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매일 피아노를 칩니다'(김여진)로부터 옮긴다.




칸타타 140번 ‘눈을 떠라, 부르는 소리가 들리도다’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97XXXXXXX140



영화에 나온 바흐 칸타타 BWV 140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 중에서 ‘시온의 딸들이 파수꾼의 노래를 들으며Zion hört die Wachter singen’의 빌헬름 켐프의 피아노 편곡 버전을 반복 재생해 들었다(O.S.T 수록 버전도 좋지만 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의 연주도 들어볼 것을 추천한다).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그리고 바흐 / 3. 느리게, 아픔을 가지고 매일 피아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성진이 친 헨델의 미뉴에트(빌헬름 켐프 편곡)를 듣는다. 빌헬름 켐프에 관한 아래 글은 살림지식총서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빌헬름 켐프 [Wilhelm, Kempff] (음악의 역사 (음악사 대도감), 1996. 9. 10., 김원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1296&cid=60519&categoryId=60519



작년 가을의 릿터 44호에 실린 성해나의 소설 '잉태기' 에 빌헬름 켐프가 연주한 헨델의 미뉴에트를 음반으로 듣는 장면이 있다. 


"나는 무게감이 없는 완성된 형태의 음악을 저 높이서 조망할 수 있는 경지를 지향해왔다. 보기 흉한 음악 혹은 잘라내듯 떨어져나간 음표들, 긴장되어 있거나 힘에 벅찬 요소 모두를 나는 반대한다." - 빌헬름 켐프

빌헬름 켐프라는 이름은 독일 피아니스트 계보에서 반드시 거론되어야 하는 이름이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정책에 수동적이었던 켐프는 음악적으로 고립되었고 모든 연주활동을 중단했다.

오랜 시간 침묵하던 켐프는 1951년 영국순회연주를 기점으로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을 재개하는데 당시 그의 모습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켐프는 작은 소품을 연주할 때조차 2~3군데의 미스터치(건반을 잘못 누르는 것)를 내곤 했지만, 영국에서의 연주 당시 켐프는 튼튼한 기교의 기초 위에 특유의 구조적이고 사색적인 자신만의 톤을 선보여 이미 명인의 반열에 오른 상태였다.

그의 피아니즘을 단지 몇 단어로 압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항상 확신에 차 있었으며 그의 연주가 독일 음악의 전통 위에 우뚝 서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의 연주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며, 악보에 충실하면서도 거기에만 얽매이진 않았다. 언젠가 시벨리우스를 위해 함머 클라비어를 연주해주고, 켐프는 시벨리우스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는데 아마도 이는 켐프를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리라.

"당신은 피아니스트처럼 연주하지 않는군요. 마치 인간 그 자체처럼 연주해 주었습니다." - 엄숙한 독일 정신의 계승자, 빌헬름 켐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스트리아 국회의사당 - 사진: UnsplashBeatriz Miller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역사적 위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공공건축물이다.

시민포럼 건축물들은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포부를 미학적으로 승화시켜 낸 부르주아지 예술의 명품들이었다. 의사당 건물은 의회 정부를, 시청사는 자치시를, 대학교는 시민의 고등교육을, 부르크 극장은 문화예술을 각각 대표한다.

이와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애초의 황제 교서에서는 혁명 재발에 대한 두려움이 절실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국가가 경제적・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으면서 링슈트라세에서의 군사 상징 건물들은 점차 철거하는 방향으로 일이 추진됐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성격이 점진적으로 근대성을 띠게 됐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약함의 힘'(현경)에 저자가 케냐 나이로비에 있는 카렌 블릭센 박물관을 방문하는 장면이 있다. 아래에 일부 옮긴다.



카렌 블릭센 박물관 By Krg - 자작, CC BY-SA 3.0, 위키미디어커먼즈


[네이버 지식백과] 카렌 블릭센 박물관 [Karen Blixen Museum]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64669&cid=42864&categoryId=50859


영화화되었던 '바베트의 만찬'(카렌 블릭센 / 필명: 이자크 디네센)이 올해 3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나왔다.









1913년부터 1931년까지 케냐에 와서 커피 농장을 하다가 모국 덴마크로 돌아가 작가가 된 카렌 블릭센(Karen Blixen)의 집에 간 것이지요. 그녀의 자전적 소설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로 영화화되면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 영화 속에도 카렌 블릭센의 집이 나옵니다. 그 집에 가서 그녀의 에너지를 느껴 보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책은 "나는 아프리카 ‘옹(Ngong)’ 언덕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로 시작됩니다. 나이로비 근교에 자리 잡고 있는 그녀의 하얀 집은 푸른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지금은 덴마크 정부가 케냐 정부에 기증해 ‘카렌 블릭센 문학관’으로 사용되고 있지요. 저는 이른 아침, 아직 관객들이 없을 때 도착해 그녀가 살던 집을 둘러보았습니다. 이미 카렌은 세상을 떠났지만, 곳곳에서 그녀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벽난로가 있는 거실과 서재, 옹 언덕과 커피 농장이 내려다보이는 침실, 많은 나그네를 먹였을 부엌과 식당……. 집 안은 하얀 레이스와 파스텔 톤의 가구, 곳곳에 듬뿍 꽂아 놓은 생화들로 여성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습니다. 거실에 놓인 사진을 보니, 카렌은 건장한 몸매와 강렬한 눈빛의 소유자였습니다. 사진 속 그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고마워요. 마음껏 살아 주셔서……. 당신의 삶이 나를 이 언덕까지 오게 했네요. 고통도 많았지만 멋진 삶이었어요. 자신을 다 쏟아부을 수 있는 일과 사랑을 당신 생에서 찾았으니…… 축복된 삶이지요." - 아픈 사랑이 남긴 위대한 유산 / 1. 내가 사랑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년 이 즈음 읽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무엇이든 가능하다.' 아래 글의 출처는 수록작 '금 간'이다. 


사진: UnsplashMaira Gallardo



린다는 집안을 조용히 서성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일 수 없는 뭔가를 받아들이려고 애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수대에는 커피 얼룩이 묻은 하얀 머그잔 두 개가 있었다. 린다는 누가 커피를 마셨는지, 그 잔들이 어떻게 개수대 안에 들어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잔들을 씻는데 다리 힘이 거의 풀릴 것 같았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쓴 채 가게로 들어가 셀로판지로 포장된 도넛과 케이크와 땅콩과 캔디 매대 옆을 지나갔다. 화장실은 경악스러울 만큼 지저분했다. 그녀는 이렇게 지저분한 공중화장실을 마지막으로 쓴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이런 게 뭐가 중요하지? - 금 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