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을 제외한 다른 책은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자라도 만나본 사람보다 만나지 못한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독서가의 경우도 그러하다. 우리 삶의 의미는 어쩌면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있는지도 모른다.


2. 결국에는 체력이다. 연애도 독서도 몸이 하는 일이다. 우리는 몸뚱이를 갖고 태어나 그 몸뚱이를 벗어날 수 없는 가여운 동물이다.


3.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때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고, 그때 그 책을 다시 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전에 좋았던 사람이 또 좋은 경우는 없어도, 전에 별로였던 책이 좋은 경우는 많다. 그 이유를 연구해볼 만하다.


4. 하는 것들만 한다. 물론 '하는 것들'에 들지 않는 것들도 한다. 그러나 평균에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 않는 삶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삶은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을 것이다. 이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씁쓸하게도 얼마간의 돈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제 도입 검토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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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뽀해 주는 사람한테 옮은 거 아냐?" 작년 11월이었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사서 집에 가는 길에 마침 전화를 건 친구가 입술 주위와 접촉성 피부염이라는 말을 듣고 나를 놀렸다. 누군가와 '접촉'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서 나는 좀 억울했다. 뽀뽀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한테 옮은 거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6개월 만에 피부과에 다시 방문했다. 예약을 하지 않아서 오래 기다려야 한단다. 그럴 줄 알고 책을 한 권 들고 갔다. 교수처럼 문학 읽기. 옆에 대기 환자도 많은데 하필이면 '문학에서의 섹스'라는 장을 읽을 차례다. 다행히 내 책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 계단이 성교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남들 다 아는 비밀을 뒤늦게 알게 되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6개월 전처럼 이번에도 좀 억울했다. 그러고 보니 20대 중반까지 나는 계단에서 많이 헤맸다. 꿈 얘기다. 배경은 대개 학교나 친척 집이었다. 계단이 중간에 끊어져 오도가도 못 하거나, 문을 열면 끝도 보이지 않는 좁은 계단이 나타나 어리둥절하거나, 익숙한 계단을 기껏 올랐더니 전혀 엉뚱한 곳에 도착하거나.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많이 꾸었던 '꿈의 해석'이 그렇다는 말이지, 제기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프로이트 이론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건 너무 정확하지 않은가? 젠장.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악몽에서 깬 듯 놀라서 창구로 갔더니 안에서 앉아 기다리란다. 그래 기다린다. 어디 도망 안 간다. 뛰어봤자 프로이트 선생의 손바닥이겠지. 의사를 만나는 데 한 시간 가량 걸렸다. 입술 주위는 많이 좋아졌는데, 이번에는 양쪽 볼이 말썽이다. 전에 처방받은 연고를 발라도 별 효과가 없다. 의사는 쓱 보더니 뭐라고 병명을 말한다.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책이나 컴퓨터만 들여다보지 말고,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야 낫는데요. 의사는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고 알려주는 것처럼 말한다. 그 말이 자꾸 걸려서 진단명을 제대로 듣지도 못 했다. 잠을 푹 자라는 말도, 스트레스가 좋지 않다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라니, 뭔가 들킨 기분이었다. 약국으로 향하면서 연애하라는 처방을 의사가 완곡하게 말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그나저나 언젠가부터 계단에서 헤매는 꿈을 왜 꾸지 않는지 모르겠다. 집에 와서 처방받은 연고의 설명서를 훑어보니 이번에는 지루성 피부염인 것 같았다. 접촉 다음에 지루. 어째 얘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얼굴에 연고를 바르고 나는 의사를 비웃으며 다시 책을 펼쳤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책이 나를 비웃는다. 다음 장의 제목은 '섹스만 빼고···' 이런 제기랄. 왠지 더 이상 읽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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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과 나란히 적힌 낯선 이름

네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시간과 장소

나의 삶을 열어젖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준 너의

청첩, 상자처럼 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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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카페 에필로그, 시간의 웅덩이

옛사랑이 그립다는 것인지

그리워하는 자신이 가엾다는 것인지

흐느끼는 BGM은 사이렌

유혹당한 것은 그리운 마음인지 갈급한 육체인지

모르는 자들이 모여 고개를 처박고 마시는 한 모금의 차

가정법의 푸념은 엔딩 크레딧

뒤늦은 각성은 클리셰

순간

추억의 목덜미를 귀신같이 포착하여 찢어발기는

악어의 치악력이 지배하는 여기는

주인공을 참칭한 맥거핀들의 카페,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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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가더라도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는 없겠지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중고로서 들어가는 나이를

지금은 내가 헤아릴 수는 있어도

사랑은 또 처음의 양장으로

돌아오지는 않겠지


헌책방에 오는 사람들은

볼장 다 본 사랑을 들고 오는데

손에 들린 사랑은 옛 연인의 손길에

은밀한 페이지까지 다 펼쳐보였을 터인데

어쩌면 나도 만지고 싶은 것일까

손가락을 베이면서라도 아파하며

또 누군가를 읽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애증의 지난 시간을 넘기고

새로운 헌 사랑을 구해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그림자는 힐끔

뒤돌아보다 이내 끌려가는데

그것은 나의 두 빈손에

서늘한 활자를 인쇄하는데

나는 갑자기 눈이 밝아져서

손으로 눈을 비비고


헌책방에 가더라도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서는 안 되겠지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낡고 변색된 양장이 다시

일독을 권한다 해도

그때 나는 내 손때를 모른 체하며

돌아온 사랑을 툭 던져놓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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