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빨강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편혜영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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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전에 쓴 이야기를 팬데믹을 거치며 다시 쓴 이야기.

현실을 공포로 만드는 순간을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가답게, 재와 빨강에서도 허우적대며 아무런 대책 없이 구덩이로 빠져들고 마는 인간의 모습을 담았다.
자신이 친 덫 속으로 추락하는 주인공의 모습 중, 폭력을 경험한 후 새로운 세계로 진입했음을 깨닫는 장면은 놀라울 만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포기하고 받아들인 순간조차 조롱당할 거리가 남아있다는 비참함이 주인공의 처지를 한없이 끌어내린다.

이야기를 읽는 사람의 심리도 몹시 위축되고 심란해지고 마는 것이 편혜영 소설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 책을 출간하고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팬데믹은 가상의 사거니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 되었다. 소설을 구상하고 쓸 당시만 하더라도 내게 역병은 먼 과거이자 중세의 것이었다. 겪은 적 없는 시간이자 도래하지 않을 미래였다. 팬데믹을 겪은 후였다면 이 소설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삶을 폐허로 만드는 것은 역병과 쓰레기, 끊임없이 출몰하는 쥐 떼가 아니라 적나라한 혐오와 차별, 정교한 자본주의임이 명백해졌으므로 다른 상상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작가의 말 중

-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은 법이다. - 8

- 사내에게 얻어맞은 순간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세계에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도덕과 질서와 교양과 친절이 일상이었던 세계에서 약탈과 기만과 폭력과 쓰레기가 보편적인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생존방식은 간명했다. 가격하거나 가격당하는 것. 약탈과 폭력이 생계의 방편이라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게 유일한 자산이었다. - 58

- 지나간 생애가 너무나 시시하고 볼품없어서, 그런 인생에 회한이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사소하고도 하찮은 일로 가득한 나날로부터 멀어졌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불행은 이처럼 사소한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서글픔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이 그를 짓눌렀다. - 171

- 그는 방역복을 애지중지했다. 방역복은 안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 옷을 입었다는 것은 남과 똑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이었다. 남들과 같아지면 자신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 195

- 전염병이 잦아든 후 병으로 죽은 사람과 일자리를 잃은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상으로 돌아왔다. 전염병으로 인한 불행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남았다. - 225

2023. dec.

#재와빨강 #편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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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되기 전까지 안개는 자유로웠고 문학동네 시인선 196
정영효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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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삶에 대한 이야기인가.
끊임 없이 의심하는 시가 읽는 내내 뭔지 모를 불안감을 야기했다.


- 나는 변하지 않는 얼굴을 원했고 상대를 짐작할 수 있는 의지를 원했으며 과거가 빠진 다짐을 원했지만
주인은 없고 내가 주인처럼 남은 채 상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고 믿어던 곳인데
진실이라곤 나를 둘러싼 고민과 과기대가 사라진 물음뿐이었다 정적이 사라지길 기다리는 동안 - 거래 중

- 계속 시도한다면 멈추기 힘든 다짐이 아무도 없는 자리를 지키기 시작했다 - 아무도 없다 중

- 우리는 오랫동안 반응했다 싸움을 두려워했고 결론을 조심했고 뒤바뀌길 바라면서 함부로 예상하고 있었다 우리는 성장하는 우연을 기다렸으며 정해진 밤과 익숙한 음악 쪽으로 분명히 따라가고 있었다 변명을 숨긴 채 다른 말을 찾기 위해 고민했고 아무에게나 친절하게 손을 내밀려 필요한 만큼만 확실해지기로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이해하면서 의심을 지킬 수 있었다 언제든 예외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최소한으로 고민하면서 - 최소한으로 전문

- 여기가 맞는지 의심할수록 확신을 지우는 약속과 설명을 붙잡고 만나기 직전까지 풍경을 채우며 모든 목적은 입구에서 멈춘다
거기는 다른 곳임을 알았는데 나타난다 어디로든 이어지기 위해 드러났고 정확하게 믿을 때 가까워진다
찾으려고 하면 언제든 앞에 있다 - 일층 중

2023. dec.

#날씨가되기전까지안개는자유로웠고 #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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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오면 우리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1
정보라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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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로 비롯된 지구의 황폐화를 앞두고 인공태양을 설계하는 자와 그를 반대하는 안전장치를 만드는 자와...
기계들의 반란과, 인간의 비인간화, 흡혈인, 로봇이 아니라 생각하는 로봇...

아포칼립스 물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불법촬영에 대한 작가의 불안과 분노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가장 인상깊다.

빌리라는 이름 붙여진 로봇의 외전, 인간의 마지막 무기라는 존재가 되어버린 흡혈인에 대한 외전이 있으면 재밌게 읽을것 같다.

늘 재밌는 정보라 작가의 이야기.

- 이런 내용을 읽으며 나는 수소 원자가 사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온도가 올라가면 충돌한다. 밀도가 높아져도 충돌한다. 같은 장소에 오래 갇혀 있으면 반드시 충돌한다. 어쩌면 인간은 점점 달아오르는 이 행성에 너무 많이, 너무 오래 갇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7

- 기계들의 반란은 공상과학 소설의 아주 오래 된 단골 소재다. 기계들의 반란이 실제로 일어나면 옛날 소설가들은, 예를 들어 집에 있는 세탁기나 청소기가 나의 목숨을 위협할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 같다. 그들은 틀렸다. 인간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언제나 인간이다. - 14

- 인간은 언제나 같은 인간을 죽이는 일에 무척 능숙했다. 다른 어떤 동물도 인간만큼 인간을 잘 죽이지 못했다. - 17

- 빌리는 끈질겼다.
“한때는 인간이었잖아요. 그때는 당신이 인간인 걸 어떻게 알았냐고요?”
그런 건 생각해본 적 없다. 인간이었을 때 나는 그냥 인간이었다.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흡혈인으로 변한 이후다. - 65

- 인간이 인공태양을 개발해서 지구를 멸망시키려 했기 때문에 기계가 개입해서 안전장치를 가동시켰어요. 그러면 기계가 인공태양을 가동해서 지구를 멸망시키려 하면 인간이 개입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 94

- 빌리를 처음 만났을 때 수영장에서 빌리가 외쳤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나, 사람이에요. 로봇 아니에오.”
기계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은 존재가 있었다. 내가 사라지면 그의 마지막 순간을, 그의 마지막 선택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 124

2023. dec.

#밤이오면우리는 #정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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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각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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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의 유명한 시리즈 물이라고 해서 읽어보았다.

미스터리 연구회의 학생들의 무인도 입성. 부터 아 다 죽겠구나 하는 느낌.

중반까지 흥미진진하고 대체 범인이 누구인지가 궁금했지만.
결론적으로 후반부의 결론은 응? 하는 느낌.

어쨌든 흥미롭게 읽은 미스터리물.
시리즈를 다 읽어볼까 싶다.

- 세계를 바둑판이라 하고, 인간들을 말이라 하자. 인간의 수읽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치밀하게 모든 요소들을 분석하여 계획을 세운다 한들, 언제 어디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얄팍한 계산으로 예상할 수 있을 만큼 이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인간의 마음이란 너무도 복잡하고 제멋대로이기에...... - 10

- 이윽고 그들이, 죄 많은 사냥감들이 덫을 향해 날아들 것이다. 덫은 열 개의 등변과 내각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은 찾아올 것이다. 아무런 의심도, 두려움도 없이, 자신들을 포획하고 심판할 그 십각형의 덫 속으로...... - 11

2023. dec.

#십각관의살인 #아야츠지유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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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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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몰아치고, 바람소리가 거센 가운데 읽자니 몰입은 잘된다.

모래땅에 사는 곤충을 채집하기 위해 휴가차 떠난 사구여행.
모래에 잠식되어 가는 이상한 마을에 감금되어 변모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사이코드라마 같은 이야기.

삶의 의미라는 것도 없이, 그저 모래를 치우기 위해 사는 마을이지만, 실상 그 모래를 마을 사람들과 같이 치우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모래 구덩이에 덜렁 던져져 원래(부터일까) 살고 있던 여자와 살게 되고, 그 여자가 제정신인지도 잘 모르겠고. 여튼 좀 괴상한 이야기다.

잘난 척 하며 유서처럼 편지를 남겨놓고 여행을 떠난 탓에 사회에서는 의문의 실종으로 기록되버리고 만 주인공의 생사가 딱히 불쌍하지도 않았다. 왤까.

- 지상에 바람과 흐름이 있는 이상 모래땅의 형성은 불가피한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불고 강이 흐르고 바다가 넘실거리는 한, 모래는 토양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어다닐 것이다. 모래는 절대로 쉬지 않는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지표를 덮고 멸망시킨다...... - 19

- 그러나...... 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조여들듯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래벽을 보고 있노라면, 아까 기어오르려다 떠밀려났던 비참한 실패가 떠오르고 만다...... 몸부림만 칠 뿐 아무 효과도 없는, 전신을 마비시키는 무력감...... 이곳은 이미 모래에 침식되어 일상적인 약속 따위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특별한 세계인지도 모른다...... - 54

- 실패했어......
그렇네요......
참 내, 그것도 아주 보기 좋게 실패했어.
하지만, 순조롭게 성공한 사람, 없어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여자는 눈물 어린, 그러나 마치 남자의 실패를 변호하듯 힘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 얼마나 비참한 친절함인가. 이 친절함이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다니, 너무 불공평한 것은 아닌가? - 198

2023. dec.

#모래의여자 #아베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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