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갱어의 섬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4
에도가와 란포 지음, 채숙향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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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키야 세이이치로가 무슨 이유로 앞으로 써나갈 무서운 악행을 결심했는지, 그 동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

또 설령 안다고 해도 이 이야기와는 별 관계가 없다.(...)

어쩌면 그는 선천적인 악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름이면 언제나 파블로프의 개처럼 추리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주변에도 올 여름을 위한 추리소설들 권해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얼마 전 태풍이 올라오던 날, 습기에 못 이겨 에어컨을 켜고 [도플갱어의 섬]을 읽다가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오한이 드는 여름 밤 추리소설의 위력을 간만에 제대로 실감했다.

 

추리소설의 전개 장르와 형식이 워낙 다양해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고르는 것이 읽는 재미와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긴 하지만, 치밀하고 과학적인 추리 전개 방식을 가진 탐정이 한 축에 있고, 그와 대조되는 기괴하고도 변태적이고 큰 슬픔이 깔려 있으면서도 지능과 기지가 남다른 범인이 있다면, 가히 태풍에 버금가는 오싹함을 느끼는데 부족하지 않다.

 

특히 최근 기억에 이 4편에 버금가는 작품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걸 보니, 가능하면 많은 독자들이 이 각각의 단편이 뿜어내는 인간에 대한 폭로와 추리 대결의 열기를 놓치지 말고 올 여름에 만끽하길 권하고 싶다. 트릭과 반전이 겹치고 교차하여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끝을 놓칠지도 모르는 이 즐거운 게임에 흥미가 있는 독자라면 말이다.

 

그에 더해 현실은 늘 찐 고구마 백 개라도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은 열린 결말 따위의 혼란이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그야말로 통쾌상쾌유쾌명쾌의 사건해결을 보여준다.

 

그렇게 여름의 더위를 란포 소설의 열기로 몰아내다 보면,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올 것이고, 그때서야 독자들은 그 시원함말고도 란포가 얘기하고자했던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사색하는 선물 같은 기회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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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나는 공자랑 논다
조희전 지음 / 지식과감성#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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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대는 흔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렸을 적 동몽선습이나 천자문을 배우는 기회가 있던 시기였다. 취학 전 큰 소리로 따라 읽은 동몽선습은 취학 후 전혀 다른 형식과 내용의 교육을 받으면서 곧 그 내용을 잊어버렸고, 천자문은 천지현황부터 아리송하기 시작해서(하늘이 왜 검다는 거지?) 책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된 주제를 파악하기가 난해한 책이었고, 서너 번 시도는 했으나 결국 천자를 다 알기 전에 완전히 포기하곤 다시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 후로도 가끔 접하게 되는 고전에서 ’, ‘이데올로기가 너무 강조되는 내용들은 드러내지는 못해도 마음에서 본질적으로 거부하거나 포기하는 결과를 양산해서, 어릴 적 고전에 대한 경험과 인상이 그다지 유쾌하거나 유익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다 시기가 늦어진 것이 후회가 될 만큼 고전의 매력과 가르침에 대해 감탄하고 존경하게 된 시기는 대학원 시절, 문사철 친구들과 함께 한 고전읽기 모임에서였다. 공자가 세계 4대 성인 중 한 명이라는 것은 정보로서만 알고 있었지만, 성인들의 가르침과 관련 서적들이 종교로 믿는 마음이 강한 경우가 아니라면, 현실에서 상식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그다지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란 생각에 내게는 권위가 없었다.

그런데, <논어>는 전혀 다른 분류의 서적이었다. 문장이 단아하고 깔끔하고 가르침이 담백한 것은 저자 공자를 닮은 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의 내용과 깊이는 촌철살인에 잘 어울리는 통찰과 결기를 담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놀라고 감동하고 존경하게 되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변에 <논어>는 읽어 보면 참 좋을 것이라고 소심한 추천을 건네곤 했다.

 

다른 고전은 결과적으로 실패인 듯하다. <맹자>는 결국 끝까지 읽지 못했고, <주역>은 이해가 불가능했다. 내 개인의 역량이고, 혹시 세월이 더 지나면 언젠가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논어>에 한한 한, 내 애정은 변함없거나 더 늘어날 것이고, 추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좋은 것은 일찍 접할수록, 널리 알리고 나눌수록 더 좋으니, 우리 집 꼬맹이들에게도 권해 보았다. 중국어회화는 재밌어 해도 한자는 피카소보다 더 어려워하니, 한자가 없는 <논어> 소문을 듣고 그 시작으로 삼았다. 그런 중에도 글쓰는 것, 필사는 좋아라 하니 필사도 가능한 한글로 따라 읽고 쓸 수 있는 책이라 딱 적합했다.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스스로의 열등감을 후벼 파는 것도 아니고,

고루한 훈육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선생과 제자란 어떻게 서로 존중해야 하는지,

즐겁게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지 느끼게 해주고,

그러다 보면 자신의 처지에 맞는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당장은 현실적 도움을 찾진 못해도 마음속에 보석처럼 빛날 감동을 받을 수도 있는 그런 경험이 되기를 바란다.

단기성과, 혹은 어떤 분야든 소위 한방이 인생을 결정하는 극단적 시험/결과/성과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2,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르침들이 전해 내려올 수 있었는지, 어떻게 끝없이 감동을 줄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을 경외와 경애의 마음으로 느껴 가면 좋겠다.

 

아이들이 따라 쓰는 옆에 앉아 있다 보니, 다시 <논어>의 원문을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음에는 나도 필사의 대열에 합류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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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 안의 소녀 소설의 첫 만남 15
김초엽 지음, 근하 그림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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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에서 주관하는 <2019년 책 한 권도 안 읽은 사람 100인에 선정> 되어 이 책을 받게 되었다. 선정 과정이 끝날 때까지 알지 못했고, 책 계속 읽은 가족 구성원이 대리 신청해 주어 선정되는 상상할 수 없는 이벤트 당첨자가 되었다. 기한 내에 읽고 리뷰를 올리지 않으면 도서 반환을 해야 한다고 해서 뭐라도 써보기로 하였다.


음... 일단 제목이 무지하게 낯설고 책을 거의 읽지 않지만 그래도 내 취향이 아닐거란 느낌적 느낌이 들었다. 88페이지 얇은 책을 중반까지 좀비처럼 책장을 넘겼다. SF... 나노기술, 입자알레르기, 기상통제... 어쩌지... 그래도 동정받는건 싫다고 확실히 말하는 주인공이 마음에 들었다. 남들은 다 혜택을 받는 기술인데, 혼자 앓는 병은 병증보다 마음이 몹시 외로울 것 같았다. 그렇게 다 읽고 나니 주인공 얘기를 끝까지 들어준 것같아 속이 시원했다.

2019년 한 권 읽은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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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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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부터 홀리는 책은 오랜만이다.

해가 지고 불이 들어오고 그래도 아직은 색채가 남아 있는 시간.

차이와 다름이 잘 구분되지 않고

돌아갈 집이나 사람이 없는 이들은 죽도록 외롭고 쓸쓸해

어쩌면 이쯤에서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올 수도 있는 시간.

 

비슷한 무리의 사람들이 강 건너편 아파트에 빽빽하게 모여 비슷하게 살아가는 동안다른’ ‘혹은 생각보다 많은 그들은 강 이쪽에서

차의 빈자리 하나도 마저 채우지 못한 채

어디로 갈까…… 하고 자문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 책의 내용이 죽도록 쓸쓸하고 우울한 내용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다소 실망스럽게도) 기대를 벗어날 만큼 가볍고 빠르게

짧지 않은 삶의 한 시기를 통과하며 통쾌하고 유쾌하게 들려주는

가감 없는 이야기이다.

 

혹자는 게이스럽다,’ ‘가볍다라는 점에 당혹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포착해낼 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맨 몸으로 치장 없이 삶을 맞닥뜨리고 살아내는

그 젊음이 통째로 부럽기만 하다.

 

워낙 포장과 치장이 없어서인지

4편의 연작 - 재희, 우럭 한점 우주의 맛,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 - 을 다 읽고 나니, 작가와 비정상적인 친밀함을 (혼자) 느끼는

스토커적인 기분에 휩싸이는 지경이 되었다.

 

거리낌 없는 거짓과

잘 포장된 위선과

수치심이라곤 찾을 수 없는 변명과

아마도 끝까지 반성 없는 꼰대들이 득실거리는 미세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오랜만에 맑은 숨을 쉰 듯 사랑스러운 이야기였다.

 

나는 나의 꼰대 치수를 재는 바로비터로

부분부분 반성과 회한에 젖어 이 책을 읽었고,

자신을 전혀 방어하지 않고도 이 책을 재밌게 읽어낼 수 있었다는 자부심을

댓가로 얻었다.

 

사실 댓가 따위 없어도 좋을 만큼

2019년 상반기를 기억상실로 살아낸 것처럼

이 소설이 유일무이 최고라고 느껴졌다.

 

이렇게 말하는 게 여전히 꼰대스럽긴 하지만

잊고 있었던, 잊어버렸던, 최선의 경우라면 심연의 어디쯤 묻혀 있던,

상큼발랄 명징한 정신을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4편의 연작 소설들의 늘 마지막에는

어김없이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듣거나 눈물이 차올랐다.

이런 소설이, 이런 작가가 우리 곁에 있다.


꼰대 바로미터가 되어 준 구절들.

대부분의 평범한 부모가 그러하듯, 자식에게는 답답한 상식을 들먹이면서도 뒤로는 신나게 외도를 하거나 종교나 주식, 다단계 같은 것에 미쳐 있는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16


철구 미친 새기가 나한테 자자고 하는 거 있지. 뒤에서 내 욕하고 다니는 거 뻔히 아는데. 얼굴과 마음이 골고루 역겨운 새끼...... 19


의사: 학생이 꼭 내 딸 같아서, 걱정이 돼서 그래.(...) 여자의 몸에 제일 해로운 게 뭔지 알아요? 방종하고 안전하지 않은 성생활이야.(...)

재희: 임신이랑 출산이 제일 나쁘다던데요?(...) 여자 몸에 태아는 이물질이나 다름없다고 하던데요. 임신이나 출산만큼 몸에 해로운 건 없다던데. (...) 38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6


(...)둘 다 자존감이 낮고, 주기적으로 자살 충동을 느끼며, 학창 시절에 따돌림을 당해본 경험이 있고 꼴에 예술영화나 책 같은 것을 즐겨 보며 하루키와 홍상수, 불문학과 아우디 같은 구질구질한 것들을 혐오하는 공통점이 있는 게이라 서로를 꽤 특별히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48


재희의 하객 중 적어도 세 명 정도는 재희랑 잤던 남자들이었고, 둘은 나랑 잔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때때로 성소수자가 정말 소수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순진함에 놀라곤 한다.) 64


그때 영원할 줄 알았던 재희와 나의 시절이 영영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 68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절대 털어놓지 못할 심연을 마구 휘저어

잠시 통쾌함을 선물처럼 가져다 준 구절들.


남자들은 도대체 왜 자꾸 내게 미안하다고 할까. 그냥 미안한 짓을 안 하면 될 일인데. 그는 여느 때처럼 일방적으로 자신의 용건을 늘어놓았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염치로 나에게 또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주고 싶은 것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우리 사이에 더 주고받아야 할 건 욕밖에는 없었다. 72


지난 3년 동안 쓴 소설이라고 해봤자 술 먹고 물건을 훔치고, 군대에서 계간을 하고, 성매매를 하고, 바람피우는 사람들 얘기가 전부였는데 도대체 뭘 보고 착하다는 건지. 두 번만 착했다간 사람도 죽이겠네. 아무튼 교회 아줌마들의 립서비스는 알아줘야 했다. 75


엄마가 하도 코를 골아서 엄마와 같은 방을 쓰던 환자가 두 명이나 병실을 옮겼다.(...) 옆에 사람이 있을 때는 뭐가 마음에 안든다 난리더니 막상 아무도 없으니 밤에 저승사자가 너무 쉽게 데려갈 것 같다는 등 40년차 기독교인답지 않은 샤머니즘적 발언으로 다채롭게도 사람을 미치게 했다. 76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차장에게 퇴사 후 글을 쓸 거라고 해버렸다. 평생 꿈꿔왔던 일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 꿈 그거 좋지. 그러나 이거 하나는 기억하게. 기회는 기차와도 같아.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지. 기차는 매일 매시간 돌아오는데 도대체 무슨 개 같은 소리일까 생각하며, 그렇게 나의 첫 번째 회사생활을 정리했다. 79


(...)엄마는 자궁암 명의가 있다고 소문난 강남의 한 종합병원 수술대에 누워,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고 싶다며 수술할 때 마취를 하지 말아 달라 의료진에게 요청해 산부인과뿐만 아니라 정신과 치료도 함께 받게 되었다.(드디어!) 79


자기소개의 마지막 순서였던 남자는 자신을 창작하는 사람이라고 짤막하게 소개했다. 작곡을 하는 것도, 미술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창작을 한다는 그 문장이 이가 시릴 정도로 쿨해서 나는 단번에 그에게 불길한 관종의 기운을 느끼고야 말았다(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었다). 82-83


우리 가족은 그냥 평범한 중산층이고, 아버지는 평범한 중산층의 가장답게 죽도록 바람을 피워 이혼을 했으며, 엄마는 대한민국 중노년층 사망 원인 1위인 암에 걸린 환자랍니다, 말해야 하나. 85-86


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보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90


나와 같은 지붕 아래 잠든 저 여자가 늙고 병들면 경기도의 외진 숲에 내다버리고 말리라, 산 채로 미친 들짐승의 먹이로 만들 것이다,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며 그 시절을 버텼다. 100-101


그를 알기 위해, 나아가 그에게 빠져드는 나 자신의 마음을 알기 위해, 그 모순을 해석하기 위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하는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관찰했고 기록했다. 천년만년 학위논문을 쓰는 대학원생처럼. 절박하고 가련하게. 113


왜 나이든 꼰대들은 자기보다 어린 사람만 만나면 자기가 아는 사람의 이름을 백명쯤 불러대고, 자신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어젠다를 천 개쯤 대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걸까. 알아서 뭐 하게. 알면 뭐가 달라져. 비슷한 것을 알고 있고, 비슷한 생각을 하면 나이 차이가 줄어들기라도 해? 다른 생각을 하면 어쩌게. 역시 애 같은 생각을 하는군, 내가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았군, 여기며 엉망진창이 된 얼굴이며 몸 같은 것들을 자위질해대려고? 132


엄마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받고 싶어졌다. 딱 한번이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 그럴 일은 아마 영영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잠시라도 사과 받고 싶은 마음을 품은 나 자신이 우스워지면서……. 149


그때 그들을 바라보던 엄마의 표정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세상천지가 다 멎어버린 듯한 그 얼굴은 마흔여덟 가지의 감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임이 분명했다. 절망이나 고통 따위로는 단순화할 수 없는 감정의 결을, 아빠와 아빠의 내연녀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고요를, 뭔가를 꾹꾹 눌러 담는 형태의 감정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배웠다. 157-158


서른 장도 넘는 일기에는 그를 만날 때마다 끓어 넘치던 나의 과잉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썼는지 알지 못했다. 그와 내가 어떤 관계였는지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마치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던지듯 그에게 내 날것의 마음을 던졌다. 166-167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그 불편한 진실을 나는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깨달았다. 169


엄마는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네가 너를 바라듯 주도 너를 바라고 있다. 잠시도 불쌍해할 틈을 주지 않는 재주가 있는 여자였다. 엄마는. 171


나는 (...) 그녀가 내 삶을 지연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누구보다도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며 (...) 나무나 자연스러운 우주의 현상이다.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그녀가 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인 것만 같았다. 살가죽만 남은 채 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이 혐오스럽지만 그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177-178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 있잖아, 단 한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알지만, 나는 엄마를, 당신을,(...) 아마도 영영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179


핏줄이 연결된 것처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그저 바라보는 일.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일뿐이다. 181

 

[대도시의 사랑법]이란 연작소설책 중

대도시의 사랑법이야기가 빠진 것이 공교롭긴 한데,

이미 서평을 올려서 그렇다. 

https://blog.naver.com/kiyukk/221571651196

 

 

현재의 혼란과 체력/지능 저하를 대신 변명하듯 들려준 위로의 구절들.


책상에 있던 물건들을 하루에 하나씩 집에 들고 갔다. 모든 물건이 정리될 때쯤 사표를 냈다. 뭐 대단히 신나거나 설레거나 후련한 기분은 아니었다. 실은 다 지겨웠다. 260


가끔은 내가 모든 걸 다 잘못한 것만 같고, 때로는 이유없이 모든 게 다 억울했다.(...) 논리 없이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내 인생의 시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게 분명했다. 272


내 소설 속 가상의 규호는 몇 번이고 죽고 다치며 온전한 사랑의 방식으로 남아 있지만 현실의 규호는 숨을 쉬며 자꾸만 자신의 삶을 걸어 나간다. 그 간극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모든 것들을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지난 시간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써왔지만 결국 나의 몸과 나의 마음과 내 일상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더 여실히 깨달을 따름이었다. 307


이해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하는 자리에서 여전히 전하지 못하는 말들은 산산이 흩어져간다. 소설은 가깝기에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심리적 착취를, 출구 없는 증오를, 그러나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의 무한회로를 반복하며 가족이란 얼마나 이상한 존재인지 가만히 바라본다. 325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토록 사랑스러운 작가.


글을 쓸 때 (혹은 일상을 살아갈 때) 홀로 먼지 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 들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손에 뭔가 닿은 것처럼 온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감히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말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금 주먹을 꽉 쥔 채 이 사소한 온기를 껴안을 수밖에 없다. 내 삶을,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오롯이 나로서 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

 

2019년 여름

사랑하는 나의 대도시, 서울에서

박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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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쨈과 함께 1~3 세트 - 전3권
루시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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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들에겐 꽤 인기가 있는 웹툰인가 보다,

 

모른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서 나도 놀랐다,

 

큰 비 소식이 들리는데 재밌고 웃을 수 있고 감동이 없지 않은,

 

그런 이야기책들이 있으면 함께 읽는 재미가 더 커질 것이다,

 

꼬맹이들은 재밌어하는데 나만 큰 감동을 받아 민망한 모습을 보이진 않겠지...

 

나이가 들어 곤란한 점이다, 간혹 찾아오는 감동 과다,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이 좀 간지럽다,



크리스마스는 쨈과 함께는 악마를 인간 세상의 개로 추방시킨다는 발상에서 시작된다. 사랑에 관한 두 캐릭터의 충돌은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며 갈등 요소와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루시드 작가의 섬세하고 유머 넘치는 그림체는 귀여울 뿐만 아니라 탁월한 연기력으로 캐릭터들의 매력과 장점을 십분 드러낸다. 전직 악마에서 개로 몰락한 쨈의 시니컬한 태도, 노견 순덕이의 느긋함과 넘치는 사랑, ‘주사모(주인을 사랑하는 모임)’에서 활동하는 강아지들의 유쾌함 등은 작품을 보는 큰 재미이다. 또 유머러스하면서도 따뜻한 대사들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비록 강아지가 된 악마이지만 주인과의 유대감과 사랑, 믿음, 그리고 다가올 이별을 준비하는 모습을 아름답기까지 하다. 쨈과 순덕이가 전하는 사랑 이야기는 강아지를 키우는 분들뿐 아니라 강아지를 키우지 않는 분들에게도 큰 감동을 줄 것이다. 사랑은 가장 보편적이고 모두에게 필요한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출판사 서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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