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는 감이여 - 충청도 할매들의 한평생 손맛 이야기
51명의 충청도 할매들 지음 / 창비교육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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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이란 확실히 세월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 어릴 때는 식감이나 색상 때문에 먹을 시도를 하지 않았던 식재료들이 갑자기 맛있게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지, 부추, 꽈리고추 등등...


그 중 특별한 찬거리 하나를 꼽자면 어머니가 아니면 세상 어디에서도 먹을 수 없었을 듯한 요리가 있는데, 다수의 한정식집에서도 알고 계시거나 반찬으로 내주신 적이 없고, 어머니 친구분들도 할 줄 모른다 하시니, 이건 아마 외할머니, 어머니에게로 이어져 내려온 찬거리가 아닌가 한다.

가을 장마가 시작되어 눅진하긴 하지만, 찬바람 불기 시작하는 딱 그 철에 일년에 단 한 번 먹을 수 있는 귀찬 찬이고 추억이라 9월이 되자마자 기대가 된다.


물론 이제는 어머니가 호기롭게 예전처럼 요리를 하시진 못해서, 내가 열심히 배우고 있다. 널리 알려진 요리 미스테리 중 하나인, 같은 재료 같은 순서로 해도, 심지어 감독관 어머니가 옆에서 일일이 다 지시하고 허락을 받아도 같은 맛은 아니다. 좌절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언젠가 제대로 맛이 나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 상상의 힘을 빌어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한 가지 찬도 이럴진대, 51명의 할매들의 각각의 손맛은 얼마나 풍부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을까, 읽기 전에 기대다 높았다. 오랫만에 어머니와 함께 읽고 이야기하고 싶은 책이었다.


이것만은 내가 젤 잘하지!

글보다 어려운 걸 척척해내던 인생

 
이 책은 내용과 별개로 탄생 과정에서도 감동적인 부분이 많다. 특히 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워 요리법을 쓰고, 여기에 중고등학생과 자원 봉사자가 재능 기부로 그림과 채록에 참여해 완성된 그아먈로 3세대가 힘을 모은 저작이다. 특히 질문할 거리를 만들어 여쭙고 녹음하는 과정을 거치며 할머니들이 쓰시는 충청도 사투리까지 꼼꼼히 받아 적은 덕분에 할머니들의 인생과 요리가 기록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요리책으로는 낯설게도 이 책은 부록조차 흥미롭다. 충청도 사쿠리에 익숙한 분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내게는 생소하면서도 재밌는 말이 잔뜩 있는 것이 이 책의 가치를 한층 높여 주는 요소이다. '할머니가 알려 주는 사계절 제철 재료들'에는 할머니들이 직접 그림을 그린 재료들이 수록되어 있고, '할머니 요리어 사전'에는 사투리 단어들이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설명을 들어도 도무지 그 느낌을 알 수 없는 단어들도 있는데, 그래도 심각해 지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이 책만의 매력이다. 참! '별미 요리 꿀팁'도 있는데, 못 먹어보고 못 들어 본것이 대부분이라 꿀팁을 살려 요리할 수 있을지는 요원하다.


읽어갈수록 이 책이 요리책인가 싶은 마음이 커져 간다. 51명 할매들의 요리법이 분명히 정성스럽게 담겨 있지만, 할매들의 인생이야기가 훨씬 더 선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인사말부터 인생역전 에피소드들, 해당 음식에 얽히고설킨 사연들. 요리법을 자필로 적으셨는데, 그 정갈함과 정성에 더 많은 생각이 머루른다.

“9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동생들 키우느라 공부를 못했다.

얼마나 공부하고 싶었는지 말도 못한다.”

“면사무소 가서 혼자 해결할 수 있으니 너무 감사하다.

아들이 캐나다에 있는데 편지도 쓸 수 있게 됐다”


기회 보상이 더욱 더 잘 이루어지면 좋겠다. 자립적으로 간단한 공무를 해결하는 일, 자식에게 편지 쓰는 일이 더 없이 행복한 보상이라니 교육 보상 효과를 들은 것 중 최고로 감동이다. 돈이 부족한 것이 생계에 직결되는 위협이라면 글을 읽고 쓸 수 없다는 것은 개인의 자립과 독립 그리고 자존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일 것이다. 글을 깨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내시다 돌아가신 분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상상해 보니 마음이 뻐근하다.

 
손글씨와 사투리의 효과인지, 요리법이 구술로 듣는 듯 너무나 생생하여 요리를 만들어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게는 분명히 난이도가 너무 높은 것도 사실이다. 일단 계량 따윈 하지 않으신다. 부연설명이 상세하진 않다. 그냥 자르고 불리고 찌고 볶고 지지라! 는데, 간혹 양념이나 부재료 주재료의 분량이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ㅠㅠ 계란 물을 만들어 밥 위에 올려놓고 찌라고 하시면...... 아궁이와 가마솥을 먼저 마련해야할 것 같으다. 맷돌로 이래저래 갈아라! 하시는데 맷돌도 없...... 뉴슈가(사카린)과 미원...... 구매해 둬야하나 잠시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할매들이 공동 식당 창업 해주심 이사 가서 단골이 되고 싶을 정도로 기회가 된다면 얻어먹고 싶은 것들은 지천이나 따라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래도 이 책은 이대로 완벽하다. 알게 되어 반갑고, 감사하고, 맛있는 거 많이 드시며 오래 사시면 좋겠다. [요리는 감이여] 식당이 생기면 참 좋겠다. 꼭 가서 먹어 보고 싶다.


이 책이 승승장구해서 할머니 저자들이 공부하니 재미난 일들이 많더라, 응원해주는 이들도 많더라, 이렇게 자랑을 오래하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생각해보니 살면서 계획대로 수치 딱 떨어지게 정확하게 진행되고 마무리되는 일이 얼마나 있었던가 싶다. 그나저나 ‘감’은 어떻게 능력치를 키우는 것인지 ‘눈치’도 없기로 유명한 나로서는 참 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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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사자 와니니 2 - 검은 땅의 주인 창비아동문고 305
이현 지음, 오윤화 그림 / 창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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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어!”


푸른 사자 와니니 2권이다. 1권에서는 마디바 무리를 떠나서 자신들만의 무리를 이룬 와니니와 친구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나는 약하지만, 우리는 강해!"

1권의 엔딩 부분에서 기억나는 인상적이 구절이다.

 

우리 집 꼬맹이와 나는 1권을 읽을 때부터 왜 푸른 사자라고 하는 지가 궁금했다. 어리다는 뜻인가? 와니니가 희망하는 대로 잘 자라서 행복하게 된다는 의미인가? 여러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실은잘 못한다고한 살짜리 어린 사자를 무리에서 내쫓다니! 놀라서, 꼬맹이가 어떻게 받아 들일까 맘속으로 긴장한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극단적인 고난과 시련이 계기가 되어 성장하는 이야기를 산나게 들려 주려면 꼭 필요한 구성이었겠지요. 역시 '야생'이란 생각이!

 

물도, 먹이도, 무리도. 힘도. 초원에서는 그 무엇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초원의 동물들이 마음먹은 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희망이다. 와니니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26

 

이렇게 눈치나 보고 도망이나 다닐 거면, 뭐 하러 사자로 태어나? 72

죽고 사는 일은 초원의 뜻이라고들 하지. 맞아. 그렇지만 어떻게 살지, 어떻게 죽을지 선택하는 건 우리 자신이야. 그게 진짜 초원의 왕이야. 89 

제가 가진 가장 큰 목소리로 포효한다는 것, 그건 사자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영토를 가진 사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었다. 187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심장이 힘차게 뛰었다.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해졌다. 사냥꾼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74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꾼이 되는 것, 그것은 암사자가 가장 잘 하는 일이다. 그것이 암사자의 일이다. 206

 

스스로 원하던 싸움을 했으니 나는 스스로의 왕이다. 초원의 왕이다. 207

 

크하하하항! 크하하하항!

검은 땅의 주인, 와니니 무리는 자신들의 땅에서 사냥을 시작했다. 219

 

엔딩이 멋지다. 3권이 나오려나 하는 기대도 가질 수 있다. 자신들의 땅사냥을 시작했다란 말이 동일한 무게로 중요하게 느껴진다.


생각보다 긴박하게 긴장감을 유지하는 다채로운 이야기이면서, 묵직한 여운을 준다. 특히 남의 생각과 평가에 휘둘리지 말고,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을지 자신이 선택하는 것, 그 과정은 자신답게 사는 것. 자신이 살아갈 영역을 만들고 자신이 가진 가장 큰 목소리로 포효해 보는 기쁨을 누리는 것. 마치 사람이 인생에 대해 전해주는 충고를 듣는 듯하다.

 

나는 배움이 늦어 중년이 되어서야 내가 얼마나 많은 주변의 배려와 도움을 받으며 살아 왔는지 제대로 깨닫고 아프게 실감할 수 있었는데, 와니니가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주위의 많은 도움을 받아 들여 성장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감동이다. 

저자가 무려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을 직접 취재했단 점도 놀랍고 존경스럽다. 그런 취재의 힘이 제대로 드러나서인지, 사자뿐만 아니라 혹멧돼지, 하이에나, , 버펄로, 개코원숭이, 하마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여러 동물이 등장하여, 꽤난 집중해서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작가는 다양한 동물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 주면서, 더 나아가 그들이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세렝게티 초원의 조화로운 모습까지 담아낸다. 겁쟁이라 기회가 있을 때에도 결국 시도하지 못한 아프리카 여행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이 책은 어린이 독자들과 함께 썼습니다.

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작고 약한 암사자 와니니가 어엿한 우두머리가 되어

검은 땅에서 포효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와니니의 친구가 되어 준 어린이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충실한 열정으로 태어난 귀중하고 아름다운 책이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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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내려와 들꽃이 된 곳
박일문 지음 / 지식과감성#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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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모든 종류의 시집을 탐내며 살았고, 완독했다 하더라도 절대 남을 주거나 하는 법이 없이 서가에 몽땅 두었다가, 필요한 날 몇 번이고 꺼내 읽는다. 소설과 달리 모든 시는 매번 다르게 읽히고 다른 이야기를 전해 주는 신비한 마법서이다. 그래서 시집 발간 소식이라면 일단 탐욕이 발동하는 마음을 갖지 않기가 힘든데, 시인이자 다른 많은 호칭들인 저자의 이력을 읽으며 무척 놀랐다. 경영학과 졸업, 시인, 수필가, 서평가, 아나키스트, 귀촌 펜션지기, 개인 사진전 3...... 무수한 경험을 말해 주듯, 목차에는 별에서 작은 들꽃까지, 하늘, , , 개천, , , 몽골, 히말라야, 메콩까지, 다시 별이 내려와 들꽃이 된 곳에까지 글 길이 이른다.


부정하고자 애써도 불가능하게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내가 만난 것들 중 하나가 이 책에 담긴 사진들이다. 하늘을 먼저 보고 그 하늘 저 멀리 있을 수도 있고 이미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별들이 있다. 그리고 그 별들이 내려와 들꽃이 되었다고 한다. 저 많은 별들 중 어느 별은 생명이 다해 떠돌다 아주 작은 씨앗이 되어 지구에서 꽃으로 피어났을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문학에서도 시인들이 현대의 천문학자들이 밝힌 것들을 시적 언어로 정확하게 예언하고 묘사한 작품들이 있다. 나는 언제나 그런 것들이 사랑스럽다. 결국 우리는 같은 고향 출신들이다. 별꽃들. 지구 반 바퀴를 돌아다니며 살았다고 자주 말한 시절이 있지만, 저자가 가본 곳엔 가 보지 못했다. 다시 나설 체력이 남아 있을까 싶어 서럽다.

 

생각해보면 포토 산문집이라는 형식이 그리 익숙하진 않다. 이 책은 내 기준에서 구성이 참 독특한데, 예술이 결국 예술가의 시선이자 고백이라면 사진과 시와 에세이와 수필과 서평까지 빼곡한 이 책 또한 저자에게 가장 맞춤한 표현방식일 것이다. 나는 별과 하늘이 좋아 그 부분을 오래 기쁘게 보았다. 다른 독자라면 꽃과 나무와 강과 땅과 산과 계절...... 다른 것을 또한 기쁘게 볼 것이다.

 

 

별을 본다는 것은 꿈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별을 보는 사람들은 결코 악할 수가 없다.

별을 보면 우리네 인간사가 얼마나 찰나적이며

작은 먼지 같은 것인지 깨닫기 때문이다.​

 

머언 과거의 빛이 현재의 나를 위로합니다.

세상사 아무리 복잡하고 심란해도 별빛은 변함없이 우리를 반겨 줍니다.

 

 

별들이 스러져 꽃이 피는지, 꽃잎들이 스러져 별이 되는지......

별도 꽃도 총총 피어나는 하늘내들꽃마을의 봄밤!

어찌 잠을 이룰 수 있으랴.

 

아직 잠이 덜 깬 겨울 숲에 들어 스러져 가는 것들을 오래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제 임무를 마치고 사라져 가는 것들......(중략)​

문득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했던

윤동주 시인이 떠오릅니다.

 

 

낯선 것들도 있지만 익숙한 것들도 있는데, 시인과 작가는 역시 숨겨진 것들을 보는 능력이 있다. 그런 시선이 나에겐 부재하더라도 역시 새로운 감정을 일렁이게 하니, 글이란 참 소중한 소통방식이다. 무더운 여름이 서늘한 가을로 바뀌는 계절의 문턱에 올라선 기분이다. 환절기를 제외하고는 계절,을 자주, 오래 잊고 사는 기분이다. 도시란 변화보다 무변화가 더 많으니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좋은 친구들과 아나키스트 주인장이 운영하는 생태 쉼터 하늘내들꽃마을 펜션에서 묵으며 쉬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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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트르 물랭호텔 1 - Hoôtel du Moulin
신근수 지음, 장광범 그림 / 지식과감성#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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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신문사 기자를 하며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다"

"회사가 갑자기 폭삭 망해 파리에서 4년 동안 한식당을 운영했죠."

“원래 발 뻗고 글이나 쓰려고 몽마르트르 언덕에 호텔을 개업했는데 웬걸, 글 쓸 틈도 없었다”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하루 3만 명, 연간 1천만 명의 여행자들이 방문한다는 그 규모면에서 지구상 최고의 여행지 중 하나일 것이다. 실제로는 상당히 지저분하고 너무나 붐비고 안전이 잘 확보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마음 편히 머문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연상되는 것은 설레면서도 느긋하면서도 세련된 '예술'이다. 그저 (예비)직업 예술가들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우충충한 하늘도 매케한 공기도 평범한 커피도 어떤 메뉴도 어쩔 수 없이 예술적인 곳이 파리이다. 그 중에서도 몽마르트르에서 호텔을 우직하게 28년간 경영하며 만난 이들의 추억담을 들려 주는 책이라니, 펼쳐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더구나 이 책이 제 1권이다. 저자가 계획대로 책을 7권 더 출판한다면 한동안은 파리와 몽마르트르의 일상에 제대로 푹 잠길 수 있을 것같아 기대된다.

이 뒷표지를 보고서 오랫만에 몽마르트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 Le Moulin de la Galette, à Montmatre를 찾아 보았다.


짐작대로 목차 또한 '예술'적이다. 첼리스트, 영화, 음악, 연극, 노래, 그림, 글, 발레 등등. 저자가 짐작하기엔 27만 명 정도의 세계인들과 만났고 단골만 5만 명이 될 것이라 한다. 이야기가 시간 순서가 아니라 주제별로 나위어져 진행되는 형식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27년 동안 27만 명은 ‘평범한 세계인들과의 만남’이었다.

한 지붕 아래서 귀중한 만남을 통하여 귀중한 시간들을 가졌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사연도 많았다.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이들 중에는 내 오랜 기억 속에 잊혀진 분들도 있어 놀랍고도 반가웠다. 이문열, 안성기, 김민기, 이호철.


"세월이 지나도 배우 안성기씨는 좀처럼 잊히지 않아요.

얼마나 인성이 푸근하고 점잖던지,

아! 화면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더라고요."


"많은 손님 중에서 청와대 특별보좌관과 주미 대사를 지낸 김경원씨가 기억에 남아요." 1990년대 중반 '호텔 수준에 맞지 않는 귀빈'이란 생각에 바짝 긴장했지만 '곰탕에 김치 식사가 좋다'며 보인 검소하고 정중한 모습에 감동받았다. "겸양이 몸에 밴 분이었죠.'갑질 손님'을 만나면 늘 그분이 그립더군요."


'아침이슬'의 가수 김민기와는 달 밝은 날 호텔에서 대작하다가 "밤에 작은 배를 타고 나가 술을 마셨는데, 달빛이 창창한 바다를 보자니 얼음장이 깔린 것 같아 그 위를 걷고 싶었다"는 시(詩) 같은 회고를 들었다.

술이 셌던 소설가 이문열씨는 새벽까지 호텔 마당에서 함께 포도주를 마시다 "이 일 접으시고 글을 쓰시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무일품의 한국인이 자기 자본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프랑스 중소자영업 전문투자은행에 대출을 받으러 방문해서, 한국인으로서 최초 신청자에다 최초 대출 수혜자라는 기록을 만든 이가 이 책의 저자이다. 그런 믿어지지 않은 일도 잘 하셨듯이, 이제 부디 원하시는 글을 실컷 원하시는 만큼 쓰시길, 그래서 덕분에 몽마르트르 이야기를 오래 잔뜩 들을 수 있길 고대한다.

 

신 형은 못한 것이 아니고, ‘안 한 것’이 아닐까요?...... 감사하고 부끄러웠다.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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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 (영화 원작 소설) - 완역, 1·2권 통합 걸 클래식 컬렉션 1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공보경 옮김 / 윌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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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드디어 [작은 아씨들]이다. 걸 클래식 시리즈 중 마지막이며, 968쪽이란 기쁘고 설레는 분량의 훌륭하고 감동적인 새 번역서이며, , 세라, 하이디 모두 부족함이 없지만, 걸 클래식이란 호명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모두 여성작가, 모두 여성 번역가들, 모두 여성인 서문 작성자들, 여성 표지 디자이너, 모두 여성 편집자들. 보석보다 아름다운 여성 고전 선집이다.

 

어릴 적 어떤 식으로든 이들을 만나 무엇이든 느끼고 생각해본 추억이 없는 이들이나, 소위 성인이 되어 내용을 알게 된 독자들은 달리 느끼겠지만, 나는 이 선집이 어린 시절 잃어버린 소중한 보물을 기적처럼 찾게 된 것에 버금가는 감동적인 조우이다. 창밖의 한기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으며 달콤한 향기가 온 집안에 퍼진 듯이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매일 반복되는 세월에 머물 수 있을 듯한, 그 걱정과 염려 없던 시절을 한 번 더 살아 보고 싶다는 환상과 상상을 호명한다.

 

목차를 보며 기억을 떠올려 보자니 마치 청교도 사상가의 전형처럼 검소하고 바르고 강인했던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의견을 잘 따르던 자매들이 떠올랐다. 어려서는 작가에 대해 알 생각을 못했는데,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되면서 작가에 대해서도 작품 못지않은 여러 생각이 들었다, 루이자 메이 올컷 자신이 청빈하고 엄격한 청교도 집안에서 자란 점. 첫째 메그처럼 가정교사로 일한 것, 남북전쟁 당시 간호사로 근무한 것, 1868년 출간 전후 시기는 여성에게 직업이 허락되지 않고 결혼과 육아만이 삶의 옵션이었던 것, 넷째 에이미는 실제 화가였던 동생이 모델이라는 점 등이다. 그 중에서도 루이자 메이 올컷의 어머니는 그 시절에 드물던 사회운동가로서, 여성의 참정권, 노예 해방과 교육에 관심이 많았으며, 딸인 루이자 메이 올컷에게 글쓰기 재능이 있으니 셰익스피어같은 작가가 될 것이라 격려했다고 한다. 여성이 대학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투표권도 없던 그 시절에.

 

그런 교육의 힘이었을 것이다. 여성운동, 노예해방운동, 금주운동들이 전개되던 그 시절에 올콧 작가가 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신비롭고 존경스러운 원동력은. 뚜렷한 꿈이 있고, 몰입할 수 있는 재능이 있고, 살짝 지나치지만 솔직하고 두려움 없이 용감한 캐릭터. 이기적이지 않고 가족에겐 사랑과 헌신을 아까지 않지만 자신의 꿈도 포기하지 않는 현명한 캐릭터. 지금에도 누구나 되고 싶은 캐릭터 중 하나일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 제일 좋은 친구에이런 말은 소용없겠지만 좀 영리하게 살아.란 문자를 받았는데, 대고모가 에게 세상 영리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장면이 있어 재밌고 짠했다.

 

선물 없는 크리스마스가 무슨 크리스마스야.”

첫 문장이 예전 그대로이다. 마음이 설레고 떨리고 반갑다.

   

나는 더 이상 네 자매 중 한 사람에게 자신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 시절은 지나갔다. 대신에 이 작품이 건네는 이야기들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많이 들린다. 어린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지금의 나의 고민의 스펙트럼이 넓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 중 일부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새겨듣지 못할 지도 모른다.

 

너희가 짊어져야 할 작은 짐에 대해 조언을 해줄게. 때로는 짐이 버거울 때도 있겠지만, 짐은 우리에게 유익한 거야. 짊어지는 방법을 깨달으면 점점 가볍게 느끼게 돼. 243

 

솔직하게는 이런 말에 여전히 조금은 화가 나고 섭섭하다. 그런 마음 배경은 그저 짐을 지고 싶지 않다, 라는 것이다. 그래도 하기 싫은 일을 마냥 하지 않겠다고 펑펑 울며 거부하면 되는 시절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운이 좋아야 때론 가벼운 짐을 지는 일이란 것을, 대부분은 버거운 짐을 지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도 버텨봐야 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것을 안다. 서글프다.

 

늙어서 관절이 굳을 때까지,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날까지 계속 뛸 거야. 나를 철들게 하려고 재촉하지는 마, 언니.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잖아. 나는 최대한 오래 아이로 살고 싶어.” 312

 

어린 시절이었지만 나도 최대한 오래 아이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제대로 된 어른이 되는 법을 모르겠다. 아마 늙어갈 테지만 성장은 못하는(grow old, not grow up) 인간으로 마무리할 것 같다는 비통한 예상이 매일 더 확실해진다.

 

조는 자신이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글이 잘 쓰일 때면 모든 것을 잊고 몰입했다. 결핍도 근심도 좋지 않은 날씨도 의식하지 않고 상상 세계 속에 안전하고 행복하게 들어앉아 작가에게는 현실과 다름없는 상상 친구들과의 삶을 즐기며 희열을 느꼈다. 그럴 때면 잠도 오지 않고 식욕도 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행복한 몰입의 순간이 찾아올 때면 밤낮이 짧게 느껴졌고, 결실을 맺지 못해도 매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523

 

우리가 읽고 싶어. 우리를 위해 뭐든 써보렴. 세상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말고 시도해봐. 분명히 너한테 도움이 될 거고 우리도 즐거울 거야.” 843

 

어쨌든 다시 만난 작은 아씨들에서도 역시 의 이야기가 가장 궁금하다. 생계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행복하게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은 와 같은 이들은 참 부럽다. 어찌된 일인지 젊은 날의 결심과는 달리 직업은 자아실현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처럼 나 역시 행복하지 않았다. 집보다 공항에서 더 자주 식사를 해야 했던 워크숍 강의들도, 늘 바쁘고 오랜 기간의 출장들이 많아 세 달 동안 집에 오 일 정도 밖에 들어오지 못한 기업체 일도, 그게 싫어서 9-6타임터널을 반복하던 공사의 무사태평일도, 한국사회 우리가 남이가의 조직생활이 도저히 적응불가능해서 선택한 프리랜서도 모두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세월은 멀어지며 흘러갔고 에이미의 열정은 사라지고 베쓰처럼 소심한 마음과 아픈 몸이 남았다.

 

그래서 1868년부터 오늘날까지 150년이 지나도록 수없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현실의 수많은 들을 응원하고 싶다. 오늘날의 는 아마 작은 아씨들의 가난한 것 빼고는 운이 좋은 보다 훨씬 더 힘겹게 살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시대를 뛰어 넘어 두려움 없이 소신껏 살아가는 의지가 되는 어머니도 없을 수 있고, 힘들 때마다 기꺼이 곁을 내어 주고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는 자매들도 없을 수 있고, 혈육만큼 친밀하고 솔직하게 오래 사귈 수 있는 친구도 한 동네에 없을 수 있고, 무엇보다 오롯이 나만의 공간으로 방해받지 않고 즐겁고 행복하게 몰입할 수 있는 다락방도 없을 수 있다.

 

다시 읽은 작은 아씨들은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성숙하고 강인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캐릭터들이다. 15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다. 그야말로 little이란 수식어는 little한 내 인생에나 어울리는 말로 남은 기분이다. 개인의 삶과 가족의 관계, 자신의 바람과 사회적 시선 이런 것들이 내 삶에선 완벽한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고민의 해답은 언제나 숨은그림찾기에 감춰져 있는 것처럼 명쾌한 적이 없다. 이런 우울한 감상을 늘어 놓다보니, 우리 집 10대들은 어떻게 읽어 내는지 몹시 궁금하다. 어쨌든 그래도 나는 이 새로 단장하고 환골탈태한 고전의 무게감이 사랑스럽다. 적어도 그거 하나는 확실한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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