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류이치 사카모토 (Ryuichi Sakamoto) 지음, 양윤옥 옮김 / 청미래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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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것은 좀더 에세이같은 글이었으나, 연대기같은 책이다.

연말에 류이치 사카모트의 음악들을 자주 듣다보니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진 면이 있어 읽게 되었다.
생각했던것 보다도 훨씬 더 반골기질의 음악가였고, 사상적 격동의 시대를 거쳐온 사람인데,
유명했던 곡 말고 다른 실험적인 곡들도 많이 찾아 들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스스로도 언급했듯, 건방지고 힘이 넘쳤던 청년인 류이치 사카모토를 볼 수 있어서 신선.

- 개인적인 체험과의 박리를 통해서 음악이라는 세계의 실존을 얻는 것으로써, 시간이나 장소의 제약을 뛰어넘어 모두와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음악은 그런 힘을 가졌다. - 21

2023. dec.

#음악으로자유로워지다 #류이치사카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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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이름 붙이기 -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할 때
캐럴 계숙 윤 지음, 정지인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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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게 읽었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저자 룰루 밀러가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과학자인 캐럴 계숙 윤의 저서.
그때도 이름을 보고 한국계구나 하는 호기심이 있었는데, 그게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던 건지, 번역이 되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룰루 밀러의 책이 드라마틱한 서사가 존재해서 재미의 측면도 충분히 만족시켜줬기에, 약간은 그런 기대를 했지만, 사실 이 책은 상당히 분류학, 특히 분기학에 대해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는 글이다.

생명의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학문인 분류학은, 생태계를 쉽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고도로 발달하는 학문이 되어갈수록, 오히려 생물의 분류를 초월해 직관적으로 이해해오던 생물의 이름을 지워나가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러한 분류학의 붕괴를 혼돈스러워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에 집중하고 이해해야 된다는 이야기 인가... 싶다.
솔직히 집중하며 읽지는 못한 책.

- 분기학자들은 엄청나고 자극적인 혁신으로 가장 탁월한 단계의 현대 과학을 눈부시게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따를 수 있으니, 이 혁명으로 초반에 희생된 존재 중 하나가 바로 물고기였다. - 25

- 여러 박물학자가 '종'이라는 말을 쓸 때, 그들의 머릿속에 각자 들어 있는 개념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를 보면 정말 우습다. 나는 그게 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 113

2023. dec.

#자연에이름붙이기 #캐럴계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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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미터 문학과지성 시인선 478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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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시들이다.
가만히 책장에 다시 꽂았다.

-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 - 시인의 말

-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 오십 미터 중

- 생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삼키는지
똑똑히 지켜보라
욕망이 욕망에게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
(...)
계시는 언제나
천만 년 전으로부터 왔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생은 나를 삼키고 있었다
위대한 것들은
위대해서 아득하다. 남아 있는 생이여. - 행성의 노래 중

- 냉정한 햇살이 담장 넘어 사라질 때 눈을 감으면 우등열차가 머릿속을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이명을 앓듯 아프게 그해의 꽃들이 지고 있었다. 그는 비극을 주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세상에 떠나보내도 괜찮은 건 없었다. 세월도 사랑도. - Midnight Special 3 아버지의 날들 중

- 아시는지요. 늦은 밤 쓸쓸한 밥상을 차렸을 불빛들이 꺼져갈 때 당신을 저주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 목련이 목숨처럼 떨어져 나갈 때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 목련이 죽는 밤 중

- 사람의 일에도 눈물이 나지 않는데 강물의 일에는 눈물이 난다. - 강물의 일 중

- 나는 아직도 생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상처에 대해서 알 뿐
안부를 물어줄 그 무엇도 만들어놓지 못했다 - 외전 2 중

2023. nov.

#오십미터 #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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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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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이라고 보이는 개인의 삶 속에 무한한 우주와 같은 여러 개의 자아들이 혼재하고 그 자아들이 서로 갈등하고 화해하는 것이 인간임을 말하고 있다.

평범한 철도 공무원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회고록을 쓰게 되고, 사후에 그의 원고를 읽게 되는 오랜 지인.

평범한 그의 일생을 뭐 딱히 기록할 것이 있으랴 생각하고 원고를 읽는 이의 당혹스러움을 독자도 같이 따라가게 된다.
평범하지만 조금 똑똑하고 조숙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며 모범생의 얼굴로 살아가던 그는 시라는 세계에 빠져들어 영혼의 자유로움을 경험하지만,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는 현실에 타협해 철도 공무원이 되는 길을 택하고, 어느 역장의 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순조로운 승진으로 고위 공무원이 되는데,
실은 출세하고자 하는 노림수로 역장의 딸과 결혼을 선택하고, 장인의 도움으로 이른 나이에 역장으로 승진하고, 모범적이고 정숙한 아내와의 관계를 지겨워하는 일면이 있다는 고백이 회고록의 중반 이후부터 서술된다.
노년의 어느 날 시인으로 존재하던 과거의 자신을 찾아온 젊은 친구의 방문에 시 따위가 뭐라고라는 태도로 시큰둥하고 불친절하게 대하지만, 사실 그 시절의 그의 시는 놀라운 발견이라 할 만큼 훌륭한 면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그 평범한 인생을 위해 어떤 잠재력을 등졌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회고록을 써나가면서 자신이 생의 변곡점에서 해왔던 선택들, 자신의 내면이 진실로 원했던 것들, 그런 하지 않았던 일들을 떠올리며 분열적인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하는 셈이었다.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생. 그 안의 우주를 보여주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다.

- 노신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친구가 죽었어. 그처럼 규칙적인 사람도 해내는 걸 보면 죽는다는 건 아주 평범한 일임이 틀림없겠군. 하지만 분명히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겠지. 아마 삶에 애착이 있었으니까 자서전을 썼을 게야. 그렇게 평범해 보이던 사람도 어느 날엔가는 훌쩍 세상을 뜨게 된다는 걸 누가 알겠나. - 9

- 하지만 인생이란 별난 모험이 아닌 일상적 법칙의 흐름이다. 삶에 나타나는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것은 단시 삶의 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 덜컥거림이나 비통함이 없고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족한 삶일까? 그 대신 우리는 많은 일을 해냈고,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완수했다. 나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아 행복했고, 소심하지만 목가적인 삶에서 발견한 조그맣고 규칙적인 행복은 부끄러울 게 없다. - 20

- 모든 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한다. 결국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시간이다. - 117

- 나는 쓰는 일을 중지하고 가만히 누워 있으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다시 대화의 단편들이 떠오르고, 두 음성은 어리석은 일의 시비를 가리려고 싸움을 시작한다. 내가 재차 끼어들지 않을 수 없다. 조용히 해. 다투지 말란 말이야. 모두가 진실이다ㅏ. 하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이 평범한 인생 속에도 여러 가지 동기가 존재할 수 있지 않은가? 아주 단순한 일이야. 인간은 이기적이고 태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생각하기 마련이지. 잠시 그걸 잊고, 자신마저 잊은 채 자기가 몰두하는 일만이 존재할 때가 있는 거야.
가만있어 봐. 그처럼 단순한 게 아니지. 그건 두 개의 전혀 다른 삶이야. 그게 문제라고!
뭐가 문제란 말인가?
둘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게. - 150

- 흠, 첫 번째는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이고, 두 번째는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이고, 이 우울증 환자가 세 번째 인물이지. 유감이지만 그것은 세 개의 삶이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야. 절대적으로, 극단적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삶이지.
그건 전체적으로 볼 때 한 개의 평범하고 단순한 삶이야. - 159

- 지금 너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어쩌면 그 시들은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바보 같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 그시에 대해 기쁨을 가질 수도, 약간은 우쭐해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보라. 이 시들을 내가 썼고, 그다지 나쁘지는 않아. 하지만 너는 매우 슬퍼하고 있지. 심지어 그 호전적인 음성도 들리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는 짓이지. 그는 그게 패배의 시기였고, 네가 시인이기에는 재능도 인격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제 모든 건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이자 네 속에 있던 것으로 함몰하지 않기 위해 느꼈던 공포처럼 보인다. 불구덩이를 막아 버렸고, 괴물이 스스로 질식하도록 만든 것처럼 보인다. 아마 불길은 벌써 꺼졌을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손가락에 불이 붙지 않고 손이 뜨겁지 않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너는 일들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그 일을 네 직업이자 생활로 만들었다. 너는 성공했고, 너 자신에게서 벗어나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양심적이고 만족스럽게 평범한 인생을 살았어. 잘 살아온 삶인데 또 뭘 원하는 거지? 뭘 유감스러워하는 건가? - 174

- 보라고.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주 단순해야 했어. 그런데 온갖 유형의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잖나. 평범한 인간, 억척스러운 인간, 우울증 환자, 시인...... 그들 모두 자신이 나의 자아라고 그래.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그저 돌이켜 봄으로써 내 삶을 산산조각 낸 게 아니냔 말일세. - 180

- 대체 얼마나 많은 경우의 인생이 있었던 건가. 넷, 다섯, 여덟? 나의 인생을 구성하는 여덟 개의 삶이 있었다. 내게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고, 조금 더 맑은 정신이 든다면 일련의 또 다른 삶들을 발견하게 되겠지. 아마도 전혀 연관성이 없고, 단지 일회적으로 일어났거나 한순간 동안만 지속되었던 그런 삶들이 나타나리라. 어쩌면 한 번도 나타나지 못했던 삶들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 212

- '가엾은 친구.' 포펠 씨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원은 조용했지만, 울타리 너머 어디선가에서 어떤 아이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노신사는 생각에 잠긴 채 책의 접혀진 부분을 펴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난> 내 인생에 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내 인생은 그의 삶처럼 단순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았소. 의사 선생님은 아직 젊으시니까 인간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 모를 겁니다. 모든 걸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들면 어떤 결론에 도달할는지! 그래요. 그 삶을 살아온 건데, 말이 무슨 소용이겠소. 그리고 선생님도 필히......'
'전 자신의 내면을 뒤져 보는 일 따위에 쓸 시간이 없습니다. 말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추악함을 볼 만큼 봤습니다.' 의사가 대꾸했다.
'그러니까 카드점이나 치는 게 낫다는 거군요......' 포펠씨는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 243

2023. dec.

#평범한인생 #카렐차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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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 주해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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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진 삶을 살다 떠난 엄마를 기억하는 글.

전쟁과 기지촌 생활, 미국 이민과 조현병.
한 사람에게 닥친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들 속에서도 삶을 비관하지만은 않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라 숨 가쁘게 읽게 된다.

일본 강제 징용된 가정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가족을 하나씩 잃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든 전쟁 생존자인 저자의 어머니는 미국인과 결혼으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그 시절 백인들의 사회에서 소수자로서 살아오다 조현병이라는 또 다른 불행을 마주하는,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인생.
그런 엄마에 대한 진실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저자의 노력이 연구자로서의 의무감이기도 하겠지만, 엄마에 대한 지극한 이해와 사랑이 아닐까 싶어 마음이 몹시 동요되었다.

역사 속에 외면받은 약자들에 대해 읽다 보면 늘 가슴이 답답하고, 해갈되지 않는 울화가 치미게 된다.
전쟁과 더불어 생성되는 기지촌의 존재에 대해 한국 사회는 외면 그 이상의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는 것을 늘 상기해야 한다. 일제 침략기에 운영되던 위안부라는 성 착취 구조가 일본에 부역하던 군부가 그대로 답습하여 한국전쟁 당시에도 비슷한 체제로 운영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 드러나고 증언되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책, 보상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려진 바 없지 않은지. 단지 생존을 위해 기지촌으로 흘러든 사람만 있었던 게 아닌 조직적인 인신매매 납치가 있었다는 사실도 더 연구되고 알려져야 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조현병이 사회적 고립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깊이 공감한다.
비백인이 극도로 적은 커뮤니티에 어느 날 덜렁 합류한 한국 여성의 고립감과 그 사회 안에 진입해야 한다는 생존적 강박증이 이미 극도의 트라우마로 점철된 삶을 산 사람에게 어떤 작용을 했을지.

무거운 책 읽기이지만, 한 사람의 관심이라도 더 필요한 게 아닐지 하는 마음으로 정독했다.

- 상실의 슬픔을 글쓰기로 달래보려 시작한 프로젝트였지만, 이 책은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닮은 사람들을 기리고 애도하는 데 실패한 한미 사회에 대한 정의 회복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 서문 중

- 그리고 입을 열 때면 두려워진다
우리 말이 들리지 않을까 봐
환대 받지 못할까 봐
그렇다고 침묵을 지킨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두렵고
그러니 입을 여는 게 낫다
기억하면서
우린 결코 살아남을 운명이 아니었음을 - 오드리 로드, [살아남기 위한 호칭기도]

- 엄마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코를 킁킁거렸다. "나한테 분유를 주더라."
"아, 그래요?" 나는 놀란 척하며 말했다.
하던 생각이 끊긴 듯, 엄마는 잠시 조용해지더니 환각적 몽상에 깊이 빠져드는 듯했다.
"그 맛은 진절머리가 나." 엄마는 말했다. "전쟁 같은 맛이야." - 39

- 일제 강점기는 1945년에 끝났지만 한국이 점령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점령국만 바뀌었을 뿐. -48

-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 이야기도 그 역사에서 지워졌다. 아버지의 조부모와 달리 엄마는 홀로 이주했지만, 아무도 엄마의 용기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1970년대만 해도 한국 남자 동행 없이 혼자 여행하는 한국 여자에게는 부정하다는 낙인이 따라붙었고, 미국 남자와 함께, 또는 미국 남자를 위해 미국행을 택하면 더 이상 한국인으로 쳐주지도 않았을 정도로 모욕적인 취급을 받았다. 미국인 남편과 한국을 떠난 여느 한국 여성처럼, 엄마도 사상자로 간주됐다. 이 여성들은 일단 미국으로 건너간 이상,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 78

- 그로부터 3년 후 엄마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한단 사실에 진력이 나서 사람들이 하는 짓을 대놓고 거론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들이 따라오고, 괴롭히고, 박해했다고 말할 것이다. 이 동네사람 다 나를 노리고 있어. 애초 엄마의 말은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완전히 현실적인 말로 들릴 것이다. 미친 사람 말이 아니라. 조현병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 91

- 거기엔 엄마의 유일한 인생 목표가 자녀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내가 느낀 개인적 부채감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사회가 엄마에게 진 빚도 있었다. 음식을 만들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이민자들에게 미국 사회가 진 빚. 국가 안보의 최전선에서 제 몸과 성노동을 바쳤지만, "노고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수많은 젊은 여성에게 한국 사회가 진 빚도.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이들은 감사의 말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진 사람들에게 사회악의 근원 취급을 받고, 근절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엄마에게 진 사회적 빚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고, 그 부담을 덜 유일한 방법으로 직접 그 빚을 조금이나마 되갚았다. 엄마가 꿈꾸던 대로 "위대한 학자"가 됨으로써, 엄마의 구원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삶을 연구하고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나도 그 구원의 한 조각이나마 찾을 수 있을지 모르고. - 116

- 미나, 케이, 제이슨, 경, 엘리처럼 우리보다 늦게 셔해일리스에 온 한국인들은 입양인이거나 우리 가족 같은 혼혈 가족이었다. 우리는 미국의 군사적 개입과 전쟁이 낳은 살인적인 삶의 조건, 그리고 한국 가족을 깨뜨려놓은 성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사회 정책으로 말미암은 군사화된 주체라는 공통 유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미국 가족, 국가가 우리를 구제했다는 담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 164

- 조현병은 가난과 폭력이, 권력의 눈 밖에 나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 T.M.루어먼, [ 우리의 가장 문제적인 광기 ]

- 아버지는 대영제국에 해가 지지 않던 시절에 성인이 되었던 반면, 이전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대학 캠퍼스를 메우고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기존 역사의 지배적 담론을 바꿔가던 시절에 성인이 되었다. 그 시절 탈식민주의 학자들이 주장했듯, 제국은 글쓰기로 역습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여성, 피식민자, 억압받는 자라는 새로운 시선을 통해 엄마가 직면했던 부정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중 다수를 보았지만, 여전히 엄마가 한국에서 보냈던 과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라곤 엄마가 전쟁 통에서 살아남았고, 일종의 서비스업에 몸담았으며, 학교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내가 추론한 바에 따르면,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외삼촌이 실종되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가장 역할을 도맡았다.
이중 언어 교육 수업에서 나는 비자발적 소수자에 대한 존 오그부의 이론을 배웠다. 비자발적 소수자란 사회에 강제로 병합되었기 때문에 소수자 중에서도 가장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는데, 멕시코계 미국인,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재일 한국인이 여기에 속한다. 문득 깨달았다. 엄마가 일본에서 태어난 이유, 또 내가 그에 대해 질문할 때마다 엄마가 입을 굳게 닫아버렸던 이유가, 엄마 가족이, 적어도 외할머니가 강제징용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대해 샌드라에게 얘기했더니, 샌드라는 내 자의적인 구분을 듣고 빙긋 웃었다. "강제노동하고 노예제의 차이가 뭔데?" 나는 그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강제노동'이란 그저 완곡어일 뿐일까? 아니면 여러 형태의 노예제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용어인가? 어떤 형태든 간에 엄마가 강제노동이 자행되는 상황에서 태어났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어지러웠다. - 275


2023. sep.

#전쟁같은맛 #그레이스m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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