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비오는 토요일에 다시 집으로 왔다.

금요일, 토요일 사이에 읽은 책들이다.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는 본가로 가면서 읽었고

<검은 꽃>은 본가에서 가져와 집에 오는 길에 다시 읽었다.

 

이동하는 공간에서 책을 읽으면 눈도 나빠지고 멀미도 한다지만 이상하게 그런 공간에서 책이 더 잘 읽힌다.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는 <환상의 빛>, <금수>로 유명한 미야모토 테루의 작품이라 엄청 기대를 하고 읽었는데 읽고 나서는 영 개운하지 않다.

 

구성이나 문장 모두가 나의 기대와는 달랐다.

 

미야모토 테루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아니기에 이번 미스터리식 구성을 통해서는 미야모토 테루만의 서정적인 문체도 빛을 발하지 않았다. 한 작가가 쓰는 모든 작품의 질이 균등할 수는 없으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신기하게도 '옮긴이의 말'이 나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사건의 진상에 점점 다가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세속적인 조마조마함은 마침내 자괴감만 남기고 허탈하게 사라진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미야모토 테루,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비극적인 모성애 앞에서 무슨 말을 보탤 수 있겠는가.    407쪽

 

(결말 유출 매우 위험)

 

겐야는 로스엔젤레스 대저택에서 기쿠에 고모가 남긴 유산을 처리하다가 나약한 결혼이민자이자 거대한 가정폭력과 범죄의 희생자인 고모의 삶을 발견한다.

 

고모가 여섯 살 때 잃어버린 레일라가 실은 친아버지의 소아성애로 인해 엄마의 주도로 캐나다로 격리되어간 것을 알게 된다. 레일라가 어렸을 때 기쿠에는 능력 없는 결혼이민 여성이었고 이언은 돈, 권력을 가졌기에 딸을 지키기 위해서는 위장된 영아 유괴라는 방법밖에 없었다고는 하는데 개운하지 않다.

 

놀라울 정도로 지극히 선한 의지를 가진 주변 인물들(대저택 일꾼들, 법률회사 사람들, 동네사람들, 사설탐정)이 등장하고 이국적인 풍광, 슬로우 푸드, 차고 넘치는 경제적 여유, 천진난만한 아이들도 삽화로 자주 나오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비극적인 추함을 덮는 데 역부족이다.

 

미국인인 기쿠에의 남편 이언은 총명하고 사업적으로 성공하고 인품도 훌륭해 보이나 실은 위험한 소아성애자이기에 기쿠에가 또다른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딸과 남편을 분리시키는 걸로 나온다.

 

그런데 위장 유괴까지 봐준다 쳐도 이후 27년간이나 이언과 결혼을 지속하며 몰래 딸에게 송금한다는 설정은 진정 이치에 닿지 않는다.

 

친아버지마저 딸에게 범죄를 저지르는데 친분 있는 부부가 레일라를 자신들의 자녀로 곱게 키워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지?

여섯 살이나 된 아이가 원 가정을 잊고 아무런 트라우마도 없이 양부모에게 온전히 기댈 수 있다고?

조카가 고모의 유지를 받들어 거액의 유산을 바르게만 써줄 수 있을까?

 

딸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정에 도피시켜둘 것이 아니라

정원의 꽃을 가꾸며 딸의 장래를 막연하게 염려할 게 아니라

박차고 나와 딸과 함께 '들풀'처럼 살아 갔어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기쿠에는 결혼 전에 영어를 잘 하는 꽤 유능한 커리어우먼이었다.)

 

소설은 정치적인 올바름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불가해한 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면 할말은 없다.

 

하지만 소설 곳곳에 미국 사회에 대한 품평과 편견이 드러나 불편했다. 소아성애라는 건 꼭 미국,서구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한없이 약하고 올곧은 일본인과 소수 인종들 vs 이윤에만 골몰하고 가학적 성향을 가진 미국인

(국제 결혼한 교코와 기쿠에의 첫남편은 각각 가정폭력범, 소아성애자) 

 

이런 구도를 보는 나도 역시 일본사회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것일까.

 

그래도 식물 무식자인 내가 소설을 통해 여러 꽃과 식물을 접했다는 데 만족하려 한다. 소설 속 분위기를 느껴보려 꽃 이름들을 검색하다가 '풀꽃'같이 소박하고 곱게 사는 분들의 삶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는 것도 소득이라면 하나의 소득이다.

 

소설 전체에 자주 등장하는 자카란다 거목

 

 

남미나 아프리카의 벚꽃이라고도 하는데 호주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자주 볼 수 있다고 한다.

 

(사진은 빌려왔다. 저장하면서 출처도 찾을 것을. )

 

그리고 '신비로움, 수수께끼'라는 뜻의 꽃말을 지닌 '거베라'도 자주 등장한다. 자주 화환이나 꽃다발에 보이는 다홍색 꽃인데 기쿠에가 딸을 생각하며 가꾸는 꽃으로 등장한다.

 

 

 

 

할머니는 말이야, 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꽃을 그렇게 보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야. 그런 생각이, 마음이란 우주가 아닐까 하는 식으로 변한 거지. 159쪽

 

아아아.

정말 신비로웠던 '우주'라는 단어는

지난 암울한 시기를 거치며 너무나 오염되어버렸고 실소를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곳곳에 공들여 구현한 문장을 보고도 이번에는 감탄하지 못했다.

 

풀꽃에게 딸의 생사를 빌 게 아니라 들풀같이 일어서야 했어, 이 생각만 가득.

 

 

미야모토 테루라는 작가는 그저 <금수>, <환상의 빛>으로 만족해야겠다. 엇나간 운명, 회한을 그리는 데 주특기가 있지만 이런 과도한 설정, 무리수는 서정적인 문체나 이국적 배경으로 아무리 치장해도 심오한 주제의식을 바로 담기에 역부족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김영하 작가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하고 싶다는 작품인 <검은 꽃>은 잘 읽고 왔다.

 

일제강점기에는 정말로 통탄할 일이 가득인데 신파에 빠지지 않고

건조한 시선으로 나라를 잃은 백성들의 신산한 삶을 추적한다.

 

출간 당시에도 읽으며 언젠가 영화화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하늘과 땅, 그 사이를 강산이라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강과 산이 없는 세상을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카탄엔 그 두 가지가 모두 없었다.'

도로 밖의 너무나 당연한 강과 산이 차창 밖으로 지나쳐 가는 것을 보며 그들이 느꼈을 막막함에 다시 마음이 아팠다.

 

 

 

 

 

 

 

 

 

 

 

 

 

 

 

 

본가에 갈 때 아무래도 책에 몰두하는 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때문이겠지.

 

본가 상태와 노쇠한 엄마의 일상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한없이 복잡해진다.

 

뭔가를 마시고 과일을 깎을 때마다 그때마다 컵과 접시를 새로 닦고

한숨을 쉬다가 왔다.

 

티내지 않으려 해도 엄마는 다 알았을 것이다.

딸들이 어떤 마음일지.

 

 

 

요 며칠 소설을 너무 많이 보았는데

<식물 산책>, <우울한 땐 뇌과학>을 읽어보고 싶다.

 

다른 과학, 사회과학, 종교 분야도 읽자.

 

 

온 우주의 기운을 모을 것 없이

하루하루 나의 기력과 정성을 모아

일상을 지켜가야겠다.

 

그리고 카랑코에 화분을 죽였던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식물에는 욕심내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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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박약 별주부의 요란한 맹세

 

-아이들 첫 영성체 과제 성경 필사 꾸준히 함께 하기

아이들 글씨보다 내 글씨가 아직은 더 많다.

 

-수업 준비 잘하기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

 

-집안 정리하고 정리하기

미니멀리즘은 아니더라도 애들 친구 아무 때라도 와서 놀라는 일 없게

 

-수면 주기 식욕 조절

불규칙한 수면으로 식욕이 늘고 몸무게는 ㅜ.ㅠ

 

-동네 산책

이 지역 독립 서점 탐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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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연휴.

 

매일매일 한참 뭔가를 하고 나서 시계를 보면 갓 정오를 넘겼을 뿐이었다.

 

어린이날에는 아시아문화전당 일대를 돌면서 아이들이 놀 뭔가를 찾다가 먹을 거 먹이고 전당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웠다.

 

6일에는 다행히 비가 와서 성당 다녀오고 아들은 친구네 가고 딸과 동네 도서관에서 가서 딸아이는 저대로 책을 읽고 난 <마담 보바리>를 읽기 시작했다. 원래는 다른 고전을 읽어볼 참이었는데 전담육아 2일차 권태로운 일상이 마담 보바리를 원했다.

 

<마담 보바리>는 확실히 어릴 때 읽은 작품인데 아, 이런 장면도 있었구나 싶게 많이 새롭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길러본 경험이 없을 때에는 이 한심한 녀자, 된장녀 하고 말았는데 이제는 마담 보바리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2018년에도 마담 보바리는 현존한다. 세간에 스캔들로 유명세를 탄 파워블로거들이나 여성지에 이니셜로 등장하는 그녀들. 모두 마담 보바리의 후예이다.

 

여권이 신장되었고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매일매일의 지난한 삶은 많은 여자아이들이 동경하는 열정이 가득하고 충만한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그리고 많은 소녀들이 책으로 접하는( 현재는 미디어에서 전파하는)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참으로 허울 좋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의 태동기부터 지금까지 자본을 축적하는 부르조아들의 탐욕도 여전히 강하다. 보바리즘이라는 용어가 있기 이전부터 인간이란 자기가 가진 것을 넘어서서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자본주의로 이행해가는 사회 전반과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보고 유일무이한 스타일로 작품을 공들여 썼기에 줄거리로 보자면 그저그런 통속적인 이야기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읽다가 몇해 전에 여성지에 실린 한 가련한 여인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무심한 남편과 지루한 결혼을 이어가던 중에 여자는 어린 남자(헬스트레이너인지 수영강사인지 가물가물)와 바람이 나서 집을 떠났다. 그런 허망한 도피의 끝은 결국 어린남자의 배신이었다.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여인은 죽도록 일을 해서 다행히 큰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고 속죄의 의도로 비뚤고 엉망으로 자란 자녀들을 거둔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는 실화라 해도 그리 신빙성이 가지 않는다.

(실화를 기반으로 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마담 보바리의 이야기 쪽이 훨씬 더 생생하다.

 

 

*

 

어릴 때는 아무런 내적 갈등 없이 보바리 부인이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기억했다. 그런데 엠마가 레옹을 처음 대했을 때는 많이 망설였고 흔들리는 자신을 붙잡아보려고 했다는 게 이제야 보인다.

 

샤를르는 정말 거의 자거나 일하거나 그중 하나였고 엠마 보바리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책을 읽거나 남아도는 시간에 공상을 거듭하며 보바리 부인은 현실감을 온전히 상실한다. 그 당시에는 보바리 부인 같은 경우 얼마든지 유모를 둘 수 있었으니 얼마나 시간이 남았겠는가. 

 

영혼 없는 바람둥이 로돌프를 만나서 보바리 부인이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로돌프는 전형적인 냉혹한 바람둥이, 공진회를 디데이로 잡고 엠마를 유혹해서 버릴 계획으로 만난다.

 

로돌프와의 혹독한 이별 후에 만난 레옹 역시 예전의 망설임, 순진을 간직한 청년이 아니었다 레옹은 결국 보바리 부인을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극심한 타락의 길로 인도한다.

 

이런 타락을 더욱 부추기는 건 돈밖에 몰랐던 교활한 뢰르. 해설을 읽어보니 '행복한 사람'에서 나온 작명이라고 한다. '행복'이라는 탈을 쓴 배금주의를 적절하게 나타냈다.

 

다시 읽어보니 풍경이며 주변의 자잘한 인물 모두 주제 구현을 위해 공들여 등장시킨 거네, 하는 생각이 들어 감탄 또 감탄하며 읽었다.  

 

특히 마지막에 장님 거지의 그로테스크함이 엠마의 비극을 더욱더 심화시켰고

비소 중독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장면이 이렇게나 길었나 싶어서 당황스러웠다.

 

역시 전에는 문자 해독만 하고 독해는 아니었다.

 

읽는 중에 딸아이가 물어봐서 대강 말해주니, 나쁜 엄마네, 하고 만다.

 

고등학생 정도 되어서 만약 읽기를 원하면 같이 읽고 이야기해보면 좋겠다.

 

 

<타인은 나를 모른다>도 연휴에 읽었다. 

 

소노 아야코 책을 중간중간 읽었는데 역시나 일본 에세이구나, 싶다.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를 아주 오래 전에 잘 읽고

최근에 <약간의 거리를 둔다>도 읽었는데 요즘 유행하는 책들의 논조가 다 그렇다.

 

자신만의 속도로 살고 남과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하고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시이모님 같은 이야기만 한다. 시어머님이 약간 나서서 하긴 뭐한 이야기를 태연한 표정으로 아랫사람에게 늘어놓는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마스다 미리나 사노 요코 등도 예전에 자주 보았는데

이제는 시들하다.

 

자신의 제한된 경험을 가지고 지나치게 초탈한 듯이 이야기하고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그냥 마음 수양 정도만 하면 된다, 서로 (자신만의 기준인) 예의를 차리면 된다는 식이다.

 

개인간의 에티켓에는 민감하면서 거대 악은 묵인하는 나라에서 책임지지 않고 에둘러 말하는 게 습관이 된 듯하여서 이제는 읽고 있으면 힘이 빠진다. 이런 책을 자주 보다보니 사람이 자꾸 나른해진다.

 

확실히 국적을 초월해 널리 읽히는 고전의 힘을 실감하다 보니 이제 소소한 에세이는 졸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오늘이 어버이날이기도 하고 해서 추천하는데

이 책들은 좋았다.

 

평생 엄마와 불화했으나 엄마가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면서 엄마에 대한 감정을 정리해가는

<나의 엄마 시즈코 상>은 몇 년 전에 참 잘 읽었다.

 

그리고 마스다 미리의 평범하고 다감한 부모님 이야기도 매우 잘 읽었다.

이렇게 자녀를 편하게 잘 대해주다보면

아마 비혼으로 남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이 좋은 부모님을 보고 좋은 가정을 꾸릴 사람들도 있지만

너무나 엉망인 부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경솔하게 결혼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록산 게이 책은 4월 말부터 계속 보고 있다. 록산 게이는 사랑했던 남자친구와 그들의 친구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이후 폭식을 거듭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다.

 

미리 알려주고 싶은 사실이 있는데 내 인생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별로 깔끔하지 않지만 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비포’가 있고 ‘애프터’가 있다. 몸무게가 늘기 전. 몸무게가 늘어난 후. 강간을 당하기 이전. 강간을 당한 이후.    5쪽

 

그나마 다행인 건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긴 했지만 록산 게이의 집이 가난하지는 않아서 교육을 받고 일어설 힘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록산 게이는 자주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폭식에 빠졌다. 남성들이 선호하지 않는 몸이 되면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현재 나는 ‘생존자’보다는 ‘피해자’를 선호한다. 일어난 일의 엄중함을 깎아내리고 싶지 않다. 희망의 여정을 걸어와 승리를 쟁취한 척 하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이 무사한 척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일이 일어난 채로 여기까지 걸어왔고 그 일을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거나 내게 흉터가 남지 않은 척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도 않다. 40쪽

 

이 부분이 마음에 든다. '생존자'라는 표현이 쓰이기는 하지만 '피해자'라는 표현이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전에 성폭행에 대한 독일의 공익광고를 본 적이 있다. 소녀인 피해 여성의 몸에 뱀이 휘감기고 처녀가 되어서도 중년이 되어서도 그 뱀은 계속 여성의 몸을 휘감는다. 성폭력은 관에 들어가 묻힐 때까지 떨칠 수 없는 기억이다.

 

(ebs에서 오래 전에 보고 찾아보니 있어서 첨부)

 

 

어떤 남성들이 유희라고 여긴 것들(실상 범죄)이 피해자의 일생을 따라다니는 크나큰 일생의 트라우마가 된다. 한 여성이 자신을, 자기 정체성을, 자신의 몸을 혐오하게 만든다. 살아가는 데 내어야 할 귀한 에너지를 다른 데에 낭비하도록 만든다.

 

 

 

 

 

 

 

 

 

 

 

 

 

 

 

 

 

5일에 문화전당에서  애들 책 사이로 꽂혀 있어 보았는데

전에 봤던 책들이다.

 

<엄마 냄새 참 좋다>에서는 미혼모 이야기가 눈물겹다.

<축하해>도 어린 나이에 쓰라린 경험이 많았던 소녀들의 이야기라 너무 마음 아팠다.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건 형식적인 성교육이 아니라

성적 주체성에 대한 교육이 먼저이어야 할 것 같다.

실제적인 기구 사용법에 앞서서 인성 교육. 진정한 인간적 교류에 대한 교육

 

 

*

가정의 달이라 온통 의무투성이라 답답한 가운데

이런저런 책들만 읽고

점점 본업을 놓고 있다.

 

변덕스러운 날씨라 긴팔 반팔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고

매일매일 해야 할 기본 가사만 해도 한가득인데 ㅜ.ㅠ

 

 

그래도 오늘 같은 날

어버이여서 잠시 흐뭇한 건

아이들의 카드

 

초등학교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살게요.

 

이런 드립은 어디서 배우는 건지.

그래도 참으로 갸륵하고 감사하다.

 

 

*

마담 보바리로 거창하게 시작해놓고는

참으로 소소한 마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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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결혼기념일이었다.

우연히 <오만과 편견>을 이틀에 걸쳐 읽었고 오늘 낮에는 급하게 무려 비티비로 결제까지 해서 영화를 봤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내 연애와 결혼을 돌아볼 의도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본 건 아니지만 결과론적으로는 결혼기념일 즈음, 그리고 중년에 이르러 읽으니 더 재미난 텍스트였다.

 

아...내가 그간 <오만과 편견>이라는 작품에 대해 오만했고 편견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학부 4학년에 영문과 수업에서 소개받고 제대로 읽지 않았는데 이제라도 읽어 다행이다.

 

이렇게  이 작품이 오랫동안 사랑받고 널리  읽히는 까닭은 '짝짓기와 그에 따른 재산과 지위 이동'은 현재에도 여전하다 못해 심화되고만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전을 읽을 때 늘 그렇듯 초반을 극복하고 중반에 이르다보니 아침드라마나 흔한 막장드라마 설정과 유사하나 대사들이 뭔가 더 찰지고 고풍스럽고 시원하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이어지는 걸 막으려고 캐서린 영부인이 엘리자베스를 방문하는 건 재벌사모님들이 돈봉투를 들고 가난한 처자를 찾아와 모욕하는 설정으로 여전히 이어져가고 있다.

 

하지만 캐릭터들이 더 생생하고 심리묘사가 치밀해 인물들 감정, 상황이 다 납득이 가고 인간의 나약한 본성에 대한 연민이 든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첫 청혼을 거절하며 속사포로 퍼부은 말들은 숱한 드라마에서 실장님, 사장님, 대표님에게 맞섰던 가난하지만 줏대 잇고 생기 있는 처자들의 대사와 맥을 같이한다.

 

요약하자면 네 감정은 알겠다만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임.

 

한때 온라인에서 유행하던 재벌남자와 결혼하는 법이라는 글과 맥을 같이한다.

 

일단 따귀부터 때리고 나서

나를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라는 말을 듣기만 하면 일사천리.

 

웃자고 하는 말이고 19세기 영국 사교계나 21세기 대한민국 사교계? 연애의 장도 다를 바 없다.

결혼을 통해 신분과 재산을 공고히 지키는 건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여전하다. 다만 제인 오스틴은 개별화된 인간, 한 인간의 매력적인 품성에 의해 근대적인 낡은 관습이 극복될 수 있으리라고 미약한 희망을 품은 듯도 하다.

 

그러면서도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모두의 속물적인 욕망을 비웃는다. 하지만 인간이니 다 그렇지 하고 가엾고 귀엽게 여기는듯도 하다.

 

"얘, 얘, 제발 좀 진지해 봐. 아주 진지하게 대화하고 싶어. 딴소리 말고 내가 알아야 할 걸 모두 얘기해 줘, 어서. 언제부터 그분을 사랑하게 된 거니?" 

"아주 서서히 일어난 일이라 나도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펨벌리에서 그분의 아름다운 영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가 아닌가 해."   512쪽

 

언니 제인이 다아시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냐고 묻자 엘리자베스가 한 말이 너무 웃겨서 한참 웃었다. 그밖에도 절묘한 상황과 대사가 많아서 포스트잇을 여기저기 붙여두었다.

 

"제 미모는 처음부터 인정 안 하셨고, 태도에 대해서라면, 당신에 대한 제 행동이야 가까스로 늘 무례를 면했다고나 할까요. 말을 건넸다 하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당신께 고통을 주려고 했지요. 이제 속내를 털어놓아 보세요. 제 건방진 점 때문에 제가 마음이 드셨나요?"

"당신의 마음이 생기 있었기 때문이지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나누는 대화에서 많은 로맨틱 코미디의 원형, 독립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인상이 다시 확인된다. 근대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생기가 있는 자만이 진정한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인과 엘리자베스의 외양 묘사에서 볼 수 있듯이

그냥 생기만 있는 오징어는 뭘 해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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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이어서 영화를 보고 나니 제인과 엘리자베스, 콜린스 , 리디아, 베넷 부인 등은 소설 속 이미지와 어느 정도는 부합하는데 빙리와 다아시는 사실 많이 부족하게 여겨졌다.

 

빙리는 작품 속에서 우유부단하다고는 하나 영화에선 너무 ㅂ ㅅ 같이 그렸고(프로포즈마저 친구에게 지도받는 것으로 나오고 표정도 멍하고 ㅜ.ㅠ) 차갑고 오만하지만 사려 깊은 소설속의 다아시는 영화에서는 너무 어둡고 느끼했다.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거의 남성 주인공은 맘에 안 드는 전철을 그대로 밟는 영화였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느낌이긴 하다. 포털을 보니 영화 속 다아시가 원작 주인공과 딱 이라는 의견도 간혹 있다.)

 

아무튼 그 방대한 원작을 온전히 살리기는 힘들 것이고 그냥 그 시대 분위기, 사극 분위기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특히 키이나 나이틀리 정말 사랑스럽다. 오동진 님이 소개한 프로그램에서 보았는데 키이나 나이틀리가 무려 일곱 살에 오디오북으로 오만과 편견을 접하고 난 후 내내 제인 오스틴 팬이라서 열과 성을 다해 엘리자베스 역을 연기했다고 하니 믿을 만하다.   

 

**

중년이 되어 주변의 이런저런 결혼을 보니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롯이 택한 결혼이나 리디아가 충동적으로 망나니와 맺어지는 상황 등이 현실에서도 가끔 있다. 그리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용이해졌다고는 하지만 결혼을 통해 사회적 지위가 공고해지고 재산이 변동을 보이는 것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제인이나 엘리자베스의 결혼과 같이 조건?과 사랑이 일치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현실에서 극히 드물다.

 

그래도 아주 없는 일이 아니기에 이렇게 소비되는 것이겠지.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자면 하지원이 엘리자베스 같은 역할을 많이 한듯하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는 너무 애절하고 슬펐고  <시크릿 가든>에서는 참 밝고 경쾌했다.

 

그리고 <시크릿 가든>으로까지 생각이 치닫자 드라마속 현빈을 사모한 조용한 데 계시는 어떤 분이 생각나면서 갑자기 불쾌해졌다.

 

그곳은 참 이런 고전 읽기 좋은 곳인데 아마 이 작품을 읽을 일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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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5-0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만과 편견‘을 영상화 한 것이라면 BBC 드라마를 추천드려요. 미스터 다아시역의 콜린 퍼스는 진리입니다.^^

뚜유 2018-05-05 08:23   좋아요 0 | URL
전에 EBS에서 방영한 것이 BBC 판인가요? 제대로 보지는 못 했지만 콜린 퍼스는 진정 미스터 다아시입니다 ^ ^ 그렇지만 엘리자베스는 키이나 나이틀리 쪽이 더 좋아요.
 

 

 

 

 

 

 

 

 

 

 

 

 

 

 

 

 

 

 

 

 

 

 

 

 

 

 

 

 

오늘 아시아문화전당에서 도서관 문화주간 행사로 김영하 님 강연이 있었다. 원래는 갈까 말까 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이들 어린이 미사와 어린이날 행사로 성당에서 아이들이 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가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작년부터 하고 있는 책모임에서 간다고 하는 벗들이 있어 같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에 살 때 작가님 초창기 겨자색 게시판에서 보던 사람들과 작가님을 가깝게 본 적도 있고 강연회도 다닌 적이 있지만 이제는 꿈결인듯 오래된 시절이다.

 

지금은 역시 작가는 작품으로 만나야 제맛이지, 하고 꽤나 쿨한 척 하고 있었는데 난 세련되거나 쿨하지 않고 질척거리는 면이 많아 그런지 역시 이렇게 우르르 몰려 보니 또 좋구나.

 

알쓸신잡의 여파인지 꽤 넓은 회의실에 사람들이 꽉 들어찼고 앞자리에 고 3 여고생들이 앉아 있을 정도였다.

 

어려서 온라인 모임 사람들과 만났던 작가를 그때는 전혀 살아볼 거라 짐작도 못한 낯선 도시에와서 나이들어 전혀 다른 성격의 온라임 모임 사람들과 강연을 듣게 되어 기분이 묘했다.  ( 문장 이거 뭔소리임 )

 

아무튼 오늘 강연회에서 작가님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작가님이야 물론 절대 나를 알아보거나 하시진 않았고 나도 민망한 닉네임으로 한두 번 소개한 적이 다라서 열심히 듣기만 했다.

 

처음엔 가볍게 어린 시절의 독서 경험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셨다.

아이들 수준에 맞지 않게 책을 권하고 독후활동을 강요받으며 아이들이 책과 멀어진다고 하셨고

책을 부모가 읽어주어도 아이의 성취엔 큰 영향이 없다는 것.

 

다만, 집에 장서가 많을수록 좋다는 것

집에 있으면 언젠가 책과 만나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

 

 

강연 내용은 보다, 말하다, 읽다 에세이집에서 많이 들어본 내용인데

시의적절하게 대한항공 일가, 미투, 통일, 김생민, 4차산업혁명까지 언급되는 신기한 강연이었다.

 

그냥 연결 안 되는 술자리 이야기인듯하면서도 나름 주제의식이 있는 강연이었다.

 

굳이 이름 붙히자면 고급? 독자의 즐거움과 괴로움 내지는 그러니 이제 고전을 읽자, 그 정도.

 

 

고전은 거의 대개는 하마르티아, 즉 인간의 성격에 잠재해 있는 중대한 약점을 건드리는데

그 중대 약점이 대개 휴브리스, 오만일 경우가 많다.


고전을 통해 이런 인간의 약점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실상

 

고전이라고 함은 아무도 제대로 읽지는 않았으나 읽은 듯한 책.

읽은 척을 하게 되는 책.

 

읽을 때마다 새로 읽는 듯하고

남에게 소개할 때 늘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어보니 말야, 하고 소개하는 책들이 고전이다.

 

마담 보바리, 돈 키호테, 오만과 편견, 외투, 오이디푸스 왕, 논어 등등 많은 고전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과 많이 다를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신간의 무익함. 아니 해로움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시간의 풍화를 견뎌낸 고전의 가치를 중년 이후에야 발견하게 된다는 것. 어느 정도 독서경험이 쌓이고 나서야 발견하게 된다는 점도 동의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고전을 잘 안 읽고 안 읽히게 되는 건

스마트폰 예능 탓일까.

 

아니 뭐 인간이 원래 책읽기보다는 먹고 놀고 뛰고 하는데 더 최적화되었다는 말씀에도 동의한다.  나의 본질도 결국 테순이이므로.

 

그리고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드라마나 영화, 가끔은 책에서 본 대로 진부하게 행동한다는 데에도 동의한다. 

 

마저마저 하는 사이 강연은 끝이 났고

 

끝으로 꼭 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는데 못하고 있는 사이 어떤 고위공무원 분이 썰렁한 아재 개그로 모두의 손과 발을 꽁꽁

 

작가님 이름 듣고 분위기가 썰렁할 줄 알았는데(김영하님이라서 영상 영하를 연상하시고는)  

이렇게나 사람이 많아 놀랍다고 ㅜ.ㅠ

이젠 초딩들도 안 할 이름 개그.

분위기 폭망.

 

질문을 하면서 강연이 정리되어야 하는데 뭔가 마무리가 되지 않고 끝나버린듯해서 아쉬웠다.

 

해서 모임 벗들과 아시아 문화전당 하늘마당에서 간단히 생맥주를 한 잔씩만 마시고

20대 처자들처럼 까르르 하며 사진도 찍었다.

 

 

참, 마음만은 늙지도 않지.

 

모임에 서울서 살다오신 분이 있어 하이퍼텍 나다 이야기 하다가

거기서 마지막으로 본 아무도 모른다, 에서처럼

아이들이 밤 9시 무렵까지 자기들끼리 있을 게 걱정이 되어 택시 타고 날아왔더니만

애들이 영화 속 아이들처럼 자신들만의 시간을 잘 보내고 있더라는 얘기.

 

원래 열혈육아기를 거치며 10시 이전에 잠드는 생활을 몇 년 지속해 왔는데

오늘은 잘 시기를 놓쳐 잠이 오지 않는다.

 

신기한 봄 밤이네그려. 

 

 

*사진은 고운 벗님이 찍어보내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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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금인 어제 아이들과 쥬만지를 다시 보았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책은 보지 못했지만 영화는 20대에 재미있게 보았고 이후로도 가끔씩 보았다.

 

 

아이들이 엄마, 스포는 절대 안 돼, 라고 했지만

사실 이런 장면도 있었나 싶게 많이 새로웠다.

 

무엇보다 전에 볼 때와 다르게 로빈 윌리엄스 아저씨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게 느껴져 울컥했다. 10대에서 20대에 로빈 윌리엄스 나오는 영화를 꽤 많이 보아서 그런지 기분이 참 이상했다. 

화면 속 로빈 윌리엄스는 아직 생생한데 이제 그는 이곳에 없다. 2014년에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리셔서 ㅜ.ㅠ 살아계셨다면 지금쯤 칠순을 바라보실 텐데. 

 

*

성당 주일학교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처음 본 걸 시작으로 대학에 가서 <굿모닝 베트남>,

<굿 윌 헌팅>, <미세스 다웃파이어>, <피셔킹>, <패치 아담스> 등 로빈 윌리엄스 영화를 보며 참 많이도 웃었다. 누구랑 언제 보았는지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싸이월드 도토리로 OST를 사들이던 허세 작렬하던 그때의 나도 많이 그립다.

 

그렇게나 영화를 즐겨 보았던 20대 생기발랄하던? 아가씨는 어느새  배나온 아줌마가 되어 구석진 컴퓨터방에서 캠핑 의자를 펴고 아이들과 이 영화를 보고 있다.  

 

아련하다, 그저.

 

 

혼자 너무 숙연해졌네.

  

요즘 아이들은 이 짤방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으려나.

 

또래에게 따돌림 당하고 권위적인 아버지와 불화하던 앨런은 쥬만지에 빠져들어 26년을 허비한다. 하지만 주디와 피터를 만나고 어릴적 친구인 사라를 소환해 쥬만지 게임을 무사히 마치고서야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게 된다.

 

 

아이들은 온갖 동물들이 나오고 소동이 벌어지는 데에서 엄청난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주방이 엉망이 되고 집은 부서지고 경찰차는 너덜너덜 걸레가 되어가는데 마냥 웃고만 있다.

 

특히 아이들이 박장대소한 부분은 미친 사냥꾼과 대형 마켓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싸우는 부분이었다.

 

피터가 반칙을 해서 퇴화해 원숭이가 되니 좋다고 난리.

부르마블하면서 오빠의 주사위 조작(주사위를 손으로 잘 감싸쥐고 살짝 고대로 놓는 수법)에 많이 당했던 딸아이가

오빠도 저렇게 되었어야 하는데. ㅋㅋㅋㅋ

 

마지막에 홍수가 나서 악어가 나오고 미친사냥꾼이 앨런에게 총을 겨눌 때도 조마조마해하더니 이제 쥬만지 하면 끝이네, 하면서 좋아했다.

 

*

딸아이가 겁이 많아 다 볼 수 있으려나 했는데 나중에 게임이 끝나면 엄마아빠도 다시 살아나고 잘될 거 같다고 끝까지 본다고 고쳐 앉았었는데 잘 봐주어 기뻤다.

 

영화 끝나고 나서 내 말이 맞지 하며 의기양양.

 

아들은 얼마나 집중해보고 웃었던지 나중에 얼굴이 벌개져서 구니스 이후로 넘나 잘 봤다고.

 

어째 엄마 탓에 점점 애들 취향이 아재 취향으로

구니스, 인디아나존스, 백투더퓨처, 나홀로 집에... 이런 거 다 보고

이제 터미네이터 이런 것도 보려나.  

*

아들과 딸 모두 피터에 감정이입해서 쥬만지 판을 지키려고 응원하는 모습이 어쩐지 뭉클했다.

 

아이들 둘 다 뭐가 나올지 무서우니 그만 해, 하고 하지 않고

빨리빨리 던져, 빨리빨리.

 

그래,두려워 말고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일단 가보는 거지.

 

어찌 되었든 아이들이 환상이 가득한 세계로 들어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대면해 위험을 헤쳐가다 결국엔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고 더 강해지는 이런 해피엔딩이 이제 너무나 좋다.

 

그리고 눈물이 한참 많아지는 40대

여기 말로 여로워서 화면을 닫고 미뤄둔 설거지를 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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