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에 우리 아파트 앞동에서 불이 났다.

새벽 2시경인가 남자 고함치는 소리와 여자 우는 소리가 들려서 어인 일인가 봤더니 소방차가 네다섯 댄가 오고 앞동 10층 창문에 불길과 연기가 보였다.

 

우리 베란다에도 탄 냄새 가득하고 나가보니 월드컵 열기 때와 같이 다들 진짜 불구경 중

 

강건너 불구경이라는 속담을 몸소 체험했다.

누군가에게 큰 사고이지만 멀리 떨어져서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소방관 아저씨가 위험하고 작업에 방해가 된다 방송해도 계속 동마다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잠깐 보고 애들이 깰까보니 딸이 창문 밖으로 번쩍거리는 경광등 불빛에 깨서 다독여 다시 재웠다.

 

오가며 얼굴만 보는 젊은 아빠가 말갛게 잠든 아이를 안고 나와 왜 불이 났는지 설명해 주는 아줌마의 말을 경청하고는 궁금증을 해소하고 돌아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빙그레.

 

이십몇 개월의 아가로 추정되는데 저런 아이를 안아재우는 아빠라면 평소에도 육아에 많이 참여하는 게 분명하다.

 

남자는 잠시만 시간을 쪼개 육아에 참여해도 훌륭한 아빠라 칭송받지만 엄마는 잠시라도 육아에 소홀해 보이면 비난받는다.

 

부부가 함께 리조트에 놀러가 아이가 사고를 당해도 엄마는 아이 안 보고 뭐했냐는 비난이 쏟아진다. (비난 전에 사고를 당한 데에 대한 위로가 앞서야 하는데도 리조트에서 지 애를 안 보고 리조트에 소송거는 민폐 부부충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며 비난하기 바쁘다)

 

중년에서 젊은 층이 이용하는 다양한 커뮤니티를 최근에 눈팅하면서 한숨 나오고 화나는 것도 많았는데 별 도리가 없었다.

 

현실세계에서 바삐 일하고 애들 건사하며 사는데 일일이 싸울 수도 없었다. 시간적 여유도 없고 육아에 에너지를 더 쓰다보니 맘충이란 용어와 싸우는 걸 점차 포기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초등 고학년 정도 되어서야 겨우 책 제대로 볼 여가가 생긴 듯하다.

요즘은 평일에도 각자 놀고, 주말에 같이 도서관에 가기도 하니 특히 각자의 서가로 향할 수 있어 큰 축복이다.

 

최승범의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와 <며느라기>를 주말에 보았다.

 

최승범 책은 큰 기대는 없었는데 대중서로 잘 읽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남자이기 때문에 가부장제 하에서는 더 누릴 수 있는 위치인데도 엄마나 부인의 위치를 살피고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할 부분이 없는지 고민하는 모습에 일단 안심이 된다. 남자들의 페미니즘은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IMF를 전후해서 태어나 저성장-양극화 사회에서 줄곧 살아왔다. 신자유주의 경향을 고스란히 받아 일찍부터 경쟁을 내면화했다. 불투명한 미래와 곳곳에 도사린 위험은 실용주의자를 양산했다. 청소년기에 일베 문화를 접했고, 혐오코드가 점령한 채팅창과 댓글밭에서 놀았다. '코알라' '슨상님' 같은 일베 용어에 친숙하고 전라도 비하와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조롱은 또래 사회의 친목 활동이었다. 10년 전보다 10년 늙었다. (중략)

 미디어는 '알파걸' 열풍을 다뤘고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치인다'고 했다. 한창 게임할 나이에 셧다운제가 시행됐다. 여성가족부는 없어져야 한다는 원초적 소명 의식을 정착했다. (중략) 성장 과정 내내 눈에 담아온 세상에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이 없다. 남동생 공부시키려고 누나가 공장에 간 서사는 신분제도만큼 낯설고 조선시대만큼 먼 이야기이다.

  이십대의 보수성은 이념이나 지향보다는 생존전략에 가깝다. 잃은 것이 없으면 변혁적인 사고를 할 것 같지만, 현실이 조금만 달라져도 생존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변화를 거부한다. 140-142쪽

 

10대를 가르치는 저자는 남학생들의 싸늘한 눈초리와 비웃음을 감수하면서  꿋꿋하게 양성평등 교육을 실천하고 계신다. 이미 머리가 굳은 20대 남성보다는 유연한 사고를 할 가능성이 더 보이는 아이들에게 집중하려 하신다.

 

온라인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유한 일부 세력들(직업, 가사노동에서 자유롭고 커뮤니티에 대한 충성도가 강함)이 온라인 여론을 이끈다. 끝없이 새로운 용어 김치녀, 맘충, 개념녀 등을 생산하며 다른 이들을 통제하려고 한다.

 

종합해보면 '개념녀'는 모든 방면에서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태도를 지녔지만 경제관념만은 현대적이고 평등을 지향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념녀'는 남성이 유리한 지점은 그대로 유지하고 불리한 부분까지 유리하게 바꾸겠다는, 남성들의 무지한 욕망이 그대로 묻어나는 정치적인 용어다. 127쪽

 

예를 들면 <며느라기>의 민사린같이 외국 출장을 수시로 갈 정도로 능력 있는 여성이지만 시부모 생일이면 손수 상을 차리고 하다못해 시부모님 그들끼리 챙겨야 하는 시부모의 결혼기념일도 챙기고 각종 대소사에 참여해 다소 무뚝뚝한 자신을 대신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해야 이런 개념녀에 부합하는 것이다.

 

연애시절에는 내 호주머니 사정을 걱정해 더치페이하기를 원하면서도(기계적으로 절반이 아닌 서로의 형편에 따른 합의에 맞게 당사자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본다. 여자가 먼저 취직해 더 많이 부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반대도 있을 수 있다)  가끔은 떡 벌어지게 피크닉 도시락 정도는 뚝딱 만들어내야 개념녀이자 자랑스런 여자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동안 나도 페미니즘 공부하는 걸 멈추었는데

이제 다시 출산, 경력단절, 양육, 저임금이라는 현실 위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해보아야겠다.

 

결정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느낀 것이 성당을 아이들과 다시 다니면서이다.

 

성당 첫영성체 부모 교리반에는 직장 다니는 엄마, 그렇지 않은 엄마들(다양한 사정이 있음)이 섞여 있고 선생님은 공무원으로 퇴직하신 분이다. 늘 선생님은 직장 나가면 할 수 없지만 집에만 있는 엄마들은 평일미사도 자주 나오고 평소에도 이런 말씀을 하셔서 가끔 불편하기는 했었다. 평일에 전업 엄마라고 해도 어느때고 시간이 날 수 있는 게 아니고, 평일 미사 참여 문제는 각자의 신앙, 모종의 결단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간단한 다과 준비를 직장에 다니지 않는 엄마들에게 부탁하셨는데 처음엔 기쁜 마음으로 동의해서 하다가 어느 순간 기쁘지 않았다.

 

8-9시라는 늦은 저녁시간에 이루어지는데 모임에서 나온 식기류를 설거지하고 자리 정돈하다보면 9시 반이 넘어가버린다. 아이들이 초등고학년이지만 남편이 집에 없을 때가 많아 늘 마음이 불편했다.

 

컵이 인원 수만큼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몇 개가 되든 치우고는 가야 한다. 대개 남이 설거지할 것이 불편해 안 드시는 분이 상당수 있어 나온 현상이다.

 

이런 문제가 마음에 걸려 선생님께 각자 개인컵을 가져와 마시는 게 어떻겠냐고 건의했는데 엄마들(특히 직장다니는 엄마들)은 동의하셨는데 졸지에 나만 공동체의 나눔 정신을 모르는 사람으로 선생님께 말씀 좀 들었다.  

 

이렇게 한순간 눈총은 받았지만 그래도 일단 말하고 나니 내가 덜 불편하다. 

 

학교 녹색어머니 봉사 문제와도 비슷하다.

이건 언제 따로 써봐야겠다.

 

직장 다니는 엄마는 워킹맘이지만 그렇지 않은 엄마는?

 

겉으로는 전업이어도 속내는 다양하다.

 

프리랜서도 있고 계약직도 있고 시댁 가업을 돕는 분도 있고 미취학아이, 아픈 아이나 노인을 돌보아야는 분도 있어 온전하게 쉬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전업'이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집에서 놀고 쉬는 부류로 낙인 찍는다.

 

요새는 주부만 많이 모인 사이트에서도 전업 엄마들은 전업인데 어린이집 보내도 될까요? 전업인데 가사도우미 써도 되나요? 같은 질문을 자꾸 올린다.

 

자신과 가정이 결정할 문제를 자꾸 사회의 용인을 받으려 든다.

 

결정적으로는 자신이 결정할 문제를 남에게 맡기려 든다.

 

아이를 어느 정도 키워놓고 이제는 자아 실현?이라는 걸 해보려 하지만

이미 실현할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다.

 

아니, 아이들이 커갈수록 자아 실현이 아니라 생계 혹은 가족의 더 나은 삶?(치솟는 물가와 가중한 사교육비)을 위해 저임금  단순노동에 내몰려야 하는 것이  전업주부의 현실이다.

 

(경력 단절 없이 쭉 일해온 여성이나 남편은 그간 자아 실현이 아니라 단지 생계를 위해 쭉 일해왔다고 엄살 떨지 말라고 하기도 한다. 여성들의 결혼 전후 취업 현실과 출산과 보육에 대한 지원이 부족해 경력 단절이 잦아지는 것에 대해 논의할 문제이지 한쪽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나중에 따로 남편이나, 직장 다니는 이웃엄마에게 느끼는 불편함에 대해 정리해보려 한다. 개인적인 불편함만은 아닐 것이라 여겨져서) 

 

또한 인스타에 보이는 브런치를 즐기며 문화센터나 전전하는 팔자 좋아 ? 보이는 부류에게도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 함부로 말할 문제는 아니다.

 

뭐라뭐라고들 하는데 사실 부러워서이다. 그런데 또 속내를 알고 보면 크게 부러워할 것도 없다.

 

카스 프로필에 남편 병원 전경을 올리는 분들을 몇 분 아는데 하루 지내는 거 보니 별다를 것도 없더라. 미취학 아이 육아, 노부모 간병 등

 

물론 가는 여행지, 식당 정도가 차이가 난다. 이 차이는 계급 차이, 훗. 이게 크다.

팔자 좋은 부류? 이건 계급에 여성 문제가 얽힌 사례이다.

공부를 더 해서 정제된 말로 풀어보고 싶다.

 

 

이렇게 정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

 

20년도 전에 배운 모토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실감나는 요즘이다.

 

내가 덜 불편해지는 지점

여기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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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 비 오는 오전에 책 반납하러 갔다가 <사양합니다....>를 우연히 읽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자고 하는 말들이 관련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비수가 된다.

 

특히나 육아카페 일명 무슨무슨 맘카페에서 자주 보이는 '결정장애'니 요리 고자니 동네 바보형같이 위트도 센스도 없는 표현들이 그렇다.

 

결정장애라고 올리는 글 볼 때마다 지적도 해보았으나,

나도 알지만 꼰대질은 사절, 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런 사람들이 학교에서 -애자, 야 라고 부르는 아이들을 만든다.

 

저자는 종교는 없지만 김수환 추기경과 관련한 특별한 태몽을 꾸고 귀한 쌍둥이를 잉태한다. 딸아이는 비장애인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아들은 출산시 이상으로 후에 지적장애 2급 판정을 받는다.

 

각종 재활과 치료 과정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이 들었으며 얼마나 힘들었는지 서술된다.

그렇지만 '힘이 든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엄마아빠에게 돈쓰는 맛을 알려준'이나 치료실에서 짜증이 나서 누워 있다 나오니 '오구오구 우리아들 오늘도 치료실 전기세 내주고 왔어요.' 같은 표현.

 

장애 아동 엄마들도 다르지 않구나, 마냥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무겁게 여길까봐 의도적으로 가볍게 쓰려고 하신 것도 같고. 

 

그나저나 월 200만원을 들이느냐 100만원을 들이느냐에 따라 앞으로 생활할 수 있는 범위가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고 하니 부모님들 부담이 상당하다.

 

지방에는 병원이나 치료실도 적으니 가급적 서울 중심가에 살아야 하고 참 모든 것이 쉽지 않다.  

 

저자는 여러 치료를 전전하다 아이가 바이킹을 타며 생애 최초로 짓는 표정을 보고 사회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시도해보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주변의 동정이나 시선은 힘들지만 항상 자기 감정에 솔직한 순수한 아이를 보며 저자와 저자의 가족은 웃을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장애인, 장애인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이 한국에서는 정말 더 특별히 더 괴로운 일이라는 걸 동생을 통해 전에 들어 대강 알고는 있다.

 

치료실은 안정된 환경과 이해심 많은 어른들, 숙련된 인력이 있는 곳이고 사회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렇다.)

 

동생은 소설 <선릉 산책>과 비슷한 일을 겪었고 장애어린이집 근무를 거쳐 지금은 일반 ? 그냥 ? 어린이집 근무를 하고 있다. 보통의 ? 미취학 아동들도 그 시기에는 힘든데 장애 아동이라면 그 힘듦은 배가 된다고 한다.

 

때로는 감정이 얽히고 쌓인 가족보다는 좀 더 합리적으로 상황을 관망할 수 있는 타인(물론 제대로 된 직업의식이 있는)이 더 양질의 돌봄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읽다가 장애인 관련 제도와 인력이 부족하다는 게 한스러웠다.

 

 

2.

정신건강 관련 책들

제목도 센스 있다.

 

 

 

 

 

 

 

 

 

 

 

 

 

 

 

 

 

<정신 차리라는 말은...>은 작년에 보았는데 청소년들에게 정신 관련 질환을 알기 쉽게 해설한 책이다.

 

어느 페이지에 헹그리라는 단어가 소개된다.

배고파서 화난 상태.

 

찍어둔 사진이 안 보인다. ㅋ

 

 

<정신병동에도...>는 맛보기 용으로 만화본 적이 있는데 전문가의 시선으로 환자를 보고 있어 읽어보고 싶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는 어느 순간의 내 마음과 같다.

 

평생 나도 정서가 안정되어 있다.

다만

우울하게 안정되어 있다. ㅋ

 

애착도 별로 없다.

 

인간에게라면 딸아이(+몇몇 그것도 현실인물이 아닌)

그리고 사물은 책, 그리고 몇몇 장소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는 제목에 끌려 봤다가 오호호 하고 잘 읽었다.

퇴폐미, 허무의 극치

 

<친절은 넣어둬..>는 어느날 추천마법사에 떠서 그냥 책소개만 보았다.

 

알라딘

민간인 사찰은 고만 ㅋ

 

어느 순간부터 책읽기보다 다양한 연령대의 커뮤니티 게시판을 너무 보았더니

문체가 점점 구려진다.

 

잠이 안 와 보다가 아예 못 자기도 하고 ㅜ.ㅠ

안구건조증에

 

 

고전이나 사회과학도 읽기도 힘들어진다.

언어가 다르니

 

제목에만 낚이지 말고 좀더 진중하게 읽기 시작해야겠다.

 

그래도 가끔 정말 잘 지은 제목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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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하루 종일 요새 <레몬 트리>를 부르고 다닌다. 원 히트 원더인 풀스 가든의 95년 곡으로 국내에서 박혜경이 번안해 불렀다. 경쾌한 곡조에 비해 가사 내용은 한없이 우울한 그런 것들이다. 기분 부전 문제를 겪고 있는 환자의 일상 같기도 한데 영어 가사도 쉽다보니 입에 붙나보다.

 

아이들 선생님들이 이제 대개 30대 말 40대 초이다 보니 옛날에 어릴 때 들었던 노래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시고 그래서 그 노래들이 가끔씩 나에게 찾아오는 게 흥미롭다.

 

나도 아는 노래라고 하면 아이들이 늘 놀란다.

애들은 엄마도 아이였고 초등학교(물론 당시에는 국민학교지만)를 다녔다는 것을 가끔씩 잊곤 한다. 아이들에게 2부제 수업이나 한 반 인원이나 배운 걸 얘기해주면 다시 더 놀란다.

 

엄마도 그때는 어렸고 힘들었고 

지금도 사실 그렇고

별로 강하지 않아.

 

그래서 가끔은 힘이 되는 이야기들이 필요해.

 

요 며칠은 팔라시오의 <원더>와 그 후속작을 읽으며 보냈다.  

 

아이들에게 같이 읽자고 했는데 <원더> 양장본 두께 보더니 거부.

꼼수로 <아름다운 아이>를 들이밀어야지.

그것도 힘들어하면 같이 영화를 봐야겠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신문 광고나 포털 배너에 후원을 바란다고 실릴 안면 이형(안면 기형)을 가진 아이 어기의 이야기가 어기네 가족, 친구들의 이야기와 같이 펼쳐진다.

 

남과 다르기 때문에 역시 남과 다르게 살 수밖에 없다.

 

어기가 편안한 때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와 남들과 같이 평범한 일, 예를 들면 아이스크림을 편히 먹을 때 정도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별뜻 없는 행동, 뻔히 바라보거나 아니면 대개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피하는 일에 익숙해진 어기지만 홈스쿨과 학교생활은 천지 차이다.

 

나는 아이들이 나쁜 뜻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대놓고 비웃거나 요란을 떠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저 어리석기 그지없는 평범한 아이들일 뿐.   107쪽

 

평범한 아이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벌이는 일들 혹은 알지만 미숙해서 벌이는 일들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3년 후 나온 폭력 가해자 줄리안의 이야기도 좋았다. 누구나 분노할 만한 요즘 애들 말로 인성 쓰레기 짓을 하는 줄리안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고 어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줄리안네 부모는 개차반이나 다행히 여기에서 할머니가 제대로 된 어른 노릇을 해준다.

 

원더의 요약은 금언이 다한다.

 

브라운 선생님의 9월 금언 :

만약 옳음과 친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을 택하라. - 86쪽

 

 

 

브라운 선생님의 10월의 금언은 이랬다.

우리가 행한 행동이 곧 우리의 묘비이다.

수천 년 전에 죽은 어떤 이집트인의 묘비에 적힌 말이라고 했다. - 112쪽

 

 

나도 이를 응용해서 아이들에게 써보게 하고 싶은데

 

아들은 박명수 어록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은 무시뿐이다, 이런 소리나 하고 있다.

 

 

 

 

 

 

 

 

 

 

 

 

 

 

딸아이가 열심히 보고 있는 수상한 시리즈

 

아직 난 못 읽어봐서 일단 아파트부터 보고 있다.

읽다보니 딸이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어릴 적 그 책>은 나의 경험과도 겹친다.

 

여기서 소개한 것 중에 사서 본 전집도 있지만 대개는 빌려 읽었다.

 

디즈니 그림 명작이나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계몽사 어린이 세계의 명작, 에이브 전집

등등

 

내가 보고 싶은 이런 책들은 꼭 왜 친척집이나 아랫집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는가.

 

 

빌려 읽을 반죽도 없던 나는 5, 6학년 즈음엔 충정로 2번 출구?(이제 광주에 오래 살다보니 충장로라고 먼저 적음) 쪽으로 오던 이동도서관을 친구랑 마냥 기다렸다. 매연과 차 특유의  냄새 그리고 땀냄새가 곧 풍겨올 것에 긴장하면서도 작은 마을버스가 책을 싣고 오면 친구보다 먼저 올라 책을 찜하는 것이 신나서 열심히 달려갔었다.

 

<어릴 적 그 책>

저자의 기억력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난 저렇게 세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아마도 그 시절 그 책을 직접 소장하기 시작하면서 온전히 그 기억이 소환되었나보다.

 

특히 <추위를 싫어했던 펭귄> 에피소드에 공감한다.

 

나도 한동안 애들 보여주려고 디즈니 그림명작 중고나라에 엄청 검색하다가 포기했다. 우리 애들이 본다고 해도 내가 어릴 때 보던 것과 다를 것임을 잘 알기에.

 

 

<책으로 가는 문> 미야자키 하야오가 고른 어린 시절 책들인데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꽤 된다라고 적으려니 찔린다.

 

아예 읽지 못한 책들이 많아 꼼꼼하게 적어두어야겠다.

중간에 아이가 누워서 책 읽는 삽화를 보니 우리 아들 같다.

아이들이 책을 읽을 때 얼마나 다양한 자세를 취하는지 보지 않고는 모른다.

 

어린이도서관에서 남에게 피해주는 자세만 아니면 그냥 적당히 모른 척해주면 좋겠다.

아이 자세나 눈 건강 생각해서겠지만 한참 빠져 있는데 너무 자주 지적하는 곳도 있다.

 

지역도서관 어린이실에 눕거나 기대서 보게 되어 있는 공간에서도 일일이 아이들 앉게 하시는 분이 있어서 그곳은 잘 가지 않게 된다. 

 

명사들이 고른 어릴 적 책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도 술술 잘 읽힌다.

 

요즘 아이들은 여기 나온 책을 얼마나 기억할지.

전집은 사지 않고 골라서 같이 봤는데 그때 좋았으면 좋은 거지.

 

 

 

 

 

 

 

 

 

 

 

 

 

 

 

 

 

이 <잘못>시리즈도 딸이 잘 보고 있다. 학교생활과 밀착되어 그런지 잘 본다.

 

오카다 준의 <밤의 초등학교에서>를 잘 읽어서 <스티커별>도 주문했는데 이건 그럭저럭이라는 평.

 

딸의 독서를 아들이 따라가지 못한다.

 

뜬금없이 팽이와 유튜브에 빠져서 가끔 학습만화나 본다.

아들은 또 가끔 설민석 유튜브 강의도 본다. 중간에 역사채널 e 도 애정하며 본다.

 

학계에서는 설민석 님이 깊이가 없고 오류가 많다고는 하지만

어머니의 원수를 갚자, 갑자 사화,

무오 뭐 증조할아버지를 욕하다니 무오사화.

나뭇잎에 조광조가 왕이 된다니 기묘하군 기묘사화 이런 식이니

학생들이 좋아할 수밖에.

 

연기를 전공하셔서 그런지 표정이 풍부하고 액션이 커서 아이들이 좋아한다.

나도 보다보니 빠져든다. 특히 영화랑 그 영화속 역사를 함께 설명하는 시도가 좋았다.

국제시장이나 인천상륙작전 같은 영화를 볼 생각은 없지만 설민석 선생님 해설은 좋았다.

 

진짜 역사적 고증에 맞는지는 역사를 잘 모르니 아직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유시민 님 신간이라도 사서 보고 제대로 역사 공부 좀 할까 하다가

역시 나는 손수건이 더 탐나는게다, 자각하고 바로 포기.

 

중고나라에서 본인 소설을 사들인 작가님에게 죄송하지만

휴대용 선풍기 때문에 애들 책사다 추가한 신작이에요.

그래도 잘 읽고 있어요.  

 

불쌍한 숙희 씨. 정재미니 네 이놈.

아깝고 아까운 한정희

 

 

 

 

 

 

 

 

 

 

 

 

 

 

 

 

초등역사 책은 차고 넘쳐서 이젠 고만 사고 싶은데 시리즈물은 나오는 대로 사야 하니.

 

 

 

 

 

 

 

 

 

 

 

 

 

 

 

 

 

솔직히 안 사주고 싶은 책이지만 동네서점 가면 딸이 고르는 책들

 

 

 

 

 

 

 

 

 

 

 

 

 

 

 

 

엄마 눈에는 안 차지만

훗날 딸아이가 중고나라에서 사들이고 싶을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 딱 감고 사준다.

 

나도 사실 명작보다는 그 시절에 지경사 책들 무지 아껴 읽어서.

 

 

*

생각보다 길어진 포스팅이지만 하나 더.

 

알라딘 19년 기록보다가

생각보다 (수입 대비) 책을 많이 샀고 또 그만큼 많이 읽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딸아이가 19년 기록에 놀라면서

그래두 엄마

잘 본 것도 있으면 된 거야,

라고 말해주어 그나마 위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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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관련해 사고가 났습니다."라는 연락을 받으면 누구나 내 아이가 얼마나 다쳤나, 하고 염려부터 할 것이다.

 

그런데 내 아이가 가해자라면, 꿈에라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면 내 아이와 내 인생은?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되짚어보고 자책도 해보아도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침묵을 삼킨 소년>은 읽었고 나머지 두 책은 모임에서 소개받은 책들이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들 책을 한동안 읽다보니 으스스했고, 아이들을 키운다는 게 무겁고 힘들게만 여겨졌다.

 

미야베 미유키도 그렇고 다른 일본 작가들도 그렇고 결국 끔찍한 범죄 뒤에 (엄마) 양육의 부재와 학교 폭력, 소년 범죄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 인생은 아이 기질+양육+학교, 사회 환경이 아닐까? 하는 결론으로 모아졌다.

 

엄마에게만 양육의 무거운 책임을 묻는다는 건 너무 간편하고 무책임한 일이다. 그리고 특히 청소년기에 친구나 환경의 영향이 크고 충동적이기 쉬울 때 아이의 근간에 자리잡은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게 아닐까, 하는 다소 교과서적인 정리를 했다.

 

요즘 아들이 사춘기라 고민이 많은데 어느 정도는 내 손을 떠나간 일이고 이제 아이가 책임질 부분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겠다. 아이 성적표가 내 인생 성적표도 아니고 아이가 아직 다 자라지 않았으니 큰 기대도 실망도 금물.

 

미취학 초등 초중학년기 지나 고학년에 이르니 어느 정도 아이 현재 위치가 보인다. 객관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지표들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지켜봐야지.

 

하지만 꼬꼬마 영유아기부터 하다못해 머리둘레, 키, 몸무게나 걷고 기저귀 떼고? 말하는 개월 수 따위에 집착하던 중생이라 뭐 온전히 마음을 비우게 될 것 같지는 않다. ㅋ

 

 

 

 

 

 

 

 

 

 

 

 

 

 

 

 

한동안 아니 요즘도 '자존감' 영업은 꾸준하다.

 

그나마 수많은 '자존감' 관련 서적 중에서 나은 책들.

 

오랫동안 심리학자들은 자존감에 대해 연구해왔다. 지금까지 내려진 큰 결론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지 않은 채 자존감만을 상승시키려는 시도는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듯 나 자신에게도 너그럽고 자애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것(자기 자비)이나 자신을 판단해 버릇하지 않는 것(마음 챙김)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7쪽>  

 

즉 우리가 부러워하는 건강한 자존감의 소유자들은 자존감이 높기 때문에 삶이 괜찮은 게 아니라, 삶이 이미 어느 정도 괜찮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은 거라는 얘기다. 높은 자존감 덕분에 연봉이 높고 인간 관계가 좋은 게 아니라, 이미 그럭저럭 성공해왔고 인간관계도 잘 되어왔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자존감이 높은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30쪽

 

이러한 이유로 학자들은 스스로에 대한 너그러움이야말로 높거나 낮은 자존감이 갖는 단점은 없으면서 장점은 가지고 있는 높거나 낮지만 건강하지 않은 자존감의 아주 좋은 대안이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자존감에 상처가 났을 경우 너그러움이 좋은 해결책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진정한 자존감 또는 건강한 자존감을 갖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져야 한다.

- 84쪽

 

만약 시험 준비 중이라거나 큰일을 앞둔 경우 거울을 보며 난 괜찮은 사람이야, 하고 주문을 걸고 무리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보다는 꾸준히 매일 할 수 있는 분량의 목표를 정해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자기 마음을 챙겨가며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회적 기준에 부합할 때만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게 여겨지는 상태에서도 자신에게 너그럽게 대하고 자신의 감정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비교가 아니라 기준이다.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199쪽>

 

자존감을 정상화시키는 첫걸음은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207쪽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동물이라서 나 혼자 이 정도면 괜찮다고 정신 승리하는 게 있을 수 없다. 지금같이 사회, 공동체 대다수가 외모나 연봉, 사회적 위치 등으로 끝없이 개인의 자존을 깎아내리려는 세태 속에서는 아이들이나 우리나 제대로 성장하고 나아갈 수 없다.

 

아이들이 유아 초등을 거치면서 계속 외모나 성취에 대한 발언을 듣고 하는 요즘,

그래서 고민이 많다.

 

나 혼자 아무리 우리 왕자님, 공주님 우쭈쭈하면서 키워놓는다고 해서 아이들이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도 역시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닌 립서비스나 빈말 정도는 구분하게 되면서 칭찬의 기술이 부족해 늘 어렵다.

 

특히 외모에 대한 칭찬은 고만해야겠다.

생각보다 냉철한 두 아이들, 엄마 진짜 엄마 눈에만 그래.

 

 

 

 

 

 

 

 

 

 

 

 

 

 

 

 

 

 

생각보다 자존감 높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

 

<베를린 일기>에 이어 꽈배기 시리즈는 한동안 애들이랑 나다니면서도 잘 읽었다.

<고민과 소설가>는 살까 말까 고민하게 만든다.

 

<꽈배기의 맛> 홍상수 얘기에 공감하며 크게 웃었다.

별다를 것 없는 '하는' 이야기들에 예술적 미학적 가치를 입히고 그렇게 추어올려줘야 했나 싶다.

과거에 씨네 21 정기구독하며 혼자 열내던 일들이 그냥 다 뭔가 싶다.

 

김기덕 사단도 마찬가지.

그 아까운 시간들에 뭐하러 힘든 영화 보며 고뇌하며 살았던가.

 

<꽈배기의 멋>에 나오는 릭 애슬리 이야기도 대공감.

 

역시 거의 동시대를 거쳐오며 아재력, 이모력 충만한 사람들은 재미있게 읽어갈 것이고 그 이상이나 이하라면 이게 책이 되나 싶을 것이다.

 

꽈배기나 도너츠는 다른 베이커리 류에 비하면 하급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래도 허기를 채우고 간단한 요기하는 데는 그만이다. 뭔가 책은 보고 싶은데 무거워지는 건 싫을 때 추천.

 

 

아래 책들도 놀이터용

 

 

 

 

 

 

 

 

 

 

 

 

 

 

 

 

 

 

 

<거의 정반대의 행복>은 거의 중반을 넘어가면서도 계속 다 읽을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책인데 결국 봤다.

 

미취학 영유아 꼬꼬마 시기를 한참 넘기고 나서 육아 이야기 듣는 건 민방위도 졸업한 아저씨가 군대 이야기 듣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힘든 건 아는데 아 뭐 다 그럴 때야 하고 웃으며 등두드려주게 되거나 아 나 때는 말도 말아 더 힘들었어, 난 왜건도 없이 두 아이를 다 길렀다고. ㅋ

 

난다 님 이야기 중에 자신은 육아를 2인3각 경기라 여기고 남편은 계주, 즉 바통을 터치하는 걸로 생각한다는 데 공감이 갔다. 아내들은 힘든 상황에서 조금은 효율이 떨어져도 함께 겪기를 원하고 남편들은 번갈아 순번을 정해 하기를 원한다. 물론 남편, 아내 성향이 반대인 경우도 있다.

 

시호 자랑, 전지적 고슴도치 시점이 거의 책의 3분의 2이긴 하지만 육아하는 젊은 엄마에 대한 사회의 관대하지 않은 시선, 폭력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만했다.

 

아직 '맘충' 소리 나오기 이전에 아이들 꼬꼬마 시기가 지나갔고 특히 그 시기를 시골에서 보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요새 마구마구 든다. 광주나 근교도 요새 조금 갈 만한 식당이나 카페는 다 노키즈존이다.

 

우리 애들은 초등 고학년인데도 그런 카페에 못 간다. 진짜 딴건 몰라도 같이 조용히 책볼 수 있는데 ㅜ.ㅠ 같이 근교에서 경치 보며 책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한다.

 

유병재 책은 익히 보았던 SNS 모음.

아들이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유병재 유규선 토마토 랩을 보고 뒤로 넘어가며 웃어서 같이 보다가 역시 아직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뺏었다.

 

'딸 같아서 딸 치려고' 이게 무슨 뜻이야. 진짜 몰라서 묻는 거겠지

어리숙한 5학년이라 그런지 아직은 성에 무지하다.

 

아니면 내가 어리숙한 걸 수도 있을까.

요즘 하도 방문을 잠가서 단도직입적으로 영상 보냐고 묻기도 했는데 알 수가 없으니.

 

이런 책이라도 차차 봐주어야 하나 싶다.

 

 

 

 

 

 

 

 

 

 

 

 

 

 

 

우리 아이들이 좀 더 자라면

딸 같아서 추행하고 아들 같아서 갑질하는 행태가 사라질 수 있을까.

 

다 쓰고 나니 전형적으로 의식의 흐름에 따른 페이퍼네.

 

잔걱정 많고 자존감 낮은 엄마는 *'짜잔한' (저자들에게는 죄송스러운 표현이지만 상황이 그렇다고요. 공원에서 애들 수발들며, 혹은 밥하며 혹은 수업 가며 이동 중이거나 틈새에 읽기 편하다는)  책들에  기대 무더위와 미세먼지 가득한 이 시기를 나고 있다는 것일뿐.

 

 

*'짜잔하다'도 내가 이런 상황에서 쓰니 뭔가 전라도 스웩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사전적으로 '짜잔하다=못나다'라고는 나오지만 막 정겹게 못난 그런 느낌이다.

자매품으로 '귄있다' 역시 못생긴 건데 진짜 매력있고 끌리고 그런 상황이라 한다.

 

귄있다라는 소리를 처음 듣고 귀인있다로 알아듣고 엉뚱한 소리 했었다.

 

참, 스웩 뜻을 찾아보니 셰익스피어가 <한여름밤의 꿈>에서 먼저 썼다고 한다.

 

오늘은 빌려온 이 책도 좀 보고

1권이 겨우 들어온 <안나 카레니나>도 보련다.

 

 

 

 

 

 

 

 

 

 

 

 

 

 

 

그나저나 도서관 미스터리

 

고전 시리즈는 1권만 늘 대출중인 게 진짜 미스터리.

 

그래도 언젠가는 고전들도 차차 읽어나갈 수 있다는 큰 꿈을 품고

신새벽의 페이퍼를 마감하고 아침을 챙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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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주말 그리고 월화에 걸쳐 스산한 책들만 파고들었다.

 

미아베 미유키의 <모방범>은 듣던 대로 명성에 걸맞게 단번에 읽어낼 수 있게 흡인력이 있었다.

 

읽다가 미사를 갔는데 마리코와 요시오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범인들에게 농락당하는 철저하게 순결한? 피해자라서 그런지 더 감정 이입되어 읽었다. 의연한 삶의 태도로 큰 감동을 준 요시오 할아버지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내용 유출 주의)

 

아리마 요시오는 범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고, 대담한 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범인이 손녀를 방패로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의 죽음을 확신하는 사람이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인만큼 추측의 범위에 두면 되는 것도 과감히 사실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다. 아무리 처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허황된 희망이나 낙관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다.        1권    276쪽

 

1권에서는 사건이 전개되면서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 그것을 다루는 언론들의 행태가 소개된다. 2권에서는 가해자들의 성장배경과 가해자들에 대한 추적이 주를 이룬다. 3권에서는 범인의 검거와 뒷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검거 과정이 사실 그간의 엄청난 사건들에 비하면 좀 싱겁게 예측 가능하게 끝나는 면이 있다.

 

 

 

 

 

 

 

 

 

 

 

 

 

 

 

 

사회파 추리소설이지만 심리묘사가 뛰어나 여기저기 서표를 붙이며 읽었다. 1, 2권에 좀 많이 붙이다가 3권에 이르러서는 좀 맥없이 끝나는 감이 있어 별로 붙이지 않았다.

 

돈과 몸을 물물교환하면 뒤끝이 없다. (중략) 그러나 구리하시 히로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치아키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치아키의 생명을 담보로 그녀의 감정을 마구 흔들며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치아키가 한 번도 가격을 붙여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 것에 값어치를 매길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바꾸어 말해, 비밀스런 공간에 간직해두고 있는 것일수록 더 비싼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소녀였다면 자신의 몸만을 돈을 받고 팔 수는 없었을 것이다. 2권 85쪽

 

작가가 가출 소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단순한 몸의 거래가 아닌 값을 매길 수 없는 '자존'의 거래다. 성노동자라는 말은 허울 좋은 말뿐 그렇게 자존을 심각하게 훼손해야 하는 노동이라면 노동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사이코패스인 범인들은 피해자의 내밀한 과거를 억지로 이야기하게 하고 가족들에게 나중에 알리고 조롱하는 일을 반복하며 자신들이 전지 전능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생명을 무조건적으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든지, 사회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든지 그런 생각을 조롱하는 지향성?"

노리코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 것보다도, 따분하지 않은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지향성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잠깐 생각하고는 덧붙였다.

"응, 맞아. 가장 두려운 것은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아무런 자극도 없는 인생을 보낼 바에야 죽는 편이 낫다는 그런 지향성." 3권 284쪽

 

히로미나 피스 둘 다 어린시절에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고 자신들의 명석한 두뇌와 멋진 용모를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데에 쓰고 만다.

 

"진정한 악이란 이런 거야. 이유 따위는 없어. 그러므로 피해자는 자기가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야. 원한, 애증, 돈, 그런 이유가 잇다면 피해자도 납득할 수 있겠지. 자신을 위로하거나 범인을 미워하거나 사회를 원망할 때는 그 근거가 필요한 거야. 범인이 그 근거를 제시해주면 대처할 방법이라도 있지. 그러나 애당초 근거 같은 건 없었어. 그야말로 완벽한 '악'이야."   2권 203쪽

 

무고한 여성들을 희생시킨 '피스'는 악의 화신이었다. 

 

'피스'는 특히 자신이 모든 범죄를 기획해 연출하는 전지전능한 유일무이한 신적인 존재라는 데에 자부감을 갖고 있다가 그것 때문에 파멸한다. 르포작가 시게코가 '피스' 역시 다른 범죄의 모방범일 뿐이라 몰아붙이자 생방송에 자신의 악행을 고백하고 만다.

 

'악'을 두고 독창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작업일게다.

 

이밖에도 미야베 미유키가 여성을 타켓으로 한 강력 범죄가 자주 일어날 때 여성들은 어떤 심리 상태가 되는지 그 불안과 공포를 잘 살렸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팔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가장 공포스럽지 않은가?

 

 

 

 

 

 

 

 

 

 

 

 

 

 

 

 

 

오래 전에 받아둔 책이다.

 

이제야 다 읽고 나니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기분이다.

 

<모방범>에 비하면 잔혹함이 덜하지만 가상의 범죄보다 더 오싹하다. 평범한 인간의 그럴듯한 이유를 붙인 소소한 악이 더 무섭다. 악이라 믿지 않는 악이 더 무섭다.

 

교양 있고 지각 있던 장모가 딸을 잃고 사위의 불륜을 확인하면서 황폐하게 변해가는 과정이 소름 끼쳤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불륜에 빠진 대학교수가 아내와 여행을 떠나다 아내는 즉사하고 자신은 전신마비 상태로 살아남아 (사위의 불륜이 기록된 딸의 유품을 확인한) 장모에게 학대당한다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오기'.

 

'오기'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나, 잘못 적힌 것이라는 뜻이 있다.

 

다 읽고나니 주인공 이름에 대해 그 두 가지 해석 다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남이나 운명에 지기 싫어 열심히 살았지만 뭔가 잘못 적힌, 본래 쓰려던 것과는 다른 것을 써버린 듯한 인생이 되어버렸다.

 

큰 사고로 장애를 입고 이렇게 생의 막다른 데까지 치닫다 보면 의사든 주변 사람이든 의지를 좀더 가지라고 한다.  

 

말조차 할 수 없는 주인공은 '의지'로도 부족해 진짜 어떤 '오기'를 품고 끝까지 생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지만 결국 거대한 구멍에 빠지고 만다.

 

아프지 않았을 때는 마주칠 가능성도 없었던 교양 없고 양심은 더 없는 간병인의 살냄새와 감촉, 간병인의 망나니 아들이 입술에 축여준 싸구려 위스키에 감동하기도 하는 생의 아이러니라니.

 

간병인도 못 믿고 그 비용마저 아까워 장모가 직접 오기를 간병하면서 오기의 존엄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장모는 오기의 이전 불륜 상대를 병실로 불러내어 오기의 망가진 삶을 보여준다. 오기는 그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녀를 바라지만 다시 그녀가 오기를 찾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생전에 아내가 한 남자가 아내를 배신하고 이름을 바꾸어 다른 곳에서 다른 여인과 사는 소설을 읽고 울 때 오기가 그런 아내를 달래준 적이 있다. 자신의 유일무이함이 곧바로 다른 걸로도 대체될 수도 있다는 데 절망한 아내를 그때의 '오기'는 이해하지 못했다.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 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209쪽

 

결말이 다했다, 진짜.

 

각자의 슬픔, 구멍은 고유하다, 정말.

 

오기는 참혹한 사고를 겪고 살아남아 불륜을 후회한다거나 아내를 추억하는 일 없이 자신의 몸상태 회복과 이전 상대와의 만남, 좀 더 나은 상태만을 열망한다. 물론 이것에 대해 비난하거나 욕할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을 것이다.

 

집 밖으로 탈출하려다 장모가 파놓은 구멍에 빠져서 울면서도 그간의 자신의 생을 후회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을 위해 울어줄 때가 되어서 운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생의 깊은 구멍에 빠진다 해도 전에 구멍에 빠졌던 이들을 이해한다거나 그들의 슬픔을 똑같이 겪을 수는 없다.

 

그 누구도 타인의 슬픔을 대신해 그만큼은 슬퍼할 수 없다는 것.

비정한 생의 진실만이 엄정하게 남는다.

 

 

 

 

 

 

 

 

    

 

 

 

  

 

 

 

어쩌다 눈에 띄어 도서관에서 집어든 책인데 아직은 읽고 있다.

 

사람은 함께 산 배우자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형태로 종지부가 찍힌 후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고는 좀 더 대화를 나눠볼 걸 그랬다, 얘기를 들어줄 걸 그랬다고 후회한다.
그러나 가령 살아 있을 때 대화를 나누고 얘기를 들어주었다 한들, 그래서 과연 이해가 깊어졌을까.
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배우자 역시 타인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인이다. 가족은 생활을 함께하는 타인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홀가분하다. 

 

 

어쩌다 보니 <홀>과도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중반까지 읽고 있는데 가족관계에 대한 쿨하고 건조한 시선에 공감하기도 하면서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가족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겠지.

 

 

 

 

 

 

 

 

 

 

 

 

 

 

 

 

딸이 그렇듯이 나도 어둠이나 구멍을 들여다보는 걸 이 나이까지 참 무서워한다.

 

그런데 요 며칠 스산한 책을 읽다보니 참 버겁다.

 

이런 책들만 보다보니 버겁고 오싹해져서 딸아이가 밤에도 무서움 없이 자주 보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기 나오는 어둠이나 구멍은 스산하지 않고 뭔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듯한 그런 느낌을 준다.

따스한 삽화가 더해져서 더 그렇다.

 

수프를 만들어주는 토끼, 머리 감겨주는 라쿤, 방아깨비 과학선생님 다 정겹다.

 

마음을 꺼내 닦아줄 수 없으니 머리를 감겨준다는 라쿤의 말처럼

혼탁한 마음을 닦아주고 마음 속 깊은 구멍을 메울 뭔가가 필요하다.

 

너무 며칠간 음지의 책들만 봐서 주문.

 

 

 

 

 

 

 

 

 

 

 

 

 

 

 

 

 

 

 

 

 

 

 

 

 

 

 

 

 

이 책들이 배송중이라고 뜨네.

사전 투표도 했으니 여유롭게 읽어봐야겠다.

 

다시 양지의 독서로 나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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