는 것. 그렇다면 지금, '지난 사랑에 대한 충분한 반성'을 통해 우리가 이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지난 시간, 나의 모자람과 사랑에 대한 어리숙함, 그리고  희망을 믿지 않는 나 자신과의 이별 아닐까. 새로운 사랑과 내일의 희망을 온전히 끌어안고 설렘을 느낄 수 있도록, 조금은 새로운 내가 되어 보는 것. 거울 앞에서  낯선 나를 찾게되는 것. 그것이 이별을 겪은 자만이 이룰 수 있는, 특권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이별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이별을 준비하며, 조금씩 이별을 이루고, 조금씩 넓어지는 보폭으로 서둘러 이 시간과 멀어진다. 기억의 옷을 입고 그것은 아주 작게 마음 한켠에 밀어놓는다. 그러다 가끔 움직이는 몸 안에 툭, 하고 꾸역꾸역 부려놓은 시간들의 아련함이 쏟아져 왈칵, 우리의 어깨를, 가슴을 적신다.

이별을 위로 받기 위해 이 책을 들었다면, 당신은 이 책을 펼칠 시간을 조금 지연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당신의 이별을 보다 생생하게 느끼도록 할 것이고, 이별을 인정하게 할 것이다. 보다 현실적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할 것이다. 부드러운 위로 따윈 내일을 더욱 두렵게 할 뿐이다. 용기가 생겼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펼쳐 현실적이고 냉철하고 어쩐지 딱 떨어지는 이별 공식 위에 놓인 사람들 속에 나를 슬쩍, 끼워 넣어 보자. 결핍을 채우기 위해 먹고 물건을 사들이듯 서점으로 나가 이 책 저 책 곁을 기웃거리고 마음을 건드리는 책과 함께 버스를 지하철을 타자. 수많은 타인과 엉켜 어지러운 시간 속에서 넘기는 책의 갈피 사이에 지나온 시간들을 리뷰해 보자. 내게 일어났던 일은, 어느새 조금씩 나를 벗어나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고, 어느 책에서 본 상실과 이별의 장면이 되어 내 앞에 놓여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는 다음 사랑에 대한 희망. 또 다시 이별을 겪더라도 조금은 성숙하게 그 시간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조금은 어색하게 자리잡기 시작할 것이다. 이별은 결국 지나가고 또 다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이별해야 한다. 그렇게 지나 온 것들로부터 벗어나 보다 가벼운 몸짓으로, 내일을 또 한 번 이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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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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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가 끝난 자리 


두 권으로 된 이 소설을 단숨에 읽게 된 것은 내 몸 위를 거칠게 기어오르던 조바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안개가 무겁게 내려앉은 길로 들어서던 그들이 어서 안개 밖으로 드러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후련해진 표정을, 상처 입은 몸일 지라도 무언가 끝났다는 다행스러움에 안도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빨리 마주하고 싶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진실은 가장 마주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내 자신에게서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전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말이 옳겠다.
독재자의 숨을 끊은 그들을 문 앞에 두고 서둘러 문을 닫던 사람들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우리 가족을 죽일 셈이야?' 하고 으르렁 거리며 그들을 내쫓고 혹은 칼리에들에게 밀고하던 사람들. 사람들. 사람, 들. 그들은 누구의 초상인가. 총성이 울리는 그 거리에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인가. 생각할 수 있는 힘, 이성 따위는 그 곳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총소리와 멀어질 방법만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칼리에들의 눈 밖에 나는 일만이 그 순간, 그들이 판단할 수 있는 희망의 전부였다. 부정하고 싶었던, 인간의 나약함을 확인해 버린 순간, 나는 폭삭 늙어버린 노인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시간에 떠밀려 아무것도 붙잡아보지 못하고 죽음 앞을 서성이게 된, 패배자였다. 그럼에도 이 길에서 돌아설 수 없다는 것이 진저리쳐지도록 슬펐다. 

실제 이야기가 뼈대인 소설인 만큼 그 내용들을 허구로 간과해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은 내게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생하게 눈앞에 드러나는 과거의 일들을 -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잔혹하게 다룰 수 있는지, 얼마나 잔인하게 버릴 수 있는지, 얼마나 비굴하게 삶을 이어갈 수 있는지,  한 시대가 얼마나 오래 사람들을 붙잡고 조종할 수 있는 지를 하나하나 목도하면서 혼란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몇 십 년 혹은 몇 세기를 넘어 발굴된 뼛조각들이 모호했던 과거의 시간을 선명하게 그려내듯, 책은 32년 간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벌어진 독재의 역사를 내었고 그것은 덮어버린다고 해서 결코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펜 끝에서 살아난 축제의 진실

영원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일컬어 졌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에야 우리나라에는 그의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권력 구조를 파헤치고 이에 대한 개인적 저항을 묘사한 점을 높이 평가해 바르가스 요사를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노벨상 위원회가 밝힌 것처럼 작가의 연보는 그가 도미니카 공화국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이 소설을 탄생시키게 된 일이 결코 우연히 아니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여러 나라를 떠돌면서 뉴스 진행자, 사서, 교수, 잡지 편집위원의 다양한 활동과 집필을 병행했고 문학과 정치, 사회적인 면으로 깊이 있는 시선을 다져왔다. 그가 페루 대통령에 출마했었다는 사실은 그가 끊임없이 국가의 운행과 권력에 대해 연구해왔음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작가가 되는 것은 신이 그를 선택해 주는 소명이며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체제와 세상을 향해 늘 깨어있으면서 작품을 출간하고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칠 진실들을 만날 수 있는 안내자가 된다. 작품을 통해 목숨을 위협받거나 거친 비난에 휩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겁내지 않고 허울 뒤에 숨은 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기록하기에 애쓴다. 동시대의 사람들을 떠나 다음 세대에, 세계 여러 나라에 전해지며 가면을 벗은 역사를 바라보게 한다.

그는 『염소의 축제』를 완성시키기 위해 도미니카 공화국의 출판사와 연계를 가지며 많은 정보를 수집해 읽었고 마침내 세계가 주목하게 될, 이 소설을 완성시켰다. 이 소설은 트루히요의 독재에 뼈대를 두고 있지만 사실 그 독재 안에 놓여있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제목의 '축제'는 독재자에겐 스스로 활개를 치며 권력을 행사하던 시간들을 가르키는 동시에 암살자들에게는 염소의 암살이 성공하는 일을 가르키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독재자만 사라지면 그 이전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국가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꿈꾸던 이들은 암살이 성공한 뒤에도 여전히 그들 스스로 놓치 못하는 독재자의 권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암살자들은 곧 자신에게 붙여질 수령의 살해에 대한 죄목과 비난으로 날아들 총알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고 독재자가 죽은 지 35년이 지난 후 중년 여성이 된 우라니아의 기억 속에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작가는 독재자와의 싸움이 아닌, 스스로와의 심리적 싸움으로 패배해 간 인간의 내면을  포착하고 있었다.  

 

아직도 꺼지지 않는 그 날의 불꽃들

소설의 1권에는 세 개의 시선을 주축으로 엉켜져 있다. 중년 여성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우라니아 (1996년). 암살되기 전 하루 동안 어느 날과 다름없이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과 만나며 업무를 해나가는 일흔의 트루히요 (1961년 5월 30일). 그리고 일곱 명의 암살자들이 고속도로 근방에서 독재자를 실은 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독재자로부터 휘둘린 자신들의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가 엇갈려 전개된다. 사실 인물을 주축으로 각각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처음엔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트루히요와 암살자들의 경우는 장마다 야기되는 인물들이 각각 달리 이어졌음으로 점점 익숙해져갔다. 세 개의 시선은 각각 다른 임무로 이 소설에 놓여 있었고 현 시대에서 떠올리는 한 여성의 기억과 독재자의 내면, 그를 아부하는 추종자들, 독재자에게 쏠 총을 들고 지난날을 회상하는 암살자들의 과거 이야기가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이야기는 더욱 극적으로 치달아갔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우라니아의 진실과 독재자가 암살 된 후 혼란에 빠지는 국가에서도 일어났던 잔인한 살인과 술수, 서로를 향한 끝없는 의심들은 한 국가 안에 벌어진 불행의 무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바꿔놓았을지를 짐작케 한다.

 

  *  우라니아, 그녀의 삶을 뒤바꾼 한 순간에 대한 기억

우라니아는 트루히요가 죽은 그 해로부터 35년이 지나 고국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산토도밍고'라는 본연의 이름을 되찾지 못한, 자신의 유년시절이 있는 도시에 도착했지만 그녀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호텔에 묵는다. 무언가에 대한 불안과 불쾌감에 휩싸여 그녀는 변화한 도시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옷차림도 갖추지 못한 채 그녀는 즉흥적으로 자신의 집으로 향하고 그곳에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가 간병인의 병수발을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떠난 뒤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은, 한 때 지식인으로 트루히요 곁에서 한 팔 행세를 했던 상원의원 카브랄은, 반신불수가 되어 스스로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백발의 노인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그 날의 일을 이야기하며, 그 날,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있었는지를 묻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녀가 오래 연락하지 않은 친척들을 만나 서서히 밝히는 그 날의 일은 열네 살의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한 일이었다. 어린나이에도 그녀는 아버지가 트루히요의 총애를 잃고 절망할 때 아버지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결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동료 마누엘의 말을 따라 딸을 권력자의 신임을 되찾기 위한 제물로 이용했다. 그것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보다 더 깊은 절망이었다. 일흔의 트루히요의 몸뚱이에 열 네살의 그녀가 상처입은 기억을 그녀는 자세히 친척들에게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로 힘든 발걸음을 했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던 그녀는, 실상 이야기를 모두 꺼내놓은 뒤에 찾아온 허무감에 당황한다. 결국 그 시간은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날로 부터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치며 자신의 지휘를 높이기에 노력했고 또 여성이라면 부러워할만한 성공한 지식인이 되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위로한 방법은 결국 매일매일 도미니카공화국의 역사에 골몰한 일이었다.
 


우라니아, 넌 정말 얼음이니? 단지 남자들에게만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게 아니다. 너의 시선과 행동과 제스처, 그리고 말투는 위험을 예고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렇다. 그들의 마음이나 본능 속에서 너를 유혹하거나 구애하려는 의도가 엿보일 때만 그렇다. 그런 사람들에게 너는 얼음이다. 고양한 냄새를 내뿜어 적을 내쫓는 스컹크처럼, 너는 네 주변으로 냉기를 발산하며, 그런 사람들에게 북극의 냉기를 느끼게 한다. 너는 그 기술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으며, 그 덕분에 너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공부와 일, 그리고 독립적인 생활이다. "행복하게 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p.279 (1권)
 

사실  우라니아는 실재하는 인물이 아닌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이다. 우라니아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 바로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자연스럽게 끌고 온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무지한 국가에서 남성의 권력 앞에 성적 노리개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여성들의 삶을 대변한다. 힘없고 가난한 국가의 남성들은 개인의 발전보다 자신의 성적 욕구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그것으로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려 한다. 거리의 여성을 조롱하며 쾌락과 성취감을 느낀다. 트루히요 또한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에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굳히기 위해 그들의 처나 어린 자녀들을 성적으로 탐닉해 왔다.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며 독재자에게 자신의 어린자녀를 바치고 아부했던 추종자들의 모습을 보면서는 과연 누가 더 악랄한 자인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우라니아는 그 날의 상처가 아직도 자신 안에 아물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족을 꾸리는 평범한 삶을 되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 안에 터지는 뜨거운 축제의 불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엔 너무나 약했고 어린 존재였다. 
한 소녀에서 중년 여성이 된 후에도 더 거대해지고 선명해진 과거의 시간들과 독재를 펼치며 자신의 혈기왕성함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찼던 트루히요의 모습을 맞물려 만나면서 한 시대 안에 이루어진 비극이 누군가에겐 자부심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치욕이었다는 사실을 눈이 시리게 바라봐야 했다.  

 

  * 엇갈린 축배의 잔

일흔의 트루히요는 늙은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전립선을 앓고 있는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나온 소변이 바지를 적시게 될까 자주 아랫도리를 살폈다. 미국 해병대에서 몸에 익힌 훈련과 규율대로 여전히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최소한의 잠만 자도 회복되는 대단한 체력을 과시'하던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를 재건하고 경제적으로나 타국으로부터의 안보 문제 등에 큰 힘을 발휘하며 거침없이 사람들을 지휘 조종했던 트루히요는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치정과 살인, 술수 들이 나라를 위해 결코 피할 수 없었던 일이라 당당히 정당화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가족과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이 자신이 늙고 병든 노인에 지나지 않은 사실을 알고 덤벼들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조니 아베스 대령, 주정뱅이 입헌의원 치리노스, 미국 해병대에서 만나 그를 계속 지지해주고 있는 사이먼 지틀맨, 그에게 쾌락을 선사하던 마누엘, 대통령으로 앉혀둔 발라게르 박사. 그의 주변인들은 끊임없이 그를 '조국의 아버지' '자선가' '수령님'으로 떠받들고 도미니카공화국의 하느님이라고까지 지칭했다. 그들은 좀 더 수령의 발밑 가까이로 가기 위해 다투었고, 서로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부었다. 그들은 꼭두각시였고, 그의 권력 앞에 벌벌 떨었다.

 어쩌면 이후에 들어선 정부들이 너무나 엉망이어서 많은 도미니카 사람들은 트루히요를 그리워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사람들은 권력 남용과 살인, 부패와 비밀 염탐, 격리와 두려움을 잊어버렸다. 공포는 이미 신화가 되어 있었다. (중략)
"사람들은 살해되고 고문당했으며 실종되었어요. 심지어 체제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도 그런 일을 당했지요. 가령 그의 멋쟁이 아들 람피스는 헤아릴 수 없이 권력을 남용했어요. 그가 날 찝쩍거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빠가 얼마나 벌벌 떨었는지 기억나요?"  -p. 168~169(1권)

누구도 그의 꼭두각시이지 않은 자는 없었다. 그의 단독적 행동과 폭력, 학살 등의 역사를 초인적인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는 절대적인 존재였고 벗어날 수 없는 하늘이었다. 그가 죽은 후에도 트루히요라는 독재자가 서른두 해 동안 사람들 안에 새겨놓은 육체적 정신적 기억들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사람들을 조종했다. 그는 더 이상 젊고 패기 있던 독재자가 아니라 자신의 바지 위에 흘린 소변을 숨기기 위해 물을 쏟아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여성과의 잠자리가 맘처럼 되지 않아 등을 보이고 우는 발정 난 늙은 염소에 지나지 않았다. 잔인함과 허영, 탐욕으로 가득 찬 자신의 행동을 국가를 위한 희생이었다고 신화화시키던 권력자의 최후는 결국 그가 만든 국가 안에서 그가 베푼 자선으로 살고 있는 이들이 쏜 총알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끝까지 엇나가는 아들이 못미덥고 허영뿐인 아내와 형제들이 늘 약점이었던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 부당한 현실에 겨눈 일곱 개의 총, 비극의 총성

사람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트루히요가 경제발전과 국가보호라는 보기 좋은 가면으로 선동을 시작하자 자신들의 삶을 바꿔줄 권력자에 대해 두터운 믿음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그가 자국 보호를 위해 울렸다는 수 천, 수만의 총성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공포감에 휩싸여 더욱 그를 추종하기에 이른다. 연약한 이들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씩 독재를 반대하는 운동세력이 생겨나고 그를 암살하기 위한 비밀조직이 권력자들의 이름을 엎고 꾸려진다. 그들은 대부분 젊고 패기 있는 이들이었고 모두 독재자와 관련된 상처를 갖고 있었다. 독재자의 사상에 부당한 희생자가 되거나 누군가는 죄를 뒤집어쓰고 사살되기도 했다. 트루히요의 차가 고속도로 위를 지나가 어서 그의 머리에 총알을 날리길 바라는 암살자들의 심리적 상처에 대한 이야기들은 트루히요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빼앗고 이용하기에 능란한 사람이었는지를 나타낸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힘없이 권력 앞에 내어주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며 자신을 증오했고 또 그 만큼 꼭 트루히요를 죽이고 말겠다는 분노에 치달아 있었다.


"넌 마치 우리 모두가 트루히요 신봉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어, 살바도르." 안토니오 델라 마사가 성을 내며 말했다. "토니는 푸에르토플라타의 주지사 아니었어? 아마디토는 경호원 아니야? 난 20년 전부터 레스타우라시온에 있는 염소의 제재소를 관리하고 있지 않아? 네가 일하는 건설회사도 트루히요 소유 아니야?"  -p. 137(1권)

  그들은 지난 시간동안 그들 각자가 트루히요의 잔인함과 비도덕성을 묵인하면서 그의 자선을 받아들이며 살았고, 그를 위해 일했다는 것을 치욕스러워하고 있었다. 이 날 그들이 성공하게 될 암살은 그들 안에서 죄를 사하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많은 권력자들이 연계된 만큼 자신들의 총알이 트루히요에게만 박힌다면 모든 일은 잘 마무리 될 것이라 믿고 기도 했다. 연계된 권력자들은 모두 트루히요 가까이에서 그의 일을 했던 이들이며 오늘도 그와 산책을 할 때 한마디의 은총이라도 더 입고자 애썼을 이들이었다. 자신의 가족과 이웃이 한 인간의 권력에 이용되고 후엔 가차 없이 버려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누구도 트루히요에게 분노를 나타내지 못했다. 그의 위로를 받아들였고 그가 건네는 말을 믿으려 애썼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를 등지고 나오면서도 온몸을 흔드는, 부끄러운 안도감을 느꼈다. 깨어있는 정신은 그를 기억하는 육신의 움직임을 끝까지 제어하지 못했다.

소설의 2권에는 트루히요의 암살이 이루어진 뒤 동요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그를 추종하던 이들과 시민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면서 국가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발라게르와 트루히요 가족 간의 기싸움. 거리를 매운 칼리에들이 기습적으로 방문해 관련되었다고 의심되는 자들 마저 모두 잡아가면서 사람들은 모두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고, 암살자들은 모두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가 결국 수용소에서 가장 잔인한 마지막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람세스 앞에서 전기고문을 당하고, 악마처럼 그들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모습은 계속 읽어내려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암살이 성공한 뒤 그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독재자가 죽은 후 계획된 모든 일을 하나씩 처리해 나가기로 했던 푸포 로만 장군이 권력의 두려움에 스스로를 묶은 까닭이었다. 그는 권력의 기싸움에서 이미 이성을 잃었고 결국 람세스에게 제일 먼저 붙잡혀 가장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총살당하게 된다. 

이 모든 일로부터 자신을 지켜낸 건, 발라게르 박사 한 사람 뿐이었다. 그는 흥분하지 않고 이 국가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하나씩 처리해 가며 미국과 손을 잡고 국가에 평화와 안정을 되찾아 갔다. 그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트루히요 가족들을 모두 해외로 추방했다. 독재자의 곁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여 온 조니 아베스 대령도 끝내는 가족과 몰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독재자를 추종했던 이들은 다시 그들 앞에 나타난 대통령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발라게르 박사는 암살로 반란 혐의로 붙잡힌 모든 이들을 사면했다. 그리고 암살자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임베르트와 아미아마를 조국에 위대한 공헌을 한 자로 인정해 주었다.
소설은 한 국가 안에 닥친 시련 앞에서 각 계층들이 어떻게 대처하는 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은 그 독재시대의 단면에 들어찬 다양한 계층의 표정과 이야기를 세밀하게 담아내었고 그것은 국가가 바른 길로 가기 위해 가장 힘을 가져야 하는 것이 바로 우라니아와 암살자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말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정치에서 가장 아랫 계층으로 몰리고 있는 현실의 오류를 말이다.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세계지도를 펼쳐본다. 우리나라와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먹먹한 나라.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가벼운 한 장의 종이 위에 조용히 숨을 쉬며 존재하는 나라. 힘없고 자본없는 작은 국가들이 그렇듯 하나의 국가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의 순간을 지나왔을까. 

아메리카 카리브해 이스파니올라섬의 동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 도미니카 공화국. 프랑스, 에스파냐로부터  점령과 독립을 반복하고, 이웃한 아이티 공화국으로부터도 수차례 점령을 당해야 했던 나라. 미국에도 점령당했다가 독립한 후 아직까지도 경제 등의 많은 부분을 의존해야 하는 연약한 국가. 

축제가 끝난 자리에는 아직도 그 축제를 끝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두려움과 아쉬움, 안타까움이 뒤섞인 과거를 되새김질하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위로받고 싶었던 것일까.
 

이 거대한 서사의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아직도 놓을 수 없는 장면들에 휩싸여 있다.
사람들은 모두 피해자였으며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곳엔 선한 자는 없고 나약한 자들만이 있었다. 비단 그곳뿐이겠는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도,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약한 자들을 염탐하고 약점을 공격해 그들의 자유와 내일마저도 자신의 실속을 위해 이용하려는 권력자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더욱 잔인하고 더욱 화려한 모습으로 말이다. 한 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가져본 적 없는 평범한 이들에게, 오늘이 전부인 사람들에게 그들은 안개를 뚫고 오는 빛처럼 그들 사이로 파고든다. 희망처럼, 권력자의 힘이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차올라 자신의 목에 걸린 단단한 줄을 느끼지 못한다. 어울려 사는 삶이란 무엇일까. 개인과 개인은 어쩜 이렇게 먼 거리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권력은, 계층은 무엇일까. 그렇게라도 가족을 위해 지키려 했던 삶. 책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웠고 그들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이어지길 바란 삶에 대해 막연한 거리가 느껴졌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아마도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공산주의와 독재, 국가의 종교 등으로 인해 개인의 삶을 탄압하는 나라들이 존재함을 일깨워주고 그들이 더 이상 악습을 번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일 것이다. 독재자가 등장하는 소설의 어떤 독재도 좋은 결말로 치닫진 못했다. 또 독재자는 결국,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든 허상이었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개인은 너무나 약한 존재라는 사실에도, 가슴이 아팠다.  도미니카 공화국과 같은 현실에 놓인다면,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누구도 섣불리 옳고 그름을 가려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가장  안전한 다수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 그들처럼 움직이고 그들처럼 행동하려 할 것이다. 그것이 비겁하게 느껴질지라도 누구도 이들을 조롱하고 비난할 순 없다. 그들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엔 우라니아가 '마호가니의 집'에서 트루히요로 인해 겪은 잔인한 일들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이곳을 떠나기를 결심하며 호텔로 돌아오는 부분에서 끝난다. 하지만 처음, 호텔 곁을 서성이던 그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인 듯 했다. 더 이상 가족과 연락을 끊지 않을 것이며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다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추행하는 남성에게 당당히 말하는 모습도 조금은 그녀가 단단해졌다는 느낌을 주었고, 무언가에 조금은 홀가분해 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시대가 담긴 책을 읽다보면, 특히 역사와 얽힌 글을 읽다보면 더욱 감정이 격해지는 걸 피할 수 없다. 그 시절, 그 자리에 내가 없었음을 안도하면서 느끼는 무력감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희망도 주워 담지 못한 채 이 책을 덮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우라니아의 마지막을 대면하면서 느낀다. 무언가에 대한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만이 입술을 뗄 수 있다는 것을. 희망은 책 밖에 남은 자들의 몫이며, 그것은 독자 각자의 마음에 피어오르는 무언가에 대한 '투지' 일 것이다. 이젠 역사소설을 보면서  느꼈던 안타까운 감정들과 대면할 용기가 생긴다. 개인은 약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모이면 분명 변화는 일어나며 그것은 기적이 될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믿고 싶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여전히 어느 쪽으로도 향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연약한 존재일 뿐임을 확인했고, 인간이 가진 딜레마를 오래 벗어버리지 못할 것임을 느꼈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나와 한 개인과 어느 나라의 사람들에게 향하는 무수한 감정들에 혼란을 겪었고 그로 인해 조금은 성숙해진 느낌이 든다. 가슴 한쪽이, 오래 기억하며 답을 달아가야 할 무언가로 묵직해진 기분이다.

축제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나 또한 이 책을 영원히 마음속에서 덮지 못할 것 같다. 아직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으므로. 그저 책의 힘을 믿으며, 이 소설을 통해 세계에 다시 달궈진 독재의 비극이 어느 나라, 누군가에게,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는 축제의 불꽃을 꺼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어느 날, 내가 조금은 떳떳한 마음이 되어 이 책을 덮을 날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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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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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이 책 곁을 맴돌았다. 아니, 헤매었다고 하는 게 맞다. 한 권의 책 속에 담겨 있기에 그 세계는 너무나 광활했고 그들의 이야기는 무거웠다. 한강 작가를 좋아하는 나였기에 그녀의 오랜만의 소설이 반가웠고 제목마저 나를 이끌었다. 바람이 분다, 가라. 책이 출간된 건 이제 막 봄이 움트려할 때였는데, 해가 바뀐 뒤에도 여전히 제자리에 고여 있을 뿐인 내게 그것은 어떤 신호처럼 울렸다. 그리고 또 한 번, 계절들을 보내고 한 해의 막바지에 다다라 다시 책을 덮었다. 어느 새, 세 번째였다.
책 속은 여전히 깜깜하고 길은 끝없이 엇갈려 있었다. 돌아서면 다시 새로운 길. 곳곳에 놓인 어둠의 웅덩이에 빠져 잠시 멈춰야 할 때도 있었다. 잦아들 줄 모르는 슬픔이 몰아쳐 눈앞을 가렸다. 그러나 다시, 끝을 모르는 이 길로 두려움을 지고 나를 던져야 했다. 두 다리에 힘이 없으면 바닥에 배를 밀고서라도 나아가야 했다. 살아있는 자의 숙명을 이 책에서 목격하게 될 줄이야. 너무 많은 삶의 비애를 알아버린 느낌. 나는 쉽게 그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387페이지 속에 가볍게 담겨버린 한 여자의 그림자 같은 생과 그녀와 삶의 일부분이 포개어진 또 한 여자의 마지막을 말이다.

한강 작가는 이 소설을 연재하던 중간 연재를 멈췄고, 그 뒤 네 번의 겨울을 보내며 새로 썼다고 했다. 살얼음이 박힌 느낌으로 이 소설 곁을 서성이고 뒤척였다던 그녀가 ‘이젠 돌아보지 말아야 겠다’는 그 시간들을 어느새 내가 돌아보고 있었다. 이 글을 쓰며 아플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짐작되었다. 그녀를 가까이서 만났더라면 나는 덥썩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미술평론가 강석원이 엮은 서인주 유작 평전의 출간을 앞둔 시간에서 출발한다. 그는 촉망받던 젊은 여성 화가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 짓고 그녀의 삶과 그림들을 극적으로 포장해 사람들 앞에 내놓으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이 자살이 아님을 아는 이정희는 그 책의 출간을 막기 위해 강석원과 맞서며 자신의 기억들을 되짚어 간다. 알콜중독인 엄마의 자살과 병으로 숨을 거둔 삼촌의 죽음을 견뎌야 했던 인주. 자신의 몸으로 아이를 품어줄 수 없었던 정희. 그리고 실패로 끝나버린 결혼생활. 그녀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 시간을 보내왔고, 더욱이 서로에게 상처를 내보이는 일에 어색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따뜻한 음식과 물 같은 존재로 지내왔던 정희에게 인주의 죽음은 자신의 일부를 상실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인주는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고 아이를 위해서라도 삶에 치열했고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정희는 끝없이 시간 속을 헤맨다. 서인주의 작업실에 몰래 들어가 그녀의 그림들과 체취를, 움직였던 공간을, 흔적을 오래 더듬는다. 돈과 권력으로 무장한 강석원이 모두 움켜쥐려 했던 그녀의 삶을 놓아주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시간을 잃어버린 정희가 안간힘으로 무장할 수 있었던 건 자신과 포개어진 인주의 생을 거짓무덤에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함께 나눠온 시간을 기억을 부정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녀의 치열한 싸움 사이사이에 추억들은 환청처럼 찾아온다. 외삼촌과 인주와 함께 까먹던 계란들. 먹그림들. 우주가 담긴 책들. 결혼을 한 뒤 정희가 삶을 놓아버릴까봐 그녀 곁에 데려다놓았던 인주의 아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편안한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평온해서 현재의 그녀를 더욱 슬퍼보이게 했다. 어쩌다 이 시간을 통과하게 된 것일까. 고통으로 누군가의 부재를 바라봐야 하는 이 시간으로. 행복했던 기억들은 타고 남은 재처럼 허공으로 사라지려는 그녀를 깨우고 일으킨다. 새벽의 찬 공기속으로 등을 떠민다. 그녀는 인주를 볼 수 없었던 시간 동안 그녀에게 있었을 일들을 계속 추적해 간다.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메일을 넣고 전화를 걸면서 끊임없이, 시간과 얼굴을 내밀지 않는 상대와 싸운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모두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에 대한 낯선 이야기들을 만나면서 정희는 또 한 번 내면에 충돌하는 슬픔을 느낀다. 인주는 그 날 새벽, 눈발이 아득하게 날리는 미시령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했었다. 눈발이 모든 것을 덮기 전에 그 전화를 받았더라면, 어쩌면 지금 인주는 살아있을까. 자책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시간 앞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남은 힘을 다해 걸음을 뗀다. 피비린내 나는 공기 속에 이야기는 부유하는 먼지처럼 질기게 온 몸으로 내려앉는다. 코와 입으로 들어와 내부에 들어차고 호흡을 방해한다. 어둠 안에 드문드문 꺼질듯 희미한 불빛들. 별처럼 작은 그 불빛을 뚫고 나가면 보일 듯한 과거의 따뜻했던 시간들. 식물을 기르듯 먹그림에 몰두하던 그들의 모습.

우리는 늘 삶을 의심하고 무의식중에 자신의 근원을 쫓는다. 나는 어디서 왔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와 같은 철학적 심연에 휩싸여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어떤 대답을 얻기 위해 그토록 우리는 혼돈을 자처하는 것일까. 죽음으로 종결되는 생에 어떤 제목을 붙여주고 싶은 것일까. 처음과 끝을 알고 싶었던 외삼촌의 우주에 대한 이야기들. 그 곁에서 광활한 우주와 자신의 거리를 가늠하던 앳된 고등학생 소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녀는  너무나 멀어져버린 그 시간들을 눈으로 읽기 위해 끊임없이 우주의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을 자신의 현실에 대입시킨다.   

과거의, 자신이 살았던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것을 바라보면 그 모든 것은 찰나의 시간일 뿐이다. 그것들은 애써 만지고 이해하려 할수록 모호한 것들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태초에 ‘소금 한 알’처럼 던져진 우주. 그 표면에 붉은 마그마가 바다를 이루었던 처음. 태고의 비가 수천만 년을 변함없이 흐르며 서서히 지구를 식혀가던 시간. 가슴에 담기엔 너무나 벅찬 그 시간을 가늠하려 애쓸수록 혼돈만이 일었다. 모호했던 삶의 ‘시작점’이 그곳에 있다면, 우리는 모두 동일한 원소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거기서 우린 스스로의 근원과 맞닥뜨린 것은 아닐까. 인간과 우주를 연결시키며 우리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끄는 것은 결국 자신 안의 것을 진실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 때문 아닐까. 공식에 대입하면 풀리는 규정된 삶을 갖고픈, 고단한 사람들의 희망 아니었을까.



책의 표지를 장식한 그림. 한은선 작가의 「물결치다」라는 작품을 찾아 오래 보았던 일이 있다. 처음엔 아주 잠시, 전체를 드러낸 그림을 마주하기가 불편했다. 살갗 위의 상흔 같아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것은 빙하 사이의 크레바스 같기도 했고, 어딘가로 이어진 물줄기 같기도 했다. 종이를 채운 흔들림과 비규칙적인 어둠은 불안정한 작중 인물들과 많이 닮아있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작가의 그림을 실제로 보고 싶은 막연한 마음도 생겼다.  


외삼촌의 작업에서 서인주의 작업으로 이어진 먹그림은 어둠속에서 돋아나는 빛, 희망과 닮아있었다. 그것은 혼돈을 뚫고 나아가려는 움직임이었다. 외삼촌은 큰 한지 위에 먹을 심고 물길을 내어주면서 한지위로 자국을 밀고 나가는 먹의 길을 바라보곤 했다. 긴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물과 먹과 종이가 어울어지며 하나의 의미가 되어가는 모습은 우리내 삶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온화하고 고요한 시간인 듯 하지만 그 안에서 서로가 밀고 밀리며 치열히 다투고 있었다. 그렇게 남은 흔적들을 가까이서 볼 때는 불안정하게 느껴지지만, 멀리서 전체를 보면 아름다운 별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우리가 아등바등 하며 사는 삶도 지나와 먼 거리에서 보면, 어쩌면, 이런 모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은 별을 닮았다. 인간은 그 별로부터 떨어진 티끌일 뿐이다. 우주의 물질이 하나이듯 종이와 담벼락, 타인의 손과 손까지도 하나였다. 무엇을 이해하고 피할 수 있을까. 밤과 낮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생성과 소멸을 목격하며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을. 고요해질 수 없는 수면을 품고 끝없이 출렁이고 휩쓸리며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불쑥,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 모든 혼돈을 가슴에 담았다 덜어내길 반복하면서 ‘단박에 목숨까지 꿰뚫을 수 있는 삶을 지금 살아내고 있다’ 는 것만으로 충분히 우리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니까.

살고싶다.
살고싶다.


불길 속에서 치열하게 그녀가 되내던 말이 곁을 맴돈다.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불길에 갇힌 그녀는 우주가 태어나던 그 시간과 다르지 않아보였다. 그녀가 다시 태어나고 있다, 고 생각했다.

외따로 떨어진 유성처럼, 어디선가 누구도 모르게 차디찬 몸을 견디고 있을 사람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갈망했던 서인주와 이정희의 관계를 질투하던 강석원은 결국 온전히 자신의 것일 수 없는 서인주의 흔적에 불을 붙이며 이정희 또한 함께 죽이려 한다. 자신이 품고 있는 기억이 거짓이 될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현듯 인간의 모든 감정 앞에 관대해지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욕망과 질투, 시기, 자만의 부푼 감정들로 우리는 내일을 맞을 이유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방어하려는 것 아닐까.


누군가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져나오기 위해 달아나고, 실제로 까마득히 떨어져서 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뚫고 나간 자리는 여전히 뚫려 있으리란 것을, 다시는 감쪽같이 오므라들 수 없으리란 것을 몰랐다.
                                                                                                              - p.64


나는 늘 한강 작가의 소설에서 느껴 온 여성의 섬세한 감정과 생의 긴밀함, 풍부한 내면의 표현 들을 존경해왔다. 정오를 넘긴 새벽까지, 그 균일한 고요 속에서 그녀의 문장을 읽고 있으면 넘치는 감정들에 젖어 스스로 소설가가 된 듯도 했다. 햇볕 아래서 식물이 되길 원했던 가늘고 여린 잎 같던 여자들. 그러나 정희는 달랐다. 치열하게 무언가를 갈구하며 싸워나갔다. 타인의 눈매에 위압되지 않았고 꼿꼿이 맞섰다. 당당히 진실을 요구했다. 그녀는 알 수 없이 용감했고, 알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더욱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그녀가 안타까웠고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들이 더욱 애잔하게 느껴졌다. 삶은 이해할 수도 규정될 수도 없는 것이다. 지나온 삶의 상처들은 더더욱 그렇다.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아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새로운 시간 속에 편입한다. 살아낸다는 현재형 밖에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며 어떤 것도 지나오기 전엔 무(無)의 상태일 뿐이다.

아이의 머리맡에서 자장가를 불러주다 불현듯 떠올랐던 생각이 있다.  

우주가 여기 있다는 것.

먼지의 입자 같은 한 개의 세포가 또 다른 세포를 만나 수정이 되고 분열하면서 형상과 무게, 존재를 만들었을 이 아이의 처음. 좁은 길을 다시 돌아나와 막다른 세상으로 쏟아져버린 존재. 시간의 눈금만큼 조금씩 스스로를 팽창시키는 존재. 나와 아이가 나란히 우주의 삶을 살고 있다고. 우리의 시작은 그랬고 우리는 한 개의 점저럼 계속 존재하고 있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넘어져 있던 한 여자를 일으켜 세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재촉한 것은 작가와 우리와 나란한 삶을 살고 있는 한 여자에 대한 걱정과 위로가 아니였을지. 아이를 등에 업은 서인주가 이정희에게 건내었던 말을 적어본다.

이런 바람이 불면 말이야.
민서를 고쳐 업으며 인주는 말했다.
이만큼의 습기를 품은 바람이, 이만큼의 세기로 불면 말이야...... 

혈관 속으로 바람이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져. 모든 것이 커다란 전체로 느껴져. 언제고 낸 다리를...... 단박에 목숨까지 꿰뚫을 수 있는 삶을 지금 살아내고 있다는 게, 무섭도록 분명하게 느껴져.
                                                                                                            - p. 369 


바람이 나를 끌고 나는 곳은 어디일까. 또 어떤 삶의 심연 속으로 나를 데려다 놓을까. 어둠에 움츠러들지 않고 그 속으로 나를 밀려 한다. 어둠에서 만이 더욱 선명한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니까. 어렴풋이 삶의 윤곽을 더듬은 느낌. 손에 남은 차가운 긴장감을 움켜쥐어 본다. 시간이 모래보다 곱게 바르라져 날린다. 다시, 바람이 분다. 

 

  

  

 

 * 사진출처 :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2/h200602051738497568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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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주르, 뚜르 - 제1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40
한윤섭 지음, 김진화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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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나라’, 각각의 뜻을 설명하라고 할 때, 당황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봉주의 질문 앞에 선뜻 입을 땔 수 없었다. 같은 것을 지칭하는 단어이니 같은 뜻일 것도 같았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본 ‘조국’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하지만 이 책을 덮은 지금은, 설명할 수 있다. ‘조국’과 ‘나라’의 다른 뜻을. 조국이란 말이 갖고 있는 향수와 힘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봉주르, 뚜르』에는 5학년 봉주가 프랑스란 낯선 나라에서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돌아보고, 그리워하며, 자부심을 갖게 되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게 그려지고 있다. 이야기는 탐정소설처럼 우리를 들뜨게 하고, 끝까지 호기심을 잃지 않게 한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엔 우리가 살면서 놓치고 지나온 역사과 과오, 그리고 남겨진 과제에 눈뜨게 한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 사랑하는 나의 가족.’
  ‘살아야한다’



낯선 땅 프랑스 뚜르에 새 보금자리를 튼 봉주네 가족. 그곳에서 봉주는 특별한 문장을 발견한다. 한글로 쓰인 두 개의 간절한 문장. 봉주는 그 문장의 주인을 찾으려한다. 그가 무사히 살아있는지,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갔는지 혹여 나쁜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자꾸만 마음이 쓰이고,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주네 가족이 이사 온 집에는 한국인은 산 적이 없다고 하고, 집과 관련된 주변 사람 누구도 쉽게 실마리를 내주지 않는다. 그 가운데 봉주는 처음으로 가슴깊이
‘조국’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책에서 본 한국의 역사 인물들과 나라, 가족에 대해서도. 

 세계는 더 이상 넓지 않다. 비행기를 타고 하루만에도 해외를 다녀오고, 거기서 한국인을 만나는 일도 잦다. 또 한국 안에서도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공부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세계의 거리가 좁아질수록 쉽게 잊게 되는 것이 바로 자국(自國)에 대한 인식이 아닐까 한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 나의 나라를 갖고 있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잊어버리고 우리는 다른 나라의 문화와 생활 모습들을 동경하며 산다.
 낯선 땅에서 발견한 한글로 쓰인 문장으로부터 발현되는 봉주의 이야기는 나의 나라를 갖고 있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끼게 한다. 또 타인의 나라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얼굴색과 머리색, 모습이 다른 것이 생각과 감정 또한 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뚜르로 이사한 뒤 등교하기 시작한 학교에서 봉주와 늘 부딪히기만 했던 ‘토시’ 수수께끼 같은 아이였다.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소개한, 무뚝뚝하고 표정 없던 아이. 봉주는 처음부터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한 토시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수영도 달리기도 토시만은 꼭 이기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발표수업에서 봉주는 한국을 소개하게 되고, 거기서 토시와 작은 다툼을 하게 된다. 한국이 분단국가임을 아는 타국의 아이가 던진 질문에 봉주는 우리 모두 그렇게 알고 있는 북한에 대한 기본 정보로 대답을 해준다. 가난한 나라라는 것과 독재자로 인해 북한 사람들이 불쌍하게 살고 있다는 것. 그 때 토시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봉주에게 반문한다. “네가 북한을 어떻게 알아?”라고…… 토시는 분명히 봉주의 대답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을 던진다.


 “넌 네가 북한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토시는 가볍게 말하고 책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정말 화가 났다.

 “내가 북한에 대해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난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야.”
 “뭐가 사실인데? 왜 북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데?” 

 “화낼 거 없어. 난 네가 너희 나라에 대해서 다른 아이들한테 정확히
알려 주길 바랐을 뿐이야. 그뿐이야. 다른 뜻은 없어."

 일본인인 토시가 왜 그렇게 이야기했어야 했는지, 그 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우리나라에 관심이 있어 북한을 좀 더 알고 있거나 어쩌면 남한이 가난한 북한을 돕는다는 봉주의 말이 자국만을 자랑하고 옹호하는 것으로 들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토시의 말에 나도 퍼뜩 정신이 들긴 했다. 북한에 대해 너무 빈곤과 무지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북한은 그들 나름대로 편안한 삶을 살고 있진 않을까. 불행하지 않은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봉주는 ‘북한’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찾아보게 되면서 먹먹한 마음을 갖는다. 한 나라였지만 서로 땅을 가르고 점점 다른 문화와 모습을 갖추어가면서 어떤 타국보다도 먼 나라가 된 느낌이다. 북한은 가난하고, 그래서 북한사람은 프랑스로 오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핵무기 개발로 다른 나라로부터 비난을 사고 있는 북한. 가난한 북한사람들은 매일 굶어 죽어간다…… 
 토시가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한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봉주가 하는 한국말을 알아들으면서도 아는 척 할 수 없었던 이유를, 그렇게 뚜르로 와서 일본인으로 식당을 운영하게 된 가족의 이유를 토시가 한마디, 한마디 꺼낼 때마다 가슴 한쪽이 덜컹거렸다. 현재 북한의 3대 세습은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주고 있었다. 자유와 평화는 없고 권력만이 세습되고, 난무했던 결정. 국민을 외면한 정부의 오만. 뉴스가 요란하게 북한의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토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떠나온 자신의 나라를 부끄러워하기 보단 북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 그 아이의 마음이 깊이 가슴에 울렸다. 나는 북한의 결정 앞에 어떤 비난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북한 아이와 친구가 된다는 것, 그건 어떤 것일까?

“북한에 대해서 찾아봤어요. 제가 혹시 북한 아이와 친구가 되면 어때요?”
엄마 아빠가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북한 아이와 친구가 되는 게 안 될 건 없는데, 북한 아이를 만날 기회가 별로 없지. 물론 요즘 한국에는 탈북자들이 많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아빠가 대답했다.
“만약 그럴 기회가 생긴다면 그게 위험한 일이에요?”

 사실 분단만 아니었다면 그저 다른 지역에 사는 또래의 아이가 만나 어울리게 된 것일 뿐인데 전쟁의 상처로 인해 자신을 숨기고, 어색하고 불편하게 만나야 하는 토시와 봉주의 현실이 못내 서글펐다. 봉주의 창을 때리던 토시의 돌맹이가, 둘이 숨어든 공원의 어둠이 그런 두 아이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비췄다.
 문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비밀을 얘기해 준 토시와 친구가 되면서 봉주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고, 마음이 한 뼘 성장했다. 서로를 기다리는 애틋한 친구가 된 봉주와 토시의 모습에 진한 감동이 일었다. 아이는 아이다울 때 가장 예쁘지 않은가. 의심과 미움을 버리고 만난 아이들은 정말, 천진난만했고 예뻤다. 어린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서로에 대한 걱정과 우정이 따뜻했다. 그래서 계속 이어질 수 없었던 두 아이의 마음에 안타까움은 너무 크게 일었다. 

 전쟁세대와 멀어질수록 우리는 역사를 잊어가고 있다. 교과서 속 외우기 어려운 복잡한 사건사고들로만 치부하며 외면한다. 우리의 ‘역사’를 잊는다는 것은 나라의 뿌리를 잃는 일이다. 아이들에게 역사를 전하고 스스로 느낄 수 있게 해야 할 의무는 분명 지금의 어른들에게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있어야 한다. 
 ‘봉주르, 뚜르’ 속에는 꼭 집어 역사라 말할 수 있는 이야기도 사건도 없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뒤에는 ‘조국’‘나라’, ‘나의 가족’, 그리고 ‘일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낯설지만 깊이 공감되는 단어들이 가슴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역사를 선과 악으로 결정지어놓은 책으로 아이의 생각을 미리 닫아버리기 보단 열린 마음으로 역사에 대해, 나의 조국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가슴에 역사를 새기고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기에 이 책은 특별한 의미로 누구의 가슴에나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재미로 읽고 덮어도, 마음 한쪽에 들어찬 묵직한 무엇을 느끼며 책을 덮어도 한순간 느꼈던 따뜻함은 오래 남을 것이다. 문장의 주인이 드러나고 이야기는 결말을 맺지만 어쩐지 아직 비밀은 풀리지 않은 느낌이 든다. 가슴 속엔 아직 풀리지 못한 물음표들이 떠다닌다. 그 생각의 고리들에 하나씩 답을 달고 나면 아이도 나도, 불쑥, 다르게 느껴지는 오늘을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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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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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손으로 들고 읽을 수 있는 작은 무게의 책이다. 그러나 심심한 맘에 섣불리 이 책을 펼쳤다간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나는 마음의 무게에 곤욕스러워질 것이다. 두 번째로 만난 헤르타 뮐러의 책. 그녀의 문장은 막힘없이 흘러가는 작은 구슬처럼 여유롭고 또 아름답지만, 그 문장들이 늘어서서 뿜어내는 인간의 생과 사에 대한 이야기는 처절하고 묵직하기만 하다. <숨그네>의 레오에게서 삶 자체를 착취당한 자의 비애를 보았다면,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의 빈디시에게선 현실을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자책하며 선택할 수 없는 내일 앞에 발만 구르는, 무능력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전쟁 후, 전몰자 기념비 주변에 핀 ‘장미’는 아름답지만 연약한 ‘풀들’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다는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 무성하게 자라난 권력은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내일을 억압하고 마음대로 오려내었다.
  ‘빈디시’는 독일로 망명할 수 있는 여권을 얻기 위해 2년 째 이장에게 밀가루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기약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었다. ‘모피가공사’는 이미 여권을 받아 떠날 채비를 하고 있고, ‘야간경비원’은 떠날 생각이 없다. 떠나려는 자와 떠나는 자, 남으려는 자가 부딪히면서 이야기는 끊임없이 빈디시의 내면을 헤집는다. 그는 이 마을의 모든 것에서 ‘멈춰선 시간’을 본다. 벗어나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선 희망도 내일도 없다. 끝이 난 것이다. 바퀴를 잃고 멈춰 선 수레가 길가에 버려진 자신의 큰 덩치를 수치스러워하듯, 빈디시는 남아있는 자신을 수치스러워했고 여권을 얻지 못한다면 생은 끝난 것이라 여겼다. 
  그의 마을엔 생기 있는 것도, 빛나는 것도, 오고가는 미소도 없었다. 안개가 낀 듯 경계가 흐릿한 그곳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건, 죽음의 냄새였다. 흡사 죽은 자들이 사는 내세 같기도 했다. 살아서 먹고, 움직이고, 이야기하지만 시간의 목줄에 이끌려 하루를 지나칠 뿐, 누구도 그 목줄을 팽팽히 당겨 살아내는 이는 없었다. ‘관’은 이름표를 달고 그들의 곁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죽음’은 친근하게 맴돌았고, 사람들은 성당에 모여 떠나는 이를 배웅했다. 뮐러의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루마니아를 알았고, 그곳에 있었던 전쟁과 비극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쉬쉬하며 숨겨야 했던 역사와 감시당해야만 했던 삶의 고단함이 절실히 느껴졌고, 안타까웠다. 차우셰스쿠 정권에 갇혀 마음에 깊은 감옥을 지어야 했던 슈바벤 독일 마을 사람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온전히 자신을 누일 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마을은 생활의 터전도 안식처도 아닌 ‘작은 수용소’ 같았다. 사람들의 재산과 노동, 곡식 등의 것들이 어떤 대가도 없이 정부에게 넘겨졌다. 열리지 않은 곡식과 열매마저도 그들의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훔쳐보았고, 눈길로 조롱했다.


빈디시는 바짓가랑이에 한 손을 올려놓는다. 손은 차갑고, 허벅지는 따뜻하다. “여기 사정은 점점 나빠질 거야.” 빈디시는 말한다. “저들은 닭이고, 달걀이고 닥치는 대로 빼앗아가고 있어. 심지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옥수수까지 빼앗아가는 판이야. 언젠가는 자네 집과 마당까지 뺏어갈걸.” - p.111

 

 그런 마을의 사정에도 떠나지 않으려는 야간경비원을 빈디시는 우둔하게 여겼다. 누가 옳은 것일까. 전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빈디시는 살기 위해 지금의 아내에게 삶을 붙들어 매었다. 전쟁 후 남은 자들에게 사랑의 몸짓은 교환의 가치였고, 쾌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성스러움은 사라지고 그것은 인간의 욕심과 분노로만 그들 곁에 자리 잡았다. 그것은 빵이었고, 옷이었고, 여권일 뿐이었다. 아내는 빈디시를 만나기 전, 러시아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남자들의 철제침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빈디시는 그 때의 아내를 두고두고 이해하지 못했다. 본문 중「풀수프」에서 그녀의 과거를 자세히 만날 수 있다. 그 문장들이 가리키는 한 여자의 잔인하고 고단했던 시간이, 굶주림 앞에 무릎 꿇은 그녀의 마음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섣불리 그녀의 판단을 비난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카타리나를 미워할 수 없었다. 
  처음에 빈디시는 어서 빨리 독일로 망명할 수 있는 여권을 얻고 싶었음에도, 도를 넘는 부정된 방법을 쓰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마음은 조급해졌고, 결국 딸아이의 몸을 내어주고 만다. 도시에서 유치원교사로 일하는 아말리에는 부모를 원망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화장을 한다. 빨간 원피스를 입고 하얀 구두를 신는다. 빈디시는 말리지 못하고 망부석이 되고 만 자신을 끝없이 자책했다.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말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딸아이가 돌아올 길을 내다보면서 끝없이 길을 잃었다. 그들의 모든 감정과 판단은 여권에 묶여있었다. 어쩌면 목숨도. 그들은 그 줄을 끊지 못했다. 
  힘을 가진 자들은 그늘에 숨어 약한 자를 탐하고, 제복과 수도복으로 죄를 가리고 있었다. 손도 데지 않고 약한 자를 쥐락펴락했다. 사람들은 권력으로 무장한 그들을 우러러 보면서 원하는 것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권력은 그렇게 그림자만 남은 그들을 삼켰다. 표정도, 입술도, 재산도, 가족도, 내일도 모두 삼켰다. 명명하여 부르기 이전에 그들은 한 개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어둠이 내리면 그 윤곽마저 사라지는 그림자 덩어리. 빛이 닿지 않는 그들은 축축하게 젖은 종이인형처럼 불안했다. 내밀한 삶은 서로에게 바닥까지 드러났지만 지나쳐온 많은 시간들로 모든 것을 알아버린 그들에겐 슬픔도, 동정거리가 되지 못했다. 서로에게 침묵했다.  


 여권이 생긴 뒤엔 빈디시 가족에게도 일상의 대화가 오갔다. 집안의 것들을 팔면서 생기가 돌았다. 비행기 멀미를 걱정하면서 새 옷을 재단했다. 머리를 잘랐다. 아말리에의 잠든 얼굴이 부부의 눈에 보였다. 빈디시의 아내가 웃었다. 그렇게 죽음이 지나가고, 과거가 지나갔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아말리에를 찾아댔다. 빈디시 부부는 아무렇지 않게 아말리에의 약속을 챙겼다. 여권이 생긴 뒤의 빈디시 가족의 모습과 대비되어 이어지는 본문「은빛 십자가」는 그들이 잃은 것과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 힘으로 어떻게 한 인간을 짓밟는지를, 한 사람의 생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모습이 냉정하게 그려진다. 시대를 국가를 잘못 얻은 그녀의 삶이 이렇게 훼손되는 게 안타까워서, 아말리에의 담담함이 안쓰러워서, 당연하게 그녀의 작은 가슴을 움켜쥐는 그들의 손이 두려워서, 나는 잠시 책을 덮어야 했다. 삶의 앞, 뒷면을 한 번에 보아버린 듯 그 극단 앞에 눈이 매웠다.  

  침착하게 이어지는 문장들은 차갑게 그들의 삶을 후려쳤지만 누구도 스스로의 잘못을 알진 못하는 듯 했다. 떠나는 날, 빈디시 부부는 회생 정장을 차려입었다. 때가 묻은 ‘꿩’의 모습으로 그들은 마을과 작별하려 한다. 무언가를 쟁취했다기보단 도망치는 느낌이 강했다. 오히려 그 사이 결혼한 ‘야간경비원’에게서 막 달아오르려는 삶의 냄새가 맡아졌다. 그들은 행복하게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들의 내일은, 오늘과 다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그림자이길 자청한 자이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스스로를 숨길 곳을 위하여, 자신이 삼켜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 야간경비원은 빵을 씹으며 나지막이 말한다. 빈디시는 밀가루포대를 들어올려 자전거에 싣는다. “인간은 강해.” 그가 말한다. “짐승보다 더 강하지.” - p.15

 

  그림자는 그늘로 들어서면 사라진다. 존재가 없어지고 무의미해 진다. 그것은 안전하게 느껴졌지만, 어리석은 삶의 입구로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단 한번만이라도 땅을 딛고 서서 제 팔과 제 다리를 휘젓고,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면서 살아있음을, 스스로 존재함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면 어쩌면 그들은, 꿩보다는 나은 모습을 갖출 수 있지 않았을까. 인간은 강하게 자신의 삶을 몰아가지만, 결국 결정적인 힘이 가해지는 순간에는 약해지고 무능력해진다. 미래가 위협당하는 순간, 그들은 안전한 곳이라고 느껴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어떻게든 가야한다. 그토록 분명하게 인간은 강하다고 말했던 빈디시는 아말리에를 권력 앞에 내어주고 다른 사람들의 입술이 두려워 자신의 집을 나서지 못했었다. 스스로를 조롱하듯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라고 말했다. 
  '몸집만 커다란 꿩은 어설프고 무력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상징’한다. 살기 위해선 도덕도 인간다움도 버려야 하는 인간의 비애가 날지 못하는 꿩의 모습과 겹쳐져 인간의 나약함을 비웃음거리로 만든다. 빈디시 뿐만 아니라 분명, 지금 우리의 삶에도 똑같이 비춰지고 있는 꿩의 모습. 안전하게 살기 위해선 권력에 편승해야만 하는 현실. 섣불리 부정하고 틀렸다 말할 수 없는 현실. 두려움이 손과 발을 묶는 현실. 살기위해 그래야만 했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스스로 면죄를 받는 잔인한 현실. 그렇게 우리도 빈디시의 마을에 살고 있다.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나는 불현듯 두려워진다. 삶을 팽팽하게 조이는 어떤 무게감에, 내게로 달려오는 내일 앞에 묵직한 책임감을 느낀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빈디시는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안에 살고 있다. 그가 조용히 그곳에 머물 수 있도록, 내 인간다움을 이기고 나의 밖으로 출몰하지 않도록, 팽팽하게 마음을 조율해 본다. 그러나 내 입술은, 보는데로 진실을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은 한 인간을 ‘꿩’으로 전락시킬 수 있지만 그 현실을 박차고 나가는가, 갇히는가, 의 선택은 분명 자신의 몫이다. 삶은 결국 각자가 가진 그릇만큼 담기기 마련이고, 책임은 각자의 몫일 뿐이다. 다행인 건 누구도 서로를 비난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는 사실.  나는 내가 가진 최선을 다해 나의 삶을 그림자 밖으로 꺼내겠다고, 그림자의 꿈을 이루겠다고 다짐한다. 그 희망만이 내가 이 책을 덮을 수 있는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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